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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실록8권, 헌종 7년 1월 12일 무술 2번째기사 1841년 청 도광(道光) 21년

송계간·송내희·성근묵·김은근에게 보좌를 명하는 글을 내리다

송계간(宋啓榦)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듣건대, 주공(周公)의 가르침에, ‘노성(老成)한 덕이 있는 지임(遲任)이 말하기를, 「사람은 옛사람을 구한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예전 융성한 때에 천공(天工)을 대신하여 화리(化理)를 일으킨 자는 반드시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는 일을 먼저 한 것이다. 경은 세 조정에서 융숭하게 예우(禮遇)하던 사람으로서 일세(一世)의 사표(師表)가 되는 높은 자리에 있어 사림(士林)에서 본받고 조야(朝野)에서 의지한 지 이제 40여 년이 되었다. 내가 사복(嗣服)한 초기에 경이 훌쩍 와서 나를 돕고 나를 이끌어 주기를 마음속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기다렸을 뿐만이 아니었으나, 정성과 예(禮)가 천박하여 가둔(嘉遯)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며, 두세 번 돈면(敦勉)한 것이 겉치레가 되었을 뿐이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등용한 것은 내가 그대에게 벼슬을 주어 매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어진이를 높이고 도(道)를 지키며 널리 구하여 도움을 바라는 뜻에 말미암은 것이다. 더구나 이제 염의(簾儀)를 거두시어 번다한 만기(萬機)가 내 몸에 달려 있으니, 덕이 없는 몸이 아침부터 밤까지 삼가고 두려워하는 까닭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백성을 편하게 한 선왕의 대신(大臣)이 도모한 공(功)으로 시작하지 않겠으며, 비록 경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으로 말하더라도 어찌 다시 한결같이 멀리 가서 나를 버리고 돌보지 않겠는가? 대질(大耋)이 건강한 것은 하늘이 군자를 돕는 까닭이다. 봄날이 점점 화창해지면 더욱 잠시 말을 달려 올 수 있을 것이니, 경은 초심(初心)을 돌려 날을 정하여 조정에 와서 내 기명(基命)013) 을 안정시키고, 내 전학(典學)014) 을 빛나게 하라. 이것이 내가 구구히 바라는 것이다."

하고, 송내희(宋來熙)에게 하유하기를,

"오직 그대는 대대로 벼슬한 집의 후손이며 선정(先正)의 적전(嫡傳)이다. 만약 내가 사랑하여 예우하는 것이 융숭하고 선인이 휴척(休戚)을 같이한 것을 생각하면, 훌쩍 조정에 와서 나의 어려움을 도울 것인데, 내가 사복(嗣服)한 초기에 몇 번이나 하유하여 불렀지만, 이 정성과 예가 성실하지 못하여 오히려 멀리 피하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운 줄 잘 알면서도 너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사업을 이어받았는데, 다행히 7년 동안 복림(覆臨)하신 자천(慈天)에 힘입어 팔짱을 낀 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동조(東朝)께서 염유(簾帷)를 이미 거두셨고 나도 지학(志學)의 나이가 되었으니, 만기를 친히 총괄해야 하는데, 보람은 더욱 아득하고 모든 일에 어려움이 많아서 정치는 기대에 맞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학업이 정밀하지 못한데 보도(輔導)할 사람이 없어서 장구(章句)를 훈고(訓詁)할 때에 조금도 돕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해 첫달에 단문(端門)015) 에서 시조(視朝)하는 것은 곧 뭇 신하를 맞이하여 자문하는 뜻인데, 바로 모름지기 홍유(鴻儒)·숙학(宿學)으로 마음에 터득하고 몸소 행하는 자를 좌우에 두고 계옥(啓沃)하고 개도(開導)하는 책임을 맡겨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급한 일인데, 그 사람을 구하려면 그대를 버려두고 누구를 찾겠는가? 지금 내 마음이 향하고 조야(朝野)에서 바라고 사림(士林)에서 본받는 것이 모두 다 그대에게 돌아가고, 또한 그대를 앞세우지 않는 이가 없는데, 그대는 평소 태산(泰山)·북두(北斗) 같은 덕망을 지니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려는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제 어찌하여 한결같이 돌보지 않고 오래 가서 돌아오지 아니함으로써 유현(儒賢)을 널리 불러 도움을 구하는 아름다운 일을 방해하는가? 내가 어려서 함께 할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새로 배우며 일취월장하는 데 있어서 지금 시기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여 즉일로 길을 떠나 와서 목마르듯이 어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고, 성근묵(成近默)에게 하유하기를,

