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서·호서 구관 당상 및 진휼 당상에게 양서의 곡식 이전 문제를 물어보다
관서의 구관 당상(句管堂上) 김희순(金羲淳), 호서의 구관 당상 민기현(閔耆顯), 진휼 당상(賑恤堂上) 박종경(朴宗慶)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곡식을 옮기는 일로 양서(兩西)025) 지방에 조치한 것이 아직껏 소식이 없다. 조령(朝令)026) 을 작정한 후에 남쪽 백성들이 받아 먹기를 기다리고 있어 한 시가 급한데 아직껏 운반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희순이 말하기를,
"그동안 왕복하면서 조치하느라 늦어지고 있습니다. 관서·해서를 물론하고 만약 반드시 곡물로 옮기고자 한다면, 모두 때가 늦어 제때에 사용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고, 박종경이 말하기를,
"전 해백(海伯)이 연중(筵中)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어제 들어서 알았습니다. 무오년027) 호서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역시 해서에서 이전(移轉)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복시(司僕寺)와 호조에서 전변(錢邊)028) 으로 추이(推移)하여 호서에 획급(劃給)하고, 해서의 모조(耗條)로 해마다 남는 것을 취해서 유통(流通)해서 갚았는데, 이는 환침곡(還寢穀) 명목이었습니다. 병인년029) 에 신이 선혜청 당상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 각사(各司)의 책응(策應)이 점차 부족하기에 환침조(還寢條)를 청해 상평곡(常平穀)의 숫자를 보충했습니다. 또 작년에는 총융청의 지방(支放)030) 에 대해 또 연석에서 여쭈어, 획부(劃付)하였다가 연한을 정해 가져다 쓰게끔 해서 양쪽이 다 편리할 계책을 삼았었습니다. 전 해백이 아뢴 뜻은 비록 무오년의 예를 인용하였으나 지금은 경사(京司)의 경용(經用)이 전에 비해서 줄어들었고, 또 근년 이래로 응당 들어와야 할 일정한 부세 또한 많이 견감했기 때문에 실로 돈을 떼어줄 방도가 없습니다."
하자, 김희순이 말하기를,
"전 해백이 말하기를, ‘경사(京司)에서 어떤 종류의 돈이든 먼저 호서에 주고, 해서에서 뽑아내 옮겨 조치한 조(條)를 매년 모곡(耗穀)을 받아 본자(本資)를 갚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은 겉으로 언뜻 보기에는 비록 편리할 듯하나 지금의 사세를 생각하면 또한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선혜청 당상의 말은 오로지 경용(經用)을 잇대기가 어려워서 한 말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사의 경용이 비록 부족하다고는 하나 양호(兩湖)의 민정(民情)도 일시에 민박(悶迫)하다. 경중(京中)031) 에서 먼저 어떤 종류의 돈이든 즉시 추이(推移)하여 내려 보낸다면 앞으로 조치해 갚는 것은 해서에서 좋은 방안에 따라 할 것이다."
하였다. 박종경이 말하기를,
"새 해백이 내려갈 때에 말하기를, ‘본도(本道)의 전변(錢邊) 가운데서 힘이 닿는 대로 변통하여 모조(某條)를 조치하겠다.’고 하였으니, 그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려 그가 어떻게 조치하였는가를 살핀 연후에 비로소 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서는 비록 돈으로 준비할 도리가 있다고는 하나 이환(移換)해 보내는 때에 저절로 지체될 것이고, 또 그 보고가 오기를 기다려서 조치하고자 한다면 날짜가 또 늦어지게 된다. 도신(道臣)이 이미 장계로 요청하였고 조가(朝家)에서 또 시행하라고 허락하였으므로 받아 먹기를 기다리는 허다한 무리들이 밤낮으로 갈망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돈이든 곡물이든 간에 결정된 것이 없다. 백성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불쌍하여 거의 침식이 불안할 정도이다. 국체(國體)로 헤아려 보아도 어찌 구차스럽지 않겠는가? 나간 후에 대신과 상의해서 조치하여 즉시 내려 보내야 한다."
하였다. 박종경이 말하기를,
"많은 양의 돈을 사세상 실어보내기 어렵고 또 지체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각 해당 도(道)에서 상납하는 결전(結錢) 가운데서 먼저 가져다 사용하라고 해당 도(道)에 공문을 보내 유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양남(兩南)032) 의 곡식은 또 춘궁기(春窮期)를 당해서 공사(公私)간에 바닥이 났으므로, 지금 비록 돈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주의 곡물을 가져오게 하면 사들여서 급함을 구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로(海路)로 옮기는 데에 폐단은 없겠는가?"
