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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14권, 순조 11년 3월 25일 계유 1번째기사 1811년 청 가경(嘉慶) 16년

소대하여 명나라와 한나라의 정치에 대한 비교를 행하다

소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의 정치를 한(漢)나라의 정치와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자, 참찬관(參贊官) 민기현(閔耆顯)이 아뢰기를,

"한나라 고제(高帝)가 창업(創業)한 초기에는 법(法)을 삼장(三章)으로 간략하게 하였으므로 규모(規模)가 관대하고 풍류가 독후(篤厚)하였으니, 서한(西漢)의 정치는 후세에서 미치기 어려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의 문물은 찬연히 구비되었으니 성당(盛唐) 때와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그리고 문식(文飾)과 질박(質朴)을 가지고 논한다면 질박 쪽에 가까운가? 문식 쪽에 가까운가?"

하자, 민기현이 아뢰기를,

"과연 문식 쪽이 우세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성시(盛時)에는 문식과 질박이 중도(中道)를 얻었었지만, 한·당·송·명은 진실로 삼대의 다스림에다 비교하기 어렵다. 그리고 당나라 조정으로 말하자면 태종(太宗) 뒤로는 모두 볼 만한 것이 없다."

하자, 민기현이 아뢰기를,

"당나라 태종이 영웅 호걸의 군주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룰 수는 있었습니다만, 단지 인(仁)과 의(義)를 빌렸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선제(宣帝)가 오로지 이치(吏治)를 숭상하였지만, 끝내 삼대의 정치에는 미칠 수 없었는데 이는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오패(五覇)054) 와 비교한다면 조금 낫겠는가?"

하자, 민기현이 아뢰기를,

"한나라 선제의 다스림은 명분과 실제를 종합하여 자세히 밝혔으니, 한대의 훌륭한 관리가 이때에 융성하였습니다."

하였다.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깎은 듯하고 다듬은 듯하며 쪼은 듯하고 갈은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사람은 깎은 듯이 다듬은 듯이 쪼은 듯이 갈은 듯이 한 공이 있은 연후에야 현명하게 자신을 보전하여 덕에 나아가고 업을 닦을 수 있다.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위에 있는 인군(人君)에 있어서이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모든 경연(經筵)과 소대(召對)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날에 행하되, 혹시라도 탈품(頉稟)하여 정지해야 할 경우는 즉시 옥서(玉署)055) 에서 고사(故事) 두서너 조목을 진달하여 강연(講筵)을 대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註 054]
    오패(五覇) : 춘추 시대(春秋時代) 제후(諸侯)의 맹주(盟主) 다섯 사람. 곧 제 환공(齊桓公)·진 문공(晉文公)·진 목공(秦穆公)·송 양공(宋襄公)·초 장왕(楚莊王).
  • [註 055]
    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癸酉/召對。 上曰: "皇之治, 比諸治, 則果何如也?" 參贊官閔耆顯曰: " 高帝創業之初, 約法三章, 規模寬大, 風流篤厚, 西漢之治, 後世難及矣。" 上曰: "皇文物, 燦然具備, 比諸盛之時, 果何如也? 論以文質, 則近於質邊乎? 文邊乎?" 耆顯曰: "果爲文勝矣。" 上曰: "三代盛時, 文質得中, 而, 固難比擬於三代之治。 且以朝言之, 太宗之後, 皆無足觀矣。" 耆顯曰: "太宗以英雄豪傑之主, 能做貞觀之治, 而但假仁借義而已矣。" 上曰: "宣帝, 專尙吏治, 而終不可跂及於三代之治何也? 較諸五覇, 則差勝歟?" 耆顯曰: "宣帝之治, 綜核名實, 世良吏, 於斯爲盛矣。" 敎于玉堂諸臣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人有切磋琢磨之功, 然後可以明哲保身, 進德修業。 雖韋布之士, 尙猶然矣, 況在上之人君乎? 自今以後, 凡於經筵召對, 行於無故日, 而或有頉稟停止者, 卽自玉署, 敷陳故事數條, 以代講筵。"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