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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 6월 9일 경술 1번째기사 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비국에서 출정한 사람의 공죄를 가려 아뢰고 종사관·장관 등의 별단을 올리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순무사(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은 6개월 동안 영(營)을 설치하고 천리를 지휘하면서 계책을 적중하게 세웠으므로, 수고한 공이 매우 컸으니, 특별히 정2품의 자급(資級)을 더해 주고 그 공로에 보답해야 합니다. 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柳孝源)은 왕명을 받고 출정(出征)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고루 겪으면서 임금의 위광(威光)이 미치는 바에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개선(凱旋)했으니, 가자(加資)해야 합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은 앉아서 경내의 적을 진압하여 혼자서 성을 온전하게 보존했으며, 길을 나누어 간 군사에게 지시하여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빨리 소탕했으니, 새서 표리(璽書表裏)의 은전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영변(寧邊)의 전전(前前) 부사 오연상(吳淵常)은 가까운 주변에 숨어 있던 흉적을 적발하여 김우학(金遇鶴)·남익현(南益顯)을 모두 죽이고, 경외(境外)로 새어나가는 적을 붙잡아 귀성(龜城)·태천(泰川)을 다시 온전하게 회복하였으니, 새서 표리의 은전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鍾永)은 적로(賊路)에 당해서 군민(軍民)을 아울러 관장하여 징발하고 안정시키기를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빈 성을 지키면서 아울러 영읍(營邑)을 총람(總攬)하였는데, 준조 절충(樽俎折衝)144) 이 다 합당하여 안주(安州)의 위기가 다시 안정됨은 사실 온전한 공로가 있으니, 가자해야 합니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안주에서 징병(徵兵)하던 초기에는 열군(列郡)에서 응하여 달리 온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숙천의 친병(親兵)만이 유독 먼저 이르러 군세가 점차 떨쳐지고 성수(城守)가 비로소 공고하게 되었습니다. 급할 때 처하여 단속함이 이러하니, 평일의 전제(專制)함을 알 수가 있으며, 하물며 또 진에 나온 이후에 군·민을 다스림에 각기 그 방도를 다하였으니, 현직(現職)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조용(調用)해야 합니다.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영식(李永植)송림(松林)의 싸움에서 공과(功過)가 반반씩이나 가산(嘉山)·박천(博川)의 위급한 상황이 한 번 진군(進軍)하여 안정되었고, 곽산(郭山)의 승리에서 성세(聲勢)가 처음으로 떨치게 되어 선천(宣川)·철산(鐵山)의 넋을 잃은 적의 세 소굴을 모조리 소탕하였으니, 전도(全道)를 수복(收復)하게 된 것은 실로 이 싸움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윤욱렬·오치수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이영식은 전에 이미 시상하였으니 그냥 두소서. 순영(巡營)의 중군(中軍) 이정회(李鼎會)는 싸움에 나온 것이 비록 송림(松林) 싸움보다 늦었지만 전공을 이미 곽산(郭山)보다 빨리 아뢰었으니, 본직으로 변지(邊地)의 이력(履歷)을 허락하여 써야 합니다. 삭주 부사(朔州府使) 윤민동(尹敏東)은 한 성이 가운데 들고 팔진(八陣)이 밖을 둘러싸서, 오직 삭주의 나누어 받은 곳이 적로(賊路)의 가장 요지를 맡고 있었는데도 이웃 성채(城寨)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일찍이 응하지 않음이 없었고, 궁지에 몰린 도적이 혹 도망가면 일찍이 잡지 않음이 없었는데, 진퇴와 주선함이 아주 조리가 있었으니, 본직으로써 방어사 이력(履歷)에 쓰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운산 군수(雲山郡守) 한상묵(韓象默)은 기미를 살피고 적을 정탐하여 영변에서 내응하는 변고를 구하였으며, 군사를 다스려 승산을 마련하여 본읍이 스스로 지킬 방도를 마련했으니, 준직(準職)에 조용해야 합니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권수(權琇)용골성(龍骨城)을 지키면서 군사는 흩어지고 적이 추격해 오자, 팔뚝에 자자(刺字)하고 군중(軍衆)에게 맹세하며 인수(印綬)를 품고 사잇길로 가서 의주(義州)의 대진(大陣)에 구원해 주기를 청했으나 수신(帥臣)이 계파(啓罷)한 것은 과연 잘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위험에 임해서 팔뚝에 자자한 것은 아주 가상하니, 현직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자리를 기다렸다가 즉시 조용하게 해야 합니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유상필(柳相弼)은 군량을 때에 맞춰 운반하여 군식(軍食)이 부족하지 않게 하였으니, 승서(陞敍)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귀성 부사(龜城府使) 조은석(趙恩錫)과 병우후(兵虞候) 이익(李榏)은 혹 외로운 성을 보전하다가 위태로움에 임해서 응변(應變)하기도 하고, 혹은 좌우의 대진(大陣)에서 일에 따라 성의를 다하였으니, 모두 궁전(弓箭)·통개(筒箇)145) 의 상을 시행해야 합니다.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주성(鄭周誠), 박천 군수(博川郡守) 이운식(李運植), 정주(定州)의 전전 목사 서춘보(徐春輔), 정주의 전 목사 임재수(林栽洙)는 비록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공적은 없으나 모두 공수(攻守)한 노고가 있으니, 궁전(弓箭)을 사급하는 은전을 모두 시행해야 합니다. 무릇 정주성 안에 있는 적을 비록 마땅히 남김없이 진멸(殄滅)하여야 하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를 다스리지 않음은 성왕(聖王)의 대덕(大德)이며 항복한 자를 죽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지극한 경계입니다. 더군다나 전후의 윤음(綸音)에서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다칠까 염려하여 반드시 임석(袵席)에서 굽어 보호하실 생각을 하셨으니, 덕의(德意)가 미친 곳은 봄날처럼 따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이 함락되던 날 투항한 군졸 2천 명을 모두 처참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구중(九重)에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는 것이겠습니까? 역시 불량(不良)한 무리를 교화시키는 뜻도 아니니, 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은 마땅히 삭직(削職)하여 공과 죄가 서로 가리워지지 않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허항(許沆)이 전사하던 날에 함종(咸從)미국(尾局)146) 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니 이는 바로 같은 진(陣)이었고, 순천(順川)은 가장 가까운 이웃 성벽(城壁)이어서 기고(旗鼓)가 서로 바라다 보며 위급할 때에 함께 해야 하는데, 그가 몸을 솟구쳐 홀로 달려가 죽을 때까지 발꿈치를 돌리지 않는 것을 보고도, 각자 군사를 머물러 두고 출동시키지 않으며 서로 구할 생각이 없어 전군(全軍)이 다함께 죽도록 맡겨 두었습니다. 지금 죄를 조사하는 때를 당해서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함종 부사 윤욱렬과 순천 군수 오치수를 청컨대 절도사로 하여금 영(營)으로 잡아와서 엄중히 곤장을 쳐서 징려(懲勵)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순무영의 장관 이하 및 경외(京外)의 장사(將士)로 진에 달려가 성을 지키며 공을 세운 사람은 방금 등급을 나누어 논공 행상하기 위해 별단(別單)을 만들어서 아뢰었는데, 출정(出征)한 제군(諸軍)은 5개월 동안 한데서 자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마침내는 승첩을 아뢰었습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공적은 없으나 별도로 노고에 보답하여 윗사람과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은 정성에 보답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경영(京營)의 군병(軍兵)은 각 해당 영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서 넉넉하게 시상하여야 합니다. 송도 및 관서의 향군(鄕軍) 가운데서 앞장서 적을 죽여 공로가 조금이라도 드러난 무리는 해당 부와 해당 도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제급(題給)하게 하고, 이에 10년을 한정하여 그들의 신역(身役)을 견감하게 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비록 두루 상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신역을 견감하는 은전을 7년을 한정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각처 의병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척적(尺籍)147) 을 전(傳)함도 없었는데, 징발하는 영을 기다리지 않고서 의리를 사모하고 충성을 권면해 즐거운 곳으로 달려가듯 한 것은 더욱 별도의 큰 상을 주어 장려함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김견신(金見臣)허항(許沆)이 거느린 무리가 제일 먼저 창의(倡義)하였고 공훈을 가장 많이 세웠습니다. 송지렴(宋之廉)이 모집한 날랜 포수(砲手)는 오랫동안 대진(大陣)에 있으면서 성세(聲勢)를 많이 도와 전후에 적을 죽인 것이 제일 많았습니다. 이 두 진영의 사졸은 한결같이 본도로 하여금 쌀과 포(布)를 넉넉하게 제급(題給)하게 하고 이에 따라서 부역을 견감하는 은전을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 뒤늦게 달려 온 의병은 그 공로의 많고 적은 데 따라서 각 고을의 전진(戰陣)에 나간 군졸과 함께 일체로 시상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사인(士人)과 향족(鄕族)으로 소문을 듣고 의리를 향하여 서로 이끌고 무기를 들고 나선 자는 특별히 본도로 하여금 규례에 벗어나게 논공 행상해야 합니다. 의주·영변·안주·구성 네 고을에서 성첩(城堞)을 지킨 군졸은 그들이 세운 공로가 진에 나아가 싸운 자들과 다름이 없으니 모두 3년을 한정해서 부역을 견감하고, 교졸(校卒) 가운데서 공로가 더욱 현저한 무리들도 역시 쌀과 포를 제급해야 합니다. 전사한 여러 병졸에게는 이미 넉넉한 휼전(恤典)을 시행하였고, 또 자손이 있으면 그 나이와 거주지(居住地)를 책자로 만들어 올려 보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도신의 장계 가운데, ‘아들 하나의 신역(身役)을 영원히 탈면(頉免)해 주고 10년 동안 연역(煙役)을 특별히 견감하며 받아간 신·구 환곡을 탕감하소서.’ 한 청은 실로 마땅하니, 이에 의거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비록 병사한 무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똑같으니, 생전의 신역과 환곡을 같은 예로 탕감 해야 합니다. 이밖에 소모(召募)하고, 방수(防守)하여 각양으로 공로를 세우고, 적변(賊變)이 일어나던 초기에 위험한 지역에 드나들며 왕래하면서 정탐(偵探)한 자는 모두 본도로 하여금 경중을 가려서 두루 보답하는 상을 주고 수용(收用)하기에 합당한 자도 역시 규례에 벗어나게 특별히 시상하여 누락됨을 당해 울분을 품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합니다. 쌀과 포를 제급한 자는 모두 책자를 만들어 계문하게 해서 회감(會減)하고, 출정한 제군의 시예(試藝)와 논공 행상은 이미 무신년148) 의 예가 있으니, 경영(京營)은 중순(中旬)149) 의 예에 의하고 송도 및 관서는 도시(都試)의 예에 의해서 각기 활 잘쏘는 것을 시험하여 그 입격(入格)한 화살 숫자를 별단에 써서 아뢰게 하여 논공 행상하여 위로하는 바탕을 삼아야 합니다. 이제 이 상전(賞典)이 비록 넉넉하고 후한 데 따른 것 같지만 본도의 전수(戰守)한 공적은 단지 책자의 현주(顯註)에 의거한 것이니, 그것이 낱낱이 다 정당하게 되었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누락되어 시상하지 않거나 상이 공로에 맞지 않은 등류가 있으면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다시 실적(實績)을 조사하여 이치를 들어 계문하게 하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의 종사관(從事官)·장관(將官)·장교(將校)·원역(員役) 별단(別單).

종사관 부사과(副司果) 서능보(徐能輔)는 가자하고, 김계온(金啓溫)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므로 겸중군(兼中軍)으로 승서하고, 전 병사 김익빈(金益彬)에게는 궁전(弓箭)과 통개(筒箇)를 사급(賜給)한다. 비장(裨將) 전 부사 이유수(李惟秀), 전 첨사 서유건(徐有建), 전 부사 이의수(李義秀),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 윤우현(尹禹鉉),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안광정(安光貞), 부정(副正) 이근식(李近植), 기사장(騎士將) 전 부사 박종화(朴宗和), 파총(把摠) 김식(金植)에게는 모두 아마첩(兒馬帖)150) 을 사급하고, 교련관(敎鍊官) 가선 대부(嘉善大夫) 전 첨사 김창인(金昌仁)에게는 상가(賞加)한다. 전 만호(萬戶) 여현장(呂鉉長), 가선 대부 김복순(金復淳), 전 만호 조신배(趙信培), 한량(閑良) 변득운(邊得運)·이흥국(李興國)·박재묵(朴在默), 전 만호 고광빈(高光彬), 전 권관(權管) 김상희(金商禧), 전 만호 방경유(方景孺), 사과(司果) 박태휘(朴泰輝), 한량 신재문(申在文)에게는 모두 불장궁(不粧弓) 한 장씩을 사급한다. 별무사(別武士) 절충 장군(折衝將軍) 맹상련(孟尙鍊), 과거 출신 박중검(朴重儉), 한량 차근행(車謹行)·강도완(姜道完)·양긍일(梁兢佾)·전명주(全命周), 과거 출신 김상현(金商鉉), 가선 대부 전 첨사 김효일(金孝逸), 별장(別將) 반해강(潘海康)에게는 모두 각 해당 영(營)으로 하여금 수용(收用)하게 한다. 서리(書吏) 이유선(李惟善)에게는 체가(帖加)하고, 정경신(鄭暻信) 등 8인과 문서직(文書直) 4명에게는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포를 후하게 제급(題給)하게 한다.

