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찬이 관왜의 폐단을 제거할 것을 청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역관(譯官)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게 하는 것은 관백(關白)의 지부(知否)와 도주(島主)의 정위(情僞)를 탐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허실(虛實)과 진위(眞僞)를 분명히 안 연후에 통신사(通信使)를 들여보내야 합니다. 통신사의 사행(使行)이 있은 지가 이미 50년 가까이 되었으므로 제반 조약(條約)이 대개 이폐(弛廢)된 것이 많습니다. 관왜(館倭)들이 간사한 짓을 부리는 폐단이 날로 불어나고 있으니 한번 수명(修明)시켜 정칙(整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통신사의 한 일에 대해서는 우리쪽에서 이미 저들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저들도 의당 폐단을 제거할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 사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이번에 바다를 건너가는 행위에 있어서는 우선 약조(約條) 가운데 의당 수거(修擧)해야 될 것과 잘못된 전례로 의당 혁제(革除)해야 될 것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말을 해서 저들로 하여금 하나하나 이개(釐改)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폐단을 반드시 강호(江戶)에서 모두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니, 만약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執政)이 마주 대한 곳에서 분명히 변해하고 통렬히 이야기한다면 또한 간사한 계교를 꺾고 폐단을 제거하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제재(諸宰)들과 함께 상의하여 합당하게 만든 것이 15,6조항이 됩니다. 그 가운데 소소한 조건(條件)은 비록 일일이 거론하여 앙달(仰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가장 큰 것을 뽑는다면, 폐단 가운데 제일의 건사(件事)는 곧 부특송사선(副特送使船)입니다. 이에 앞서 약정(約定)한 세견선(歲遣船) 20척은 곧 제1선(第一船)부터 제17선(第十七船)까지와 1, 2, 3 특송선(特送船)입니다. 이정암(以酊菴)094) 은 곧 현소(玄蘇)가 도서(圖書)를 받은 곳인데, 지금까지도 서승(書僧)에 의탁(依托)하고 있습니다. 만송원(萬松院)은 곧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와 약조(約條)할 적에 공(功)이 있었다고 하여 설치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두 개의 송사선(送使船)은 또한 20선(船) 이외의 것이니, 이미 잘못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부특송사선은 잘못된 예 가운데 더더욱 잘못된 예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폐단을 끼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저들의 생업(生業)을 위하여 임의로 왕래하다가 인하여 준례가 된 것이니 이는 의당 영원히 혁파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중간에 5선(船)을 끊었던 처음에 도주(島主)가 진상(進上)과 공무역(公貿易)을 간청함에 따라 전의 법식에 의거하여 하나의 특송사선(特送使船)에 부송(付送)하게 하였기 때문에 진상가(進上價) 공목(公木)095) 20동(同), 공무역가(公貿易價) 공목(公木) 36동, 모두 합쳐 공목 56동을 해마다 입급(入給)하는데, 전혀 의의(義意)가 없으니 이 또한 폐단 가운데 큰 것입니다.
