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유생 이학배 등이 채제공의 일을 상소하다
경상도 유생 이학배(李學培)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이 천리나 먼 길을 걸어서 정성을 다해 봉장(封章)하고 대궐문 밖에 엎드린지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마침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해서 받아들이라는 명이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만, 승정원에서 태학(太學)의 ‘근실’이 없다는 것으로 규례에 어긋난다 하여 마침내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대개 유생의 상소는 근실이 있어야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그 규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천 명 이상이 넘는 유생의 상소와 같은 경우는 ‘근실’의 유무에 구애받지 않았고 또한 받아들인 예도 많으니, 애석합니다. 만약 대신(臺臣)이 한마디만 이에 대하여 언급하였더라면 어떻게 그날 승정원에서 그같은 아룀이 있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저 열성조(列聖朝) 이래로 무릇 큰 형정(刑政)이나 큰 의리에 있어서 그것이 나라의 치란(治亂)에 관계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처음에 영남 선비들의 한마디 말이 없은 적이 없었고, 우리 선대왕(先大王) 때에 이르러서는 영남에 대하여 권주(眷注)087) 하심이 전후로 융성하고 진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경신년088) 이후로 높으신 교릉(喬陵)의 송백(松柏)이 한 아름이 되지 않았는데, 흉역(凶逆)이 뜻을 얻어 대의(大義)가 마침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홍희운(洪羲運)·이기경(李基慶)·강준흠(姜浚欽) 등 일종의 추악한 무리들이 기회를 타서 한풀이를 하기 위하여 여러 흉도들과 어울려서 서로 없는 죄를 마구 만들어 고 상신(相臣) 채제공(蔡濟恭)을 삭직(削職)함에 이르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아! 신들이 의지하는 바는 선왕의 의리이며, 신들이 삼가 받들어 신봉하는 바는 선왕의 하교입니다. 신들이 삼가 선대왕께서 친히 지으신 뇌문(誄文)을 보았던 바 거기에서 말씀하시기를, ‘뛰어나게도 혼자 맡아서 세 가지 의리를 한 몸에 견지하였다.[挺然獨任 義三秉一]’고 하였고, 어주(御註)로 설명하기를 제4, 5구절의 말은 신축년089) ·임인년090) 의 의리보다 엄격하고, 제6,7구절의 말은 무신년091) 의 의리보다 엄격하며, 제8,9구절은 모년(某年)092) 의 의리의 핵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채제공이 50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지킨 것은 후세에 길이 두고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계축년093) 의 한 편의 상소는 장차 죽음을 앞두고 작별을 고할 때 심장의 피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금등(金縢)094) 을 반하(頒下)하게 된 까닭을 말한 것으로, 연교(筵敎)에서 말하기를, ‘그 일을 홀로 알기 때문에 홀로 그 일을 말하였으니 충간 의담(忠肝義膽)이라고 말해도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영조(英祖)갑신년095) 에 휘령전(徽寧殿)에 친히 임어하시어 사관(史官)을 물리치고 어서(御書)인 금등을 채제공에게 명하여 정성 왕후(貞聖王后) 신위(神位)의 욕석(褥席) 밑에 보관하게 하였었는데, 선조(先朝)께서 등극하신 초 병신년096) 에 이르러 특별히 채제공을 입시토록 명하고 영고(寧考)097) 께서 당일에 유시하셨던 까닭을 채제공에게 분명히 하교하고 충신과 역적을 구분하신 성교(聖敎)가 간곡하였습니다. 또 무술년098) 에 채제공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다음 처음으로 조현(朝見)하는 반열에 들어갔을 때, 원례(院隷)099) 가 숙창궁 승언색(淑昌宮承言色)을 전호(傳呼)하는 것을 듣고는, 채제공이 여러 사람들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임금을 낳으신 빈궁(嬪宮)이 아니면 문안을 받지 못하는 것이 예절이다. 