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
임금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변(昪)이고, 자(字)는 도승(道升)이니,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방지손(旁支孫)입니다. 영종(英宗)께서 두 번 전(傳)하여 정종(正宗)에 이르렀고, 정종께서 순조(純祖)·익종(翼宗)·헌종(憲宗)에게 전하였는데, 헌종이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임금께서 순조비(純祖妃)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명을 받들어 들어와서 헌종의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습니다. 순조는 윤서(倫序)에 의하면 고(考)가 되고 헌종은 통서(統序)에 의하면 예(禰)가 됩니다. 모비(母妃)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곧 우리 순원 왕후(純元王后)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입니다. 옛날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아우를 두었는데 은언군(恩彦君)이라고 했습니다. 은언군의 아들이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인데, 임금은 전계 대원군의 제 3 자(第三子)입니다. 본생모(本生母)인 염씨(廉氏)는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인데, 순조 신묘년160) 6월 17일 정유에 경행방(慶幸坊)의 사제(私第)에서 〈임금을〉 탄생하였습니다. 이때 순원 왕후의 꿈에 영안 국구(永安國舅)161) 가 한 어린아이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 하였는데, 왕후께서는 꿈에서 깨고 나서 그 일을 기록하여 두었었던 바, 그 후 임금이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이를 살펴보니 의표(儀表)가 꿈속에서 본 아이와 똑같았습니다.
임금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는데 4세 때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을 읽었으며, 한 대목을 들으면 나머지 열 대목을 깨달아 알았고 필획(筆畵)도 완전하고 보기에도 좋아서 도움받아 예습하지 않고도 자연히 체식(體式)을 성취했습니다. 14세 때 집안에 어려운 일을 당하여 전가족(全家族)이 교동(喬桐)으로 이사(移徙)하였고, 즉시 또 강화(江華)로 이사했는데, 큰 바다를 건널 적에 바람을 만나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일어났는데도 임금은 태연히 두려워함이 없이 집 사람들을 위무(慰撫)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배가 언덕에 도달하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배에 하늘이 돕는 사람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기유년162) 6월 임신(壬申)에 헌종 대왕(憲宗大王)이 훙서(薨逝)하시니, 순원 왕후(純元王后)께서 하교하기를, ‘영종(英宗)의 혈맥(血脈)은 헌종과 임금뿐이니 종사(宗社)를 부탁할 것으로 정하였다.’ 하고, 드디어 대신(大臣)을 보내어 봉영(奉迎)하여 오게 했습니다. 이해 봄·여름에는 밤중마다 광기(光氣)가 잠저(潛邸)의 남산(南山)에서 보였으며, 여위(輿衛)가 갑진(甲津)을 건널 적에는 오색 무지개가 큰 강에 다리처럼 가로질러 있었으며, 양화진(楊花津)에 이르렀을 적에는 양떼가 와서 꿇어앉아 맞이하여 문후(問候)하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하였다가 그달 9일에 이내 관례(冠禮)를 행하고 거상(居喪)하였으며 빈전(殯殿)에서 대보(大寶)를 받고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습니다. 중궁전(中宮殿)을 높여 대비(大妃)로 삼고, 대행 대왕(大行大王)에게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경문 위무 명인 철효(經文緯武明仁哲孝)라고 하고, 묘호(廟號)를 헌종(憲宗)이라고 하였습니다. 10월 28일에 경릉(景陵)에 대장(大葬)했는데 효현 왕후(孝顯王后)와 같은 언덕이었습니다. 이때 대왕 대비께서 국전(國典)에 따라 수렴(垂簾)하고 함께 청정(聽政)했는데, 임금께서 공손하고 과묵한 자세를 지니고서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대왕 대비에게 품하여 재결(裁決)하였습니다. 임금은 예전에 배운 것이 현저한 것이 없음을 우려하여 공제(公除)163) 하고 나서는 즉시 《소학(小學)》을 강하였으며, 일강관(日講官)을 두고서 이르기를, ‘공부란 입지(立志)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술년164) 봄에 인릉(仁陵)에 거둥하여 이르기를, ‘양음(諒陰)165) 하는 것이 상례(常禮)에 어긋나지마는, 금년은 곧 우리 순종(純宗)께서 탄강(誕降)하신 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였고, 탄강하신 월일(月日)에 이르러서는 또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으며, 경조(京兆)166) 에 명하여 문(文)·음(蔭)·무(武) 가운데 61세가 된 사람을 초계(抄啓)하여 가자(加資)하게 하고, 사서인(士庶人)에게는 쌀과 베를 하사하게 하였다.
신해년167) 원조(元朝)에는 대왕 대비께서 국모(國母)로 임어(臨御)한 지가 50년이 되었기 때문에, 직접 표리(表裏)를 올리고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하례(賀禮)를 진달하였으며 공미(貢米)와 시요(市徭)와 반속(泮贖)을 견감시켰고 제도(諸道)의 오래 된 환곡(還穀)을 차등 있게 감면시켰습니다. 선원전(璿源殿)을 증축하여 헌종 대왕의 수정(睟幀)을 봉안(奉安)하였으며, 예관(禮官)이 진종(眞宗)을 조묘(祧廟)하는 것의 당부(當否)에 대한 의논을 진헌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아직 친속(親屬)이 다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질천(迭遷)할 것을 의논하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 미안스럽다. 그러나 제왕가(帝王家)는 통서(統序)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 고금의 통의(通誼)이다. 헌종 대왕께서 15년 동안 군림(君臨)하여 왔고, 정종(正宗)·순종(純宗)·익종(翼宗)이 적자(嫡子)와 적자로 서로 전하여 온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는데, 이제 이소(二昭)·이목(二穆) 이외의 위차(位次)에 봉부(奉祔)한다면 천리와 인정에 있어 어떠하겠는가? 진묘(眞廟)를 조천(祧遷)하는 것은 본디 예법에 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영녕전(永寧殿)으로 천봉(遷奉)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예문(禮文)을 고증하여 의논함에 있어 분명히 하고 신중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은언군(恩彦君)의 신유년168) 의 무안(誣案)이 중국에 계류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신(使臣)을 보내어 진주(陳奏)하여 변정(辯正)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익평군(益平君) 이희(李曦)에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고 풍계군(豊溪君)의 사판(祠版)을 은전군(恩全君)에게 입계(入繼)하여 후사(後嗣)로 두게 하였습니다. 양서(兩西)169) 에 수해(水害)가 발생하였을 적에는 위유사(慰諭使)를 나누어 보내어 구휼하고 집을 짓게 하였으며 경사(京師)의 돈을 내려 보내어 그 비용을 돕게 했습니다. 8월에 헌종 대왕을 효현 왕후의 태실(太室)에 합사(合祠)하였고 길체(吉禘)를 행하였으며 대왕 대비의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정렬(正烈)이라고 하였고 왕대비의 존호는 선경(宣敬)이라고 하였고 효현 왕후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경혜 정순(敬惠靖順)이라 하고 대비(大妃)에게 존호를 올려 명헌(明憲)이라 하였으며 하례(賀禮)를 받고 반사(頒赦)하였습니다. 9월에 안동 김씨(安東金氏)를 왕비(王妃)로 책봉했는데,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 충순공(忠純公)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입니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이하 4대의 사판(祠版)에 제사지내게 하고서 이르기를, ‘주량(舟梁)170) 의 예(禮)가 이루어졌으니, 더욱 그 충정(忠貞)하여 경사를 쌓은 데의 보답임을 증험할 수 있다.’ 하고, 대원군(大院君)의 사우(祠宇)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묘(文廟)에 나아가 알성례(謁聖禮)를 거행하였습니다.
