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경원의 지문·시책문·애책문의 내용
휘경원(徽慶園)의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빈(嬪)의 성은 박씨(朴氏)로 가계(家系)가 반남(潘南)에서 나왔는데, 사로왕(斯盧王)의 후예이다. 박상충(朴尙衷)은 고려 공민왕 때에 도의(道義)로 드러나 학자들이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고 칭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박은(朴訔)이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의 벼슬을 하였고, 시호는 평도(平度)였다. 5대를 내려와 박소(朴紹)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는 야천(冶川)이고, 학문과 문장으로 당시의 명유(名儒)가 되었는데, 영상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로부터 번성하고 혁혁하여 대대로 저명한 벼슬아치가 나왔고 몇 가닥으로 분파되었으나 모두가 드러난 씨족이 되었다. 5세조 박세성(朴世城)은 숙종 때에 윤선도(尹善道)와 권시(權諰)를 배척하였으며 벼슬이 좌부승지에 이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고조 박태원(朴泰遠)은 벼슬이 목사에 이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박필이(朴弼履)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할아버지 박사석(朴師錫)은 현령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은 호가 금석(錦石)인데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증 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따님이다. 원경유는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의 5세손인데, 빈이 그 셋째 따님이다. 빈은 영조[英宗]경인년025)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정조[正宗]정미년026) 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빈호(殯號)는 수(綬)이고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1822) 임오(壬午) 12월 26일에 창덕궁(昌德宮)의 보경당(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유사(有司)가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원호(園號)는 휘경(徽慶)으로 올렸다. 이듬해 2월 27일에 양주(楊州) 배봉산(拜峯山) 좌묘원(坐卯原)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옛날 영우원(永祐園) 자리의 왼쪽이다. 1남을 두었는데 지금의 전하이고, 1녀를 두었는데 숙선 옹주(淑善翁主)로서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主)에게 시집갔다. 전하께서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바로 세자 저하이고 다음은 일찍 죽었다. 세 공주를 두었는데 맏이는 명온(明溫)으로 봉해졌고, 하나는 옹주이다.
당초 원 부인(元夫人)의 꿈에 노인이 무릎을 꿇고 큰 구슬 하나를 바쳤는데,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이윽고 빈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특이한 바탕이 있었다. 아이 때에 두 언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호랑이가 갑자기 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두 언니는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울었으나 빈은 서서히 걸어서 방으로 들어가 마치 아무 것도 안 본 것처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범하다는 것을 알았다. 문효 세자(文孝世子)027) 가 죽고 선왕의 춘추도 많으셨는데, 효의 왕후(孝懿王后)와 화빈(和嬪) 및 여러 후궁들에게 모두 소생이 없었다. 성상께서 매우 걱정하여 다시 명원(名媛)을 간택(揀擇)하게 되었는데, 빈이 차점(次點)을 차지하였다가 삼간(三揀) 때에 드디어 명원으로 뽑혔다. 성상께서 고묘(告廟)·수빙(修聘)·선고(宣誥) 등을 마치고 개장(盖仗)을 갖추어 맞아들여 근례(巹禮)를 거행하였는데, 이처럼 성대한 예절은 옛날에도 없었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다른 빈어(嬪御)와 같이 보아서는 안 되니, 특별히 대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경술년028) 에 생남(生男)의 경사가 있자 성상께서 더욱 두터이 대우하셨으나 빈은 여전히 조심하고 어렵게 여기었다. 효의 왕후를 신중히 섬기고 같은 반열을 더욱 온화하게 대하니, 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자 지체(志體)의 봉양이 점차 갖추어졌다. 기사년029) 에 세자가 탄생하자, 전하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를 생각하고 깊은 경사를 열어주신 근원을 미루어 신(臣)에게 명하여 대궐 뜰에서 하유하게 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차자를 올려 융숭하게 받들자고 청하였고, 예관은 의논하기를, ‘신하들은 저하(邸下)로 부르고 세시와 명절에 하례를 드릴 때 안팎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치되, 의주(儀註)와 같이 하소서.’ 