누가 이것을 규례로 정하였는가? 유독 하늘에 해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의리를 모른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송덕상(宋德相)의 흉악한 상소가 나왔을 때는 채제공이 한 번 보고 땅바닥에 내던지며, ‘이것에 무슨 소중히 여길 바가 있는가? 하고 이에 과감하게 ‘종묘 사직은 의탁할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선대왕께서 하교하기를, ‘더욱 경의 충직(忠直)함을 알겠다.’고 하였으니, 이런 것들은 모두 채제공의 수립(樹立)함이 우뚝하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선대왕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를 엄격히 받들어 확고하게 준수하는 일이겠습니까? 임인년100) 의 한 편의 상소에서는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대의(大義)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평소의 집념이 확고하여 스스로 맹분(孟賁)·하육(夏育)101) 같은 용사(勇士)라도 빼앗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 혹시라도 이 논의에 대하여 다른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신을 시켜서 칼로 찌르라고 하여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까지 하였으니, 이 또한 채제공의 신념이 의연하여 움직일 수 없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했기 때문에 임금과 마음이 서로 맞고 통하여 예우(禮遇)가 특별해서 무수한 공격을 받고도 온전히 보전하였고 구덩이에 빠뜨려도 건져주었던 것입니다. 어필(御筆)로 정승에 임명하여 10년 동안이나 맡겼으니, 소중하게 의지하심이 보통 사람보다 휠씬 뛰어났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미쳐서는 은혜로는 뇌문(誄文)을 내려 묘도(墓道)에 새겨서 세워 주고, 사고(私藁)를 구해 들이게 하여 친히 교정(校正)을 가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임금과 신하가 있은 이래로 있어 본 적이 없는 은수(恩數)입니다. 아! 저 이기경·강준흠의 무리는 유달(裕達)102) 의 여론(餘論)에 붙고 환관(煥觀)103) 의 음지(陰旨)를 받들어 마침내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사학(邪學)의 괴수로 지목하여 간교한 말로 문장을 꾸며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무릇 채제공이 홍희운·이기경·강준흠의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온 것은 단시일의 사유가 아니었습니다. 대개 채제공이 본래 평소에 사학(邪學)을 물리치기에 엄격하여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계품하기도 하여 사수(私讎)처럼 미워한 것은 영고(寧考)께서 인정하신 바이고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진작부터 이들 무리가 사학을 배척한다는 명분을 핑계대고서 속으로 협잡(挾雜)하려는 생각을 품고 끝내는 남의 집안과 나라를 해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물리치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가만히 미친개의 이빨을 갈고 물여우[沙弩]의 독을 품은 지 오래 되었으나 특히 신임이 두터운 임금과 신하의 사이를 이간할 수 없었고, 해와 달같이 밝으신 데에 도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왕(先王)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감히 한 번도 해치려는 꾀를 부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채제공이 죽자 시사(時事)가 한 번 변하게 