임자년171) 에 대왕 대비께서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거두었으므로 임금이 비로소 친히 기무(機務)를 재결하였으며 대왕 대비의 존호를 더 올려 선휘(宣徽)라고 하였습니다. 함흥(咸興)에 화재가 발생하여 거의 1천 가호가 연소(延燒)되자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기를 관서(關西) 때처럼 하였습니다. 10월에 천둥하는 재변(災變)이 발생하자 찬선(饌膳)을 감하고 음악을 거두고서 교서(敎書)를 내려 자신을 책망하였으며 군하(群下)에게 자신의 궐실(闕失)을 극언(極言)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런 뒤부터 재침(災祲)을 당하면 그때마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11월에 하교하기를, ‘나 소자(小子)가 사복(嗣服)172) 한 지가 이제 3년이 되었는데도 현양(顯揚)하는 전례(典禮)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정례(情禮)에 있어 서운하기 그지없다. 금옥(金玉)에 새기고 수용(睟容)을 그려 봉안(奉安)하는 것은 우리 왕가(王家)에서 이미 행하여 온 예법이다.’ 하고, 드디어 다음해인 계축년173) 춘향제(春享祭) 때 태묘(太廟)에 나아가 순종 대왕(純宗大王)의 책보(冊寶)를 추상(追上)하기를 계천 배극 융원 돈휴(繼天配極隆元敦休)라고 하고, 대왕 대비의 존호를 더 올리기를 영덕(英德)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서(關西)에 흉년이 들자 선혜청(宣惠廳)의 돈 5만 냥과 사역원(司譯院)의 삼포세(蔘包稅) 6만 냥을 대여(貸與)하여 구제해 살렸습니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손(祀孫)을 동반(東班)의 음직(蔭職)에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여름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정전(正殿)을 피하고서 하교하기를, ‘돌아보건대 나는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대단한 가뭄은 어찌하여 발생한 것인가? 민생(民生)이 곤궁하여 지쳐 있는데도 이를 잘 구제(救濟)하지 못하였고 법령(法令)의 시행이 옹알(壅遏)되었는데도 이를 잘 진작(振作)시키지 못하였으며 재곡(財穀)이 다 없어졌는데도 잘 절약하지 못하였고 탐욕많은 관리가 횡행하는데도 이를 잘 징치(懲治)하지 못하였으니, 첫째도 과매(寡昧)한 나의 죄요, 둘째도 과매한 나의 죄이다.’ 하였습니다. 대신(大臣)들이 면려하는 차자(箚子)를 진달하고 이어 관직에서 물러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재생(災眚)이 발생한 것은 나의 부덕함에 연유된 것이다. 경(卿) 등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大臣)들이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탐묵(貪墨)을 징치(懲治)할 것을 계속 권면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재곡(財穀)이 없어졌는데도 절약하지 못했다는 것은 진실로 그러한 것이지만 탐묵스런 관리들이 횡행하여도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팔도(八道)의 전최(殿最)174) 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잘 다스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도백(道伯)이 잘 모르고서 이렇게 한 것인가?’ 하였습니다. 유현(儒賢) 송내희(宋來熙)·김병준(金炳駿)·송달수(宋達洙)·조병덕(趙炳悳)을 불렀고, 뒤에 또 임헌회(任憲晦)·이민덕(李敏德)을 불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습니다. 겨울에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성헌 영철 예성 연경(聖憲英哲睿誠淵敬)이라고 하고, 왕대비의 존호를 더 올려 정인(正仁)이라고 하였으며, 헌종 대왕(憲宗大王)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체건 계극 중정 광대(體健繼極中正光大)라고 하고, 효현 왕후(孝顯王后)의 존호를 단성(端聖)이라고 하며 대비(大妃)의 존호를 더 올려 숙경(淑敬)이라고 하였습니다. 영남(嶺南)에 흉년이 들자 백금(白金)·단목(丹木)·백반(白礬)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니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갑인년175) 지사(知事) 서준보(徐俊輔)의 문과(文科) 회방(回榜)176) 때에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묘사(廟祠)에 제사지내게 했는데, 이는 동방(東方)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전수받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이어 문충공(文忠公)의 사손(嗣孫)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수령들의 탐오(貪汚)를 계칙(戒飭)하면서 이르기를, ‘탐묵(貪墨)의 해독은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의 해독보다 더하다. 나의 적자(赤子)177) 들의 살점을 깎아먹고 나의 적자(赤子)들을 떠돌게 하여 가련한 나의 죄없는 백성들이 구렁창에 죽어 나뒹구는데도 구휼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방본(邦本)을 공고하게 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 가운데 장오(贓汚)로 보고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배가(倍加)하는 형벌을 시행하겠다.’ 하였습니다. 5월에는 대왕 대비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기로과(耆老科)를 설행(設行)하였는데,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자질(子姪)들이 기로(耆老)들을 부축하고 과장(科場)으로 들어올 것을 허락하였으며 드디어 방방(放榜)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로 당상(耆老堂上)의 아내에게도 모두 의백(衣帛)을 하사하였습니다.
을묘년178) 정월에는 경모궁(景慕宮)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고,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찬원 헌성 계상 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라고 하고, 혜빈(惠嬪)의 휘호는 유정(裕靖)이라고 했는데 이는 장헌 세자께서 탄강하신 지 두 번째 되는 회갑(回甲)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의 묘소(墓所)를 살펴보게 하였고, 제도(諸道)의 사직단(社稷壇)을 수축(修築)하게 하였습니다. 임금은 일찍이 인릉(仁陵)·수릉(綏陵)·휘경원(徽慶園)의 택조(宅兆)가 풍수(風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비로소 기전(畿甸) 지역의 원근(遠近) 지방을 두루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해에서부터 또 몸소 서쪽으로는 희릉(禧陵)까지와 동북쪽으로는 광릉(光陵)까지를 간심(看審)하면서 산등성이와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8월에 수릉(綏陵)을 건원릉(健元陵)의 국내(局內)로 천장(遷葬)하였고, 10월에는 휘경원(徽慶園)을 순강원(順康園)의 오른쪽 산등성이로 천장(遷葬)하였습니다. 정종(正宗)께서 춘궁(春宮)으로 계실 때 주자(朱子)와 송자(宋子)179) 의 글 가운데에서 출처(出處)·시의(時義)·문학(問學)에 관한 것으로서 일규(一揆)가 되는 것을 초출(抄出)하여 분류(分類)해 모아 편집하고는 이를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이라고 이름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간행(刊行)하면서 도신(道臣)에게 판각(板刻)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선거(選擧)에 엄중히 하였는데, 병진년180) 별시(別試)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옛날의 좌주(座主)들은 인재를 발탁하여 국가의 수용(需用)이 되게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단지 관절(關節)과 분경(奔競)만 알 뿐이다. 그리고 거실(巨室)의 자제(子弟)들은 한 글자의 글도 읽지 않았는데도 부형(父兄)들이 그 두각(頭角)을 딱하게 여겨 극력 주선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인재를 수습(收拾)하는 방법이겠는가? 이번의 계칙이 있은 뒤에도 사정(私情)을 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과장률(科場律)로써 다스리겠다.’ 하니, 유사(有司)들이 놀라 두려워하였습니다. 3월에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과 완양부 대부인(完陽府大夫人)의 묘소를 포천(抱川)으로 천봉(遷奉)하였는데, 춘조(春曹)181) 에 명하여 관곽(棺槨)의 재목을 갖추게 하고 장생전(長生殿)182) 에서 택송(擇送)하게 하였습니다. 여주(驪州)에 황재가 발생하여 1천여 가호(家戶)가 연소(延燒)되자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구제하여 주었으며, 내탕(內帑)의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하사하였습니다. 함흥(咸興)에 또 화재가 발생하자 여주(驪州)의 경우와 같이 내탕전(內帑錢)을 하사하였는데, 금년에 진공(進貢)한 용전(茸錢) 3천 냥을 더 제급(題給)하여 주었습니다. 7월에 영남(嶺南)에 큰 물이 지자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하교하기를, ‘휼전(恤典)에 쓰인 공곡(公穀)을 비록 회감(會減)183)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만으로는 나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내탕(內帑)의 백금(白金) 2천 냥과 단목(丹木) 2천 근과 호초(胡椒) 2백 근을 반하(頒下)하라.’ 하였습니다. 해서(海西)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자 또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게 하고 내탕전을 영남(嶺南)의 경우와 똑같이 반급(頒給)하였습니다. 10월에는 인릉(仁陵)을 헌릉(獻陵)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천봉(遷奉)했는데, 능을 파낸 처음부터 임금께서 재계(齎戒)하는 마음으로 조심하는 것을 초상(初喪) 때처럼 하였으며, 영여(靈轝)가 이르자 행전(行殿)에서 영곡(迎哭)하였습니다. 이어 신릉(新陵)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친히 향(香)과 제문(祭文)을 찬진(撰進)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애절하고 정성스러워서 봉독(奉讀)한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복토(復土)를 하고 나서는 기전(畿甸)의 백성들이 역사(役事)한 노고를 생각하여 절식(折式)을 준용(準用)해서 양세(兩稅)를 견감시켜 주었습니다.