하니, 빈께서 이르시기를, ‘이는 비록 성상의 효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마음에 매우 거북스럽다.’고 하셨다. 지난해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風痰)의 증세가 생겼는데, 전하께서 약원(藥院)에 명하여 직숙(直宿)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자 직숙을 거두고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빈께서 전하에게 극력 사양하여 취소하였다. 그러나 환후가 차츰차츰 더 심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심으로써 우리 전하께 극도의 슬픔을 안겨 드렸으니, 아! 슬프도다. 전하께서 고례(古禮)에 따라 시마복(緦麻服)을 입기로 하셨으나, 상사(喪事)의 의절은 대부분 살아계실 때를 모방해서 하였다. 환경전(歡慶殿)에 빈궁(嬪宮)을 모시고 손수 원관(園官)의 칭호를 고쳐 참봉(參奉)으로 썼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도총부(都摠府)를 개수한 다음 이곳에다 반우(返虞)해 놓고 상막(喪幕)에 거처하면서 전(奠)을 드리는 의리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정 신하들이 대부분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전하께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체로 성상의 생각은 ‘상복이란 예절의 큰 한계점이므로 존귀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명위(名位)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역대에서 경상적인 것을 어겨 후세의 비난을 사는 일은 모두 할 수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의문(儀文)과 절차(節次)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므로 비록 오늘날 처음으로 시행한다 해도 지나친 일은 아니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신이 생각해 보건대, 전(傳)030) 에 이르기를, ‘왕자(王者)가 아니면 예를 논의하지 않고 문자를 고정(考定)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이신비(李宸妃)031) 의 상사(喪事) 때 빈염(殯斂)에 황후의 예를 쓰도록 권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032) 이 이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문자를 고정하고 예를 논의할 처지에 계시어 절충하고 짐작하되, 의리로 헤아려 만들어 인정에 합치되었으며, 경상을 지키고 권도(權道)에도 통달하여 높여 보답하는 도리를 스스로 다하였으며, 이 의리는 성현(聖賢)이 다시 나와도 필시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위대한 성인이 하신 일이 보통보다 몇만 갑절 더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전하께서는 현실(玄室)의 지문(誌文) 서술을 신에게 명하셨는데, 빈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부녀자가 무슨 지장(誌狀)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행록(行錄)을 짓지 말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상 생활 속에서 여사(女史)를 빛내고 사책(史策)에 빛나게 할 만한 일을 상세히 상고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덕이 높고 공이 커서 사람들의 귀와 눈에 젖어 엄폐할 수 없는 몇 가지를 기술하려고 한다. 빈의 성품은 총명하고 장중하여 평상시에 말씀이 적었으며 아랫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服飾)과 기용(器用)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혜빈(惠嬪)을 받들 때 효성과 순종을 다하고 선왕을 섬길 때 거스른 말이 없었으며 전하를 양육하실 때 의복을 항상 빨아서 입히고 가르칠 때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하셨다. 경신년033) 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성상을 보호하면서 삼가고 조심하여 항상 미치지 못하듯이 하였는데, 낮이면 식음도 잊어버리고 밤이면 편안히 잠잘 사이도 없이 하다가 피로가 쌓였지만 자신은 돌보지 않으셨다. 대체로 어느 누가 자애로운 정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오직 한 조각의 혈성(血誠)과 고심(苦心)은 신명(神明)을 감격시키고 금석(金石)을 뚫을 만하셨으니, 천고(千古)를 손꼽아 보아도 빈(嬪) 한 분뿐이라고 하겠다.
아! 덕은 육궁(六宮)034) 에서 으뜸가고 공은 만세의 터전을 닦아 놓았는데, 이는 붓을 든 사람의 사견(私見)이 아니고 곧 팔도의 백성들이 다같이 칭송한 바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겠는가? 신이 옛날에 사필(史筆)의 소임을 맡아 빈께서 궁중으로 들어오실 때의 성대한 거동을 보았는데, 아직도 우리 선왕께서 기뻐하던 모습과 칭찬하시던 음성을 기억하고 있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역력하다. 그런데 늙어 백수(白首)가 되도록 죽지 않았다가 다시 우리 전하께서 슬퍼하시는 날을 만나 참람하고 비루하다는 것을 잊은 채 외람되이 지석(誌石)의 글을 올리게 되니, 옛날을 우러러 추억하고 지금을 굽어볼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시었다."
