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목사 송지겸 등이 흉년의 실상을 연명하여 상소한 내용
광주 목사(光州牧使) 송지렴(宋知㾾), 순천 부사(順天府使) 조진화(趙晉和), 무안 현감(務安縣監) 서준보(徐俊輔), 무장 현감(茂長縣監) 이윤겸(李允謙), 함평 현감(咸平縣監) 이조(李潮), 부안 현감(扶安縣監) 유원명(柳遠鳴)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근밀(近密)한 반열에서 나와 외람되이 하읍(下邑)을 맡았습니다. 진실로 아뢰어야 할 만한 백성의 고통이 있으면 평상시에도 으레 일에 따라 조목조목 진달해야 하는데, 더구나 이렇게 큰 흉년이 들어서 천리(千里)가 적지(赤地)가 되어 만백성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였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런 때에 한번 유민(流民)들의 그림을 만리(萬里)나 떨어진 계정(階庭) 앞에서 올리지 않는다면, 일로(一路)의 신음하는 정상을 전하께서 어떻게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호남의 기근은 을·병년(乙丙年)이 가장 극심했다고 일컫고 있는데, 고로(故老)들에게 들으니 모두들 금년의 흉황(凶荒)이 을병년보다 더 극심한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진실로 1백년 동안 없었던 것입니다. 남토(南土)의 경작(耕作)은 오로지 물갈이[水耨]를 숭상하고 있는데, 한전(旱田)을 뒤집어서 가는 것도 또한 물을 끌어대는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는 한전(旱田)·수전(水田)이 모두 이앙(移秧)을 하지 못했으니, 더구나 한전을 가는 것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른바 이미 이앙한 것과 밭에 심은 각종 곡식도 계속되는 가뭄에 시달리고, 거듭되는 한재(旱災)와 서리를 만나 가을이 된 뒤에는 장포(場圃)가 전부 텅 비어 버렸으니,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도내(道內)의 진폐(陳廢)된 전지(田地)가 거의 10분의 7, 8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한전(旱田)은 으레껏 표재(俵災)에 넣지 않고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또한 어떻게 한결같이 전체가 흉년임을 갖추어 알 수 있겠습니까? 백성 가운데 항산(恒産)이 있는 자가 지극히 적은데 지금은 항산이 있는 집도 한결같이 부황(浮黃)이 들어 조석(朝夕)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이니, 더구나 항산이 없는 백성들이야 어떻게 내년까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나물을 베어 먹고 풀부리를 캐어 먹으면서 시각(時刻)을 연장시켰습니다만, 지금은 정리(井里)를 떠나 각기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남편은 아내와 결별하였으므로 길바닥에는 쓰러져 죽은 시체가 잇따르고, 떠도는 걸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흩어져 사방(四方)으로 갈 것입니다만, 사경(四境) 밖도 기근이 똑같으니 또한 어딜 간들 잠시나마 목숨을 연장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원야(原野)를 맴돌면서 아득히 갈 곳이 없으니, 그 경색(景色)이 참담하여 인심이 당황하고 겁에 질려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주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쪽을 돌아보며 애태우시던 끝에 먼저 묘당의 건의에 따라 신속히 우휼(優恤)하는 은전(恩典)을 내리셨고, 이어서 도신(道臣)의 소계(疏啓)에 따라 또 견감시키고 정퇴시키는 은택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대파(代播)하는 경우에는 면세(免稅)를 허락하고 진헌(進獻)에 대해서는 정봉(停封)하게 하였는가 하면, 9만의 재총(災摠)에 대해서는 특명(特命)으로 준표(準俵)하게 하고 환향(還餉)·신포(身布)도 등급을 나누어 정퇴하게 하였으니, 위에 것을 얻어서 아래에 보태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신 등은 삼가 이미 조령(朝令)을 받들어 덕의(德意)를 선양(宣揚)하였습니다. 이렇게 황황하여 생존하기 어려운 백성으로서 지금 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있습니다만, 환곡(還穀)은 곧 세초(歲初)에 진대(賑貸)할 자본곡이어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신포(身布)는 바로 경외(京外)에서 지방(支放)할 수요(需要)에 들어 있는 것이어서 기한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정퇴시킨 이외에 숫자는 기일 내에 준봉(準捧)하는 것이 신 등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사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주광(黈纊)176) 아래 한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대저 금년에는 재감(災減)한 것 이외에 전도(全道)의 답결(畓結)이 겨우 5만 결(結)입니다. 