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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2월 20일 임진 6번째기사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선전관 정운귀가 최제우와 동학에 대해 보고하다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올린 서계(書啓)에,

"신이 11월 12일에 공손히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豐)·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청 군관(左邊捕盜廳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을 거느리고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등지에서 동학(東學)의 괴수를 자세히 탐문하여 잡아 올릴 목적으로 바삐 성밖으로 나가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그것을 전파시킨 자를 염탐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최 선생(崔先生)이 혼자서 깨달은 것이며 그의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 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 입으로 지껄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경주에 도착하는 날부터 장시(場市)와 사찰(寺刹) 사이에 출몰하면서 나무꾼과 장사치들과 왕래하니, 혹은 묻지도 않는 말을 먼저 꺼내기도 하고 혹은 대답도 하기 전에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최 선생이라고 부르는 자는 아명(兒名)이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이 제우(濟愚)로서, 집은 본주(本州)의 견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에 있었는데 5, 6년 전에 울산(蔚山)으로 이사 가서는 무명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본토(本土)로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혹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에서 책 한 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라고 한답니다. 사람들은 본래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홀로 ‘선도(善道)’라고 한답니다. 대체로 그 도(道)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몸과 입을 깨끗이 하고서야 열세 글자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를 전수해 주고, 또 그 다음에 여덟 글자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를 전수해 준다고 합니다. 그것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면하고 병이 제거되며 신명을 접하게 된다는 등의 말로 속이고 홀리면서 권유하는 바람에 그 말에 빠져들어 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글자를 모르는 아녀자와 아이들도 미쳐 현혹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약을 먹는 법이 있는데 한 번 그 약을 먹으면 이 학설에 전심하여 다시 깨달으려는 생각이 없으며 혹 약을 먹는 중에 금기하는 일을 조심하지 않다가는 크게 광증(狂症)이 나서 남의 눈을 빼먹고 그 자신도 스스로 죽고 만다고 합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돼지를 잡고 과일을 사서 궁벽한 산 속으로 들어가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는데, 지금 이 괴수 최가의 집에서 금년만 해도 여러 차례 모여서 강설(講說)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처음 배울 때에도 예물이란 명목으로 전부 선생에게 바치고, 전도를 받아 깨닫게 되면 재산을 털어 선생한테 주되 조금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도를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최가가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고 나서 손에 나무칼을 쥔 채로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나고 끝에는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한 길 남짓 뛰어올랐다가 한참 만에야 내려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최가가 잡혀 진영(鎭營)에 갇히게 되자 제자 수백 명이 와서 호소하기를, ‘저희들의 공부가 본래 백성을 해치고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니, 저희 선생님을 속히 풀어주소서.’라고 하였답니다. 진영에서 즉시로 놓아주니, 몰려다니면서 의심할 만한 자취를 보이지 않았고 또한 비상(非常)한 일을 꾸민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근을 막론하고 공부하러 오는 자는 날마다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이 전해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는 황당한 내용이 있어 그대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달 9일에는 따로 양유풍 등을 곧바로 최복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내어서 자세히 염탐해 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최복술에게 가서 만나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청하니, 최복술은 조금도 비밀로 하거나 숨기는 것이 없이 흔쾌히 허락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공부하겠다고 청하되, 「배우는 글을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마음속으로 외워서 읽으면 어떻겠느냐?」하니, 최복술이 말하기를, 「만약 단지 마음속으로 읽고 소리 내어 읽지 않는다면 배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꺼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없다.」고 하자, 최복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배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 공부가 이루면 오직 하늘 이외에 다른 것은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벽에도 써 붙여 놓은 글이 많았는데 자획이 범서(梵書)와 같아서 그 글의 뜻이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필시 그 자가 공부하는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이에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하니, 끝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튿날 또 오겠다고 약속하면서 비록 하루 이틀 사이라도 익힐 수 있는 글을 얻었으면 매우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최복술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최자원(崔子元)이나 이내겸(李乃兼)에게 가서 물으면 저절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최자원이내겸은 바로 경주 남문(南門) 밖에 사는 자들로서 최복술의 수제자(首弟子)라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따로 사람을 보내어 만나보고 문답한 조목(條目)을 앞서 전해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비록 목격하지 못한 한두 가지 일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은밀히 서로 부합하여 정녕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최복술이 동학의 괴수라는 철안(鐵案)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신은 그날 밤에 비밀리에 본진(本鎭)의 장교(將校)와 나졸(羅卒) 30명을 동원하여 양유풍 등으로 하여금 한밤중에 그 소굴을 곧바로 들이쳐 최복술을 결박하여 끌어내고 또 제자들 23인도 결박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본부(本府)에 신분을 밝히고 먼저 최복술의 용모 파기(把記)를 봉초(捧招)한 뒤에 형구(刑具)를 채워 단단히 가두고, 제자 등도 본부의 옥에 엄하게 가두어 놓고서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최자원이내겸 두 놈에 대해서는 본부에 비밀 관문(關文)을 띄워 잡아가두게 했으나, 최자원은 먼저 눈치채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본부에 엄히 신칙하여 기어이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이내겸은 얼마 안 되어 체포되었기 때문에 또한 용모파기를 봉초한 다음 형구를 채워 단단히 가두었다가 최복술과 함께 일체 압송해 올려 보내겠습니다. 압수한 문서와 편지 등은 하나하나 단단히 봉하고 성첩(成貼)하여 이은식(李殷植)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문서 중에 《논학(論學)》이란 한 책에는 최복술이 동학의 거괴(巨魁)가 되는 근거가 그 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은 이제 올라가서 복명(復命)할 생각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 【원본】 5책 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24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상-동학(東學)