하였다.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시책문(諡冊文)에 이르기를,
"예는 압굴(壓屈)의 제한이 있지만, 오늘날 내 마음을 어떻게 가눌 수 있겠는가? 덕은 길러 준 은혜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하늘 같은 은혜 갚고자 해도 끝이 없도다. 이에 시호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마지막 길을 빛내는 규례를 높이도다. 이를 어찌 천양(闡揚)했다고 하겠는가? 오직 울먹이는 심정만 간절하구나. 삼가 생각건대 수빈 저하(綏嬪邸下)께서는 행실은 좋은 법도를 따르셨고 얼굴에는 온순하고 사려 깊은 인상이 어리었네. 아름다운 덕을 오래 쌓아 훌륭한 가문에서 좋은 경사를 모았고, 난초(蘭草) 같은 향기는 본받은 바 있어 좋은 소문이 규방에서 풍겨 나왔네. 태몽(胎夢)은 구슬을 바친 것에서 징험되었으니 조짐은 잉태할 때보다 앞선 듯하고, 어린 나이에 호랑이를 보고도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기특함이 당웅(當熊)035) 보다 더하였도다. 책문을 반포하고 문명(問名)036) 도 하셨으니 선왕의 거룩한 간택에 응하였고, 관작을 봉하고 칭호를 내렸으니 군자(君子) 복리(福履)037) 의 편안함에 따랐다. 드디어 상서로운 길이 열리니 어진 자손이 계승하리로다.
그러나 매교(禖郊)038) 에 아들의 점지(點指)가 더디니 국세(國勢)는 거의 철류(綴旒)039) 처럼 위태로웠는데, 요모문(堯母門)040) 이 경술년041) 에 열렸으니 종맥(宗脈)은 실로 이를 힘입어 번성하게 되었도다. 삼전(三殿)042) 에 기쁨과 사랑이 극진한 것은 오로지 공경과 온화를 간직하였기 때문이고 육궁(六宮)에서 앞다투어 찬미하니 모두가 빛난 덕을 우러러보고 훈도(薰陶)되었다.
아! 경신년043) 의 비운은 딱하게 소자(小子)가 어린 나이에 어려움이 많았다. 배봉산(拜峯山)에 감도는 구름을 붙잡을 수 없으니 진유(眞遊)044) 의 멀어짐이 가슴 아팠고, 훤초(萱草)의 빛이 유난히 따뜻하니 인자(仁慈)하신 은혜가 갈수록 융숭하였다. 항상 병이 날까 걱정하여 주셨으므로 보호를 믿었고, 간혹 재앙을 만나면 자세하게 깨우쳐 주셨다. 하루 세 차례 문안에 일곱 문채의 장복(章服)이 뒤따름을 보았으니 비록 손자를 희롱하는 염원은 풀으셨으나, 20년 동안 천승(千乘)의 봉양을 받으면서 오히려 조촐하고 풍성한 정성을 혐의롭게 여겼다. 요즈음 초췌(憔悴)한 증세가 깊어지니, 더욱 희구(喜懼)045) 의 마음이 간절하게 되었다. 선군(先君)의 생각으로 힘쓰시어 비록 고달프고 병이 깊어도 쉴 새가 없었는데, 자식의 마음에 끝없는 것은 오직 늙으시도록 건강하시기만을 빌었다. 높은 나이 60세에 가까우시어 장차 80세를 바랐고, 병이 났으나 곧 쾌유의 기쁨이 있었으므로 강릉(岡陵)과 송백(松栢) 같은 수를 바랐다. 바야흐로 어머니가 장수한 노래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보무(寶婺)046) 의 광채가 흐려져서 놀랐도다.