이런 5만의 총결(摠結)을 50여 주(州)에 나누어 분배(分配)하면, 1파(把)·1속(束)이 모두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고 해도 평년(平年)의 가을에 견주어 본다면 감축(減縮)된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5만의 실결(實結)이란 것도 여름서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겪지 않은 재앙이 없어서, 벌레·서리·바람·홍수를 당하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각 고을에서 실결을 잡은 것도 이것이 논에서 말라 죽는 벼 이삭이 아니면 곧 줄기에 달라붙어 있는 쭉정이 낱알인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미루어 본다면, 이른바 답결(畓結)이 5만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명색만 있을뿐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서속(黍粟)과 잡종(雜種)에 관한 밭의 결총(結摠)에 이르러서는 원래가 적은데다가 모두 손상(損傷)을 입어서 전혀 먹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수병(穗秉)의 허비가 이미 이른 가을에 먼저 나버려서 병앵(甁罌)의 저축이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없게 되어 지금은 이미 힘이 고갈되었고 죽음이 박두하였습니다. 비록 가죽을 벗겨 내고 뼛골을 빻는다고 해도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을 실로 판출할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말이 모두들 ‘조가(朝家)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살리기 위해서 견감(蠲減)시킨 것이 이미 많지 않았는가? 오늘날 창고에 실어다 바치는 것이 내년 봄에 대여(貸與)받을 수 있는 자본이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목전에 목숨을 연명할 수가 없는데 앞으로 어느 겨를에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관(官)에서 급하게 독책(督責)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사명(死命)을 재촉하는 것이 될 뿐이다.’ 하니, 그 말이 매우 가긍하고 측은합니다. 신 등이 밖으로는 영곤(營閫)의 책칙(責飭)에 핍박되고, 안으로는 우벌(郵罰)이 목전에 당한 것이 안타까워서 온갖 방법을 다하여 독책하면서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려고 합니다만, 누렇게 부황이 든 몸에 마구 매질을 가하고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집에 닭과 개도 보전할 수 없을 정도로 다그치는 것이 어찌 인인 군자(仁人君子)가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제 신 등이 담당하고 있는 고을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내년의 환진(還賑)에 대한 접제(接濟)는 모두 새로 받아들이는 환향(還餉)에 의존하고 있으니, 많게는 1만 석, 작게는 수천 수백 석을 뒤따라 거두어 들여야 한다는 것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고을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또한 이로 미루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연해(沿海) 각처는 대개 우심(尤甚)한 고을이어서 곡부(穀簿)에는 나누어 줄 것이 없는 데가 많고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도 대개는 고갈되어버렸으니, 만일 새로 받아들이는 것을 기다려 장차 진구(賑救)할 것을 의논하려 한다면 각 고을의 기민(饑民)들이 새끼줄에 꿰어 가게에 걸려 있는 고어(枯魚)의 형국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호남의 우심한 34개의 고을에 대해 주야로 헤아려 보았습니다만 구제할 수 있는 계교는 오직 환곡(還穀)의 한 조항 뿐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사소(些少)하니, 참으로 이른바 ‘밀가루 없이 수제비 빚는다.[無麵之不托]’라는 격입니다. 따라서 또한 멀거니 서서 죽는 것을 바라만 볼 뿐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적(糶糴)의 법의(法意)는 본디 수재와 한재를 예비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각 고을의 곡부(穀簿)가 모두 상사(上司)의 지용(支用)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분급(分給)하는 것은 많고 유치(留峙)177) 하는 것은 매우 적은 탓으로, 한번 흉황을 만나면 이렇게 탕연(蕩然)하게 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남쪽 지방의 풍속은 와언(訛言)에 휩쓸려 선동되기 쉬운 탓으로 모두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걱정만 품고 있고, 전혀 삶을 즐기려는 마음이 없어서 양심(良心)을 잃은 관계로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보고 듣기에 경악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 등이 지나치게 헤아리는 우려는 또 오로지 진구하는 한 가지 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유(韓愈)의 말에, ‘하늘이 가뭄을 내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금년의 세전(稅錢)은 모두 백성들의 뱃속에 들어 있으니, 아울러 의당 징수하는 것을 정지해야 합니다.’