고환 차왜(告還差倭)는 곧 도주가 강호(江戶)에서 환도(還島)한 뒤 고지(告知)하는 자입니다. 3년에 한 번씩 강호를 왕래하는 것이 이미 전례(前例)로 굳어져 있으니, 사자(使者)를 보내어 고지할 필요없이 단지 환도(還島)했다는 서계(書啓)를 세견선(歲遣船) 편에 순부(順付)하게 하는 것이 일에 있어 매우 편리하고 좋습니다. 그런데도 도주(島主)가 준례에 따라 왕환(往還)하고 중첩되게 차왜(差倭)를 보내는 것은 더욱 형식에 매인 것으로 폐단이 극심하니, 이 또한 의당 영구히 혁파해야 될 일입니다. 매년 왜인(倭人)에게 지급하는 공작미(公作米)는 곧 공목(公木) 5백 동(同)의 대가(代價)인 것인데, 당초 저들이 안타깝게 간청하였으므로 단지 5년 동안을 기한으로 허락했었습니다. 기한이 차기에 이르러서는 공작미를 일컬으면서 재판왜(裁判倭)가 나오겠다고 청하고는 또 기한을 물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또 5년 동안 시행할 것을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준례가 되어 매양 5년의 기한이 찰 적마다 저들은 준례에 의거 나아왔고 우리 나라는 준례에 의거 허락하여 왔던 탓으로 문득 항규(恒規)로 굳어져버렸으니, 너무도 의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재판왜(裁判倭)가 5년마다 나아오면 1백여 일 동안을 머무는데, 이들의 지공(支供)에 드는 비용도 매우 많습니다. 이 일은 너무도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단삼(單蔘)은 곧 조정(朝廷)에서 예물(禮物)로 내려주는 물건이기 때문에 간혹 품질이 좋지 않더라도 받아가는 자의 입장에서는 감히 점퇴(點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삼(蔘)을 점퇴하는 폐단이 거의 한정이 없어서 간혹 전부 점퇴시켜 버리고 한 해가 지나도록 서로 버티다가 결국은 썩어서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리는 데 이르기까지 하니, 사체(事體)에 의거 논하건대 어찌 이런 도리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공목을 입급(入給)하는 것은 본디 연례(年例)의 정한(定限)이 있는 것이어서 매양 당년에 새로 받은 것으로 당년에 죄다 지급하게 되어 있는 것이 곧 정해진 법규인 것입니다. 근래에는 저들의 점퇴가 갈수록 더욱 극심하여 그 의도가 뇌물을 징수하려는 데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오로지 미루면서 받아가지 않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으니, 그 습관이 가증스럽습니다. 이 뒤로는 저들이 만일 당년을 넘길 경 우에는 받지 않은 숫자가 비록 3,4백 동(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입급(入給)할 필요가 없게 해야 합니다. 저들이 부당하게 징색(徵索)하려는 의도에 대해 과조(科條)를 엄히 세운다면 뇌물을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될 것 같습니다.
왜관(倭館)을 수리하는 일은 참으로 하나의 더없이 큰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매양 수리할 때를 당하면 저들이 그들의 공장(工匠)을 데리고 나와서 한 칸에 들어갈 재목과 기와를 번번이 서너 칸에 들어갈 분량을 달라고 요구하고 한 달이면 끝마칠 역사(役事)를 번번이 5,6개월을 지연시킵니다. 이렇게 하는 즈음에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 까닭없이 더 지급하는 물력(物力)이 거의 절한(節限)이 없게 되어, 한번 수리를 거치게 되면 그때마다 수십만 냥의 비용이 허비되게 되니, 이는 한번 이혁(釐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대소 감동(監董)을 막론하고 반드시 우리 나라의 공장을 저들의 요청에 따라 개급(改給)하게 한다는 내용을 영원히 법규로 정한다면, 비용을 허비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연읍(沿邑)의 표선(漂船)에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두승(斗升)은 새로 만들어 낙인(烙印)한 다음 하나는 동래부(東萊府)에 두고 하나는 관수(館守)에 두며 또한 연읍(沿邑)에도 나누어 보내어 이것으로 양급(量給)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 이 법식을 무시하고 왕래하는 선박 가운데 각포(各浦)에 표박(漂泊)해 있는 선척에 대해 말[斗]로 요미를 양급할 경우, 말 위로 더 끌어담아 움켜넣는 것이 거의 6,7승(升)이나 됩니다. 이 뒤로는 호조에서 교정(較正)한 곡자(斛子)를 가져다 쓰게 하되 평목(平木)은 본부(本府)에서 보낸 것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전처럼 난잡하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런 폐단을 어떻게 죄다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만, 말을 잘하여 동요하지도 않고 굴하지도 않으면서 사리에 의거 절충시킨다면 또한 반드시 고칠 수 있는 방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에 의거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여러 달 동안 심하게 가물었다는 것으로 기우제(祈雨祭)를 날짜를 가리지 말고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재찬이 또 아뢰기를,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한 뒤, 경외(京外)의 각 아문(衙門)에서 거행하는 절목(節目)에 대해 이미 증거댈 만한 구례(舊例)가 없어 하나를 지적하여 거행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일전의 연교(筵敎)에서 법사(法司)의 좌아(坐衙)와 현방(懸房)에서 도살(屠殺)하는 것과 각처(各處)에서의 용형(用刑)에 있어 구애하지 말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만, 일정한 기일을 정하여 지금부터 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뒤로는 거행하는 데 있어 혼란을 야기시키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좌아(坐衙)하고 도살(屠殺)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월(當月)이라도 임시(臨時)가 아니면 구애하지 말게 하라. 이미 대신(大臣)의 주달이 있었으니 용형(用刑)에 대해서는 당월에는 우선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박종훈(朴宗薰)이 아뢰기를,
