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규가 이병영의 복식 개혁에 반대하여 전례에 따르기를 건의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심상규(沈象奎)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 지평 이병영(李秉瑩)이 상소로 인하여 청한, 복식(服飾)을 개혁하여 번다한 조문을 삭제하자는 건을 가지고 원임 대신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토론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의 의복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철릭[帖裏]입니다. 그것은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연이어 꿰매어 만든 것으로 소매가 팔꿈치를 돌릴 수 있는데, 대개 심의(深衣)를 입고 전쟁에 나가는 뜻이 있기 때문에 융복(戎服)이라고 이릅니다. 옛날에는 모포(帽袍) 속에 입었기 때문에 또 첩리(帖裏)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에다 도포(道袍)를 입으면 조회에 나아갈 수 있고, 도포를 벗으면 군대에 나아갈 수 있으니,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간소(簡素)하고도 편리한 것은 고제(古制)가 그러합니다. 선조(先朝) 계축년019) 하교(下敎)를 상고해 보면, 입(笠)과 철릭을 함흥(咸興)의 본궁(本宮)에 받들어 모셔 융복의 버릴 수 없다는 증거를 삼았으니, 이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의수(衣袖)020) 의 옛것은 겨우 팔을 돌릴 만하던 것이 지금은 거의 넓고 드리워져 끌고 다니게 되었으며, 옛날의 입첨(笠簷)은 겨우 어깨를 덮을 만하던 것이 지금은 또 넓어서 반좌(盤坐)를 지나쳤으니, 족히 미관(美觀)이라고 할 것이 없고 사용하기에도 적당치 않으므로 개탄스럽고 의아스럽습니다. 그 넓은 것은 모두 사치와 허비에 속하는 것이니, 지금 정말 구제(舊制)를 준행하고 이미 익숙해진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폐단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융복이 있는데다가 또 군복이 있으니, 군(軍)과 융(戎)이 무엇이 다르기에 복장이 이렇게 다릅니까? 이것이 사치와 허비가 되는 것이므로 그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할 경우 군복의 사치와 허비는 융복보다 여러 곱절이 될 뿐만이 아니니, 차라리 군복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또 갑자기 의논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대개 군복은 개주(介胄)021) 의 속옷이니 융복의 모포(帽袍)의 속옷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각영(各營)의 군졸(軍卒)은 모두 군복을 착용하고 각사(各司)의 조례(皁隷)는 모두 철릭을 착용하니, 곧 각각 그 장령(將領)과 관원(官員)의 상복(常服)하는 바에 따라 그러한 것입니다. 장신(將臣)과 직책을 가진 무변(武弁)의 공복(公服) 아래에 지금도 모두 군복을 입는데, 문관(文官)과 음관(蔭官)은 철릭이 지금은 창의(氅衣)로 변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이미 변한 것을 다시 변경시켜 도리어 번폐(煩弊)스러움을 자아낼 필요가 없겠지마는, 구법(舊法)이 아직 존속되고 있는데, 또 무엇 때문에 폐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군복도 갑자기 없애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선조(先朝)께서 화성(華城)에 거둥하실 때는 군복을 참용(參用)하셨으니, 성의(聖意)의 재결(裁決)하시는 데에 어찌 권도(權度)가 없으시겠습니까? 다만 표기(標旗)와 내호가(內扈駕)의 여러 신하들은 군복(軍服) 차림으로 수행하였고, 각관(各官)은 모두 융복으로 한결같이 다른 거둥 때와 같이 했습니다. 신(臣)의 우천(愚淺)한 생각에는 이 뒤에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하실 때에도 마땅히 능원(陵園) 거둥의 의절을 써야 하겠습니다. 대개 참용은 영구(永久)한 제도가 아니요, 상의(常儀)는 옛 전례(典禮)를 따르는 것이 귀중한 바이니, 일찍부터 마음에 잊지 않던 바이므로, 감히 이렇게 사단으로 인하여 아울러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거둥의 의절에 관계되어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원임 대신, 예조 당상, 관각 당상(館閣堂上) 및 여러 비국 당상에게 하문하시어 지당(至當)한 데에 돌아가도록 힘쓰시면 그지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입(笠)에다 반드시 붉은 말갈기 털을 맺어서 만든 것은, 비용이 많은 것이 걱정될 뿐만 아니라 꾸미는 일이 쓸데없이 번거롭고 더욱이 바람을 받기에 괴로우니, 이로써 미관(美觀)을 삼는다는 것은 어이없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입은 말갈기를 쓰지 말고 꾸미는 것도 작우(雀羽)·방우(傍羽)·영우(嶺羽)와 같은 형식도 또한 버려야 합니다. 능행(陵行)의 의주(儀註)에 파재(罷齋)022) 하고 환궁(還宮)할 때에 비록 삽우(揷羽)의 조문이 있기는 하나, 이는 예절(禮節)에 족히 관계된 것이 없습니다. 성내(城內)의 전좌(殿坐)는 모두 재일(齋日)이 아니요, 묘궁(廟宮)에 향알(享謁)하고 환궁할 때에 비록 이미 파재하였더라도 시위(侍衛)들은 삽우하지 아니했는데, 어찌 교외(郊外)에만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삽우의 한 절차는 의주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까 합니다. 다만 호랑이 수염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시위로서 융복한 자는 입(笠)에 반드시 꽂았고 또 객사(客使)가 왔을 때 일찍이 모두 이러한 장식을 한 것을 보았는데, 지금 갑자기 제거한다면 혹 그전의 의절보다 생략한 것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존속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이밖에 전에 아뢴 근일에 조정의 의절로 강구(講究)한 중에 변통하여 정리해야 할 것들을 특별히 일통(一通)의 절목(節目)을 만들어 계하(啓下)하여 준행(遵行)할 자료로 삼게 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國家)가 안전을 유지하여 세도(世道)를 편케 하고 민지(民志)를 하나로 하는 것은 ‘의리를 밝힌다[明義理]’는 세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故) 중신(重臣) 조득영(趙得永)의 병인년 상소는 지조가 엄정(嚴正)하고 수립(樹立)이 탁월하여 혼자 소장(消長)의 기미를 예견하고 힘써 충역(忠逆)의 구분을 분변함으로써, 우리 선왕(先王)의 정미(精微)한 의리를 밝히고 우리 전하의 계술(繼述)한 의리를 밝히어 효연(曉然)히 일세(一世)에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서로 면려(勉勵)하여 잠시도 소홀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잊지 않은 것을 가상히 여기고 천명한 것을 지키는 도리는 또한 이 중신을 포상하는 것뿐입니다. 또 그가 만년(晩年)에 자정(自靖)한 것도 족히 풍교(風敎)에 도움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고 이조 판서 조득영의 시호를 빨리 의논할 것을 명하여 이전(彛典)을 밝힘이 마땅하겠습니다. 전에도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혹 특별한 하교로 인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린 예(例)가 있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0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019]계축년 : 1793 정조 17년.
