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병사가 홍경래·김창시 등 적도의 동태에 대해 아뢰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적도 7명을 잡았는데, 5명은 자백을 받아 효수(梟首)하였습니다. 또 송림(松林)의 백성 한지겸(韓志謙)을 잡아 조사했더니, 그 공초(供招)에 ‘적당(賊黨) 3백여 명이 이번 24일 밤에 이 동리로 와서 점거했고, 자칭 선봉이라는 자는 갑옷을 입고 장검을 지니고 말을 탔는데, 곧 곽산(郭山)에 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홍가(洪哥)였으며, 26일 저녁에는 적괴(賊魁)로서 이른바 대원수(大元帥)라는 홍경래(洪景來)와 부원수(副元帥) 김창시(金昌始)·모사(謀士) 우군칙(禹君則)이 5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복동(多福洞)에서 와 모였습니다. 우군칙은 본디 요술로 사람을 현혹시켰는데, 김창시와 더불어 말하기를, 「대원수 홍경래의 다섯 형제는 모두 장재(將才)가 있는데, 두 사람은 선천(宣川)에서, 두 사람은 북도(北道)에서 기병(起兵)한다면 안주(安州)·평양(平壤)을 차례로 공격해 취할 수 있을 것이고, 또 호서(湖西)에서 기병하여 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천 가야동(伽倻洞)의 정가(鄭哥)는 다섯 살 때 해도(海島)에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능히 칼을 쓸 줄 아는데다 큰 뜻이 있어 망명한 자를 부르고 반도(叛徒)들을 받아들여 거의 수만 명에 이르는지라, 임신년016) 3월에 북도에서 서울로 들어가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적괴 홍경래는 선봉 홍가와 더불어 모두 용력(勇力)이 있었습니다. 중화(中和)에 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윤가(尹哥)는 후군장(後軍將)이 되었고, 태천(泰川)에 사는 변대헌(邊大憲)의 세 종형제는 좌우 익장(翼將)이 되었습니다. 가산(嘉山)의 장교·아전과 추도(楸島)의 읍속(邑屬)들은 나루의 사람들과 더불어 무수히 정주(定州)의 재궁(齋宮)에 들어갔으며, 김가(金哥)란 향인(鄕人) 또한 많이 와서 편들었습니다. 당초에 모반을 꾸미고 군졸을 기른 것은 다복동의 이희저(李禧著)가 창언한 말에서 나온 것이고, 금을 캔다고 하여 유민(流民)을 모집한 것은 나루터의 백성인 김정우(金鼎禹)의 흉격(凶檄)에서 비롯된 것이니, 모두 김창시가 꾸며낸 것입니다. 무기는 태천과 박천에 실어다 놓았고, 군량은 갈마창(渴馬倉)과 고성진(古城鎭)에서 가져다 먹는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비록 허황함이 많으나 죄수의 공초에 관계되는지라 이에 논열(論列)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군이 나루터에 바싹 진군하자, 박천 고을 안에 남아 있던 적들이 또한 도망해 흩어졌습니다. 해당 군수인 임성고(任聖皋)는 오랫동안 잡혀서 갇혀 있었는데, 감시가 매우 엄했던터라 이제야 비로소 탈출하여 당일로 영하(營下)에 왔다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면
- 【분류】변란-민란(民亂)
- [註 016]임신년 : 1812 순조 12년.
○平安兵使啓言: "賊徒七名捉來, 五名則捧遲晩梟首, 又捉松林民韓志謙査問, 則所供內 ‘賊黨三百餘名, 今二十四日夜, 來據本里, 自稱先鋒者, 着甲冑持長劎, 乘駿馬, 乃 是郭山居名不知洪哥, 二十六日夕, 賊魁所謂大元帥洪景來ㆍ副元帥金昌始, 謀士禹君則, 率五百餘兵, 自多福洞來會。 而禹君則本以妖術惑人, 與金昌始爲言曰, 「大元帥洪景來五兄弟, 皆有將才, 二人自宣川起兵, 二人自北道起兵, 安州ㆍ平壤, 可以次第攻取, 湖西又有起兵以應者, 宣川 伽倻洞 鄭哥, 五歲, 自海島入中國, 能使劎, 有大志, 招亡納叛, 幾至累萬, 壬申三月, 自北道入京。」 云。 賊魁洪景來, 與先鋒洪哥, 俱有勇力。 中和居名不知尹哥, 爲後軍將, 泰川居邊大憲, 三從兄弟, 爲左右翼將。 嘉山校吏與楸島之民博川邑屬, 與津頭之人, 無數投入定州 齋宮, 金哥鄕人, 亦多來附。 當初造謀養兵, 出於多福洞 李禧著倡說, 採金募集流民, 由於津頭民金鼎禹 〔凶〕 檄, 則皆是金昌始所作。 器械則輸致於泰川ㆍ博川, 軍糧則取食於渴馬倉 古城鎭。’ 其說雖多虛謊, 係是囚供, 玆以論列。 大軍之進薄津頭也, 博川邑內留接之賊, 亦爲逃散。 該郡守任聖皐, 久被拘囚, 防守甚緊, 今始脫出, 當日來到營下云。"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2면
- 【분류】변란-민란(民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