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 왕후의 천릉 지문
천릉 지문(遷陵誌文)에 이르기를,
"아! 우리 열고(烈考) 정종 대왕을 그전에 화성(華城) 현륭원(顯隆園)의 동쪽 산기슭에다 장례를 치루었는데, 이를 건릉(健陵)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유식한 사람들은 모두 그곳의 지세가 낮아 성인(聖人)을 오래 안장할 곳이 아니라고 우려하였다. 그후 22년 신사년158) 3월 9일 기미(己未)에 우리 효의 왕후가 승하하시자, 선왕의 능으로 장례를 모시려고 하였다. 이때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여, 그 능의 자리가 우려스러운 상황에 관해 극구 말하면서 다시 길지를 택하여 만년의 계책을 도모할 것을 청하자, 우리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비답하기를, ‘대행 대비께서 평소 이 일를 크게 우려하시어 소자에게 누차 하교하셨는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더욱 기운이 꺾이고 목이 메여 송구함을 견딜 수 없다.’ 하시고, 즉시 대신과 경재(卿宰)를 불러 조정에서 의논하게 하였다. 그 의논이 모두 동일하여 엇갈리지 않자, 대신과 예관(禮官) 및 공역(工役)을 동독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널리 장지를 보게 하고 또 재삼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에 현륭원의 우측 자좌(子坐) 산등성이의 더욱 길한 곳을 얻어서 네모로 된 광중(壙中)에 동혈(同穴)의 제도로 마련하여 선왕을 모시고 효의 왕후를 합장한 다음, 능호는 옛 능호 그대로 두었는데, 이 해 9월 13일 경신(庚申)이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크게 감탄하며 서로 축하하기를, ‘구릉(舊陵)은 진실로 우려되고 화성(華城)은 본래 선왕의 뜻이었으니, 지금부터는 두 분이 아무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애당초 선왕 13년 기유년159) 에 수원부(水原府)의 화산(花山)으로 영우원(永祐園)을 옮긴 다음, 원호(園號)를 현륭으로 고치고 또 화성(華城)을 크게 축조하여 상설(象設)을 감싸게 하였다. 그리고 초상화[御眞]를 현륭원의 재전(齋殿)에 걸어 놓고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뜻을 표하였으며, 새해마다 배알(拜謁)하면서 애도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19년 을묘년160) 에 자궁(慈宮)을 모시고 현륭원에 가 배알하고 나서 화성궁(華城宮)으로 돌아와 술잔을 올려 축수하면서 하교하기를, ‘외로운 내가 이 예(禮)를 이곳에서 행하니, 지극한 소원을 조금 풀었다.’라고 하였다.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올 때마다 지지대(遲遲臺)에서 수레를 멈추고 현륭원을 돌아보면서 머뭇거리고 차마 그 곳을 떠나지 못하였으며, 화성궁의 당(堂)을 노래(老來)로, 누(樓)를 신풍(新豐)으로 명명하였으니, 대체로 은미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왕위가 즐겁지 않아 천승(千乘)을 헌신발처럼 버리고 화성을 이처럼 권고하였으니, 이는 《맹자(孟子)》에 이른바 ‘큰 효자는 종신토록 사모한다.’는 것이다. 지금 다시 능소에 나아가 화성(華城)에다 모시었으니, 이는 또 하늘이 우리 선왕에게 크게 감동하여 이곳에 유택(幽宅)을 주신 것이고, 또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영원히 우리 열고(烈考)와 문모(文母)를 편안하게 한 것이다. 아! 훌륭하다. 전하께서 신 심상규(沈象奎)가 선왕을 섬긴데다가 또 지금 사관으로 있다고 하여 현궁(玄宮)의 지문(誌文)을 제술하라고 명하셨는데, 참으로 황공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선왕의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행(善行)은 온 나라에 넘쳐 사책(史策)에 그 사실을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리고 영원히 세상에 칭송될 것이므로 지석(誌石)에 기록할 것이 없으며, 천지(天地)같이 위대하고 일월(日月)같이 밝은 빛을 신처럼 지식이 얕고 좁은 사람이 그려낼 수 없다고 여기었다. 그러나 《예기(禮記)》를 상고해 보면 공자(孔子)의 상(喪)에 공서적(公西赤)161) 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기록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는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니, 그 중요성이 실로 글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의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이니, 영조 현효 대왕(英祖顯孝大王)의 손자이며 사도 장헌 세자(思悼莊獻世子)의 아들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혜빈(惠嬪) 홍씨(洪氏)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따님이다. 장헌 세자가 죽자 영조께서 왕에게 명하여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왕의 백부(伯父)이다. 왕께서 즉위한 후 효장 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묘소(墓所)를 영릉(永陵)으로 삼았으며, 빈(嬪) 조씨(趙氏)는 효순 왕후(孝純王后)로 추존하였는데,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따님이다. 사도(思悼)의 호는 장헌(莊獻), 묘소는 영우원(永祐園), 묘(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추존하였으며, 혜빈은 혜경궁(惠慶宮)으로 추존하였다. 하루는 장헌 세자가 잠을 자다가 신룡(神龍)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난 후 벽에다가 그 모습을 그려 놓았는데, 그후 왕이 탄생하였다. 이날은 영조 28년 임신년162) 9월 22일(기묘)이다. 음성이 우렁차고 코가 우뚝 솟았으며, 입이 커 골상이 특이하였다. 영조께서 그곳에 나아가 보시고 매우 기뻐하여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나를 빼닮았다」 하고 그날로 호(號)를 원손(元孫)으로 정하였다.
백일도 채 되지 않아 섰으며, 걸어다니자마자 단정히 꿇어앉았으며, 말을 하지 못하였을 때부터 문자를 보면 좋아하였다. 3세 때에 스승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8세 때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영조를 모시고 어가에 올라 운종가(雲從街)를 지나자 사민(士民)들에게 세손(世孫)을 우러러보게 하였다. 환궁한 후에 묻기를, 「오늘 바라보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는데 너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신(臣)이 선행(善行)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영조께서 「선행을 하기가 쉽느냐?」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쉽습니다.」라고 하니, 영조께서 매우 기뻐하였다. 10세 때에 입학(入學)하여 박사(博士)에게 수업하였다. 이때 《소학(小學)》의 제사(題辭)에 있는 명명 혁연(明命赫然)의 뜻을 묻기를, 「밝은 명(命)이 나의 몸에 있는데 어느 곳을 가리킨 것인가? 혁연(赫然)을 구하려면 또 어떤 공부를 해야 되는가?」 하니, 박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교문(橋門)에 둘러서 있는 수만 명의 인파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놀라워하는 얼굴로 서로 칭송하기를,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다.」고 하였다.
임오년163) 가을에 영조께서 명나라 조정의 시사(時事)에 의하여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책봉하고 춘방(春坊)·계방(桂坊) 양방(兩坊)에 관원을 두었다.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에 소명(召命)에 응하여 입대(入對)하였는데, 왕이 마침 《맹자(孟子)》를 강하고 있었다. 송명흠이 《맹자》의 전체적인 뜻을 묻자, 왕이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명흠이 또 입지(立志)를 묻자, 왕이 말하기를, 「바라는 것은 요(堯)·순(舜)이다.」라고 하였다. 송명흠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총명하고 영특하여 상지(上智)의 자질을 타고나셨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왕이 영조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강관(講官)이 삼남(三南) 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말하였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이날 저녁 반찬에 육고기를 들지 않았다. 영조께서 그 이유를 묻자, 왕이 대답하기를, 「때마침 굶주리는 백성들이 생각나자 마음에 측은한 생각이 들어 차마 젓가락이 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조가 8, 9세 때부터 더욱 씩씩하고 과묵(寡默)하여 성급하게 말하거나 성급한 안색이 없었고 환관(宦官) 및 궁첩(宮妾)들과도 말하는 때가 드물었다. 영조께서 매양 말씀하기를, 「세손은 조금도 돌아다닐 뜻이 없어 금원(禁苑)에 꽃이 만개해도 나를 따라갈 때가 아니면 한 번도 가서 구경한 적이 없고 날마다 조용히 앉아서 글만 읽고 있다. 이것이 어찌 힘써서 될 일이겠는가? 바로 그의 천성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조의 춘추가 높아지자 병을 앓는 때가 많았는데 왕이 10년 동안 병을 간호하면서 주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옷의 띠를 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병세가 위태로워지면 애타게 걱정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노천(露天)에서 기도를 드렸으며 앉고 누으며 설 때에 친히 부축하였다. 영조가 그 노고를 민망히 여기어 혹 좌우 사람에게 대신하라고 명하였다가 곧바로 찡그리며, 「우리 손자같이 나를 편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화완 옹주(和緩翁主)는 왕의 고모인데, 그의 아들 정후겸(鄭厚謙)이 옹주의 세력을 믿고 횡포(橫暴)가 극심하였고 홍봉한(洪鳳漢)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그 형의 여세로 의정(議政)이 되었다. 영조가 정사에 게을러지자 두 흉물이 서로 결탁하여 당여(黨與)를 조성하고 권력을 탐하며 법령을 업신여겨 조정의 정사를 문란케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유독 왕의 영명(英明)함을 꺼려하여 출입할 때마다 엿보면서 갖은 무고(誣告)로 동요시키고, 화완 옹주는 또 궁중에 앉아서 그의 아들을 위해 흉당(凶黨)들을 도왔다. 그러나 왕은 차분히 대처하여 태연히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지냈다. 영조께서 병환이 더욱 악화되자 왕으로 하여금 모든 정무를 대신 보게 하려고 하니, 적당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영조께서 공사(公事)를 동궁(東宮)에 들이라고 명하니, 홍인한(洪麟漢)이 손을 저으며 승지에게 전교를 쓰지 말라고 하면서 여러 말을 늘어놓으면서 극력 저지하였다. 영조께서 마침내 홍인한 등을 치죄하고 왕에게 여러 정사를 대신해 보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동궁으로 나아가 하례를 받고 구작례(九爵禮)164) 를 행하였는데, 군신들이 모두 천세(千歲)를 외치자 영조가 그들을 돌아보고 웃으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왕께서 이미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매 곧 상소하여 사사로운 쓰라림을 진달했는데, 그 말이 매우 애절하였다. 영조께서 그 상소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거주(起居注)》를 취하여 정축년165) 부터 임오년166) 까지 차마 읽지 못할 말들은 그 초안(草案)을 지워버리고 하교하기를, 「종통(宗統)을 바로잡아 3백 년의 종국(宗國)이 되었는데, 일기(日記)를 세초(洗草)167) 한 것은 자식된 마음을 만세에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서(諭書)를 짓고 「효손(孝孫)」 두 자를 은인(銀印)으로 만들어 왕에게 주었다. 이때부터 왕은 그 유서와 은인을 조회할 때와 어가가 행차할 때 항상 앞에 놓아 두었다.
그후 영조가 승하하자 왕이 물도 마시지 않고 곡을 그치지 않았다. 성복(成服)을 한 후에 왕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소원에 부대껴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면복(冕服) 차림으로 예를 행하는 것은 나의 마음에 더욱 송구스럽다. 이 예(禮)는 강왕고(康王誥)168) 에 나타났는데, 소식(蘇軾)169) 은 그것이 예가 아니라고 비난하였다. 양음(亮陰)의 법제를 비록 행하지 못하더라도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 차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것이 고례(古禮)이며 국제(國制)라고 극력 권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따랐다. 즉위하고 나서 면류관을 벗고 나서 상복을 입은 다음 중외에 유시하기를,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종통의 소중함을 생각하여 나를 효장 세자의 후사로 삼았으니, 예의를 엄하게 지키지 않을 수 없고 정리도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는 예절은 당연히 대부(大夫)의 예로써 행하고 태묘(太廟)와 같이 할 수 없으며, 혜경궁도 서울과 지방에서 진상하는 물품이 있으나 대비와 같이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이것을 구실삼아 추숭(追崇)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선왕의 유교(遺敎)가 있으므로 그들을 해당 법률로 논죄하여 선왕의 영전(靈前)에 고하였다. 그리고 장헌 세자를 높이 받들되 송(宋)나라 복왕(濮王)의 고사(故事)170) 를 따르고, 축식(祝式)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을 인용하여 황숙부(皇叔父) 및 종자(從子)로 칭하였고, 다섯 가지 제향은 생(牲)과 음악을 사용하였다.
혜경궁에는 무릇 네 번이나 책호(冊號)를 올리고 말하기를, 「예(禮)가 혹 이존(貳尊)에 가까워서 의리에 거스리면서까지 사사로이 억지로 높이 받드는 것은 내가 말한 높이 받드는 것이 아니다. 전사(前史)에 황자(皇子)와 공주(公主)에게 호를 주는 것과 본조(本朝)에서 순강(順康)과 소녕(昭寧)171) 에게 호를 더한 것은 이존의 혐의가 없고 이름을 천양하는 뜻이 있으므로, 나는 그런 의의를 일으켜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은밀히 후궁 문씨(文氏)172) 와 결탁하여 임오 옥사(壬午獄事)173) 를 빚어냈으므로, 영조께서 왕에게 이르기를,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 하고 소급해 그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하였다. 왕이 동궁에 있을 때 조재한(趙載翰) 등이 임오 옥사를 징계 토벌한다는 핑계로 환관을 시켜 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자, 왕이 그들의 간악함을 파악하고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있었는데, 그후 대상(大喪) 때 이덕사(李德師)가 또 상소하여 조재한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선왕을 속이는 역적이다.」 하고, 이내 조재한과 이덕사 등을 처형하였다. 그후 대행 대왕(大行大王)174) 의 장례 시기가 다가오자 왕이 영가(靈駕)를 따라 장지(葬地)에까지 가려고 하니, 신하들이 병이 날까 두렵다고 하면서 만류하고, 또 「옛날부터 이런 예는 없다.」고 하므로 성밖에 나가 하직을 하였다. 이때 영가(靈駕)가 이미 멀리 떠났으나 여전히 오랫동안 서서 상여를 바라보며 곡을 하니, 들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눈물을 흘렸다. 혼전(魂殿)의 제사도 반드시 친히 행하였고 기신(忌辰)을 당하면 재계와 목욕을 하고 슬픈 마음으로 사모하여 20년을 하루같이 보냈다. 그리고 언제나 태묘에 나갈 때는 13실에 이르러 몸을 굽히고 팔짱을 끼어 엄숙한 모습을 취하면서, 숙연히 열성(列聖)께서 자리에 계신 것처럼 여겼다. 초하루와 보름마다 오고(五鼓)175) 에 반드시 진전(眞殿)에 배알(拜謁)하고, 비록 비바람이 치거나 극심한 추위나 더위 속에서도 거르지 않았다. 경모궁의 담장에 일첨문(日瞻門)과 월근문(月覲門)을 건립해 놓고 수행인을 간단히 데리고 수시로 살펴보았고, 매년 5월 13일부터 21일까지 약 10일간을 재실(齋室)에서 거처하였다.
