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해 역관 현의순 등이 아뢴 대마도의 사정
도해 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최석(崔昔) 등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에는 팔도(八道)가 있는데, 도(道)에는 66주(州)가 있고 주에는 6백 32군(郡)이 있으며, 군(郡) 이외에는 3도(島)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관백(關白)의 명령을 따릅니다. 관백은 무장주(武藏州)에 있고 왜황(倭皇)은 대화주(大和州)에 있습니다. 대저 축인방(丑寅方)에서 시작되어 손사방(巽巳方)에까지 뻗쳤으며, 대마도(對馬島) 남쪽에서 섭진주(攝津州)의 대판성(大坡城)에 이르기까지의 수로(水路)가 모두 합계하면 2천 4백 30리(里)입니다.
1. 대마도는 남북이 3백 50리이고, 동서는 7, 80리가 되는 곳도 있고 5, 60리가 되는 곳도 있습니다. 본래 성루(珹壘)는 없고 바다를 해자(垓子)로 삼고 있으며, 가로(街路)는 협애하여 모두가 깊숙한 산협(山峽)이며, 가옥은 위로 중첩되게 지었는데 모두 높은 절벽 위에 있습니다. 층층으로 된 바위와 자갈로 이루어진 등성이 사이마다 선창(船艙)을 설치하여 놓고 출입하는 것을 기찰(譏察)합니다. 개간하여 경작할 만한 전토(田土)가 없고, 단지 송죽(松竹)·종려(棕櫚)·등감(橙柑)·동백(冬栢)이 하늘을 뒤엎을 듯이 무성한 것만 볼 수 있는데, 언제나 비오고 바람부는 날이 많습니다. 대마도의 북쪽에는 악포(鰐浦)와 좌수포(佐須浦)가 있는데 저들과 우리의 선박(船舶)이 모두 여기를 통하여 왕래하며, 이를 대풍소(待風所)라고 합니다. 대풍소에서 북으로 부산포(釜山浦)에 이르기까지가 4백 80리(里)이고 남으로 대마도 부중(府中)까지가 3백 20리 입니다.
1. 대마도의 민호(民戶)는 1만 5천여 호(戶)이고 전세(田稅)는 피모(皮牟)와 잡곡(雜穀)으로 받는데 모두 3만여 표(俵)가 되고, 우리 나라에서 하사하는 공작미(工作米)와 겸대(兼帶)한 미태(米太)까지 아울러 2만여 석(石)이 됩니다. 1표(俵)는 우리 나라의 관두(官斗)로 따져서 8두(斗) 6승(升)이 들어갑니다. 온 대마도가 먹고 사는 것을 오로지 우리 나라에 의존하고 있는데, 해촌(海村)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호에 따라 배를 지급하여 주고, 산촌(山村)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구(家口)마다 총(銃)을 지급하여 생활하게 합니다. 부민(富民)이라고 할지라도 비단옷을 입을 수 없고, 집은 모두 기와로 덮었으며, 곤궁한 백성은 감저(甘藷)를 식량으로 삼습니다.
1. 대마도 도주(島主)는 2년 동안은 도내(島內)에서 일을 처리하고, 1년은 강호(江戶)에 가서 알현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고 있는데, 강호에는 도주의 처자(妻子)와 제택(第宅)이 있습니다. 66주(州)의 태수(太守)들이 모두 이렇게 하는데 이는 볼모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강호에서는 우리 나라를 말할 수 없이 우러러보고 있기 때문에 매번 도주가 가서 알현하는 시기가 늦다고 여기고 있으며, 대마도는 우리 나라와 매우 가까이 있으므로 각별한 우대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주(各州)의 태수들이 흠탄(欽歎)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서화(書畵)를 마치 금옥(金玉)처럼 여겨 구득하면 곧 보물처럼 보관합니다. 국법(國法)은 귀천(貴賤)·남녀(男女)를 막론하고 6, 7세 때부터는 언문(諺文)을 가르치는데, 이를 이름하여 ‘가나[假名]’라고 하며 공사(公私)의 문서는 모두 이 ‘가나’를 사용합니다. 진문(眞文)의 관원 자리가 하나 있는데, 시서(試書)를 알고 해서(楷書)·초서(草書)를 대략 이해하는 사람이면 곧 이 자리에 차임합니다. 궁시(弓矢)가 있기는 합니다만 별로 익히는 일이 없고, 또 채찍질을 가하면서 말을 달리지도 않았습니다. 무예는 단지 긴 칼과 짧은 총을 가지고 하였고, 행진은 한줄로 대(隊)를 지어 물고기를 꿰미에 꿰듯이 나아갔습니다. 교련법(敎鍊法)은 오로지 《위료자(尉繚子)》173) 를 가르쳤습니다.
