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유 헌성 왕대비의 선왕에 대한 언교(諺敎)
효유 헌성 왕대비(孝裕獻聖王大妃)의 언교(諺敎)에 이르기를,
"선왕(先王)께서는 정해년001) 7월 18일 신시(申時)에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탄강(誕降)하셨다. 병술년002) 10월 꿈에 익종 대왕(翼宗大王)께서 옥(玉)으로 아로새긴 나무를 갑(匣)에 담아서 내게 주시는 것을 본 것이 실로 탄강의 조짐이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 때부터 타고난 자질이 비범하게 숙성하여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섰고, 또 손을 대어 돌상에서 필묵(筆墨)과 책을 먼저 잡았다. 재기(才氣)가 뛰어나게 나타나서 두세 살 때에 능히 《천자문(千字文)》의 1백여 자를 통하였다. 부왕(父王)께서 보고 늘 보아서 익숙해진 것이리라 생각하고 《소학(小學)》을 펴 보이셨는데, 묻기 전에 문득 손으로 아는 자를 가리키며 아무 자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니, 부왕께서 그 총명한 것을 기뻐하여 매우 사랑하시며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장차 나보다 낫겠다.’ 하셨다. 4세 때에 병풍에 그린 사람을 보고 누르지 말게 하며 ‘그림 가운데의 아이가 아플세라 걱정된다.’ 하셨으니, 천성이 인자하기가 이러하셨다. 경인년003) 망극한 일이 있을 때에 나는 편찮아 계신 곳에 있었고 궁인(宮人)과 유모(乳母)만이 모시었는데, 사람들이 허둥지둥하는 빛을 보면 반드시 유희(遊戲)하지 않으셨다. 화변(禍變)이 망극한 날에는 좌우 사람들이 놀라시게 될세라 염려하여 스스로 슬픔을 참았지마는 어찌 슬픈 기색이 없었겠는가? 여느 사람이라면 그때에 바야흐로 4세이므로 아는 것이 없을 것인데, 아는 것이 있는듯 보모(保母)의 품에서 소리내어 울며 ‘나도 고운 옷을 입고 싶지 않다.’ 하셨다. 빈전(殯殿)이 매우 가까우므로 삼시의 제전(祭奠) 때에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유희를 그치고 자리를 펴고 부복하여 ‘나도 반열(班列)에 참여한다.’ 하고 반드시 슬퍼하는 낯빛이 있었다. 이해 9월에 중희당(重熙堂)에서 책봉(冊封)을 행하였는데,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이 매우 많았고 복식을 갖추고서 예를 행하여 능히 절차를 따랐다. 정사(正使)인 봉조하(奉朝賀) 남공철(南公轍)과 부사(副使)인 외조(外祖) 충경공(忠敬公)이 후사배(後四拜)를 그만두고 대내(大內)로 돌아가기로 의논하는 것을 듣고 ‘행례(行禮)가 끝난 뒤에 도로 들어가겠다.’ 하셨으니, 이러한 일이 비상히 영명(英明)하다고 일컫는 바이다. 양전(兩殿)께서 대례(大禮)가 순조로이 이루어진 것을 아름답게 여겨 과합(果盒)을 내리셨으니, 받아서 기뻐해야 할 것인데 문득 눈물을 흘리므로, 성상과 좌우 사람이 모두 슬퍼하였다. 5세 때에 부왕을 꿈에 보고 소리내어 울고 낯빛이 슬픔이 있었으니, 천성인 지극한 효성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하겠는가? 6세 9월에 경현당(景賢堂)에서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이어서 강연(講筵)을 열었는데 시각을 어기지 않았고, 혹 빈객(賓客)이 전에 배운 음(音)에 대하여 우생(優栍)을 내면 번번이 묻기를 내가 아무 자에 대하여 잘못 읽었는데 우생(優栍)은 무엇 때문인가?’ 하셨으므로, 이때부터는 빈객이 감히 우생을 내지 못하였다.
