대신들이 양전과 역참의 폐단, 고리대 폐단, 의정부의 위상, 문무관이 서로 만나는 절차 등을 아뢰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양전(量田)에 연조(年條)를 둔 것은 그 경계를 정확히 하자는 것인데, 숙종(肅宗) 경자년(1720) 이후로는 지금까지 개량(改量)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나라의 재정이 날로 줄어들고, 아래로는 아전의 농간이 날로 늘어나 그 사이에서 백성들만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법도가 해이하여 수습할 도리가 없으나 토지의 경계라도 바로잡아놓으면 아마 만 분의 일이나마 구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기 자기 고장의 형편에 따라 해야지 모든 도(道)에서 동시에 거행할 필요는 없으므로 올해에 몇 고을 하고, 내년에 몇 고을 하는 식으로 해서 2, 3년을 한정해서 끝내면 됩니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전결(田結)에 따라 약간씩 분배하는 것이 양전(量田)의 옛 규례입니다.
이런 뜻으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고, 올 겨울부터 수령(守令)의 전최(殿最)를 첫째로 양전(量田)을 부지런히 했는가 태만했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평가하여 올리거나 내쫓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신(道臣)들이나 유수(留守)에 대해서는 묘당(廟堂)에서 무슨 소문이 들려오는 것에 따라 경계도 하고 신칙도 하여 아무튼 실효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 역참(驛站)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지정된 몫의 토지를 주고 좋은 말도 주어 맡은 직무를 원만히 수행해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로 내려오면서 역참의 폐단이 점점 불어나서 혹은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 수영(水營)의 비장(裨將)과 책방(冊房)들이 느린 말을 강제로 떠맡기고 몇 곱절의 값을 받아가며, 혹은 부가(富家)와 호호(豪戶)에서 기름진 토지를 위협하여 빼앗아 결국 영영 잃어버린 땅이 되어 거의 토지도 없고 말도 없는 지경이 되니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각 해당 도신(道臣)이 엄명(嚴明)하게 샅샅이 조사하여 폐단의 근원을 근절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대로 숨겨두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역참의 관리가 있을 때에는 그를 찬배(竄配)하고, 해당 도신도 엄하게 논하고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막 역참의 폐단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역참의 관리를 한 번 보내주고 맞이하는 데에도 역참이 받는 폐단이 더없이 심합니다. 기강이 없는지라 마필을 책립(責立)하고, 인부를 고용하는 삯을 매 호(戶)에 내게 하고, 매 촌(村)에 따라 거두어들이므로 계속 거덜이 나게 됩니다. 그 전에는 찰방(察訪)을 임기가 차기 전에는 교체하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한 달도 채 못 되어 후임 차출을 계청(啓請)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 뒤로는 임기가 차기 전에는 옮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방의 감영(監營)과 고을 창고들에서 고리대를 하는 폐단은 이루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전라도 감영〔完營〕에 있는 균역고(均役庫)와 진휼고(賑恤庫) 두 창고만 보더라도 기록에 남은 항목의 돈이 담당한 아전(衙前)들의 농간에 의하여 공적인 재산이 사적인 이익으로 경영되니 감영 백성들의 화근으로 되어온 지 오랩니다. 