제소(齊疏)047) 는 3년이 끝나지 않았는데, 적고(狄皐)048) 의 슬픈 일이 또 하룻밤 사이에 생겼다. 사모하는 마음 미치지 못함을 탄식했으니 동조(東朝)의 궁전(宮殿)이 텅 비어 있고, 감싸주던 분이 떠나셨으니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북당(北堂)049) 이 쓸쓸하도다. 봄 가을에 사모하던 옛 묘역(墓域)에 자리잡았으니 신도(神道)도 매우 편안하실 것이며, 종천(終天)의 지극한 슬픔을 붙였으니 다행히 전알(展謁)할 길이 아주 가깝구나. 진실로 아름다운 행실을 빨리 기술하지 않으면 휘음(徽音)마저 길이 듣지 못할 것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상여(喪輿)와 상구(喪具) 두루 갖추니 친상(親喪)에는 의당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이고, 전례(典禮)와 책문(冊文) 모두 갖추니 옛 전장 따라서 유실이 없게 한 것이다. 독실한 행실이 빛났으니 ‘현(顯)’ 자는 명행(名行)을 밝게 나타낸 것이고 단장(端莊) 제정(齊整)하셨으니 ‘목(穆)’ 자는 아름다운 덕을 겸전(兼全)한 것이도다. 삼가 사신을 보내어 존시(尊諡)를 ‘현목(顯穆)’으로 올렸으니, 바라건대 밝으신 영령께서는 작은 정성을 굽어살피소서. 아! 장례의 날짜는 빨리도 다가오고 있는데, 아름다운 규범은 어찌 현경(玄扃)050) 에 묻힌단 말인가? 내세(來世)에 길이 전해져서 유방(流芳)이 여사(女史)에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
"명정(銘旌)이 길을 여니 상여(喪輿)가 엄숙하게 발인(發軔)하였고, 견전(譴奠)을 이미 거두니 시위(侍衞)의 의장(儀仗)이 나아가도다. 자달(紫闥)을 떠나 천천히 끄니 현실(玄室)을 향하여 점점 멀어지도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붙잡지 못해 울부짖고 애통과 사모가 더욱 새로웠다. 이날의 종천(終天)을 슬퍼하였다. 이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실적(實績)을 기록하고 보첩(寶牒)에 새겨 공손히 아뢰게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반남(潘南)의 훌륭한 계통으로서 대대로 관작을 계승하였으니 명석(名碩)한 분이 많았고 집안이 혁혁하였다. 영고(寧考)051) 께서 생존(生存)해 계실 때에 세자의 자리가 오래 비었으므로, 널리 철원(哲媛)을 구하셨는데, 이름난 가문에서 얻으셨다. 빈(嬪)이 이에 영광스럽게 간택에 응하시니 납징(納徵)과 납폐(納幣)의 특별한 예는 전고에 드물었다. 성품은 깊고 아름다웠으며 심성은 향긋하고 명랑하였다. 전궁(殿宮)에 하루 세 차례 문안 드리니 패옥 소리 낭낭하였고, 여칙(女則)을 띠에 적어 어김이 없이 따라 행하였다. 임금님의 사랑을 깊이 입으셨고 우러러 중전의 교화를 협찬했는데, 시종 한결같았으므로 좋은 소문이 멀리 퍼졌다. 태세(太歲) 경술(庚戌)에는 국운이 끝이 없어 경사가 역내(域內)에 넘쳤고 공(功)은 종사(宗社)에 있었다. 태평의 운을 만나면 더욱더 겸양하여 더욱 조심하셨다. 갑자기 주상을 잃자 슬픔은 주곡(晝哭)에 얽혔고 돌아가 옥란(玉欄)을 모시고자 항상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하였다. 그러나 감성을 억누르고 성상을 보호하셨는데, 질병, 음식과 한서(寒暑), 우풍(雨風)에 한시도 해이하지 않으시고 한마음으로 걱정하셨다. 11세에 운(運)이 돌아오자 구가(謳歌)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기쁨이 슬하에 넘치니 즐거움에 모두 목을 늘였도다. 조석으로 유쾌하게 만경(晩景)을 즐기셨고 효심을 미루어 지체(志體)의 봉양을 받으셨다. 온 나라 사람들이 높이 받들었고 육궁(六宮)에서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다.