"그대가 경연(經筵)에 뽑힌 지 이제 이미 오래 되었고, 내가 부지런히 예를 다해 부른 것도 이미 여러 번이었는데, 정성과 예우가 미진하여 멀리 은둔하려는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원망스럽고 부끄러운 나머지 매우 슬프다. 그대는 어느 집 사람인가? 대대로 시례(詩禮)를 일삼고 늘 경전(經傳)을 가까이 하여 사림(士林)에서 본받고 조야(朝野)에서 기대하니, 나도 어찌 목마를 때에 마시기를 바라듯이 반드시 오게 하고야 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새로 만기를 총괄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에 보도하고 계옥하는 직임에 그대처럼 숙덕(宿德)한 선비를 얻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전학(典學)의 공부를 성취할 것이며, 하고자 하는 정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건대, 우리 목릉(穆陵)016) 의 성시(盛時)에 그대 집안의 선정(先正)이 진실로 보필한 공로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눈과 귀에 드러나 있는데, 이것이 어찌 스스로 자신을 수양하고 굳게 사림(士林)을 지키며 나오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여긴 것이겠는가?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선정이 목릉을 섬긴 도리이다. 더구나 이제 새해 정월에 강연(講筵)을 열고 하늘에 계신 이를 대하는 아름다운 때에 내가 스스로 힘쓰려 하니, 이러한 때에 어진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가슴속에 갑절이나 더 절실하다. 그대는 은둔하려는 뜻을 힘써 돌이키고, 어진이를 머물게 하려는 정성에 부응하여 위로는 나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돕고, 아래로는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나의 간절한 희망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고, 김인근(金仁根)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새해 상순에 단문(端門)에서 시조(視朝)하여 뭇 신하에게 자문하고, 정치의 요체를 깊이 생각하건대, 대개 유교를 숭상하고 어진이를 예우하는 것보다 먼저 힘쓸 것이 없으므로, 내가 그대에게 전후에 돈면(敦勉)한 것도 이미 여러 번이었다. 미덕(美德)을 지니고서도 스스로 은둔을 달갑게 여기므로, 한갖 예를 다하여 부를 뿐 어진이를 머물러 있게 하기 어려우니, 진실로 내가 덕이 없고 정성이 얕아서 서로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나, 또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대는 충현(忠賢)의 세주(世胄)017) 로서 가정의 가르침에 물들었으니, 내가 미처 보지는 못하였으나 묻지 않아도 당세의 어진이임을 알 수 있다. 광필(匡弼)018) 하고 계옥(啓沃)하는 책임과 도(道)를 지키고 세상을 붙들어 세우는 공(功)은 오히려 임하(林下)의 어진이들에게 힘입는 것이 있으니, 그대가 오막살이·샘물가에 한가하게 은둔하려 하더라도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유술(儒術)을 두텁게 숭상하는 것은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서로 전수한 가법(家法)이다. 그대의 집안 선정(先正)이 명명(明命)019) 을 크게 도와 조야(朝野)에서 모범 삼고 사림에서 본받았으니, 내가 부르는 것은 곧 선왕의 예우이고 그대가 따르는 것은 곧 선정의 직분이다. 내가 어찌 백성을 편하게 한 선왕의 대신이 도모한 공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대도 어찌 감히 옛 선정이 끼친 공열(功烈)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더구나 자성(慈聖)의 정녕한 가르침이 학문에 부지런하고 어진이를 가까이 하라[勤學親賢]는 네 글자에 지나지 않으니, 부른 가운데에 들어 있는 자는 마땅히 와서 조석으로 가까이에서 나를 인도하여 큰 가르침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나깨나 마음속에 생각하여 반드시 조정에 나오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제 자전(慈殿)의 아름다움이 크게 드러나 팔방에서 두루 기뻐하는 것을 생각하면, 함께 경축하는 의리에 있어서 어찌 수레를 타거나 신 신을 겨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저 동강(東江)을 돌아보건대, 작은 배 하나로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몇 줄의 글을 내려 예물(禮物)을 갈음하니, 그대는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힘써 돌이켜 즉일로 돌아와 우리 성전(盛典)을 빛내고 나의 불선(不善)을 도와 내가 마음을 비우고 서서 어진이의 말을 들으려는 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8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註 013]
    기명(基命) : 임금이 처음 받은 하늘의 명.
  • [註 014]
    전학(典學) : 늘 학문에 힘씀.
  • [註 015]
    단문(端門) : 궁궐의 정문.
  • [註 016]
    목릉(穆陵) : 선조(宣祖)의 능호(陵號).
  • [註 017]
    세주(世胄) : 대대로 벼슬하는 집의 자손.
  • [註 018]
    광필(匡弼) : 임금을 바르게 도움.
  • [註 019]
    명명(明命) : 하늘이 내린 명.