그리고 정순 대비와 혜경궁을 섬김에 있어 유순한 모습으로 하루에 세 차례 문안을 드렸고 생각에 앞서 기쁘게 해드렸으며, 뜻을 받드는 일과 음식 및 모든 물건들도 다 갖추어 정성과 효행이 모두 지극하였다. 또 매양 이르기를, 「나라에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자성(慈聖)에게 먼저 아뢰지 않고 행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혜경궁이 부스럼이 나자 주야로 걱정하며 친히 약을 고아 붙여 드리다가 손에 종기가 나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일찍이 병이 났다가 거의 1개월 만에 나았는데, 신하들이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무망중에 조심하지 않아 오랫동안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으니, 이것은 내 자신이 반성할 일이다. 감히 하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또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누차 간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존호를 올리자고 간청하였는데 경 등이 임방(林放)176) 만 못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예(禮)는 물론 인정에서 나오지만 의리로 예를 제재하는 것이다. 천년 뒤에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신하들이 감히 다시 간청하지 못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 위(位)에 올라 그 예를 행하며 죽은 사람을 산사람처럼 섬기고 없는 사람을 있는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 효도의 지극함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鄭厚謙)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의 일당 심상운(沈翔雲)·민항렬(閔恒烈)·홍상간(洪相簡) 등을 처형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홍인한과 정후겸 등의 자손을 종으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자고 청하자, 하교하기를, 「법은 천하에 공평한 것이므로 비록 임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으로 가감(加減)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죄(死罪)로 단정할 때는 죽이기 전에 결안(結案)을 받고 죽은 뒤에는 법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곧 상전(常典)인 것이다. 지금부터 결안을 받지 않고 역률(逆律)을 적용하는 것과 이미 죽은 후에 소급하여 자손을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것과 또 차율(次律)로 결안을 받고 극형의 율을 가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라.」 하였다.
하루는 도적이 경희궁(慶熙宮)에 들어왔으나 잡지 못하였고,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도적이 또 대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가 포군(舖軍)들에게 체포되어 국문하였는데, 그 도적은 홍술해(洪述海)의 아들 홍상범(洪相範)이 보낸 사람이었다. 홍상간(洪相簡)은 죽었고 그의 아비 홍지해(洪趾海)와 그의 숙부 홍찬해(洪纘海)는 모두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홍술해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장죄를 범하였으므로 사형을 감하고 장형(杖刑)을 가한 다음 유배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과 조카, 아내와 첩들이 주야로 국가를 원망하여 불측한 음모를 꾸몄다. 홍술해의 아내 효임(孝任)이 요망한 무당을 시켜 저주(咀呪)를 하려고 땅에 흉물(凶物)을 묻었고, 홍계능(洪啓能)과 홍술해의 조카 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 이택수(李澤遂) 등도 음모하여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친 것177) 과 계해년178) 반정(反正)의 설(說)을 퍼뜨렸는데, 그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은 종신(宗臣) 이찬(李欑)이었는데 여러 역적은 모두 처형되었다. 신하들이 찬은 왕실의 지친으로서 그의 이름이 추대의 명단에 들어 있다고 하여 그를 체포하여 신문하자고 청하자, 왕이 갑자기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백관들이 대궐 뜰 앞에 엎드려 찬을 처형하자고 극력 간청하였으나 여전히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과 금부의 당상관들이 마침내 찬을 금부(禁府)로 데려다가 자결하도록 하였으나 찬이 따르지 않고 저항하니, 다시 왕에게 고하여 사사(賜死)하였다. 왕이 매우 가슴 아파하며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장례를 후히 치르게 하였다. 이에 《명의록(明義錄)》의 원본(原本)과 속본(續本)을 편찬하여 역적들의 시말을 드러냈다.
홍국영은 궁관(宮官)으로 있을 때부터 특별히 총애를 받았는데, 왕이 즉위한 후 갑자기 높은 관직으로 발탁되어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금중(禁中)에 있었다. 그가 날로 교만하고 방자해져 권세를 마구 휘두르자 왕이 점차 그의 간악한 정상을 알았으나 참고 적발하지 않았다. 이때 정순 대비(貞純大妃)께서 내교(內敎)를 내려 사족의 규수를 간택하여 후궁[嬪御]에 두어 널리 저사(儲嗣)를 구하게 하였는데, 홍국영의 누이가 빈(嬪)의 간택에 응하였다. 그가 간택된 지 얼마 안되어 빈(嬪)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홍국영이 말하기를, 「저사(儲嗣)를 널리 구하는 일은 다시 거론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이인(李䄄)의 아들 이담(李湛)이 있었는데, 홍국영이 그를 보고 기화(奇貨)로 생각하여 그의 군호(君號)를 완풍(完豐)으로 고치고 항상 「나의 생질(甥姪)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홍빈(洪嬪)의 수빈관(守殯官)으로 삼았으니,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고 길을 가는 사람들도 눈짓을 하였다. 홍국영이 또 송덕상(宋德相)을 유림(儒林)의 이름을 빌어 끌어 들였는데 소명(召命)에 응하여 이르러 소장(疏章)을 올려 저사(儲嗣)의 일을 말하였다. 그 내용에 「모양(某樣)의 도리(道理)는 아랫사람으로서 말씀드릴 일이 아니오나, 신이 숙위 장신(宿衛將臣)을 대면(對面)하였는데 이 일을 제일의 의의로 알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숙위 장신은 곧 홍 국영이며 이 일이라는 것은 담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왕이 그를 시종 보호하려고 어전에 불러 놓고 그의 죄를 들어 말하고 그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였다가 명을 내려 전리(田里)로 추방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태어난 지 5세 때 훙(薨)하자 대비가 또 내교를 내려 홍국영이 은밀히 국권을 옮기려고 시도한 죄를 선포하고 또 상변(喪變)으로 인하여 신하들이 성토를 느슨하게 한 것을 책망하였다. 이에 빈청(賓廳)에서 담의 봉작(封爵)을 삭탈하여 그의 속적(屬籍)을 끊고 인(䄄)은 왕법(王法)으로 단죄할 것을 청하니, 왕이 그 계사를 불에 태워버렸다. 담의 외조부인 송낙휴(宋樂休)가 또 고변(告變)하여, 장신(將臣) 구선복(具善復)이 인·담과 내통한 일을 모두 들추어냈으므로 구선복이 마침내 처형되었다. 이에 백관들이 대궐 뜰에 나와 인을 국법으로 처리할 것을 청하자, 왕이 합문(闔門)을 닫고 수라를 들지 않다가 신하들이 합문에 엎드려 관을 벗고 강력히 간쟁(諫爭)하니, 인과 그 가실(家室)을 강화(江華)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옛날 양옥(梁獄)179) 이 지극히 참혹하였으나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양왕(梁王) 유무(劉武)를 힘써 보호한 것은 전숙(田叔)의 충성에 힘입었던 것이다. 아! 애석하다. 오늘의 조정 신하들은 전 숙의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를 대하는 것이 어찌 한나라의 경제만 못하게 한단 말인가?」하였다.
왕이 비록 인을 섬에 안치하였으나 내부(內府)에 명을 내려 의복과 음식을 계속 갖다 주라고 하므로 문안을 하는 사람과 음식을 갖다 주는 사람이 길에 줄을 이었고 또 항상 내사관(內司官)을 보내어 은밀히 불러 보았다. 그때마다 신하들이 간하면 왕이 말하기를, 「이런 경우를 이른바 주공(周公)의 허물180) 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또 정후겸의 어머니를 완전히 석방해 주었는데, 그를 선왕이 총애하는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비록 그의 죄악이 컸지만 관대하게 용서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를 경기의 섬으로 유배하였다가 뒤에 한성(漢城)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심지어는 대내(大內)로 불러 보았는데,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인·이진(李禛)·이찬은 모두 왕의 서제(庶弟)이다. 진은 영조 때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왕이 그를 추억하고 슬퍼하여 품계가 높은 종신(宗臣)의 예로 개장(改葬)하고 그의 묘(廟)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으며,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고 친히 그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다. 왕이 중년 이후로 개연(慨然)히 이르기를, 「한(漢)나라 4백 년 기업(基業)이 어찌 풍류가 두텁고 금망(禁網)이 성긴 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지금 직접 악역(惡逆)을 범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석방하여 조정에 형벌에 걸린 사람이 없게 하고 세상에는 버림받은 가정이 없게 하고자 한다. 이것이 어찌 화기(和氣)를 주도하고 영명(永命)을 비는 근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정 신하들의 실정을 곡진히 살피어 생존해 있든 사망하였든간에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하여 봄에 꽃을 구경할 때도 이르기를, 「상신(相臣)이 빈소(殯所)에 있는데 어찌 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민사(民事)에 더욱 정성을 기울여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을 보낼 때 반드시 불러 보고 유시하여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백성의 병폐를 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암행 어사를 보내어 불법 행위를 적발하고 호소할 데 없는 억울한 사정을 펴게 하였으며, 혹은 군읍(郡邑) 및 조정의 정리(正吏)를 불러 보고 백성들의 질고를 물어 보았다. 또 측우기(測雨器)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측정하고 장대[竿]를 세워 풍향(風向)을 알아보면서 비가 한 번 내리고 날씨가 한 번 개인 것까지 반드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명례궁(明禮宮)을 동궁(東宮)의 별탕고(別帑庫)로 삼았는데, 왕이 대리 청정하던 초기에 이르기를, 「먼저 근본을 밝게 해야 한다.」 하고 즉시 호조로 이관하였다. 각 궁방(宮房)에서 사사로이 궁차(宮差)를 보내어 세를 징수하여 궁장(宮庄)에 바치게 하였는데 곳곳마다 횡포를 부리고 잔학한 방법으로 세를 거두어 들였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내수사(內需司)의 쇄관(刷官)들이 여러 도에 가서 노비를 추쇄(推刷)하면서 백방으로 조종하였으므로 쇄관이 가는 곳마다 마을이 모두 텅텅 비었으니, 이런 폐단이 오랫동안 고질이 되었다. 왕이 이르기를, 「국가에 이롭고 백성에게 이롭다면 이 살을 깎는다 하더라도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선왕께서 과인(寡人)에게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궁가 전결(田結)의 대수가 다하였는데도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과 규정 외에 더 받아들인 것은 국가의 경비를 손상케 하고, 궁차(宮差)가 마구 긁어모으는 것은 더욱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대수가 다하였는데 거두어 들이지 않은 것과 더 받은 곳을 조사하여 모두 호조로 돌려보내고, 궁가의 세금은 각 고을에서 직접 호조에 바치면 호조에서는 이를 받아 각 궁가에 떼어 주게 하고 궁차를 폐지하였으며 쇄관을 영원히 폐지하고 여러 도로 하여금 비총(比摠)181) 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또 궁인(宮人)의 수를 줄이고 이속(移屬)의 명목을 폐지하여 그 비용을 국가 경비로 돌렸다. 경영(京營)의 엽치군(獵雉軍)은 곧 응사(鷹師)의 구계(舊契)였는데 그들이 사냥을 할 때마다 엽군(獵軍)이 10명 내지 1백 명으로 떼를 지어 설치고 다녀 큰 소란이 일어났고, 심지어는 사람을 살해하기도 하였으므로 엽치군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관서(關西)의 공삼(貢蔘)과 제주(濟州)의 공복(貢鰒)도 탕감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선왕의 뜻이다.」 하였다. 또 옛날 대여해 준 8도의 곡물 10만 석도 탕감하면서 이르기를, 「선왕께서 50년 동안 고심하면서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셨으니 계술(繼述)하는 방도는 이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흉년을 만나면 날마다 조정 신하들을 접견하여 구호의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구황(救荒) 정사의 요령(要領)을 전벽(殿壁)에다 죽 써 놓고 항상 보면서 시행하였다. 또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로하고 신칙하게 하였는데, 열 줄의 한 서찰(書札)이 여러 도에 널리 반포(頒布)되었다. 그리고 상공(常貢)을 폐지하고 상세(常稅)를 감하였으며, 창고를 열어 곡식을 운반하여 구호하였고 적향(糴餉)의 수봉(收捧)을 중지하여 식량을 넉넉히 하였으며 내탕고의 재화를 덜어내 보충하기도 하였다. 경기에 흉년이 들자, 왕이 말하기를, 「지금 곡물을 발매하는 것은 곧 한(漢)나라 때 진휼미를 대여한 것과 같다.」고 하면서 한성부로 하여금 굶주린 백성을 뽑아 값을 낮추어 쌀을 나누어 주게 하였으며, 서울에 돈이 귀하자 관전 15만 민(緡)을 풀어 이자 없이 공시민(貢市民)에게 대여해 주었다. 그리고 제주가 바다 멀리 있다고 하여 흉년이 들 때마다 더욱 걱정을 하였다. 일찍이 내탕고의 돈 백만 냥을 호남에 내려보내어 곡물을 사서 구제하게 하였고, 또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해신(海神)에게 잘 건너게 해 달라고 제사를 지냈다. 또 도로에 버려진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겨 옛날 광제원(廣濟院)과 육영사(育嬰社)의 법을 모방하여 《자휼전칙(字恤典則)》을 제정하여 안팎에 반포한 다음 거두어 기른 아이들의 수를 매월 보고하게 하고 관아에서 사람의 수에 따라 식량을 공급하였다. 또 서울에 유행병[疹疫]이 치성하자 왕이, 「양제(禳祭)는 고례(古禮)이다.」라고 하면서 사방 교외에 별려제(別厲祭)를 지내게 하였으며, 또 오부(五部)로 하여금 집이 가난하여 자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방곡(坊曲)의 백성을 조사하게 한 다음, 양의사(兩醫司)에서 의원을 선택하여 그들을 진찰하고 약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때 문효 세자의 상을 당하였으나 왕은 날마다 유사(有司)에 신칙하여 백성을 구제하게 하여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또 명을 내려 서울과 지방의 언덕에 흩어져 있는 시신(屍身)을 모두 묻어 주게 하였다.