정사년184) 에 자성(慈聖)의 보령(寶齡)이 69세에 오르고 왕대비의 보령도 50세에 올랐다는 이유로써 원조(元朝)에 몸소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렸으며, 3월에는 통명전(通明殿)에서 찬선(饌膳)을 진상하고서 하교하기를, ‘복을 거두어 널리 베풂에 있어서는 의당 서민(庶民)들에게 먼저 해야 할 것이다.’ 하고, 경조(京兆)185) 의 오부(五部) 가운데에서 기유생인 사서인(士庶人)에게 쌀과 솜을 반급(頒給)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때 능원(陵園)의 묘목(墓木)을 베어낸 일이 발생했는데 엄중한 교지(敎旨)를 내려 영릉(英陵)·온릉(溫陵)·소녕원(昭寧園)의 관원을 처벌하여 파직시켰으며, 매년 봉심(奉審)할 때 전례에 따라 장문(狀聞)하는 것을 도신(道臣)의 직무로 삼게 하였습니다. 국가의 부세(賦稅)가 해마다 감축된다는 이유로써 각궁(各宮), 각 영문(營門), 각사(各司)의 서리(胥吏)·장교(將校)·하례(下隷) 가운데 원액(元額)에서 더 낸 경우는 궐원(闕員)이 있더라도 보임하지 말도록 법식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8월에 순원 대비(純元大妃)께서 훙서(薨逝)하시자 임금은 다섯 달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슬퍼하고 사모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것이 지성(至誠)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 평일에 절검(節儉)하던 것을 본받아 의대(衣襨)는 단지 대내(大內)에서 비치된 것만을 쓰고 삼도감(三都監)의 물력(物力) 가운데 외도(外道)에 복정(卜定)된 것과 팔로(八路)의 제수전(祭需錢)을 모두 견면(蠲免)시켰습니다. 지돈녕(知敦寧) 이학수(李鶴秀)가 상소(上疏)하여 순종 대왕(純宗大王)의 묘호(廟號)는 마땅히 조(祖)로 일컬어야 한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순고(純考)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에 대해 경(卿)의 말이 오늘날에 나왔으니, 미처 하지 못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 하고, 드디어 종(宗)을 고쳐 조(祖)로 하였으며,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의행 소륜 희화 준열(懿行昭倫熙化峻烈)이라 하고 신위(神位)를 다시 고쳐 썼습니다. 그리고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자헌(慈獻)이라 하고 휘호(徽號)를 올려 예성 홍정(睿成弘定)이라 하고 시호(諡號)를 순원(純元)이라고 하였습니다. 왕대비(王大妃)를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진호(進號)하였고 대비(大妃)를 왕대비(王大妃)로 진호하였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보호한다는 윤음(綸音)을 팔도(八道)에 내렸습니다. 그리고 묘당(廟堂)에 하유하여 인산(因山)할 때 결소(結所)에서 소용될 물품에 대해 계칙(戒飭)하게 하고 특별히 돈 6천 냥을 하사하여 역민(役民)에게 제급(題給)하게 하였으며, 발인(發靷)할 때에는 임금이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대여(大輿)를 따르려고 하였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창 추위가 혹심하였으므로 대신(大臣)들이 백관(百官)들을 인솔하고서 조정에서 아뢰기를 하루에 두 번 세 번씩 올렸으나 임금은 계속 애통해 하는 하교를 내리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신(大臣)들이 청대(請對)하여 극력 만류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동조(東朝)께서 길러주신 은혜를 받은 것이 모두 몇 년이었던가?’ 하고, 이내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이르기를,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정리(情理)에 있어 당연히 행해야 될 일을 어찌 자신을 돌보기 위해 신행(伸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나갔습니다. 인봉(因封)할 때에 이르러 대신(大臣)들이 또 눈물을 흘리면서 애타게 간하니, 임금이 마지못하여 이르기를, ‘대여를 따라가는 것은 비록 행할 수 없을지라도 하현궁(下玄宮)하는 날에는 마땅히 나아가서 보겠다.’ 하고, 다음날 드디어 능(陵)에 나아가 광중(壙中)에 가서 보았습니다. 이 거둥은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드물게 있는 예(禮)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였습니다. 8월에서부터 염장(鹽醬)을 드시지 않았고 궤전(饋奠)에는 반드시 직접 곡(哭)을 하였는데, 반드시 애통(哀痛)하였습니다. 대신(大臣)이 등대(登對)하여 부취(俯就)186) 하도록 면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의 아들로서 부모에 대해 누군들 효도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효도를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곡읍(哭泣)만 슬프게 할 뿐이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에서 발로되어 저절로 이렇게 되는 것인데, 만일 곡읍(哭泣)하는 것을 효도라고 한다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못했습니다.
무오년187) 원조(元朝)에 대왕 대비의 보령(寶齡)이 51세가 되었으므로 표리(表裏)를 진상하고 진하(陳賀)하였으며 순조의 묘호(廟號)를 더 높였다는 이유로써 임신년188) 해서(海西)의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평정한〉 여러 신하들의 공을 논하여 증직(贈職)을 더하고 제사를 내리며 품계를 올리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것을 차등 있게 하여 공을 기록하는 의리를 나타냈습니다. 이해가 순원 성모(純元聖母)의 보령(寶齡)이 70세가 되는 해이었으므로, 순조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대중 지정 홍훈 철모(大中至正洪勳哲謨)라고 하고 순원 왕후의 존호를 현륜(顯倫)이라고 하였으며 순조 대왕의 어진(御眞)을 받들어 영희전(永禧殿)에 경건히 걸어 두었습니다. 판부사(判府事) 이헌구(李憲球)가 회근(回巹)189) 이 되었으므로 소견(召見)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며, 충정공(忠正公) 김성행(金省行)과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사판(祠版)을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명하였습니다. 본생(本生)의 백형(伯兄)에게 봉작(封爵)하여 회평군(懷平君)으로 삼고 효민(孝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아울러 상계군(常溪君)과 함께 정1품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습니다.
기미년190) 에는 구경(九卿)과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재행(才行)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성심으로 널리 구하면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하였고, 또 각도(各道)의 방백(方伯)들에게 신칙하여 듣는 대로 초천(抄薦)하게 함으로써 뜻을 품고 헛되이 늙는다는 탄식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영돈녕(領敦寧) 김문근(金汶根)이 상소하여 헌종 대왕(憲宗大王)을 세실(世室)로 올리도록 정할 것을 청하니 빈청(賓廳)에 명하여 회의(會議)하게 하였으며, 드디어 세헌(世獻)하게 하였습니다. 순원 왕후(純元王后)를 태묘(太廟)에 부사(祔祀)하게 하고, 대왕 대비의 존호를 더 올려 자혜(慈惠)라 하고, 왕대비의 존호를 예인(睿仁)이라 하였습니다. 윤달에는 관동(關東) 지방에서 양양(襄陽)·통천(通川)·간성(杆城)에 산불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장문(狀聞)했는데, 강릉(江陵)·고성(高城)·정선(旌善)의 화재도 모두 같은 날에 있었으며, 관북(關北) 지방에서는 안변(安邊)·덕원(德源)의 가호가 연소(延燒)된 것도 같은 날에 있었습니다. 양도(兩道)191) 의 여덟 고을에 화재를 당한 인가(人家)가 2천여 가호였는데, 초목(草木)·창고(倉庫)·사찰(寺刹)도 모두 불타버렸으므로 임금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면서 이르기를, ‘존휼(存恤)하는 방도를 전례를 따르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하고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유(慰諭)한 다음 은자(銀子)·단목(丹木)·백반(白礬)을 반사(頒賜)하였으며, 가옥·창고·사찰을 도와 모두 중건하게 하였습니다. 관동(關東)의 재읍(災邑)에 대해서는 당년에 상납할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군포(軍布)를 견감시켰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박순(朴淳)의 주사(主祀)를 정립(定立)하고 이어 부조(不祔)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6월에 큰비가 내렸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오부(五部)의 인가(人家)가 퇴압(頹壓)된 곳을 살펴 휼전(恤典)을 베풀었으며, 도하(都下)에 여역(癘疫)의 여기(沴氣)가 있어 사망하는 사람이 매우 많아지자 특별히 여제(癘祭)를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임금이 병을 앓다가 다음날 낫게 되자 대신(大臣)들이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여 칭경(穪慶)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가 너무 많이 온 재앙(災殃)이 이미 오순(五旬)을 경과하고 있는데, 이런 때 경축하는 행사를 벌리는 것은 실로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뜻이 아닌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으며, 이어 윤음(綸音)을 내려 중외(中外)에 경유(警諭)하였습니다. 관북(關北)에 또 수재(水災)가 발생하자 북평사(北評事)를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삼고 내탕(內帑)의 은자(銀子)·단목(丹木)·백반(白礬)을 하사하여 휼전(恤典)에 더 보태어 쓰기를 명하였습니다.