되어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펴서 우리 선왕의 전헌(典憲)을 무너뜨리고 우리 선왕의 의리에 어긋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음휼(陰譎)한 이기경과 간사하고 악독한 강준흠·홍희운이 눈썹을 치켜 보고 팔을 걷어붙이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통쾌히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겉으로 거짓 영합하는 태도를 지으면서 속으로는 보복할 계교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덮어씌우려고 해도 덮어씌울 죄목이 없고 지목하려고 해도 지목할 만한 하자가 없으므로 마침내 지극히 추악한 죄목을 근거도 없이 억지로 덮어씌워서 죽은 뒤에 다시 죽음의 형벌을 당하였으니, 채제공의 저승에서의 원통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기경·강준흠 무리의 죄를 이루 낱낱이 들어 책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저들 이기경·강준흠이 한 짓은 꾀가 얕아서 쉽사리 알 수가 있었지만, 몰래 이를 조종하며 소굴에 깊숙이 숨어서 세도(世道)를 현혹시키고 선류(善類)를 해치는 자에 있어서는 따로 세전(世傳)하는 간당(奸黨)의 괴수가 있었으니, 곧 전 판서인 홍의호(洪義浩)가 그 자입니다. 아! 저 홍의호의 말씨나 얼굴빛이야 어찌 달콤하고 곱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견식이 있는 사람이 이를 살펴보면 그의 천 가지 만 가지 요악(妖惡)한 짓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겉으로만 보고 말한다면 채제공의 무함을 당한 것이 홍희운의 무리가 한 짓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논한다면 첫째도 홍의호요 둘째도 홍의호입니다. 대개 홍의호가 채제공을 원수로 보는 것은 그 내력이 있습니다. 그의 아비 홍수보(洪秀輔)가 일찍이 나쁜 마음을 품고 거짓을 꾸며서 기필코 채제공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어제(御製)의 뇌문에서 일찍이 다 말한 바로써, 지난번 영남의 모든 인사들이 통문(通文)을 돌려 절교(絶交)를 알리어 다시는 같은 무리에 끼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은 곧 공의(公義)가 다같이 그렇게 여겼던 것입니다. 아! 저 홍의호는 자기 아비의 죄악을 숨길 생각은 아니하고 뱀과 돼지 같은 자신의 성품을 더욱 제멋대로 하여 머리와 얼굴을 감추고 가만히 매와 사냥개 같은 부하를 부추겨서 계획은 자기가 계획하고 공격은 남을 시켜 공격하여 마침내 채제공으로 하여금 선왕께서 주신 작명(爵命)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근래에 국시(國是)가 차츰 안정되어 간사한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고는 모두를 홍희운·이기영·강준흠에게 돌리고 그 자는 곧 숨어 도망가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아! 종을 내놓아 사람을 죽여서 상명(償命)104) 의 율(律)을 논하여 시행한다면 시키는 대로 따라 한 종이 받아야겠습니까? 아니면 앉아서 시킨 주인이 받아야겠습니까? 어린아이를 꾀어 남을 욕하게 하는 나쁜 버릇을 가르쳤다면 어른에게 그 책임이 있겠습니까? 어린아이에게 책임이 있겠습니까? 저 홍희운·이기영·강준흠은 홍의호의 종이나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잠깐 천형(天刑)105) 을 면하였다고 해서 진실로 세변(世變)에 관계될 것은 없겠지마는, 홍의호는 대대로 경반(卿班)에 올라서 솜씨가 조금 반드러워 남의 이목을 속이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뭇 간사한 자들이 의지하는 바가 되어 스스로 두목 노릇을 한 자입니다. 그 자가 또한 제법 교활한데, 어찌 채제공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 내는 것이 공의에 죄를 얻는 것인 줄을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칠 줄 모르는 까닭은 다름이 아닙니다. 