왕의 시대에는 하나의 백성도 그의 혜택을 받지 않은 자가 없으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모두 그의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형벌과 옥사를 신중히 다루어 한 사람이라도 혹 잘못 처리될까 염려하였다. 여러 도의 녹안(錄案)을 심리할 때마다 입시한 신하가 받들어 써서 날이 저물 때까지 번(番)을 바꾸었으나 왕은 조금도 피곤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내각(內閣)에서 어제 판결문(御製判決文)을 수집하여 《심리록(審理錄)》 26권을 만들었는데, 글자마다 측은하고 자상한 뜻이 담겨져 있었다. 옥관(獄官)에게 신칙하여 항상 옥문을 깨끗이 청소하고 형구(刑具)도 깨끗이 씻도록 하였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은 그날로 판결하여 돌려보내고, 법에 어긋난 태(笞)·장(杖)·가(枷)·곤(棍) 등을 모두 바로잡았으며, 《흠휼전칙(欽恤典則)》을 편찬하여 이를 통용(通用)시켜 규식(規式)을 삼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에서는 모두 5일 만에 한 번씩 죄수를 심리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10일 만에 한 번씩 심리하여 아뢰고 있다. 그렇다면 10일 사이에 비록 잘못 처리된 죄수가 있더라도 어떻게 본인들이 그 억울한 사정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해조(該曹)에서 5일 만에 한 번씩 죄수를 심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침원(寢園)에 심은 나무를 벌레가 뜯어먹으니, 바야흐로 벌레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옛날에는 모두 구덩이를 파고 불에 태워서 묻었다. 왕이 이르기를, 「이 벌레도 생물(生物)이니,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불에 태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일찍이 들어 보건대, 벌레가 날아 바다에 들어가면 고기와 새우가 된다고 하였으니, 그 벌레들은 모두 바다에 던지게 하라.」 하였다. 어느날 부용정(芙蓉亭)에서 잔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 들보에 제비집이 있었다. 제비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려고 날아왔다가 그 주위를 맴돌며 들어가지 않자, 왕이 그 제비를 불쌍히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이는 또 비록 하찮은 새나 벌레도 지극한 사랑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전(傳)에, 「친족을 친근히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미물(微物)을 사랑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곧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영조의 어제(御製)를 이미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세조와 숙종 두 조정에서는 규장각(奎章閣)이란 명칭만 있고 설치되지 않아, 송나라의 용도각(龍圖閣)182) ·천장각(天章閣)183) 의 제도처럼 어제를 봉안할 곳이 없었다. 이에 내원(內苑)에 규장각을 건립하였고, 열성(列聖)의 신장(宸章)·보한(寶翰)을 별도로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선왕조의 사적을 편찬한 사람들 중에서 임무(任務)만 있고 관직이 없는 사람에게는 용도각의 학사(學士)·직학사(直學士)의 제도를 모방하여 제학(提學)과 직제학(直提學)을 설치하고, 또 직각(直閣)과 대교(待敎)를 설치하여 직각(直閣)과 대제(待制)를 모방하였다. 또 임금의 초상화를 그려 규장각(奎章閣)의 주합루(宙合樓)에 봉안하고, 손수 이문원(摛文院)의 편액(扁額)을 써서 숙직하는 관서(官署)에 걸게 하였다. 드디어 이문원에 나아가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및 각신(閣臣)들에게 책을 끼고 당(堂)에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고 경의(經義)를 토론하였으며 치도(治道)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거둥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그후 대제학을 설치하고 문형(文衡)의 의망에 오른 사람으로서 성지(聖旨)를 기다려 추천토록 하였으나, 마침내 임명된 사람은 없었다. 이때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강독(講讀)과 제술(製述)을 시험 보였다. 왕이 문신들이 전경(專經)의 강독과 월과(月課)의 제술을 하다 말다 그만두는 것은 학자를 육성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하여 정부로 하여금 승문원의 참상(參上)과 참하(參下)로서 37세 이하인 사람만 뽑아서 아뢰라고 한 다음, 다달이 열흘마다 경사(經史)를 강하고 정문(程文)을 시험하여 우열을 가려 상벌을 시행하였다. 항상 권과(勸課)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축년184) 에 선발한 이후 무릇 10회를 선발하였는데, 지금 공경 대부들은 대부분 이때 선발된 사람이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태학(太學)의 유생들을 불러 강하고, 이어 식당(食堂)을 설치하면서 이르기를, 「정자(程子)가 승사(僧舍)에서 〈승니(僧尼)들이〉 모여 식사하는 것을 보고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있다고 감탄하였는데, 하물며 현관(賢關)의 식당이겠는가? 북소리에 따라 나아가 차례로 앉는 그 질서가 볼 만하기 때문에 나는 유생들과 함께 즐거이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채소와 소금이 박한 찬이기는 하나 진수 성찬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반궁(泮宮)185) 에서 어제(御題)를 내려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나서 선발된 사람을 불러 술을 내리고 항상 사용하던 은배(銀盃)를 하사하였는데, 그 술잔에는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유생들이 시가(詩歌)를 지어 그 일을 읊으니 왕이 친히 명시서(銘詩序)를 짓고 첫머리에 《태학은배시집(太學銀盃詩集)》이라고 썼다. 태학에서의 강시(講試)하는 규칙을 밝혀 혹은 마루에 나와 친히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어제(御題)를 내려 친히 성적을 고시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경의(經義)를 조목조목 물어보기도 하면서 종종 상제(上第)186) 를 내려 초사(初仕)를 제수하는 등 상을 골고루 주었으므로, 팔방(八方)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기풍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정시문정(正始文程)》과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풍패빈흥록(豐沛賓興錄)》·《관북빈흥록(關北賓興錄)》·《관서빈흥록(關西賓興錄)》이 있었는데, 이와 같이 교육하기를 즐거워하고 선비들을 명예롭게 한 훌륭한 일은 옛날에도 없었다. 대신(大臣)·전신(銓臣)·방백(方伯)의 신하에게 명을 내려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한 사람들을 추천하게 하였고, 서양(西洋)의 야소사교(耶蘇邪敎)를 익힌 자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을 처형하라고 하였다. 왕이 춘궁(春宮)에서 덕을 기를 때부터 취침시 문안과 어찬(御饌)을 보살필 때가 아니면 경적(經籍)에 골몰하였다.
왕위에 올라서는 하루에 여러 가지 정무를 보살피느라 날이 밝기도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진 후에야 저녁 수라를 들었다. 좌우에 서적(書籍)을 펼쳐놓고 우러러 생각하며 굽어 사색하여 밤을 낮으로 삼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어찌 학문의 공부가 있겠는가? 지난 세월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마음에 충격을 받아 성격이 단단해진 이익이 없지 않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는 저술에 유의하다가 다시 경학(經學)에 종사하여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꿇어앉은 것도 공부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몸과 마음에 도움이 있는지 느끼지 못하겠다. 그리고 제왕(帝王)의 학문은 선비들의 학문과 달라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심성(心性)과 이기(理氣)도 반드시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없는데, 더구나 글짓는 일에다 어찌 나의 심력을 낭비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문장력을〉 발휘하면 은하(銀河)와 같아, 그 신명(神明)의 변화는 넓고도 온화하여 요전(堯典)·우모(禹謨)와 대아(大雅)·주송(周頌)처럼 아름다웠다. 《홍재전서(弘齋全書)》 3집(集) 1백 권이 있고, 또 《대학유의(大學類義)》·《존주휘편(尊周彙編)》·경사자집(經史子集) 4부와 손수 권점(圈點)을 찍은 《송사진전(宋史眞詮)》·《오륜행실(五倫行實)》·《향례합편(鄕禮合編)》·《팔가백선(八家百選)》·《주자서회영선(朱子書會英選)》·《통백선(統百選)》·《회선절약(會選節約)》의 여러 편이 있었는데, 이는 공자가 《춘추》를 산술(刪術)하였던 취지와 맞는 것으로서 가슴속에 쌓인 문장이 밖으로 드러나 모두 여기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술(邪術)을 물리쳤으며 경훈(經訓)을 숭상하고 잡서(雜書)와 패설(稗說)을 배척하여 오교(五敎)187) 와 삼물(三物)188) 로서 크게 학교를 일으켰다. 이에 일시 문치(文治)를 기다리던 선비들이 너나없이 자연의 법칙이 약동하는 가운데 고무되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작고하였으나 글이 여기에 있지 않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왕은 천부적으로 용맹과 지혜를 타고나 신성(神聖)한 무예(武藝)가 세상에 으뜸갔다. 많은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흉측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군왕(君王)의 권강을 총괄하였으며 태아(太阿)189) 를 손에 들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고 해이(解弛)한 기강을 떨치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감히 그 한계선을 엿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어 겉과 속이 통하였으므로, 안으로 조정에서부터 외딴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하였다」라고 하였다. 선전관 천망과 금군(禁軍)을 설치하여 무예를 익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수어청(守禦廳)과 경영(京營)을 폐지하고 북관(北關)190) 에 양진(兩鎭)을 설치함으로써 불필요한 군병을 줄이고 변경(邊境)을 개척하였다. 《병학통(兵學通)》·《무예도보(武藝圖譜)》를 저술하여 충형(衝衡)·기정(奇正)과 좌작 격자(坐作擊刺)의 법을 모두 익히게 하였다. 여가가 있을 때는 내원(內苑)에 나아가 진(陣)을 쳐 놓고 구경하다가 사방을 둘러보며 지휘하였는데, 그것은 풍운(風雲)이 몰아치는 것 같았으니, 이는 우리 효종(孝宗)이 척뇌당(滌惱堂)에서 말을 시험한 뜻이었다. 활을 쏘는 기예는 천부적으로 타고나 50발을 쏘면 49발을 맞추었는데, 「모든 일이 마음속에 다 만족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한 것도 한갓 숙위(宿衞)를 갖추거나 융원(戎垣)을 위한 것이 아니며, 항상 「균역법(均役法)에 군포(軍布)를 감하게 한 것은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힌 선왕조의 지극한 뜻이었는데, 그 일을 맡은 신하가 잘 선양하지 못하여 모두 구차하고 불편하다.」고 여겨 이 제도를 폐지하여 변경할 예정이었다. 그 기획의 시행과 신산(神算)의 미친 바는 억측하거나 갑작스레 의논하는 자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외영(外營)의 위부(衞部)를 구제(舊制)로 정한 것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다.
아! 그러나 이제는 그만이다.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신성한 무예를 밝게 펼치어 만백성이 따랐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병신년191) 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최석항(崔錫恒)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왕이 신임(辛壬)192) 의 의리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고 하여 을해년193) 의 처분을 따르라고 명한 것이다. 그리고 신축년194) 에는 사충사(四忠祠)195) 에 제사를 내렸고 고 학생 서덕수(徐德修)에게 증직하였으며, 갑진년196) 에는 사대신(四大臣)197) ·삼장신(三將臣)198) ·사절도(四節度) 및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 증(贈) 판서(判書) 이정소(李廷熽)에게 제사를 내리고, 증 판서 조성복(趙聖復)과 증 참판(參判) 김성행(金省行)에게는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그리고 무신년199) 3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곧 우리 선왕(先王)200) 께서 무예를 떨치어 난을 평정한 연월이라, 61년이 되는 옛날의 해가 돌아오니, 한갓 높은 덕망과 청고한 절개가 추억된다. 소자(小子)의 추모하는 마음에 어찌 그 충성과 노고를 갚아 선왕에게 받은 은덕을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순절(殉節) 및 왕사(王事)에 노고한 여러 신하에게 두루 제사를 지내고 여러 도에 명을 내려 생존해 있는 종군 장사(從軍將士)들을 찾아 그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며, 또 임오년201) 이전에 직분을 다한 신하들을 추모하여 모두 포상하였다.
처음에 세조가 대제학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태조·태종·세종·문종 네 조정의 《보감(寶鑑)》을 편찬하게 하였고, 그후에는 다만 이단하(李端夏)가 편집한 《선조보감(宣祖寶鑑)》과 이덕수(李德壽)가 편찬한 《숙종보감(肅宗寶鑑)》이 있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이 완성되자, 왕이 《보감》을 편찬하도록 명을 내리고 또 열두 조정에 아직 《보감》이 없다고 하여 그것도 모두 편집하게 하였는데, 무릇 68권이었다. 이때 하교하기를, 「열성조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周)나라 때 종묘에 진열한 보기(寶器)를 모방한 것이므로 반드시 종묘로 들어갈 때 봉안해야 하지만, 《보감》은 그 공덕을 천양하여 후손에게 전할 것으므로 《서서(書序)》와 《대훈(大訓)》과 더불어 그 규모가 같으니, 비록 아름다운 공적을 적은 완염(琬琰)과 법도가 소명한 새장(璽章)도 그 중요함을 비유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이에 친히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보감》을 올려 각실(各室)에 나누어 두고 영조를 높여 세실(世室)로 삼았다.