예기치 않았던 병환이 나았다가 바로 더치더니, 전에 강릉(岡陵)처럼 수하기를 기원하였던 것이 겨우 53세에 그쳤단 말인가? 이처럼 아득해져 마침내 덕음(德音)을 들을 수 없으니, 아! 슬프도다. 한 사람이 슬퍼하자 백관도 비참해 하는데 해가 빨리도 바뀌어 날을 잡아 장사를 모셨다. 복을 시마(緦麻)로 석 달을 입었으니 옛날 성인의 정제(定制)를 따랐고, 죽책(竹冊)이 천년에 빛나니 한번 절혜(節惠)하여 시호를 올렸노라. 주유(珠襦)에는 향기가 멎었고 경대(鏡臺)에는 티끌이 쌓였다. 풍렴(風簾)은 쓸쓸히 움직이고, 야대(夜臺)052) 는 멀어서 처량하도다. 보삽(寶翣)은 구불구불 가고 또 가서 돌아오지 않도다. 요지(瑤池)를 찾아가시는지 옥마(玉馬)의 울음소리 들리고 은하수를 건너시는지 금학(金鶴)이 날아가도다. 평생의 자애로운 돌보심과는 다르고 옛날에 사모하고 의지했던 바가 아니로세. 아! 슬프도다. 길은 청문(靑門)을 나와서 가성(佳城)053) 을 새로 얻었는데, 청오경(靑烏經)054) 은 길지(吉地)를 고하고 현귀(玄龜)055) 는 길하다고 하도다. 참으로 산수가 수려하니, 하늘과 땅이 감추어둔 것이 드러났도다. 백령(百靈) 사귀(邪鬼)를 꾸짖어 금하니, 송백이 울창하도다. 체백(體魄)이 안온하셔서 큰 복이 길이길이 이어지게 하소서. 아! 슬프도다. 어진 이가 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믿지 못할 것은 하늘이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은 옛날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오직 아름다운 덕이 사람들에게 젖어 있으니, 여사(女史)에 실려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 방렬(芳烈)을 천양(闡揚)하니, 백세토록 영원히 전하리라. 아! 슬프도다."
하였다. 【판부사 남공철(南公轍)이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18면
- 【분류】왕실(王室) / 역사-편사(編史)
- [註 025]경인년 : 1770 영조 46년.
- [註 026]
정미년 : 1787 정조 11년.- [註 027]
문효 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원자.- [註 028]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註 029]
기사년 : 1809 순조 9년.- [註 030]
전(傳) : 《중용(中庸)》.- [註 031]
이신비(李宸妃) : 북송(北宋) 진종(眞宗)의 후궁(後宮). 인종(仁宗)의 생모(生母). 인종은 태어나면서부터 태후(太后)가 기르고 이신비는 후궁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으며 태후가 두려워 말해 준 사람이 없어, 인종은 이신비가 자기의 생모인 줄도 몰랐음. 이신비가 졸지에 죽으니, 재상 여이간(呂夷簡)이 내관(內官) 나숭훈(羅崇勳)에게 말하여 황후의 예로 관 속에 수은(水銀)을 채워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음. 태후가 죽은 뒤에 인종이 이신비가 자기의 생모이고 또 비명(非命)에 죽었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무덤을 파 보았는데, 얼굴이 생시와 다름이 없고 황후의 예로 후장(厚葬)하였음을 보고 일을 일으키지 않았음.- [註 032]
