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의 예를 정하다
차대하였다. 영릉(英陵)과 장릉(長陵)을 이장할 때의 사례에 의하여 이번 산릉의 합장 때에 지문(誌文)은 합하여 짓게 하였고, 장릉을 옮겨 합장할 때의 사례에 의하여 표석(表石)은 하나만 설치하고 앞면과 뒷면의 글자를 모두 합하여 새기게 하였다. 영의정 한용귀가 아뢰기를,
"표석은 하나로 합하여 새기기로 이미 정하였으니, 사체상 별도로 새돌을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새로 뜬 돌의 품질이 결국 극히 아름다운 옛날의 돌만 못합니다. 그리고 옛 표석은 높고 두터운데다 넓기까지 하므로 비록 갈아서 다듬더라도 치수가 각 능침의 표석과 비교하면 남았으면 남았지 모자라지는 않으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옛 표석을 가첨석(加簷石)과 함께 그대로 쓰자.’고 합니다. 농대석(籠臺石)에 있어서는 체석(體石)을 갈아서 다듬은 뒤에는 꽉 맞추어 견고하게 하기 어려우니, 새 돌을 준비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장할 때에 애책문(哀冊文)에 대해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장릉(長陵)을 이장할 때에는 영릉(寧陵)의 사례에 의하여 그냥 옛날의 애책문을 사용 하였는데, 첩(帖)의 끝 부분 빈 곳에 이장한 연월을 첨가해 써 넣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하여 할 것입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금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백성의 일이 걱정스럽습니다. 외도(外道)에 농사 형편이 가물어서 딱한 곳이 있을 경우 비록 모든 제사를 정지하는 때이지만 규벽(圭壁)061) 을 거행하지 없을 수 없습니다. 이 뜻을 여러 도에 분부하여 구애하지 말고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장할 때의 지석(誌石)에 대해 등록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영릉을 이장할 때에 양위(兩位)의 지문(誌文)을 합해 엮어서 썼고, 장릉을 이장할 때에도 영릉의 전례에 의하여 하였습니다. 이번 구릉(舊陵)의 이장과 신릉(新陵)의 합봉을 같은 날 하게 되었으니, 지문은 두 능의 사례에 의하여 합해서 짓는 것이 인정이나 예절로 헤아려 볼 때 실로 합당합니다. 즉시 제술관(製述官)을 계하(啓下)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 임한호가 아뢰기를,
"근래에 사치의 습관이 해마다 늘어나 의복에 법도가 없어져서 귀천의 차별이 없으므로 비천(卑賤)한 하인이나 한미(寒微)한 서민까지도 모두 화려한 것을 숭상하여 의복이 분수를 넘고 있습니다. 찬란한 제도는 모두 귀한 가문을 본받고 장식의 물건은 대부분 북경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용하는 등 서로 모방하여 고상한 풍치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중의 궁속(宮屬)은 더욱 심하여 일상적인 피복도 반드시 가볍고 고운 것을 찾고 있습니다. 이번 국상 때 포목(布木)을 나누어 준 일만 보더라도 누차 퇴자를 논 바람에 여러 날 서로 버티어 폐단이 많았으니, 이 밖에 모든 일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폐단을 없애지 않을 경우 재물을 허비하는 틈을 막을 수 없고 백성이 곤란을 받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쓰러지게 된다.’062) 고 하였으니, 먼저 성상부터 검소한 덕에 힘쓰시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에 보이소서. 그러면 위에서 행하는 것을 아래에서 본받아 명령하지 않아도 따를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재물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유족하게 하는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성상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주연(胄筵)063) 을 부지런히 열 것과 궁료(宮僚)를 자주 접견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내외의 관사를 신칙하여 저장한 물품이 헛되게 없어지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호조 판서 박윤수가 아뢰기를,
"국상 때에 호조에서 써야 될 것이 30여만 냥이나 되고 이 밖에 큰 일이 자주 겹쳐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 것이므로 형편상 특별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과 지방의 아문(衙門)에 사실 착수할 곳이 없습니다. 전에도 이와 같을 때는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 향군(鄕軍)의 번(番)을 세우지 않은 대신 돈과 쌀로 받아 쓴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금년 9월부터 5년까지 번을 중지하고 그 댓가를 본조에서 가져다 쓴다면 당장의 경비를 그런대로 매꾸어 나갈 수 있겠기에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한용귀, 좌의정 남공철, 우의정 임한호가 모두 말하기를,
"사체는 비록 매우 구차스러우나 당장 눈앞의 사세가 변통할 길이 없고, 또 연전에 이미 시행한 사례가 있으니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김노경이 아뢰기를,
"조조(朝祖)064) 의 의식 절차가 《오례의(五禮儀)》에는 기록된 바가 없고 《상례보편(喪禮補鞭)》에는 ‘신백(神帛)065) 으로 예를 행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병신년066) 에 대신과 유신에게 널리 물어본 뒤에 《오례의》에 의하여 거행하였기 때문에 경신년067) , 을축년068) , 을해년069) 에도 모두 예조에서 병신년에 이미 행한 사례에 의거하여 여쭈어 보기만 하고 마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식년(式年) 여러 과거의 초시(初試)는 명년 봄으로 미루어 행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수찬 강세륜(姜世綸)이 아뢰기를,
"연풍현(延豊縣)의 일은 정말 끔찍합니다. 이날 사형을 거행하였으니,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도백이 사전에 신칙하지 않아 이런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추고만하고 말 수 없습니다. 청컨대, 공청 감사 이석규(李錫奎)를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한용귀가 아뢰기를,
"호서 도백의 이번 일은 살피지 못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으니, 유신이 파직하자고 청한 것은 사체상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하건대, 그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지금 곧 바로 체차할 경우 맞이하고 보낼 때에 백성에게 많은 폐단을 끼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가뭄이 본도에 더욱 심하니 앞으로 백성의 일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에 체차하는 것은 실로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옥당의 아뢴 바는 역시 소견이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77면
- 【분류】왕실(王室) / 재정-국용(國用)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註 061]규벽(圭壁) : 천지에 제사함.
