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돈녕 김조순이 장례에 대하여 상소하다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요사이 서운관 제거(書雲觀提擧)의 임명을 삼가 받았으므로, 상사를 감독하는 예조의 신하와 같이 건릉(健陵)038) 에 나아가 신릉(新陵)을 합장하는 것이 적당한지의 여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는 물론 예전(禮典)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건릉의 자리에 대해 항상 근심하고 두려움이 마음속에 맺혀서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으므로 감히 이렇게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신은 재주가 없고 지식이 없어서 보통 학술(學術)의 길에도 일단면을 엿보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풍수 지리의 오묘한 것을 두루 찾아서 위로 산릉(山陵)의 중대한 일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신이 진달하고자 하는 바는 원래 술가(術家)의 논의가 아니고, 깊이 믿는 바는 바로 선현(先賢)의 말이므로, 혹시 근거가 없는 데로 돌아가지는 않겠기에, 스스로 참람하고 망령됨을 잊었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주 문공(朱文公)039) 이 영부릉(永阜陵)에 관해 의논한 상소에 수미(首尾) 2천여 마디의 말이 명백하고 간절하였습니다. 거기에 ‘수황 성제(壽皇聖帝)께서 승하하시니 온 천하가 슬퍼하고 사모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좋은 땅을 얻어서 장사지내어 후손에게 좋은 한 계책을 전해 주어서 영구히 다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장사라는 말은 간직한다는 뜻인데 자손으로서 선조의 유체(遺體)를 간직할 적에는 반드시 신중(愼重)과 성경(誠敬)의 마음을 다하여 편안하고 견고하여 오래 가게끔 함으로써 그 형체가 온전하고 신령이 편안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 자손이 번성하여 제사가 끊기지 않는데 이는 자연적인 이치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옛날 사람들은 장사지낼 적에 반드시 땅을 고른 다음 점을 쳐서 결정하였는데, 길하지 않을 경우 다시 골라 재차 점을 쳤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 점치는 법이 폐지되기는 하였으나 땅을 고르는 설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혹시 땅을 정밀하게 고르지 못하여 땅이 좋지 못할 경우 반드시 샘물이나 땅강아지나 개미나 땅바람 등이 그 안을 해치게 되어, 죽은 이의 형체와 정신을 불안하게 하고 자손들도 사망하여 후손이 끊어지는 근심이 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많이 파고 뚫은 곳에는 지기(地氣)가 이미 새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길지(吉地)라 하더라도 온전한 기운이 없고, 선조의 묘지 곁에 자주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놀라게 해도 재앙을 초래합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땅을 고를 때 반드시 그 주세(主勢)의 강하고 약함과 풍기(風氣)의 모이고 흩어짐과 수토(水土)의 얕고 깊음과 혈도(穴道)의 바르고 치우침과 역량(力量)의 온전하고 온전하지 않음을 논해야만 그 땅의 좋고 나쁨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영부릉에 관해 논한 상소의 요지와 격언으로서, 만세에 어버이를 장사지내는 자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신은 주 문공의 말에 대해 마음을 조용히 갖고 묵묵히 징험해 보니, 건릉(健陵)의 자리가 대단히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천만년의 계획이 될 수 없는 단서가 매우 많았습니다. 