신유년192) 에 순조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건시 태형 창운 홍기(乾始泰亨昌運弘基)라고 하고, 순원 왕후의 존호를 홍화(洪化)라고 하였으니, 이는 순고(純考)193) 께서 등극(登極)한 원년(元年)의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고, 성모(聖母)께서 주량(舟梁)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와 고(故) 충신(忠臣) 김제겸(金濟謙)의 사판(祠版)을 조천(祧遷)하지 말게 명하였습니다. 관북(關北) 지방에서 단천부(端川府)의 민호(民戶)가 표몰(漂沒)되었고 길주(吉州)·명천(明川)에 수재(水災)가 났다고 장문(狀聞)하였으므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내탕(內帑)의 은자(銀子)·단목(丹木)·백반(白礬)을 반사(頒賜)하였으며, 윤음(綸音)을 내려 구제하고 구휼하는 데 관계된 것은 충분히 상의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습니다.
임술년194) 에는 순조 대왕의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고명 박후 강건 수정(高明博厚剛健粹精)이라 하고, 순원 왕후의 존호는 신운(神運)이라 했는데, 성모(聖母)께서 주량(舟梁)한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의 문과(文科) 회방(回榜)이 이해이었으므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며, 편전(便殿)에서 소견(召見)한 다음 직접 사전(謝箋)을 받고는 찬선(饌膳)을 선사(宣賜)하고 시(詩)를 내려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삼남(三南) 지방의 읍민(邑民)들이 소요(騷擾)를 일으켜 왕왕 관원을 협박하고 아전을 해쳤는데, 함흥(咸興)의 백성들은 관찰사(觀察使)의 정당(政堂)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습성이 진실로 밉기도 하지만 방백(方伯)이 된 사람이 나의 애휼(愛恤)하는 마음을 본받지 못한 탓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영남(嶺南)에 안핵사(按覈使)와 선무사(宣撫使)를 나누어 보냈으며, 호남(湖南) 난민(亂民)의 수창자(首倡者)를 주참(誅斬)하였고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을 처벌하였습니다. 적정(糴政)·군정(軍政)·전정(田政)이 문란한 것이 모두 백성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으로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였으며, 난간에 나가서 친히 삼정(三政)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에 대해 책문(策問)하였습니다. 정공(正供) 이외에 더 정한 명색(名色)은 폐지하라고 명하고,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5만 냥을 하사하여 이정(釐整)하면서 절생(節省)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으며, 절목(節目)이 완성되자 의논이 모두 귀일되지 않았으므로 구관(舊貫)195) 에다 조금 증산(增刪)을 가하여 행하였습니다. 가을에 인릉(仁陵)에 전배(展拜)하고 이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거둥하여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서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이르기를, ‘병자년196) ·정축년197) 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인심은 편안한 데에 익숙하면 직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습성을 이루게 된다. 효종(孝宗)께서 성취하지 못하신 뜻을 우러러 생각하면 강개(慷慨)한 마음이 격앙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계축년198) 임금께서 휘경원(徽慶園)을 천봉(薦奉)한 뒤 형가(形家)199) 의 의논이 끝내 갑론 을박(甲論乙駁)이 있었으므로 몸소 택조(宅兆)를 간심(看審)하였고, 5월에 광릉(光陵)의 국내(局內)에 있는 달마동(達摩洞)으로 천봉하였는데 원(園)을 모두 두 번 천봉하였습니다. 따라서 임금의 효성이 이에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사(知事) 윤치수(尹致秀)가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북경(北京)에서 나온 서책에 정원경(鄭元慶)이 저술한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에 본국(本國)의 종계(宗系)와 개국(開國) 때의 일을 기록했는데, 매우 무오(誣汚)스럽기만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열람하고는 크게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겨 드디어 사신(使臣)을 보내어 진변(陳辨)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사신이 출발할 적에 서쪽 성문(城門)에 나가서 전송하였습니다. 사신이 돌아와서 소설(昭雪)시키게 되었음을 아뢰자, 드디어 종묘(宗廟)에 고하고 반사(頒赦)하였는데, 군신(群臣)들이 임금의 공덕(功德)으로써 선조(宣祖)신묘년200) 에 나라를 빛나게 했던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지금 나의 치법(治法)은 절대로 고석(古昔)의 성세(盛世)에 견줄 만한 것이 없는데, 더구나 종계 변무(宗系辨誣)는 내가 우리 왕가(王家)의 일을 행한 것이다. 무슨 공덕이라고 일컬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빈청(賓廳)에서 누차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마침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모두 10여 차례 계청하니, 임금이 마지못해서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책보(冊寶)를 받고 존호(尊號)를 희륜 정극 수덕 순성(熙倫正極粹德純聖)이라 하고 왕비(王妃)의 존호는 명순(明純)이라 하였습니다. 지사(知事) 김병국(金炳國)이 잇따라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고사(故事)를 원용하여 자휘(慈徽)를 천명(闡明)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마침내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를 올려 홍덕(弘德)이라 하였고, 왕대비(王大妃)의 존호는 정목(正穆)이라 하였습니다. 임금이 직접 전문(箋文)을 올리고 나서 책보(冊寶)가 완성되었으나 미처 올리기도 전에 선어(仙馭)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갔으니, 아! 원통합니다.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이 졸(卒)하자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시면서 이르기를, ‘근신 검약(謹愼儉約)’ 네 글자는 나의 자훈(慈訓)을 받들어 주야로 복응(服膺)한 것이니, 나 소자(小子)가 융숭하게 의지하고 우대하며 국사를 위임한 것은 그의 처지(處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하였으며, 임금께서는 우근(憂勤)한 끝에 피로가 쌓이어 수년 이래 자주 체후가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무오년201) 에 곤전(坤殿)202) 께서 원자(元子)를 탄생하였으나 첫 돌도 못되어 졸서(卒逝)하였으며, 후궁(後宮) 가운데 출산(出産)이 있었으나 또한 일찍 요절(夭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런 일을 사리에 의거해 달래면서 비록 얼굴과 말씀에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영위(榮衛)203) 는 점차 손상이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도 능원(陵園)의 전성(展省), 묘궁(廟宮)의 전향(傳香), 법전(法殿)의 조하(朝賀)를 오히려 조금도 해이함이 없이 힘써 행하였는데, 12월 7일 병세가 매우 위독하여졌고 다음날 경진일(庚辰日)에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예척(禮陟)204) 하였습니다. 춘추(春秋)는 33세이고, 재위(在位)는 14년이었습니다. 경(卿)·사대부(士大夫)들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대덕(大德)으로써 이 지경에 그치고 만단 말입니까?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장수를 한다고 했는데 하늘을 기필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늘을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하였고, 도하(都下)의 사녀(士女)들이 달려와서 시일(時日)을 보전하지 못할 듯이 통곡하며 들끓었습니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봉영(奉迎)하여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한 다음 상사(喪事)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대소(大小) 신하들과 함께 임금의 공덕(功德)을 의논하여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문현무성헌인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철종(哲宗)이라 하였습니다. 다음해 갑자년205) 4월 7일에 예릉(睿陵)에 장사지냈으니, 곧 희릉(禧陵)의 오른쪽 산등성이의 자좌(子坐)의 언덕인데 임금이 을묘년206) 에 몸소 간심(看審)할 적에 성의(聖意)에 점쳐 둔 곳이었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어린 따님 하나가 있는데 궁인(宮人) 범씨(范氏)가 낳은 것입니다. 임금은 기우(氣宇)가 엄정(嚴正)하고 우뚝한 콧대에 용의 눈동자를 하고 있으므로 둘러볼 때에는 영채(英彩)가 번뜩여 위엄을 차리지 않아도 근엄하였고 살피지 않아도 환히 알았습니다. 그의 인효(仁孝)에 대해서는 타고난 천성(天性)이 그러하였습니다. 어릴 적에 완양(完陽)·용성(龍城) 두 부대부인(府大夫人)을 섬김에 있어 전혀 차이가 없었으며,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의 상사(喪事) 때에 빈실(殯室)에 들어가 영결(永訣)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으며, 11세 때 대원군(大院君)의 상사(喪事)를 당했을 적에는 곡용(哭踊)과 애척(哀戚)이 다 함께 지극하였습니다. 등극(登極)한 뒤 순원 성모(純元聖母)를 모실 적에는 거처를 반드시 같은 궁전(宮殿)에서 하였고, 음식은 반드시 같은 주방(廚房)에서 하게 하였으며, 경연(經筵)이나 시사(視事)가 있는 이외에는 잠시도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음은 물론, 〈순원 성모께서〉 체후(體候)가 미령할 적에는 부축하고 주무르고 긁어주는 것을 말하기 전에 뜻을 받들었는가 하면 주야로 의대(衣襨)를 풀지 않았는데, 9년을 하루처럼 하였습니다.