하였고, 주부자(朱夫子)가 황정(荒政)에 대해 올린 글에, ‘견각(蠲閣)과 진휼은 본디 한가지 일로 수미(首尾)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이미 수납(輸納)하라고 추호(追呼)하는 소요를 겪은 연후에 다시 진휼하는 것은 살을 베어내어 입으로 먹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당시 소흥(紹興)178) 연간에 견감시키고 국고를 풀어 하사한 것이 1백여 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오늘날 남쪽 백성들에 대해서 견정(蠲停)하고 독촉을 중지한 것은 조가(朝家)의 입장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저 어리석고 미련하며 곤궁한 백성들은 아직도 남은 기대가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요(堯)·순(舜)의 백성도 널리 은혜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다는 격인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쌀을 풀어서 내려준 송 고종(宋高宗)이 소흥 연간에 시행한 일을 우리 전하께서 호남(湖南)에다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리가 나기전의 접제(接濟)에 대한 방도를 반드시 묘당의 의논이 상의하여 확정지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소식(蘇軾)의 말에, ‘희령(熙寧)179) 연간의 황정(荒政)은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던 것은 구제한 것이 더디었기 때문이었다.’ 하였는데, 지금의 사세(事勢)가 조금만 하루라도 늦추게 되면 참으로 헛되이 힘들이고 아무런 유익이 없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진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망자(死亡者)가 잇따라서, 이미 각 고을에서는 인구(人口)를 초기(抄記)하여 먹여주기도 하고 가호(家戶)를 계산하여 진구하기도 하여 세전(歲前)까지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 있는데, 신포(身布)를 징수해야 하는 것이 원래 이들에게 있으며, 호환(戶還)을 봉납하지 않은 것도 또한 이들에게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진구하여 살리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독책하여 가혹하게 징수하고 있으니, 죽음에서 헤어나려고 한들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을 관리들이 징색(徵索)하는 것은 환곡과 신포 뿐만이 아닙니다. 조세(租稅)와 결전(結錢)을 징색함에 있어 각기 기한이 있는데 전세(田稅)는 정공(正供)이고 대동(大同)은 상부(常賦)로, 봄이 지난 뒤 과징(科徵)을 차례로 시작합니다. 결전(結錢)을 거두어 들이고 어염세(魚鹽稅)를 징수하고 삭포(朔布)를 거두는 것이 모두가 눈앞에 닥친 민역(民役)인데, 삼가 수납(收納)함에 있어 빠지는 것이 많을까 우려됩니다만 신 등은 아득하기만 하여 계획을 세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조가(朝家)에서의 진휼에는 참으로 은혜를 베풀다가 국고가 고갈되는 걱정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전에 없는 흉황(凶荒)을 만났으니 비상한 거조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이 위급한 군정(群情)을 진정시키고 이 일로(一路)의 생령(生靈)들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감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경사(京司)의 전포(錢布)와 아문(衙門)의 저축은 과연 얼마나 됩니까? 쌀을 사서 환곡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때이고 연한을 정하여 대여를 허락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계교하여 보건대, 시일이 급박하여 육지로 운송하고 선박으로 실어다 먹이는 것이 시기를 어겨서는 안됩니다. 