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철이 검소함을 숭상하는 일에 대해 상소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세손궁(世孫宮)의 빈사(賓師)와의 상견례(相見禮)와 서연(書筵)의 개강 길일을 이미 택정하였는데, 이는 바로 제왕(帝王)의 학문을 하는 시초이자 만세 태평의 기초인 것으로 대소 신민이 환희하고 경축할 일입니다. 신이 지난 번 전석(前席)에서 ‘강독(講讀)을 형식으로 하지 말고 또한 간단(間斷)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앙청하였고, 끝에 가서 ‘일찍부터 가르치고 어진 사대부와 가까이 지낼 때가 많아야 한다[早諭敎親賢士大夫時多].’는 열 글자를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어리석은 소견에 간절하여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사온데 하우(夏禹)의 거친 음식을 먹고 허름한 의복을 입은 것은 비단 백성을 위해서 자봉(自奉)에 박하였던 것만이 아니라, 겸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후세에 끼쳐 주고 영년(永年)을 비는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고, 성왕(成王)075) 은 태자로 있을 때에 정인(正人)과 교유(交遊)하여 문견(聞見)에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혈기가 정해진 뒤에 비록 방심(放心)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한번 이루어진 성품은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니, 옛날의 성왕(聖王)은 덕을 닦아 후손에게 끼쳐 줌에 있어서 검소함을 선무(先務)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또 멀리 요(堯)·순(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가까이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만 같음이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게도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는 나라를 누리시기 50년에 검덕(儉德)은 더할 나위 없으시어 입고 계신 의대(衣襨)는 때가 항상 끼어 있었고 더러는 낡았어도 바꾸어 입지 않으신 일도 있었으며, 상서(上書)의 낭(囊)으로 종이 휘장[紙幃]을 만들었습니다. 거실(居室)이 협소하므로 중문의 판[板扉]를 토계(土階)위에다 놓아 퇴청(退廳)을 삼고 새로 짓지 않았으며, 혹 수라[水剌]를 올릴 때를 당하면 소관사(所管司)에 식칙하여 그릇 수를 줄이도록 하시고 높이 괴어 올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연신(筵臣) 중에 찬수(饌需)가 너무 간략하다고 말한 사람이 있자, 하교하기를, 경 등은 이것을 보고 적다고 하는가? 나는 양덕(涼德)으로서 매양 밥상을 푸짐하게 대하면서 국기(國忌)의 판게(板揭)를 등 뒤에 모신 것을 바라보게 되면 척강(陟降)하시는 영령이 굽어보시는 것과 같아 태강(太康)076) 을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신은 젊고 미천할 때에 여러 어른들에게 들은 바가 아직도 귀에 익어 흠탄해 마지않습니다. 또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도 검덕이 전후로 마찬가지이셨으나 경술년077) 이후로는 더욱 이 일에 마음을 쓰셨는데, 하루는 여러 신하를 불러 찬수를 내리시면서 하교하시기를, ‘나는 본성이 사치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려니와 지금은 원자의 옷자락이 점점 커 가니, 일동 일정(一動一靜)에 모두 나를 보고 본받을 것이므로 내가 근년에는 많이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고 음식도 극히 간략하게 하며, 그릇도 꽃을 그려 넣은 상품은 쓰지 않고 분원(分院)078) 의 보통 그릇을 써서 일에 따라 복을 아끼는 도리를 실행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또 6월의 경신(慶辰)에 비단 신[鞋]을 바친 사람이 있자, 하교하시기를, ‘신이란 발에 꿰는 것인데 어찌 비단으로 하겠는가? 빨리 물리쳐 원자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라.’ 하셨으며, 글씨를 배울 때에 근시(近侍)가 새 붓과 채간지(彩簡紙)를 올리니, 하교하시기를, ‘이 채간과 붓은 너무 좋으니 독필(禿筆)과 휴지(休紙)로 바꾸어 오라.’ 하셨는데, 이는 신이 그때에 근시의 반열에 있으면서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 국조(國朝) 4백 년 동안 여러 성왕(聖王)이 이어오면서 이룩한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은 사기(史記)에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나, 무엇보다도 이 검소함으로 가법(家法)을 삼으셨습니다. 양성(兩聖)의 고사(故事)는 또 모든 이목(耳目)이 보고 들어 상세히 아는 바이기에, 고로(故老)들에게 들은 것과 신이 목격한 바로써 거듭되고 번거로움을 피치 않고 이토록 되뇌어 아뢰는 바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궁위(宮闈)에 한가히 계실 때에 몸으로 가르치시고 사물에 따라 가르치도록 힘쓰소서. 강학(講學)의 방향은 성현(聖賢)을 높이고 사보(師保)를 어렵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거처는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선유(善柔)와 편영(便佞)을 멀리 하도록 하며, 의복 음식 기용(器用)의 조금이라도 화사(華奢)에 간섭되는 것은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하여 자연히 습관과 천성이 한데 어울리게 하시면, 마침내는 성역(聖域)에 이르고 수(壽)와 복록이 끝이 없게 되어, 하늘에 영명(永命)을 비는 근본이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바는 모두 충애(忠愛)에서 나온 것이지만 특히 검소함을 숭상하는 일은 더욱 정심(正心)을 기르고 복을 아끼는 도리이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에는 유현(儒賢) 중에서 시임 찬선(贊善) 이외에 품계가 상등(相等)하여 그 직을 맡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자리를 가설(加設)하여 단망 부직(單望付職)한 전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현존 유신(儒臣)으로 송치규(宋稚圭)는 시임 찬선이나, 송계간(宋啓榦)·오희상(吳熙常)은 전례대로 나란히 단망 부직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8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 [註 075]성왕(成王) : 주 무왕(周王武)의 아들.
