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 이장을 수원 옛날 향교로 정하다
건릉을 이장할 곳을 수원 옛날 향교 터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산릉을 살펴본 대신 이하 천릉 도감 당상을 여차에서 불러 보고 또, 상지관(相地官)인 사과(司果) 남양진(南陽進)·김경인(金景寅)·최상일(崔相一), 사용(司勇) 신희(申熙), 교수 방경국(方慶國)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상지관은 차례대로 주달하라."
하니, 남 양진이 말하기를,
"교하(交河)의 장릉(長陵) 재실(齋室) 뒤는 내려오는 산맥이 길고 멀며 곱고 아름다우며, 자리[穴處]가 안온(安穩)하고 명당(明堂)으로 넓고, 평평하니, 이는 지리서(地理書) 가운데 귀격(貴格)으로 치는 것입니다. 수원의 옛날 향교 터는 산맥의 형세가 웅장하고 존엄한 가운데 또 아름답고 곱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장풍향양(藏風向陽)하여 혈성(穴星)이 십분 뚜렸하며 수구(水口)가 막히고 조회하는 산과 안산(案山)이 모여들었는데 수풀 사이에 아름다운 기운이 가득차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최상의 길지 입니다. 이 두 곳을 가지고 논하면 수원이 교하보다 더 낫습니다."
하고, 김경인·최상일·신희 등의 아뢴 바도 같았다. 판부사(判府事) 한용귀가 말하기를,
"신 등이 이번에 교하의 장릉 재실 뒤와 수원의 옛날 향교 터를 모두 살펴보았는데, 산세의 웅장함과 혈성의 풍후함과 좌우 산맥의 모여듬과 안산의 수려함은 두곳이 똑같은데 매우 좋은 땅인 듯합니다. 또 상지관의 말을 듣건대, 역시 똑같이 찬미하면서 ‘만약 수원을 교하에 비교하면 매우 귀하고 매우 길한 품격은 매우 차등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만 년의 무궁한 터를 원침(園寢)의 가까운 안에서 얻었으니 지난해에 선침(先寢)047) 을 가까이 하시려는 성상의 뜻에 진실로 부합된 것으로서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하고, 판부사 김사목은 말하기를,
"수원의 옛날 향교 터는 풍수가의 말뿐만 아니라 살펴 본 여러 신하들이 너나없이 찬미하였습니다."
하고, 총호사 남공철은 말하기를,
"교하의 장릉 재실 뒤의 터는 웅장 수려하고, 수원 옛날의 향교 터는 안온 풍후 하니 모두 대단히 길한 자리라고 할 만합니다. 여러 대신과 여러 당상관의 소견도 이의가 없고 상지관 등도 극구 칭찬하면서 모두 최상의 길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장하겠다는 명이 있을 때부터 신 등이 매양 서로 대하여 이에 대해 논하기를, ‘수원에서 만약 길지를 얻지 못할 경우 그만이지만 만일 길지가 있을 경우 진실로 신도(神道)와 인정에 합치한다.’고 하면서 더욱 이를 밤낮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히 좋은 자리를 수원 안에서 얻었으니, 너무나도 기쁘고 다행한 일입니다."
하고, 관상감 제조 김조순은 말하기를,
"신이 교하에 두 번 나가고 수원에 세 번 나갔는데, 여러 풍수가들이 모두 찬미하고 서로 어긋나는 논의가 없었습니다. 비록 보통 안목으로 말하더라도 모두 최상의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으므로 진실로 감히 피차의 고하(高下)를 따져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만 수원이 교하보다 못하다는 것은 정말 논할 것도 없습니다. 똑같은 길지라면 천리와 인정에 부합되는 데에 따라 어느 곳을 취하거나 버려야 할지 저절로 쉽게 결정될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결정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 입니다."
하고, 천릉 도감 당상 김이양은 말하기를,
"신은 여러 풍수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 수원을 최상의 길지라고 똑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의 아뢴 바도 천리와 인정을 참작한 것이니 오직 성상께서 단정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고, 산릉 도감 당상 이상황은 말하기를,
"이번에 두 곳을 살펴 본 상지관들의 논의가 모두 지극히 좋고 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원에 있어서는 원침의 국내(局內)에 이같은 최상의 길지를 만났으니, 천리와 인정으로 참작하건대 진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노경은 말하기를,
"신이 연전에 원관(園官)으로 있을 때 옛날에 들었던 말씀이 있었는데, 이번에 원지(園志)를 상고해 보니 역시 성상의 말씀이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 택한 산등성이가 과연 서로 부합되었으니, 자못 천지가 묵묵히 도운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옳다. 더군다나 상지관이 모두 대단히 길하여 교하보다 낫다고 하니, 다시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옛날 향교 터로 결정하겠다."