주문공(朱文公) : 주희(朱熹).- [註 033]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註 034]
육궁(六宮) : 후(后)·비(妃)·부인(夫人)·빈(嬪)·세부(世婦)·여어(女御)의 임금이 거느리는 여섯 계급의 궁녀.- [註 035]
당웅(當熊) : 한(漢)나라 원제(元帝)가 후궁까지 거느리고 호권(號圈)에 행행하여 짐승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곰 한 마리가 우리를 뛰어나와 전상(殿上)으로 뛰어오르려 하자 풍소의(馮昭儀)가 앞을 가로 막아 무사하였음. 뒤에 임금이 ‘어쩌자고 그러한 위험한 짓을 했느냐?’고 묻자, 대답이 "짐승은 먹이만 얻으면 그치니까 몸으로 자당(自當)하려 하였습니다." 하였음. 원제가 탄복하고 그 뒤로는 더욱 경대(敬待)하였음.- [註 036]
문명(問名) : 혼인의 육례(六禮) 가운데 한 가지. 신랑편에서 사람을 보내서 규수(閨秀)의 생년월일·성씨를 알아보는 일.- [註 037]
복리(福履) : 복록.- [註 038]
매교(禖郊) : 아들을 얻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인데, 매사(禖祠)가 들에 있기 때문에 매교라고 함. 고매(高禖).- [註 039]
철류(綴旒) : 깃대의 반대쪽 위아래 두 끝에 불꽃처럼 댄 긴 오리. 보기에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위험스러움을 비유함.- [註 040]
요모문(堯母門) :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구익 부인(鉤弋夫人) 조첩여(趙婕妤)가 구익궁(鉤弋宮)에서 임신 14개월 만에 소제(昭帝)를 낳으니, 무제가 말하기를, "듣자니 옛날 요(堯)임금은 14개월 만에 태어났다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 황자(皇子)도 14개월 만에 태어났다." 하고, 구익궁의 문을 요모문이라 명명하였음.- [註 041]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순조의 생년을 말함.- [註 042]
삼전(三殿) :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빈(嬪)인 혜빈(惠嬪) 홍씨(洪氏) 및 정조비 효의 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를 지칭한 말.- [註 043]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정조가 승하한 해.- [註 044]
진유(眞遊) : 참된 세계로 돌아감.- [註 045]
희구(喜懼) : 늙은 부모를 모신 자식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부모가 오래 사시니 즐겁고 한편으로는 병이 나시지나 않을까, 그래서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항상 두려워한다는 말.- [註 046]
보무(寶婺) : 여인을 상징하는 별 이름. 즉 무녀성(婺女星).- [註 047]
제소(齊疏) : 자최(齊衰)와 소사(疏食). 효의 왕후의 상중임을 뜻함.- [註 048]