정사년207) 이후 찬선(饌膳)을 대하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성모(聖母)께서 밥을 드시면 나도 밥을 먹었었는데, 이제 어찌 차마 혼자서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들이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대원군(大院君)의 온 가문(家門)을 전석(全釋)시킨 것이 임오년208) 에 있었는데, 이는 순고(純考)의 특은(特恩)이었습니다. 임금이 효성을 극진히 하려는 생각을 번번이 제사(祭祀)와 전배(展拜)에 나타내었으며, 아름다운 공렬을 천양(闡揚)하는 일을 한 번만이 아니라 누차 거행하여 거의 거르는 해가 없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에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묘궁(廟宮)의 사향(祠饗)은 반드시 몸소 거행하였으며 희생(犧牲)을 살펴보고 깨끗한가를 점검하였으며 의용(儀容)은 공손하게 하였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탄강(誕降), 승하(昇遐), 등극(登極), 주량(舟梁)이 있었던 해를 당하면 혹은 직접 능침(陵寢)에 나아가기도 하고, 혹은 대신(大臣)을 대신 보내기도 하며 반드시 행사에 대비하였습니다. 헌종(憲宗)의 빈전(殯殿)을 받듦에 있어서는 원내(苑內)의 과일이 익으면 천신(薦新)하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선왕(先王)께서 상완(賞翫)하시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두 분 자전(慈殿)을 섬김에 있어 정성껏 공경함이 돈독하고도 경건하였으므로 궁위(宮闈) 안에 상서로운 화기가 넘쳐흘렀는데, 이는 임금께서 어버이를 섬기고 선왕을 받드는 효도이었습니다. 임금께서 강화(江華)에 계실 적에 어떤 수신(守臣)에게 가혹한 조절(操切)을 당했었는데, 등극(登極)한 뒤 그 수신이 승지가 되어 입대(入對)했었습니다. 물러나간 다음 임금이 측근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그의 강대(講對)를 살펴보니 고의로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일은 국법에 따른 것이었다.’ 하고, 대우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다름이 없게 했습니다. 정령(政令)을 시행할 적에는 한결같이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안민(安民)’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전벽(殿壁)에 걸어놓았으며, 수재나 화재를 당하면 임금이 수축(修築)할 것을 파고(播告)한 말이 애긍(哀矜)하고 측달(惻怛)하였으므로, 이민(吏民)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삼남(三南) 지방과 관북(關北) 지방에 안핵사(按覈使)를 보낼 적에는 곡진하게 계유(戒諭)하여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억울하게 죄에 걸리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면서 오직 위무(慰撫)하고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궁인(宮人)이 임금이 쓰는 은기(銀器)를 잃어버리자 임금께서는 그 죄루(罪累)가 여러 사람에게 미치게 될 것을 幣構漏된다.’ 하였으며, 또 고기를 즐겨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이를 즐기게 되면 사서인(士庶人)들이 다투어 본받게 될 것이니, 가축(家畜)들의 화(禍)가 반드시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궁인(宮人)들이 새나 벌레를 잡는 경우가 있으면 속히 놓아주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한 마리를 잡게 되면 여러 마리가 상하게 된다.’ 했는데, 이는 임금께서 사람을 사랑하여 동물에게까지 미치게 한 인덕(人德)인 것입니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을 행하고 아들이 되어서는 효(孝)를 행한다.’ 했는데,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인(仁)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인데, 임금께서 타고나신 천분(天分)이 이러하였습니다. 그런데다 우리 순원 왕후(純元王后)께서 또 여덟 글자의 전심부(傳心符)를 가지고 사복(嗣服)한 처음에 순서가 있게 교회(敎誨)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극경 극신(克敬克愼)과 극근 극검(克勤克儉)이란 것은 요(堯) 순(舜)이 서로 전수(傳授)한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입니다.
임금께서는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간직하여 행하였고 띠에 써서 유념하였습니다. 14년 동안 임어(臨御)하면서 이룩한 성덕(盛德)·대업(大業)이 이것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근엄하고 공손하고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상천(上天)을 섬겼기 때문에,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천둥하는 경고(警告)가 있을 때면 그때마다 마음을 재계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양도(禳禱)하였습니다. 장마가 지고 가뭄이 드는 것이 성심(聖心)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여러 해 동안 큰 풍년이 들었으며, 거의 3년을 계속 풍년이 든 때도 있었습니다. 대신(大臣)을 예우하여 사대(賜對)할 때마다 사령(辭令)을 반드시 근신하였고 의관(衣冠)은 반드시 정제(整齊)하였으며, 기구신(耆舊臣)을 우대하여 경수연(慶壽宴)에는 반드시 은혜로운 하사가 있었으니, 임금께서는 이제야 극경(克敬)을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사(賞賜)에 신중을 기하면서 충현(忠賢)을 표창하여 드러내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국조(國朝)의 명유(名儒)와 신신(藎臣) 가운데 정량(貞亮)하고 절의(節義)가 있는 사람에게는 벼슬과 시호를 추증(追贈)하고,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게 했으며, 혹은 집이 분묘에 사제(賜祭)하기도 하여 거의 빠뜨린 것이 없었습니다. 학문을 강론하고 사도(斯道)를 호위하여 사림(士林)에 아름다운 은혜를 내리고, 의(義)를 취하여 인(仁)을 이루고, 왕실을 위하여 복근(服勤)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세사(世祀)를 허락하였으며, 여러 옥송(獄訟)과 금계(禁戒)에 대해 흠휼(欽恤)하고 애경(哀敬)하여 살리기를 좋아하여서는 차라리 실형(失刑)의 책임을 지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여 세신(世臣)과 고가(古家) 가운데 오래도록 단서(丹書)209) 에 기재되어 있거나 초야(草野)의 횡의(橫議)에 올라 한때 문망(文網)210) 에 걸렸던 사람들을 모두 신석(伸晳)시켜 자신(自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큰 옥사(獄事)에서 국문을 행할 때에도 목숨을 건진 사람이 많았고, 죄수들을 심리(審理)하여 소결(疏決)할 때는 모두 사유(赦宥)시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만 장률(贓律)에 대해서만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임금께서는 여기에서 극신(克愼)을 잘 행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聖母)께서 훈계하기를, ‘사람이 글을 읽지 않으면 고사(古事)에 어두워져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없다.’ 하였는데, 이 때문에 등극(登極)한 원년(元年)부터 맨 먼저 경악(經幄)을 열었습니다. 그리하여 육경(六經)에 본원을 두고 사전(史傳)으로 보익(補翼)하여 강론하고 탐구하였으므로 계발(啓發)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찍이 자경잠(自警箴) 열 조항을 병풍에 써 놓았는데, 시신(侍臣) 가운데 우러러 칭찬하는 사람이 있자 임금께서 이르기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하였습니다. 더욱 민생(民生)의 휴척(休戚)에 마음을 쏟았으므로 모든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이 사폐(辭陛)할 적에는 반드시 면유(面諭)하였으며,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장부(臧否)를 규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뜻을 겸손하게 지녀 귀에 거슬리는 말도 도리를 헤아려 절충(折衷)하였고 유술(儒術)을 숭장(崇奬)하여 궁정(弓旌)의 초빙(招聘)이 산골까지 두루 미쳤으니, 임금께서는 여기에서 극근(克勤)을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장(法章) 이외에는 항상 명주와 면포를 입었고 두세 번씩이나 세탁하여 입었으며, 궁실(宮室)이나 원포(苑圃)는 수리만 할 뿐이었으며, 진기한 찬선(饌膳)을 물리치고 기이한 완구(玩具)는 끊어버렸기 때문에 담박(淡泊)하여 기호(嗜好)가 마음에 접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문에 임금이 일생 동안 흥작(興作)하거나 선색(宣索)하는 번거로움이 없었으니, 임금께서는 여기에서 극검(克儉)을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믿음성이 넘쳐흘렀고 치도(治道)가 융숭하여져 온갖 경사가 찬연히 이루어졌으며 깊은 인덕(仁德)과 후한 은택(恩澤)이 두루 충일하였으니, 성모(聖母)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았고 영원히 천만세(千萬世)까지 할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오래도록 외방에서 노고를 겪었으므로 그가 즉위(卽位)하게 되자 감히 정무를 폐거나 편안하게 있지 않았으므로 나라가 잘 다스려져 평안하였으며,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여염(閭閻)에서 일어나 백성에 관한 일의 어려움을 알았으므로 명실(名實)을 종합하여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서업(緖業)을 중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선왕(先王)에게 큰 임무를 내린 것도 이와 같았는데, 향국(享國)한 역년(歷年)이 멀리는 은 고종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가까이는 한 선제만도 못하게 됨으로써 중흥하여 잘 다스려진 정치로 하여금 장구히 이어가는 교화를 이루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실로 하늘이 한 것이니, 말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아! 원통합니다. 신(臣)은 고루한 몸으로 우악(優渥)한 은택을 많이 받았고 벼슬을 역임하여 보필(輔弼)하여 온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검석(劍舃)을 어루만질 수 없게 된 뒤에 차마 모사(摹寫)하여 그려 내는 소기(小技)를 바치게 되니, 말이 글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므로 크게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 원통합니다. 【의정부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69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60]신묘년 : 1831 순조 31년.