왕이 또 영조께서 편찬한 《갱장록(羹墻錄)》을 구하여 이르기를, 「열성조에서 다스렸던 법과 정사의 규범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보감》을 편찬하는 해에 이 《갱장록》도 분류(分類)하여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간절한 일이다.」 하고,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계속 편찬하게 하였다. 왕이 하루의 일을 반드시 기록하였는데, 《기거주(起居注)》에 빠지거나 착오된 것이 많다고 하여 내각(內閣)에 명하여 별도로 편집하게 하고, 증자(曾子)의 일삼성(日三省)의 뜻을 취하여 《일성록(日省錄)》이라고 하였으며, 각신(閣臣)들이 또 연석(筵席)에서 들은 성상의 말을 기록하고, 이를 《일득록(日得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왕이 유시하기를, 「이 《일성록》은 경의(經義)를 논란한 것과 시정(時政)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믿고 살피기 위한 것인데, 만일 분에 넘치는 과장만 늘어 놓으면 후세에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단종조(端宗朝)의 시사(時事)에 감격하여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육신(六臣)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순절한 신하 2백 30인의 사적을 널리 상고한 후 장릉(莊陵) 곁에 단(壇)을 설치하여 춘추로 제사를 지냈는데,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에 나와 있다. 또 황단(皇壇)202) 에 망배(望拜)할 때마다 선무사(宣武祠)203) 에 관원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고, 이제독(李提督)204) 에게는 대대로 부조사(不祧祠)205) 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의주의 현충사(顯忠祠)206) ·기충사(紀忠祠)207) 양사(兩祠)에 편액을 내리고 또 칠의사(七義士) 임인관(林寅觀) 등 95인은 단제(壇祭)를 지내어 오직 나라 위하는 의리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척화(斥和)한 신하들도 모두 표장(表奬)하고 그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였으며, 충신 의사단(忠臣義士壇)을 건립하고 정충상무비(旌忠尙武碑)를 편찬하였는데, 《존주록(尊周錄)》에 나와 있다. 왕이 삼황(三皇)208) 의 기신(忌辰)마다 소찬(素饌)을 드시며 이르기를, 「근고(近古) 이상에는 공좌(公坐)에서 회식(會食)할 때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고 국기(國忌)가 있을 때는 조정 신하들이 이틀 동안 모두 소찬을 먹었다. 선왕조의 초기만 해도 이와 같이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적전(東籍田)209) 에서 벼베는 것을 살펴볼 때 농부에게 위로주(慰勞酒)를 하사하고 유시를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정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유시를 내려 농사를 권장하고 또 벼베는 것을 살피는 것으로써 다시 신칙하였다. 왕이 항상 이르기를, 「요(堯)·순(舜)을 본받으려고 하면 당연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넓은 도량은 태조를 본받고, 빛난 문치(文治)는 세종을 본받으며, 영특한 무예는 세조를 본받고, 지극한 효행은 인종(仁宗)을 본받으며, 자나 깨나 풍천(風泉)210) 을 생각하여 대의(大義)를 발휘한 것은 효종을 본받고, 현인을 기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 위엄과 영단을 빛내는 것은 숙종의 치체(治體)이며, 황극(皇極)211) 을 세워 우리 세신(世臣)을 보호한 것은 영조의 심법(心法)이다.」라고 하였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크게 드러났다, 문왕(文王)의 모훈(謨訓)이여! 크게 계승하였다, 무왕(武王)의 공훈(功勳)이여!」라고 하였으니, 그 말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선왕의 혼전(魂殿)에서 이미 빈소(殯所)를 열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상례보편(喪禮補編)》에 「혼상(魂箱)으로 조전(祖奠)을 행한다.」고 하였으나, 상례(喪禮)는 날짜를 앞당기는 일은 있어도 뒤로 물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예기》의〉 단궁(檀弓)에는 「부하(負夏)212) 에서는 주인이 이미 조전을 마친 후 널을 밀고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자유(子游)가 그것은 실례(失禮)라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뜨락 안에서 널을 밀고 돌아온 것도 실례라고 비난을 하였는데, 더구나 혼상(魂箱)으로 나가 태묘(太廟)에 하직하고 다시 빈전(殯殿)으로 돌아올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혼(魂)이 실당(室堂)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선유(先儒)의 말이지만, 조전을 행할 때 재궁(梓宮)213) 으로 하지 않고 혼상으로 하는 것은 모두 예의(禮意)가 아니다. 고례(古禮)를 기준으로 하려고 하면 고금의 사리가 다르니, 이는 급히 논할 일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오례의(五禮儀)》의 국제(國制)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담제일(禫祭日)에 헌현(軒懸)214) 을 울리자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대상(大祥)에는 소복(素服)을 입고 이달에는 담제를 지내며 한 달 지나서는 풍악을 즐기는 것이다. 맹헌자(孟獻子)215) 가 담제 때 헌현을 즐겁게 여기지 않자 공자가 이르기를, 「보통 사람보다 한 등급이 더 높다.」고 하였는데, 막 초상을 치르고 나서 어찌 차마 종고(鍾鼓)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대소 법악(法樂)은 매달아 두고 사용하지 않게끔 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묘에서 체제(禘祭)를 거행할 때 특히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을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애당초 의정부에서 영조의 묘정에 배향할 신하들을 의논해 올릴 때에 김창집은 영조를 섬기지 않았으므로 그 의논에 들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송(宋)나라 장준(張浚)이 효종(孝宗)을 세울 때에 공로가 있었으나, 의논하는 자들은 그 일이 다른 조정에 있었다고 하여 묘정의 배향을 어렵게 여겼는데, 〈문신(文臣)인〉 양만리(楊萬里)만 혼자 배향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고 상신(相臣)이 나라의 대계를 결정한 대의(大義)와 순절한 충의는 장준의 고사를 인용해 의거하는 것이 정당하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효종과 선정(先正) 사이는 정의가 긴밀하였으니, 그것은 곧 《춘추(春秋)》의 대의인데 아직도 배향을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결여된 일이라고 하겠다.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이 배향하기를 기대하지 않은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세종께 배향하고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은 인종께 배향하였으니, 문정공(文正公)의 배향을 또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환조(桓祖)가 탄생한 지 여덟 번째 회갑년(回甲年)인 을묘년216) 에 대신을 함흥의 본궁(本宮)으로 보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때 함흥의 유생 중 영흥(永興)의 본궁에 전사청(典祀廳)의 고적(故蹟)이 있다고 상소한 사람이 있자, 왕이 매우 감격하여 이 사실을 조정 신하들에게 물어 보고 나서 대신과 예관(禮官)을 보내어 환조 대왕(桓祖大王)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의 본궁에 배향하였다.
양 본궁에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위패를 모시는 것은 원묘(原廟)의 제도이다. 옛날에는 내수사(內需司)의 별차(別差)가 제향을 맡았는데, 그들이 예를 어기는 일이 많았으므로 왕이 모두 그 의절(儀節)을 시정하고 매년 의폐(衣幣)를 봉할 때 반드시 재실(齋室)에서 유숙하였다. 또 대사(大社)에 친히 나아가 곡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고 나서 대사(大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여러 도에 신칙하여 사단(社壇)을 보수(補修)하고 보호를 잘하게 하되, 매월 예조 판서에게 보고하여 성적을 매기게 하였으며, 황단(皇壇)의 제향 때에 처음으로 친히 희생과 그릇을 살피도록 정하였다.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文廟)에 배향하게 하고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고쳤으며,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의 사당에 대로사(大老祠)로 편액을 하사하고 손수 비문을 짓고 써서 그 사당의 뜨락에 세웠다. 단군과 기자(箕子) 및 삼국 고려 시조와 여러 왕릉(王陵)을 골고루 수축하였고, 온조왕(溫祚王)의 묘호(廟號)를 숭렬전(崇烈殿)217) 으로 하였다. 또 환관들이 신하들과 대화를 못하게 하였으며 무당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한강 밖으로 내쫓았고, 승려(僧侶)들도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도에 유시를 내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노인을 쉬게 하고 농부를 위로하여 널리 공경하고 근본을 알게 하는 뜻으로 포고하니, 농서(農書)를 구하여 그 취지에 응하고자 글을 올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우리 조정의 경제서(經制書)로는 세종이 지은 《육전(六典)》, 세조가 저술한 《경국대전(經國大典)》, 성종 때의 《속록(續錄)》, 숙종 때의 《집록통고(輯錄通考)》, 선왕조의 《속대전(續大典)》이 있었다. 왕이 원전(原典)과 속전(續典)이 각각 한 책으로 되어 있어 참고하기에 어렵다고 하여 그 두 대전(大典)과 속전(續典)을 가져다 선왕의 교령(敎令)과 왕의 수교(受敎) 등 법령으로 삼을 만한 것을 모두 한 책으로 묶었는데, 이것이 《대전통편(大典通編)》으로서 안팎에 반포된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대정(大政)218) 행하면서 하교하기를, 「서경(書京)219) 의 이선(吏選)이 가장 중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을 기용할 때 이미 과목(科目)을 사용하였는데, 문신(文臣)의 시종(侍從)이 도리어 음직(蔭職)과 무관만도 못하다. 그리하여 안에서는 부세(賦稅)를 관장하는 관리가 되지 못하고 밖으로는 지방 장관(長官)이 되지 못하므로, 그들은 금전·곡식·갑병(甲兵) 등도 모두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신진 문신들은 낮은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민생의 질고를 익숙히 알게 한 다음 그들을 역마(驛馬)를 타고 오라고 불러들여, 조정에 나와서는 말로, 물러가서는 상소로, 그 이로운 점과 폐단을 아뢰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구중 궁궐이 비록 깊지만 사방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백성과 나라에 도움되는 것이 날마다 암행 어사를 보내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하고, 정사(政事)에 문관과 음직·무관을 번갈아 차출하라고 신칙하였다. 왕이 세상에 흔치 않은 자질로 태어나 큰일을 할 수 있는 뜻을 가졌다. 정치와 관리를 바로잡고 질(質)과 문(文)을 참작하여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 등의 예절과 절도에 있어서 경전(經典)을 참고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고금을 박섭(博涉)하여 예악(禮樂)과 물채(物采)가 찬연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관부(官府)와 군현(郡縣)에 이르기까지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없었고, 도량 형기에도 법도가 없는 것이 없었으며, 주모(籌謨)·전주(銓注)·군실(軍實)·옥결(獄決)·방용(邦用)·민수(民數) 등에 있어서도 상고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일부(一部)의 대전(大典)이 질서가 정연하여 일대 왕자(王者)의 헌장(憲章)이 되었다.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천하의 안녕을 구하여 그 성공을 보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왕이 하늘을 엄숙하고 신중히 섬겨 빛이 비친 곳에 기우듬히 서서 몸을 기대지 않았으며 옷을 갈아입고 대소변을 볼 때에도 북쪽을 향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북극성이 있는 바이다.」라고 하였고, 거센 바람과 빠른 천둥과 폭우(暴雨)를 만날 때는 반드시 얼굴색을 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히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주위를 맴돌거나 문을 나설 때 옷깃을 가지런히 하여 공경을 표하였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술잔을 올릴 때는 종종걸음을 걷고, 나갈 때 옷깃이 새 깃처럼 정연하였으므로, 백관이 부지런히 달려와 엄숙하고 화목한 자태를 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혹 명을 내려 대행시킬 때에는 근신(近臣)을 보내어 그 일을 감시하게 하였으며, 재전(齋殿)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제례(祭禮)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편히 쉬었고, 능(陵)과 원(園)의 제향 때도 반드시 떡·과일·구이(糗餌) 등을 가져오게 한 다음 꿇어앉아 맛을 보았다.
일찍이 무더운 날씨에 빈연(賓筵)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오늘 날씨가 매우 덥자 문득 경들을 일찍 퇴근시키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은 게으른 마음이다.」 하고, 해가 저문 후에 끝냈다. 한가한 시간에 접견할 때는 예절을 생각하고 늘 상쾌한 웃음을 웃으시므로 한집안의 아비와 아들의 사이처럼 온화하였으나, 법전(法殿)에 나아갈 때에는 신하들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일찍이 양방(兩坊)의 빈객(賓客)이나 관원을 지낸 자는 비록 음관(蔭官)이라도 직명을 부르고 이름은 부르지 않았으며, 비록 대내(大內)에서 만나보는 친근한 사람과 외척의 신하라도 조정의 정사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고, 비록 좌우에 있는 내시(內侍)의 무리라 하더라도 공사(公事)가 아니면 앞에 오지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사대부를 접한 시간이 많고 환관과 궁녀들을 접한 시간은 적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 일에 대해서 거의 부끄럼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귀주(金龜柱)가 주연(胄筵)220) 의 말로써 임금 앞에서 홍봉한(洪鳳漢)을 논죄하였을 때엔 그를 먼 섬에 유배하여 위리 안치하였고, 홍낙임(洪樂任)을 반력 명단(頒曆名單)에 두고 홍수영(洪守榮)을 제관(祭官)에 차출하였을 때엔 병조 판서와 전형의 관원을 유배하는 등, 양쪽의 처분을 엄히 내렸다. 또 정사에 부지런하여 무릇 조참(朝參)·상참(常參)·빈대(賓對)·윤대(輪對)를 반드시 행하고, 신하들의 상소와 안팎의 장계도 즉시 가부를 회답하여 하나도 미루지 않았다. 낮에 신하를 접하여 밤이 될 때까지 있는 때가 많았고 금중(禁中)의 자물쇠를 열기도 전에 명령이 이미 내렸으며, 한나절이 되도록 수라를 들겨를이 없으므로 너무 과로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왕이 이르기를, 「나는 피로하지 않다. 나라를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당연히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갖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다가 마음을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검소함을 지켜 옷을 누차 빨아서 입었고, 곤복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수라상에 진귀하고 신선한 반찬이 없었다. 침전(寢殿)도 소박하여 창과 벽에 그을음이 찌들었으므로 유사(有司)가 다시 수리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경비가 많이 들어 수리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나는 그것이 더럽게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어좌(御座) 곁에는 도서(圖書)와 기물(器物)이 모두 일정한 곳에 정돈되어 있었으며 당실(堂室)의 구석진 곳에도 관서(官署)와 같이 규모가 정연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그윽한 곳에 혼자 계신 경지(境地)를 알 수 있다. 전(傳)에 이르기를, 「가지런하고 씩씩하며 중정(中正)하면 족히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날이 가물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 위해 지제교(知製敎)가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축문에 자책(自責)하는 말이 없으니 되겠는가?」 하고 글을 고치라고 명한 다음, 유시를 내려 열 가지 일로 자신을 책망하였다. 또 대우단(大雩壇)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일산을 쓰지 않은 채 보여(步輿)를 타고 대우단으로 가서 온종일 한데 앉아 있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서 면류관과 곤복을 벗지 않고 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과연 비가 내렸다. 왕이 이 밝은 천명(天命)을 돌아보시고 상제(上帝)를 공경하여 언제나 이르기를, 「하늘이 먼 곳에 있는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 유행병이 있을 때는 두려워하고 자신을 살펴 시종 게을리하지 않았다.