채제공은 곧 의리의 주인이었으니,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는 것은 일의 형편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리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채제공을 원수로 여기고 채제공을 공격하는 것은 곧 의리를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의리를 공격한다면 의리에 대한 죄인인데, 어찌 신들의 당연히 성토하여야 할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홍찬모(洪燦謨)의 일에 대하여 논하건대 여러 사람이 입으로 떠든 것에는 근저와 와굴의 귀착됨이 있으니, 그 자가 장차 벗어나려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 자에 대하여 가깝게 나왔으면 진실로 당연히 전례를 인용(引用)하여 의리에 대처(對處)하여야 할 것인데도, 팔을 휘두르며 옥사(獄事)를 다스려 며칠 안에 죽게 하여 말을 못하도록 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은 오직 정실(情實)이 탄로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니, 그의 마음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비록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살펴보아도 그 본래부터의 심술이 간교하고 참혹하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저지른 죄가 저처럼 지극히 무겁고 정상과 태도가 저처럼 드러났는데도, 아직까지 편안히 부귀를 누리면서 높은 자리에서 후한 녹을 타는 벼슬아치에게 여우처럼 알랑거리고 개처럼 구차하게 굴고 있으니, 그가 성조(聖朝)에 수치를 끼친 것이 진실로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은 홍의호에 대하여 본래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가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채제공을 위하여 의리를 신구하려는 상소에서 홍의호를 논급한 것은 다만 채제공을 신구하는 것이 곧 의리를 신구하는 것이고, 홍의호를 성토하는 것이 곧 채제공을 신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앞의 상소가 받아들여지기도 전에 홍의호의 대장(對章)이 벌써 올라갔습니다. 신들이 비록 그 원본은 보지 못했지만 승선(承宣)의 상소를 살펴보면 그의 자기 변명이 아주 장황하다고 할 뿐만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가 힘써 공의(公議)에 대항하여 임금을 속인 실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방자하고 거리낌없음이 어찌 이렇게 극심한 데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 신들이 맺힌 한을 품고 고통을 십으며 무릇 이렇게 18년 동안 죽기 전에 잠시라도 선왕의 의리가 다시 천명되고 선왕의 형정(刑政)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보려고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조용하여 채제공을 위하여 한 마디 말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세의 충신과 지사(志士)들은 모두 탄식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니, 선대왕의 지극히 정미한 의리가 혹시 거의 이 우주 사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없어지게 되겠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대의(大義)에 정일(精一)하시어 미세한 경중의 차이에도 자세히 살피시고 선왕의 형정을 따르시어 소장(消長)의 기미(幾微)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하셔서, 심환지(沈煥之)나 김관주(金觀柱) 같은 흉역에 대해서는 이미 징토(懲討)하는 형전(刑典)을 엄격히 하였고 권유(權裕)나 김달순(金達淳) 같은 역적에 대해서는 공평한 형벌로써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채제공에 대해서만 아직까지 그 광대 광명(廣大光明)한 법을 미루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채제공 한 사람의 억울함이야 별로 애석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선조(先朝)의 대의(大義)가 차츰 어두워지는 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선조의 은혜로운 비답 중에 ‘오직 나의 본뜻이 더욱 어두워지고 숨겨질까 그것이 두렵다.’