1. 곤장(棍杖)이나 편태(鞭笞)로 형벌하는 법이 없고, 죄가 있으면 그때마다 주륙(誅戮)을 가하였으며, 관직에 있는 사람의 가벼운 죄는 그 집을 금고(禁錮)시키고 온 집안을 폐호(閉戶)시키며, 소민(小民)을 신문해야 할 죄가 있으면 물을 배가 부르도록 먹이고 횡목(橫木)을 배위에 굴려서 실정(實情)을 알아내는데, 신문할 만한 것이 없는 자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노예로 삼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물건을 훔치는 습관이 없는데, 혹 뒤섞여서 죄를 받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앞다투어 사실을 자백하면서 죽는 것을 흔쾌히 여겼습니다. 예악(禮樂)의 문식(文飾)을 모르고 단지 법이 잔인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 뿐이었습니다.
1. 공복(公服)은 대략 단령(團領)과 같은데, 앞뒤를 단폭(單幅)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는 넓어서 노끈으로 끝을 묶었습니다. 머리에는 일각건(一角巾)을 썼는데 그 모양이 굽이 없는 나막신[木屐]과 같았습니다. 이를 이름하여 풍절건(風折巾)이라고 하였습니다. 직책이 낮은 자는 위에는 소매가 큰 옷을 입고 아래로는 긴바지를 늘어뜨렸으므로 다닐 적에는 반드시 땅에 끌렸습니다. 머리에는 피변(皮弁) 모양처럼 생긴 일각건(一角巾)을 썼는데, 이름하여 ‘시오모자(侍烏帽子)’라고 하였습니다. 소매끝을 노끈으로 묶고 긴 바지를 땅에 끌리게 하는 것은 만일 죄를 범하였을 경우 나획(拿獲)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큰 공회(公會)가 아니면 머리에 관(冠)을 쓰는 일이 없습니다. 정수리의 머리털은 죄다 깎아내고, 단지 노골(露骨) 뒤의 머리털을 사용하여 위로 거두어 올려 꼬부려서 잡아맨 다음 밀유(蜜油)를 바릅니다. 몸에는 주의(周衣)를 입었는데 흑색이었고, 허리에는 큰 띠를 둘렀는데 반드시 긴 칼을 꽂았습니다. 본래 상하의 속옷은 없습니다. 여자들의 옷도 이와 같은데 수식(首飾)이 있습니다.
1. 대마도의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며, 이예주(伊豫州)의 산에는 동철(銅鐵)이 나는데 채취하여도 고갈되는 일이 없습니다. 유기(鍮器)는 일체 엄금하고 일상 생활에는 모두 목기(木器)와 목저(木筯)를 사용하며, 반찬은 해어(海魚)·해채(海菜)·녹육(鹿肉)·산약(山藥)·우방(牛蒡)174) 등속인데, 그 맛이 매우 담박합니다. 비록 천인(賤人)일지라도 차[茶]를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저 재용(財用)을 매우 아끼는데, 인구는 날로 늘어나 도세(島勢)가 점점 쇠잔(衰殘)되어 간다고 합니다.
1. 공해(公廨)와 사실(私室)은 매우 정밀하게 하기를 힘쓰지만 단청(丹靑)은 칠을 하지 않습니다. 재목(材木)은 모두 가느다란 것이며, 벽은 흙을 쓰지 않고 얇은 판자로 꾸미며, 사면(四面)은 모두 장자(障子)로 되어 있으므로 밀어 옮기고 여닫아도 문의 지도리나 문고리를 볼 수 없습니다. 대소(大小) 간가(間架)는 척촌(尺寸)도 어긋나지 않으며, 온돌방을 만들지 않고 단지 마루만 설치하여 두터운 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잡니다. 가첨(家籤)과 가구(街口)에는 저수통(貯水桶)을 설치하며, 금화(禁火)하는 무리를 많이 동원하여 주야로 순경(巡警)하게 합니다.