- [註 161]
영안 국구(永安國舅) : 영안 부원군 김조순.- [註 162]
기유년 : 1849 헌종 15년.- [註 163]
공제(公除) : 임금이나 왕비가 승하한 뒤 26일 동안 공무(公務)를 중지하고 조의(引意)를 표하는 일.- [註 164]
경술년 : 1850 철종 원년.- [註 165]
양음(諒陰) : 임금의 거상(居喪).- [註 166]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註 167]
신해년 : 1851 철종 2년.- [註 168]
신유년 : 1861 철종 12년.- [註 169]
양서(兩西) : 황해도·평안도.- [註 170]
주량(舟梁) : 임금이 친영(親迎)함.- [註 171]
임자년 : 1852 철종 3년.- [註 172]
사복(嗣服) : 즉위.- [註 173]
계축년 : 1853 철종 4년.- [註 174]
전최(殿最) : 감사(監司)가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정부에 보고하던 우열(優劣).- [註 175]
갑인년 : 1854 철종 5년.- [註 176]
회방(回榜) : 과거에 급제하여 만 60년이 되는 해.- [註 177]
적자(赤子) : 임금의 치하(治下)에서 그 은혜를 받는 백성.- [註 178]
을묘년 : 1855 철종 6년.- [註 179]
송자(宋子) : 송시열(宋時烈).- [註 180]
병진년 : 1856 철종 7년.- [註 181]
춘조(春曹) : 예조(禮曹).- [註 182]
장생전(長生殿) : 왕실용(王室用) 또는 대신(大臣)에게 지급하는 관곽(棺槨)을 보관하는 곳.- [註 183]
회감(會減) : 받을 것과 줄 것을 상쇄(相殺)하여 회계 처리하는 것.- [註 184]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185]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註 186]
부취(俯就) : 내려와 앉음.- [註 187]
무오년 : 1858 철종 9년.- [註 188]
임신년 : 1812 순조 12년.- [註 189]
회근(回巹) : 회혼(回婚).- [註 190]
기미년 : 1859 철종 10년.- [註 191]
양도(兩道) : 강원도와 함경도.- [註 192]
신유년 : 1861 철종 12년.- [註 193]
순고(純考) : 순조.- [註 194]
임술년 : 1862 철종 13년.- [註 195]
구관(舊貫) :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례.- [註 196]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97]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98]
계축년 : 1853 철종 4년.- [註 199]
형가(形家) : 지사(地師).- [註 200]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註 201]
무오년 : 1858 철종 9년.- [註 202]
곤전(坤殿) : 왕비.- [註 203]
영위(榮衛) : 몸을 보양(保養)하는 혈기(血氣).- [註 204]
예척(禮陟) : 승하(昇遐).- [註 205]
갑자년 : 1864 고종 원년.- [註 206]
을묘년 : 1855 철종 6년.- [註 207]
정사년 : 1857 철종 8년.- [註 208]
○行狀:
王姓李, 諱昪, 字道升, 英宗大王旁支也。 英宗再傳至正宗, 正宗傳純祖翼宗憲宗, 而憲宗無嗣, 王奉純祖妃純元王后之命, 入承憲宗大統。 考純祖倫序也, 禰憲宗統序也。 母妃安東金氏, 卽我純元王后, 永安府院君 忠文公 祖淳女也。 昔我正宗大王有弟曰恩彦君, 恩彦君有子曰全溪大院君, 王, 全奚大院君第三子也。 本生母廉氏, 龍城府大夫人, 以純祖辛卯六月十七日丁酉, 誕王于慶幸坊私第。 時純元王后夢, 永安國舅, 進一小兒曰, ‘請善養此兒’, 后覺而識其事, 及王入宮, 日表如夢中所見。 王幼聰睿, 四歲讀周興嗣千文聞一知十, 筆畫完好, 不資肄習而有自然就體式者。 十四歲, 遭家難, 全家徙喬桐, 旋又移江華, 涉大洋遇風甚危, 王, 晏然無懾, 慰撫家人。 已而達于岸, 舟人曰, ‘此舟中其有天佑人乎。’ 己酉六月壬申, 憲宗大王薨, 純元王后敎曰, ‘英宗血脈, 惟憲宗與王, 其定爲宗社付托’, 遂遣大臣奉迎。 是年春夏, 每夜中有光氣, 見潛邸南山及輿衛渡甲津也。 彩虹橫長江如橋, 至楊花津, 有群羊來跪, 爲迎候狀。 初封德完君, 是月九日, 仍冠首恤宅宗, 受大寶于殯殿, 卽位于仁政門。 尊中宮殿爲大妃, 上大行大王諡曰經文緯武明仁哲孝, 廟號曰憲宗。 十月二十八日, 大葬于景陵, 孝顯后同原也。 時, 大王大妃, 用國典, 垂簾同聽政, 王, 居恭默, 事大小皆稟決焉。 王, 念舊學罔顯, 旣公除, 卽講《小學》, 置日講官曰, ‘工夫在立志耳。’ 庚戌春, 幸仁陵曰, ‘諒陰中謁先陵, 非常禮, 而今年, 卽我純廟誕彌之年也。’ 及誕彌月日, 又詣眞殿行酌獻, 命京兆抄六十一歲人, 加文蔭武資級, 賜士庶人米布。 辛亥元朝, 大王大妃母臨, 爲五十年, 親上表裏, 頒敎陳賀, 蠲貢米市徭泮贖, 諸道舊還穀, 有差。 拓璿源殿奉憲宗大王睟幀, 禮官獻眞宗祧廟當否議, 王曰, ‘親未盡而遽議迭遷, 其於天理人情, 未安。 而帝王家以統序爲重, 古今之通誼也。 憲宗大王, 君臨十五載, 纉承正純翼適適相傳之大統, 今若奉祔於二昭二穆以外之位, 則其於天理人情, 當如何也? 眞廟之祧, 自是不得不然之禮也。’ 遂遷于永寧殿。 王於考文議禮, 明愼如此。 恩彦君, 於辛酉, 有誣案, 在上國, 至是遣使陳奏, 獲辨正。 命益平君 曦主其祀, 命豐溪君祠版, 入繼恩全君, 而置其後。 兩西水分, 遣慰諭使存恤結搆, 捐京師錢助其費。 八月, 祔憲宗大王 孝顯王后于太室, 行吉禘, 上大王大妃尊號曰正烈, 王大妃尊號曰宣敬, 追上孝顯王后徽號曰敬惠靖順, 上大妃尊號曰明 憲, 受賀頒赦。 九月, 策王妃安東金氏, 永恩府院君 忠純公 汶根女也。 遣承旨, 宣侑于金文忠公壽恒以下四世祠版曰, ‘舟梁禮成, 益驗其忠貞積慶之報也’, 酌獻于大院君祠宇, 詣文廟謁聖。 壬子, 大王大妃撤簾, 王, 始親機務, 加上大王大妃尊號曰宣徽。 咸興火, 延燒殆千戶, 遣使慰諭, 如關西。 