적고(狄皐) : 적(狄)은 적(翟)과 통하여, 적의(翟衣)는 황후가 입는 옷을 말하고, 고(皐)는 고복(皐復)을 뜻하는데, 고복은 망인(亡人)의 옷을 가지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그 옷을 흔들면서 세 번 "아무 고을 사는 아무개 고복!"이라고 외치면서 초혼(招魂)하는 것을 말함. 따라서 적의로 고복한다는 것은 후비(后妃)의 상을 당하였음을 뜻함.- [註 049]
북당(北堂) : 어머니의 처소.- [註 050]
현경(玄扃) : 현실(玄室)과 같은 뜻.- [註 051]
영고(寧考) : 정조(正祖)를 말함.- [註 052]
야대(夜臺) : 묘혈(墓穴).- [註 053]
○癸卯/徽慶園誌文:
嬪姓朴氏, 系出潘南 斯盧王之裔也。 有諱尙衷, 高麗 恭愍王時, 以道義顯, 學者稱之曰潘南先生, 本朝追諡文正, 有子曰訔, 入本朝, 官左議政, 諡平度。 五轉而有諱紹, 號冶川, 學問文章, 爲時名儒, 贈領相諡文康。 自是以來, 蟬聯赫奕, 代有名宦, 派分支列, 咸爲顯族。 五世祖諱世城, 當肅宗時嘗斥尹善道、權諰, 官至左副承旨, 贈吏參。 高祖諱泰遠牧使贈吏參, 曾祖諱弼履, 贈吏判, 祖諱師錫, 縣令, 贈左贊成。 考諱準源, 號錦石, 判敦寧府事, 贈領相, 諡忠獻。 妣原州 元氏, 贈參判景游女, 原平府院君 斗杓五世孫, 嬪其第三女也。 嬪以英宗庚寅五月八日, 生正宗, 丁未被選嬪, 號曰綏, 宮號曰嘉順, 今上殿下二十二年壬午十二月二十六日, 厭代于昌德宮之寶慶堂, 壽五十有三。 有司上節惠曰顯穆, 園號曰徽慶。 明年二月二十七日, 葬于楊州 拜峰山坐卯原, 寔永祐園舊基之左也。 誕一男今殿下一女淑善翁主, 下嫁永明尉 洪顯周。 殿下二男, 長卽世子邸下, 次不育。 三公主, 長封明溫, 一翁主。 初元夫人夢, 老人跪獻一大珠, 光彩滿室。 旣而生嬪, 幼有異質。 兒時與二女兄, 同坐, 有虎突至庭。 二兄皆驚仆啼哭, 嬪獨徐步入戶, 若無所見, 人皆知其不凡。 文孝旣卒, 先王春秋已晼晩, 孝懿后及和嬪諸御, 皆無育。 上, 憂甚復揀名媛, 而嬪居第二, 及三揀, 遂膺首選。 上爲告廟、修聘、宣誥, 具蓋仗迎入行巹, 禮貌之盛, 古未有也。 常曰, ‘是不可與他嬪御同視, 當有以別之。’ 及庚戌有慶, 上遇愈重, 嬪猶謙愼寅畏, 事孝懿惟謹, 處同列愈和, 宮中咸稱其賢。 殿下嗣位, 志物之養漸備。 己巳, 世子生, 殿下追惟先王之遺志, 推原啓發之濬祥, 命賤臣諭於庭。 於是, 時原任大臣箚請隆奉, 而禮官議 ‘群臣稱邸下, 時節慶賀, 中外奉箋獻方物如儀’, 嬪曰, ‘是雖聖孝所及, 於心大不安也。’ 前年秋季, 忽有風痰之祟, 殿下命藥院, 設直宿, 已而少愈, 撤直, 請賀。 嬪力辭於殿下, 寢之。 然患候輾轉沈谻, 遂及不諱, 竟貽我殿下終天之慟, 悲夫! 殿下遵古禮服緦, 治喪事儀節, 多像生。 殯于歡慶殿, 御筆改園官號爲參奉, 命有司葺都摠府, 將返虞, 於是以寓居廬奠饋之義。 廷臣多言不可, 殿下堅不撓。 蓋聖心以爲, ‘喪服者, 禮之大防, 而人君之尊, 固不敢以踰名位者, 歷代之背經而見譏於後世, 皆不得爲而不可爲者也。 若其儀文節度之間, 得爲而不爲者, 非所以恔於心, 雖創之於今, 未爲汰也。’ 臣竊惟傳, 言非王者, 不議禮不考文, 李宸妃之喪, 殯(歛)〔斂〕 勸用后儀, 而朱文公載之《名臣言行》, 我殿下處考文議禮之地, 折衷斟酌, 起於義而合於情, 守經達權, 自盡崇報之道, 斯義也, 聖賢復起, 必不易矣。 于以見大聖人所作爲, 出尋常萬萬也。 殿下以玄室之誌命臣, 而嬪常言, 婦人安用誌狀, 我身後無庸下行錄爲也。 故其日用常行之, 可以炳彤管而耀靑簡, 無從而細考。 然其德盛而功大, 塗耳目而莫掩者, 謹述一二。 嬪性度明達莊重, 平居寡言笑, 御下恩而有嚴, 服开器用, 不貴珍奢, 奉惠嬪, 克盡孝順, 事先王罔有違言, 養殿下衣服常用浣濯, 敎導必以義方, 而自庚申後, 至今二十餘年, 保護聖躬, 洞屬如不及, 日而忘膳, 宵而忘寢, 至於勞瘁而不自恤。 夫孰無止慈之情, 憂國之念, 而一(叚)〔段〕 血誠苦心, 可以格神明而貫金石者, 歷論千古, 殆惟嬪而已。 噫! 德有以冠六宮, 功有以基萬世, 非秉筆者所敢私, 卽八域含生之所共誦也, 曷不休矣? 臣昔以簪筆之任, 恭睹入宮之盛儀, 尙記當日我先王歡喜之色, 嘉褒之音, 歷歷如隔晨。 而〔老〕 白首不死, 復値我殿下哀遑號霣之日, 忘其僭陋, 猥進幽刻之辭。 俯仰今昔, 不覺涕淚之沾襟云。 【領敦寧金祖淳製。】