서울에서 출정한 장관·장교·원역의 별단.

좌사 파총(左司把摠) 윤지겸(尹之謙), 마병 초관(馬兵硝官) 이기정(李基鼎), 좌초관(左哨官) 방우정(方禹鼎)에게는 【모두가 영군 장관(領軍將官)으로서 5개월 동안 한 데 자면서 이미 근로(勤勞)가 많은 데다가 대진(大陣)이 겁략을 당할 때에는 온 힘을 다해 방어하여 조치가 합당하였었다.】 모두 가자(加資)하고 중초관(中哨官) 손태영(孫泰永)에게는 【별도로 진에 가서 처음부터 힘써 성문을 쌓고 흙을 파서 정성을 다하여 역사를 감독했으며 성을 함락시킨 때도 또한 성벽에 먼저 올라갔다.】 가자하여 우후(虞候)에 제수하고, 군관인 전 부사(府使) 조운구(趙雲衢)·유문검(柳文儉)은 상당한 직으로 조용하고, 무겸(武兼) 이존경(李存敬), 훈련 주부(訓鍊主簿) 김현필(金鉉弼)은 모두 현직보다 조금 나은 자리에 승서한다. 가선 대부 유진명(柳鎭明)은 상으로 가자하고, 전 낭청(郞廳) 조문규(趙文逵), 한량 조익풍(趙益豊), 별군관(別軍官) 가선 홍문적(洪汶績), 정충 장군 오성철(吳聖哲)·김석규(金錫圭), 한량 유운덕(劉運德)은 모두 각기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각자의 원(願)에 따라 수용하게 한다. 과거 출신 유형원(兪逈源) 【동로(東路)의 복병장(伏兵將)으로 적을 격파할 때에 군사를 이끌고 성(城)에 들어가 자못 참획(斬獲)함이 있었다.】 가자한다. 송영(松營)의 기사 백총(騎士百摠) 박징희(朴徵禧) 【송영군(松營軍)의 도령(都領)으로 부진(赴陣)하였다.】 상으로 가자한다. 집사(執事) 가선(嘉善) 사의관(史誼觀) 【행군 집사(行軍執事)로서 거행(擧行)하여 대진(大陣)이 겁략 당할 때 적 3급(級)을 베었다.】 사과(司果) 조경린(趙景麟), 【행군 집사로 거행하였다.】 유흥기(劉興基)에게 【탄환(彈丸)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장중령(張重齡)【출전할 때에 세운 공이 많았고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앞장을 서서 성을 공격하였는데, 능철(菱鐵)151) 에 발을 다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변장(邊將)으로 제수하고, 이동은(李東殷)은 상으로 가자한다. 김광룡(金光龍)·이동환(李東煥)에게 모두 각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한다. 송영(松營)의 기사(騎士) 출신 백유회(白有繪) 【김이대(金履大)를 사로잡았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으로 제수하고, 집사(執事) 최정복(崔貞復)·윤성동(尹星東)에게 모두 본부로 하여금 원에 따라 수용하게 한다. 별무사(別武士) 가선 대부 정의진(鄭義鎭) 【대진(大陣)이 겁략 당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고, 5개월 동안 갑옷을 벗지 않고 경포수(京砲手)를 거느리고 날마다 시석이 쏟아지는 가운데를 출몰하여 적도(賊徒)들이 보기만 하면 문득 위축되었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으로 제수한다. 과거 출신 이문주(李文柱)· 【전령 차비(傳令差備)로 거행하여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1급을 목 베었다.】 매경은(梅景殷)·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2급을 베었다.】 박효건(朴孝建)· 【전령 차비로 거행하여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다.】 김우적(金禹績)· 【전령 차비로서 공을 세운 것이 가장 많았다.】 한여시(韓黎矢) 【시마초 차지(柴馬草次知)로 거행하면서 겸하여 군량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강계무(姜繼武)·김창건(金昌健)·허귤(許橘)은 아울러 해당 영(營)으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별견 장교(別遣將校) 김명숙(金命淑) 【행영 집사(行營執事)로 거행하였다.】 상으로 가자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한다. 전 만호(萬戶) 김계택(金啓宅) 【적정(賊情)을 탐지하기 위해 내려가 공성(攻城) 제구(諸具)의 역사를 보살폈다.】 상으로 가자하고, 가의 대부 김재명(金在明) 【공성 제구(攻城諸具)의 역사를 보살폈다.】 체가(帖加)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한다. 전 만호 김인환(金仁煥) 【화기(火器)를 운반하고, 성문을 쌓고 흙을 파내서, 화약을 묻어 불을 붙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보살펴 공이 가장 드러났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을 제수하고, 남한 산성 집사 이정량(李廷良) 【화기를 운반하고 목책(木柵)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다가 적의 창을 맞아 죽었다.】 아들은 상복(喪服)을 벗기를 기다려 본영의 집사로 즉시 차출한다. 별부료(別付料) 김전(金篆) 【북도(北道) 사람으로 자원해 내려가 공로를 많이 세웠으며 스스로 소 세 마리를 마련해 잡아 호군(犒軍)하였다.】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최만리(崔萬里)·안의득(安義得)·김진원(金鎭元)·전학초(全學初)·오정린(吳禎麟)·오중권(吳仲權) 【이상은 대진(大陣)이 겁략 당할 때 합력하여 적 두 명을 사로 잡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김용손(金龍孫) 【별견장(別遣將)으로 가산(嘉山) 진중(陣中)에 머물러 있었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소모(召募)하여 진에 온 사람 사과(司果) 구시방(具時芳) 【전함(前啣) 장교로 병영에 내려가 삼초(三哨)의 군사를 얻어 유격장(游擊將)이 되어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1명을 사로 잡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황하윤(黃河潤)·황유청(黃有淸) 【대진이 겁략 당할 때 협력하여 적 3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각영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한다. 가선 대부 정유(鄭鍒) 【평양(平壤)의 별군관(別軍官)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에 달려 나갔다.】 상으로 가자하고, 금군(禁軍) 길의척(吉義倜) 【성채(城寨)가 겁략 당할 때 정탐하는 적을 사로잡았다.】 상당한 실직(實職)에 임용하고, 한량 김종헌(金宗憲) 【함종진(咸從陣)이 겁략 당할 때 전사하였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가급(加給)하게 한다. 약방(藥房) 이규환(李圭桓), 마의(馬醫) 민흥대(閔興大)는 모두 각영으로 하여금 원에 따라서 수용하게 하고, 서리(書吏) 김상희(金尙禧)는 체가하고, 송유항(宋有恒)은 해당 부서에서 요미를 후하게 주고 승차(陞差)한다. 황혁(黃)은 해당 영에서 요미를 후하게 주고 승차하며, 약방 서원(藥房書員) 박문환(朴文煥) 등 3명은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게 하고, 훈국(訓局)의 별파진(別破陣) 양조일(梁祖一) 【흙을 파낼 때 공이 많이 있었다.】 체가하고, 남한 산성의 별파진 박인흡(朴仁洽)·강세후(姜世厚) 【이상은 흙을 파낼 때 많은 공이 있었다.】 모두 본영으로 하여금 장교에 승서하게 한다. 어영청의 별파진 문복득(文卜得), 남한 산성의 별파진 이춘일(李春一), 훈국의 거부(車夫) 김낙행(金樂行) 【이상은 성문을 쌓을 때 많은 공이 있었다.】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후히 시상하게 한다. 훈국의 일기총(一旗摠) 김철홍(金哲弘), 서자적(書字的) 한광진(韓光鎭)은 해당 부서로 하여금 모두 쌀과 베를 후히 제급하게 하고, 마병(馬兵) 조계문(趙啓文)·최철중(崔哲重)·양도묵(梁道默)·이춘득(李春得)·안광원(安光源)·지인득(池仁得)은 모두 체가하여 해당 영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서 수용하게 하고, 전승임(全承任)·김광려(金光麗)·윤도욱(尹道昱)·박춘문(朴春文)·김세욱(金世郁)·박경욱(朴景郁)은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고 해당 영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수용하게 한다. 보군(步軍) 조윤옥(曹允玉)·강우신(姜遇信)·이국필(李國弼)·김진원(金進源)·강치온(康致溫)·윤낙신(尹樂莘)·강덕룡(姜德龍)·양해종(梁海宗)은 모두 해당 부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게 하고, 고경득(高景得)·정취옥(鄭就玉)·권영(權榮)·정필운(丁弼運)·황인태(黃仁泰)·이종혁(李宗爀)은 모두 체가한다. 금위영 중초군(中哨軍) 강문득(姜文得)·조언유(趙彦有)·김중형(金重珩), 뇌자(牢子) 조만득(趙萬得)은 모두 아울러 체가하고, 중초군 이광유(李光裕)·이종직(李宗稷)·김철주(金鐵柱)·노성원(盧聖源)·박흥철(朴興哲)·어성린(魚成鱗)·유지무(柳枝茂)·박완상(朴完相)·한호복(韓好福)은 모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하게 하고, 총융청의 당보수(塘報手) 김성복(金成福)은 체가한다.

평안도에서 출정한 장령(將領) 이하의 별단.