"산실청을 설치한 이후 대간(臺諫)의 전계(傳啓) 여부는 옛날 선조(先朝) 때 정원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때 승지가 피혐(避嫌)하는 신계(新啓) 이외에는 비록 행공(行公)하는 대간일지라도 또한 대각(臺閣)에 나아가 전계하지 않고 모두 정사(呈辭)와 호망(呼望)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앙주(仰奏)하니, 하교하시기를 ‘이왕의 전례가 과연 그러하다고 하니, 이런 내용을 양사(兩司)에 알리라.’ 하였습니다. 증거할 만한 전례가 이미 이러하니, 곧바로 감찰 다시(監察茶時)를 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번 품정(稟定)을 거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재찬이 또 아뢰기를,
"근래 경외(京外)에서 유소(儒疏)를 자주 올리는 것이 자못 삼사(三司)에서 서로 소장을 다투어 올리던 때보다 더한데 옛날에도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매양 청(廳)을 설치하고 번곤(藩閫)에서 전재(錢財)를 나누어 징수함에 있어 사도(四都) 3백 60고을에 배정(排定)된 숫자를 저리(邸吏)들을 추적해 잡아와서 강제로 먼저 바치게 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되면 형장(刑杖)을 마구 가하는 것이 법사(法司)에서 독책하여 징수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은 물론이고 또 반학(泮學)의 하례(下隷)들을 풀어서 멋대로 잡아다가 추징(推徵)할 적에 가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하례들도 빙자하여 저지르는 일이 많아 심지어는 시전(市廛)에서 온갖 방법으로 때리고 협박하면서 강탈하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과거에 이런 일 때문에 선조(先朝)의 수교(受敎)가 지극히 엄절(嚴截)하여 각사(各司)의 관원(官員)이 하례를 차송(借送)하는 경우에 이르러서도 관장(官長)을 논죄(論罪)하여 통렬히 금단(禁斷)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에 견주어 더욱 극심하기 때문에 저리(邸吏)들이 지탱하여 견뎌낼 수 없다고 합니다. 성균관(成均館)·사학(四學)·경조(京兆)에 분부하여 일절 엄히 금단하게 하며, 이뒤에 이렇게 할 경우에는 먼저 대사성과 경조의 당상부터 중한 쪽으로 논하여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연전(年前)에 대신(大臣)이 이 일 때문에 거론하여 아뢰었었는데 이제 또 대신이 아뢰는 내용을 들으니, 그런 폐단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사습(士習)이 이러하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아뢴 대로 경조윤(京兆尹)096) ·국자장(國子長)097) 을 엄히 신칙하여 논감(論勘)하겠다는 것으로 또한 신명(申明)시키고 법식으로 정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청주(淸州)의 만동묘(萬東廟)098) 는 곧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운명(殞命)할 적에 문인(門人)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여 의리에 의거 창건한 것으로, 이는 옛사람이 한 칸 모옥(茅屋)에서 소왕(昭王)을 제사지낸 의리099) 인 것입니다. 그뒤 이를 조정(朝廷)으로 추상(推上)하여 그 제도를 증가시키고 관(官)에서 제수(祭需)를 공급하게 되었으므로 사체의 존중(尊重)함이 대보단(大報壇)100) 의 버금에 해당되니, 이제 사사로이 설립할 사원(祠院)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이제 듣건대 그 만동묘의 문이 새로 화재를 겪었으므로 묘(廟)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본묘(本廟)의 재력(財力)으로는 영건(營建)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과거 영묘조(英廟朝) 때 고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 연석(筵席)에서 만동묘에 대한 일을 아뢰어 제전(祭田)을 증치(增置)하였는데 그뒤 수축(修築)하는 역사(役事)가 있으면 또 조가(朝家)에서 군정(軍丁)으로 도와 주었으므로 지금까지 사림(士林)에서 미담(美談)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이 묘문(廟門)을 다시 건립하는 것은 그 사역(事役)이 그리 호대(浩大)한 데 이르지 않는 것이니, 약간의 물력을 가지면 조획(措劃)할 수 있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돌보아 도와준다면 이것이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만 사람들이 듣기에 매우 좋을 것 같기에 감히 주달합니다.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속히 개건(改建)하게 한 뒤에 공곡(公穀)으로 회감(會減)하라는 내용으로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2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건설(建設) / 공업(工業) / 도량형(度量衡) / 과학-천기(天氣) / 사상(思想) / 풍속(風俗) / 인사(人事) / 신분(身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무역(貿易)
- [註 094]이정암(以酊菴) : 대마도에 있는 절의 이름.
