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찬 등이 왕세자의 교육과 5개 진의 혁파의 여부를 아뢰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이미 상견례를 행하고 서연을 열어 강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열조(列朝)의 고사를 상고하여 보니, 세자가 비록 어리더라도 매일 삼강(三講)을 열고, 또 소대와 야대가 있으며, 그 외에 직숙하는 궁료를 일정한 시각도 없이 접견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개 안에 들어가 있으면 저절로 보모(保姆)·근신(近臣)들과 마구 섞여 친근히 지내게 되어 조신(朝臣)들과 상접할 기회가 전연 없기 때문에 반드시 자주 강연을 열고 별도로 소견을 내리기도 하는 것은, 이것이 비단 강학 한 가지일 뿐만 아닙니다. 현명한 사대부들로 견문을 익히게 하고 지사(知思)를 유도하게 해서 여기에 일정한 범위를 두어 덕(德)으로 교화하여 도와 성취시키도록 하는 지극한 뜻이었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일찍이 깨우치려는 뜻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어제 삼가 보건대 ‘이 뒤의 서연은 하교를 기다려서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가만히 생각하기를, 날마다 삼강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1일 1강을 상례로 하고, 강연 이외에 별도로 입직(入直)하는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궁료들을 불러서 두세 번 접견하여 옆에서 항상 친해지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묵(翰墨)의 공부에 대해서도 아침저녁에 나지 않아서 일상 생활이 ‘문예(文藝)에 노닌다.[游於藝]’는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한다면 옛 성인이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법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옛날 성왕이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실천을 통하여 가르쳤습니다. 지금 원량(元良)041) 을 도와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책임은 오직 전하의 실천을 통한 가르침[身敎]에 달려 있으니, 그 가르침이란 정령(政令)에 대한 시행이나 조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의 모든 언어와 행동이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한 가지 생각이라도 혹시 정당함을 잃는다면 가르침이 아니요, 한 가지 일이라도 혹시 예절에 어긋난다면 가르침이 아닙니다. 심지어 기거(起居)와 출입(出入), 희로(喜怒)와 호오(好惡)의 경우에 있어서도 예절에 맞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으면 가르침이 되지 못합니다. 먼저 성궁(聖躬)으로부터 반드시 신중히 하여 동작이 법칙(法則)에 맞아서 우리 세자를 가르치게 된다면 진실로 국가의 억만년의 근본이 될 것이니, 더욱 유념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아뢴 바는 응당 깊이 유념하겠다.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 사리에 꼭 맞아 매우 좋다. 내일부터 시작하여 서연에 대한 취품(取稟)을 날마다 들이도록 하라. 그리고 서연 이외에 자주 궁료를 인접(引接)하는 일에 대해서도 궁료들은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접때 삼수부(三水府)의 서쪽 5개 진(鎭)의 혁파(革罷) 여부와 관련하여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자세히 알아서 계문하도록 하였었습니다. 이제 올라온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의 장계를 보니, 말하기를, ‘후주(厚州)를 복설(復設)한 뒤로 자작(自作)·어면(魚面)·강구(江口)·신방(神方)·묘파(廟坡) 등 5개 진이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삼수의 고질적인 폐단만 되므로 마땅히 혁파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5개 진을 혁파한다면 별해진(別害鎭)을 홀로 보전할 수가 없으므로 장진(長津)을 별해진으로 옮긴다면 설치하는 경비도 별로 들지 않을 것입니다. 봉역(封域)에 대해서는 당연히 산천으로 한계를 삼되, 북청의 파산사(坡山社)는 갑산에 소속시키고, 갑산의 별해사는 삼수에 소속시키고, 삼수의 강구·신방·묘파·별해 및 함흥의 병풍파(屛風坡)는 모두 장진에 소속시킨다면 경계가 정해져서 인민들이 저절로 모여들 것입니다.’ 