병우후진(兵虞候陣)의 좌형장(左領將) 전 오위 장(五衛將) 최진일(崔鎭一) 【수성(守城)할 때에 공을 세움이 가장 많았고, 송림(松林)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대진으로 가 시종 군무(軍務)를 전담해 관장(管掌)·검찰(檢察)하였으며 총수(銃手) 30명을 모집하여 성을 격파하던 날에 동문(東門)을 거쳐 성으로 들어갔다.】 우영장(右領將) 전 오위 장 김경엽(金景燁) 【수성(守城)할 때에 공을 세움이 가장 많았고, 송림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대진으로 가서 대소의 군무를 좌영장과 함께 전적으로 관장하여 검찰(檢察)하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천총(千摠) 최인지(崔麟趾) 【송림 싸움에서 공을 세움이 많았다.】 본도에서 수용하고, 행군 집사(行軍執事) 한량(閑良) 전학엽(全學燁) 【송림(松林)·곽산(郭山)에 출전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기 위해 진외(陣外)로 갔다가 함종진(咸從陣)이 겁략 당할 때 창을 맞아 죽었는데, 김학엽이 복수를 위해 진중에 남아있었다.】 먼저 그 아비에게 휼전을 내리고 〈그 아들은〉 상복을 벗기를 기다려 본도에서 수용한다. 겸사복(兼司僕) 김의권(金義權) 【송림 싸움에서 공을 세움이 많았고, 곽산 싸움에서 전진하여 적을 추격하였으며, 애도(艾島)를 방수(防守)하였다.】 환약 감관(丸藥監官) 한량(閑良) 강처홍(姜處弘)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창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군기 감관(軍器監官) 한량 김치언(金致彦) 【정월에 각종 화기(火器)를 가지고 대진에 가서 화기 장방(火器粧放) 및 거패(車牌) 등 성을 공격하는 여러 기구를 감조(監造)하였고, 흙을 파낼 때 주야로 감독하고 화약을 묻고 불을 붙였다.】 상으로 가자 후에 병영에서 원에 따라서 수용한다. 함종진(咸從陣) 장사 군관(壯士軍官) 김계묵(金啓默)· 【송림 전투에서 힘껏 전진하여 적의 가짜 원[倅]인 김이대(金履大)의 가속(家屬)을 붙잡아 바쳤으며, 곽산 싸움에서는 소모 군관(召募軍官)인 서울에 사는 전재명(全再明)과 함께 적의 괴수 이제초(李齊初)를 뒤쫓아가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으며, 김계묵 역시 낙마하여 형세가 장차 위급하게 되었었는데, 김재명이 뒤쫓아가 구원해 내고 협력하여 함께 적을 포박하였다.】 서울의 소모 군관(召募軍官) 전재명(全再明)은 모두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邊將)에 제수한다. 중군(中軍) 최치호(崔致昊) 【송림 싸움에서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였고, 곽산 싸움에서 선두 부대도 힘껏 진격하였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은산 초관(殷山哨官) 김정옥(金正玉)· 【곽산의 전투 및 적이 본채(本寨)를 겁략할 때의 전공이 문치장(文致章)과 다름이 없었다.】 장사 군관 문치장(文致章)· 【곽산 싸움에서 군병(軍兵)을 독려하여 용맹을 떨쳐 전진하였고,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김정옥(金正玉)과 함께 적 2급(級)을 베었다. 성을 공파(攻破)하던 날에 홍경래(洪景來)의 동생 홍정래(洪鼎來)를 사로잡았다.】 영장(領將) 박계량(朴季良)· 【송림 전투에서 전구(前驅)로 싸움에 나아갔고, 곽산 전투에서는 총수(銃手)를 독려하여 총을 쏘며 바로 앞까지 전진하여 적을 매우 많이 죽이니 적이 분궤(奔潰)되었다.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또 총수를 거느리고 일제히 총을 쏘아 적을 죽었다.】 강서 파총(江西把摠) 김이인(金利仁) 【송림·곽산 전투에서 박계량(朴季良)과 함께 공이 같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무사(武士) 이달욱(李達旭)·박상화(朴尙化), 기패관(旗牌官) 강우문(姜右文)·박제순(朴濟順)·이원갑(李元甲), 초관(哨官) 강희철(姜希喆)·오치현(吳致賢)· 【이상은 송림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총을 쏘아 적을 죽였으며, 곽산 전투에서 총을 쏘아 적을 죽였다.】 김세봉(金世奉)· 【송림 전투에서 총을 쏘아 적을 죽였으며,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쏘았다.】 이봉문(李奉文) 등 9명과 【송림 전투에서 총을 쏘아 적을 죽였다.】 이경운(李京云) 【적이 본진을 겁략할 때 총을 쏘아 적을 죽였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후하게 제급하게 한다. 영변 별장(寧邊別將) 김재철(金再哲) 【자원(自願)해 출정(出征)하여 2백 명의 관군(官軍)을 거느리고 정주성(定州城) 아래로 가서 함종진이 겁략 당할 때에 칼날을 무릅쓰고 충돌하다가 이내 전사하였다. 그 아들 김구장(金九章)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진영으로 달려가 적을 죽였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가급(加給)하게 하고, 그 아들 김구장은 상복을 벗기를 기다려서 특별히 수용하게 한다. 천총 김응철(金應哲)· 【적변(賊變)이 있던 처음에 자원하여 출전했으며, 곽산 전투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적을 추격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다.】 순천진(順川陣)의 장사 군관 안형복(安亨馥) 【송림 전투에서 시석을 무릅쓰고 앞장섰으며, 곽산 전투에서 적도들이 몰려오자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알리고 이내 진군하였다. 적이 허항(許沆)의 성채를 겁략할 때에 적 2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박종묵(朴宗默) 【송림 전투에서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앞장섰으며, 곽산 전투에서는 적 김이국(金理國) 등 6명을 사로잡았다.】 본도에서 시상한 것이며, 변득렴(邊得㾾) 【송림 전투에서 적 2급을 베었으며, 동성(東城)을 공격할 때에 힘껏 싸우다가 화살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한다. 병영 집사(兵營執事) 유학린(劉學麟)· 【적이 허항의 진영을 겁략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다.】 장사 군관(壯士軍官) 최상언(崔尙彦)·송대윤(宋大允) 【적이 허항의 진영을 겁략할 때 적 2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수용하게 하고, 군졸(軍卒) 이정번(李正番)· 【송림 전투에서 적 7명을 죽였다.】 김두청(金斗淸) 【송림 전투에서 적 3명을 죽였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후히 제급하게 한다. 양덕(陽德)의 소모군(召募軍) 이성춘(李成春) 【제경욱(諸景彧)을 따라다니며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다가 적에게 붙잡혔는데,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가급하게 하고, 이장갑(李長甲)의 예에 의해서 도내의 변장(邊將)을 특별히 증직한다. 숙천진(肅川陣)의 파총(把摠) 김학원(金學源)·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먼저 안주(安州)로 달려가 성을 지켰으며, 송림 전투에 출전하여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적 1명을 사로잡았다.】 집사(執事) 김태홍(金泰弘)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먼저 안주로 가서 성을 지켰으며 송림 전투에 출전하여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적 1급을 베었다.】 모두 본도에 수용하게 하고, 장사 군관 오치도(吳致道) 【자원해 출전하여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불이 군기막(軍器幕)에 미치자 화약과 군기를 지고 나와 요행히 불타는 것을 면하였다.】 상으로 가자한다. 포교(捕校) 김윤거(金允琚) 【도망하는 적 2명을 잡아 바쳤다.】 본도에 수용하고, 군졸 김동이(金同伊) 【적에게 붙잡혔다가 밤을 틈타 도망해 오다가 순천(順川)의 군사 2명이 적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는 긴 창으로 적을 찌르고 드디어 함께 돌아왔다.】 체가한다. 군졸 임종석(林宗石)·박상번(朴尙番)·최차삼(崔次三)·김삼광(金三光) 【이상은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창을 맞았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후히 제급하게 한다. 좌수(座首) 김학일(金學一)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병영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제군에서 모두 기일에 오지 못하였으나 유독 김학일이 벼슬자리를 비우고 시골에 있으면서 초모(招募)하여 70명으로 부대를 만들어 자장(資裝)을 찾아 주고 격려 단속하여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하룻밤 사이에 거느리고 가게 하였으며, 이어서 또 민병(民兵) 2백 명을 가려 뽑아 송림의 적을 진격하였다.】 본도의 전랑(殿郞)으로 차임하고, 평양 중군진(平壤中軍陣) 영장(領將) 옥재혁(玉載赫), 【적이 함종진(咸從陣)을 겁략할 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으며, 성을 격파하던 날에 나학수(羅學守)와 함께 홍경래를 베었다.】 무사(武士) 김형록(金亨菉) 【성을 격파하던 날 적 홍총각(洪總角)을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며 변장을 제수한다. 천총 최종석(崔宗錫)· 【성을 격파하던 날에 적의 집사 김혜철(金惠哲)의 목을 베어 바치고, 적의 괴수 이희저(李希著)의 조카를 사로잡았다.】 영장(領將) 김진연(金進淵) 【동문과 남문의 전투에서 매번 앞장섰으며, 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총수(銃手)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으며, 성이 격파되던 날 홍경래의 어미를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무사 차익환(車益煥) 【성이 격파되던 날 적 양시위(楊時緯)를 사로잡았다.】 변장을 제수하고, 초관(哨官) 나학수(羅學守)· 【성이 격파되던 날, 옥재혁(玉載赫)이 홍경래를 벨 때 협력하였다.】 장사 군관 이담(李淡)· 【성이 격파되던 날 적의 집사 이침(李琛)을 사로잡았다.】 무사 김중빈(金仲彬)· 【남문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격하다가 탄환을 맞았다.】 임종언(任宗彦)·김인수(金仁守)· 【이상은 동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기패관(旗牌官) 김치룡(金致龍), 무사 김성우(金成右)·김범(金範) 【이상은 남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군졸 이춘삼(李春三),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적 3명을 사로잡았다.】 총수 황보철(皇甫喆)·김학봉(金學奉)·박문현(朴文玄) 【이상은 남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모두 체가한다. 가산진(嘉山陣) 천총 장대명(張大明) 【일곱 차례 출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초관(哨官) 강수광(姜守光) 【동문 전투에서 탄환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박천진(博川陣) 군관 정복희(丁馥禧) 【성이 격파되던 날 적 윤언섭(尹彦涉)을 사로잡았다.】 변장을 제수하고, 초관 조이욱(趙利郁)·김종록(金宗菉), 기패관 이동엽(李東燁) 【이상은 일곱 차례 출전하여 자못 공로가 있었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정주진(定州陣) 초관 조명진(趙命珍)·배행준(裵行俊), 교련관 오협(吳鋏), 기패관 송인천(宋仁天), 군관 김관해(金觀海), 별군관 송문봉(宋文鳳), 【이상은 일곱 차례 출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군관 김덕룡(金德龍)·강시제(康時濟) 【이상은 여러 차례 접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삭주진(朔州陣) 장사 군관 길선덕(吉善德) 【자원해 출전하여 적을 만약 섬멸하지 못하면 죽어서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며, 북성(北城)의 흙을 팔 때 밤낮으로 역사를 감독하였다.】 상으로 가자하고, 운산(雲山)의 연군(鉛軍) 변동이(邊同伊) 등 11명은 【1명은 영변(寧邊)의 병졸로 북성에 흙을 팔 때에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두 부역을 견감한다. 창군(槍軍) 박지영(朴之永) 【효유문(曉諭文)을 가지고 솔선하여 동문 밖 적이 둔(屯)을 치고 있는 곳에 가서 던져 전했다. 북성 흙을 팔 때에 탄환을 맞았는데, 다리를 싸매고서 조금도 물러나 피하지 않았고, 또 성의 돌 몇 개를 뽑아내었다.】 장군(將軍) 강돈금(姜頓金) 【북성에 땅을 팔 때에 거듭 화살과 탄환을 맞았으나 시종 역사에 힘썼다.】 모두 부역을 견감하고 체가한다. 군뢰(軍牢) 박지영(朴枝英) 【성문을 쌓을 때에 공이 많았다.】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고, 인산리(麟山吏) 오세권(吳世權) 【자원하여 진에 나아가 성문을 쌓고 흙을 파낼 때 세운 공이 매우 많았다.】 본도로 하여금 소원에 따라서 수용하게 한다.

창의 소모(倡義召募) 장사(壯士)의 별단.