宣傳官鄭雲龜書啓:

臣於十一月十二日, 敬奉傳敎, 率武藝別監梁有豐·張漢翼、左邊捕盜廳軍官李殷植等, 以慶尙道 慶州等地東學魁首, 詳探捉上次, 忙出城外。 藏蹤祕跡, 星夜馳往。 自鳥嶺慶州, 爲四百餘里, 州郡凡十數。 東學之說, 幾乎無日不入聞, 而店婦、山童, 無不誦傳其文。 名之曰‘爲天主’, 又曰‘侍天主’, 恬不爲愧, 亦不得掩, 蓋其漸梁熾盛, 於斯可知。 廉訪其傳師, 則皆曰‘崔先生獨得妙悟, 而家在慶州’, 萬口喧騰, 一辭湊合。 故臣行到慶州之日, 出沒於場市、寺刹之間, 來往于樵牧、商賈之際, 則或不待問而先說, 或未及答而詳傳。 渠輩所稱崔先生, 兒名福述, 冠名濟愚, 家在於本州見谷面 龍潭里, 而五六年前, 移寓蔚山地, 賣買白木而資生矣。 近年還居本土後, 或向人說道曰: ‘吾致誠祭天而歸, 自空中墜下一卷書, 俾爲受學也。’ 人固不知其何樣文字, 而渠獨曰善道。 大抵其道始學之時, 必先精潔身口, 乃授十三字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 次授八字 【至氣今至願爲大降】 , 而願學之人則必以免禍、去病、接神等說, 誑惑慫慂, 其說易入故, 雖目不識字之婦孺, 猖狂迷亂, 晝夜不輟。 且有服藥之法, 一服其藥, 專心此學, 更無開悟之念。 或服藥而不謹拘忌, 大發狂疾, 拔人之眼而啖, 渠亦自斃云云。 每月朔望, 殺猪買果, 入去淨僻山中, 設壇祭天, 誦文降神, 而今此魁首崔漢家, 今年則屢次聚會講說。 而凡初學時, 禮物名色, 皆獻于先生, 及其傳通而有悟, 則傾給財産于先生, 小無悔吝。 衆會講道之席, 崔漢誦文降神, 手執木劍, 始跪而起, 終至舞劍騰空一丈餘, 良久乃下, 至有目睹者云。 昨年, 崔漢捉囚於鎭營, 而弟子數百名來訴, 以謂‘渠輩之學, 本非害民敗俗, 則願爲速放渠師’, 自鎭營卽爲白放, 而旣未見屯聚可疑之跡, 亦未聞綢繆非常之事。 然毋論遠近, 來學者, 日增云。 上項傳聞諸條中事, 涉荒誕者有之, 有難準信。 故今月初九日, 別遣梁有豐等, 直往福述所居處, 使之詳探以來矣。 回告以爲: "往見福述, 懇乞願學, 則福述少無祕諱, 欣然許諾。 而又有一人請學, 曰‘所學文字, 勿以口讀, 心內暗讀, 未知如何’云, 則福述曰‘若只以心讀, 不以口讀, 則不如勿學’, 其人曰‘不無忌諱, 故不能口讀’, 福述曰‘然則勿學可矣。 凡吾學旣成, 則惟天以外, 他無可畏’云。 壁上亦多書付者, 而字畫如梵書者, 其文意殊不知指其何事, 而似必渠學之說矣。 乃求其筆跡, 則終不許給。 故更約以明日又來, 而‘雖一兩日間, 若得可習文字, 甚好’爲言。 則福述曰‘此須往問于崔子元李乃兼, 自可學得’云。 ‘子元乃兼, 卽居于慶州南門外者, 而福述之首弟子’云。" 以今此別遣人所見、所問答之條目, 比之於上項所傳聞之云云, 雖不無一二件未及目擊之事, 大槪暗相符合, 丁寧無疑者亦多。 福述之爲東學魁首, 鐵案已定, 故臣於當夜, 祕發本鎭校卒三十名, 使梁有豐等, 夜半直搗巢穴, 縳出福述, 又縳弟子二十三人。 臣則卽時露蹤于本府, 先捧福述之容貌疤記後, 具格牢囚, 弟子等亦令嚴囚府獄, 恭俟處分。 而所謂崔子元李乃兼兩漢, 祕關本府, 使之捉囚。 而崔子元先機逃躱, 故嚴飭本府, 使之期於捉得, 而李乃兼未幾就捕, 故亦捧容貌疤記, 具格牢囚, 竝與福述一體押上。 其搜探文書、書札等, 一一堅封成貼, 捧授于李殷植處。 而其文書中《論學》一冊, 福述之爲東學巨魁根基, 備載其中矣。 臣則自此復命計料事。

敎曰: "令廟堂稟處。"


  • 【원본】 5책 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24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상-동학(東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