1. 연향일(宴享日)에 신 등이 도주(島主)의 집으로 갔었는데, 성(城)은 덮은 것이 없고 문(門)은 동서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협문(夾門) 밖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는데, 거기에서 염내(簾內)로 들어가서 도주와 서로 접견하였습니다. 그 집의 벽은 금(金)으로 칠을 하였고, 나이는 이제 38세인데 인품이 순후(淳厚)하였습니다. 풍절건(風折巾)을 쓰고 자단령(紫團領)을 입었는데, 그의 뒤에는 칼을 잡은 사람들이 옹립(擁立)하여 있었습니다. 명을 봉행하는 사람과 부리는 사람들은 황색(黃色) 단령(團領)을 입었고 모두 부복(俯伏)하여 명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며, 재판(裁判) 이하 제역(諸役)들은 밖에 물러나 있는데 조용하여 떠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희자(戱子)175) 를 설행하였는데, 한단(邯鄲)·몽원(蒙猿)·인도(靭道)·성사(成寺)·수인(首引) 전륜(轉輪) 등의 명색(名色)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개 중원(中原) 창씨(倡氏)의 희연의(戱宴儀)와 같은 것이었는데, 범례(凡例)는 한결같이 홀기(笏記)를 따라서 조금도 차실(差失)이 없었으며 접대하는 즈음에 성의가 상당히 간곡하였습니다. 관백(關白)의 금년 나이는 48세인데 장차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의논할 것이라고 합니다.
1. 도주(島主)의 집 북쪽에 새로 큰 건물을 건립하였는데, 이름하여 동무광전(東武廣殿)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객관(客館)을 건립하였는데 매우 웅장하였으며, 5년 만에 공사를 끝맺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백성의 힘에 의존하였는데 2구(口)가 있는 집은 1구(口)는 부역(赴役)하고 1구(口)는 농사를 지었으며, 1구(口)인 집은 1구가 부역했는데, 아울러 아무런 고가(雇價)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나온 강호(江戶)의 관인(官人)은 일행(一行) 1백 59인이 바다를 건너왔는데, 데리고 온 1백 33인에게 날마다 제공하는 어채(魚菜)·시탄(柴炭)에 속하는 것을 전부 촌민(村民)에게 담당시켰지만 또한 본가(本價)를 계산하여 지급한 것이 없었으므로, 이것이 국법에서 나온 조처이기는 하지만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44면
- 【분류】외교-왜(倭)
- [註 173]《위료자(尉繚子)》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 사람으로 병가(兵家)인 위료(尉繚)가 지은 병서. 위요는 위(魏)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제(齊)나라 사람으로 귀곡자(鬼谷子)의 제자라고도 하나 분명치 않으며, 그의 저술인 《위요자》는 손·오(孫吳)의 병서 이래 많이 읽혀져 왔음.