공충 병사(公忠兵使) 김견신(金見臣) 【이미 포상을 받았다.】 좌부 방어장(左部防禦將) 한응좌(韓膺佐) 【자원으로 서림(西林)에 종군(從軍)하였는데, 성을 공격할 때 먼저 나가 문을 지키는 적을 베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본도로 변장을 제수하고, 좌선 봉장(左先鋒將) 박정모(朴禎謨) 【김견신(金見臣)과 함께 모의하여 창의(倡義)해서 김 견신의 부장(副將)이 되어 거짓으로 적괴(賊魁) 복일(復一)에게 투항하여 적정(賊情)을 자세히 탐문하고 밤중에 도망해 돌아왔는데, 북성의 흙을 팔 때에 탄환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변장을 제수한다. 후부 방어장(後部防禦將) 박성묵(朴聖默) 【김현신과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서림(西林)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상으로 가자하고, 구응 방어장(救應防禦將) 문응규(文應圭) 【김견신과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가는 곳마다 세운 공로가 많았다.】 본도에서 수용한다. 전부 방어장(前部防禦將) 김계엽(金啓熀) 【처음부터 의병을 일으켜 서림 전투에서 전부(前部)가 되어 공로가 가장 많았는데, 정주성을 공격할 때에 탄환을 맞았다.】 철산(鐵山) 한량 김국추(金國樞) 【철산 백성으로서 김견신의 군사를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였고 곧바로 향도관(嚮導官)이 되어서는 철산(鐵山)의 백성으로 적을 위해서 서림산(西林山) 부성(富城)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가족을 위협해서 그들로 하여금 성 밖에서 울부짖게 하여 적군의 태반이 도망하여 흩어지게 한 것은 실로 그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영병장(領兵將) 가선 대부 전 첨사 홍여일(洪麗一) 【의주(義州) 사람으로 3월 초에 연행(燕行)에서 돌아와 자원해서 한 부대의 군사를 얻어 김견신의 진영으로 갔다. 북성의 흙을 팔 때에 일을 감독하였으며 성을 격파하던 날 먼저 성벽에 올라가 입성하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증 통제사(贈統制使) 허항(許沆) 【이미 포증(褒贈)을 받았다.】 의주의 무사 임술조(林述祚)· 【그의 동생 임증봉(林曾鳳)과 함께 용천(龍川) 성문을 속여서 열게 하였으며 동림(東林)을 수복할 때 먼저 성문을 부수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임증봉(林曾鳳)· 【그의 형 임술조와 함께 용천성에 들어가 문을 열어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기사(騎士) 좌영장(左營將) 김형척(金亨倜), 【자원하여 종군하였는데 용천(龍川)을 습격할 때 적 7명을 베고 말 두 필을 빼앗았으며, 김형철·임술조와 함께 먼저 동림 성문을 부수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기사 김형철(金亨喆) 【자원해 종군하여 김형척·임술조와 함께 동림 성문을 먼저 부수고 관군을 맞이하여 들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무사 허웅(許雄)·김중규(金中奎)·김문도(金文道) 【모두 자원으로 종군하여 용천을 수복할 때에 허웅은 적 2명을 베고, 김중규는 1명을 베었다. 이내 선천(宣川)으로 가서 세 사람이 협력하여 적도 김인백(金仁白) 등 4명을 잡아 바쳤다.】 아울러 본도에서 수용한다. 초산 부사(楚山府使) 최신엽(崔信燁), 【이미 포상을 받았다.】 의주의 한량 임치명(林致明)·양해득(梁海得) 【모두 최신엽을 따라서 미곶(彌串)과 용골(龍骨)을 수복할 때 세운 공이 가장 많았다.】 모두 본주에서 수용한다. 삼등 현령(三登縣令) 송지렴(宋之廉), 【이미 포상을 받았다.】 강계(江界)의 한량 계운해(桂運海) 【심하(深河)에서 전사한 사람 계수방(桂秀芳)의 육대손(六代孫)으로 송지렴과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시종 협력하여 계책을 도와 대응하였고, 군수(軍需) 조달에 세운 공이 가장 많았었다. 대진이 겁략 당할 때 본채(本寨)에 남아 지키면서 기미를 보아가며 막아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변장을 제수하고, 길주(吉州)의 한량 김종욱(金宗郁) 【강계에 와 머물면서 의병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서 군장(軍裝)과 전마(戰馬)를 스스로 마련해 함께 진으로 갔다. 허항(許沆)의 진이 겁략 당할 때 필마 단창(匹馬單槍)으로 적진에 충돌하여 적괴 홍총각(洪總角)의 갑옷을 빼앗았다. 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적로(賊路)를 막았으며 성을 격파할 때에는 적장 김치신(金致信)을 베고 적병을 사살(射殺)한 것이 역시 많았다.】 상으로 가자하여 실직에 조용한다. 강계의 의사(義士) 별무사 김대윤(金大允) 【활 잘 쏘고 총을 잘 쏘았는데, 송지렴을 따라서 진에 나가 동성(東城)에 땅을 팔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역사를 감독했다. 북성(北城)이 궤파(潰破)될 때 포수(砲手)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 손태영(孫泰永)과 함께 동문을 열고 각진의 군사를 불러들였다.】 별무사 김계문(金啓文)· 【자원하여 진으로 나가 2월 25일, 윤거(輪車)로 성을 공격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성벽에 올라가 화살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하였다. 성을 격파하던 날 송지렴과 함께 앞장서 입성해서 총을 쏘아 죽인 적이 매우 많았다.】 윤홍조(尹弘祚)· 【총과 활을 잘 쏘았는데, 자원해서 진으로 나가 싸움에서 반드시 앞장섰다. 적을 격파하던 날에 포를 쏘아 적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호일성(扈一成) 【자원하여 진에 나가 포수 54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와서 송지렴의 진에 소속되었다. 성을 격파하던 날 송지렴의 전봉(前鋒)이 되어 적의 대포를 맞아 얼굴이 데어 문드러졌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창성(昌城)의 전 권관(權管) 강인학(姜仁鶴) 【정묘년에 순절(殉節)한 사람의 자손으로 한 집안의 의사(義士) 42명을 일으켜 스스로 양자(糧資)를 마련하여 대진으로 갔다.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3명을 사로잡았다.】 병조의 육품직에 조용한다. 희천(熙川)의 한량 함의형(咸義衡) 【의사(義士) 50명을 모집하여 자원해서 진으로 갔다. 성을 격파한 후 적의 괴수 이희저(李希著)의 수급을 베어 바쳤다.】 상으로 가자하여 변장을 제수한다. 의주 행영장(行營將) 정내홍(鄭來鴻) 【수성(守城)할 때 집사(執事)로서 거짓으로 적의 괴수 이복일(李復一)에게 투항하여 적정(賊情)을 자세히 탐지하여 허항(許沆)의 진중으로 따라갔다. 용천(龍川)을 수복할 때 적 3명을 베고 2명을 사로잡았다. 관군과 함께 선천(宣川)에서 모여 적 4명을 사로잡고 이내 정주(定州) 진중으로 갔다. 허항의 진이 겁략 당할 때 적 2명을 사로잡았으며, 허항이 전사한 후 그 군사를 대신 거느렸다.】 상으로 가자하여 실직에 조용한다. 귀성(龜城)의 가선 대부 전 만호(萬戶) 김지환(金志煥) 【병영의 장사 군관(壯士軍官)으로 출전하여 송림·곽산의 전투 때 후영(後營) 선봉이 되어 적추(賊酋) 박성신(朴聖信)의 세 부자(父子)를 잡아 바쳤으며, 장정 53명을 모집하여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상으로 가자하고, 곽산의 한량 원영정(元永丁) 【의병 44명을 모집하고 양미(粮米)를 스스로 마련하여 와서 정주 서문(西門) 밖 고갯마루의 요새지를 지켰다. 청천강(淸川江) 북쪽의 적이 패한 후 김지환(金志煥)과 협력하여 박성신(朴聖信)을 붙잡았다.】 상당한 초사(初仕)에 녹용(錄用)한다. 곽산의 전 좌수(座首) 강집(姜) 【의병장으로서 시종일관 진(陣)에 있으면서 전후하여 적 장홍익(張弘益) 등 15명을 붙잡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별군직 장낙현(張洛賢) 【의주 사람으로 서울에 있다가 적변을 듣고는 내려가 본주(本州)의 의사(義士)를 모집하고 또 7명의 의사(義士)의 자손을 모아 정주성 아래에 진을 쳤다.】 가자(加資)하고, 벽동(碧潼)의 사인(士人) 김경로(金慶魯) 【향무(鄕武) 1백 명을 창도(倡導)하여 거느리고 진으로 가서 땅을 팔 때에 낮에는 역에 나가고 밤에는 진에 머물렀다.】 본도의 전랑(殿郞)으로 차출한다. 태천(泰川)의 의병장 백사증(白師曾) 【의사 20명을 거느리고 양찬(粮饌)을 스스로 마련하여 요로(要路)를 지켰고, 성을 격파한 후 도망하는 적 8명을 베었다.】 철산(鐵山)의 진사 박대관(朴大觀) 【의병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부름에 호응해서 사인(士人) 43명을 모집하고 양미 12석을 거두어 대진(大陣)을 응접하였다. 이내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진으로 나갔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의주의 전 첨사(僉使) 한금기(韓今琦)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자원하여 진으로 나가 관병(官兵) 70명을 거느리고 영병장(領兵將)이 되었다.】 상복 벗기를 기다려 상으로 가자한다. 안주 향인 안명렬(安命烈) 【적들이 반란을 일으킨 초기에 60여 명을 모집하고 스스로 군량을 마련해 가지고 온 고을 경내를 순회하면서 돌아다녀 마을 사람을 동요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역적 한지겸(韓志謙) 등 3명을 잡아들였다.】 상으로 가자하며, 전 장령(掌令) 차경진(車敬鎭) 【선천(宣川) 사람으로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사인(士人) 김연(金埏)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웃 마을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동림(東林)의 적도를 쫓았으며 군기(軍器) 및 도둑질해 가는 창고의 곡식을 빼앗아 창고 안에 다시 넣었으며, 그의 자손과 친속을 거느리고 청천강(淸川江) 요로를 지켰다.】 수령을 제수한다. 태천(泰川)의 사인(士人) 이시복(李時復) 【서울에 있다가 적변을 듣고 달려 돌아가 군병 29명을 모집해서 진 앞으로 나가 여러 차례 접전하였으며, 또 돈과 곡식을 모아 출정한 사람의 가속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기와 잡물을 마련하였다.】 본도의 전랑(殿郞)으로 차출한다. 장사 군관(壯士軍官) 구채문(具采文) 【곽산 사람으로 적이 본군에 들어올 때에 그의 무예(武藝)를 듣고서 위협해 불렀으나 굽히지 않고 도망해 피했으며, 적이 물러간 후 양미(粮米)를 스스로 마련하여 가지고 와 응모하였다. 성을 격파하던 날 적을 많이 베고 사로잡았는데 이때 19세였다.】 변장을 제수한다. 평양의 한량 장운한(張雲漢) 【용사(勇士) 송인철(宋仁哲) 등 20명을 창모(倡募)하여 자원하여 진으로 갔다.】 오필련(吳必鍊) 【동지(同志) 정득현(鄭得賢) 등을 거느리고 대진으로 나갔으며, 또 소 두 마리와 장(醬) 두 바리[馱]를 마련해 순무영 중군(中軍)의 진영에 바쳤다.】 모두 본도에서 원에 따라 수용한다. 강서(江西)의 전 사고 참봉(史庫參奉) 이인화(李仁華) 【동지 고경천(高擎天) 등을 창모(倡募)하여 함종진으로 나갔으며, 성을 격파하던 날 성첩(城堞)을 지켜 도망하는 적을 막았다.】 용천(龍川)의 향인(鄕人) 안택륜(安宅倫)· 【적변이 있던 처음에 장낙현(張洛賢)의 진으로 나갔는데, 병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본부의 향인 김응면(金應勉) 등을 모아 함께 대진으로 나갔다.】 이지렴(李志㾾)· 【그의 동생 이지락(李志洛) 및 사인 차신국(車信國) 등과 함께 대진으로 나갔다.】 정주의 향인 김기영(金基英) 【의병 10명을 거느리고 군량(軍粮)을 스스로 마련하여 대진으로 나갔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도사(都事) 최대식(崔大寔), 박사(博士) 박영현(朴榮顯) 【모두 정주 사람으로 본현의 사인 백경환(白慶煥)·정현박(鄭顯璞)·윤종현(尹宗鉉)과 함께 서울에 있다가 적변을 듣고서 서로 이끌고 진으로 나갔다.】 모두 복직(復職)시킨다. 운산(雲山)의 전 참봉 이즙(李檝) 【적변이 있던 처음에 향인 강백록(康百菉)·이현문(李顯文)과 함께 1백 20여 명을 창모(倡募)하여 운산(雲山)·태천(泰天)·영변(寧邊) 세 고을의 요로에 나누어 둔(屯)을 쳐 도망하는 적 3명을 잡아 바쳤다.】 영변의 향인 김성붕(金成鵬) 【적변이 일어난 처음에 향인을 모집하여 고갯마루의 요새지에 나누어 둔을 쳐 적의 군관 변대헌(邊大憲)·변대현(邊大賢) 형제를 잡아 바쳤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평안도의 장사 군관 별단.

병영의 장사 군관 한량 왕사현(王思賢) 【송림에 출전하여 대진을 따라다니며 안형복(安亨馥)과 함께 운흥(雲興)의 적둔(賊屯)에 가서 정탐하여 적정을 먼저 보고하였다.】 상으로 가자하였다. 직부(直赴) 이의승(李宜承) 【송림과 곽산 두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있는 힘을 다하여 방어하였다.】 한량 이심일(李心鎰)·한정신(韓正臣) 【송림과 곽산 전투에 참가 하였는데, 적을 격파하던 날 앞장서서 먼저 성벽에 올라갔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한량 백인서(白麟瑞) 【송림과 곽산 전투에서 모두 전공(戰功)이 있고 적 휘하의 김이국(金理國) 등을 사로잡았으며,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뒤쫓아가 적을 죽였다.】 김낙홍(金洛弘)· 【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5명을 사로잡았다.】 과거 출신(出身) 최천학(崔天鶴)· 【송림에 출전하여 대진을 따라다니며복 병장이 되어 적 9명을 붙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라. 과거 출신 김인덕(金仁德) 【송림에 출전하였고, 대진으로 나가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겸사복(兼司僕) 구즙(具緝)·오명회(吳命恢) 【송림에 출전하였다가 대진으로 가서 복병장이 되어 흙 파는 역사를 감독하였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하고, 한량 이인협(李寅協) 【송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후에 대진에 나가 복병장이 되어 북성(北城)의 요해처를 지키고 북성(北城)의 흙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았다 성을 격파하던 날 병든 몸을 이끌고 군사를 거느려 입성하였다.】 향인(鄕人) 이건악(李健岳)· 【곽산에 출전하였고 성을 격파한 후 대진으로 가 접전하다가 탄환을 맞았다.】 과거 출신 서백석(徐百碩) 【접전할 때 탄환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과거 출신 김창신(金昌信) 【송림 전투에서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였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한량 이희엽(李禧燁) 【송림 전투 후에 이영식(李永植)을 따라 다복동(多福洞) 적의 소굴을 쳐서 적의 기치(旗幟)를 빼앗았다.】 김후덕(金厚德) 【이영식을 따라가 다복동 적의 소굴을 쳤고 대진으로 나가 복병장이 되었다.】 모두 본도에서 수용한다. 과거 출신 김성록(金聲菉) 【송림에서 대진으로 가 접전 중에 화살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과거 출신 장치영(張致榮) 【송림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진으로 나가 우영장(右營將)의 행군 집사(行軍執事)가 되었다.】 본도에서 시상한다. 한량 변득렴(邊得㾾) 【송림에서 대진으로 나가 접전할 때에 화살을 맞아 정월에 먼저 돌아왔다.】 상으로 가자하고, 한량 한무흥(韓武興) 【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적 1명을 베었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전 만호 박대욱(朴大旭) 【복병장(伏兵將)으로 접전할 때 탄환을 맞아 3월에 병으로 돌아왔다.】 상으로 가자하고, 과거 출신 계응화(桂應華) 【북성(北城)을 파는 부역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한량 박치검(朴致儉) 【송림 전투에서 앞장서서 쫓아갔으며 북성의 흙을 팔 때에 역사를 감독하였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평안도 각읍 수성(守城) 방수(防守) 및 각종 공을 세운 사람의 별단.