사세(事勢)의 용이 여부를 논하지 말고, 그 두 창고의 고리대 문제를 완전히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해당 도신(道臣)이 직접 장부를 가지고 허위 유전(留錢)을 샅샅이 조사하여 모두 거둬들이게 한 뒤에 그 돈으로 도(道) 안의 각 고을에서 곡식을 사다가 그 곡식으로 본전을 세워 이자를 취해 쓰게 하면 감영에 창고를 설치한 것과 다름이 없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미치던 큰 폐단도 제거될 것이 명백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도성 안에서 좀도적들의 피해가 최근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는데 그 원인을 캐어보면 잡기(雜技)로 인한 폐해가 열에 일곱 여덟입니다. 이런 것을 엄격히 금지하지 않았다가는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의 두 관청과 두 포청(捕廳)에 명령을 내려 각별히 염탐하여 잡아다가 법대로 감단(勘斷)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리들이 흔히 법 맡은 관청의 서리(胥吏)나 하인들과 결탁하여 감히 관섭(關涉)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궁가(宮家)와 경재(卿宰)를 막론하고 혹시라도 숨겨두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이 명령을 위반한 행위가 보고된 자가 궁감(宮監)이면 엄하게 과치(科治)하고 경재(卿宰) 집안의 가장이면 초기(草記)하여 감처(勘處)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면서 의정부(議政府)가 한가한 관청이 된 것은 그 이름과 실지를 헤아려볼 때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항상 개탄해오던 바입니다. 전번에 대왕대비의 하교를 받은 후에 물러가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것을 변통할 방법을 헤아려 의논하였습니다. 비변사를 창설한 것도 이미 300년이나 되었으니, 아직은 계품(啓稟)하거나 천망(薦望)하는 등의 일을 두 관청에 적당히 나누어 담당시켜 마치 송(宋) 나라 때에 중서성(中書省)과 추밀원(樞密院)에서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해당 장리(掌吏)의 이차(移差) 및 제반 조건(條件)에 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계하(啓下)하고 준행(遵行)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로써 정식(定式)을 삼으라."
하였다.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이 서로 만나는 절차에 대해서 저번에 추후 등대(登對) 때 품처(稟處)하라는 대왕대비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문관과 무관의 체통(體統)이 엄격히 다른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문관으로서 종1품 이하로부터 정경(正卿)이 무재(武宰)를 만났을 때 약간 서로 존경의 뜻을 표시함에도 불구하고 무재가 스스로 처신하는 것은 종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시임 포장(時任捕將)은 정경(正卿)이 앉은 곳에 구애 없이 드나들도록 허락한다면 전날의 서로 다른 처지를 그대로 두면서도 조정의 너그러운 기풍도 보이겠기에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역에 소재한 각궁(各宮)의 무토 수세지(無土收稅地)에 이른바 도취(都聚)라고 하면서 수납(收納)하는 것을 근래에 혁파했으나, 해도(該道)에서는 한 곳에 뒤섞어 받아서 잉여분을 취하는 폐단이 여전하다고 합니다. 법령이 잘 실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한 가지를 미루어서도 알 수 있으니 다시 공문을 보내 신칙한 후에도 만일 이전과 마찬가지로 법에 어긴 사실이 보고 될 때에는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은 견파(譴罷)할 것이며, 농간을 부린 감영과 고을의 이서(吏胥)들을 적발하여 엄히 형신(刑訊)하고 원배(遠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서(注書)의 기록이 곧 역사의 바탕이 되니 위아래 사이의 담화(談話)라든지 경연(經筵)에서 해석한 것에 혹 착오가 있으면 이와 관련한 문제가 심히 큽니다. 