본디 총명(聰明)과 성지(聖知)를 타고났지만, 백대(百代)의 치란(治亂)과 구류(九流)의 예술과 인물의 성정(性情)과 귀신의 변화를 마음으로 깨우치고 뜻으로 이해하고 이르기를, 「이치는 하나뿐이지만 만물을 포괄하고 백사(百事)를 수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매양 연석(筵席)에 나갈 때마다 어전에 계사와 주달(奏達)이 연달았고 묘당의 계획과 대각의 상소와 형옥(刑獄)과 재부(財賦)가 일시에 모두 거론되어도 두루 이치에 합당하게 처리하여 패연(沛然)히 매우 많은 여지(餘地)가 있었다. 그리고 남의 선행을 취하되, 소원하고 미천하다고 해서 빠뜨리지 않았고, 군신들이 알현할 때는 반드시 안색을 부드럽게 가져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되, 그들의 말이 혹 뜻에 거슬리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도움되는 말을 구하는 하교를 전후에 걸처 수십 번 내리었다. 하루는 이르기를, 「선왕의 만년에도 충직한 말과 격한 의논을 한 자가 많았는데, 요즈음에는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과인이 자신의 잘못을 듣기 싫어하여 그러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현인 구하기를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이 하니, 경술(經術)로써 나오는 자도 있었고, 문학으로써 나오는 자도 있었으며, 재능으로써 나오는 자도 있었고, 세록(世祿)의 훈공(勳功)으로써 나오는 자도 있었으며, 혹은 여러 사람이 버린 가운데 발탁된 사람도 있었고, 혹은 죄를 탕감하여 기용(起用)한 자도 있었는데, 모두들 그 나름대로의 재능을 다 발휘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침전(寢殿)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란 편액을 걸었고, 또 《만천명월주인옹서(萬川明月主人翁序)》를 지어 자신을 비유하기도 하였다. 《주역(周易)》에 「성인은 덕을 높이고 사업을 넓히는데 높은 것은 하늘을 본받고 낮은 것은 땅을 본받는다.」고 하였으니, 그 말은 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14년 경술년221) 에 수빈(綏嬪) 가순궁(嘉順宮)이 우리 전하를 탄생하자, 왕이 왕비에게 그를 사자(嗣子)로 삼으라 명하고 나서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노인에게는 관작을 하사하였고, 나이가 1백 세인 사람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지급하였으며, 여러 도에 옛날부터 포흠(逋欠)으로 내려오던 환곡을 탕감해 주었고 모든 세금도 감해 주었는데, 이 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24년 경신년222) 정월 1일에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이 달에 현륭원(顯隆園)에 배알하였다. 이때 땅에 엎드려 목이 메도록 울면서 이르기를, 「오늘 또 어떻게 차마 현륭원을 이별하고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돌아올 때는 더욱 가슴 아파하였다. 이때부터 불편한 증후(症候)가 자주 나타났다. 2월 을유에 우리 전하의 관례(冠禮)를 행하고 왕세자로 책봉하였는데, 현종의 고사(故事)를 따라 가례(嘉禮)까지 이 해에 아울러 치르려고 빈궁(嬪宮)을 처음 간택하였다. 이때 지금 중전이 그 간택에 선발되었는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안동(安東)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었다. 이날 본가로 돌아갈 때, 특별히 명을 내려 의장(儀仗)을 삼간택 때와 같이 갖추었다. 그리고 6월 초에 이르러 또 부스럼증이 날로 위독하였으나 여전히 민사(民事)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승지로 하여금 계사나 주청의 처리를 지체하지 못하게 하였다. 28일 기묘에 병환이 크게 위독하자, 대신과 각신들이 침실로 들어가 문안을 드렸는데, 왕이 이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가느다란 소리로 「수정전(壽靜殿)」이라고 하였는데, 수정전은 곧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거처하던 궁전이었으니, 대개 성상의 뜻은 자성(慈聖)에게 고하려고 한 듯하였다. 드디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춘추가 49세였다.
국상이 나던 날 도성의 선비들과 서민들은 서로 넘어지면서 발을 구르며 통곡하였고 깊은 산골의 서민들도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아! 애통하도다. 우리 전하께서 대소 신하들과 옛날 시법(諡法)을 상고하여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는 정종(正宗)이라고 하였다. 왕을 정(正)이라고 한 것은, 광대(廣大)한 경지에 이르러 정미(精微)함을 다하고 고명(高明)함을 극진히 하여 중용(中庸)의 길을 택하였으니 이것은 도학(道學)의 정(正)이요, 천지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으니 이것은 의리(義理)의 정(正)이며, 마음을 바루어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루어 백관을 바르게 하며 백관을 바루어 만민을 바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치법(治法)과 정모(征謨)의 정(正)이다. 시호는 행실의 자취이며 묘호는 공(功)의 표현이니, 아! 〈왕은〉 그에 가깝다고 하겠다. 큰 덕의 이름은 얻었지만 오직 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돌보아 명하신 것이 과연 무슨 증험이 있단 말인가? 이게 어쩌면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 문왕(周文王)의 법도를 잘 본받아서 날로 사방을 편안케 한 공로로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자손이 보전되어 만세토록 기리고 그 덕을 힘입을 것이니, 이것은 크게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다.
왕비는 김씨(金氏)이다.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충익공(忠翼公) 김우명(金佑明)은 현종의 비(妃)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아버님으로서, 왕비의 5세조이고, 좌참찬(左參贊)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默)과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왕후의 부모이다. 영조 계유년223) 12월 13일 한성(漢城)의 사가에서 왕후가 탄생하였는데, 이 해 가을에 그 후원(後園)에 있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갑자기 모두 다시 꽃이 피었으므로 가족들이 이상하게 여겼더니, 얼마 후에 왕후가 탄생하였다. 왕후는 덕스러운 모습이 천부적으로 타고나 정숙하고 유순하였으며 거동이 법칙이 있었다. 9세 때 간택에 선발되자 영조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어 「5세(五世) 동안 옛 가풍(家風)을 계승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종통(宗統)이 될 만하다.[五世繼昔寔爲宗國]」라는 여덟 글자를 손수 써서 하사하였다. 10세가 되던 해 2월에 세손빈(世孫賓)으로 책봉되었고, 병신년224) 에 중전의 자리에 오르고, 경신년225) 에 우리 전하가 왕위를 계승하자 왕대비로 삼아 존호(尊號) 올리기를 논하였다. 그러자 왕후가 이르기를, 「선왕이 존호를 받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지극한 슬픔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 미망인(未亡人)이 존호를 받는다면 선왕과의 정의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는 비록 효심에 꺼림칙하겠지마는, 신하들은 더욱더 감복하였다. 그리고 경진년226) 겨울에 대신과 예관이 아뢰기를, 「재명년에는 자성(慈聖)의 춘추가 70세가 되므로 예의상 당연히 경하를 올려야 하지만, 그 해는 임오년이니, 간택된 지 61년이 되는 그 다음해에 하례를 행하소서.」 하였다. 이에 정월 초하루에 전하께서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받들어 올리고 하례를 드렸다. 또 영조 병자년227) 에 있었던 인원 대비(仁元大妃)의 칠순 경연(七旬慶讌)을 상고하여 경하의 전례를 논의하려고 하자, 왕후가 더욱 마음 아파하였다. 처음에 약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가 한 달이 지나자 점차 병세가 위독해져 동궁(同宮)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셨으니, 아! 애통하도다! 왕후의 성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공순하고 검소하였는데, 대궐에 들어올 때부터 누차 어려운 시기를 당하였다. 임오년228) 윤5월에 혜빈(惠嬪)과 왕후에게 사가로 돌아가라고 명을 내렸으나 왕후가 혜빈을 따라가겠다고 하므로 영조가 이 말을 듣고 착하게 여겼다.
또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섬긴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으므로 얼마 섬기지 못한 것을 일생 동안 가슴아파 하였고, 혜경궁(惠慶宮)을 섬길 때 기쁜 얼굴로 대하고 더욱 조심하여 항상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경신년229) 이후에는 또 한결같이 왕께서 섬기던 듯이 정순 대비를 섬기었고, 〈청연(淸衍)·청선(淸璿)〉 두 군주(郡主)와도 우애가 지극하였다. 남의 허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친척이 혹 잘못하더라도 책망하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들이 대부분 꾸지람을 당한 것보다 더 부끄러워하였다고 하였다. 그중에서 더욱 사가에 은택(恩澤)을 주는 것을 경계하여 비록 줄 만한 물건도 사사로이 주지 않았으며, 자신을 봉양하는 일도 매우 절약하여 의복과 기명(器皿)을 겨우 사용할 만큼 취할 뿐이었다. 중년에 왕후가 갑자기 임신을 한 것 같은 기미가 있자, 왕이 매우 기뻐하여 산실(産室)을 서둘러 마련하였으나 그 해가 지나도록 혈육을 두지 못하였다.
그후 경술년230) 에 〈가순궁(嘉順宮)이 아들을 낳아〉 세자(世子)로 정하자 그를 돌보는 은정이 자신이 낳은 혈육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우리 전하께서도 사랑하고 공경함이 또 지극하여 그 사랑과 효성이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 이에 앞서 무술년231) 에 대신(臺臣) 박재원(朴在源)이 정순 대비의 언문 교지에, 「중전은 병이 있어서 아들을 낳을 가망이 없다.」는 말씀이 있다고 하여 양의(良醫)를 구하여 치료하자고 간청하자, 홍국영이 크게 노하여 공좌(公坐)에서 박재원을 질책하였으니, 이때 왕후가 홍빈(洪嬪)을 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다. 왕께서도 박재원의 충성을 살피시어 그에게 특별히 아름다운 관작을 내려 포상하였다. 양전(兩殿)이 이와 같이 이의가 없었으니, 이것은 모두 왕의 밝은 지혜와 왕후의 덕이었다. 대비로 계실 때에는 하늘 같은 은의(恩義)를 더욱 형용할 수 없었으니, 아! 그 덕이 지극하도다. 신하들이 모두 신중하게 검토하여 시호는 효의(孝懿)로 휘호(徽號)는 예경 자수(睿敬慈粹)로 올렸으니, 아! 근사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왕후의 가계(家系)와 세덕(世德)은 전 대제학 김조순(金祖淳)이 엮은 지문(誌文)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가순궁이 또 숙선 옹주(淑善翁主)를 낳아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에게 시집갔고, 전하께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세자이고 차남은 키우지 못하였다. 두 공주는 장녀는 명온(明溫)으로 봉하고 차녀는 아직 봉하지 않았으며, 또 한 옹주도 봉하지 않았다. 숙선(淑善)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 선왕께서 일찍이 신의 우직하고 졸렬함을 살피셨는데, 두 번이나 국상(國喪)을 치루면서도 차마 순종(殉從)하지 못하고 외람되이 붓을 잡아 기술하였으니, 참으로 그 덕을 만분의 일이라도 알지 못할까 두려운데, 차마 어찌 감히 실상에 넘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천년의 긴 세월이 뒤에 있으니, 이를 질정(質正)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82면