또 삼가 듣건대, 영좌(嶺佐)의 여러 고을은 곡총(穀摠)이 모두 넉넉하고 연사(年事)도 조금 실하게 되었으며 양서(兩西)의 산군(山郡)에는 조적곡(糶糴穀)이 많이 유치(留峙)되어 있다고 하니, 이제 이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게 하는 것은 우리 전하께서 한번 호령(號令)을 내리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우리 숙묘(肅廟)임술년180) 에 팔로(八路)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이때 묘향(廟享)과 어공(御供)을 모두 감생(減省)하게 하였으며, 성조(聖祖)께서 손수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린 것이 모두 1천여 마디였는데 지극히 정성스럽고 딱하게 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특별히 영곤(營閫)·주현(州縣)·진역(搢驛)에 교서를 내려 보호하고 구활하라는 뜻을 하유하였는데,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아래로는 우천(愚賤)에 이르기까지 오열하면서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떤 변장(邊將)은 교서(敎書)를 받들고 3일 동안 울고나서 드디어 자기 집의 곡식을 가져다가 사졸(士卒)들을 구제하였으며, 무인들도 또한 곡식을 관(官)으로 실어다 바쳤는지 상(賞)을 사양하고 받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상하가 평안하여 기황(饑荒)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영묘(英廟)계미년181) 에 국내에서 크게 진구를 시행하였는데, 그때에도 먼저 간곡하고 딱하게 여기는 교서를 내리고 나서 안집사(安集使)를 나누어 보낸 다음 강도(江都)의 쌀과 교제(交濟)의 곡식을 교대로 삼남(三南)으로 옮겼기 때문에 백성이 죽음을 면하였고 마을에 떠돌아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촌야(村野)의 노인들이 아직도 그때의 일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태평한 정치로 다스릴 때인 갑인년182) 의 진구는 멀지 않은 옛날이어서 신 등이 더욱 역력히 진달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연분(年分)의 계문(啓聞)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정대(停代)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며, 윤음(綸音)을 반강(頒降)한 것이 거의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전곡(錢穀)을 획하(劃下)함에 있어서는 넉넉하고 후한 쪽으로 따르도록 힘썼고, 내탕(內帑)의 저축을 풀고 초목(椒木)을 반하하는 것이 모두 특은(特恩)에서 나왔습니다. 본도(本道)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신(道臣)이 장청(狀請)한 이외에 상공(上供)에 관계되는 모든 민역(民役)은 일체 아울러 정감(停減)시켰으며, 별유(別諭)를 환히 내리고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냈었습니다. 그때 연해(沿海) 고을의 흉황(凶荒)은 도(道)의 절반에 불과했는데도 조가(朝家)에서 구휼하는 방도는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성인이 인심을 감복시키는 방법은 또한 진심을 담은 사교(辭敎)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법이 똑같았습니다.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일정 일사(一政一事)를 번번이 조종(祖宗)을 본받으시는데, 더구나 늦추어서는 안되는 민사(民事)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계술(繼述)해야 될 것이, 돌아보건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즉시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려 풀어서 하사할 수 있는 전포(錢布)와 옮길 수 있는 곡물에 대해 속히 구획(區劃)하게 함으로써 죽어가는 백성의 목숨을 회생시키게 하여 주소서. 이어 또 계속하여 덕음(德音)을 반하하여 일로(一路)로 크게 하유하되, 저 누더기를 입은 바짝 마른 부류들은 정구(庭衢)에서 마주 대한 것처럼 하고 집에서 울고 들에서 통곡하는 정상을 지척 앞에 임어하여 보는 것처럼 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하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하여주는 것처럼 한다면, 백성은 본래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神)스러운 것이므로 받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가까이하는 말을 듣고서 그 누구인들 감히 지성으로 감격하고 우러러 흐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의뢰(依賴)하는 것이 있으니 무슨 흩어지는 것을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견정(蠲停)이 이미 넉넉하고 진급(賑給)에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으니, 덕의(德意)로 회유(懷柔)하고 혜정(惠政)으로 오게 한다면 죽은 목숨을 살리고 뼈에 살을 붙여주는 은택이 비로소 극진한 것이 되는데, 대저 흉황을 걱정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대신(大臣)의 집으로 가서 사리를 논하여 초기를 올리라."
하였다. 대신이 이에 앞서 구획하였으므로 다시 재처(裁處)를 일삼을 것이 없다고 하니, 버려두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44면
- 【분류】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농업(農業) / 호구(戶口) / 역사-고사(故事)
- [註 176]주광(黈纊) : 주광은 누런 색의 솜을 둥글게 뭉쳐 관의 양끝에 다는 것으로, 임금이 요긴하지 않은 말까지 지나치게 듣는 것을 막는 뜻을 지녔음.