하였고, 남병사(南兵使) 유상량(柳相亮)은 말하기를, ‘6개 진을 혁파하는 것과 장진읍을 옮기는 논의는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진을 혁파한 이후 늠료(廩料)042) 는 동쪽의 5진에 첨획(添劃)하고 군기 집물(軍器什物)은 본부에 이속하며 환곡은 그전대로 사창을 지어 파수(把守)하는 등의 절차에 있어서는 모두 주진관(主鎭管)에서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후주는 비록 읍을 설치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대진(大鎭)이 되었으니, 이른바 서쪽의 6진은 곧 후주의 내지(內地)이므로 관방(關防)에 있어서는 과연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삼수를 지보(支保)할 수 없는 것은 곧 서쪽 6진 때문입니다. 이해득실이 아주 분명하지만 일이 관방에 관계되니, 연혁(沿革)에 대해서는 여러 장신(將臣)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다. 훈련 대장 이득제(李得濟)와 금위 대장 이요헌(李堯憲)·총융사 김기후(金基厚)는 모두 철파(撤罷)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김재찬이 말하기를,
"자작·강구·어면·신방·묘파의 5진은 모두 철파하되, 별해진은 이미 네 고을의 요충이고 또 삼수의 울타리이므로 5진과 함께 철파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독진(獨鎭)으로 남겨 두어 전처럼 삼수에 속하게 할 일입니다. 그리고 장진읍을 옮기는 일은 한꺼번에 하기가 곤란할 듯하니, 풍년이 들어 백성들의 마음이 펴일 때를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다시 논의하더라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경계를 옮겨 정하는 일은 제도를 고치는 일에 크게 관계되니,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소서. 5진을 혁파한 뒤, 늠료·군기·환곡은 수신(帥臣)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관서의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 세 가지의 1천 1백 냥 영(零)을 전부 탕감하고, 내수사(內需司)의 용강 둔세(龍岡屯稅) 8백 냥 영은 절반을 탕감하기를 계청(啓請)하니, 대개 도신이 장계로 진주(陳奏)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관서의 금년 봉진마(封進馬)에 대해서도 견정(蠲停)을 윤허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6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구휼(救恤)
○壬寅/次對。 領議政金載瓚啓言: "王世子旣行相見禮, 書筵初開, 講學伊始, 謹稽列朝故事, 世子雖在沖年, 輒日開三講, 又有召對夜對, 又令在直宮僚, 不時晉接。 此蓋入而在內, 自當與阿保近習, 雜處昵居, 而朝臣相接, 絶無其時, 故必頻開講筵, 別賜召見, 此非但爲講學一事而已。 欲令與賢士大夫, 習熟見聞, 誘導知思, 範圍於是, 薰陶於是, 以爲輔助成就之至意也, 列聖朝早諭之意, 有如是矣。 昨伏見此後書筵待下敎之命, 臣之區區迷見, 竊以爲雖不必逐日三講, 一日一講, 則率以爲常, 講筵之外, 別召入直春桂坊, 或再接三接, 日親於左右。 雖至翰墨之工, 不離於昕夕, 日用云爲, 無違於游於藝之義。 則古聖人蒙養之方, 恐不外於是矣。 且伏念古者聖王之敎子也, 必以身爲敎。 今日輔導元良之責, 惟在殿下之身敎, 其所以敎之者, 非政令施措之謂也。 凡殿下之動靜語默, 無非敎也。 一念而或失其正則非敎也, 一事而或違於禮則非敎也。 至於起居出入喜怒好惡之際, 不得中節, 一有過不及之差, 則非敎也。 先自聖躬, 必愼必重, 動中儀則, 用以敎迪我世子, 則允爲宗國億萬年之本, 益加留神焉。" 敎: "以所陳當體念矣。 大臣所奏切當, 甚好。 明日爲始, 書筵取稟, 逐日入之, 書筵外宮僚頻爲引接之意, 宮僚知悉。" 又啓言: "頃因三水府西五鎭革罷便否, 令道帥臣, 詳審以聞矣。 卽見咸鏡監司金履陽狀啓, 則以爲 ‘厚州復設之後, 自作、魚面、江口、神方、廟坡等五鎭, 地在內服, 徒爲三水之痼弊, 斷當革罷。 而若罷五鎭, 則別害一鎭, 無以獨全, 移長津於別害, 則其所設始, 不煩經費。 至於封域, 當以山川爲限, 北靑坡山社, 屬於甲山, 甲山別害社, 屬於三水, 三水之江口、神方ㆍ廟坡、別害及咸興之屛風坡, 幷屬於長津, 則壃界各定, 人民自集爲辭。’ 南兵使柳相亮以爲 ‘六鎭革罷, 長津移邑之論, 別無異同。 至於罷鎭後廩料, 添劃於東五鎭, 軍器什物, 移屬本府, 還穀仍作社倉, 把守等節, 幷自主鎭管擧行爲宜云矣。’ 蓋厚州, 雖未設邑, 旣成大鎭, 則所謂西六鎭, 卽厚州之內地, 在關防, 果無所據。 況今三水之將不得支保, 卽西六鎭之故也。 利害得失, 較然明甚, 而事係關防, 沿革請下詢諸將臣處之。" 訓將李得濟, 禁將李堯憲, 摠使金基厚, 皆以撤罷爲宜。 載瓚言: "自作、江口、魚面、神方、廟坡五鎭, 竝爲撤罷, 別害旣據四邑之要衝, 且爲三水之屛翰, 不可與五鎭竝罷。 姑爲留作獨鎭, 依前屬之三水。 而長津移邑, 有難同時竝擧, 稍待年豐民紓, 從後更議, 恐爲未晩。 境界移劃, 太涉更張, 今姑置之, 五鎭旣罷後, 廩料軍器還穀, 依帥臣議施行, 恐宜。" 從之。 又啓請關西魚鹽船三稅一千一百兩零全蕩, (內需寺)〔內需司〕 龍岡屯稅八百兩零, 折半蕩減, 蓋以道啓陳奏也。 仍請關西今年封進馬, 亦許蠲停, 從之。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46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