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판서 김흥근의 상소대로 졸곡 이후 연거 때에는 흑립을 쓰도록 제정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흥근(金興根)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臣)의 벼슬은 예(禮)를 의논하는 데에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졸곡(卒哭) 뒤에 전하께서 연거(燕居) 때 백포 과립(白布裹笠)을 쓰시는 것은 보편(補編)에 실려 있으므로 신의 조(曹)에서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내상(內喪)이 먼저 있었으므로 졸곡 뒤에 뭇 신하가 진현(進見)할 때에는 이미 오모(烏帽)·흑대(黑帶)를 쓰는데, 전하의 백포립(白布笠)은 공제(公除)032) 이후에도 마찬가지라면 이는 상하의 복제(服制)가 차이나는 것입니다. 본편(本編)의 전중복제이정조(傳重服制釐正條)에 공제 이후 연거 때에는 흑포과립(黑布裹笠)으로 마련하였고, 또 연제(練祭) 이후는 흑립(黑笠)으로 실려 있으니, 공제 이후이건 연제 이후이건 물론하고 이제 장기(杖期) 연거 때의 상제(詳祭) 이후에 흑립을 쓰는 것과 견주어 보면 도리어 전중(傳重)보다 중합니다. 임금과 신하의 복제를 모두 백포립으로 정한 것은 미처 우러러 헤아리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변하여 조금 길(吉)하게 하는 것은 예(禮)의 점차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가 진현할 때의 복제에 이미 조금 변하는 뜻을 붙였다면 전하의 입제(笠制)에 대해서만 연거 때에 쓰는 것이라 하여 시월(時月)의 절차가 바뀌는 데에 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겠습니까? 또 압존(壓尊)이 되는 곳에는 본디 그 제도가 있고 문침(問寢)·시선(視膳)·진현(進見)이 무시(無時)로 있으니, 또한 어떻게 진퇴하는 사이에 각각 그 지극히 마땅한 것을 얻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이 소장(疏章)을 내려서 대신(大臣)과 관각(館閣)의 당상(堂上)과 외방에 있는 유현(儒賢)에게 널리 물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 제도가 의심스러운 것은 과연 경(卿)의 말과 같으니, 청한 대로 수의(收議)하라."
하였다. 곧 모든 의논이 같았기 때문에 졸곡 이후 연거 때에는 흑립을 쓰는 것으로 제정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97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의생활-예복(禮服)
- [註 032]공제(公除) :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일반 공무(公務)를 중지하고 26일 동안 조의(弔意)를 표하는 일.
○辛未/禮曹判書金興根疏略曰:
臣職在議禮, 有不敢泯默者。 今此大行王妃卒哭後, 殿下燕居時, 白布裹笠, 載在《補編》, 自臣曹啓不矣。 竊念內喪在先, 卒哭後群下進見, 旣用烏帽黑帶, 而殿下白布笠, 一如公除以後, 則是上下之服參差也。 《本編》傳《重服制釐正條》, 公除後燕居, 以黑布裹笠磨鍊, 又以練後黑笠載錄, 無論公除後練後, 以今杖朞燕居之祥後黑笠較看, 則反有重於傳重。 竝擧君臣之服而定之以白布笠者, 雖未仰度微變微吉禮之漸也, 故群下進見之服, 旣寓微變之意, 則惟於殿下笠制, 以其燕居所用, 而無所差殊於時月節次之際乎? 且壓尊處, 自有其制, 而問寢、視膳、進見無時, 則又何以折衷於進退之間, 各得其至當乎? 伏乞下臣此章, 廣加詢訪於大臣館閣堂上在外儒賢。
批曰: "斯制之可疑, 果如卿言, 依所請收議。" 尋因僉議詢同, 卒哭後燕居, 以黑笠爲制。
- 【태백산사고본】 6책 1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97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의생활-예복(禮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