처음 학문을 배울 때에 비록 어린 나이일지라도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므로 유의(留意)하면 두어 번 읽고는 외었고 문의(文義)에 의심스럽고 모르시는 것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양전을 우러러 섬기되 그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고, 갑오년004) 의 대상(大喪)을 당해서는 궤전(饋奠)하고 곡읍(哭泣)하는 의절(義節)이 성인(成人)과 같으시므로 근시(近侍)들이 우러러보고 모두 슬피 느꼈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더욱이 극진하셨는데, 이를테면 진전(眞殿)의 다례(茶禮) 때에 반열에 참여한 신하들이 함께 아는 바이나, 대내(大內)에서도 친히 행하지 않으신 적이 거의 없었다. 뇌우(雷雨)를 당하면 반드시 경계하고 두렵게 여겨서 잠자리에 계시면 문득 일어나 앉으셨으니, 이는 성념(聖念)이 하늘을 공경하시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기해년005) ·경자년006) 두 해에 가뭄을 당해서는 깊은 밤에 곤포(袞袍)를 입고 분향(焚香)하고 축문(祝文)을 읽어 친히 비를 비셨으니, 이는 오로지 백성을 돌보시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10세 이후에는 번번이 부왕의 어용(御容)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것을 슬퍼하고 사모하셨으나, 내가 듣고 괴롭게 생각할세라 염려하여 듣지 못하는 곳에서 궁인에게 물으셨고, 또 능침(陵寢)이 미흡한 것을 염려하여 여러 해 동안 경영하셨다가 병오년007) 봄에 천봉(遷奉)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때는 작은 일까지도 모두 친히 집행하여 현궁(玄宮)을 받들어 내는 날부터 현궁을 내릴 때까지 불안하고 초조하여 침수(寢睡)를 폐하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으며 미음·죽의 소선(素膳)을 들며 그지없이 애통하셨으니, 그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효성은 근시(近侍)한 신하들이 함께 아는 바이다. 8월에 순종(純宗)·익종(翼宗) 양조(兩朝)의 어진(御眞)을 진전에 봉안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는 천리(天理)·인정(人情)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친히 모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여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셨다. 동조(東朝)께서 편찮으실 때에는 의약(醫藥)의 일에 불안하여 의관(醫官)이 입진(入診)하면 반드시 친히 맥부(脈部)를 받들고 증후(證候)를 상세히 논하고 혹은 의관이 진찰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고 평상으로 회복되셔서는 몹시 기뻐하셨으니, 이는 효성이 지극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성총(聖聰)이 뛰어나고 재기(才氣)가 우월(優越)하며 강명(剛明)하고 정직하여 비뚠 것을 보면 반드시 바로잡았다. 언어가 공손하였고 의관을 갖추지 않으면 대신(大臣)·경재(卿宰)를 만나지 않으셨는데, 이번에 편찮으신 중에도 한결같으셨다. 3,4세 이후로는 낮에 누운 적이 없었고 매양 밝기 전에 세수하고 낮 동안과 깊은 밤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옛사람의 서첩(書帖)을 몹시 사랑하였다. 거처는 반드시 고요한 곳을 택하였으며, 의대(衣襨)는 곤포(袞袍)가 아니면 문단(紋緞)을 입지 않았고 반드시 무명·명주·모시의 거친 것을 취하였으며, 찬품(饌品)은 반드시 간략한 것을 숭상하셨으니, 이것도 다 좌우의 근시들이 아는 바이다. 내가 늘 의대가 너무 검소하고 찬품이 두세 그릇에 지나지 아니하여 사서인(士庶人)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면 반드시 이르기를 ‘의대를 검소하게 하는 것은 복을 이끄는 방도이고 찬품을 간략하게 하는 것은 수(壽)를 더하는 방도라.’고 하셨다. 때때로 혹 밥알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면 반드시 먼저 주워 드셨으니, 한 알의 쌀도 아끼시는 것이 이러하였다. 탄강(誕降) 이후 이제까지 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떠나신 적이 없었고 동가(動駕)가 있으면 곧 총총히 환궁(還宮)하셨다. 이를테면 춘당대(春塘臺)에 전좌(殿座)할 때에는 내가 가서 보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 대내(大內)에서 기다렸다가 앞서 가고 한 때도 옆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무릇 의대·찬선을 내가 친히 살피면 반드시 뜻에 맞으셨다. 내가 선왕(先王)을 보호한 것이 이제까지 어린 나이 때와 같았고 선왕이 효성을 다한 것이 유아(乳兒) 때와 같아서 그 지극한 정애(情愛)와 지극한 자효(慈孝)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하셨으니, 천성이 아니면 어째 이러하실 수 있겠는가? 편찮으실 때에도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내가 친히 보살피면 반드시 기뻐하고 어린 나이가 아니므로 오히려 지나치게 여기면 매우 언짢은 듯하셨으니, 오늘을 당하여 더욱이 후회된다. 아아! 평소의 현효(賢孝)와 오늘의 춘로서 한 때의 병환으로 말미암아 이 지경에 이를 것을 어찌 꿈엔들 생각하였겠는가? 저 푸른 하늘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는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는가? 심장은 돌과 같은 것도 쇠와 같은 것도 아니어 오장이 무너지고 찢어지니, 지극히 원통(冤慟)한 것을 어떻게 참겠는가? 이 참혹한 아픔을 당하여 그지없이 어지러운 정신으로 대략 기술하므로 앞뒤가 말이 되지 않으니, 이것은 짐작해서 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37면
- 【분류】왕실(王室)
- [註 001]정해년 : 1827 순조 27년.