하자, 박종경이 말하기를,
"제주의 관곡(官穀) 1만 석을 이미 공문을 보내 가져오게 하여 호남의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곡(私穀)을 많이 쌓아 놓지 못하도록 조정에서 금하고 있으므로 바다를 건너오지 못한다고 하니, 지금 만약 통하게 한다면 반드시 호남 백성들에게 크게 이로울 것입니다. 도하(都下)033) 의 시가(市價)가 세전(歲前)에 비해 조금 감해졌으니, 이는 필시 주금(酒禁)의 효과이고, 또 강상(江上)의 미상(米商)들이 호서의 연안에서 압류(押留)될까 겁을 먹고 처음부터 실어보내지 않은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중(筵中)에서 거론된 이야기를 각별히 공문으로 보내 신칙하여 압류하지 못하게 하고, 왕래하면서 매매(買賣)하도록 허락하여 이익이 고루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김희순이 말하기를,
"해서 역시 사상(私商)을 금하고 있다 하니, 일체로 공문을 보내 신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남에서 상납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 대동목(大同木)034) 인가? 작년의 목화(木花) 농사가 또 매우 흉작이었다고 하는데, 저 남쪽 백성들을 생각하면 이처럼 밥을 먹지 못해 허둥지둥할 때에 장차 어떻게 모아서 마련해 납부하겠는가? 금년 호남의 대동목은 모두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게 한다면, 혹 백성들의 곤란을 조금 늦춰 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겠는가?"
하자, 박종경이 말하기를,
"삼남(三南)에서 목면으로 상납하는 것 역시 많다고 합니다. 선혜청의 대동(大同), 세 영(營)의 군포(軍布), 병조의 기번(騎番) 및 각사(各司)의 허다한 응납(應納)이 모두 민간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데, 지금 흉년을 당해서 부황(浮黃)이 나고 있는 때에 손을 써 마련할 방도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신 돈으로 받아들이라는 하교는 실로 남쪽 백성들의 다급함을 구제해 주는 은택입니다. 다만 근래에 호조와 선혜청의 저축된 무명이 점차 소모되어 거의 잇대 쓰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것이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지난번 위태조(位太條)를 대신 돈으로 받아들이라는 하교 또한 진념(軫念)하는 데서 나온 것인데, 그때에 호남 도백의 글을 보건대, ‘공문이 한번 도착하자 우레처럼 환호성이 일어났다.’라고 하였었습니다.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대동이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은전(恩典)은 모조리 쓸 수가 없고 민읍(民邑)의 소망 역시 허둥지둥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구별하는 정사가 있어야만 지나치게 하는 근심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희순은 말하기를,
"저 호남 일도를 생각하면 이처럼 전에 없던 큰 흉년을 만나 허둥지둥하는 형상이 조석을 보존하지 못할 듯합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 편안하게 품어주시는 정책을 진념하시어 위로하는 유시를 선포하시고, 참으로 아랫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방책이 있으면 대뜸 위의 것을 덜어주는 덕정을 쓰시었습니다. 명절에 바치는 물품을 특명으로 중지하고 전세(田稅) 상부(常賦)를 등급을 나누어 견감하였습니다. 환곡(還穀)은 연한을 정해 뒤로 물리고, 옛날의 포흠(逋欠)을 전부 감면해 주셨으며, 또 뒤따라 굶주린 백성을 뽑아 구호하고 곡식을 옮겨 잇대셨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또 대동(大同)을 대신 돈으로 받아들이라고 하교하심으로써 저 곧 죽어가는 불쌍한 백성들을 전후로 무휼한 혜택이 여러모로 힘을 다 기울였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조정에서 비록 한때를 진념한 혜택이기는 하나 은전(恩典)은 마땅히 구별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더욱 심한 고을의 다음과 조금 실(實)한 고을을 분등(分等)해 조치해야만 비로소 실제의 혜택이 밑에까지 미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민기현(閔耆顯)은 말하기를,
"양호(兩湖)의 민정을 이처럼 진념하시니, 덕의(德意)가 넘쳐흘러 매우 감탄되므로 백성들이 춤을 추며 기뻐할 것으로 여깁니다. 호서의 농사는 호남에 비해서 조금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우연(右沿)의 목화 농사에 있어서는 흉작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니, 이 역시 하나로 보는 혜택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바가 좋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 선조(先朝)에서는 만약 흉년을 만나면 혹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차출해 보내기도 하고, 또 별도로 수의(繡衣)035) 를 보내 근만(勤慢)과 장부(臧否)를 살피게 하였으므로, 실제의 혜택이 참으로 적지 않았다. 감진 어사와 암행 어사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은가?"
