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순의 졸기
영돈녕부사 김조순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애통하고 애통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028) 에 영고(寧考)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라고 하셨는데, 어제의 일과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보위(寶位)에 오른 지 30여 년 동안 보필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던 것은 왕실의 가까운 척친(戚親)이었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오직 그는 부지런하고 충정(忠貞)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하여, 안으로는 지극한 정성으로 힘을 다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리어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였으니, 국가가 오늘날이 있도록 보존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겠는가? 참으로 선왕(先王)께서 부탁하여 맡기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않은 소치(所致)인데, 이제는 끝났다. 내가 애통해 하는 것 이외에 나라의 일을 장차 어디에 의뢰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물을 건너는데 노[楫]를 잃은 듯하다. 졸한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029) 한 벌을 실어 보내고 승지를 보내어 고독함을 구휼하게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역명(易名)030) 의 전례(典禮)를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하게 하며, 녹봉(菉俸)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보내고 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각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 척분(戚分)으로는 비록 장인과 사위 사이이지만 정의(情義)로는 사보(師輔)를 겸하였다. 어제 한번 상면하고서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비통한 생각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성복하는 날에는 창경궁(昌慶宮)의 금천교(禁川橋)에서 마땅히 망곡(望哭)하여 한번 애통한 회포를 펼 것이니, 해방(該房)에서는 자세히 알기 바란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졸한 영안 부원군 집에 원부의(原賻儀) 이외에 단속(緞屬) 10단(端)과 포목(布木) 각 1동(同), 돈 1천 냥, 쌀 50석, 전칠(全漆) 1두(斗)를 별도로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성복하는 날에는 제문(祭文)을 마땅히 손수 지어서 내릴 것이다."
하였다.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 왕비(明敬王妃)031) 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 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 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032) 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 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 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德)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正宗]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37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註 028]경신년 : 1800 정조 24년.
- [註 029]
동원 부기(東園副器) : 동원은 한(漢)나라 때 관곽(棺槨)을 제조·관리하던 관서로, 궁중의 소용되는 관곽, 곧 동원 비기(東院秘器)를 만들고 남은 판재(板材)를 이름.- [註 030]
○己卯/領敦寧府事金祖淳卒。 敎曰: "慟矣慟矣! 此何事也? 記昔庚申, 寧考執予小子手而詔之曰: ‘今予以爾托于此臣, 此臣必不以非道輔爾。 爾其識之’, 事如昨日, 言猶在耳。 逮嗣服三十餘年之間, 托之心膂者, 非但以肺腑故也。 惟其勤勞忠貞, 一心王室, 內而至誠竭力, 輔予以正, 外而彌綸鎭安, 弘濟時艱, 國家之保有今日伊誰之力? 眞不負先王寄托之聖意, 而今焉已矣。 予之慟衋之外, 國事將何賴焉? 念及於此, 若濟失楫。 卒永安府院君家, 東園副器一部輸送, 遣承旨恤孤。 成服日, 遣承旨致祭, 易名之典, 令太常, 不待狀卽爲擧行, 祿俸限三年仍送, 禮葬等節, 令各該司, 依例擧行。" 又敎曰: "嗚呼! 分雖舅甥, 情兼師輔。 昨日一面, 遽成永訣, 悲悼之懷, 曷有已也? 成服日, 於昌慶宮 禁川橋, 當望哭, 以伸一哀。 該房知悉。" 又敎曰: "卒永安府院君家, 原賻儀外, 緞屬十端, 布木各一同, 錢一千兩, 米五十石, 全漆一斗, 別爲輸送。" 又敎曰: "成服日, 祭文當親撰以下矣。" 祖淳, 忠獻公 昌集玄孫, 而明敬王妃之父也。 容儀秀美, 器識宏達, 自少已卓然自拔於流俗之外, 弱冠登第, 久處邇列, 以公直無隱, 受正廟深知, 特以他日輔幼之責托之。 及妃膺再揀, 而正廟禮陟, 貞純大妃, 因先王遺意, 擢授戎垣, 時世道艱危, 不爲之撓, 及大婚成, 上遂虛已任之。 祖淳旣處肺腑, 內贊密勿, 外任彌綸, 殫誠竭忠, 身佩安危者, 三十餘年, 惟以保護聖躬, 成就君德, 持守精義, 扶植善類, 爲一副追報之道, 用能篤棐我郅隆之治。 於是朝野翕然, 謂 ‘君子之茂德焉’, 文章之高世餘事耳。 然素性過於仁厚, 篤好人倫, 故其流也或至於泛博, 又謹愼之至, 事多循常, 蓋不以功業自居也。 後因廷議, 追配正宗廟庭。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37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註 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