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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15권, 순조 12년 3월 13일 을유 1번째기사 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평안 감사가 순무 중군의 첩보를 아뢰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순무 중군(巡撫中軍)의 첩보(牒報)에 ‘이 달 8일 밤 4경에 적들이 서북문으로부터 몰래 나와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과 의병장 허항(許沆)의 진을 습격하여 불을 놓고 포장(鋪裝)한 것을 태우며 어지러이 찌르고 쳤는데, 때가 마침 캄캄한 밤인지라 서로 유린(蹂躪)하였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순천 부사(順天府使)의 진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와서 구원하자 적들이 비로소 퇴각해 흩어졌는데, 혹은 성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함종 부사의 군사 중에 죽은 자는 70명이고, 다친 자는 1백 37명이었으며, 적도로서 아군에 죽은 자는 46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주 군관(義州軍官) 정내홍(鄭來鴻) 등과 곽산 장교(郭山將校) 김은성(金殷成)이 적군 고종현(高宗賢) 등 4명을 잡아 와서 바쳤으므로, 적정을 캐물어 보았더니 ‘적의 양식이 거의 다 떨어져가는 판이라 만사 일생(萬死一生)의 책으로 적장 홍경래(洪景來)는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성가퀴를 파수(把守)하고 우군칙(禹君則)·홍총각(洪總角) 등은 장건(壯健)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함종 부사의 진부터 시살(廝殺)하고 이어 차례로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라고 하길래 즉시 모두 효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집사(執事) 이정량(李廷良)은 중상을 입고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병사(兵使)의 첩보를 받아보니, ‘초산(楚山)영변(寧邊)의 총수(銃手) 등이 적군 10여 명을 총살하였고, 의병 진 중에서 창에 맞아 죽은 자가 3명, 다친 자가 3명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4면
  • 【분류】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乙酉/平安監司啓言: "巡撫中軍牒報, ‘今月初八日夜四更, 賊自西北門, 潛出襲擊, 咸從府使尹郁烈, 義兵將許沆陣放火燒舖, 亂刺亂擊, 時値黑夜, 自相蹂躪。 至黎明, 順川陣發兵來援, 賊始退散, 或入城中, 或逃之四, 咸從軍致死者七十名, 致傷者一百三十七名, 賊徒之爲我軍所殺者, 四十六名。 義州軍官鄭來鴻等, 郭山將校全殷成, 生擒賊軍高宗賢等四名來納, 盤覈賊情, 則賊糧垂乏, 出萬死一生之計, 賊將洪景來, 率軍千餘名, 把守城牒, 禹君則, 洪總角等, 領壯健五百餘名, 先從咸從陣厮殺, 仍欲次第潰出’ 云, 幷梟首。 ‘南漢執事李廷良, 中傷致死。’ 云。 又接兵使牒報, 「楚山寧邊銃手等, 銃殺賊軍十餘名, 義兵陣中槍死者三名, 致傷者三名。」 云。"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4면
    • 【분류】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