하니, 박종경이 말하기를,
"친히 진자(賑資)를 감독하고 수령을 독책하기에는 감진 어사가 나으나 이때에는 주전(廚傳)036)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암행 어사에 있어서는 능부(能否)를 출척(黜陟)하고 염탐(廉貪)을 안찰(按察)하고 또 따라서는 감진(監賑)을 겸하기도 하니, 감진 어사가 일거 양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스스로 폐단을 지어 도리어 열읍(列邑)에서 계속 소요를 일으키는 단서가 되니, 이것이 참으로 민망스러운 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해가 되어 달이 이미 바뀌었는데 좌규(左揆)037) 의 병환이 지금까지 차도가 없다. 지금 묘당의 일이 적체되고 백성들의 근심이 눈에 가득한데 곡식을 옮겨 구황하는 것은 오히려 두서가 없으니, 어찌 매우 민망하지 않겠는가? 또 단규(端揆)038) 만 홀로 오랫동안 수고하였으니, 어찌 조정의 체면이 구차하지 않은가? 지금은 봄 날씨가 점차 따뜻해져 묵은 병이 쉽게 회복될 것이니, 가까운 시일 안에 애써 일어나 조정에 나와 일을 보아 내가 조석으로 갈망하는 뜻에 부응하라고 하번(下番) 한림(翰林)이 가서 좌상에게 유시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50면
- 【분류】재정(財政) / 사법(司法)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 / 상업(商業)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25]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 [註 026]
조령(朝令) : 조정의 명령.- [註 027]
무오년 : 1798 정조 22년.- [註 028]
전변(錢邊) : 돈의 이자(利子).- [註 029]
병인년 : 1806 순조 6년.- [註 030]
지방(支放) : 관아의 일꾼들에게 봉급을 내어줌.- [註 031]
경중(京中) : 서울.- [註 032]
양남(兩南) : 전라도와 경상도.- [註 033]
도하(都下) : 서울.- [註 034]
대동목(大同木) : 대동법(大同法)에 의하여 물리어 거두는 무명. 다섯 새로, 길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서른 다섯 자임.- [註 035]
수의(繡衣) : 암행 어사.- [註 036]
주전(廚傳) : 주(廚)는 음식(飮食), 전(傳)은 거마(車馬)의 뜻.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經由)하는 역참(驛站)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 [註 037]
좌규(左揆) : 좌의정.- [註 038]
단규(端揆) : 우의정.○丙戌/召見關西句管堂上金羲淳、湖西句管堂上閔耆顯、賑恤堂上朴宗慶。 上曰: "向來移粟事, 兩西之區劃者, 尙無動靜。 朝令酌定之後, 南民待哺, 一時爲急, 而尙無移運, 何也?" 羲淳曰: "其間往復之故, 尙致遷就。 而無論關西、海西, 若必欲以穀物移屬, 則皆致晩時, 恐不得及期用之矣。" 宗慶曰: "前海伯筵中酬酢, 昨果得聞。 而戊午湖西判歉之時, 亦有海西移轉之擧。 而自司僕、戶曹, 推移錢邊, 劃給湖西, 以海西耗條, 年年取剩, 流伊還報, 此是還寢名色也。 丙寅臣待罪惠堂時, 以各司策應之漸至匱乏, 請得還寢條, 以補常平穀數。 且於昨年以摠廳支放, 又爲筵稟劃付, 限年取用, 以爲兩便之計。 而前海伯所奏之意, 雖引戊午之例, 而今則京司經用, 比前耗縮, 且近年以來, 常賦應入, 亦多蠲減, 故錢條推移, 實無可擬之道矣。" 