산기슭이 약하여 웅장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없으니 주세의 강약은 논할 것조차도 없고, 묘역이 높은 것은 오로지 보충해 쌓은 것이므로 질고 습하여 사철 내내 마르지 않으니 수토의 깊고 얕음은 논할 것조차도 없고, 가로로 떨어진 줄기가 도움이 없이 고단하게 내려가 오른쪽은 닿아서 높고 왼쪽은 기울어져서 푹 꺼졌으니 혈도의 바르고 치우침은 논할 것 조차도 없고,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가 갖추어지지 않고 안산(案山)이 참되지 않는가 하면, 독성(禿城)이 높이 솟아서 바위가 쫑긋쫑긋 서 있고 넓은 들판이 바로 연하고 큰 시내가 바로 흘러 달아나니 역량의 온전하고 온전하지 않는 것은 논할 것조차도 없으니, 능의 잔디가 항상 무너져 줄어드는 것과 습한 곳에서 벌레가 생기어 서식하는 것은 다만 미세한 근심입니다. 밖으로 나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안에 숨겨져 볼 수 없는 것은 또한 어떻게 반드시 평안하고 반드시 길하여 만에 하나라도 근심이 없으리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주 문공이 이른바 ‘정밀하게 고르지 못하여 땅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샘물이나 땅강아지나 개미나 땅바람 등이 있다.’는 것으로서, 오래도록 편안하고 견고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치가 아니니, 두렵고 근심스러워서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대개 능을 봉한 이후로 지금까지 사대부들이 잊지 못하는 숨은 근심으로 〈그 근심을〉 품지 아니한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풍수가(風水家)가 떠들어대는 말과 민간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는 더욱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서,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의 동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감히 앞서 대뜸 진달하지 못하였던 것은, 진실로 이 일이 지극히 공경하고 지극히 삼가야 하며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일이어서 잠깐 사이에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성상께서 독단적으로 그 즉시 거행하실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머금고 원통함을 품었으나 굳게 참고 입을 닫은 지 20여 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불행하게도 갑자기 큰 일은 당하였는데, 이때에 다시금 말하지 않을 경우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은밀히 방외(方外)에 술수에 통한 자의 말을 들어 보니, 본릉은 금년 연운(年運)과 맞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합장은 애초에 논할 바가 아닙니다. 비록 이와 같지 않더라도 위에서 진달한 것처럼 본릉의 자리가 좋지 않으니, 결코 다시 그럭저럭 넘기어 후손에게 편안함을 전하면서 영구히 다함이 없게 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이 또 명백히 진달할 것이 있는데, 바로 본릉의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한 까닭입니다. 세상에 모르는 사람은 혹시 이는 선대왕께서 정하신 땅이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유년040) 에 원침(園寢)041) 을 옮긴 뒤에도 성상께서 후일을 생각하여 원침에 참배하실 때마다 대뜸 산을 순행하셨는데, 예를 들면 향교의 옛터와 용주사(龍珠寺) 뒤의 산기슭이 그곳입니다. 향교 터는 성상께서 매양 촉박하고 좁아서 맞지 않는다고 한탄하셨고 용주사 뒤의 산기슭은 여러 논의가 모두 기울고 드러나서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걱정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경신년042) 봄 거둥하실 때에 비로소 지금의 자리를 살펴보셨는데, 이는 수원부(水原府)에 사는 어떤 풍수가가 말한 것으로서, 이른바 옛 군기고(軍器庫)의 터입니다. 