- [註 095]
공목(公木) : 일본과의 물화(物貨) 교역(交易)을 공무(公貿)라 하고, 이 공무에 치르는 무명[木]을 공목(公木)이라 함.- [註 096]
경조윤(京兆尹) : 한성 판윤(漢城判尹).- [註 097]
국자장(國子長) : 성균관 대사성.- [註 098]
만동묘(萬東廟) :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던 묘(廟).- [註 099]
의리 : 주(周)나라 소왕(昭王)은 강왕(康王)의 아들인데, 남방(南方)을 순행하여 한수(漢水)에 이르니 형(荊)나라 사람이 아교로 만든 배로써 소왕을 건너게 하여 아교가 풀어지자 배가 파선되어 소왕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음. 당나라 헌종(憲宗) 14년(819)에 한유(韓愈)가 지은 양주 의성현 역기(襄州宜城縣驛記)에 의하면, "동북(東北)에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소왕정(昭王井)이라 하고, 이 우물 동북쪽으로 수십보 백성들이 모여 제사지낸다."고 하였음.- [註 100]
대보단(大報壇) : 임진 왜란 때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도와준 공(功)을 생각하여 숙종 30년(1704)에 대궐(창덕궁) 안에 설치한 제단(祭壇). 영조 25년(1749)에 태조(太祖)·의종(毅宗)을 합사(合祀)하였음.○次對。 左議政金載瓚啓言: "渡海譯官之行, 欲探關白之知否, 島主之情僞也。 的知其虛實眞僞然後, 始可入送通信使。 通信使之行, 已近五十年, 諸般約條, 擧多弛廢。 館倭輩奸弊日滋, 不可不一番修明釐飭。 且信使一事, 我旣爲彼除弊, 則彼亦宜思所以除弊, 事理當然矣。 今此渡海之行, 先以約條中, 當爲修擧者, 謬例之當爲革除者, 條列爲言, 使彼一一釐改。 且諸弊, 未必皆江戶之所知也, 若於島主及江戶執政相對處, 明辨痛說, 則亦足爲折奸祛弊之一助。 故臣與諸宰, 相議停當, 則爲十五、六條矣。 其中小小條件, 雖難一一枚擧仰達, 而撮其最大者, 則其弊之第一件, 卽副特送使船也。 前此約定歲遣二十船, 卽自第一船, 至第十七船及一、二、三特送。 而以酊菴, 卽玄蘇之受圖書者也, 至今依托書僧。 萬松院, 卽島主平義智約條時, 有功而設也, 然兩送使, 亦是二十船之外, 則已可謂謬例。 而況此副特送使船, 尤是謬例之謬例也。 不念我國之貽弊, 自爲彼人之生業, 任意往來, 因以爲例, 此宜永革者也。 中絶五船, 初因島主之懇請進上及公貿易, 依前式付送於一特送使船。 故進上價公木, 爲二十同, 公貿易價公木, 爲三十六同, 合公木爲五十六同之年年入給, 專無義意, 此亦爲弊之大者也。 告還差倭, 卽島主之自江戶還島後告知者也。 