안주 수성 도패장(安州守城都牌將) 절충 장군(折衝將軍) 이춘화(李春華)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북성을 지켰으며, 거느린 군사가 3백 20명인데 연달아 포(砲) 쏘는 것을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어 상을 주고, 쌀을 내어 떡을 만들어 다시 성 안의 장정을 먹였다.】 도내의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집사 행수(執事行首) 전 경복장(景福將) 전계장(全啓璋) 【수성(守城) 및 출전했을 때 각종 수용(需用)을 힘을 다해 마련했으며 화약을 가지고 정주에 나가 성을 공격하였다.】 본도에서 수용하고, 장교(將校) 김여흥(金麗興) 【내능(內應)하는 적도 이무실(李武實)을 잡아 바쳤으며, 성첩을 지킬 때 도성장(都城將)으로 거행하였다.】 상으로 가자한다. 영변의 집사 겸사복(兼司僕) 길상척(吉尙倜) 【칼을 품고 내응하는 적 이만봉(李萬奉)을 붙잡아 바치고, 적정을 정탐하여 본관(本官)에 몰래 알려서 위태로운 성을 보전하는 데 실로 그의 공이 많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변장을 제수한다. 천총 출신 장문오(張文吾), 겸사복 박처검(朴處儉) 【이상은 앞장서 자원하여 태천(泰川)의 적 소굴을 소탕하고 흉추(凶酋) 박인식(朴仁植) 등 5명을 사로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성장(城將) 겸사복 최정보(崔廷珤) 【태천의 가짜 고을 원[倅] 변대익(邊大翼)을 붙잡아 참수(斬首)하여 바쳤으며, 또 도망하는 적 1명을 잡아 바쳤다.】 도내의 변장을 제수하고, 한량 윤정호(尹鼎浩) 【최정보와 함께 변대익을 붙잡았다.】 중군(中軍) 홍치백(洪致伯) 【내응하는 여러 적을 조사해 잡을 때 많은 공로가 있었고, 태천을 수복할 때에도 또한 방략(方略)을 설시하였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천총인 과거 출신 김문행(金文行) 【장사 군관 고한장(高漢章) 등을 거느리고 곧장 다복동 적의 소굴을 쳐서 군기(軍器) 30태(馱)를 거두어 모으고 적 8명을 잡았다.】 도내의 변장을 제수하고, 부민(府民) 유태운(劉太云) 【적의 군관 김상각(金尙珏) 및 쌀 아홉 섬과 소 한 마리를 적진으로 끌고 가던 최경일(崔景一) 및 적당(賊黨)과 가까운 일족인 최익성(崔益成)을 잡아 바쳤다.】 체가한다. 운산(雲山)의 행수 군관(行首軍官) 안여곤(安如坤), 집사(執事) 이춘재(李春栽) 【이상은 영변에 내응하는 적정을 염탐하였고 적도 나대곤(羅大坤)을 잡아 바쳤으며, 또 수검(手劍)으로 남익현(南益顯)과 김우학(金遇鶴) 두 적을 먼저 베었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수리(首吏) 김남희(金南禧), 형리 박사권(朴思權) 【이상은 남익현(南益顯) 무리들이 흉적에게 내응하는 상황을 염탐하여 먼저 운산 본관에 알렸으며, 영변에 따라 들어가서 내응하는 적을 잡아 다스려 공로가 가장 드러났다.】 모두에게 본도로 하여금 자원에 따라 시상한다. 장교 서상곤(徐尙坤) 【적의 자객(刺客) 김우갑(金遇甲)이 영변부 관아로 돌입하는 것을 보고는 칼을 빼앗고 포박해 베었다. 북성(北城)에 땅을 팔 때 길선덕(吉善德)과 함께 연군(鉛軍)을 거느리고 주야로 역사를 감독하였다.】 천총 허철(許喆) 【영변 성문에서 칼을 품고 매복해 있던 적 강수흥(康守興)을 잡아 바쳤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의주의 도령장(都領將) 전 첨사 김취규(金就奎) 【적변을 듣고 기복(起復)하여 군무(軍務)를 전담했으며, 그의 가족이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돌보지 않았었고, 그의 아들 김택회(金宅晦) 역시 산성 중군(山城中軍)으로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상복 벗기를 기다려서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한다. 전 군수 장몽열(張夢說) 【적변을 듣고 기복(起復)하여 들어와 산성을 지켰으며 그 가속(家屬)이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돌보지 않았다.】 상복 벗기를 기다려 가자하고, 방어장(防禦將) 정현석(鄭賢碩) 【장사 군관 조도헌(趙道憲)을 시켜 적의 괴수 문제(文濟) 및 그의 두 아들과 첩 하나, 며느리 하나를 찾아 잡게 하였다.】 상으로 가자하고, 방수장(防守將) 최봉덕(崔鳳德) 【조도현을 시켜 적의 괴수 남관(南冠)·남혁(南赫) 형제를 잡게 하였다.】 본도의 변장을 제수하고, 부민(府民) 조도헌(趙道憲) 【문제·남혁 등 여러 적과 그의 지속(支屬)을 찾아내 잡았다.】 부역을 견감하고 체가한다. 포교 최종일(崔宗日)·김덕영(金德永)·김표응(金表應)·문정엽(文正燁) 【이상은 힘을 합쳐 서림(西林)의 적장 김익명(金益明)을 잡아 바쳤는데, 최종일은 적변이 일어난 처음에 큰 길[官路]을 따라서 곧장 병영으로 나가 적정을 보고하고 공문[題辭]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고, 귀성(龜城)의 방수장(防守將) 정몽량(鄭夢良) 【적의 괴수 우군칙(禹君則)·최이륜(崔爾崙)·최이항(崔爾恒)·최정우(崔正宇)·최이구(崔履九)를 잡아 바쳤다.】 상으로 가자하여 중군에 차정(差定)한다. 좌수(座首) 홍이경(洪履警) 【적변이 일어난 처음부터 염탐하여 진안(鎭安)하는 데 세운 공로가 많았으며, 밤에는 칼을 짚고 관문에 오래 서 있었다.】 중군 전 동지(同知) 조영(趙暎) 【장정을 모집하여 시종 일관 성을 지켰으며 손수 포를 쏘아서 음흉한 격문(檄文)을 가지고 성 밖으로 오던 적추(賊酋)를 다치게 하여 내쫓았다.】 모두 본도에서 소원에 따라서 시상하고, 풍헌(風憲) 홍이후(洪履垕) 【적도가 정주부(定州府)의 경내를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는 장군을 모집하여 적추(賊酋) 한처곤(韓處坤) 및 그 도당(徒黨) 5명을 참획하였다.】 상으로 가자하고, 약정(約正) 허용(許溶) 【적도가 정주부의 경내를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 장군을 모집하여 적추 한처곤 및 그 도당 5명을 참획하였다.】 체가하고, 포교 김득기(金得己) 【적도 장홍익(張弘益) 등 3명을 잡아 바쳤다.】 곽산의 방수장 김홍척(金弘倜) 【정주성에 패전한 적(賊) 15명을 잡아 바쳤다.】 모두 본도로 하여금 시상하게 한다. 향인(鄕人) 김우척(金宇倜) 【적의 군관 박상현(朴尙賢) 및 적의 괴수 김창시(金昌始)의 아비와 아들을 잡아 바쳤다.】 모두 본도의 변장을 제수하고 평양 군기 감관(平壤軍器監官) 조진범(趙鎭範) 【화약 창고에 방화한 적을 사로잡았다.】 평양 배지(陪持) 김복삼(金福三)·김진홍(金珍弘)·이초영(李初英) 이상은 본도로 하여금 소원에 따라서 수용한다. 안주(安州) 배지 최종한(崔宗漢)·백사정(白士正), 의주 배지 김이급(金以汲)·김내문(金來聞)은 모두 본도에서 특별한 예로 수용하고, 그 가운데서 제일 많이 상경(上京)한 한 사람은 도내의 변장을 제수한다.

평안도의 재산을 보내 군량을 보탠 사람의 별단

의주 유학(幼學)152) 홍득주(洪得周) 【적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각종 곡식 1천 2백 18석과 돈 5천 냥을 자원하여 관에 바쳐 기민(饑民)에게 나누어 주니 성중의 민심이 이를 의뢰해서 조금 안정되었다. 또 돈 2백 냥을 내어 본부의 성첩을 지키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사(初仕)에 조용하고, 숙천(肅川)의 향인 차형기(車亨基) 【돈 2천 냥을 내어 안주(安州)로 실어다 바쳐 군수(軍需)에 보탰다.】 안주의 향인 박경(朴絅) 【돈 1천 5백 냥과 벼 8석을 본현에 자원해 바쳐서 군수에 보탰다.】 모두 변장을 제수하고, 김경중(金慶中) 【돈 1천 냥을 안주에 자원으로 바쳐서 군수를 보탰다.】 모두 본도의 전랑(殿郞)에 차임한다. 숙천 진사 차형규(車亨逵) 【쌀 17석 영(零), 콩 13석 영(零), 돈 35냥 영(零), 소 일곱 마리를 내어 대진(大陣)이 경내를 지나갈 때 스스로 준비해 맞이하여 호궤(犒饋)하였다.】 증산(甑山)의 장교 계진흥(桂震興) 【소 20마리를 대진에 자원하여 바쳤다.】 ·벽동(碧潼)의 향인 안사권(安士權) 【쌀 1백 석을 내놓았는데 두 차례에 나누어 김경로(金慶魯)의 의병진으로 실어 보냈고, 그 아들 안급인(安仁)을 진중으로 보내 계속 호궤를 담당하게 하였다.】 ·삭주(朔州)의 한량(閑良) 이현택(李賢澤) 【쌀 15석과 소 열 마리를 내어 본읍 진영에 자원하여 바쳤다.】 ·안주의 향인 박용의(朴龍儀), 【돈 2백 냥을 내어 본현에 자원하여 바쳐서 군수에 보탰다.】 ·의주의 유학(幼學) 김홍적(金弘迪), 【돈 2백 냥을 내어 본부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안주의 향인 최석증(崔錫曾) 【돈 1백 50냥을 내어 본현에 자원하여 바쳐서 군수에 보탰다.】 ·삼등(三登)의 사인(士人) 장공서(張公書) 【소 열 마리를 내어 평양성을 지키는 곳에 자원하여 바쳤다.】 ·강서(江西)의 절충 장군 박창겸(朴昌謙) 【소 열 마리를 내어 후영진(後營陣)에 자원하여 바쳤다.】 ·평양의 전 동지(同知) 안봉핵(安鳳翮) 【소 한 마리와 술 한 항아리를 내어 본부의 창의사(倡義士)에게 나누어 호궤하고, 또 돈 1백 50냥을 내었다.】 ·전 오위 장 오성렬(吳成烈) 【돈 1백 50냥을 냈다.】 ·의주의 한량 김정윤(金廷潤) 【소 다섯 마리와 쌀 5석을 내어 본부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에게 나누어 호궤하고, 또 소 두 마리를 내어 가지고 김견신(金見臣) 진에 가 호궤하였다.】 ·가산(嘉山) 유학(幼學) 김희권(金希權) 【쌀 1석과 소 여덟 마리를 내어 대진에 자원하여 바쳤다.】 ·의주의 유학 문천익(文天益) 【각종 곡식 50석 9두(斗)를 내어 서쪽 6개 면(面)의 진에 나간 군병에게 나누어 주었다.】 ·벽동의 사인 공현검(公顯儉) 【쌀 40석을 내어 본군의 의병진에 수송하였다.】 ·영변의 유학 김광척(金光倜) 【돈 2백 냥을 내어 의병의 양식을 보탰다.】 ·평양의 절충 장군 김여행(金麗行)·유학 송인철(宋仁哲) 【각기 돈 2백 냥을 내어 소를 사고 장을 사서 대진과 평양진에 자원하여 바쳤다.】 ·강계의 향인 김양섭(金陽燮)·김종욱(金宗郁) 【각기 돈 1백 냥을 내어 송지렴과 계운해 등이 창의(倡義)하여 진으로 갈 때 힘 닿는 대로 자원하여 바쳐서 구량(糗粮)과 기계(器械)를 마련하게 하였다.】 ·의주의 민병 천총(民兵千摠) 절충 장군 김광하(金光厦) 【돈 30냥을 내고, 또 좌영장(左營將)이 출직(出直)하는 처소 3간(間)을 스스로 마련하였다.】 ·강서(江西)의 진사 홍용규(洪龍圭) 【돈 2백 70냥을 내었다.】 ·정운갑(鄭雲甲) 【돈 1백 30냥을 내었고, 정예한 포수 20명을 모집하여 행장(行裝)에 필요한 돈 30냥을 주어 후영진(後營陣)으로 가게 하였다.】 이상은 모두 본도에서 소원에 따라 시상한다. 희천(熙川)의 유생과 향인 등은 【돈 1천 냥을 내어 본군의 김인복(金麟福)·양홍(梁鴻) 등이 모병하여 진으로 갈 때 군장(軍裝)과 군량을 마련해 주었다.】 본도에 공문을 띄워 물어보며 자원에 따라 보고하게 한다. 강계(江界)의 과녀(寡女) 유조이(劉召史) 【돈 15냥을 내었다.】 최조이(崔召史) 【돈 5냥을 내었다. 이상은 힘닿는 대로 마련해 바쳐서 구량(糗粮)과 군기(軍器)를 마련하게 하였다.】 모두 호역(戶役)을 면제한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6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 재정-역(役)

  • [註 144]
    준조 절충(樽俎折衝) : 친목을 유지하면서 적의 기세를 누름.