고 간절히 경계하신 것은 바로 신들이 오늘날 말씀드리게 됨을 위한 것입니다. 외람되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진실로 죄가 되겠습니다만, 이 말은 온 영남 지방의 일치된 의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시어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셔서 속히 채제공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명하여 정당한 공의를 따르시고, 이어서 홍의호·이기경·강준흠 등이 선인(善人)과 정인(正人)을 해친 죄를 다스리어 잘못된 형정(刑政)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죄인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일에 대해서는 형정(刑政)이 본래 조정에 있으니, 너희들이 번거롭게 할 일이 아니다. 중신(重臣)에 대한 일은 아! 참으로 심하구나. 너희들이 어찌 이처럼 괴격(乖激)한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3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87]권주(眷注) : 은총을 베풂.
- [註 088]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註 08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90]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09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092]
모년(某年) : 임오년의 화변(禍變)을 말함.- [註 093]
계축년 : 1793 정조 17년.- [註 094]
금등(金縢)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篇名)·무왕(武王)이 앓을 때에 주공(周公)이 조상인 삼왕(三王) 즉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에게 기도하여, 자신으로 무왕의 목숨을 대신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그 축책(祝冊)을 금등의 궤속에 넣어 둔 것이었음.- [註 095]
갑신년 : 1764 영조 40년.- [註 096]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註 097]
영고(寧考) : 영조를 가리킴.- [註 098]
무술년 : 1778 정조 2년.- [註 099]
원례(院隷) : 승정원에 소속된 노비.- [註 100]
임인년 : 1782 정조 6년.- [註 101]
맹분(孟賁)·하육(夏育) : 맹분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衛)나라의 용사(勇士)이고 하육은 주(周)나라의 용사(勇士)였음.- [註 102]
유달(裕達) : 권유(權裕)와 김달순(金達淳).- [註 103]
○慶尙道儒生李學培等疏略曰:
臣等千里裹足, 瀝血封章, 進伏閶闔, 已涉旬日。 際因臺臣之疏, 至降捧入之命, 而喉院以無太學謹悉, 謂違規例, 竟至沮格。 蓋儒疏之有謹悉許捧, 其例誠然。 而若其儒疏之過千以上, 不拘謹悉之有無, 亦多其例, 惜乎。 倘使臺臣, 一言及此, 則豈至有喉院伊日之啓乎? 粤自列聖朝以來, 凡有大刑政大義理, 有可以關國家之治亂者, 未始無嶺儒之一言, 逮我先大王所以眷注於嶺南者, 前後隆摯。 夫何庚申以後, 喬陵之松柏未拱, 而凶逆肆志, 大義遂晦。 於是乎洪羲運、李基慶、姜浚欽輩一種怪鬼, 乘機逞憾, 綢繆群凶, 互相構捏, 至於追削故相臣蔡濟恭而極矣。 噫! 臣等之所藉手者, 先王之義也。 臣等之所奉信者, 先王之敎也。 臣等竊伏覩我先大王, 親製誄文, 若曰, ‘挺然獨任, 義三秉一,’ 御註若曰, ‘第四五句言, 嚴於辛壬義理, 第六七句言, 嚴於戊申義理, 第八九句言, 某年義理頭腦。’ 嗚呼! 濟恭五十年立朝所秉之固, 可謂永有辭於後世。 而且其癸丑一疏, 乃是將死告歸時, 一腔血瀉出來者也。 