十月有雷異, 減膳撤樂, 下敎責躬, 命群下, 極言闕失。 自後, 遇有災祲, 輒如之。 十一月下敎曰, ‘予小子嗣服三年于玆矣, 顯揚之典, 尙未擧, 情禮缺然。 範金鏤玉, 摹天畫日, 卽我家已行之禮也。’ 遂以翌年癸丑春享, 詣太廟, 追上冊寶于純宗大王曰, 繼天配極隆元敦休, 加上大王大妃尊號曰英德。 關西饑, 貸宣惠廳錢五萬兩, 司譯院蔘包稅六萬兩濟活之。 命德興大院君祀孫, 錄用東班蔭職。 夏, 旱甚, 避正殿, 敎曰, ‘顧予否德, 叨承丕基, 早夜憂懼, 莫敢遑寧。 今此亢旱, 奚爲而然也? 民生困瘁, 不能救濟, 法令壅遏, 不能振刷, 財穀罄竭, 不能節約, 貪墨橫行, 不能懲治, 一則寡昧之罪也, 二則寡昧之罪也。’ 大臣箚勉, 仍乞退, 王曰, ‘災眚之來, 由予否德。 於卿何有?’ 不許。 大臣以節財用懲貪墨繼之, 王曰, ‘財穀竭而無節約, 則誠然矣, 而貪墨之無所懲畏, 何也? 以八道殿最觀之, 無非善治, 豈道伯, 不知而如是也?’ 召儒賢宋來熙、金炳駿、宋達洙、趙秉悳, 後又召任憲晦、李敏德, 倂不至。
冬, 追上翼宗大王尊號曰聖憲英哲睿誠淵敬, 加上王大妃尊號曰正仁, 追上憲宗大王尊號曰體健繼極中正光大, 孝顯王后尊號曰端聖, 加上大妃尊號曰淑敬。 嶺南饑, 頒白金丹木白礬曰, ‘言念民事, 寢食靡甘。’ 甲寅, 知事徐俊輔文科回榜, 賜几杖, 命致侑于鄭文忠公 夢周及先正臣金宏弼、趙光祖、李彦迪、李滉、李珥、金長生、宋時烈、宋浚吉之廟, 東方性理道統所禪也。 尋命文忠嗣孫調用。 飭守令貪汚曰, ‘貪墨之害, 甚於洪水猛獸。 剝割我赤子, 蕩析我赤子, 哀我無辜, 塡于溝壑, 而莫之恤也, 則安民固本之義, 安在哉? 方伯守令, 如有以贓汚聞者, 當施加倍之律。’ 五月, 大王大妃誕辰, 設耆老科, 御春塘臺, 許子侄入場, 扶將遂放榜。 耆老堂上妻, 竝賜衣帛。 乙卯正月, 酌獻于景慕宮, 追上莊獻世子徽號曰賛元憲誠啓祥顯熙, 惠嬪曰裕靖, 以世子誕彌再回甲也。 遣禮曹郞, 審察燕山、光海墓, 脩築諸道社壇, 王, 嘗以仁陵、綏陵、徽慶園宅兆不叶, 始命徧相畿甸遠近, 自是年, 又躬審西至于禧陵, 東北至于光陵, 陟巚降原, 不以爲勞。 八月, 遷綏陵於健元陵局內。 十月, 遷徽慶園於順康園右岡, 正廟在春宮時, 抄朱子宋子書中出處時義問學之爲一揆者, 彙而編之曰《兩賢傳心錄》, 至是刊行, 命道臣佽剞劂費。 王嚴於選擧, 及丙辰別試, 敎曰, ‘古之座主, 擢置人才, 爲國家需用, 今也不然, 只知關節奔競。 且巨室子弟, 不讀一字書, 而父兄憐其頭角, 爲之力圖, 是豈收拾人才之道乎? 是飭之後, 若有用情者, 當以科場律從事’, 有司震讋。 三月, 遷全溪大院君ㆍ完陽府大夫人墓所於抱川, 命春曹, 它具棺槨材, 自長生殿擇送。 驪州火, 被燒近千戶, 遣使慰諭賙救, 內下銀子丹木。 咸興又火, 內下如驪州而加給, 今年進貢茸錢三千兩。 七月, 嶺南大水, 遣使慰諭, 敎曰, ‘恤典公穀, 雖令會減, 此不足以寬予心。 頒內帑白金二千兩, 丹木二千斤, 胡椒二百斤。’ 海西水。 又命使慰諭, 而內下頒給如嶺南。 十月, 遷奉仁陵于獻陵右岡, 自啓陵之初, 王齊居皇皇, 如始喪, 靈轝至, 迎哭于行殿。 仍詣新陵殯殿, 親撰進香文, 哀切懇到, 奉讀者無不流涕。 旣復土, 念畿民奔命, 用準折式蠲兩稅,
〔○〕丁巳, 慈聖寶齡, 躋六旬有九, 王大妃寶齡, 躋五旬, 元朝親上箋文表裏, 三月, 進饌于通明殿, 敎曰, ‘歛福敷錫, 宜先庶民’, 命京兆五部己酉生士庶人, 頒給米綿。 時有陵園墓木犯斫事, 下嚴敎, 罪英陵溫陵昭寧園官, 罷, 每年奉審時, 循例狀聞, 道臣之職。 以國賦歲縮, 命各宮各營門各司吏校隷元額外加出者, 有闕勿補, 著爲式。 八月, 純元大妃薨, 王, 五朔居廬, 哀慕哭擗, 出於至誠。 體大行平日儉節, 衣襨只用內備, 三都監物力之卜定於外道者, 及八路祭需錢, 竝蠲免。 知敦寧李鶴秀, 疏請純宗大王廟號宜稱祖, 王曰, ‘我純考盛德至善, 卿言出於今日, 益切靡逮之慟。’ 遂改宗爲祖, 追上尊號曰懿行昭倫熙化峻烈, 改題神位, 追上純元王后尊號曰慈獻, 上徽號曰睿成弘定, 諡曰純元王大妃進號大王大妃, 大妃進號王大妃, 下安民保民綸音于八道。 諭廟堂, 飭因山時結所需索, 特下錢六千兩, 給役民, 發引時, 王援《五禮儀》。 將隨轝, 諸臣力諫不聽。 時方嚴冱大臣率百官廷啓, 日再三上, 王洊下哀痛敎, 終不許。 大臣請對力挽, 王曰, ‘予受東朝鞠育之恩, 凡幾年矣?’ 因掩泣曰, ‘父母之喪, 情理當行之事, 寧顧其身而莫伸乎?’ 諸臣掩抑不能對而退。 及因封, 諸大臣又涕泣苦諫, 王不得已曰, ‘隨轝雖不得行, 下玄宮日, 當進詣矣。’ 翌日遂詣陵臨壙, 是擧也, 帝王家罕有之禮也, 國人服其至孝。 自八月, 不進鹽醬, 饋奠必親哭, 必哀痛。 大臣登對, 勉以俯就, 王曰, ‘人子之於父母, 孰無欲孝之心? 養志盡誠, 可爲伸孝。 徒爲哭泣之哀, 何益哉? 然情之所發, 自然如此, 若以哭泣爲孝, 則亦可愧也’, 仍下淚不成聲。 戊午元朝, 大王大妃寶齡望六, 進表裏陳賀, 以純祖廟號加隆, 論壬申平西諸臣功, 加贈賜祭進秩錄孤有差, 以寓紀常之義。 是年純元聖母寶齡七旬之年也, 追上純祖大王尊號曰大中至正洪勳哲謨, 純元王后尊號曰顯倫, 奉純祖大王御眞, 揭虔于永禧殿。 判府事李憲球回巹, 召見賜几杖, 命忠正公金省行, 文純公權尙夏祠版不祧。 封本生伯兄爵, 爲懷平君賜諡孝愍, 竝與常溪君贈爵正一品。 己未, 命九卿及備局有司堂上, 薦才行人曰, ‘誠心旁求, 豈無人才乎?’ 又飭各道方伯, 隨聞抄薦, 勿使有志而虛老。 領敦寧金汶根, 上疏請定憲宗大王世室, 命賓廳會議, 遂世獻之。 祔純元王后于太廟, 加上大王大妃尊號曰慈惠, 王大妃尊號曰睿仁, 閏月, 關東以襄陽ㆍ通川ㆍ杆城山火, 聞江陵ㆍ高城ㆍ旌善火, 皆在一日, 關北以安邊ㆍ德源延燒, 亦在同日。 聞兩道八邑人家被燒者二千餘, 草木倉庫寺刹俱燬殘, 王, 大驚惕曰, ‘存恤之方, 不可按例而止’, 別下綸音, 遣使慰諭, 頒銀子丹木白礬, 佽搆奠倉庫寺刹, 竝令重建。 蠲關東災邑田稅大同軍布當年所納者。 命故相臣朴淳定立主祀, 仍施不祧。 六月, 大雨, 遣宣傳官, 察五部人家頹壓給恤典, 都下有沴氣, 死亡甚多, 命設別厲祭。 時王有疾翌瘳, 大臣援故事, 請稱慶, 王曰, ‘極備之災, 已過五旬, 此時豫大, 實非恐懼修省之義’, 不許。 仍下綸音, 警諭中外。 關北又有水, 命以北評事爲慰諭御史, 下帑銀丹木白礬, 加補原典, 辛酉, 追上純祖大王尊號曰乾始泰亨昌運弘基, 純元王后尊號曰洪化, 以純考御極元年之回甲, 聖母舟梁六十年也。 命先正臣金昌協李縡, 故忠臣金濟謙祠版不祧。 關北以端川府民戶漂頹, 及吉州明川水災, 聞遣使慰諭, 領帑銀丹木白礬, 下綸音, 凡係濟恤, 爛商以聞。 壬戌, 追上純祖大王尊號曰高明博厚剛健粹精, 純元王后尊號曰神運, 以聖母舟梁回甲也。 