  • [註 145]
    통개(筒箇) : 화살 넣는 통.
  • [註 146]
    미국(尾局) : 군진(軍陣)의 행렬(行列)에 있어서 그 부대의 뒷부분.
  • [註 147]
    척적(尺籍) : 군명(軍令)을 이름.
  • [註 14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149]
    중순(中旬) : 무과(武科)의 하나.
  • [註 150]
    아마첩(兒馬帖) : 길들이지 않은 말 급여 증명서.
  • [註 151]
    능철(菱鐵) : 마름쇠.
  • [註 152]
    유학(幼學) : 벼슬하지 못한 유생.

○庚戌/備局啓言: "巡撫使李堯憲, 六朔開營, 千里專制, 籌劃得宜, 勞勩甚大, 特加正二品之資, 用酬其功。 巡撫中軍柳孝源, 受命出征, 備經櫛沐, 王靈所曁, 全師凱還加資。 義州府尹趙興鎭, 坐鎭壓境之賊, 獨保全城, 指授分路之兵, 亟勦諸屯, 施以璽書表裏之典。 寧邊前前府使吳淵常發肘下伏莾之凶, 而咸誅, 捕境外漏網之賊, 而復全, 施以璽書表裏之典。 安州牧使趙鐘永, 當賊路而竝管軍民, 則徵發鎭安之一無, 或踈守空城而兼攬營邑, 則樽俎折衝之兩得其宜, 安州之幾危復安, 實有全功加資。 肅川府使李儒秀, 安州徵兵之初, 列郡無一應赴, 而肅川親兵, 獨能先至, 軍勢漸振, 城守始固。 急處之團束如此, 則平日之專制可知, 況又赴陣之後, 治民治軍, 各盡其方, 右職調用。 咸從府使尹郁烈, 順川郡守吳致壽, 龍川府使李永植, 松林之戰, 功過雖半, 而土崩之急, 一鼓賴安, 郭山之捷, 聲勢始振, 而魄褫之賊, 三窟盡蕩, 全道收復, 實基於此戰。 尹郁烈吳致壽竝加資, 李永植前已施賞置之。 巡營中軍李鼎會, 赴戰雖後於松林, 奏功旣趁於郭山, 以本職, 許用邊地履歷。 朔州府使尹敏東, 一城在中, 八陣環外, 而惟朔州分受之所當賊路最要之地, 隣寨有警則未嘗不應, 窮盜或遁, 則未嘗不捕, 進退周旋, 極有條理, 以本職許用防禦使履歷。 雲山郡守韓象默, 相機詗賊, 救寧邊內應之變, 治軍制勝, 備本邑自守之方, 準職調用。 龍川府使權琇, 守城龍骨, 兵散賊迫, 涅臂誓衆, 懷印間行, 乞救於義州大陣, 帥臣啓罷, 果是不審。 而臨危涅臂, 極用嘉尙, 右職待窠, 卽令調用。 价川郡守柳相弼, 運餉及時, 軍食無匱, 施以陞敍之典。 龜城府使趙恩錫, 兵虞候李榏, 或全保孤城, 臨危應變, 或左右大陣, 隨事殫誠, 幷施弓箭筒箇之賞。 嘉山郡守鄭周誠, 博川郡守李運植, 定州前前牧使徐春輔, 定州前牧使林栽洙, 雖無表異之績, 俱有攻守之勞, 幷施弓箭賜給之典。 凡在定州城內之賊, 雖當殄滅無遺, 然而罔治脅從, 聖王之大德, 勿殺降者, 兵家之至戒。 況前後綸音, 爲慮僅鋒鏑之濫傷, 必軫袵席之曲保, 德意所曁, 藹然如春。 而乃於陷城之日, 降卒二千皆斬, 此豈體九重好生之德?’ 而亦非所以化龍蛇之義也, 巡撫中軍柳孝源, 宜削其職, 以示功罪不相掩之意。 許沆, 戰亡之日, 咸從尾局相聯, 卽是同陣, 順川以最近之隣壁, 旗鼓相望, 緩急共須, 而卽見其挺身獨赴, 死不旋踵, 各自按兵不動, 無意相救, 一任全軍之俱沒。 今於査罪之時, 不可以事過而仍置, 咸從府使尹郁烈順川郡守吳致壽, 請使節度使, 拿致營下, 嚴棍懲勵。" 允之。 又啓言: "巡撫營將官以下及京外將士赴陣守城效勞之人, 今方分等論賞, 修出別單以啓, 而從征諸軍, 五朔暴露, 冒死向前, 竟底奏捷。 雖無表異之績, 不可無別樣酬勞之擧, 以答其親上死長之誠。 京營軍兵, 令各該營, 分等從優施賞。 松都及關西鄕軍中, 居前殺賊, 效勞稍著之類, 令該府該道, 米布從優題給, 仍令限十年復其身蠲其役, 其餘則雖不得徧加賞賚, 而蠲役之典, 限七年施行。 至於各處義旅, 初無尺籍之傳, 不待徵發之令, 而慕義勸忠, 如赴樂地者, 尤不容不另施殊賞, 以示奬勵。 其中金見臣許沆所領之衆倡義最先, 樹勳最多。 宋之廉所募精砲, 長在大陣, 多助聲勢, 前後殺賊, 最爲夥然。 此兩陣士卒, 一倂令本道, 米布優數題給, 仍施蠲役之典。 其餘晩後來赴之義旅, 隨其勞勩之多寡, 與各邑赴陣軍卒, 一體施賞。 其中士人鄕族之聞風嚮義, 相率執殳者, 另令本道援例論賞。 義州寧邊安州龜城四邑守堞之卒, 其所効勞, 與臨陣無異, 幷限三年蠲役, 校卒中勞勩尤著之類, 亦爲米布題給。 戰亡諸卒, 旣已優施恤典, 且有子孫年歲居住修成冊上送之命。 而道啓中 ‘一子身役, 永許頉免, 十年烟役, 特爲蠲減, 所受新舊還蕩減之’ 請, 實爲得宜, 依此施行。 雖以病死之類言之, 其爲死於王事, 一也, 生前身還, 一例蕩減。 外此召募防守各樣效勞及賊變之初, 出沒危險, 往來偵探, 幷令本道, 分輕重徧加酬賞, 可合收用者, 亦爲援例另施, 俾無見漏齎鬱之歎。 而題給米布者, 幷爲修成冊啓聞, 會減出征諸軍之試藝, 論賞旣有戊申已例, 京營則依中旬例, 松都及關西則依都試例, 各試射放, 以其入格矢數, 別單修啓, 以爲論賞慰悅之地。 今玆賞典, 雖從優厚, 而本道戰守之績, 只憑成冊之懸註, 難保其一一稱停, 如或有漏落未施及賞不稱勞之類, 請許令本道, 更探實蹟, 論理啓聞。" 允之。 巡撫營從事官ㆍ將官ㆍ將校ㆍ員役ㆍ別單。 從事官副司果徐能輔加資, 金啓溫日淺, 陞敍兼中軍, 前兵使金益彬弓箭筒箇賜給, 裨將前府使李惟秀, 前僉使徐有建, 前府使李義秀, 都摠經歷尹禹鉉, 訓鍊僉正安光貞, 副正李近植, 騎士將前府使朴宗和, 把摠金植幷兒馬帖賜給, 別軍官折衝前僉使趙宗弼不粧弓一張賜給, 敎鍊官嘉善前僉使金昌仁賞加, 前萬戶呂鉉長, 嘉善金復淳, 前萬戶趙信培, 閑良邊得運李興國朴在默, 前萬戶高光彬, 前權管金商禧, 前萬戶方景孺, 司果朴泰輝, 閑良申在文竝不粧弓一張賜給, 別武士折衝孟尙鍊, 出身朴重儉, 閑良車謹行姜道完梁兢佾全命周, 出身金商鉉, 嘉善前僉使金孝逸, 別將潘海康, 竝令各該營收用。 書吏李惟善帖加, 鄭暻信等八人, 文書直四名, 竝令該曹米布從厚題給。 京出征將官ㆍ將校ㆍ員役別單。 左司把摠尹之謙, 馬兵哨官李基鼎, 左哨官方禹鼎, 【俱以領軍將官, 五朔暴露旣多勤勞, 大陣被刦時, 極力捍禦措置得宜。】 幷加資, 中哨官孫泰永 【別遣赴陣自初効勞, 筑闉掘土, 殫誠董役, 破城之時, 亦爲先登。】 加資, 虞候除授軍官前府使趙雲衢柳文儉, 相當職調用, 武兼李存敬, 訓鍊主簿金鉉弼, 竝右職陞敍。 嘉善柳鎭明賞加, 前郞廳趙文逵, 閑良趙益豐, 別軍官嘉善洪汶績, 折衝吳聖哲金錫圭, 閑良劉運德, 竝令各軍門從自願收用。 出身兪迥源, 【以東路伏兵將破賊時, 領軍入城, 頗有斬獲。】 加資, 松營騎士百摠朴徵禧 【松營軍都領赴陣。】 賞加。 執事嘉善史誼觀 【以行軍執事擧行, 大陣被刦時, 斬賊三級。】 司果趙景麟 【以行軍執事擧行。】 劉興基 【中丸。】 竝賞加。 張重齡 【出戰時多有效勞, 不避矢石, 居前攻城, 菱鐵傷足, 幾至死境。】 邊將除授, 李東殷賞加。 金光龍, 李東煥幷令各營門收用。 松營騎士出身白有繪 【生擕履大。】 賞加。 邊將除授。 執事崔貞復尹星東, 幷令本府, 從願收用。 別武士嘉善鄭養鎭 【大陣被刦時, 擒賊一名, 五朔不解甲, 率京砲手, 逐日出沒於矢石之中, 賊徒見輒畏縮。】 賞加邊將除授。 出身李文柱 【以傳令差備擧行, 大陣被刦時, 斬賊一級。】 梅景殷 【大陣被刦時, 斬賊二級。】 朴孝建 【以傳令差備擧行, 大陣被刦時, 擒賊一名。】 金禹績 【以傳令差備, 效勞最多。】 韓黎矢 【以柴馬草次知擧行, 兼有給糧之勞。】 幷賞加。 姜繼武金昌健許橘, 竝日該營施賞。 別遣將校金命淑, 【以行營執事擧行。】 賞加。 五衛將除授。 前萬戶金啓宅 【以偵探賊情下去, 攻城諸具看役。】 賞加。 嘉義金在明 【攻城諸具看役。】 帖加。 前萬戶金仁煥 【火器領運築闉掘土, 埋藥燃火, 終始看役, 效勞最著。】 賞加, 邊將除授, 南漢執事李廷良 【火器領運木柵看役, 被賊槍死。】 其子待闋服, 本營執事卽爲差出。 別付料金篆 【以北人自願下去, 多有効勞, 自備犒牛三隻。】 邊將除授, 崔萬里安義得金鎭元全學初吳禎麟吳仲權, 【以上大陣被刦時, 合力擒二賊, 倡募義兵爲伏兵將。】 金龍孫 【以別遣將, 留嘉山陣中。】 幷賞加, 召募赴陣人司果具時芳 【以前銜將校, 下去兵營。 得三哨兵爲游擊將, 大陣被刦時, 擒一賊。】 賞加, 黃河潤黃有淸 【大陣被刦時, 合力擒三賊。】 幷令各營收用。 嘉善鄭鍒 【以平壤別軍官, 領軍赴陣。】 賞加, 禁軍吉義倜 【刦寨日, 擒偵探賊。】 相當實職調用, 閑良金宗憲 【咸從陣被刦時戰亡。】 令該曹加給恤典。 藥房李圭桓馬醫閔興大幷令各營從願收用, 書吏全尙禧帖加, 宋有恒該曹厚料陞差。 該營厚料陞差, 藥房書員朴文煥等三名, 幷令該曹, 米布題給, 訓局別破陣梁祖一 【掘土時多有効勞。】 帖加, 南漢別破陣朴仁洽姜世厚 【以上掘土時多有效勞。】 竝令本營陞校。 御營廳別破陣文卜得, 南漢別破陣李春一, 訓局車夫金樂行 【以上築闉時, 多有效勞。】 幷令該曹該府, 從厚施賞。 訓局一旗摠金哲弘, 書字的韓光鎭, 幷令該曹, 米布從厚題給, 馬兵趙啓文崔哲重梁道默李春得安光源池仁得, 幷帖加。 令該營, 分等收用。 全承任金光麗尹道昱朴春文金世郁朴景郁, 幷令該曹, 米布題給, 該營分等收用。 步軍曺允玉姜遇信李國弼金進源康致溫尹樂莘姜德龍梁海宗, 幷令該曹, 米布題給, 高景得鄭就玉權榮丁弼運黃仁泰李宗爀, 竝帖加。 禁衛營中哨軍姜文得趙彦有金重珩, 牢子趙萬得, 幷帖加。 中哨軍李光裕李宗稷金鐵柱盧聖源朴興哲魚成鱗柳枝茂朴完相韓好福, 幷令該曹米布題給, 摠戎廳塘報手金成福帖加。