- [註 174]
우방(牛蒡) : 우엉.- [註 175]
희자(戱子) : 마당놀이 또는 놀이꾼.○渡海譯官玄義洵、崔昔等, 以聞見別單, 啓。:
日本國有八道, 道有六十六州, 州有六百三十二郡, 郡之外有三島。 竝聽於關白。 關白在武藏州, 倭皇在大和州。 大抵起自丑寅方, 延至巽巳, 自對馬島南, 距攝津州之大坂城, 水路共計, 爲二千四百三十里。 一, 對馬島南北三百五十里, 東西或七、八十里, 或五、六十里。 本無城壘, 以海爲溝, 街路狹窄, 無非絶峽, 屋廬重疊, 盡在懸崖。 矗巖脊确之隙, 輒置船艙, 而譏其出入。 無田土耕墾, 但見松竹、棕櫚、橙柑、冬柏參天, 每多風雨。 島之北有鰐浦、佐須浦, 彼、我船, 莫不從此往來, 是謂待風所。 自待風所, 北至釜山浦四百八十里, 南至馬島府中三百二十里。 一, 對馬島民戶, 一萬五千餘戶, 田稅皮牟、雜穀三萬餘俵, 我國所賜公作米竝兼帶米太二萬餘石。 一俵, 以我國官斗量, 入八斗六升。 一島仰哺, 專在我國, 海村居民, 隨戶給船, 山村隨口給銃, 俾爲生涯。 雖富民, 無得衣錦, 屋皆瓦覆, 窮民以甘藷爲食。 一, 對馬島主, 二年在島理事, 一年往謁江戶以爲常, 江戶有島主之妻子第宅。 六十六州之太守, 亦皆如之, 蓋執質也。 自江戶景仰我國, 每緩島主往謁之期, 馬島偏近朝鮮, 致蒙優待。 各州太守, 莫不欽歎。 我國書畫, 盡視若金玉, 得之便珍藏。 國法無論貴賤男女, 自六七歲, 敎之以諺文, 名之曰 ‘假名’, 公、私書盡用假名。 有眞文官一窠, 能知《詩》、《書》, 稍解楷、草者, 輒塡此窠。 雖有弓、矢, 別無嫺習, 又不馳馬鞭芻。 武藝只以長劍短銃, 行陣一行作隊, 魚貫而進。 敎錬之法, 專擧尉繚子。 一, 無刑棍、鞭、笞之法, 有罪輒加誅戮, 官職人之輕罪者, 禁錮其家, 闔門閉戶, 小民有可問之罪, 飮水滿腹, 以橫木輪其腹而得情, 無可問者, 限年爲奴。 無欺人偸物之習, 倘有混淪抵罪之弊, 爭先首實, 以死爲快。 不知有禮樂之制作, 只知繩法之峭刻。 一, 公服稍似團領, 前後以單幅爲之, 袖闊以繩罩其口, 頭戴一角巾, 形如無齒木屐, 名之曰 ‘風折巾。’ 職卑者, 上着大袖衣, 下垂長袴, 行必曳地。 頭戴如皮弁樣之一角巾, 名之曰 ‘侍烏帽子。’ 袖口之罩繩, 長袴之曳地, 淌有罪犯, 爲其便於拿獲也。 如非大公會, 無頭上冠。 盡削頂, 只用顱後髮斂上, 曲以係之, 以蜜油塗之。 身穿周衣, 尙黑色, 腰圍大帶, 必揷長劍。 本無上下裏衣。 女服亦如是, 而有首飾。 一, 島俗尙儉, 伊豫州之山, 出銅鐵, 取之無竭。 而切禁鍮器, 日用盡是木器、木筯, 饌用海魚、海菜、鹿肉、山藥、牛蒡之屬, 其味甚淡。 雖賤人, 茶不離身。 大抵財用則甚惜, 而生齒日繁, 島勢漸殘云。 一, 公廨、私室, 務極精緻, 不施丹靑。 材木皆纖細, 壁不用土, 粧以薄板, 四面皆障子, 推移開闔, 未見戶樞門環。 大小間架, 尺寸不爽, 不爲房堗, 只設抹樓, 鋪厚席寢其上。 家簷、街口貯水桶, 多發禁火之徒, 日夜巡警。 一宴享日, 臣等往島主家, 城無蓋覆, 門無東西。 夾門外竪下馬碑, 轉至簾內, 與島主相接。 以金塗其壁, 年今三十八歲, 爲人淳厚。 着風折巾、紫團領, 後有人按劍擁立。 奉行、御用人等, 黃色團領, 俯伏伺候, 不敢仰視, 裁判以下諸役, 屛營於外, 闃然無譁。 設戲子, 有邯鄲、夢猿、軔道、成寺、首引、轉輪等名色。 槪如中原倡氏戲宴儀, 凡例一遵笏記, 少無差失, 接待之際, 誠意頗款。 關白今年四十八歲, 將議立儲云。 一, 島主家之北, 新建大廈, 名之曰東武廣殿。 又建客館, 甚壯大, 五年始告訖。 專靠民力, 二口之家, 一夫赴役, 一夫作農, 一口之家, 一口赴役, 竝無雇價。 今番出來江戶官人一行一百五十九人渡海, 所率一百三十三人之日供魚菜、柴炭等屬, 專使村民擔當, 亦無本價計給, 雖出國法, 怨聲載路。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44면
- 【분류】외교-왜(倭)
- [註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