- [註 062]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쓰러지게 된다.’ :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로,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불면 쓰러지게 된다. [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草尙之風 必偃]"는 구절을 인용한 것임. 즉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게 된다는 뜻임.- [註 063]
주연(胄筵) : 왕세자의 강학하는 자리.- [註 064]
조조(朝祖) : 제사 이름.- [註 065]
신백(神帛) : 왕이나 왕비의 시체를 둔 빈전(殯殿)에 모시는 베로 만든 신주.- [註 066]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註 067]
○甲戌/次對。 命依英陵、長陵遷奉時例, 今番山陵合祔時誌文合撰, 依長陵遷奉合祔時例, 表石設一坐, 前後面文字, 竝爲合刻。 領議政韓用龜啓言: "表石旣以一坐合刻定奪矣, 事當別治新石。 而新浮石品, 終不如舊石之盡美。 且舊石高厚且廣, 雖除磨正, 分數比之, 各陵寢表石, 有衍而無減, 衆議皆以爲 ‘舊石, 竝加簷仍用。’ 至於籠臺石, 則體石磨正之後, 難以密合而安固, 措備新石, 極爲便當矣。" 從之。 又啓言: "遷奉時哀冊文, 謹考《謄錄》, 則長陵遷奉時, 依寧陵例, 仍用舊冊, 而就末帖空處, 添載遷奉年月矣。 今番亦依此爲之乎?" 從之。 又啓言: "見今雨澤久閟, 民事可悶。 外道農形, 如有渴悶處, 則雖在諸享停廢之時, 不可無圭璧之擧。 以此意, 分付諸道, 史之勿拘擧行。" 從之。 又啓言: "遷陵時誌石, 謹考《謄錄》, 則英陵遷奉時, 兩位誌文, 合撰用之。 長陵遷奉時, 亦依英陵已例爲之矣。 今番舊陵遷奉, 新陵合祔, 旣在同日, 則誌文之依兩陵例合撰, 揆以情禮, 實爲允當。 請製述官, 卽爲啓下, 使之擧行。" 允之。 右議政林漢浩啓言: "近來奢靡之習, 年加歲增, 衣章無度, 貴〔賤〕 無間, 輿儓之〔賤〕 , 匹庶之微, 皆尙華麗, 服着踰分。 燦燦之制, 皆效貴家, 〔玩〕 好之物, 多須燕産, 互相模倣, 看作高致。 且掖庭宮屬, 尤有甚焉, 尋常被服, 必要輕細。 雖以今番國恤時布木分賜事觀之, 屢次敲推, 歷日相持, 爲(弊)〔弊〕 多端, 外此凡事, 可以推類而知。 此弊不祛, 糜財之竇, 無以防塞, 而生民受困, 勢所必至矣。 《傳》曰: ‘草尙之風, 必偃。’ 先自聖躬, 益懋昭儉之德, 以示內外宮府。 則上行下效, 不令而從, 此豈非裕財足民之一助乎? 深願更留聖念焉。" 上曰: "當留念矣。" 又請勤開冑筵, 頻接宮僚, 從之。 又請飭內外官司, 俾無蕆蓄枵蕩之(弊)〔弊〕 。 戶曹判書朴崙壽啓言: "國恤時臣曺應用三十餘萬兩, 外此大事稠疊, 入用浩多, 其勢不得不別般變通。 顧今京外衙門, 實無着手之處。 在前如此之時, 多有禁御兩營鄕軍停番, 取用其錢米之例。 自今九月爲始, 限以五周年停番, 本曹取用, 則目下經用, 庶可以牽補架漏, 故敢此仰達。 請下詢大臣處之。" 領議政韓用龜, 左議政南公轍, 右議政林漢浩, 僉以爲 "事面雖極苟且, 而目下事勢, 變通無路, 且有年前已行之例, 依施似好矣。" 從之。 禮曹判書金魯敬啓言: "朝祖儀節, 《五禮儀》則無所載錄, 《喪禮補編》則 ‘以神帛行禮’ 載錄。 而丙申年, 博詢大臣儒臣後, 命依《五禮儀》擧行, 故庚申乙丑乙亥, 俱自臣曹, 據丙申已例稟旨, 不爲磨鍊矣。 今亦依此擧行。" 從之。 又請式年諸科初試, 退行於明春, 從之。 修撰姜世綸啓言: "〈延〉豐縣事, 誠爲悚然。 重辟之擧, 行於是日, 事未前有。 當該道臣之不能先事提飭, 做此大錯, 不可以推考而止。 請公淸監司李錫奎罷職。" 從之。 領議政韓用龜啓言: "湖西道臣之今番事, 不可但以不審言, 儒臣之請罷, 事體固然。 而第念其莅任屬耳, 今若徑遞, 則迎送之際, 將致民邑之許多(弊)〔弊〕 端。 況今暵乾, 本道尤甚, 來頭民事, 不可不念。 此時遞易, 誠爲可悶矣。" 敎曰: "玉堂所奏, 亦有所見矣。"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77면
- 【분류】왕실(王室) / 재정-국용(國用)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註 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