하였다. 총호사 남공철이 아뢰기를,
"삼가 등록을 상고해 보니, 기유년에 원(園)을 옮길 때 재실(梓室)을 바꾸지 않았습니다만 여러모로 극진하게 한다는 뜻에서 미리 준비하여 대령해 놓았습니다. 이미 기유년의 전례가 있으니, 장생전(長生殿)에 분부하여 기일 전에 비갑(椑匣)을 만들게 하고, 재궁(梓宮)도 기유년의 사례에 의하여 사용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준비하여 대령해 놓으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74면
- 【분류】왕실(王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47]선침(先寢) : 선친의 능묘.
○命健陵遷奉, 定于華城舊舊鄕校基。 是日, 召見山陵看審大臣以下, 遷陵都監堂上于廬次, 又命相地官司果南陽進、金景寅、崔相一, 司勇申熙, 敎授方慶國, 使之入侍。 上曰: "相地官以次奏達也。" 陽進曰: "交河、長陵齋室後, 則來龍長遠姸美, 穴處安穩, 明堂寬平, 此地家書中貴格也。 水原舊舊鄕校基, 則龍勢雄偉, 尊嚴之中, 又爲端麗。 兼之以藏風向陽, 穴星十分眞的, 水口關鎖, 朝對拱揖, 林木之間, 可見佳氣之蔥鬱, 此是無上吉地。 而以兩處論之, 水原有勝於交河矣。" 景寅、相一、熙等所奏, 亦同。 判府事韓用龜曰: "臣等今番交河、長陵齋室後及華城舊舊鄕校基, 竝看審, 而山勢之雄偉, 穴星之豐厚, 龍虎之拱挹, 案對之明麗, 兩處同然, 似是極吉之地。 而且聞相地官之言, 亦皆一辭贊美, 而 ‘若以華城較彼交河, 則品格之極貴極吉, 不啻隔等’ 云。 得此萬年無疆之基於園寢密邇之內, 允叶, 昔年密邇先寢之聖意, 誠非偶然矣。" 判府事金思穆曰: "水原舊舊鄕校基, 則不但地師之言, 看審諸臣, 莫不贊美矣。" 摠護使南公轍曰: "交河、長陵齋室後基, 雄渾秀麗, 華城舊舊鄕校基, 安穩豐厚, 俱可謂大吉之地。 諸大臣及諸堂之見, 皆無異辭, 相地官等極口贊揚, 皆以爲無上吉地矣。 自有遷奉之成命, 臣等每相對論, 此以爲 ‘華城, 如不得吉地則已, 如有吉地, 則允叶於神理人情。’ 尤以此日夜企望。 得此大吉之地於華城之內, 萬萬喜幸矣。" 觀象監提調金祖淳曰: "臣再進交河, 三詣華城矣, 諸地師竝皆讃美, 無參差之論。 而雖以凡眼言之, 俱知爲上吉之地, 誠不敢以彼此高下, 質言仰對, 而華城如或不及於交河, 則固無可論。 等是吉地, 則天理人情之所符, 取捨自可易定矣。 惟在自上裁斷焉。" 遷陵都監堂上金履陽曰: "臣竊聞諸地師輩, 皆以華城爲無上吉地, 一辭同然。 諸大臣所奏, 又參之以天理人事, 惟望睿志之斷定焉。" 山陵都監堂上李相璜曰: "今番兩處看審, 相地諸人之論, 皆以爲極吉無欠。 以至於華城則園寢局內, 遇此無上吉地, 參之以天理人事, 實非偶然矣。" 禮曹判書金魯敬曰: "臣於年前, 待罪園官時, 有仰承於昔日者, 今番考見園志, 亦載聖敎。 而叶吉之岡, 今果相符, 殆若天地之默相者然矣。" 上曰: "卿等之言, 旣甚允當。 況諸相地官, 皆謂其大吉, 而勝於交河, 則更有他〔議〕 乎? 以舊舊鄕校基完定。" 摠護使南公轍啓言: "謹稽謄錄, 則己酉遷園時, 不爲改梓室, 而以靡不用極之意, 預爲備待矣。 旣有己酉已例, 分付長生殿, 使之先期治椑匣, 梓宮, 亦依己酉年例, 毋論入用與否, 使之備待之意, 分付。" 從之。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74면
- 【분류】왕실(王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