○諭宋啓榦曰: "予聞周公之訓曰, ‘耉造德遲任之言曰, 「人惟求舊。」 此古昔盛際, 代天工而興化理者, 必於親賢敬老而先之者也。 卿以三朝禮遇之隆, 處一世師表之尊, 士林之所矜式, 朝野之所倚望, 垂四十有餘年于玆矣。 予自嗣服之初, 徯卿幡然朂予而迪予, 不啻若飢渴于中, 而誠禮淺薄, 嘉遯莫廻, 再三敦勉, 歸於應文備具而止, 可勝愧歎? 今玆晉擢, 非曰吾與爾縻之直, 由予小子尊賢衛道, 旁求仰助之義耳。 矧今簾儀誕撤, 萬務之繁, 在予眇躬, 顧以寡昧, 夙夜所以祗慄者, 曷敢不于前, 寧人圖功惟始, 而雖以卿愛君憂國之誠言之, 豈復一向邁往遐棄, 予莫之顧否? 大耋康强, 天所以佑君子也。 而春煦漸暢, 尤可以有間驅馳, 卿其勉回初心, 剋日造朝, 宥密我基命, 緝熙我典學, 是予區區之望也。" 諭宋來熙曰, "惟爾古家之世裔也, 先正之嫡傳也。 若念沖子眷禮之隆重, 前人休戚之與同, 則庶幾幡然簉朝, 弘濟我艱難, 而自予嗣服之初, 幾爾旌招之諭, 而奈此誠禮之未孚, 尙爾遐萉之莫回, 雖予之極知多愧, 而嗟爾之不能無慨也。 以予寡昧, 承祖宗艱大之業, 幸賴慈天之七年覆臨, 垂拱無爲。 今焉東朝之簾帷已撤, 而予亦係志學之年, 萬幾親摠, 而效愈邈, 庶績多艱, 而治不徯此, 專由於學業不精, 輔導無人, 章句訓詁之間, 無絲毫裨補之力。 故歲之首月之元, 端門視朝, 卽是延訪群臣之意, 而政須鴻儒, 宿學心得而躬行者, 置之左右, 委之以啓沃開導之責。 此爲今日急務, 苟求其人, 捨爾伊誰? 此時予心之所蘄向也, 朝野之所想望也, 士林之所矜式也, 擧皆以爾爲歸, 而亦莫不以爾爲先, 以爾平日山斗之望, 致澤之志, 今何一向邁邁, 長往不返, 以妨諸儒賢旁招求助之美事乎? 毋謂寡躬沖藐之無足與有爲, 亟念新學就將之迨此不可失, 卽日登塗, 以副側席如渴之思。" 諭成近默曰: "爾之膺經筵之選者, 今已久矣, 予之勤干旌之招者, 亦已屢矣。 誠禮未盡, 遐遯莫回, 悵愧之餘, 深庸慨然。 爾是誰家人也? 箕裘詩禮, 茶飯經傳, 士林之所矜式, 朝野之所想望, 予亦安得不如渴思飮, 必致乃已哉? 顧予寡昧, 新摠萬幾, 此時輔導啓沃之任, 不得如爾宿德之士, 則將何以致典學之工, 成從欲之治乎? 載念我穆陵盛際, 爾家先正, 實左右之至今赫赫人耳目, 是何曾自淑其身, 固守東岡, 以不出爲高也? 今予之所期於爾者, 卽先正之所以事穆陵也。 矧今三陽惟新, 講筵將開, 對天茂時, 予方自勉, 此際側席之心, 倍切于中。 爾其勉回考槃之志, 庸副縶駒之誠, 上以補予不逮, 下以趾厥先美, 毋孤予凝企之望焉。" 諭金仁根曰: "粤予歲之首, 維月上旬, 端門視朝, 咨訪群工, 深惟爲治之要, 蓋莫先於崇儒禮賢, 予於爾前後敦勉, 亦旣屢矣。 握瑜懷瑾, 自甘永矢, 引旌徒勤, 皎駒難縶, 亶由予涼德淺誠, 不足相孚, 而亦不能不爲爾惜之。 爾以忠賢世冑, 擩染庭訓, 予雖未及見爾, 不問可知爲當世賢者。 匡弼啓沃之責, 衛道扶世之功, 尙有賴於林下諸賢, 爾雖欲肥遯於衡泌之間, 其可得乎? 噫! 惇尙儒術, 卽我列聖朝相傳之家法也。 爾家先正, 洪贊明命, 朝野爲之型範, 士林爲之矜式, 予所召, 卽先王之禮也, 爾所膺, 卽先正之職也。 予曷其不于前, 寧人圖功攸行, 爾亦曷敢不于昔先正遺烈是則也? 又況慈聖之丁寧詔敎, 不越乎勤學親賢四箇字, 在於招延之列者, 宜于于然來爾, 尙朝夕左右, 迪予一人, 用答揚光訓。 此所以寤寐翹想, 必欲致之朝端者也。 顧今慈徽丕闡, 八方普歡, 其在同慶之義, 寧容駕屨之俟? 眷彼東江, 一葦可杭。 玆宣數行, 用替戔帛, 爾其勉回遐心, 卽日幡然, 賁我盛典, 輔予不穀, 以副虛佇企凝之望。"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83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