諡冊文:
禮有限於厭屈, 今日曷爲予懷? 德莫大於劬勞, 昊天欲報罔極。 肆稽節惠之典, 庸崇賁終之規。 豈云顯揚? 惟切掩抑。 伏惟綏嬪邸下行循嘉則, 姿凝順思, 藍珤久胚, 鍾善慶, 於華閥, 蘭薰在襲。 藹淑聞於芳閨。 娠夢旣驗於獻珠, 兆若先於懷日。 幼儀無怖於見虎, 奇不啻於當熊。 發冊問名, 是膺皇考禮揀之盛, 封爵賜號, 俾踵君子福履之綏。 遂長發於殷祥, 廼永錫乎周胤。 楳郊遲於降乙, 國勢幾澟綴旒, 堯門闢於維庚, 宗脈實賴緜瓞。 極歡愛於三殿, 亶爲存儆而含和, 爭頌美於六宮, 莫不仰燿而薰德。 嗚呼! 涒灘之降割, 閔予沖年之多難。 梧雲莫攀, 痛眞遊之寖邈, 草暉偏煦, 荷慈恩之愈隆。 常勤疾憂而保護之是恃, 或遇災咎則警誨之有諄, 三朝見七章之隨, 縱慰含飴之念, 〔廾〕 載致千乘之養, 猶歉洗腆之誠。 〔由〕 來慼悴之祟深, 冞懷喜懼之忱切。 先君之思以勖, 雖哀茶沈淹之罔間, 人子之心無窮, 惟耆艾康寧之是祝。 遐籌漸躋於耳順, 將爲春秋八千, 愆度比喜於翼瘳, 願如岡陵松柏, 方期壽母之興詠, 遽驚寶婺之淪精。 齊疏未闋於三年, 狄皐又慘於一夕。 愾孺慕而靡逮, 東殿仍〔虛〕 , 廓慈覆而何依? 北堂俄閴。 卜玆履露之舊域, 想神理之大安, 寓我終天之至哀, 幸瞻展之孔邇。 苟無懿媺之亟述, 可奈音徽之長違? 輿衛備廞, 〔親〕 喪固所自盡, 典冊斯具, 舊章率由不忘。 篤實輝光, 顯是名行之昭著, 端莊齊整, 穆爲德美之兼全, 謹遣使臣, 上尊謚曰顯穆, 尙冀明靈, 俯諒微悃, 欸遠日之倐屆, 休範詎閟於玄扃? 庶來世之永垂, 流芳增煒於彤管。 【戶曹判書沈象奎製。】
哀冊文:
畫旌啓塗, 雕轀肅軔, 犧罇旣撤, 蜃衛將進。 違紫闥而徐引, 指玄室而漸遠。 惟我主上殿下, 攀號靡逮, 摧慕冞新。 慟此日之終天, 念厚夜之莫晨。 爰命瑤臺而紀績, 俾鐫寶牒而恭陳。 其辭曰; 潘南靈緖, 世襲圭組, 彬鬱名碩, 華赫門戶。 寧考在宥, 儲位久缺, 廣求哲媛, 于彼顯閥。 嬪於是時, 光膺揀擇, 迺徵迺幣, 殊禮曠昔。 性度淵懿, 神襟蘭郁。 三朝殿宮, 瑜佩雝然, 書紳女則, 率行無愆。 深荷天眷, 仰贊坤化, 終始一德, 令聞遠播。 太歲在戌, 無疆邦錄, 慶溢區宇, 功存宗祏。 遇泰益謙, 小心翼翼。 奄遭天崩, 慟纏晝哭, 歸侍玉欄, 常願其速。 然猶抑情, 保護聖躬, 疾恙飮食, 寒暑雨風, 造次不弛, 一念憧憧。 運回十一, 謠騰四重, 喜深繞膝, 歡均延頸。 昕夕怡愉, 娛玆晩景, 孝心所推, 志物備養。 一國隆奉, 六宮慕仰。 无妄一疾, 乍瘳旋添, 胡昔祝之岡壽, 僅五旬而踰三? 羌冥漠其若玆, 竟難追於德音。 嗚呼! 哀哉。 一人悲疚, 千官悽愴, 歲籥倐換, 卽遠而葬。 服麻緦於三月, 遵古聖之定制, 耀竹冊於千載, 節臺惠而爲謚。 珠襦兮香歇, 鏡匳兮塵委。 風簾動而蕭瑟, 夜臺邈而悽悲。 瞻寶翣之逶迤, 去復去兮無歸。 訪瑤池兮玉馬, 響躡銀渚兮金鶴飛。 異平生之慈顧, 非昔時之瞻依。 嗚呼! 哀哉。 路出靑門, 佳城新得, 《靑烏》告吉, 玄龜協卜。 信山明而水麗, 發地秘與天作。 百靈呵禁, 松栢蔥鬱。 庶體魄之妥安, 綿景祿於瓜瓞。 嗚呼! 哀哉。 賢而無壽, 難諶者天。 原有始則有終, 自古曺而已。 然惟懿德之在人, 載彤管而不朽。 猗! 芳烈之闡揚, 傳百世而永久。 嗚呼! 哀哉。 【判府事南公轍製。】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18면
- 【분류】왕실(王室) / 역사-편사(編史)
- [註 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