- [註 002]
병술년 : 1826 순조 26년.- [註 003]
경인년 : 1830 순조 30년.- [註 004]
갑오년 : 1834 순조 34년.- [註 005]
○孝裕獻聖王大妃諺敎:
先王, 以丁亥七月十八日申時, 誕降于昌慶宮之景春殿。 丙戌十月, 夢見翼宗大王, 以雕玉之樹, 盛于匣而賜予, 實誕降之兆也。 自襁褓孩提, 天質夙就非凡, 百日前能立, 而且與之手, 晬盤, 先執筆墨與冊。 才氣英發, 數歲能通千字百餘字, 父王見之, 意其常目而慣熟, 展示《小學》, 發問之前, 輒手指所知之字曰, 某字在此, 父王喜其聰明而甚愛之曰, ‘好學, 其將勝予乎?’ 四歲, 見屛畫人物, 勿令壓之曰, ‘恐畫中兒有疼,’ 天性之慈仁如此。 庚寅罔極時, 予在於患候處, 只有宮人及乳母侍, 見人遑遑之色, 必不遊嬉。 及乎禍變罔極之日, 左右之人, 恐致驚動, 雖自忍抑, 豈無悲色? 苟如凡人, 時方四歲, 宜無所知, 而若有所知, 在保母之抱而哭之曰, ‘吾亦不欲着華服。’ 殯殿甚近, 三時祭奠, 聞哭泣之聲, 則輒止遊嬉, 引席俯伏曰, ‘吾亦參班,’ 必有戚容。 是歲九月, 行冊封于重熙堂, 侍衛諸臣甚多, 而裝束行禮, 能循節次。 正使奉朝賀南公轍, 副使外祖忠敬公議除後四拜而還內, 聞之曰, ‘行禮畢後, 當還入矣。’ 如此之事, 所以稱異常英明者。 兩殿嘉大禮之順成, 賜以果盒, 宜其受以爲喜, 而忽然下淚, 上及左右人莫不悲戚。 五歲, 夢見父王而哭之, 顔色有戚, 若非天性之至孝, 則何以如此? 六歲九月, 行相見禮於景賢堂, 仍開講筵, 不失時刻, 或賓客於前受音, 出優栍, 則每問之曰, ‘予於某字誤讀, 而優栍何也?’ 自此賓客, 不敢出優栍。 初受學, 雖在沖年, 聰明絶人, 苟留心則讀數遍輒誦, 文義無疑晦焉。 沖年仰事兩殿, 極其至誠, 及當甲午大喪, 饋奠哭泣之節, 如成人, 近侍仰瞻無不悲感焉, 尤盡於奉先之節, 如眞殿茶禮時參班諸臣所共知者, 而自內不爲親行無幾矣。 嘗雷雨, 必警惕, 在寢輒起坐, 是聖念之出於敬天也。 己亥庚子兩年, 遇旱, 於深夜, 御袞袍焚祝親禱雨, 是專出於恤民也。 十歲後, 每以父王御容之依微, 爲悲慕, 恐予聞而疚懷於未聞處, 問於宮人, 又慮陵寢之未恰, 積年經營, 丙午春, 下遷奉之敎。 當其時, 雖微細事, 靡不親執, 自出玄宮日, 至下玄宮時, 憧憧焦煎, 而廢寢睡不進水剌, 進以糜粥素膳, 罔極哀慟, 其至誠至孝, 近侍諸臣之所共知也。 八月, 奉安純宗、翼宗兩朝御眞於眞殿, 敎曰: ‘此天理人情之所不容已, 而今與親侍無異, 以盡天性至孝焉。 東朝患候時, 憧憧於醫藥之節, 醫官入診, 必親奉脈部, 詳論證候, 或以醫官之不善診察爲慮, 及平復, 歡天喜地, 此誠孝之極也。 自幼時, 聖聰絶倫, 才氣過人, 剛明正直, 見欹必整。 言語敬恭, 大臣卿宰, 非衣冠則不見, 雖於今番患候中, 亦如一焉。 三四歲以後, 晝未嘗臥, 每未明盥漱, 終日深夜, 手不釋卷, 酷愛古人書帖。 居處必以靜衣襨, 非袞袍, 不御紋緞, 必取木, 綿, 紬苧之麤者, 饌品必尙簡略, 此皆左右近侍之所知。 予常偶衣襨之太儉素, 饌品之不踰數三器者, 與士庶無異, 過於薄略爲言, 則必曰 ‘衣襨之儉素, 所以導福, 饌品之簡略, 所以益壽。’ 時或見水剌飯粒之遺地, 必先拾以進之, 其愛惜粒米如此焉。 誕降之後, 至于今於予所居, 無相遠有動駕, 輒忽忽還宮。 如春塘臺殿座之時, 爲予臨視, 必待自內先往, 無一時離側, 凡衣襨饌膳, 予有親檢, 則必適意。 予之保護先王, 至今如沖年, 先王之致孝, 如乳兒, 其至情至愛, 至慈至孝, 有倍他人, 苟非天性, 焉能如此? 雖在患候時, 暫不捨予, 坐臥予若親視, 則必喜以非幼沖之年, 猶以爲過, 則甚有齟齬意, 當今之日, 尤爲追悔。 嗚呼! 以平時賢孝, 今日春秋, 由一時之病患, 至於此境, 豈夢寐之所到哉? 彼蒼者天, 胡忍爲此? 胡忍爲此? 心腸非如石非如鐵, 五內崩裂, 至冤極慟, 何以忍抑? 當此慘毒之痛, 以罔極荒迷之精神, 大略記之, 先後不成言, 此則斟酌見之。
- 【태백산사고본】 9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537면
- 【분류】왕실(王室)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