그때 심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열 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분변할 수 없었고 나무가 우거지고 촘촘한 안에서 돌아다닐 수 없었으므로, 그루를 조금 베어낸 뒤에 겨우 발을 옮겨서 잠깐 살펴보셨습니다. 그 사람을 돌아보고 하교하시기를, ‘사방이 잘 보이게 하려면 많은 나무를 베어야 할 것이니, 우선 푯말을 세워 놓고 다시 살펴보자.’고 하셨는데, 신이 이날 모시고 일의 자초지종을 보았고 직접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뒤로부터 다시 왕림하지 못하시고 마침내 상설(象設)을 갑자기 설치하고 말았으니, 아! 슬픕니다. 만약 구애없이 다니고 앉을 수 있고 마음대로 바라보실 수 있었더라면, 항상 말씀과 행동을 신중히 하신 선왕께서 한두 번만 살피지 않고 반드시 해를 지내고 달을 지내면서 정중히 선택하였지, 어찌 두어 걸음의 땅에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결정하시었겠습니까? 그런데 승하하신 초기에 간사한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갑자기 유명(遺命)이라고 하면서 능 자리로 정하였던 것이니, 어찌 참으로 선왕께서 정하진 것이며 선왕의 유명이겠습니까? 이것이 특히 신이 매우 한스러워서 변명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설사 참으로 선왕의 유명이라고 하더라도 길지(吉地)가 아닐 경우 마땅히 계획을 바꾸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땅이 유감스러운 점이 많고 또 절대로 선왕의 뜻이 아닌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의논할 수 없단 말입니까? 아! 이곳에다 합장할 수 없다면, 새로이 좋은 자리를 고르기에 하루가 시급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는 대부분 ‘동릉(東陵) 국내(局內)에 아직 남은 자리가 있다.’고 하나, 10리의 주변에 일곱 능침이 서로 뒤섞여 있고, 또 주 문공이 ‘파서 뚫은 곳이 많으면 지기가 많이 새어 나가고, 선조의 묘역 곁에서 놀라게 하면 재앙을 초래한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밖의 푯말을 세워 놓은 땅에도 옛날 명사(名師)들이 잡아 놓은 곳이 많으니, 지금 만약 그 가운데서 정밀하게 고른다면 반드시 격(格)에 합치하는 편안하고 좋은 자리로 건릉보다 몇백 배나 나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이장할 곳을 정하고 합장하는 예를 행하여 우리 선대왕의 형체와 신령이 수풍(水風)·사력(沙礫)·충의(蟲蟻)의 근심을 영구히 받지 않고 우리 왕대비께서 합장의 소원을 이루게 한다면 일거에 둘 다 완벽할 것이니, 이보다 무엇이 더 아름답겠습니까? 좋은 경사가 자손에 미치고 복조가 길이 전하여 성스럽고 신령스런 자손이 번창하여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이니, 종묘에 만년 동안 제사지내는 계책이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조정에 내려서 대신과 경재로 하여금 같이 의논한 다음 살펴서 처리하게 하소서. 아! 신이 평일에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어찌 앞에 나서서 입을 놀리며 망령되게 국가의 대사를 논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는 세상에 드문 선왕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주 문공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생각하다 보니, 충정(衷情)이 격발하여 눈물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만약 신의 말이 오늘날 시행될 경우, 비록 내일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대행 대비께서 평소 이 일을 매우 근심하여 여러번 소자(小子)에게 하교하신 것이었다. 이제 경의 상소를 보니 더욱 목이 찢어지고 답답하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즉시 대신과 경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73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註 038]건릉(健陵) : 정조(正祖)의 능.
