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순조실록 17권, 순조 14년 6월 20일 기묘 2번째기사 1814년 청 가경(嘉慶) 19년

병조에서 비변사의 초기에 의해 관서의 군공자에 대해 아뢰다

병조에서 비변사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관서의 군공(軍功)에서 빠진 자 59인, 상이 공로에 맞지 않은 자 13인, 경영(京營)의 장사 7인을 등급을 구분하여 별단을 써서 들였는데, 이르기를,

"공로는 같으면서 빠진 자로는, 평양 천총(千摠)인 출신(出身)046) 장대명(張大明)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을 따랐다.】 , 장사 군관(壯士軍官)인 출신 윤인활(尹仁活) 【순영 중군(巡營中軍) 이정회(李鼎會)를 따랐다.】 , 별무사인 전 참봉 조사범(趙師範) 【적변이 발생한 초기에 징병하였고 시종 공로를 세웠다.】 , 안북(安北)의 장사 군관인 출신 이의승(李宜承)·장치영(張致榮) 【이상은 각 진장(陣將)을 따랐다.】 , 숙천(肅川)의 행군 집사(行軍執事)인 출신 김태홍(金泰弘) 【 전 영장(營將) 이유수(李儒秀)를 따랐다.】 용강(龍岡)의 파총(把摠)인 출신 이학려(李學麗) 【 후영장(後營將) 윤욱렬(尹郁烈)을 따랐다. 이상은 부진(赴陣)한 지 넉 달 동안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평양의 기고관(旗鼓官)인 출신 김용섭(金用燮), 안북의 수성 도감관(守城都監官)인 출신 함인갑(咸仁甲) 【 이상은 적변이 일어났을 때 병졸을 모아 성을 지켜서 시종 공로를 세웠다.】 , 의주의 기사 별장(騎士別將)인 출신 문국필(文國弼), 구응장(救應將)인 출신 강응제(姜膺濟), 책응장(策應將)인 출신 백해윤(白海潤), 좌선봉장(左先鋒將)인 출신 박붕(朴鵬) 【 이상은 의병장 김견신(金見臣)을 따라 싸움에 나가서 여러 달 동안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평양 파총인 한량 박천서(朴天瑞)·김성려(金成麗) 【 이상은 순영 중군 이정회(李鼎會)를 따랐다.】 , 장사 군관인 한량 한익주(韓翼周) 【 박천 군수 이운식(李運植)을 따랐다.】 , 안북의 장사 군관인 한량 박처홍(朴處弘)·이희엽(李禧燁)·김천명(金天明)·김후덕(金厚德), 당보 초관(塘報哨官)인 한량 김귀령(金龜齡), 거촉 도감관(炬燭都監官)인 한량 박성일(朴成逸), 약환 감관(藥丸監官)인 한량 배화봉(裵化鳳) 【 이상은 적변이 일어났을 때 각 진장(陣將)을 따랐다.】 , 순천(順川)의 초관(哨官)인 한량 김우평(金右平)·박태직(朴台稷)·최형려(崔亨呂), 행군 집사 김노석(金魯錫) 【 이상은 우영장(右營將) 오치수(吳致壽)를 따랐다.】 , 숙천의 행군 집사인 한량 강택겸(康宅謙) 【 전 영장(營將) 이유수(李儒秀)를 따랐다.】 , 가산 파총인 한량 장명오(張命五), 별무사인 한량 장추영(張樞英) 【 이상은 가산 군수 정주성(鄭周誠)을 따라 싸움터에 나가서 넉 달 동안 많은 공로를 세웠다.】 , 평양의 관성 집사(管城執事)인 한량 조정운(趙鼎運), 부중군(府中軍)인 한량 홍윤호(洪潤祜), 안북의 집사(執事)인 한량 골윤묵(骨潤默) 【 이상은 적변이 일어났을 때 병졸을 모아서 성을 지켜 공을 세웠다.】 , 의주 영장(領將)인 한량 김문도(金文道)·김우성(金遇聖)·김중규(金重奎)·김명곤(金明坤) 【 이상은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을 따랐다.】 , 선봉장인 한량 정민화(鄭敏化), 구응장(救應將)인 한량 김시문(金時文) 【 이상은 의병장 김견신을 따랐다.】 , 참모인 한량 장시열(張時說) 【창의장(倡義將) 장낙현(張洛賢)을 따랐다.】 , 성천(成川)의 초관인 한량 오덕신(吳德臣), 【군사를 거느리고 전 영장 이유수에게 달려갔다.】 , 삭주(朔州)의 영장(領將)인 한량 임정신(林正愼) 【 전 부사(府使) 윤민동(尹敏東)을 따랐다. 이상은 여러달 동안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자산(慈山)의 기패관(旗牌官)인 한량 이정백(李正白) 【 본읍(本邑)의 관아가 비었을 때 적변의 소식을 듣고 병졸을 모아 거느리고 병영에 합류하여 세운 공이 많았다.】 , 영변(寧邊)의 집사인 한량 박치엽(朴致熀) 【 적변이 일어났을 때 닥치는 대로 적의 무리를 체포하고, 뒤이어 병졸을 거느리고 대진(大陣)으로 달려가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인데, 이상에 대해서는 상가(賞加)하고, 산성 도령장(山城都領將)인 전 오위 장(五衛將) 가선(嘉善) 장윤조(張胤祚) 【 적변이 일어났을 때 민병(民兵)을 모집하여 백마산성(白馬山城)에 들어가 지키면서, 아들을 장낙현(張洛賢)진에 보내어 적을 쳐서 공을 세워, 앞서 이미 체가(帖加)하였다.】 에게는 가자를 시행하며, 자산의 중군인 가선 김재유(金載裕) 【본읍의 관아가 비었을 때 적변의 소식을 듣고 병졸을 모아 거느리고 병영으로 달려가서 많은 공을 세웠다.】 , 안북의 행수 집사(行首執事)인 전 첨지 김계장(金啓璋) 【적변이 일어났을 때 병졸을 모아 성을 지켜 시종 공을 세웠다.】 , 토포 군관(討捕軍官)인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인억(金麟億) 【적변이 일어나자 각 진장을 따라 부진(赴陣)하여 넉 달 동안 많은 공을 세웠다.】 , 초산(楚山)의 행군 집사인 절충 장군 김관택(金觀澤) 【영병장(領兵將) 김치화(金致華)와 함께 출진하여 여러달 동안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삭주(朔州)의 집사인 절충 장군 한필의(韓弼誼) 【부사 윤민동(尹敏東)을 따라 싸움에 나가서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곽산(郭山)의 통정 대부 이덕신(李德信) 【정주(定州)와 곽산의 경계를 지키면서 도망가는 적들을 체포하였다.】 , 평양의 행군 집사인 절충 전응련(全應璉) 【적변이 나자 병졸을 모아 성을 지켜서 시종 공을 세웠다.】 인데, 이상에 대해서는 실직(實職)에 조용(調用)하고, 의주의 종사(從事)인 진사(進士) 최상륜(崔相綸) 【영병장 허항(許沆)을 따라 싸움에 나가서 여러달 동안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은 본도 전랑(本道殿郞)에 차하(差下)하며, 평양의 책응 감관(策應監官)인 유학 김이운(金履雲), 안북의 군수 감관(軍需監官)인 유학 염처백(廉處白) 【적변이 일어나자 병졸을 모아 시종 공을 세웠다.】 , 선천(宣川)의 참모인 유학 장문익(張文翊) 【영병장 허항을 따라 싸움에 나가서 여러 달 동안 적을 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철산(鐵山)의 소모관(召募官)인 유학 정현박(鄭顯璞) 【적변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내려와서 동지들을 불러모아 박대관(朴大觀)의 진영에 달려가서 많은 공을 세웠다.】 , 태천(泰川)의 향인 김형철(金亨喆) 【영변(寧邊)의 최정보(崔廷珤)와 함께 변대익(邊大益)을 염탐하여 체포하였는데, 세운 공이 최정보와 차이가 없었다.】 , 삭주의 수성장인 좌수(座首) 주정심(朱正心) 【당해 부사가 출진한 뒤, 넉 달 동안 성을 지키며 세운 공이 매우 많았다.】 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본도에서 각별히 수용하도록 한다. 상전(賞典)에서 누락된 자로는, 훈련 도감 지구관(地殼官)인 이동한(李東翰), 【순무영의 집사로서 일 때문에 대진에 내려갔다가 그대로 행군 집사에 차하되어 크고 작은 군무를 전담하여 거행하였으며, 적괴(賊魁) 등의 수급(首級)과 홍총각(洪總角) 등의 4적(賊)을 압령(押領)하여 바치는 등 공로가 매우 많았다.】 , 별무사인 출신 강계무(姜繼武) 【치중 차지(輜重次知)로서 내려가서 여섯 달 동안 공로가 매우 많았다.】 , 훈국(訓局) 출신인 황유청(黃有淸) 【영변의 소모 군관으로 자원하여 부진(赴陣)해서 곧 입암 방수장(笠岩防守將)에 차하되어 시종 여섯 달 동안 공로가 매우 많았다.】 , 금위영 교련관인 부사과 김광룡(金光龍) 【치중 차지로서 행군할 때에 크고 작은 기계(器械)와 많은 군수 물자를 힘을 다하여 책응(策應)하여 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 별무사인 부사과 허귤(許橘) 【중군이 내려갈 때에 모시고 가서 진중에 도착하여 차지 군량(次知軍粮) 겸 중초 차관(重哨差官)으로 누차 출전하여 세운 공로가 매우 많았다.】 이며, 상이 공로에 맞지 않는 자로는, 안북의 좌영장(左領將)인 전 오위 장 가선 대부 최진일(崔鎭一), 우영장인 전 오위 장 가선 대부 김경엽(金景燁) 【이상은 적변이 일어나자 병졸을 모아 성을 지켰으며, 송림(松林)의 전투에서 죽기로 맹세하고 싸워 마침내 크게 이겼으나, 단지 가자만 받았다.】 인데, 이상에 대해서는 상당직(相當職)에 조용하며, 복병장인 절충 장군 이인협(李仁協) 【장사 군관으로 참획(斬獲)이 많았으며, 북성(北城)의 굴토(掘土) 때에는 밤낮 작업을 감독하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았으나 가자를 받는데 그쳤다.】 , 의주의 방어장(防禦將)인 절충 장군 김계황(金啓滉) 【김견신을 따라서 적의 세작(細作)을 붙잡았고, 서림성(西林城)을 공파(功破)하여 사로잡음이 많았으며, 거련(車輦)까지 가서 또 적도를 사로잡고, 성을 치다가 탄환에 맞았으나, 다만 상가(賞加)에 그쳤다.】 , 좌영장인 절충 장군 김형척(金亨倜) 【허항을 따라 용천(龍川)에 이르러 적 7급(級)을 베었으며, 일지병(一枝兵)을 이끌고 먼저 동림(東林)에 도착하여 문을 열어 관군을 받아들이고, 연달아 정원진(定原陣)에 이르러 시종 공을 세웠으나, 다만 가자에 그쳤다.】 , 기사인 절충 장군 임술조(林述祚) 【묵최(墨縗)를 입은 몸으로 허항을 따라 용천을 습격할 때 장사 군관을 거느리고 성중에 숨어 들어가 성문을 열어 본진(本陣)을 맞아들였으며, 동림을 칠 때는 일지병을 거느리고 먼저 성문을 깨뜨렸으며, 잇달아 정원진(定原陣)에 달려가 시종 공을 세웠으나, 단지 가자에 그쳤다.】 , 철산의 소모장인 박대관(朴大觀) 【동지를 불러 모으고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여 밤낮 눈비를 맞으며 의분을 발휘하여 적을 공격해서 선천·철산 지방의 인심이 순역(順逆)을 분별하게 된 것은 그의 힘에 힘입은 바 많았으나, 단지 가자에 그쳤다.】 , 영변의 중군인 절충 장군 홍치백(洪致伯)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며 내응하는 적을 체포한 것은 실로 전장에 나가 적을 사로잡은 것에 못지 않는데 단지 가자에 그쳤다.】 인데, 이들은 오위 장에 조용하며, 안북의 장사 군관인 절충 장군 김이해(金履海) 박종묵(朴宗默) 【이상은 모두 선봉으로 이제초(李齊初)를 산채로 잡을 때 김계묵(金啓默)과 힘을 합쳐서 세운 공이 가장 많았으나 다만 가자만 받았다.】 , 의주의 구응장(救應將)인 문응규(文應奎) 【총수(銃手) 30명을 모집하여 수성(守城)을 도왔다. 김견신(金見臣)과 함께 양책(良策)의 적을 격파하여 달아나게 하고, 서림(西林)으로 진공하여 적 4명을 사로잡았으며, 또한 거련(車輦)에 도달하여 적을 잡았으나, 다만 가자(加資)를 입었을 뿐이다.】 , 우선봉(右先鋒)인 절충 장군 엄재광(嚴再光) 【묵최(墨縗)를 입은 몸으로 종군하여 김견신과 함께 양책의 적을 공파하고, 다시 서림과 거련에서도 사로잡은 것이 많았으며, 굴토(掘土)할 때 세운 공이 많았으나 다만 가자만 받았다.】 , 귀성(龜城)의 중군인 가선 대부 조영(趙映)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는데, 적도(賊徒)들이 와서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어 꾀이며 위협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손수 격문(檄文)을 전달하는 적을 쏘아 죽였다. 성지(城池)가 확보된 것이 그의 힘에 힘입은 바 많으나, 다만 가자(加資)만 받았다. 그런데 앞서 이미 체가와 상가를 시행했었다.】 인데, 이상은 상당한 실직(實職)에 조용하며, 금위영의 교련관인 절충 장군 구시방(具始芳) 【영변의 소모군관으로 3초군(哨軍)을 거느리고 대진(大陣)에 달려가서 싸움마다 나갔으며, 또 유격장(遊擊將)이 되어 적도가 의주진(義州陣)을 엄살(掩殺)할 때 달려가서 북쪽으로 쫓아버렸고, 적이 대진(大陣)을 겁박(劫迫)할 때 적병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은 사로잡았으며, 적을 깨뜨릴 때 14명을 베었고, 정주(定州)의 인신(印信)을 찾아서 대진에 바치는 등 공로가 가장 많으나 가자를 받는데 그쳤다.】 은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중초군(中哨軍) 박완상(朴完相) 【중군을 따라 내려가서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고 용전 분투하다가 탄환 두 개를 맞아 팔이 관통하고 갈비뼈가 부러져서 거의 죽다가 겨우 살아났으나 다만 미포(米布)만 주었다.】 은 본영에서 수용토록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 [註 046]
    출신(出身) : 문·무과(文武科) 또는 잡과(雜科)에 급제하고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사람.