羲淳曰: "前海伯則以爲, ‘自京司, 推移某樣錢, 先給湖西, 自海西抽出移劃條, 每年取耗還本’ 云。 而此事外面驟看, 則雖似輕便, 顧今事勢, 亦自不易。 故惠堂之言, 則專爲經用之難繼矣。" 上曰: "京司經用, 雖曰不足, 兩湖民情, 一時悶迫。 自京中, 先以某樣錢, 卽爲推移下送, 則來頭劃報, 自有海西之從長區處矣。" 宗慶曰: "新海伯下往時以爲, ‘本道錢邊中, 當隨力變通, 某條區處’ 云, 待其報來, 觀其如何措置, 然後始可爲之矣。" 上曰: "海西雖有錢條辦備之道, 移換送去之際, 自可遲滯, 且待其報來, 始欲區處, 則日字又致稽緩。 道臣旣狀請, 朝家又許施許, 多待哺之類, 日夕渴望之餘, 尙無錢穀間發落。 言念民事, 萬萬矜惻, 殆乎寢食不安。 揆以國體, 寧不苟艱乎? 出去後, 與大臣商議區劃, 卽速下送, 可也。" 宗慶曰: "許多錢條, 勢難駄送, 且恐遲滯。 自各該道, 就其上納結錢中, 先爲取用事, 關諭該道。 而兩南之穀, 又當窮春, 公私罄竭, 今雖有錢, 必無以爲食。 濟州之穀, 使之出來, 則自可貿取救急矣。" 上曰: "海路移運, 能無弊端乎?" 宗慶曰: "濟州官穀萬石, 己爲發關出來, 以補湖南賑資。 而聞私穀多峙, 拘於朝禁, 不得越海, 今若通之, 則必大利於湖民矣。 都下市直, 比歲前稍減, 此必是酒禁之效, 而且是江上米商, 㤼於湖沿之執留, 初不駄往之致也。" 上曰: "以筵中酬酢, 各別關飭, 使之勿爲執留, 許令往來買賣, 以爲均利之地, 可也。" 羲淳曰: "海西亦禁私商云, 一體關飭, 好矣。" 上曰: "湖南之難於上納者, 是大同木邊乎? 昨年緜農, 又極歉荒云, 念彼南民, 當此艱食遑遑之時, 將何以拮据備納耶? 今年湖南大同木, 竝令代錢捧納, 則庶或爲紓民困之一端耶?" 宗慶曰: "三南之以木上納者, 亦云夥然。 惠廳之大同、三營之軍布、兵曹之騎番及各司許多應納, 皆出於民間, 當今饑荒顑頷之際, 萬無措手辦備之道。 而今此代捧之下敎, 實爲南民救涸之惠。 第近來戶、惠之木儲, 漸至苟艱, 殆難繼用, 是甚悶然矣。 向來位太條代錢之敎, 亦出於軫念, 而伊時見湖南伯書, 則以爲, ‘關文一到, 歎聲如雷。’ 此猶如是, 況大同乎? 然國家之恩典, 不可盡用, 民邑之企望, 亦難曲副。 但有區別之政, 然後可免濫觴之患矣。" 羲淳曰: "念彼湖南一道, 遭此無前大侵, 遑遑之狀, 若不保朝夕。 而惟我聖上, 克軫懷綏之策, 頻宣慰諭之音, 苟有益下之方, 輒用損上之德。 節膳供獻之特命停捧, 田稅常賦之分等蠲減。 還穀之限年停退, 舊逋之全數蕩滌, 而又從以抄饑而賑之, 移粟而繼之。 及夫今日, 又有大同代錢之敎, 哀彼涸轍之命, 措諸袵席之安, 前後撫恤之澤, 可謂靡不用極矣。 第朝家雖軫一時之惠, 而恩典當有區別之道。 就其尤甚之次及稍實之邑, 分等區劃, 然後始爲實惠下究之道矣。" 耆顯曰: "兩湖民情, 如是軫念, 德意藹然, 極庸感歎, 想當蹈舞歡欣。 而湖西年事, 比諸湖南, 足可謂稍勝, 而至右沿綿農, 不免判歉云, 此亦合有一視之澤矣。" 上曰: "所言好矣。" 又敎曰: "在昔先朝, 若値歉歲, 則或差送監賑御史, 又別遣繡衣, 以察勤慢藏否, 實惠誠不少。 而蓋監賑與暗行, 何者爲勝耶?" 宗慶曰: "親監賑資, 督責守令, 監賑爲勝, 而此時廚傳, 亦不可不念。 至於暗行, 則黜陟能否, 按察廉貪, 又從而兼爲, 監賑可謂兩得。 而挽近以來, 自致有弊, 反爲列邑繹騷之端, 此誠悶然處矣。" 上曰: "歲新而月已易矣, 左揆愼節, 至今進退。 見今廟務積滯, 民憂溢目, 移粟救荒, 尙無頭緖, 寧不切悶? 且端揆之獨賢, 亦云久矣, 朝體豈不苟艱? 今則春晷漸和, 宿疴易蘇, 須圖從近强起, 造朝視事, 以副予朝夕懸望之意, 下番翰林, 往諭於左相。"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50면
- 【분류】재정(財政) / 사법(司法)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 / 상업(商業)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