- 【분류】왕실(王室)
- [註 158]신사년 : 1821 순조 21년.
- [註 159]
기유년 : 1789 정조 13년.- [註 160]
을묘년 : 1795 정조 19년.- [註 161]
공서적(公西赤) : 노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 [註 162]
임신년 : 1752 영조 28년.- [註 163]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164]
구작례(九爵禮) : 예연(禮宴) 때에 임금에게 술잔을 아홉 번 올리던 예. 제1작(第一爵)·제2작은 왕세자와 반수(班首)가 차례로 올렸으며, 제3작부터 제9작까지는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올렸으나, 뒤에는 종친(宗親)·재신(宰臣) 가운데서 낙점(落點)하여 올리기도 하였음.- [註 165]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註 166]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167]
세초(洗草) : 존치(存置)할 가치가 없는 문서(文書)를 없애버림. 실록(實錄)이나 선원보략(璿源譜略)의 편찬을 마치고 그 원고(原稿)의 폐기, 또는 정세 변동이나 기휘 저촉(忌諱抵燭)에 의하여 보관할 필요가 없는 문서의 폐기 등을 이르는 말. 초(草)했던 원고나 폐기 문서를 물에 빨아 먹물을 빼고 환지(還紙)를 만드는 데 이용하였으므로 세초(洗草)란 말이 생겼음.- [註 168]
강왕고(康王誥) : 《서경》의 편명.- [註 169]
소식(蘇軾) : 송나라의 문장가.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임.- [註 170]
복왕(濮王)의 고사(故事) :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아들로서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복왕(濮王)을 숭봉(崇奉)하여 황제의 대우를 하려고 하니 이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결국 황친(皇親)이 아닌 황백(皇伯)으로 추숭(追崇)한 고사가 있음.- [註 171]
순강(順康)과 소녕(昭寧) : 순강은 원종(元宗)의 사친(私親) 인빈(仁嬪) 김씨(金氏)를 말하고, 소녕은 영조(英祖)의 사친 숙빈(淑嬪) 최씨(崔氏)를 말함.- [註 172]
문씨(文氏) : 숙의(淑儀) 문씨임.- [註 173]
임오 옥사(壬午獄事) : 영조 38년(1762)에 장헌 세자(莊獻世子:사도 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건.- [註 174]
대행 대왕(大行大王) : 영조를 가리킴.- [註 175]
오고(五鼓) : 새벽 4시 전후. 오경(五更).- [註 176]
임방(林放)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 공자(孔子)의 제자. 노나라 권신 계씨(季氏)가 태산(泰山)에 여제(旅祭)를 지내자 공자는 염유(冉有)에게, "네가 저지하지 못하겠느냐?" 하니, 염유가 대답하기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하므로, 공자는 "태산이 임방(林放)만 못하랴?" 하였음. 즉 태산의 산령(山靈)은 비례(非禮)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임.- [註 177]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친 것 : 태갑(太甲)은 은(殷)나라 탕(湯)임금의 손자. 탕임금이 죽은 뒤에 태갑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현상(賢相) 이윤(李尹)이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유폐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계하자 맞아들였음.- [註 178]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註 179]
양옥(梁獄) : 양왕(梁王)의 옥사(獄事). 양왕은 한 문제(漢文帝)의 둘째 아들로, 경제(景帝)의 동모제(同母弟)임. 성명(姓名)은 유무(劉武)이니, 양(梁)나라에 봉(封)하여 효(孝)로써 시호(諡號)를 삼았음. 당초에 태후(太后)는 양왕으로써 태자(太子)를 삼으려 하였으나 원앙(袁盎) 등이 반대하여 이루지 못하자 양왕이 사람을 시켜 원앙을 죽여 이것이 옥사(獄死)가 되었는데, 경제가 전숙(田叔)을 보내어 조사하였더니, 전숙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양왕의 일은 묻지 마소서. 바른 대로 말하면 처단하여야겠고, 처단하면 태후(太后)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여 양왕의 신하 몇 사람에게만 죄를 준 일이 있음.- [註 180]
주공(周公)의 허물 :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인 주공(周公) 단(旦)이 무왕이 죽은 뒤 섭정(攝政)하면서 모반한 관숙(管叔:주공의 형)과 채숙(蔡叔:주공의 아우)을 정벌하였으므로 이른 말임. 주공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셋째 아들로, 무왕을 도와 주(紂)를 쳐부수고,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왕실의 기초를 세우고 제도(制度)와 예악(禮樂)을 정하였는데, 주대(周代)의 제도와 예악은 대개 그가 계획하여 이룬 것임.- [註 181]
비총(比摠) : 연분(年分)을 정하는 방법의 하나. 매년 가을에 호조에서 그 해의 기후와 작황(作況)을 참고하고 상당년(相當年)과 비교 상량하여 총수를 결정, 급재(給災) 절차를 거친 다음 세액을 결정함.- [註 182]
용도각(龍圖閣) :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건립한 것으로, 태종(太宗)의 어서(御書)·어제 문집(御製文集) 및 보록(譜錄)·보물 등을 봉치하고 학사(學士)·직학사(直學士)·대제(待制)·직각 학사(直閣學士) 등의 관리를 두었음.- [註 183]
천장각(天章閣) : 송(宋)나라 진종(眞宗)의 장서각(藏書閣)이었는데,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직학사(直學士)·대제(待制) 등의 관원을 두어 국사(國事)를 의논하게 하였음.- [註 184]
신축년 : 1781 정조 5년.- [註 185]
반궁(泮宮) : 성균관.- [註 186]
상제(上第) : 급제.- [註 187]
오교(五敎) : 부자 유친(父子有親)·군신 유의(君臣有義)·부부 유별(夫婦有別)·장유 유서(長幼有序)·붕우 유신(朋友有信)의 다섯 가지 교화(敎化).- [註 188]
삼물(三物) :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를 말함이니, 육덕은 지(知)·인(仁)·성(聖)·의(義)·충(忠)·화(和)이고, 육행은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이고, 육예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임.- [註 189]
태아(太阿) : 명검(名劍)의 이름.- [註 190]
북관(北關) : 함경도 마천령(摩天嶺) 이북 지역.- [註 191]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註 192]
신임(辛壬) :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신축년(1721년)·임인년(1722년)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사화(士禍)를 가리킴. 노론(老論)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延祁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왕세제로 하여금 정무(政務)를 대리하게 하자 소론(少論)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노론의 사대신(四大臣: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체)을 역모(逆謀)로 무고케 함으로써 그들을 극형에 처하게 하고, 그 외 많은 노론을 사사(賜死) 또는 유배하게 하였음.- [註 193]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註 194]
신축년 : 1781 정조 5년.- [註 195]
사충사(四忠祠) :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사우.- [註 196]
갑진년 : 1784 정조 8년.- [註 197]
사대신(四大臣) :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 [註 198]
삼장신(三將臣) : 이홍술(李弘述)·이우항(李宇恒)·윤각(尹慤).- [註 199]
무신년 : 1788 정조 12년.- [註 200]
선왕(先王) : 영조.- [註 201]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202]
황단(皇壇) : 임진 왜란 때에 명(明)나라 신종(神宗)이 원병을 보내 우리 나라를 도와준 공을 생각하여 설치한 제단, 곧 대보단(大報壇)을 말함. 숙종 30년(1704)에 대궐(창덕궁) 안에 설치했는데, 영조 25년(1749)에 와서 태조(太祖)·의종(毅宗)도 합사(合祀)하였음.- [註 203]
선무사(宣武祠) : 선조(宣祖) 31년(1598)에 창건한 사우로, 임진 왜란 때 우리 나라에 와서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형개(邢玠)와 양호(楊鎬)를 배향하였음.- [註 204]
이제독(李提督) : 이여송(李如松).- [註 205]
부조사(不祧祠)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뫼시어 제사함.- [註 206]
현충사(顯忠祠) : 평안도 의주에 있는 별단(別壇)으로, 명나라 유민 임인관(林寅觀) 등 95인과 조선인 백대호(白大豪) 등 21인을 배향하였음.- [註 207]
기충사(紀忠祠) : 경종(景宗) 2년(1722)에 청건한 사우로, 고구려의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와 조선의 김상헌(金尙憲)을 배항하였음.- [註 208]
삼황(三皇) : 명나라의 태조·신종(神宗)·의종(毅宗)의.- [註 209]
동적전(東籍田) : 서울 동쪽에 있던 임금의 친경전.- [註 210]
풍천(風泉) : 비풍(匪風)·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니,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쇄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나라 왕실을 생각하는 내용임. 여기에서는 멸망한 명(明)나라를 생각하는 존주 대의(尊周大義)의 뜻이 담겨 있음.- [註 211]
황극(皇極) :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중 지정(大中至正)의 도(道).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다섯 번째는 황극이니, 임금이 표준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였음.- [註 212]
부하(負夏) : 위(衞)나라의 땅 이름.- [註 213]
재궁(梓宮) : 임금의 관(棺).- [註 214]
헌현(軒懸) : 악기(樂器)를 방의 3면, 곧 남쪽을 제외한 동·서·북쪽에 거는 일. 제후왕(諸侯王)의 궁정 의례(宮廷儀禮)에 쓰는 악임.- [註 215]
맹헌자(孟獻子) : 노(魯)나라의 대부 중손말(仲孫蔑).- [註 216]
을묘년 : 1795 정조 19년.- [註 217]
숭렬전(崇烈殿) :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묘호(廟號). 조선조 세조 10년(1464) 충남 직산(稷山)에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창건하였으나, 선조 30년(1597)의 정유 재란 때 화재로 인하여 폐허화되었는데, 인조 3년(1625) 왕명에 의해 남한 산성으로 옮겨 지었고, 정조 19년(1795)에 이르러 숭렬전으로 칭호를 고치고,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음.- [註 218]
