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김홍근이 성학의 권면을 아뢰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니,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토성진(兔城鎭)을 혁파(革罷)하고 환향(還餉)은 쌀로 쳐서 고을 문부(文簿)에 옮겨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이 아뢰기를,
"신이 조정에 나오던 초기에 외람되게 몇 가지 아뢰어 권면한 것이 있는데, 늘 학문에 힘쓸 것을 앞세웠으나, 몇 달 동안 한결같이 한가하고 산만하십니다. 예지(睿智)을 타고났으므로 굳이 힘쓸 것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순(舜)과 우(禹) 같은 성인도 학문에 의지하는 것이 없을 수 없었으며, 철이 무더워 응접하기에 괴롭다고 생각하신다면 옛날에 평범한 임금으로서 땀을 흘려도 피로한 줄 모른 이가 있었으며, 신이 아뢴 것이 늙은이의 상담(常談)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고금을 통하여 경리(經理)·경행(經行)은 달리 변통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니, 이것을 버리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의 보상(輔相)의 벼슬을 생각하면 한 마디로 말하여 마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후의 성유(聖諭)가 여러 번 신의 집 선고(先故)에 미쳤는데, 신이 명을 도피할 바가 없이 출척(怵惕)하고 감격한 것도 신의 집 선훈(先訓)이 오히려 혹 오늘날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의 재분(才分)은 각각 한정이 있으니, 방현령(房玄齡)이 지모(智謀)가 있었으나 두여회(杜如晦)와 같이 결단하지 못하였고, 송경(宋璟)이 정도(正道)를 지켰으나 요숭(姚崇)과 같이 응변(應變)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선조로 말하면 대대로 정승의 중책을 받아 기강을 세우고 도(道)를 지키고 상도(常道)를 지키고 의리를 취하여 참으로 일대(一代)에서 추대를 받았습니다. 경륜(經綸)의 재략(才略)과 사무를 부담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사양하여 차지하지 않고 당시에 쓸만한 인사에게 양보하였습니다. 그리고 근세의 대신(大臣)이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지 않고 한결같이 대각(臺閣)에 넘기는 것은 보필하고 광구(匡救)하는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오로지 이것을 스스로 맡았으니, 이것은 선인이 스스로 살피는 데에 밝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아주 변변치 못한 자질로 외람되게 선인의 사업을 이어받았는데, 일체의 모의하고 계획하고 견제하고 변통하는 기량은 근사(近似)한 도리가 없음을 스스로 분별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감히 망령되게 스스로 나타내어 쓸 계책을 삼지 않았으니, 오직 때때로 어리석은 말을 올려 제 기능에 맡는 간언(諫言)을 다하면, 거의 만에 하나라도 가계(家計)를 실추하여 융숭한 대우를 저버리는 데 이르지는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정령(政令)과 사업이 뭇사람의 마음에 어긋나는 데 이르지 않았고, 성색(聲色)과 완호(玩好)는 성심(聖心)을 저촉하여 엄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기뻐서 성궁(聖躬)에 궐실이 없다고 여기고 있으나, 오로지 신은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으신 것이 전하의 큰 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연(經筵)에서 취품(取稟)하는 것을 시사(視事)라고 일컬으니, 조종(祖宗)의 성대한 법의 명의(命意)가 있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이 곧 정사이니 정사는 학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접때 아뢴 뜻을 세우고 실속을 힘쓴다는 것이 또한 그 요체입니다. 《맹자(孟子)》에,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신도 전하께서 이에 대하여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지 않으실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쓸데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마시고 과단성있게 밝게 결단하여 전의 규례를 통렬하게 고치시고, 시종 일념(一念)으로 독실하여 게을리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내가 스스로 매우 부끄럽다. 더욱더 힘쓰겠다."
하였다. 우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아뢰어 성학(聖學)을 권면하니, 비답을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87면
- 【분류】왕실(王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丁卯/上御熙政堂, 行藥院入診, 引見大臣備局堂上。 命兎城鎭革罷, 還餉折米, 移錄邑簿。 左議政金弘根啓言: "臣於呈身之初, 猥有數條陳勉, 而以典學爲先, 數朔之頃, 一向悠泛。 謂睿智天縱, 毋待强勉, 則舜、禹之聖, 不能無資於學, 謂時序炎溽, 有勞酬接, 則古之中主, 尙有汗透而不知爲疲, 謂臣所陳, 不過老生常談, 則窮古亘今, 經理經行之移易他不得者, 舍是無由也。 顧臣輔相之職, 蔽一言匪其人耳。 然前後聖諭, 屢及於臣家先故, 臣之無所逃命, 怵惕而感激者, 亦有臣家先訓之尙或可以藉手於今日。 而凡人才分, 各有限, 玄齡之謀, 不能爲如晦之斷, 宋璟之持正, 不能爲姚崇之應變。 卽以臣先祖言之, 世膺三事之重, 樹綱衛道, 守經取義, 固爲一代之所推。 至若經綸才猷, 擔夯事務, 則輒退然不居, 讓與需時之彦。 以爲近世大臣, 不以君德闕失, 爲己責, 一付之臺閣, 非輔弼匡救之義, 專以是自任, 此前人所以明於自審也。 臣以萬萬無肖, 叨塵先武, 一切謀謨, 籌劃宰制, 變通之量, 自分無近似道理, 初不敢爲妄自發用之計, 則惟是時進愚戇之說, 冒效藝事之諫, 庶可爲萬有一不至於墜家計而孤隆遇也。 第今政令事爲, 不至於違拂群心, 聲色玩好, 未聞有干蔽聖志, 擧欣欣然以爲聖躬無闕失, 臣獨以爲典學不勤, 乃殿下闕失之大者也。 經筵取稟, 稱以視事, 可見祖宗盛典, 命意攸在。 學便是政, 政不外學, 而向所陳立志懋實, 又其要也。 《孟子》曰, ‘不爲也, 非不能也,’ 臣亦以爲殿下, 於此非不能也, 直不爲耳。 惟殿下, 俯察愚悃, 勿以人廢, 廓揮明斷, 痛改前規, 一念終始, 慥慥不懈焉。" 批曰: "今聞卿言, 予甚自愧, 當益加勉矣。" 右議政鄭元容, 陳勉聖學, 賜批。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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