平安道出征將領以下, 別單。 兵虞候陣左領將前五衛將崔鎭一 【守城時, 效勞最多, 出戰松林仍赴大陣, 始終軍務專管檢察。 募得銃手三十名破城日, 由東門入城。】 右領將前五衛將金景燁 【守城時效勞最多, 出戰松林仍赴大陣, 大小軍務與左領將, 專管檢察。】 幷賞加。 千摠崔麟趾 【松林之戰多有效勞。】 本道收用行軍執事閑良全學燁 【出戰松林ㆍ郭山, 其父爲見其子, 而往陣外, 咸從陣被刦時, 中槍死, 學燁爲復讐留陣中。】 先給其父恤典, 待闋服本道收用。 兼司僕金義權 【松林之戰多有効勞, 郭山之戰前進追賊, 防守艾島。】 丸藥監官閑良康處弘 【大陣被刦時中槍。】 幷賞加。 軍器監官閑良金致彦 【正月持各樣火器赴大陣, 火器粧放及車牌等攻城諸具監造, 掘土時晝夜看役埋藥懸火。】 賞加後, 自兵營從願收用。 咸從陣壯士軍官金啓默 【松林戰極力前進, 捉納賊僞倅履大家屬, 郭山戰與召募軍官京居全再明, 追逐賊魁齊初槍刺落馬, 而啓默亦落馬, 勢將危急再明追至援出, 協力同縳。】 京召募軍官全再明幷賞加, 邊將除授。 中軍崔致昊 【松林戰居前追賊, 郭山戰前隊力進。】 本道施賞, 殷山哨官金正玉 【郭山戰及賊刦本寨時戰功, 與文致章無異。】 壯士軍官文致章 【郭山戰董飭軍兵奮勇前進, 賊刦本陣時, 與金正玉斬賊二級, 破城日, 擒景來弟鼎來。】 領將朴季良 【松林戰前驅進戰, 郭山戰督領銃手放丸, 直前殺賊甚多, 賊徒奔潰。 賊刦本陣時, 又領銃手齊放殺賊。】 江西把摠金利仁 【松林ㆍ郭山之戰與朴季良同功。】 幷賞加。 武士李達旭, 朴尙化, 旗牌官姜右文朴濟順李元甲, 哨官姜希喆吳致賢 【以上松林戰冒死進前, 放丸殺賊, 郭山戰放丸殺賊。】 金世奉 【松林戰放丸殺賊, 賊刦本陣時, 冒死放丸。】 李奉文等九名 【松林戰放丸殺賊。】 李京云 【賊刦本陣時, 放丸殺賊。】 幷蠲役, 令本道, 米布從厚題給。 寧邊別將金再哲 【自願從征領二百官軍, 赴定州城下, 咸從陣被刦時, 冒刃衝突仍爲戰亡其子九章爲復父讐赴陣殺賊。】 令本道加給恤典, 其子九章, 待闋服另加收用。 千摠金應哲 【賊變之初, 自願出戰, 郭山之役, 極力追賊, 斬獲甚多。】 順川陣壯士軍官安亨馥 【松林戰, 冒矢石居前, 郭山戰賊徒來到, 單騎馳告仍爲進軍, 賊刦許沆寨時, 擒賊二口。】 竝賞加, 朴宗默 【松林戰, 冒矢石居前, 郭山戰擒賊金理國等六名。】 本道施賞, 邊得濂 【松林戰斬賊二級, 攻東城時力戰中矢。】 賞加。 兵營執事劉學麟 【賊刦許沆陣時, 擒賊一口。】 壯士軍官崔尙彦宋大允 【賊刦許沆陣時, 擒賊二口。】 幷本道收用, 軍卒李正蕃 【松林戰, 殺賊七名。】 金斗淸 【松林戰, 殺賊三名。】 幷蠲役, 令本道, 米布從厚題給。 陽德召募軍李成春 【隨諸景彧, 持梯踰城, 而爲賊所執, 罵賊不屈而死。】 令本道, 加給恤典, 依李長甲例, 道內邊將特贈。 肅川陣把摠金學源 【賊變之初, 先赴安州守城, 出戰松林賊刦大陣時, 擒賊一口。】 執事金泰弘 【賊變之初, 先赴安州守城, 出戰松林, 賊刦大陣時, 斬賊一級。】 竝本道收用, 壯士軍官吳致道 【自願出戰, 賊刦大陣時, 火及軍器幕, 擔出火藥及軍器, 幸免延燒。】 賞加。 捕校金允琚 【捉納逃遁賊二名。】 本道收用, 軍卒金同伊 【爲賊所捉, 乘夜逃還, 見順川軍二名爲賊所擒, 以長槍刺賊, 遂與同還。】 帖加。 軍卒林宗石朴尙番崔次三金三光 【以上賊刦大陣時被槍。】 幷蠲役, 令本道, 米布從厚題給, 座首金學一 【賊變初, 兵營徵發諸郡, 皆未能赴期, 獨學一以空官, 留鄕招集作隊七十人覓給資裝, 激勵團束, 使中軍一夜間, 領赴。 繼又抄擇民兵二百名, 進擊松林賊。】 差本道殿郞, 平壤中軍陣領將玉載赫 【賊刦咸從陣時, 領軍往救破城日, 與羅學守同斬景來。】 武士金亨祿 【破城日, 擒賊洪總角。】 幷賞加, 邊將除授。 千摠崔宗錫 【破城日, 斬納賊執事金惠哲, 擒賊魁希著姪。】 領將金進淵 【東門南門之戰, 每次居前, 大陣被刦時, 率銃手往救破城日, 擒景來母。】 幷賞加。 武士車益煥 【破城日, 擒賊楊時緯。】 邊將除授, 哨官羅學守 【破城日玉載赫斬景來時協力。】 壯士軍官李淡 【破城日, 擒賊執事李琛。】 武士金仲彬 【南門戰先進中丸。】 林宗彦金仁守 【以上東門中丸。】 旗牌官金致龍, 武士金成右, 金範 【以上南門戰中丸。】 幷賞加。 軍卒李春三 【賊刦大陣時, 擒賊三口。】 銃手皇甫喆金學奉朴文玄 【以上南門戰中丸。】 幷帖加。 嘉山陣千摠張大明 【七次出戰多有效勞。】 本道施賞。 哨官姜守光 【東門戰中丸。】 賞加, 博川陣軍官丁馥禧 【破城日, 擒賊尹彦涉。】 邊將除授, 哨官趙利郁, 金宗祿, 旗牌官李東燁 【以上七次出戰, 頗有效勞。】 幷令本道施賞, 定州陣哨官趙命珍裵行俊, 敎鍊官吳鋏, 旗牌官宋仁天, 軍官金觀海, 別軍官宋文鳳 【以上七次出戰, 多有效勞。】 軍官金德龍, 康時濟, 【以上屢次接戰, 多有効勞。】 幷令本道施賞, 朔州陣壯士軍官吉善德 【自顧出戰, 賊若不滅, 誓死無還, 北城掘土晝夜董役。】 賞加, 雲山鉛軍、邊同伊等十一名 【一名寧邊卒, 北城掘土, 晝夜不懈。】 幷蠲役, 槍軍朴之永 【持曉諭文挺身, 赴東門外賊屯處, 投傳, 北城掘地時, 中丸裏脚少不退避, 又拔城石數箇。】 壯軍姜頓金 【北城掘地時, 重被矢丸, 而終始力役。】 幷蠲役帖加。 軍牢朴枝英 【築闉時, 多有效勞。】 本道施賞。 麟山吳世權 【自願赴陣, 築闉掘土時, 效勞甚多。】 令本道從願收用, 倡義召募壯士別單。 公忠兵使金見臣 【已蒙褒賞。】 左部防禦將韓膺佐 【自從軍西林攻城時, 先登斬守門賊, 迎納官軍。】 本道邊將除授。 左先鋒將朴楨謨 【與金見臣合謀倡義, 爲見臣之副, 詐投賊魁復一處, 詳探賊情, 乘夜逃還, 北城掘土時中丸。】 賞加, 邊將除授。 後部防禦將朴聖默 【與金見臣合謀倡義, 西林戰多有效勞。】 賞加。 救應防禦將文應圭 【與金見臣合謀倡義, 隨處效勞亦多。】 本道收用, 前部防禦將金啓熀 【自初倡義, 西林戰爲前部, 最有功效, 攻定城時, 中丸。】 鐵山閑良金國樞 【以鐵民迎犒金見臣軍, 仍爲鄕導官, 恐嚇鐵山民爲賊守西林山 富城者之家屬, 使之號泣城外, 賊軍太半逃散, 實賴其功。】 領兵將嘉善前僉使洪麗一 【以義州人, 三月初自燕行回還, 自願得一隊軍赴金見臣陣, 北城掘土時, 董役破城日, 先登入城。】 竝賞加, 贈統制使許沆 【已蒙褒贈。】 義州武士林述祚 【與其弟曾鳳, 賺開龍川城門, 東林收復時, 先破城門, 迎納官軍。】 林曾鳳 【與其兄述祚, 潛入龍川城, 開門納軍。】 騎士左營將金亨倜 【自願從軍, 襲龍川時斬賊七級, 奪馬二匹, 與金亨喆, 林述祚, 先破東林城門, 迎納官軍。】 騎士金亨喆 【自願從軍, 與金亨倜、林述祚, 先破東林城門, 迎納官軍。】 竝賞加。 武士許雄金中奎金文道 【竝自願從軍, 收復龍川時, 雄斬賊二級, 中奎斬一級, 仍往宣川, 三人, 協力, 捉納賊徒金仁白等四名。】 竝本道收用ㆍ楚山府使崔信燁 【已蒙褒賞。】 義州閑良林致明梁海得 【竝隨崔信燁收復彌串ㆍ龍骨時, 效勞最多。】 幷本州收用。 三登縣令宋之廉 【已蒙褒賞。】 江界閑良桂運海 【以深河戰亡人秀芳之六代孫, 與宋之廉合謀倡義, 自初至終, 協力贊畫, 策應軍需效勞最多。 大陣被刦時, 留守本寨相機捍禦, 使敵不得入。】 邊將除授, 吉州閑良金宗郁 【來留江界聞義兵之出, 自備裝戰馬, 同赴陣前, 許沆陣被刦時, 匹馬單槍衝突賊陣, 奪賊魁總角之甲, 大陣被刦時, 捍禦賊路, 破城時, 斬賊將金致信, 射殺亦多。】 賞加, 實職調用, 江界義士別武士金大允 【以善射善放, 從宋之廉赴陣, 東城掘地, 晝夜董役。 北城潰破時, 與砲手緣梯入城, 與孫泰永開東門, 招入各陣軍。】 別武士金啓文 【自願赴陣, 二月二十五日, 輪車攻城時, 冒死先登, 中矢幾死。 破城日與宋之廉, 挺身入城, 放銃殺賊甚多。】 尹弘祚 【以善放善射, 自願赴陣戰必居前, 破賊日, 放砲殺賊甚多。】 扈一成 【自願赴陣, 率砲手五十四名, 追後來屬於宋之廉陣, 破城日, 爲之廉前鋒, 被賊火砲面皮焦爛。】 竝賞加。 昌城前權管姜仁鶴 【以丁卯殉節人子孫, 倡起一門義士四十二人, 自備糧資, 赴大陣。 大陣被刦時擒賊三名。】 兵曹六品職調用。 熙川閑良咸義衡 【召募義士五十名, 自願赴陣, 破城後斬納賊魁希著首級。】 賞加, 邊將除授。 義州行營將鄭來鴻 【以守城時執事, 詐投賊魁復一處, 詳探賊情, 隨往許沆陣中。 收復龍川, 斬三賊擒二賊, 與官軍會於宣川擒四賊, 仍赴定州陣中。 許沆陣被刦時, 擒賊二名, 許沆戰亡後, 代領其衆。】 賞加, 實職調用。 龜城嘉善前萬戶金志煥 【以兵營壯士軍官出戰, 松林、郭山戰時, 爲後營先鋒, 捉納賊酋朴聖信三父子, 召募壯丁五十三名, 爲伏兵將。】 賞加。 郭山閑良元永丁 【召募義兵四十四名, 自備糧米來, 守定州西門外嶺隘淸北賊敗之後, 與金志煥協力捉朴聖信。】 相當初仕錄用。 郭山前座首 【以義兵將, 終始在陣前後, 捉賊張弘益等十五名。】 賞加, 別軍職張洛賢 【以義州人, 在京聞變, 下去募本州義士, 又召集七義士子孫, 陣于定州城下。】 