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교의 졸기
의정부 우의정 김이교(金履喬)가 졸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밤에 어의(御醫)가 돌아오는 편에 증세가 위중함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만에 하나 다행하기만을 바랐는데, 지금 서단(逝單)을 대하니 통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 대신의 공경스럽고 돈후(敦厚)함과 충신(忠信)스럽고 질직(質直)함은 고인(古人)에게 비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뿐 아니라, 성실함은 족히 사람을 움직일 만하고 행의(行誼)는 풍속을 바루기에 넉넉하였다. 더욱이 평일 조집(操執)의 엄정함은 다만 나라만 알았고 안위(安危)에 처신한 절목은 종시토록 변함이 없었으니, 몇 조정을 손꼽아보아도 실로 짝이 될 만한 이가 드물었다. 내가 전후로 마음을 쏟고 의지한 것은 이 점을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끝이 났으니 거듭 슬퍼서 어쩌지 못하겠다. 작고한 우의정 김이교 집의 예장(禮葬) 등절(等節)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대로 거행하게 하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서 치제(致祭)하며, 녹봉(菉俸)은 3년을 한하여 보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김이교는 안동인(安東人)이니,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粲)의 손자이다. 우아하여 문학이 있고 돈후하여 외화(外華)를 몰라, 당시에 덕도(德度)로 추중되었고 뒤에는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정승이 되어서는 별로 해놓은 일이 없으니, 대체로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381면
- 【분류】인물(人物)
○甲戌/議政府右議政金履喬卒。 敎曰: "夜因御醫之回, 雖知症勢之危重, 尙冀萬一之幸, 今見逝單, 不勝痛惜。 此大臣之愷悌敦厚, 忠信質直, 求諸古人, 不惟無愧, 誠款足以動人, 行誼優於矯俗。 而況其平日秉執之嚴, 只知有國, 夷險一節, 終始不渝, 歷數朝廷, 實罕其倫。 予之前後眷注而倚毗者, 亦賴於此, 今焉已矣, 重爲之傷衋, 不能己已。 卒右議政金履喬家禮葬等節, 令該曹, 依例擧行, 成服日, 遣承旨致祭, 祿俸限三年輸送。" 履喬, 安東人, 忠正公 時粲孫也。 雅有文學, 敦厚無華, 時以德度推之, 後配廟庭。 然其拜相, 無施措, 蓋才不逮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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