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제의 설행과 아전의 포흠에 대해 하교하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下敎)하기를,
"오늘 차대(次對)에 나오게 정한 것은 혹심한 가뭄 때문이다. 간혹 한두 차례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으나, 이것으로는 밭을 갈거나 김을 맬 수는 없을 것이다. 봄 보리는 처음에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하였는데, 가뭄이 한결같이 이와 같으니 비록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든 나머지라 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기 어려울 것인데, 날마다 비가 오기를 기다려도 아직 한 번도 흡족하게 내리지 않고 있다. 하지(夏至)도 멀지 않았으니, 길일(吉日)을 가리지 말고 속히 기우제(祈雨祭)를 설행(設行)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하지(夏至) 전에 특별히 규벽(圭璧)을 바쳐 제사지내는 것이 이미 그 전례(前例)가 많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환곡(還穀)의 포흠(逋欠)이 쌓인 폐단이 과연 백성들에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러한가? 아니면 또는 이미 받아들였는데도 혹은 아전의 무리에게 사취(詐取)를 당해서 그러한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봄 사이에 조곡(糶穀)을 받은 백성이 가을에 바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간혹 큰 흉년이 든 해에 가끔 유리(流離)하여 사망하는 가호(家戶)가 있으면, 또 동리(洞里)에서 징수(徵收)하는 것도 있어서 민간(民間)에서 진정 포흠을 내는 경우는 본래 아주 적습니다. 이른바 민간의 포흠은 대부분 아전의 포흠을 문부(文簿)에 농간을 부려 마침내 백성의 이름으로 돌린 것입니다. 가령 백성에게 3분을 받지 않았으면, 그 2분은 틀림없이 아전의 무리가 간계(奸計)를 부린 것입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아전의 포흠은 오로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을 감독하고 신칙하는 것은 오로지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감사는 반드시 출척(黜陟)을 엄정하고 명백하게 하여 잘하는 자는 포장(褒奬)하고 잘못하는 자는 물리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침내 백성이 그 폐해(弊害)를 받고 죄는 수령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민생(民生)만 진실로 불쌍하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수령은 죄를 논하여 감단(勘斷)한 후 정배(定配)하였을 경우 죄를 받은 지 얼마 안되어 곧 용서받아 돌아오므로, 더욱 두려워하여 꺼리는 바가 없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비록 패택(霈澤)이 있는 뒤라 하더라도 옥수(獄囚) 가운데 죄가 가벼운데도 미처 석방되지 않은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이 또한 화기(和氣)를 범하여 재이(災異)를 불러들이는 하나의 단서(端緖)가 된다.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이미 경연(經筵)에 나와 있으니, 이 전교(傳敎)를 자세히 들은 후 대신(大臣)과 같이 상확(商確)하여 반드시 정밀하게 살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박종훈이 말하기를,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본래 수시로 있는 바이나, 오직 백성이 곤궁(困窮)하지 않고 나라에 저축(儲蓄)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유비 무환(有備無患)이 될 수 있는 것인데,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마른 것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습니다. 성인(聖人)의 말씀에, ‘반드시 용도(用度)를 절약하고 사람을 애휼(愛恤)하는 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옛날에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일찍이 교외(郊外)에 거둥하셨을 때 낮수라를 올리고 상을 물리기에 미쳐 의빈(儀賓)에게 내리셨는데, 단지 물에 말은 밥 한 그릇, 건어(乾魚) 5, 6미(尾) 및 초간장에 절인 채소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데 풍속(風俗)이 어찌 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재용(財用)이 어찌 넉넉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대저 재물(財物)이란 본래 두 개의 근원(根源)이 없고 탕장(帑藏)·부고(府庫)가 모두 민력(民力)에서 나오니, 이제 검소(儉素)함을 숭상하고 용도(用度)를 절약하는 것으로써 재해(災害)를 그치게 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비록 실정과는 먼 듯하나 위로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고 아래로 민생(民生)을 안정시키는 바가 진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부마(駙馬)를 간택(揀擇)하라는 명(命)이 있었으므로, 길례(吉禮)가 마땅히 머지 않아서 있을 것이니, 사치함을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셔서 몸소 행하시어 풍속(風俗)을 인도하심이 바로 이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아뢴 바가 모두 지극히 합당하다. 마땅히 명심(銘心)해서 잊지 않고 지키겠다. 대신(大臣)은 감독하고 인도하는 지위에 있으니, 서로 면려(勉勵)하여 사치하는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51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科學)
○上御熙政堂, 引見大臣備局堂上。 大王大妃敎曰: "今日次對之進定, 以亢旱之故也。 間或有二三次驟雨, 而此不可以鋤犂論。 春牟則初云稍登矣, 旱氣一直如此, 雖屢豐之餘, 猶難救濟, 而日日望霓, 尙靳一霈。 夏至且不遠, 祈雨祭不卜日設行可乎?" 右議政朴宗薰曰: "夏至前特擧圭璧, 已多其例矣。" 大王大妃敎曰: "還逋積(弊)〔弊〕 , 果以未捧於民而然耶? 抑亦已捧而或爲乾沒於吏輩而然耶?" 宗薰曰: "春間受糶之民, 秋無不納之理。 間或大歉之歲, 往往有流離死亡之戶, 則又有洞里之徵, 民間之眞箇逋欠者, 本自絶少。 所謂民逋, 擧皆吏逋之舞弄文簿, 畢竟歸之民名。 假使民未捧三分, 則其二分, 必是吏輩之奸也。" 大王大妃敎曰: "吏逋專在於守令, 而董飭守令, 惟在監司, 必須嚴明黜陟, 褒其善而黜其不善可也。 而不此之爲, 則畢竟民受其害, 而罪不歸於守令, 民生誠可矜矣。" 又敎曰: "守令之論勘定配者, 被罪未幾而旋卽宥還, 故尤無所畏憚矣。" 又敎曰: "雖霈澤之後, 獄囚之中, 若有罪輕未放者, 則此亦爲干和召災之一端矣。 刑判旣登筵, 詳聽此傳敎後, 大臣同爲商確, 必須精審可也。" 宗薰曰: "水旱固所時行, 唯民不困窮, 國有儲蓄然後, 方可以有備無虞, 而民窮財竭, 未有甚於此時, 聖人之言, ‘必以節用愛人, 爲治國之本。’ 昔我宣廟, 嘗於郊幸, 進午膳, 及撤, 賜諸儀賓, 只水澆飯一器, 乾魚五六尾及醋醬淹菜而已。 若是而風俗安得不厚, 財用安得不裕乎? 夫財者, 本無二源, 帑藏府庫, 均出於民力, 今以崇儉節用, 爲弭災之方, 雖似迃遠, 然其所以上悅天心, 下奠民生, 亶不外此矣。 又伏念駙馬揀擇有命, 吉禮當在不遠, 祛奢從儉, 躬行導俗, 正在於是矣。" 大王大妃敎曰: "所奏儘至當矣。 當銘念服膺矣。 大臣在董率之地, 交相勉勵, 以變侈風, 是所望也。"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5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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