領府事鄭元容, 是年文科回榜, 賜几杖, 召見便殿, 親受謝箋宣饌, 賜詩以寵之。 時, 三南邑民俶擾, 往往脅官戕吏, 咸興民至犯觀察政堂, 王曰, ‘民習固可惡, 而爲方伯者, 不能體予愛恤之心而然也。’ 分遣按覈, 宣撫兩使于嶺南, 湖南亂民首倡者誅之, 罪道帥臣。 以糴政軍政田政之紊亂, 皆所以病民, 設釐整廳, 臨軒親策問三政救弊, 命罷正供外加定名色, 特下內帑錢五萬兩, 爲釐整, 節省費節目成, 議不咸就舊貫, 略加增刪行之。 秋拜仁陵, 仍幸南漢, 御西將臺, 召見諸大臣曰, ‘丙丁之事, 尙忍言哉? 人心狃安, 恬嬉成習。 仰念孝廟未就之志, 不勝激仰慷慨也。’ 癸亥, 王以徽慶園遷奉後, 形家之論, 終有所甲乙, 躬相宅兆, 五月遷奉於光陵局內, 達摩洞園, 凡再遷。 王之孝, 於是無憾矣。 知事尹致秀疏言, ‘北來書有鄭元慶所著《廾一史約編》者, 書本國宗系及開國時事, 極誣衊狀’, 王, 覽之大驚痛, 遂命專价陳辨, 臨發, 御西城門送之。 使還, 獲湔雪, 遂告廟頒赦, 群臣以王功德, 援宣廟辛卯光國故事, 請上尊號, 王曰, ‘是何言也? 今予治法, 萬無媲侔於古昔盛際, 況宗系辨誣吾行吾家事。 有何功德之稱乎?’ 賓廳屢啓不從, 遂率百官庭請, 凡十餘啓, 王, 勉從。
受冊寶尊號曰, 熙倫正極粹德純聖, 王妃尊號曰明純。 知事金炳國, 繼援仁元后故事, 請闡慈徽, 遂上大王大妃尊號曰弘德, 王大妃尊號曰正穆, 旣親上箋文, 而冊寶成, 未及上而仙馭遽上賓, 嗚呼! 冤哉。 永恩府院君 金汶根卒, 王, 震悼曰, ‘謹愼儉約四字, 奉我慈訓, 蚤夜服膺予小子倚遇委毗之隆, 不但爲其處地而然耳。’ 王憂勤積悴, 數年來頻有違豫。 戊午, 坤殿誕元子, 未朞而逝, 後宮就館者, 亦多夭慼。 王, 以理遣之, 雖不見色辭, 而榮衛則漸致損矣。 然而陵園展省, 廟宮傳香, 法殿朝賀, 猶力行不少懈, 十二月七日, 疾大漸, 翌日庚辰, 禮陟于昌德宮之大造殿, 春秋三十三, 在位十有四年。 卿士大夫攀擗號呼曰, ‘以吾王之大德而止於斯歟? 德必得壽, 謂天可必? 天不可必也歟, 國其奈何?’ 都人士女, 奔走震盪, 若不保時日。 大王大妃命大臣, 迎今上殿下, 入承大統, 主喪事, 與大小臣工, 議王功德, 上謚曰文顯武成獻仁英孝, 廟號曰哲宗。 用翌年甲子四月七日, 葬于睿陵, 卽禧陵右岡坐子之原, 而王於乙卯躬審時, 聖意攸屬也。 嗚呼! 痛矣。 一女幼, 宮人范氏出。 王, 氣宇凝遠, 隆準龍睛, 顧眄有英彩, 不威而嚴, 不察而明。 其於仁孝, 天性然也。 幼時事完陽ㆍ龍城兩府大夫人, 無間焉, 龍城府大夫人之喪, 不得入訣殯室, 爲平生恨, 十一歲, 遭大院君喪, 哭踊哀戚備至。 御極後, 侍純元聖母, 居處必同殿, 飮食必同廚, 經筵視事之外, 未嘗暫離側, 有不安節, 扶持抑搔, 先意承志, 蚤夜不解衣帶, 九年如一日。 丁巳以後, 對饍輒泣曰, ‘聖母飯, 予亦飯, 今何忍獨食?’ 左右飮涕。 大院君一門全釋, 在壬午, 而純考特恩也。 王之不匱之思, 輒寓之於霜露濡履, 揚徽闡烈, 屢擧不一擧, 殆無曠年, 以爲不如是, 無以恔於心也。 廟宮祠饗, 必躬將, 省犧牷眂滌濯, 儀容齊遬。 遇祖宗朝誕降登遐御極舟梁之歲, 或親詣寢堧, 或替遣大臣, 必蕆事焉。 奉憲宗殯殿也, 苑果熟, 命薦之曰, ‘是先王所賞翫者。’ 事兩慈殿, 誠敬肫摰, 宮闈之內, 祥和洋溢, 是惟王事親奉先之孝也。 王之在江華, 爲一守臣所操切, 登極後, 守臣以承旨入對。 旣退, 王語左右曰, ‘觀其講對, 非故欲困我者。 嚮日事, 國法也。’ 待之與諸臣無異。 政令之間, 一以愛民保民爲心, 大書安民二字, 揭之殿壁, 有水火之災, 播脩之告, 哀矜惻怛, 吏民聳聽感泣。 三南關北按覈之行, 諄諄戒諭, 慮有一夫之枉罹, 專拊循尉。 存宮人失所, 御銀器王慮, 累及衆人, 命更造以代之, 藥院有酪粥, 自十月, 日供, 至明年正月而止, 命停之曰, ‘牛不字畜不蕃。’ 又不喜肉曰, ‘予若嗜此, 士庶競效之, 畜之禍, 必滋多。’ 宮人有捕禽蟲, 亟命放之曰, ‘捕一則傷衆族。’ 是惟王愛人及物之仁也。 傳曰 ‘爲人君止於仁, 爲人子止於孝’, 孝者, 百行之源, 仁者, 心之德, 愛之理, 王之得於天分如此。 而我純元聖母, 又以八字傳心之符, 循循誘誨於嗣服之初。 其曰克敬克愼, 克勤克儉者, 堯、舜相授之精一心法也。 王慥慥莊懷而書紳。 臨御十四年, 盛德大業, 莫不本之於此。 嚴恭寅畏, 對越上天, 彗孛轟燁之告警, 輒齋心側身以禳之。 一雨暘動關聖心, 歲屢大熟, 殆至三登。 禮遇大臣, 每賜對, 辭令必謹, 衣冠必整, 優待耆舊, 慶壽之宴, 必有寵貺, 王於是, 可謂克敬矣。 愼於賞予而拳拳於褒忠象賢, 國朝名儒藎臣貞亮節義之人, 贈爵謚錄祀孫, 或賜祭于家若墓, 殆無遺焉。 其有講學衛道, 嘉惠士林, 取義成仁, 服勤王室者, 特許其世祀, 庶獄庶愼, 欽恤哀敬, 好生寧失恒虞。 夫一物之不得其所, 如世臣古家, 積久載丹書及草野橫議, 一時扞文網者, 倂伸晣而維新之, 有大獄鞫訊, 傅生者居多, 慮囚疏決, 或至咸宥, 而惟贓律不少貸, 王於是, 可謂克愼矣。 聖母有訓曰, ‘人不讀書, 昧於古事, 不能治國’, 是以, 自初元, 道開經幄, 原本六經, 翼以史傳, 講究探賾, 啓發弘多。 嘗書自警十條于屛, 侍臣有仰讃者, 王曰, ‘匪書之難, 行之惟難。’ 尤恤恤乎民生休戚, 凡方伯守令之陛辭, 必加面諭, 分遣御史, 紏察臧否。 遜志逆耳之言, 揆諸道而折衷之, 崇奬儒術, 弓旌之招, 徧于丘園, 王於是, 可謂克勤矣。 法章之外, 常服惟紬綿, 而澣濯至再三, 宮室苑圃, 葺之而已, 屛珍膳而絶奇衺之翫, 泊然無嗜好之嬰於心者。 是故, 終王之世, 無興作宣索之繁, 王於是可謂克儉矣。 由是, 有孚盈缶, 治道升中, 百嘉鬯遂, 深仁厚澤, 瀜液周徧, 庶不負聖母付托, 而永有辭於千萬世矣。 昔殷高宗, 舊勞于外, 作其卽位, 不敢荒寧, 邦以嘉靖, 漢 宣帝, 興於閭閻, 知民事艱難綜核名實, 業以中興。 天之降大任於我先王, 亦若是也, 而享國歷年, 遠不及於高宗, 近猶遜於孝宣, 俾中興嘉靖之治, 不得久道而化成, 天實爲之, 謂之何哉? 嗚呼! 冤矣。 臣以弇陋, 厚被渥澤, 周還承弼, 有年所矣。 而今於劍舃莫攀之後, 忍效摹繪之技, 不但言之不文, 爲大瞿焉耳。 嗚呼! 冤矣。 【議政府左議政趙斗淳製。】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附錄終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69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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