대정(大政) : 해마다 음력 12월에 행하는 도목 정사(都目政事). 도목 정사는 6월과 12월에 두 차례 행하는데, 12월 것이 규모가 커서 대대적으로 행하므로 이 이름이 생긴 것임.- [註 219]
서경(書京) : 평양.- [註 220]
주연(胄筵) : 서연(書筵).- [註 221]
경술년 : 1790 정조 14년.- [註 222]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註 223]
계유년 : 1753 영조 29년.- [註 224]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註 225]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註 226]
경진년 : 1820 순조 20년.- [註 227]
병자년 : 1756 영조 32년.- [註 228]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229]
〔○〕 遷陵誌文曰:
嗚呼! 我烈考正宗大王, 旣大葬于華城 顯隆園之東麓, 是曰健陵。 國人之有識慮者, 皆竊憂其地淺夷, 非聖人安久之藏。 後二十二年辛巳三月九日己未, 我孝懿王后薨, 將筮兆于先陵。 領敦寧府事臣金祖淳, 上疏極言, 陵地可憂狀, 請精擇吉土, 爲萬年之圖, 我殿下, 涕泣下批曰, ‘大行大妃, 平日以是大憂, 屢下敎於小子, 今見卿疏, 益不勝摧咽悶悚。’ 卽召大臣卿宰, 廷議之。 金議僉同無貳, 遂命大臣禮官及敦匠之臣, 廣行相視, 又使再三覆按。 乃得顯隆園之右坐子之岡, 爲尤吉, 治方中爲同穴之制, 緬奉先王, 而后祔焉, 陵仍舊號, 實是年九月十三日庚申也。 於是, 國人又皆太息相慶曰, ‘誠舊陵之爲憂, 而華固先王之志, 今而後, 兩無憾矣。’ 始先王十三年己酉, 遷永祐園于水原府之花山, 更號顯隆, 大築華城, 以拱衛象設。 揭御眞于園之齋殿, 以寓晨昏之義, 歲輒展謁, 哀慕不自勝。 十九年乙卯, 奉慈宮, 謁于園, 還御華宮, 進爵上壽。 敎曰, ‘以予孤露, 行是禮於是地, 至願粗伸矣。’ 每拜園駕還, 駐蹕遲遲之臺, 回瞻夷猶, 不忍發去, 命華宮之堂曰老來, 樓曰新豐, 蓋有微意存焉。 無樂乎南面, 殆將脫屣千乘, 而獨拳拳于華者如此, 是則《孟子》所謂 ‘大孝終身慕者也。’ 今者復臨灤水之朝, 而及竁以度, 又在於華, 是又天之所以大感于我先王, 而此與之宅也, 亦惟我殿下類孝之至, 永綏我烈考文母也。 於戲! 其盛矣。 殿下, 以臣象奎, 獲事先王, 又今備官太史, 命爲玄宮之誌, 誠惶恐不敢當。 竊伏以爲我先王盛德至善, 冒溢區宇, 史不勝書。 誦于永世, 無待幽石之紀纂, 而天地之大, 日月之光, 又非如臣淺陋所可摹象。 然而稽于《記》, 孔子之喪, 公西赤 爲志, 志者, 謂志識也。 是不過志識其地重, 實不在於文。 謹拜乎稽首, 泣而敬書曰。 ‘王姓李氏, 諱祘, 字亨運, 英宗、顯孝大王之孫。 思悼 莊獻世子之子。 母惠嬪洪氏, 領議政鳳漢之女。 及莊獻薨, 英宗命王嗣孝章世子, 王之伯父也。 王卽阼, 追尊孝章爲眞宗, 墓爲永陵, 嬪趙氏爲孝純王后, 豐陵府院君 文命女也。 上號思悼曰莊獻, 墓曰永祐園, 廟曰景慕宮。 尊惠嬪曰惠慶宮。 莊獻世子, 嘗夢神龍抱珠入寢, 覺而畫其狀於壁, 已而, 誕王。 英宗二十八〔年〕 壬申九月己卯也。 聲覃訏鬯, 聞隆準海口, 質相特異。 英宗臨視喜甚, 手撫額曰, 「是絶類我」, 卽日定號爲元孫。 未百日而能立, 甫能行步, 坐必端跪, 自未語, 見文字則輒喜。 三歲就傅, 受《小學》書, 八歲冊爲王世孫。 陪英宗駕過雲從街, 許士民仰瞻。 世孫還宮問曰, 「今日百姓觀者甚衆, 亦知望於汝者, 何事乎?」 王對曰, 「望臣之爲善也」。 曰, 「爲善易乎?」 對曰, 「易也。」 英宗大喜。 十歲齒于學, 請業于博士。 問《小學》題辭, 明命赫然之義曰, 「明命在吾身, 指何境欲求? 赫然作何工?」 博士不能對。 圜橋門觀者數萬, 動色相賀曰, 「眞聖人也。」 壬千秋英宗, 命依皇朝時事, 以世孫, 爲東宮, 置兩坊官, 贊善宋明欽應召入對, 王講《孟子》, 明欽仰問孟子宗旨, 王曰, 「遏人欲存天理也。」 明欽請問立志, 王曰, 「所願則堯、舜也。」 明欽退語人曰, 「聰明英睿, 上智之姿也。」 一日侍坐英宗, 講官, 有言三南饑民菜色狀, 王, 聞之, 是日夕膳, 舍肉不御。 英宗問其故, 對曰, 「適思饑民, 心惻然自不忍下箸也。」 王, 自八九歲, 益莊默無疾聲遽色, 罕與宦亡語。 英宗每敎曰, 「世孫絶無一毫走作意, 禁苑花發, 非從予未嘗一往遊賞, 日靜坐讀書。 此豈勉强? 可爲卽其天性然也。」 英宗寶齡益高, 寖多違豫, 王十年侍疾, 晝夜未嘗離側, 衣不解帶。 少有添谻, 則遑遑憂灼, 涕泣露禱, 坐臥起居, 躬自扶護。 英宗悶其瘁也, 或命左右代之, 旋蹙曰, 「未若我孫之便吾體也。」 和緩主, 王之姑也, 其子鄭厚謙, 倚主橫甚, 洪鳳漢之弟麟漢, 席其兄而爲相。 英宗倦勤, 兩兇相糾結植黨, 與貪權翫法, 壞亂朝政。 獨憚王英明, 出入窺伺, 謀欲誣毁動搖之, 主又長處宮中, 爲其子助兇。 王從容處變, 夷然若無事。 英宗疾益彌留, 欲使王代理機務, 諸賊益懼。 英宗命公事入于東宮, 麟漢揮手止, 承旨勿書傳敎, 遊辭力沮之。 英宗竟罪麟漢等, 命王代聽庶政。 遂幸東宮受賀, 設九爵禮, 群臣皆呼千歲, 英宗顧笑甚樂。 王, 旣聽政, 卽上疏陳私痛, 言甚哀切。
英宗覽疏泣, 取起居注, 丁丑至壬午, 凡語屬不忍者, 洗其草, 敎曰, 「正宗統爲三百年宗國, 洗日記, 伸子心於萬世也。」 乃製諭書, 書孝孫二字, 鑄銀印, 授于王。 自是, 諭書銀印, 凡朝會動駕, 常陳于前。 及英宗大漸, 王, 永漿不入口, 哭不輟聲。 旣成服, 王曰, 「迫於群情, 忍將踐位, 而冕服行禮, 於予心益覺怵然。 此禮見於《康王之誥》, 蘇軾譏其非禮, 亮陰之制, 雖不得行, 釋衰從吉, 其可乎?」 群臣以古禮與國制, 力請, 王, 泣而從之。 旣嗣位釋冕, 反喪服, 大諭中外曰, 「寡人, 思悼世子之子也。 先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禮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享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禮, 而不可與太廟, 同, 惠慶宮, 亦當有京外貢獻, 而不可與大妃等。」 不逞之徒, 藉此而有追崇之論, 先王遺敎在焉, 當以當律論, 以告先王之靈。 其尊奉莊獻, 遵宋、濮王故事, 祝式用朱子定論, 稱皇叔父從子, 五享用牲用樂。 惠慶宮凡四進冊號曰, 「禮或近於貳尊, 拂義任私, 强欲崇奉, 非吾所謂崇奉也。 前史皇子公主之錫號, 本朝順康、昭寧之加號, 無貳尊之嫌, 有揚名之義, 予所以義起而行之也。」 金尙魯之爲相也, 陰結後宮文氏, 始搆壬午之禍, 英宗嘗敎王曰, 「尙魯汝讎也」’ 乃追施逆律。 王之在春邸也, 趙載翰等, 托壬午懲討之義, 因閹人聞于王, 王察其姦而心惡之, 及大喪, 李德師又上疏, 如載翰之說。 王曰, 「此誣先王之逆也。」 乃誅載翰ㆍ德師等。 大行因山期至, 王, 欲隨靷行, 群臣以毁疾, 請止, 且言, 「古無是禮。」 出辭於城外。 靈駕旣遠, 猶佇立瞻哭, 哀音上徹, 聞者莫不雨泣。 魂殿小祭祀, 必皆躬行, 値忌辰, 齋沐悲慕, 二十年如一日。 每謁太廟, 至十三室, 鞠躬磬拱, 僾然肅然, 若有見於位者。 每朔望, 將五鼓, 必拜眞殿, 風雨寒暑, 未嘗或闕。 於景慕宮, 垣建日瞻, 月覲之門, 簡輿衛無時展省, 每年五月十三日至二十一日, 彌旬齋居。 事貞純大妃、惠慶宮三朝愉婉, 先意承歡, 志物備盡, 誠孝兩至。 每曰, 「國有大小事, 予未嘗不稟慈聖而行。」 惠慶宮患癤, 晝宵焦憂, 親自熬藥傅之, 手爲之腫而不覺也。 嘗有疾, 浹月始平復, 群臣請賀, 王曰, 「不存無妄之戒, 久貽惟疾之憂, 是誠自訟敢受賀乎?」 群臣屢請晉號, 王曰, 「上號之請, 曾謂卿等, 不如林放乎? 禮固緣情, 義以制禮。 千載之下, 庶有知予心者。」 終王之世, 群臣不敢復以爲請。 《記》曰, 「踐其位行其禮, 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其王之謂乎? 賜洪麟漢ㆍ鄭厚謙死, 誅其黨沈翔雲ㆍ閔恒烈ㆍ洪相簡等。 三司請拏籍麟厚, 敎曰, 法者, 天下平, 雖人君, 不可以私意低昻。 斷死罪未死而結案, 死而準律文, 卽常典。 自今未結案而用逆律, 已死而追施孥籍, 次律結案而加以極律, 幷除之。」 盜入慶熙宮, 索之不獲, 及移御昌德宮, 盜又越宮垣, 爲舖軍所捕鞫之, 洪述海之子相範所遣也。 相簡旣斃, 其父趾海, 叔纉海, 幷島配, 述海亦以海藩犯贓, 減死杖流。 其子姪妻妾, 日夜怨望, 國家謀爲不軌。 述海之妻孝任, 使妖巫, 咀呪埋凶, 洪啓能與述海之姪相吉、相格、李澤遂等陰謀, 以太甲 桐宮癸亥反正爲說, 所欲推戴者, 宗臣禶也, 諸賊皆伏誅。 群臣以禶王室至親, 名入推戴, 請逮問, 王遽起入不出。 百官伏殿庭, 力請誅禶, 王猶不許。 大臣禁堂, 卒致禶于王府, 令自盡, 禶拒不從, 復告于王而賜之死。 王, 傷慟, 命內司厚葬之。 於是, 纂《明義》、《原續》兩錄, 以著諸逆始末。 洪國榮自宮官時, 特被寵任, 王卽位, 驟加顯擢, 握重兵處禁中。 日益驕恣, 擅作威福, 王漸燭其姦, 隱忍未發也。 時貞純大妃, 下內敎, 命揀選士族, 置諸嬪御, 以廣求儲嗣, 國榮之妹應嬪。 選未幾, 嬪喪, 國榮乃倡言曰, 「廣儲嗣之擧, 不可再也。」 裀有子湛, 國榮視以奇貨, 改其君號曰完豐, 恒言曰, 「吾甥也。」 使爲洪嬪守殯官, 聞者驚心, 道路以目。 又引宋德相假儒名應召而至, 投疏言, 儲嗣事。 有曰, 「某樣道理, 非在下者所可指陳, 臣對宿衛將臣, 以此事爲第一義。」 宿衛將臣, 卽國榮, 而此事指湛事也。 王, 顧欲保全其終始, 前席數其罪, 使之引退, 尋命放之田里而死。 文孝世子生五歲而薨, 大妃又下內敎布示, 國榮, 陰圖移國之罪, 又以喪變, 責群臣之緩討。
於是, 賓廳請奪湛封爵, 絶其屬籍, 斷裀以王法, 王取其啓火之。 湛之母舅宋樂休, 又上變, 告將臣具善復, 通關裀、湛事, 盡發, 善復遂伏誅。 百官庭請, 置裀於法, 王, 輒閉閤却膳, 諸臣伏閤免冠固爭, 乃命裀竝其家室, 置江華。 敎曰, 「昔梁獄至憯, 漢 景力保, 梁 武賴有田叔之忠耳。 惜乎! 今日廷臣, 非田叔之罪人乎? 且其待予何太不若漢 景?」’ 王雖島置裀, 而命內府, 繼其衣食問饋, 織於道又常遣內司官, 密召入見。 廷臣每爭之, 王曰, 「此所謂周公之過也。」 後又全釋厚謙之母, 王, 以其先王之所愛, 雖稔惡貫盈, 曲加寬貸。 始流畿島後, 令入京, 至於引入大內見之, 廷臣亦爭不得。 䄄、禛、禶皆王之庶弟。 禛於英宗時謫死耽羅。 王, 追念衋然用崇品宗臣禮改葬, 臨其廟奠祭, 錫美(謚)〔謚〕 親製其墓碑。 王於中歲以後, 嘗慨然曰, 「漢家四百年基業, 豈不由於風流篤厚, 禁網踈闊乎? 予欲使今之世, 非身犯惡逆者, 幷爲疏蕩, 朝無罹辟之人, 世無見棄之家。 豈非導和祈命之本乎?」 於朝臣, 曲察下情, 存沒之際, 隱䘏尤至, 方春將賞花, 已曰, 「相臣在殯, 豈可遊衍乎?」 尤惓惓於民事, 方伯守令之差送, 必引對面諭, 察民隱求民瘼。 時遣繡衣, 刺擧匪法而伸無告, 或召見郡邑朝正吏, 詢民疾苦。 置器測雨, 竪竿占風, 一雨一暘, 必關聖慮。 明禮宮爲東宮別帑, 王於代理初曰, 「宜先淸本。」 卽付之度支。 各宮房私遣宮差, 徵稅納於宮庄, 所在橫孥虐(歛)〔斂〕 , 民不堪其苦, 內司刷官, 往諸道推刷奴婢, 操縱百端, 刷官所至, 村里爲空, 弊皆久痼。 王曰, 「利於國利於民, 肌膚何惜? 先王所以諄諄於寡人也。 宮結之代盡未收, 法外加受, 損國用, 宮差橫(歛)〔斂〕 尤害民。」 遂査代盡及加受者, 竝還地部, 宮稅各邑直納戶曹, 戶曹劃 給各宮, 而罷宮差, 永革刷官, 令諸道比摠施行。 又裁省宮人, 罷移屬名色, 以其費歸之經用。 京營獵雉軍, 卽鷹師舊契, 每行獵, 獵軍十百爲群, 橫行騷擾, 至有殺越人者, 乃罷獵雉軍。 減關西貢蔘, 蠲濟州貢鰒曰, 「此先王意也。」 又蕩減八道舊糴十萬石曰, 「先王五十年苦心, 愛民如子, 繼述之道, 無先乎此。」 遇荒年, 日接廊廟之臣, 講究賙捄之策, 列荒政之要, 書之殿壁, 常目而施行之。 遣近臣, 慰諭(蕫)〔董〕 飭, 一札十行, 遍於諸道。 蠲常〔貢〕 減常稅, 發倉移粟以賑之, 停糴餉以寬之, 捐帑貨以補之。 畿甸饑, 王曰, 「今之發賣, 卽漢之賑貸也。」 令京兆, 抄饑民, 減直給米, 都下錢荒, 出官錢十五萬緡, 除其殖以貸貢市民。 以耽羅處絶海, 每歉荒, 憂軫尤勤。 嘗下帑錢百萬於湖南, 令貿粟濟之, 親製文祭海神, 祈利涉。 又愍幼稚之遺棄道路者, 倣古廣濟院育嬰社之法, 著《字恤典則》, 頒中外, 以收養之數, 每月登聞, 其收養人, 官給口糧。 京師疹疫熾行, 王曰, 「禳祭, 古禮也。」 命設別厲祭于四郊, 令五部, 訪問坊曲之貧不能自力療治者, 兩醫司揀醫人診視給藥。 時方有文孝之喪, 而王猶日飭有司救恤, 所全活甚衆。 又命京外, 盡掩埋邱壠之朽露者。 王之世, 蓋無一民, 不被其仁, 生死幷浹。 矜愼刑獄, 惟恐一夫之或枉。 每判諸道錄案, 侍臣承書, 更番至暮, 而王未有倦色。 內閣裒輯, 御判爲《審理錄》二十六卷, 其一字, 皆惻怛審克之意也。 飭獄官, 常灑掃獄戶, 洗滌杻械。 小罪卽決遣取笞、杖、枷、棍之不如法者, 皆釐正, 撰《欽恤典則》, 通行爲式。 又敎曰, 「唐ㆍ宋皆五日一錄囚, 我朝十日一錄啓。 十日之間, 雖有被枉之囚, 安得以自達乎? 自今該曹, 五日一錄囚。」