加資, 碧潼士人金慶魯 【倡率鄕武一百人赴陣, 掘土之時, 晝則赴役, 夜則留陣。】 差本道殿郞泰川義兵將白師曾, 【率義士二十人, 自備糧饌把守要路, 破城後, 斬逃遁賊八名。】 鐵山進士朴大觀 【應召倡義募士四十三人, 聚糧米十二石, 接應大陣, 仍率義兵十八名赴陣。】 竝賞加, 義州前僉使韓今琦 【以墨衰自願赴陣, 率官兵七十名, 爲領兵將。】 待闋服賞加。 安州鄕人安命烈 【賊變之初, 召募六十餘人, 自備軍糧循行一境, 不撓閭里, 捉納賊徒韓志謙等三人。】 賞加, 前掌令車敬鎭 【以宣川人, 賊變之初, 與士人金埏等, 倡率隣里百餘人, 驅逐東林賊徒, 奪取軍器及倉穀之去者, 還入庫中, 率其子孫親屬, 把守淸川江要路。】 守令除授。 泰川士人李時復 【在京聞變, 馳歸募兵, 得二十九名, 往赴陣前屢次接戰, 又鳩得錢穀, 分賙從征人家屬, 措備軍器雜物。】 差本道殿郞。 壯士軍官具采文 【以郭山人, 賊入本郡時, 聞其武藝, 威脅招致, 則不屈, 逃避賊退後, 自備糧米特來應募。 破城日, 頗有斬擒, 時年十九。】 邊將除授。 平壤閑良張雲漢 【倡募勇士宋仁哲等二十人, 自願赴陣。】 吳必鍊 【倡率同志鄭得賢等往赴大陣, 且備牛二隻醬二駄, 納于巡營中軍陣中。】 竝本道從願收用。 江西前史庫參奉李仁華 【倡募同志高擎天等, 赴咸從陣, 破城日把守城堞, 防遏遁賊。】 龍川鄕人安宅倫 【賊變之初, 赴張洛賢陣, 因病歸家, 更募本府鄕人金應勉等赴大陣。】 李志濂 【與其弟志洛及士人車信國等來赴大陣。】 定州鄕人金基英 【倡率義兵十人, 自備糗糧來赴大陣。】 幷本道施賞。 都事崔大寔, 博士朴榮顯, 【俱以定州人, 與本縣士人白慶煥。 鄭顯璞、尹宗鉉, 在京聞變相率赴陣。】 幷復職。 雲山前參奉李檝 【賊變之初, 與鄕人康百祿、李顯文, 倡募一百二十餘人, 分屯雲山、泰川、寧邊三邑要路, 捉納逃遁賊三名。】 寧邊鄕人金成鵬 【賊變之初, 倡募鄕人, 分屯嶺隘, 捉納賊軍官, 邊大憲、大賢兄弟。】 幷賞加, 平安道壯士軍官別單。 兵營壯士軍官閑良王思賢 【出戰松林, 隨往大陣, 與安亨馥往探雲興賊屯, 先報賊情。】 賞加。 直赴李宜承 【赴松林、郭山兩戰, 賊刦大陣時, 極力捍禦。】 閑良李心鎰韓正臣 【赴松林ㆍ郭山兩戰, 破賊日居前先登。】 幷本道施賞。 閑良白麟瑞 【松林、郭山俱有戰功, 擒賊麾下金理國等賊刦大陣時, 追逐殺賊。】 金洛弘 【大陣被刦時, 擒五賊。】 出身崔天鶴 【松林出戰, 隨往大陣, 爲伏兵將捉賊九名。】 幷賞加。 出身金仁德 【出戰松林赴大陣爲伏兵將。】 兼司僕具緝, 吳命恢 【出戰松林赴大陣, 爲伏兵將, 掘土看役。】 幷本道施賞。 閑良李寅協 【松林戰勝後, 往大陣爲伏兵將, 守北城要害處, 監北城掘土役, 中矢額上, 破城日扶病領兵入城。】 鄕人李健岳 【出戰郭山破城後, 還大陣, 接戰時中丸。】 出身徐百碩 【接戰時中丸。】 幷賞加。 出身金昌信 【松林戰居前追賊。】 本道施賞。 閑良李禧燁 【松林戰後隨李永植, 搗多福洞賊巢, 獲賊旗幟。】 金厚德 【隨李永植搗多福洞賊巢, 赴大陣爲伏兵將。】 幷本道收用。 出身金聲祿 【自松林赴大陣, 接戰時中矢。】 賞加。 出身張致榮 【出戰松林仍爲赴陣, 爲右營將行軍執事。】 本道施賞。 閑良邊得濂 【自松林赴大陣, 接戰時中矢, 正月先還。】 賞加。 閑良韓武興 【大陣被刦時, 斬賊一級。】 本道施賞。 前萬戶朴大旭 【伏兵將接戰時, 中丸, 三月病還。】 賞加。 出身桂應華 【北城掘役使喚。】 閑良朴致儉 【松林戰居前追逐, 北城掘地時看役。】 幷本道施賞, 平安道各邑守城防守及各樣效勞人別單。 安州守城都牌將折衝李春華 【自初至終獨守北城, 所領軍三百二十名, 連試射砲分等賞, 給出米作餠, 再饋城丁。】 道內邊將除授, 執事行首前景福將全啓璋 【守城及出戰時, 各樣需用竭力策應, 持火赴定州攻城。】 本道收用, 將校金麗興 【捉納內應賊徒李茂實, 守堞時, 以都城將擧行。】 賞加。 寧邊執事兼司僕吉尙倜 【捉納內應懷刃之賊李勱奉偵探賊情, 密告本官, 保全危城, 實多其功。】 賞加, 邊將除授。 千摠出身張文吾, 兼司僕朴處儉, 【以上挺身自願掃蕩泰川賊藪, 擒獲凶酋朴仁植等五名。】 幷賞加。 城將兼司僕崔廷珤, 【捉得泰川僞倅邊大翼斬首以納, 又捉納逃賊一名。】 道內邊將除授, 閑良尹鼎浩, 【與崔廷珤捉邊大翼。】 中軍洪致伯 【內應諸賊査捕時, 多有效勞, 收復泰川時, 亦爲設施方略。】 幷賞加。 千摠出身金文行, 【領率將士軍官高漢章等, 直搗多福洞賊巢, 收取軍器三十駄, 獲賊八名。】 道內邊將除授, 府民劉太云, 【捉納賊軍官金尙珏, 及米九石牛一隻, 領送賊陣之崔景一及賊黨切族崔益成。】 帖加。 雲山行首軍官安如坤, 執事李春栽, 【以上詗探寧邊內應賊情, 捉納賊徒羅大坤, 又手劍先斫益顯、遇鶴兩賊。】 幷賞加, 首吏金南禧, 刑吏朴思權, 【以上詗知益顯輩內應匈徒之狀, 先告雲山本官隨入寧邊鋤治內應之賊, 效勞最著。】 幷令本道, 從自原施賞。 將校徐尙坤 【見賊刺客金遇甲突入寧邊府衙奪劍縛斬。 北城掘地時, 與吉善德領鉛軍晝夜董役。】 千摠許喆, 【捉納寧邊城門懷刃埋伏之賊康守興。】 竝賞加。 義州都領將前僉使金就奎, 【聞變起復專管軍務, 其家眷爲賊所擒而不顧。 其子宅晦亦以山城中軍, 堅守效勞。】 待闋服, 五衛將除授。 前郡守張夢說 【聞變起復入守山城, 其家眷, 爲賊之所擒而不顧。】 待闋服加資。 防禦將鄭賢碩, 【使壯軍趙道憲, 搜捉賊魁文濟及其二子一妾一婦。】 賞加, 防守將崔鳳德 【使趙道憲, 捉賊魁南寬, 南赫兄弟。】 本道邊將除授, 府民趙道憲 【搜捉文濟ㆍ南赫等, 諸賊及其支屬。】 蠲役帖加。 捕校崔宗日, 金德永, 金表應, 文正燁, 【以上合力捉納西林賊將金益明, 而宗日則賊變之初從官路, 直抵兵營報賊情, 受題回還。】 幷賞加, 龜城防守將鄭夢良, 【擒納賊魁君則, 爾崙, 爾恒, 正宇, 履九,】 賞加, 中軍差定。 座首洪履警, 【自賊變之初, 詗察鎭安多有効勞, 夜則杖劍, 長立官門。】 中軍前同知趙暎, 【召募壯丁終始守城, 手自放砲, 傷逐持凶檄來到, 城外之賊酋。】 幷自本道從願施賞, 風憲洪履垕, 【見賊徒行掠府境, 招集壯軍, 斬獲賊酋韓處 坤及徒黨五名。】 賞加, 約正許溶, 【見賊徒行掠府境, 招集壯軍, 斬獲賊酋韓處坤及徒黨五名。】 帖加, 捕校金得己 【捉納賊徒張弘益等三名。】 郭山防守將金弘倜 【捉納定城潰賊十五名。】 幷令本道施賞。 鄕人金宇倜 【捉納賊軍官朴尙賢及賊魁昌始之父與子。】 幷本道邊將除授, 平壤軍器監官趙鎭範, 【捕捉火藥庫放火之賊。】 平壤陪持金福三, 金珍弘, 李初英, 以上令本道, 從願收用。 安州陪持崔宗漢, 白士正, 義州陪持金以汲, 金來聞, 幷自本道, 援例收用, 其中上京, 次數最多一人, 道內邊將除授。 平安道捐貲補餉人別單。 義州幼學洪得周, 【賊變之初, 出各穀一千二百十八石, 錢五千兩, 自願納官, 分給飢民, 城中民心, 賴以稍定, 又出錢二百兩, 分給本府守堞軍。】 初仕調用, 肅川鄕人車亨基, 【出錢二千兩, 輸納安州, 以助軍需。】 安州鄕人朴絅, 【出錢一千五百兩, 租八石, 願納本縣, 以補軍需。】 幷邊將除授, 金慶中, 【出錢一千兩, 願納安州以助軍需。】 幷差本道殿郞。 肅川進士車亨逵, 【出米十七石零, 太十三石零, 錢三十五兩零, 牛七隻, 大陣過本境, 自備迎犒。】 甑山將校桂震興 【出牛二十隻願納大陣。】 碧潼鄕人安士權 【出米一百石分兩次, 輸送金慶魯義兵陣, 送其子 仁於陣中, 使之擔當繼饋。】 朔州閑良李賢澤 【出米十五石,牛十隻, 願納本邑陣。】 安州鄕人朴龍儀 【出錢二百兩, 願納本縣, 以補軍需。】 義州幼學金弘迪, 【出錢二百兩, 分給本府守堞軍。】 安州鄕人崔錫曾, 【出錢一百五十兩願納本縣, 以補軍需。】 三登士人張公書 【出牛十隻, 願納平壤守城所。】 江西折衝朴昌謙, 【出牛十隻, 願納後營陣。】 平壤前同知安鳳翮 【出牛一隻, 酒一甕, 分饋本府倡義士, 又出錢一百五十兩。】 前五衛將吳成烈 【出錢一百五十兩】 義州閑良金廷潤 【出牛五隻ㆍ米五石, 分饋本府守堞軍, 又出牛二隻, 往饋金見臣陣。】 嘉山幼學金希權, 【出米一石牛八隻, 願納大陣。】 義州幼學文天益 【出各穀五十石九斗, 分給西六面赴陣軍兵。】 碧潼士人公顯儉 【出米四十石, 輸送本郡義兵陣。】 寧邊幼學金光倜, 【出錢二百兩, 以補義兵糧餉】 平壤折衝金麗行, 幼學宋仁哲, 【各出錢二百兩, 買牛買醬, 願納大陣及平壤陣。】 江界鄕人金陽燮, 金宗郁, 【各出錢一百兩, 宋之廉與桂運海等, 倡義赴陣時, 隨力願納, 以備糗糧器械。】 義州民兵千摠折衝金光厦 【出錢三十兩, 又自備左營將出直處所三間。】 江西進士洪龍圭, 【出錢二百七十兩】 鄭雲甲, 【出錢一百三十兩, 募得精砲二十名, 給資裝錢三十兩, 使之往赴後營陣。】 以上, 幷自本道, 從願施賞。 熙川儒鄕等, 【出錢一千兩, 本郡金麟福, 梁鴻等募兵赴陣時, 備給軍裝軍糧。】 關問本道, 從自願以報。 江界寡女劉召史 【出錢十五兩。】 崔召史, 【出錢五兩, 以上隨力備納, 以備糗糧軍械。】 幷給復。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6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