○兵曹因備邊司草記, 以關西軍功見漏者五十九人, 賞不稱勞者十三人, 京營將士七人分等別單書入。 別單 "勞同見漏人平壤千摠出身張大明, 【隨嘉山郡守鄭周誠,】 壯士軍官出身尹仁活, 【隨巡營中軍李鼎會。】 別武士前參奉趙師範 【賊變初徵兵終始効勞。】 安北壯士軍官出身李宜承張致榮 【以上隨各陣將。】 肅川行軍執事出身金泰弘, 【隨前營將李儒秀。】 龍岡把摠出身李學麗, 【隨後營將尹郁烈以上赴陣四朔討賊, 多有効榮。】 平壤旗鼓官出身金用爕, 安北守城都監官出身咸仁甲, 【以上賊變初, 徵兵守城, 終始効勞。】 義州騎士別將出身文國弼, 救應將出身姜膺濟, 策應將出身白海潤, 左先鋒將出身朴鵬, 【以上隨義兵將金見臣, 赴陣屢朔討賊、多有効勞。】 平壤把摠閉良朴天瑞金成麗, 【以上隨巡營中軍李鼎會。】 壯士軍官閑良韓翼周, 【隨博川郡守李運植。】 安北壯士軍官閑良朴處弘李禧燁金天明金厚德, 塘報哨官閑良金龜齡, 炬燭都監官閑良朴成逸, 藥丸監官閑良裵化鳳, 【以上賊變初, 隨各陣將。】 順川哨官閑良金右平朴台稷崔亨呂, 行軍執事金魯錫, 【以上隨右營將吳致壽。】 肅川行軍執事閑良康宅謙, 【隨前營將李儒秀。】 嘉山把摠閑良張命五, 別武士閑良張樞英, 【以上隨嘉山郡守鄭周誠, 赴陣四朔, 多有効勞。】 平壤管城執事閑良趙鼎運, 府中軍閑良洪潤祜, 安北執事閑良骨潤默, 【以上賊變初, 徵兵守城, 終始効勞。】 義州領將閑良金文道金遇聖金重奎金明坤, 【以上隨領兵將許沆。】 先鋒將閑良鄭敏化, 救應將閑良金時文, 【以上隨義兵將金見臣。】 參謀閑良張時說, 【隨倡義將張洛賢。】 成川哨官閑良吳德臣, 【領兵赴前營將李儒秀。】 朔州領將閑良林正愼, 【隨前府使尹敏東, 以上屢朔討賊, 多有効勞。】 慈山旗牌官閑良李正白, 【本邑空官時, 聞賊變, 聚兵領付兵營, 多有効勞。】 寧邊執事閑良朴致熀, 【賊變時隨捕賊徒, 仍領兵赴大陣, 多有効勞。】 以上賞加, 山城都領將前五衛將嘉善張胤祚, 【賊變初, 倡募民兵, 入守白馬山城遺子于張洛賢陣, 討賊効勞, 前已帖加。】 加資施行慈山中軍嘉善金載裕, 【本邑空官時, 聞賊變, 聚兵領赴兵營, 多有効勞。】 安北行首執事前僉知金啓璋, 【賊變初, 徵兵守城, 終始効勞。】 討捕軍官折衝金麟億, 【賊變初, 隨各陣將, 赴陣四朔, 多有効勞。】 楚山行軍執事折衝金觀澤, 【與領兵將金致華, 出陣屢朔討賊, 多有効勞。】 朔州執事折衝韓弼誼, 【隨府使尹敏東赴陣, 屢朔討賊, 多有効勞。】 郭山通政李德信, 【防守定ㆍ郭之界, 捕捉、逃逸之賊。】 平壤行軍執事折衝全應璉, 【賊變初, 徵兵守城, 終始效勞。】 以上實職調用。 義州從事進士崔相綸, 【隨領兵將許沆赴陣, 屢朔討賊, 多有效勞。】 本道殿郞差下, 平壤策應監官幼學金履雲, 安北軍需監官幼學廉處白, 【賊變初, 徵兵終始交勞。】 宣川參謀幼學張文翊, 【隨領兵將許沆赴陣, 屢朔討賊多有效勞。】 鐵山召募幼學鄭顯璞, 【賊變初,自京下來, 召募同志, 赴朴大龜陣, 多有効勞。】 