〖전하의 정사가〗 시작된 초기여서 사무가 번거롭고 많으며, 혹은 하나, 혹은 둘을 함께 소접(召接)하여 불러 만나보는 일이 있기 때문에 기록해야 할 분량도 대단히 방대한 것입니다. 사진(仕進)한 원래의 주서들 이외에도 가주서(假注書)를 잘 선발해 놓을 것이며, 현탈(懸頉)에 대해 일절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기(日記)를 정서해 놓은 다음 승지(承旨)가 검열해서 삭제하거나 고치거나 하는 것도 승정원(承政院)의 규례이니 이런 내용으로 엄격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5책 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36면
- 【분류】교통-육운(陸運) / 왕실-경연(經筵) / 농업-양전(量田)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중인(中人) / 금융-식리(殖利) / 사법-치안(治安)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역사-편사(編史)
次對。 領議政金左根曰: "量田之有年條, 卽王政所以正經界也。 肅廟庚子以後, 汔不改量。 上而國計日蹙, 下而吏奸日滋, 處其中而民受其害。 見今百度俱弛, 收拾不得, 經界一正, 庶幾救萬一之效。 且各隨事力, 不必諸道同時竝擧。 今年行幾邑、明年行幾邑, 要之以數三年爲限, 而冗費所出就田結中略略分排, 亦量田古規也。 以此意行會八道、四都, 自今冬爲始, 守令殿最, 先以量事勤慢題評, 而黜陟之道臣及居留, 自廟堂隨所入聞, 以爲警飭, 期有實效何如?" 允之。 又曰: "朝家所以置郵者, 以其有傳命也。 是以賜位土立善馬, 使之相資, 而近來驛弊滋甚, 或營梱幕冊, 勒授駑駘責出幾倍之價, 或富家豪戶, 脅奪膏腴, 遂成永失之土。 幾至無土無馬之境, 寧不駭然? 令各該道臣嚴明査櫛, 期絶弊源, 而如或因循隱匿, 不遵令飭, 則該郵官施以竄配, 道臣從重論警何如?" 允之。 又曰: "纔以驛弊仰奏矣, 郵官若一迎送, 則爲站受弊, 無有紀極。 馬匹責立, 人夫雇貰, 徵戶斂村, 蕩殘相繼, 而在前則郵丞瓜朔前, 未有移遷者, 近來則未滿朔而多有啓請差代之例。 此後瓜限前, 勿使遷動何如?" 允之。 又曰: "外道營邑庫債之弊, 有難枚擧, 而完營均役、賑恤兩庫記留錢之爲該掌輩翻弄, 以公貨而營私利, 爲營下民厲階久矣。 毋論事勢便否之如何, 兩庫放債一款, 革罷後乃已。 令道臣親執文簿, 査櫛其虛留, 一倂收刷後, 作穀於道內各邑, 以爲立本取耗之地, 則此與營下設庫無異, 而除民大害則明矣。 請以此嚴飭。" 允之。 又曰: "都下竊發之患, 挽近尤甚, 而究其所以, 則雜技之害, 十居七八。 此不嚴禁, 弊有所難言者, 分付刑、漢兩司及兩捕廳, 使之各別詗捕, 照法勘斷, 而此輩多有依託法隷, 不敢關涉。 自今以後, 毋論宮家卿宰, 毋或匿置, 有不悛而入聞者, 宮監從重科治, 家長草記拿處何如?" 允之。 又曰: "籌司之設而政府之爲閒司, 揆以名實, 有識之恒所慨歎, 而向伏承慈敎以後, 退與諸僚, 商確其變通之方而籌司創置, 亦三百年于玆矣。 姑以啓稟及薦望等事, 量宜分屬於兩府, 如宋之中書樞密, 竝與擧行。 該掌吏移差及諸般條件, 成節目啓下, 遵行恐好。" 敎曰: "以此定式也。" 左根曰: "文武相見事, 向承日後登對時稟處之簾敎矣。 文武體統之截嚴, 其來已久, 而第文宰從一品以下正卿之於武宰, 酬酌之際, 稍示相敬之意, 而武宰所以自處則與前無異。 時任捕將, 則許令無礙出入於正卿所坐之處, 則體統固自在, 而朝廷忠厚之風, 亦寓於其中。 故敢達矣。" 允之。 左議政趙斗淳曰: "三南所在各宮無土收稅之自來都聚收納者, 近雖革罷, 而該道混徵取剩之弊, 顧自如云。 法令之不行, 於此一事, 可以類推。 更爲關飭之後, 如或有如前淆濫之入聞者, 道臣及守令, 爲先譴罷, 作奸之營邑、吏胥, 摘發嚴刑遠配何如?" 允之。 又曰: "堂后記注, 卽史體也。 上下酬酢, 講筵解釋, 苟或錯誤則所關甚大。 一初之會, 事務繁多, 雙隻召接, 述錄浩穰, 實官仕進外假官極擇, 凡懸頉者, 一切勿許。 日記正書後, 承旨之考閱刪潤, 亦院式也, 以此嚴飭何如。" 允之。
- 【원본】 5책 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36면
- 【분류】교통-육운(陸運) / 왕실-경연(經筵) / 농업-양전(量田)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중인(中人) / 금융-식리(殖利) / 사법-치안(治安)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