- [註 177]
유치(留峙) : 환곡(還穀) 등을 방출하지 않고 쌓아두는 것.- [註 178]
소흥(紹興) :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임.- [註 179]
희령(熙寧)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임.- [註 180]
○己丑/光州牧使宋知濂、順天府使趙晋和、務安縣監徐俊輔、茂長縣監李允謙、咸平縣監李潮、扶安縣監柳遠鳴聯疏曰:
臣等出自邇列, 獲叨下邑。 苟有民隱之可以上聞, 則雖在常年, 固當隨事條陳, 矧玆大無之歲, 千里赤地, 萬姓墊危? 臣等不以此時, 一進流民之圖於階庭萬里之前, 則一路殿屎之狀, 殿下何從而盡燭乎? 湖南之饑, 最稱乙、丙, 而聞諸故老, 皆以爲今荒殆有甚於乙、丙。 則儘是百年之所無也。 南土耕作, 專尙水耨, 而旱田翻耕, 亦藉引水之功。 今夏之旱、水田, 俱未移秧, 則況旱田之翻耕乎? 若所謂已移及田種諸穀, 積困暵乾, 荐被早霜, 秋後場圃, 到底一空, 以此推之, 道內土田之陳廢, 幾乎十之七、八。 而特旱田, 則例不入於俵災之中, 朝家亦何以備悉於一路之全荒也? 小民之有恒産者至尠, 而今則恒産之家, 一例顑頷, 莫保朝夕, 則矧爾無恒産之民, 何以資活於嗣歲之前乎? 始也拮蔬茹根, 以延晷刻, 今焉離井去里, 各自圖生。 母棄其子, 夫訣其妻, 道殣相望, 流丐成群。 此輩苟可以糊口, 則必當散而之四, 而四境之外, 饑饉同然, 亦將何往而得延須曳之命耶? 徊徨原野, 茫無止泊, 景色慘沮, 人心惶怯。 恭惟我殿下宵旰一念, 南顧憧憧, 先從廟堂之建白, 而亟下優恤之典, 繼因道臣之疏啓, 而又加蠲停之澤。 代播, 則許其免稅, 進獻使之停封, 以至九萬災摠之特命準俵, 還餉、身布之分等停退, 其於損上益下之道, 至矣盡矣。 臣等謹已奉承朝令, 宣揚德意。 而以若遑遑難保之民, 又有目下切骨之苦。 還穀, 卽開歲賑貸之資, 而不可不捧, 身布, 乃京外支放之需, 而不可踰限。 則停退以外之數, 如期準捧, 是臣等之責。 而第其民勢之莫可奈何, 有不得不一徹於黈纊之下者。 蓋今歲災減之外, 全道畓結, 僅爲五萬。 以若五萬之摠, 分排於五十餘州, 而雖使一把、一束, 盡得食實, 比之平年之秋成, 則其所減縮, 當如何哉? 況其所謂五之實結, 自夏及秋, 無災不有, 蟲、霜、風、溢, 餘者無幾。 列邑之所以執實者, 如非棲畝之枯穎, 卽是粘莖之殘粒。 以此推之, 則所謂畓結, 號曰五萬, 而殆乎名存而實無。 至於黍粟、雜種之田結摠, 元少而俱被傷損, 全未食實, 則穗秉之費, 已先於早秋, 甁罌之貯, 莫恤於禦冬, 今焉力已竭矣, 死且迫矣。 雖使剝膚而椎髓, 尺布斗粟, 實無可辦之道。 而民之爲言, 皆曰, ‘朝家愛欲其生, 蠲減不旣多乎? 非不知今日輸倉, 明春受貸, 而目前不得延命, 來頭奚暇望活? 官督之急, 適足以企吾死命。’ 其言切可矜惻。 而臣等外迫營閫之責飭, 內憫郵罰之當前, 百計催督, 頭會箕斂, 而忍使浮黃之肌, 輕被箠楚, 懸磬之室, 莫保雞犬, 是豈仁人君子所可忍者哉? 今以臣等所叨之邑言之。 明年之還賑接濟, 皆靠於新捧之還餉, 而多不滿萬, 少或千百, 從後所捧, 斷可知矣。 他邑之捧, 亦可反隅。 況乎沿海諸處, 幾皆尤甚之邑, 而穀簿多是盡分, 留庫擧皆枵然, 若待新捧, 而將欲議賑, 則列邑飢民, 不免於索之於枯魚之肆矣。 見今湖以南尤甚之三十四邑, 晝宵揣度, 而爲拯濟之計者, 惟是還穀一條。 而所捧若是些少, 則眞所謂無麪之不托。 亦將立視其死, 而莫之救耳。 夫糶糴法意, 本爲水旱之備豫, 而近來列邑穀簿, 皆屬上司之支用, 故分給居多, 留峙絶少, 一遇歉荒, 若是蕩然。 而南俗易訛易動, 擧懷必死之憂, 全無樂生之念, 喪其良心, 無所不爲。 