泰川鄕人金亨喆, 【與寧邊 崔廷珤詷捕大益而効勞, 與延珤無異。】 朔州守城將座首朱正心, 【該府使出陣後, 四朔守城, 効勞甚多。】 以上令本道, 各別收用, 見漏賞典人。 訓鍊都監知〔彀〕李東翰, 【以巡撫營執事、因事下往大陣, 仍差行軍執事大小軍務, 專當擧行、賊魁等首級, 總角等四賊押領來納, 勤勞頗多。】 別武士出身姜繼武, 【以輜重次知、下往六朔, 勤勞頗多。】 局出身黃有淸, 【以寧邊召募軍官, 自願赴陣, 仍差笠巖防守將、首尾六朔, 勤勞頗多。】 禁衛營敎鍊官副司果金光龍, 【以輜重次知, 行軍之際, 大小器械, 許多軍需, 殫竭策應, 多有効勞。】 別武士副司果許橘, 【中軍下往時, 陪往到陣、次知軍糧兼爲中哨差官、屢次出戰, 効勞頗多。】 賞不稱勞人, 安北左領將前五衛將嘉善崔鎭一, 右領將前五衛將嘉善金景燁, 【以上賊變初, 聚兵守城, 松林之戰, 誓死自願, 竟獲大捷而只蒙加資。】 以上相當職調用, 伏兵將折衝李寅協, 【以壯士軍官, 斬獲旣多、北城掘土時、晝夜董役, 額上中矢, 而只蒙加資。】 義州防禦將折衝金啓滉, 【隨金見臣捉得賊細作、攻破西林城, 擒獲頗多, 轉到車輦、又擒賊徒, 攻城中丸、而只蒙賞加。】 左領將折衝金亨倜, 【隨許沆至龍川, 斬賊七級、率一枝兵, 先到東林, 開門迎納官軍、仍到定原陣, 終始効勞、而只蒙加資。】 騎士折衝林述祚, 【墨纕隨許沆襲擊龍川時、領壯軍潛入城中, 開門迎納本陣、攻東林時, 領一技兵先破城門、仍赴定原陣, 終始効勞、而只蒙加資。】 鐵山召募將朴大觀, 【倡募同志, 自備糗糧, 晝夜暴露, 奮義敵愾、宣ㆍ鐵間人心之能辨順逆者、多賴其力、而只蒙加資。】 寧邊中軍折衝洪致伯, 【徵兵守城、捕內應賊, 實不下於赴陣擒獲、而只蒙加資。】 以上五衛將調用。 安北壯士軍官折衝金履海朴宗默, 【以上俱以先鋒, 齊初生擒時, 與金啓默同力, 其効勞最多, 而只蒙加資。】 義州救應將文應奎, 【募得銃手三十名, 以助守城, 與金見臣破走良策賊, 進攻西林生擒賊四口, 又到車輦擒賊, 而只蒙加資。】 右先鋒折衝嚴再光, 【墨縗從軍, 與金見臣, 攻破良策賊, 又於西林車輦多有擒獲, 掘土時効勞亦多, 而只蒙加資。】 龜城中軍嘉善趙暎, 【聚兵守城, 賊徒來屯, 送人誘脅, 而終始不聽, 手射傳檄之賊。 城池獲保多賴其力, 而只蒙加資, 而前已帖加賞加施行。】 以上相當實職調用。 禁衛營敎鍊官折衝具始芳, 【以寧邊召募軍官, 率三哨軍, 赴大陣每戰必赴, 又爲游擊將賊徒掩殺義州陣時, 往赴逐北賊, 刼大陣時, 斬一賊擒一賊, 破賊時, 斬賊十四, 得定州印信, 納于大陣, 勞績最多, 而只蒙加資。】 邊將除授, 中哨軍朴完相, 【隨中軍下往, 不避矢石, 奮躍薄戰中格雙丸, 貫臂碎脅, 幾死僅生, 而只給米布。】 令本營收用。"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6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