- [註 020]
○甲子/次對。 左議政沈象奎啓言: "頃因前持平李秉瑩上疏, 其所請服飾之另行更張, 刪去繁文者, 往復停當于原任大臣矣。 我東衣章, 其制之最古者, 帖裏是已。 上衣下裳, 連綴成之, 袂可回肘, 蓋有深衣卽戎之義焉, 故謂之戎服。 而古則服之於帽袍之裏, 故又謂之帖裏, 加袍以趨朝, 去袍而卽戎, 安不忘危, 簡而且便, 古制爲然。 若稽先朝癸丑下敎, 以笠與帖裏之藏奉於咸興本宮, 爲戎服不可祛之證, 此無容更議。 而若其衣袖之舊僅回肘者, 今幾闊垂曳步矣, 笠簷之舊纔覆肩者, 今且廣過盤坐矣, 無足爲美觀, 而不適於便用, 誠可慨訝。 其闊其廣, 皆屬侈費。 今誠遵舊制, 而無循已習之俗。 斯可以祛其弊矣。 若以旣有戎服, 而又有軍服軍戎何別, 而服有此異? 此爲侈費, 宜去其一云爾, 則軍服之侈費, 不啻倍蓰於戎服, 此寧可袪。 而第亦有不可遽議者, 蓋軍服, 卽介冑之裏衣, 如戎服之爲帽袍之裏衣也。 各營軍卒, 皆着軍服, 各司皂隷, 皆着帖裏, 卽各從其將領官員之所常服而然也。 將臣與有職武弁公服之下, 今亦皆着軍服, 而文蔭官則帖裏, 今變爲氅衣。 今雖不必更變其已變者, 反滋煩弊, 而其舊法之尙存者, 又何可廢之乎? 然則軍服亦不可輒除也。 第伏念先朝惟華城幸行, 參用軍服, 聖意所裁, 豈無權度? 而亦只標旗, 以內扈駕諸臣, 具軍服陪從, 各官則皆戎服, 一如他幸行時。 臣之愚淺, 竊以爲今後健陵、顯隆園幸行時, 亦當用陵園幸行常儀。 蓋以參用, 非爲永制常儀, 所貴率由也, 嘗所耿耿, 敢此因端竝陳。 而係是動駕儀節, 事極重大, 下詢原任大臣禮堂館閣堂上及諸備堂, 務爲至當之歸, 不勝幸望。 至如笠之必以紫鬃結造者, 不但患其費多, 飾之繁冗, 尤苦受風, 以此爲美, 無謂莫甚。 笠不用鬃結, 飾亦去其彌文, 如雀羽、傍羽、嶺羽。 陵幸儀註罷齋還宮時, 雖有揷羽之文, 此未足有關禮節。 城內殿座, 皆非齋日, 廟宮享謁還宮, 雖已罷齋侍衛, 亦未嘗揷羽, 則何獨於郊外, 必如此哉? 然則揷羽一節, 不爲磨鍊於儀註, 恐無不可。 但虎鬚不知用自何時, 而侍衛之戎服者, 笠必揷之, 且客使之來, 曾皆見此飾, 而今忽除去, 則無或視以簡省於前儀乎? 以此以彼, 存之爲可。 外此前奏所云, 近日朝儀之所講究, 合當變通釐正者, 另成一通節目, 以爲啓下遵行之地。" 從之。 又啓言: "自古國家所以維持全安, 靖世道而壹民志者, 不過曰‘明義理’ 三字而已。 有若故重臣趙得永丙寅一疏, 秉執嚴正, 樹立卓絶, 獨炳消長之幾, 力辨忠逆之分, 以明我先王精微之義理, 以明我殿下繼述之義理, 得以曉然著明於一世, 此正君臣上下交相勉勵, 不容暫忽者也。 然則爲今日嘉乃不忘, 保守闡明之道, 亦惟褒嘉此重臣。 而且其晩年自靖, 亦足以有裨風敎。 臣謂故吏曹判書趙得永, 亟命議謚, 以昭彝典爲宜。 在前如此之人, 或有因特敎不待諡狀之例矣。" 從之。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40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