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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27권, 순조 25년 7월 18일 계묘 2번째기사 1825년 청 도광(道光) 5년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을 묘정에서 출향토록 하라는 정언 김수만의 상소문

정언 김수만(金秀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온릉(溫陵)018) 의 당일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저 박원종(朴元宗) 등 세 훈신(勳臣)도 역시 인신(人臣)인데, 성조(聖祖)019) 께서 용비(龍飛)하시던 날에 저절로 이루어진 일을 자신의 공으로 삼고 오직 자신들의 모책이라 하여 마침내는 폐출(廢黜)한 후에야 그만두었으니, 그 죄가 위로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다만 한때의 미미한 공훈 때문에 전형(典刑)을 가하지 않고 집안에서 편안히 누워 죽은 지 이제 3백여 년이 되었으니, 유식한 자들이 못내 탄식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성후(聖后)로 예부(禮祔)한 후, 저 세 신하인 자들이 아직껏 묘정(廟庭)에서 배식(配食)하고 있으니, 아! 하늘에 계신 성후의 영혼이 과연 기뻐하면서 향기로운 제향을 받겠습니까? 신의 선조(先祖) 신(臣)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을해년020) 에 한 상소가 끝내 당세에 펴지지 못했었는데, 다행히 두 성조(聖朝)에 힘입어 미처 하지 못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신의 선조의 이루지 못했던 뜻도 역시 따라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세 신하의 종향(從享)을 내치지 못했으니, 윤상(倫常)이 바로됨에 미진함이 있고 신의 선조의 평일 논의가 다 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선조(先朝) 기미년021) 에 신의 선조의 사손(嗣孫)인 전 참봉 신 김성태(金聖泰)가 유지(遺志)를 추술(追述)하여 무릅쓰고 한 상소를 올리자 즉시 따뜻한 비답을 내려 갖추 장려하여 유시하였으며, 인하여 신의 선조에게 치제(致祭)하기를 명하였습니다. 그 성비(聖批)에 이르기를, ‘그대는 김문간(金文簡)의 후손으로서 성후(聖后)를 추복(追復)한 구갑(舊甲)을 당해 세 훈신을 극론한 일이 내 마음에 감회를 일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밤을 지새웠으니, 천리 인정(天理人情)으로 헤아려 보고 국강(國綱)과 신분(臣分)으로 헤아려 보건대 대저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시고는, 인하여 김성태를 정원으로 불러서 은혜로운 말씀이 정중하셨으며, 성비(聖批)를 선조의 사우(祠宇) 가운데 보관하게 하시어 자손들이 지금까지 봉안(奉安)해 오면서 찬축(欑祝)하고 감읍(感泣)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듬해에 마침내 붕어(崩御)하시는 슬픔을 당해 끝내 대의(大義)가 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통분합니다. 지금 사손(嗣孫)이 영락하여 선조의 자손 가운데 조정에 있는 자가 오직 신 한 사람 뿐인데, 만약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러난다면 이는 비단 신의 선조를 등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우리 선조(先朝)에서 총유(寵諭)하신 성대한 뜻을 천양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이에 감히 우러러 호소하오니, 삼가 빌건대 빨리 박원종(朴宗元)·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을 묘정(廟庭)에서 출향(黜享)하라는 명을 내려 신인(神人)의 분을 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는 그대 집안 사람의 말이 비록 이와 같다고 하지만 선조(先朝)의 기미년 비답 가운데 있는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을 것이 있음을 그대 역시 반드시 알터인데, 지금 어떻게 갑자기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5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18]
    온릉(溫陵) : 중종(中宗)의 비(妃)인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
  • [註 019]
    성조(聖祖) : 중종(中宗)을 가리킴.
  • [註 020]
    을해년 : 1515 중종 10년.
  • [註 021]
    기미년 : 1799 정조 23년.

○正言金秀萬疏略曰:

嗚呼! 溫陵當日之事, 尙忍言哉? 彼朴元宗等三勳臣, 亦人臣耳。 當聖祖龍飛之辰, 貪天爲功, 惟身是謀, 竟至廢黜而後已, 其罪上通于天, 而特以一時微勳, 典刑不加, 臥死牖下, 垂今三百餘年, 有識之竊歎, 容有極哉? 伏況聖后禮祔之後, 彼三臣者, 尙今幷列於配食之庭, 嗚呼! 聖后在天之靈, 其果悅豫格思於芬苾之享乎? 臣先祖臣文簡公 乙亥一疏, 終未得伸於當世, 幸賴兩聖朝紹述之聖孝, 追擧未遑之典, 臣祖未卒之志, 亦隨以得明, 而彼三臣之從享未黜, 則倫常有未盡正, 而臣祖平日之論, 無以畢伸, 故在昔先朝己未, 臣祖嗣孫前參奉臣聖泰, 追述遺意, 冒陳一疏, 而卽下溫批, 奬諭備至, 仍命致侑於臣祖。 聖批若曰, 爾以金文簡之孫, 當翟褕追復之舊甲, 極論三勳事, 予心起感, 不覺通宵, 律之以天理人情, 揆之以國綱臣分, 夫孰曰不可? 因命招致聖泰于政院, 恩言鄭重, 使之藏置聖批於先祖祠宇中, 子孫至今奉安, 攅祝感泣, 而不幸翌年, 竟遭天崩之慟, 終使大義莫伸, 嗚呼! 痛矣! 今嗣孫零替, 先祖臣子孫中在朝者, 惟臣一人而已。 若無一言而退, 則是不但孤負臣先祖, 卒無以闡揚我先朝寵諭之盛意, 玆敢仰籲, 伏乞亟降朴元宗柳順汀成希顔黜享廟庭之命, 以洩神人之憤。

批曰: "爾以爾家之人, 言雖如此, 先朝己未批答中, 聖意有可以仰認者, 爾亦必知之, 今何可遽議乎?"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5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