聽聞之驚駭, 不一而足。 臣等過計之慮, 又不亶在於賑救一事而已。 韓愈之言曰, ‘天旱人飢, 今年稅錢, 在民腹內, 竝宜停徵,’ 朱夫子上荒政書曰, ‘蠲閣、賑恤, 本是一事, 首尾相須。 使飢民, 已被輸納追呼之擾, 然後復加賑恤, 與割肉啗口無異。’ 當時紹興之蠲放撥賜, 合爲百餘萬之多, 今日南民之所蠲停住催者, 在朝家非不曠絶, 而惟彼窮民之蠢愚者, 尙有餘望, 則眞所謂堯、舜之民, 猶病博施也。 至於錢、米之撥賜, 宋 高宗之所施於紹興者, 我殿下可不施之於湖南乎? 麥前接濟之方, 必有廟議之商確。 而蘇軾之言曰, ‘熙寧荒政, 費多無益, 以其救之之遲也。’ 今之事勢, 稍緩一日, 則誠有空費無益之慮。 開賑之前, 死亡相續, 已自列邑, 或抄口而饋之, 或計戶而賑之, 俾得延活於歲前, 而身布之當徵, 旣在此類, 戶還之未納, 亦在此類。 一邊而賙之濟之, 一邊而督之剝之, 縱欲救死, 何由得活? 縣官之索, 非徒還與布而已。 徵租索錢, 各有期限, 而田稅惟正也, 大同常賦也, 春後科徵, 次第伊始。 而結錢之斂也, 漁、鹽之稅也, 朔當之布也, 莫非當頭之民役, 竊恐收納之多闕, 臣等茫不知所以爲計也。 朝家軫恤, 誠有恩竭之患, 而値此無前之歉荒, 不有出常之擧措, 則顧何以鎭此危急之群情, 而濟此一路之生靈乎? 臣等未敢知京司、錢布衙門之儲, 果爲幾何? 而貿米作還, 此政其時, 限年許貸, 曾多已例。 惟今之計, 時日是急, 陸輸船哺, 不宜失時。 且伏聞嶺左諸邑, 穀摠皆優, 年事稍實, 兩西山郡糶糴多峙, 今欲移粟, 而使之救濟, 則不過我殿下一號令間事耳。 臣等謹稽我肅廟壬戌, 八路大饑, 廟享御供, 皆從減省, 聖祖手下哀痛之敎, 凡千有餘言, 至誠惻怛。 又別敎營閫、州縣、鎭驛, 諭以保活之意, 上自搢紳, 下至愚賤, 無不嗚咽感涕。 而有一邊將, 奉書泣三日, 遂取其家之粟, 以濟其士卒, 武人亦有輸粟于官, 而辭賞不受者。 于時上下晏然, 不知饑荒。 亦粤英廟癸未, 國內大賑, 而先下懇惻之敎, 分遣安集之使, 江都之米, 交濟之穀, 遞運於三南, 而民免捐瘠, 里無流離。 村婆野老, 尙傳其時之事, 而至有流涕者。 先大王在宥之時, 甲寅之賑, 去古未遠, 臣等尤歷歷可陳。 于斯時也, 不待年分之啓, 先下停代之命, 絲綸之宣降, 殆無虛日。 錢穀之劃下, 務從優厚, 而內帑之發, 椒木之頒, 俱出特恩。 雖以本道言之, 道臣狀請之外, 凡係民役之關於上供者, 一倂停減, 而洞下別諭, 分送近臣。 其時沿邑之歉, 不過半道, 而朝家隱恤之方, 無所不用其極, 聖人之所以孚感人心者, 亦惟在於辭敎之敷心, 而前聖後聖, 其揆一焉。 今我聖上一政一事, 動法祖宗, 則況於民事之不可緩者? 其所繼述, 顧不在玆歟? 伏願聖上卽降明旨, 錢布之可以撥賜者, 穀物之可以移轉者, 亟令區劃, 俾近止之民命, 得以回甦。 仍又繼發德音, 誕諭一路, 使彼鶉衣鵠形之類, 如對於庭衢, 家啼野哭之狀, 若臨於咫尺, 眷眷懇懇, 如父詔子, 則民固至愚而神, 以其願戴之心, 承此孔邇之言, 孰敢不至誠相感, 仰首嗚泣? 而旣有依賴, 何憂渙散? 蠲停旣優, 賑給無闕, 而懷之以德意, 來之以惠政, 則生死肉骨之澤, 於斯而至矣, 夫何歉荒之可憂哉。
批曰: "有司堂上, 往大臣第, 論理草記。" 大臣以前此區劃, 無容更事裁處, 置之。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44면
- 【분류】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농업(農業) / 호구(戶口) / 역사-고사(故事)
- [註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