此實金縢頒下之所以然, 而筵敎若曰, ‘獨知其事, 故獨言其事, 謂之忠肝義膽可也。’ 蓋英廟甲申, 親臨徽寧殿, 屛史官, 以御書金縢, 命濟恭藏于貞聖王后神位褥席下, 逮至先朝丙申御極之初, 特命濟恭入侍, 以寧考所以諭示於當日者, 明敎於濟恭, 剖分忠逆, 聖敎丁寧。 又於戊戌, 濟恭奉使而還也。 始入候班, 聞院隷傳呼淑昌宮承言色, 濟恭於衆中, 瞠然大聲曰, ‘非誕聖嬪宮, 不得問安, 禮也。 誰爲此定例也? 獨不知天無二日之義乎?’ 及夫德相凶疏之出也, 濟恭一見擲地曰, ‘此有何所重’? 乃敢曰 ‘宗社靡托乎?’ 其後先大王敎曰, ‘益知卿忠直,’ 此皆濟恭樹立之所卓然不撓者也。 而況於先大王至精至微之義, 奉承之嚴, 遵守之確? 壬寅一疏, 至曰臣雖無似, 至於大義所關, 平日秉執, 國自以爲賁ㆍ育莫奪。 爲今日臣子者, 如或萌心此論, 雖使臣手刃, 亦當不辭云云, 此亦濟恭秉執之所毅然不移者也。 是以, 契合昭融, 禮遇曠絶, 叢鏑而全保之, 坑坎而拯援之。 御筆拜相, 十年委任, 倚毗之重, 逈出尋常。 及其身歿之後, 錫以恩誄, 刻立墓道, 徵入私藁, 親加校正, 此誠有君臣以來所未有之恩數也。 噫! 彼基、浚之徒, 附裕、達之餘論, 承煥、觀之陰旨, 乃以千萬不近理邪魁之目, 文致奸言, 勒成罪案, 夫濟恭之積被仇忤於羲運、基、浚之徒者, 非一朝一夕之故也。 蓋濟恭平日, 嚴於闢邪, 以疏以啓, 如疾私讎者, 寧考之所詡, 擧世之所知也。 然而蚤知此輩, 假托斥邪, 陰懷挾雜, 畢竟禍人家國而後乃已, 故麾而屛之, 不少假借, 此輩之猘牙潛磨, 沙弩久含, 而特以風雲之契, 不可以間也。 日月之明, 不可以逃也。 終先王之世, 不敢售其一螫之計矣。 及濟恭之身後, 時事一變, 權奸鴟張, 毁劃我先王典憲, 背馳我先王義理。 於是陰譎之基慶, 憸毒之浚ㆍ羲揚眉扼腕, 謂此機可秉, 謂此讎可快, 外假迎合之態, 內售報復之計。 而欲加而無可加之罪, 欲指而無可指之瑕, 則乃以至醜之目, 勒加於無形之地, 至被身後之一律。 濟恭泉壤之冤, 已無可言, 而基、浚輩之罪, 可勝數哉。 噫! 彼基、浚之所爲, 謀淺而易知, 而若其陰運機關, 窩窟深閟, 眩惑世道, 戕害善類者, 自有世傳之奸魁, 卽前判書洪義浩是已。 噫! 義浩之其言其色, 豈不甘且艶矣? 而識者觀之, 其千妖萬惡, 不忍正視。 以言其外面, 則濟恭之被誣, 雖若羲運輩之所爲, 而若論其裏許, 則一則義浩, 二則義浩。 蓋義浩之讎視濟恭, 自有所受, 其父秀輔, 早蓄奸肚, 興訛造誣, 必欲殺濟恭而後已, 此固御誄中所嘗洞悉, 而向來全嶺人士之輪通告絶, 不許更齒於儕流者, 卽公議之所同然也。 噫! 彼義浩, 不思所以蓋父之惡, 而益逞其蛇豖之性, 藏頭匿面, 陰嗾鷹犬, 排布自我排布, 搏擊從他搏擊, 竟使濟恭, 不保先王寵錫之爵命。 邇來國是稍定, 姦狀始露, 則斂氣囁口, 都歸之羲運、基、浚, 而渠乃逃躱之不暇。 噫! 縱奴殺人, 論施償命之律, 則奉行之奴當之乎? 坐使之主當之乎? 誘兒辱人, 馴成悖倫之習, 則責在長者乎? 責在小兒乎? 彼羲運、基、浚, 不過義浩之奴耳。 小兒耳。 其得暫逭天刑, 固不足關係世變, 而義浩則世躋卿班, 手勢稍滑, 欺人耳目, 無所不爲, 以所爲群壬之依歸, 而自作窩主者也。 渠亦稍黠, 豈不知構誣濟恭之爲得罪公議, 而猶不知止者, 此無他, 濟恭, 卽義理主人也。 盜憎主人, 勢所必至, 然則讎義理也。 故讎濟恭, 攻濟恭, 卽攻義理也。 攻義理, 則豈非義理之罪人, 而臣等之所當聲討者哉? 且以洪燦謨事論之, 萬口譁然, 根窩有歸, 渠將掉脫之不得。 況在渠近出, 則固當援例處義, 而攘臂按獄, 不日致斃, 汲汲滅口, 惟恐情實之或露者, 其意果何居? 雖以此一事觀之, 其自來心術之巧憯, 可推而知也。 負犯如彼其至重, 情態如彼其莫掩, 而尙自安享富貴, 狐媚狗苟於崇班膴仕者, 其爲貽羞於聖朝, 固如何哉? 臣等於義浩, 未嘗有好惡之私。 而今於爲濟恭伸義理之章, 論及於義浩者, 特以伸濟恭, 卽伸義理。 而討義浩, 卽伸濟恭也。 臣等之前疏未徹, 義浩之對章遽投。 臣等雖未見其原本, 而觀於承宣之疏, 以爲其所自卞, 不啻張皇云爾, 則可知其力抗公議, 欺誣天聽, 其放恣無忌, 胡至此極? 嗚呼! 臣等抱菀茹痛, 凡玆十有八年之間, 無日不思少須〔臾〕 無死, 得見先王之義理復闡, 先王之刑政復明。 而寥寥一世, 未見有爲濟恭一言者。 當世之忠臣志士, 擧已歔欷然掩抑流涕, 而先大王至精至微之義理, 或幾乎泯然, 將熄於宇宙間矣。 竊覵殿下, 精一乎先大王之大義, 而審察於錙銖之重輕, 率由乎先王之刑政, 而兢念於消長之幾微, 凶如煥、觀而已, 嚴其懲討之典, 逆如裕、達而不貸以關石之誅。 而獨於濟恭, 尙靳其廣大光明之典, 何也? 一濟恭之抱冤, 固不足惜, 而其於先朝大義之寖晦, 何哉? 且先朝恩批中, 惟予本意之愈晦愈隱, 是懼是恐之丁寧告戒, 正爲臣等今日道者。 猥瀆, 誠罪也。 而其言則全嶺大同之論也。 伏願殿下, 以先王之心爲心, 斷自宸衷, 亟命復蔡濟恭官爵, 以循公議之正, 仍治義浩、基慶、浚欽輩戕善害正之罪, 以正刑政之失。
批曰: "追奪罪人事, 刑政自在, 朝家非爾等所可煩也。 重臣事, 噫其甚矣, 爾等何若是乖激也?"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3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