- [註 039]
주 문공(朱文公) : 문공은 송대(宋代)의 학자인 주희(朱喜)의 시호.- [註 040]
○領敦寧金祖淳疏略曰:
臣於日間, 伏承雲觀提擧之命, 將與宗伯敦匠之臣, 進詣健陵, 看審新陵禮祔便否, 是固禮典之不可已者。 然臣於健陵宅兆, 常有所憂懼菀結, 食息不敢忘者, 敢此冒萬死敷陳焉。 臣才薄識蔑, 尋常學術之蹊逕, 尙不能窺其一斑, 何敢傍採堪輿之玄微, 上論山陵之重大? 第臣之所欲陳者, 元非術家之論, 而所深信者, 卽是先賢之言, 則庶或不歸於無據, 而自忘其僭妄矣。 昔宋 朱文公, 議永阜陵狀, 首尾二千餘言, 明白懇切。 有曰: ‘壽皇聖帝, 厭世上賓, 率土哀慕。 宜得吉土, 以奉衣冠之藏, 垂裕後昆, 永永無極’, 又曰: ‘葬之爲言, 藏也, 以子孫而藏其祖考之遺體, 則必致其謹重誠敬之心, 以爲安固久遠之計, 使其形體全而神靈得安。 則其子孫盛而祭祀不絶, 此自然之理也。’ 又曰: ‘古人之葬, 必擇其地, 而卜筮以決之, 不吉則更擇而再卜焉。 近世以來, 卜筮之法雖廢, 而擇地之說猶存。’ 又曰: ‘其或擇之不精, 地之不吉, 則必有水泉螻蟻地風之屬, 以賊其內, 使其形神不安, 而子孫亦有死亡滅絶之憂, 甚可畏也。’ 又曰: ‘穿鑿已多之處, 地氣已洩, 雖有吉地, 亦無全力, 而祖瑩之側, 數興土功, 以致驚動, 亦能挻災。’ 又曰: ‘凡擇地者, 必論其主勢之强弱, 風氣之聚散, 水土之淺深, 穴道之偏正, 力量之全否, 然後〔可〕 以較其地之美惡。’ 凡此皆議狀之要旨格言, 而可以爲萬世葬親者龜鑑也。 臣竊嘗以文公之言, 潛心默驗, 則健陵宅兆之大(叚)〔段〕 憂悚, 不可以爲千萬年之圖者, 其端甚多。 岡麓殘慢而欠磅礴蜿蜒之意, 則主勢之强弱, 不足論矣, 塋域之高, 全藉補築, 沮洳之濕, 四時不乾, 則水土之淺深, 不足論矣, 橫落之支, 無補單行, 右逼而高, 左傾而陷, 則穴道之偏正, 不足論矣, 龍虎不備, 案對不眞, 禿城高擧而巖石巑岏, 廣野直連而大川徑走, 則力量之全否不足論矣, 若其封莎之常常崩縮, 濕生之蠕蠕棲息, 特其微細之患也。 凡其外著而易見者如此, 則其內之秘不可見者, 亦安敢信其必安必吉, 而無萬一之虞也哉? 由是言之, 此正文公所謂 ‘擇之不精, 地之不吉則必有水泉、螻蟻、地風之屬者’, 而非所謂安固久遠, 子孫盛而祭祀不絶之理也, 可不𢥠然而悚, 澟然而心寒哉? 此非獨臣一人之言也, 蓋自封陵以來, 至于今卿士大夫之耿耿隱憂, 無人不抱。 而若夫術者之洶洶, 閭巷之竊竊, 尤有所不勝道而不欲聞者。 此殆擧國同情之言也。 然而臣之不敢輒陳於前此者, 誠以玆事, 至敬至謹, 莫重莫大, 要非造次之所可仰請, 而亦非自上所可獨運而立擧者。 則茹痛齎冤, 隱忍囚舌, 將及兩紀。 今者不幸, 奄値大故, 此復不言, 更待何日? 況臣微聞方外通術之言, 本陵今年年運不合。 苟如其言, 祔禮初非可論。 雖不如此, 本陵宅兆之可憂, 如上所陳, 決不當復爲因循不思, 垂裕後昆, 永永無極之道也。 抑臣復有所明陳者, 卽本陵卜兆之故也。 世之不知者, 或疑是先大王所睿定之地。 然其實則不然。 己酉遷奉園寢之後, 聖慮尙存於他日, 每於拜園之日, 輒有巡山之行, 如鄕校之舊基, 龍珠寺後之麓是也。 而鄕校之基, 聖敎每以迫狹不稱爲歎, 寺後之麓諸論皆以傾露不可爲懼。 及至庚申春幸, 始審今兆, 卽府居一地師所告, 而所謂古軍器庫墟也。 其時植木如織, 尋丈之外, 莫辨有無, 叢密之內, 無以容旋, 略芟幾株然後, 僅移玉趾, 立而暫審。 顧敎其人曰: ‘欲豁四望, 將致多斫, 姑令樹標, 以俟更審。’ 臣於是日, 陪覩顚末, 躬聆玉音。 自此以後, 翠華不復臨, 而象設竟遽設矣, 嗚呼! 痛哉。 苟使行坐無礙, 眺望如意, 以先王庸言之愼, 庸行之謹, 不止於一審再審, 必將經年閱月, 鄭重取捨, 寧肯憑數武之地, 決立談之頃哉。 天崩之初, 奸人自專, 遽稱遺旨, 遂制玄隧, 豈眞先王之睿定, 先王之遺志也耶? 此尤臣所痛恨而欲辨者也。 設使眞是先王之遺旨, 苟非吉地, 固當改圖, 況地固多憾, 而又萬萬非先王之意乎? 何故而不可容議也? 噫! 祔禮旣不可擧於此, 則新卜吉兆, 一日爲急。 而議者多以爲 ‘東陵局內, 尙有餘穴。’ 然十里之週, 七寢相錯, 又文公所謂 ‘穿鑿已多, 地氣已洩, 祖塋之側, 驚動挻災者’, 則誠不可以輕議也。 況外此封標之地, 亦多古昔名師之所占, 今若精擇於其中, 必有合格安吉之兆, 十百勝於健陵者在矣。 於是焉卜灤水之遷, 而行魯祔之禮, 使我先大王形體神靈, 永絶水風、沙礫、蟲蟻之憂, 我太母克遂同穴之願, 則一擧兩全, 美孰加焉? 吉慶庥廕, 福祚長流, 聖子神孫, 克昌克蕃, 與泉壤無窮, 宗廟血食萬年之計, 將莫急於此矣。 伏乞下臣此章於廷, 令大臣卿宰, 雜議而審處之。 嗚呼! 臣以平日畏愼之心, 寧欲挺身鼓吻, 妄論國家大事? 而仰念先王不世之恩, 俯慕文公爲國之誠, 衷情所激, 涕淚無從。 苟使臣言, 得行於今日則, 雖明日而死, 死可瞑目矣。
批曰: "大行大妃, 平日以是大憂, 屢爲下敎於小子者也。 今見卿疏, 尤不勝摧咽悶悚。 卽令大臣卿宰, 詢議以奏。"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73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註 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