- [註 076]
태강(太康) : 너무 지나치게 즐겨 한다는 뜻이니, 《시경(詩經)》 당풍(唐風) 실송장(蟋蟀章)에 너무 "즐겨만 말고[無己大康]."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註)에 대(大)는 태(太)라고 나와 있음.- [註 077]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註 078]
분원(分院) : 사옹원(司饔院)의 사기 그릇을 만드는 일을 맡은 적소로, 경기 광주군(廣州郡)에 설치하였는데, 뒤에는 분주원(分廚院)이라 불렀음.○戊午/次對。 領議政南公轍啓言: "世孫宮賓師相見之禮, 書筵開講吉日, 已涓, 此乃帝王學問之始, 太平萬世之基也, 大小臣民, 歡忭慶祝。 臣於向日前席, 以 ‘講讀不以文具, 亦勿間斷’ 爲請, 而末乃以 ‘早諭敎親賢士大夫時多’ 十字獻之矣。 今又有愚衷之惓惓而不能自已者, 夏禹之菲飮食惡衣服, 不但爲民而薄於奉, 兼以此爲貽後祈永之本, 成王之爲太子正人與遊, 聞見無淫艶奢侈之事, 故血氣旣定, 雖有放心, 不能奪已成之性, 古之聖王, 修德貽燕, 莫不以儉爲先。 且欲遠法堯、舜, 莫如近法祖宗。 猗歟我英宗大王, 厥享國五十年, 儉德尤無間然, 所御衣襨, 塵垢常滿, 又或有弊而不改者, 以上書之囊爲紙幃。 居室狹陋, 取中門板扉, 置土階上爲退廳而不許新造, 或當進饌, 飭所司器數, 務令減少, 不許高排。 筵臣有以饌品太略爲言者, 敎曰: ‘卿等以此爲小乎? 予以涼德, 每對饌卓之豐盛, 而瞻望國忌板揭, 奉於背後, 則陟降如臨視, 有太康之戒心。’ 臣自少賤時, 得聞於諸長老, 尙今耳熟而欽歎者也。 亦粤我先大王儉德, 前後一揆, 而庚戌以後, 尤致意於此, 一日召諸臣賜饌, 下敎若曰: ‘予素性不喜奢華, 而顧今元子衣尺漸長, 一動一靜, 皆視予爲法, 故予於近年, 多以綿布爲衣袴, 飮食極其薄陋, 而器皿不用彩花甲燔, 用分院常器, 以爲隨事惜福之道。’ 又於六月, 慶辰, 有以緞鞋進者, 敎曰: ‘履, 所以掛於足者, 豈可以緞爲之? 亟屛去, 勿令元子見之’, 習字之時, 近侍以新筆彩簡進, 敎以 ‘此簡筆太好, 其易以禿毫休紙’, 此則臣於其時, 得備近列, 親見盛事者也。 國朝四百年累聖相承, 盛德大業, 史不勝書, 而尤以儉爲家法。 兩聖朝故事, 則又以耳目之所逮而詳焉, 故得聞於故老者, 親見於吾身者, 不嫌煩複, 而有此誦陳。 伏願殿下, 常於宮闈燕閒之際, 以身敎之, 遇物誨之。 講學則尊聖賢而嚴師保, 居處則親正直而遠柔侫, 凡衣服飮食器用之少涉華靡者, 勿令近前, 自然習與性成, 終至聖域, 壽祿無疆, 而祈天永命之本, 亶在於此矣。" 敎曰: "所陳認出於忠愛, 而崇儉一事, 尤爲養正惜福之道, 當十分體念矣。" 又啓言: "在前儒賢中, 時帶贊善者外, 如有當品應爲之人, 則加設單付, 多有已例。 見今儒臣宋稚圭, 時帶贊善, 宋啓榦、吳熙常, 亦宜依已例一體單付。" 從之。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8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 [註 0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