寢園植木, 有蟲損, 方捕之。 古皆掘坑焚瘞。 王曰, 「蟲是生物, 驅而放諸, 勝於烈而焚之。 嘗聞蟲飛入海化爲魚鰕, 其令投之海浦。」 嘗醼于芙蓉之亭, 有燕巢樑。 將哺子, 飛繞不入, 王, 憐之, 遂起去。 是又禽蟲之微, 亦囿於至仁之澤。 《傳》曰,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其王之謂乎? 英宗御製, 旣編印。 王, 以光廟, 肅廟兩朝, 但有奎章閣之名稱, 而未有設置, 無御製尊閣之所, 如宋 龍圖、天章之制。 乃建奎章閣於內苑, 列聖宸章寶翰, 別爲奉謨堂奉之。 又以先朝編次人, 有其事而無其官, 倣龍圖閣學士, 置提學、直提學, 又置直閣待敎, 以倣直閣待制。 摹寫御眞, 奉于閣之宙合樓, 御書摛文 之院扁直署。 遂臨院, 命時原任閣臣, 挾冊升堂。 講《近思錄》, 辨論經義, 敷陳治道。 因幸弘文館, 講《心經》。 後置大提學, 以文衡圈望人, 待旨擬差, 而竟未有拜者。 行抄啓文臣講製。 王, 以文臣專經之講, 月課之製, 作輟無常, 非作成之道, 命政府, 抄啓槐院參上參外三十七歲以下人, 月講經史, 旬試程文, 考優劣行賞罰。 時常勸課, 至誠不倦。 自辛丑選以後, 凡十選, 今之公卿大夫, 多是選中人也。 御春塘臺, 召講太學儒生, 仍設食堂曰, 「程子見僧舍會食, 歎其有三代威儀, 況賢關之食堂乎? 鼓進齒坐, 秩然其可觀, 予故樂與諸生共之。 薤鹽雖薄, 勝於珍饌。」 下御題于〔頖〕 宮, 試諸生, 召被選人, 宣法醞, 撤常御銀盃賜之, 鐫其腹曰, 我有嘉賓。 諸生賦歌詩以詠其事, 親綴銘詩序以弁之曰, 《太學銀盃詩集》。 修明太學講試之規, 或臨軒親試, 或頒題親考, 或條問經義, 往往賜上第, 除初仕賞賚遍及, 至于八方, 莫不賓興。 有《瓊林聞喜錄》、《正始文程》、《嶠南關東》、《耽羅》、《豐沛》、《關北》、《關西賓興錄》, 樂育譽髦之盛, 古未有也。 命大臣銓臣方伯之臣, 薦進專治, 朱子書者, 誅習西洋耶蘇邪敎者尹持忠, 權尙然。 王自養德春宮, 非問寢視膳, 則潛心經籍。 及御極, 一日萬幾, 宵衣旰食。 而左右縹緗, 仰思俯索, 夜以繼晝曰, 「予豈有問學工夫? 而以經歷之多艱, 不能無動心怨性之益。」 又曰, 「予始留意於作家, 又從事於經學, 亦嘗用工於端拱曲跪, 今而思之, 未覺有補於身心。 且帝王之學, 與韋布不同, 自有大於此者。 心性理氣, 猶不必毫分縷析, 況詞章述作, 何足費吾心力?」 其發爲雲漢, 神明變化, 灝灝渢渢, 可與典謨雅頌竝美。 有《弘齋全書》三集一百卷, 又有《大學類義》, 《尊周彙編》經史子集四部, 手圈《宋史直詮》; 《五倫行實》, 《鄕禮合編》ㆍ《八家百選》 《朱子書會英選》ㆍ《統百選》ㆍ《會選節約》諸篇, 有以契夫刪述之旨, 而其積中彰外之文, 皆於是乎在明正學、闢邪術、崇經訓、黜雜稗, 五敎三物, 大興庠序。 一時待文之士, 莫不鼓舞振作於鳶魚飛躍之中。 《傳》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其王之謂乎? 王, 天挺勇智, 神武蓋世。 閱歷艱虞, 掃蕩群兇, 摠攬王綱, 太阿在手, 舒慘弛張, 人莫敢窺其際。 宮府一體, 表裏洞達, 內自朝廷之上, 以至窮閻遐陬, 人人以謂 「上帝臨汝。」 置宣薦禁旅, 以開入彀之塗, 罷守禦京營, 設北關兩鎭, 以汰冗兵而拓邊荒。 著《兵學通》ㆍ《武藝圖譜》, 以盡衝衡奇正坐作擊刺之法。 暇日御內苑, 肄陣以觀之, 顧眄指揮, 風雲翕欻, 蓋我寧陵 滌惱堂試馬之志也。 其於射藝, 得於天分, 五十發輒四十九中, 曰 「物不可盈也。」 至於壯勇營之設, 不徒以備宿衛飭戎垣, 常以 「均役之法, 減布, 惠民之先朝至意, 而任事之臣, 不能對揚, 率苟且不便。」 擬將罷此而更之也。 其規畫施措, 神筭所及, 蓋非摸度驟議者所可知。 又如外營之定衛部, 舊制, 亦有深意在焉。 嗚呼! 其已矣。 《書》曰, 「布昭聖武, 兆民允懷。」 其王之謂乎? 丙申, 追奪李光佐、趙泰億、崔錫恒官爵。 王, 以辛壬義理, 宜先闡明, 命遵乙亥處分。 辛丑賜祭于四忠祠, 贈故學生徐德修職, 甲辰, 賜〔祭〕 四大臣、三將臣、四節度、及達城府院君 徐宗悌, 贈判書李廷熽, 旌贈判書趙聖復, 贈參判金省行閭。 戊申三月, 敎曰, 「是年是月, 卽我先王揚武戡亂之年若月也, 舊甲云回, 徒見山高而水淸。 以小子追感之心, 曷其不醻忠報勞, 以答前寧人攸受休哉?」 乃遍酹殉節勤事諸臣, 命諸道, 訪問從征將士生存者收錄之, 又追念壬午以前盡分諸臣, 皆加褒美。
初, 世祖命大提學申叔舟, 撰太祖、太宗、世宗、文宗四朝《寶鑑》, 而其後只有李端夏所編 《宣廟寶鑑》, 李德壽所編《肅廟寶鑑》。 及《英宗實錄》成, 王, 命仍纂《寶鑑》, 又以十二朝, 尙未有《寶鑑》, 竝爲編輯, 凡六十有八卷。 敎曰, 「列朝玉冊金寶, 倣周廟之陳寶器, 必皆奉安于入廟之時, 而《寶鑑》, 所以揄揚功德, 垂裕來嗣, 實與《西序》, 《大訓》, 同其規模, 雖琬琰之表徽, 璽章之昭度, 猶不足以喩其重。」 乃親上于宗廟 永寧殿, 分藏各室, 尊英宗爲世室。 王, 又得英宗所編《羹墻錄》曰, 「列聖朝治法征謨, 盡在是矣, 《寶鑑》, 編年是錄彙類, 便於覽省, 尤要且切。」 命閣臣續纂之。 王凡一日事爲, 輒有記識, 以《起居注》之多錯漏, 命內閣, 別爲編錄, 取曾子日三省之義, 名曰《日省錄》, 閣臣又錄登筵, 承聆聖語, 爲《日得錄》。 王, 諭之曰, 「此錄如經義問難, 時政酬酢, 欲資觀省也, 若但溢美鋪張, 後之觀者, 謂此時何如也?」 嘗曠感於端廟時事, 親製文致酹六臣, 博考殉義, 諸臣凡得二百三十人, 設壇于莊陵側, 春秋配食侑祀, 有《莊陵配食錄》。 每望拜皇壇, 輒遣官審宣武祠, 命李提督世祀不祧, 宣額於龍灣之顯忠、紀忠兩祠, 竝腏七義士林寅觀等九十五人壇而酹之, 以慰漢冠之獨葆秉義。 斥和諸臣, 竝皆表奬存錄, 建忠臣義士壇, 撰旌忠尙武碑, 有《尊周錄》。 王於三皇忌辰, 輒御素膳曰, 「近古以上, 公坐會食, 不食牛肉, 國忌, 朝臣皆茹素兩日。 先朝初年猶如此, 今則不然矣。」 觀刈于東耤, 賜勞酒田夫, 下綸音勸農。 每於元正, 必下綸音觀農, 而以觀刈又申之。 王常謂, 「欲法堯、舜當法祖宗。 恢廓之度, 承乎太祖, 巍煥之文, 監乎世宗, 英武若光廟, 至行若孝陵, 寤寐風泉, 大義彰著, 若孝廟, 進退賢邪, 威斷有赫, 肅祖之治體也。 建其皇極, 保我世臣, 英考之心法也。」 《書》曰, 「丕顯哉文王謨! 丕承哉武王烈!」 其王之謂乎。 先王魂殿, 旣啓殯, 王曰, 「《喪禮補編》, 『以魂箱行朝祖。』 夫喪禮, 有進而無退。 檀弓 『負夏主人旣祖, 推柩而返之,』 子游譏其失禮。 戶庭之內, 推而返之, 猶譏其失禮, 況以魂箱出辭太廟, 還奉殯殿? 又魂返室堂, 卽先儒之言, 朝祖不以梓宮而以魂箱, 俱非禮意。 欲準古禮, 則古今異宜, 此不可遽議也。」 遂命依《五禮儀》國制。 禫之日, 陳軒懸振作, 王曰, 「祥而縞, 是月禫, 徙月樂。 孟獻子禫懸而不樂, 夫子曰, 加於人一等, 慨廓之餘, 何忍遽聞鍾鼓之音乎? 禫月, 大小法樂, 懸而不作, 著爲式。」 吉禘于太廟, 特命忠獻公金昌集, 配享于英宗廟庭, 文正公宋時烈, 追配孝宗廟庭。 始政府議上英宗配享諸臣, 以昌集未及逮事, 不入於議。 王曰, 「宋 張浚有功於孝宗, 建策時議者, 有事在異朝, 難於配庭之論, 而楊萬里獨以爲當配。 故相決策之大義, 殉身之危忠, 正當援張浚之事。」 又曰, 孝廟之於先正, 契合密勿, 卽《春秋》大義也, 不爲配享, 誠欠典。 於昭在上之靈, 安知不有待於芬苾焄蒿之時乎? 翼成公 黃喜, 追配世宗, 文敬公 金安國, 追配仁宗, 文正追配, 又可已乎?」 桓祖誕降之八回甲乙卯, 遣大臣, 行酌獻禮于咸興本宮。 咸興儒生, 有以永興本宮典祀廳故蹟上疏者, 王, 感悟, 詢議廷臣, 乃遣大臣禮官, 躋享桓祖大王, 懿惠王后于永興本宮。
兩本宮之奉先王先后位版, 蓋原廟之制也。 舊令內司, 別差典祀享, 率多違禮, 王乃悉正其儀節, 歲封衣幣, 必宿齋躬莅。 祈穀于大社, 陞爲大祀。 飭諸路社壇, 修治禁護, 月報宗伯, 考勤慢, 享皇壇, 始定親省牲器。 從祀文靖公 金麟厚於聖廡, 改諡文正, 賜額文正公 宋時烈祠之在驪州者曰大老祠, 御製御筆爲碑, 樹其庭。 徧修檀君、箕聖 三國、高麗始祖諸王陵, 號溫祚王廟曰崇烈殿。 禁宦侍毋敢與外臣接語, 盡出巫覡于江外, 僧尼勿許入京城, 下綸音于諸道, 講鄕飮酒之禮。 又誥休老勞〔農〕 廣敬因本之義, 絿農書應旨進書者甚多。 我朝經制之書, 世宗創《六典》。 世祖著《經國大典》, 成宗時有《續錄》, 肅宗時有《輯錄通考》, 先朝有《續大典》。 王, 以原典續典, 各爲一書, 艱於考據, 命取二典及續典後, 先王敎令當宁受敎可著爲令者, 通爲一書, 是爲《大典通編》, 頒行中外。 嘗行大政, 敎曰, 「西京最重吏選, 今也不然。 用人旣用科目, 而文之侍從, 反不若蔭武。 內而未爲掌賦之官, 外而未爲字牧之任, 金穀甲兵, 皆所〔茫〕 昧。 若使新進文臣, 試吏下邑, 習知民生之疾苦, 及其馹召而來, 簉言退牘, 陳其利(弊)〔弊〕 。 九重雖邃, 四野在邇, 其有裨於民國, 勝於日遣繡衣。」 乃飭文蔭武互差之政。 王, 以不世出之姿, 有大有爲之志。 (蕫)〔董〕 正治官, 斟酌質文, 凡吉、凶、軍、賓之儀文度數, 莫不參伍經曲, 博極今古禮樂, 物采粲然備成。 以至官府郡縣, 莫不有志, 量衡律度, 莫不有則, 籌謨、銓注、軍實、獄決、邦用、民數、莫不有考, 而一部大典, 秩然一王之成憲。 《詩》曰 「遹求厥寧遹觀厥成。」 其王之謂乎? 王, 嚴恭寅畏, 昭事上天, 容光所照, 未嘗跛倚, 更衣便旋, 未嘗北向曰, 北辰所居也, 遇疾風迅雷甚雨, 必變必興。 親裸宗廟, 周旋出戶, 齊齊乎其敬也, 升降薦獻, 趨進翼如也, 百辟駿奔, 莫不肅雍。 其或命攝, 則遣近臣眂其事, 出御齋殿, 以候聞禮畢乃休, 其陵園諸享, 必進餕果糗餌, 跪而嘗之。
嘗大暑, 御賓筵敎曰, 「今日熟, 輒有卿等夙退之意, 此怠心也。」 仍竟日乃罷。 淸燕晉接, 簡其禮數, 天笑每新, 溫然若家人父子, 俄而出御法殿, 群臣俯伏抑首, 莫敢仰視。 曾經賓客兩坊官者, 雖蔭官, 稱其職而不名, 雖內覿私昵, 戚畹之臣, 不敢干朝政, 中涓之輩, 非公事不敢輒至於前, 嘗曰, 「接士大夫時多, 接宦官宮妾時少, 予於此, 庶無愧也。」 若金龜柱之以冑筵語, 論洪鳳漢於大朝, 則島棘之, 洪樂任置頒曆單, 洪守榮差享官, 則竄兵判銓官, 處分必赫然兩嚴。 勤於政事, 凡朝參、常參、賓對、輪對; 必皆行之, 諸臣章奏, 中外狀牘, 卽報可否, 無一或淹。 日輒引接臣隣, 多至夜分, 禁鑰未開, 命令已下, 至中昃不遑暇食, 有以過於勤勞爲言者。 王曰, 「我自不疲, 守成之君, 只當以勤政憂民爲心。 不如是, 亦將安所用其心哉?」 愼乃儉德, 衣有屢澣, 非袞服則未嘗御錦綺, 御膳無珍奢奇鮮之味。 寢殿樸陋, 窓壁至熏煤如塗, 有司請葺理, 王曰, 「是豈有甚費而不爲哉? 我自不見其爲陋也。」 御座之側, 圖書器物, 皆齊整有定處, 堂皇窔奧之內, 井然如位著, 亦可以仰知幽獨之地也。 《傳》曰,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其王之謂乎? 旱將祈雨, 知製敎撰進祭文, 王曰, 「冊祝無罪已之語可乎?」 命改之, 遂下綸音, 以十事責躬。 又嘗禱雨于大雩, 烈日中屛傘, 蓋御步輿至壇, 露坐竟日。 旣訖事還宮, 不脫袞冕以待, 已而果雨。 王, 顧諟明命, 上帝是祗, 每曰, 「天遠乎哉? 在方寸間。」 或有災沴, 恐懼省檢, 終始靡解。 固聰明聖知, 百代之治亂, 九流之藝術, 人物之性情, 鬼神之變化, 無不心喩而意解曰, 「理一而已, 包羅萬有, 酬酢百爲。」 每臨筵, 啓奏迭前, 廟謨臺章, 刑獄財賦, 一時竝擧, 泛應曲當, 沛然有餘暇。 取人爲善, 不以踈遠卑賤而或遺, 群臣進見, 必假之顔色, 導之使言, 言或拂意, 未嘗加之威怒, 求言之敎, 前後十數下。 嘗曰, 「先朝晩年, 尙多危言激論, 近日無敢言者, 豈以寡人, 惡聞其過乎?」 急賢如渴, 有以經術進者, 有以文學進者, 有以才〔猷〕 進者, 有以世祿勳舊進者, 或拔擢於衆棄之中, 或拂拭於罪累之餘, 皆得自效其尺寸之能。 嘗扁寢殿曰, 蕩蕩平平室, 又著《萬川明月主人翁序》, 以自喩。 《易》曰, 「聖人崇德而廣業, 崇效天卑法地。」 其王之謂乎? 十四年庚戌, 綏嬪嘉順宮, 誕我殿下, 王, 命王妃, 取以爲子, 乃大赦賜耆民爵, 百歲人加給米肉, 蠲諸道舊糴減除諸稅, 是歲大熟。 二十四年庚申正月上日, 拜景慕宮, 是月拜顯隆園。 伏地嗚咽失聲曰, 「今日又忍辭園而歸耶?」 比還駕, 益疚懷。 自是頻有不安節。 二月乙酉, 冠我殿下, 冊爲王世子, 遵顯宗故事, 嘉禮將竝行於是年, 嬪宮初揀。 今坤殿膺選永安府院君 安東 金祖淳女。 是日還第也, 特命具儀衛, 如三揀焉。 至六月之初, 又有〔癤〕 候, 日沈谻, 猶以民事不可緩, 敎承旨, 毋滯啓奏。 二十八日己卯, 疾大漸, 大臣閣臣, 入候臥內, 王, 已不能語。 而微微有玉音曰, 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殿。 蓋聖意若有仰告於慈聖者也。 遂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春秋四十九。 大喪之日, 都人士庶, 顚仆哭踊, 深山窮谷, 莫不悲號如喪其父母焉。 嗚呼! 痛矣。 我殿下, 與大小臣, 考古諡法, 謹上尊諡曰文成武烈聖仁莊孝, 廟號正宗。
若王之爲正,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道學之正也。 建天地而不悖, 俟百世而不惑, 義理之正也, 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治法征謨之正也。 諡者行之跡, 號者, 功之表。 嗚呼! 其庶矣。 而大德得其名, 獨不得其壽, 天之所以保佑命之者, 果何徵? 豈亦所謂氣數之使然? 而雖然, 儀式刑文王之典, 日靖四方, 宗廟饗之, 子孫保之, 萬世永賴, 此可大徵矣。 王妃金氏, 淸風府院君 忠翼公, 諱佑明, 顯宗明聖王后考也, 而於后爲五世祖, 左參贊贈領議政淸原府院君 靖翼公, 諱時默, 唐城府夫人 南陽 洪氏, 后之考妣也。 以英宗癸酉十二月十三日, 誕后于漢師之私第, 園之桃李, 忽盡再榮, 家人異之, 已而后生焉。 后德容天成, 貞閒婉嫕動止有則。 九歲膺揀選, 英宗嘉甚, 手書 ‘五世繼昔寔爲宗國’ 八字賜之。 致十歲之二月, 冊爲世孫嬪, 丙申正位中壼, 庚申我殿下嗣服, 尊爲王大妃議進尊號。 后曰, 「先王不受號, 以致慟在心也, 未亡人受之於先王, 精義何?」 我殿下雖缺然於孝心, 而群臣益感服。 庚辰冬, 大臣禮官, 奏, 「再明年慈壽躋七旬, 禮當稱慶, 而其歲壬午也。 請進行賀禮於膺揀周甲之明年。」 乃月正元日, 殿下率世子百官, 奉箋上賀。 又將仰稽英宗丙子仁元大妃盛事, 以議慶喜之典。 后則益以爲疚, 始微不豫, 閱月漸劇, 禮陟于同宮之慈慶殿, 嗚呼! 痛矣。 后性仁孝恭儉, 自入宮之初, 屢際艱難之會。 壬午之閏, 有命惠嬪及后, 各還私第, 后願隨惠嬪所在, 英宗聞而善之。 事莊獻世子未半年, 以承事之無幾, 益爲沒身之慟, 奉惠慶宮, 怡愉洞屬, 常若不勝。 庚申以後, 又一以王之所以事之者, 事之於貞純大妃亦然, 與二郡主友愛甚至。 恥言人過, 喜怒不形於色, 戚屬有失, 未嘗加之誚責, 但淵默不言, 其人率慙惶, 甚於被譴云。 尤以私家恩澤爲戒, 雖以物施者, 未嘗輒有私與, 自奉甚踈約, 服飾器用, 僅取供給而已。 中年, 后忽有候若娠, 王喜甚亟, 設産室, 踰歲竟無育。 至庚戌, 卽定大倫, 顧復之恩, 不啻己出, 我殿下, 又愛敬篤盡, 慈孝之盛, 宛然如昔日。 始戊戌, 臺臣朴在源, 以貞純諺敎; 「有坤殿患候嗣續無望」 之語。 請求良醫調治, 國榮大怒, 公坐叱罵, 在源, 當此時, 后之處洪嬪之難可知也。 而王卒察在源之忠, 特贈美官以旌之。 兩殿之無間然, 又如此, 此皆王之明而后之德也。 其在長樂則益無得以形容上天之載, 嗚呼! 其德之至矣。 群臣悉愼錄上諡號曰孝懿, 徽號曰睿敬慈粹, 嗚呼! 亦庶矣。 后之籍系世德, 有前大提學金祖淳所撰誌文詳之。 嘉順宮又生淑善翁主, 下嫁永明尉 洪顯周, 殿下生二男, 長世子, 次不育, 二公主, 長封明溫, 次未封, 一翁主亦未封。 淑善生一子。 嗚呼! 先王亦嘗察臣戇拙, 再攀墮髯, 忍不蓐蟻, 而猥執記述, 誠懼不足以知德之萬一, 其忍敢溢? 千歲在後, 是可以質之矣。 【大提學沈象奎製。】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82면
- 【분류】왕실(王室)
- [註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