三年一次, 往來江戶, 已成前例, 則不必送使告知, 只以還島書啓, 順付於歲遣船便, 事甚便好。 而以島主之按例往還, 疊送差倭, 尤涉文具, 爲弊則甚, 此亦所當永革者也。 每年給倭公作米, 卽公木五百同之代也, 當初彼人之苦懇也, 只限五年許之。 及限滿, 稱以公作米, 請得裁判差倭出來, 又請退限, 又限五年許施矣, 因以爲例, 每五年限滿, 則彼人依例出來, 我國依例許給, 便成恒規, 極爲無義。 且裁判倭之每五年出來, 淹留百餘日之間, 支供之糜費極多。 此事極爲痛惋。 且單蔘, 卽朝廷禮賜之物也, 雖或品劣, 受賜者猶不敢點退。 而近來退蔘之弊, 殆無限節, 或至全退, 經年相持, 終歸於腐敗無用之境, 論以事體, 豈有如許道理乎? 公木入給, 自有年例定限, 每以當年新捧, 畢給於當年者, 卽是定規也。 近來彼人點退, 愈往愈甚, 其意不但在於徵賂而已。 惟以遷就不捧爲事, 其習可惡。 此後彼若踰越當年, 則未捧之數, 雖至三、四百同, 我不必入給。 彼不當徵索之意, 嚴立科條, 則似無徵賂之弊矣。 倭館修理事, 一莫大之痼(廢)〔弊〕 也。 每當修理之時, 彼人率彼中之工匠而出來, 一間容入之材、瓦, 輒以三、四間所入責出, 一朔可畢之役事, 輒以五、六朔延拖。 如是之際, 我國物力之白地加給者, 殆無限節, 一經修理, 輒費數十萬, 此不可不一番釐革。 自今爲始, 無論大、小監蕫, 必以我國工匠, 從彼願改給之意, 永爲定規, 則似無糜費之患矣。 沿邑漂船給料斗升, 新造烙印, 一置萊府, 一置館守, 亦爲分送沿邑, 以此量給矣。 近年以來, 不有此式, 往來船之漂泊各浦也, 斗量給料, 則斗上攫取, 幾至六、七升。 此後則以戶曹較正斛子取用, 而平木以本府所送件用之, 俾無如前亂雜之弊爲宜矣。 此弊豈易盡除, 而若能善爲說辭, 不撓不屈, 以理折之, 則亦必有可革之道矣。 請以此分付。" 從之。 又以屢朔亢旱, 命祈雨祭, 不卜日設行。 載瓚又啓言: "産室設廳後, 京外各衙門擧行之節, 旣無舊例之可據, 無以指一擧行。 日前筵敎, 有法司坐衙, 懸房設屠, 各處用刑, 勿拘爲之之命, 定以一定之期, 自今著式, 俾無此後迷於擧行之弊, 似好矣。" 敎曰: "坐衙設屠, 雖當朔, 非臨時, 勿拘爲之。 旣有大臣之所奏, 用刑則當朔姑停。" 承旨朴宗薰啓言: "産室設廳以後, 臺諫傳啓與否, 昔在先朝, 有令政院考奏之命。 其時承旨, 以避嫌新啓外, 雖行公臺諫, 亦無詣臺傳啓, 皆以呈辭呼望之意仰奏, 下敎若曰, ‘已例果然云, 以此意, 兩司知悉, 可也。’ 可據之例, 旣如此, 似當直爲監察茶時。 而不可不一經稟定, 故仰達矣。" 上可之。 載瓚又啓言: "近來京外儒疏之頻繁, 殆過於三司交章之時, 未知古亦如此。 而每謂設廳分徵錢財於藩閫, 四都三百六十邑排定數爻, 推捉邸吏, 勒令先納, 若或少遲, 則刑杖交加, 無異法司之徵債, 且縱泮學下隷, 推徵橫挐, 無處不到, 下隷亦多憑藉, 甚至於攫奪市廛, 敺脅百端云。 昔年以此事, 先朝受敎, 至爲截嚴, 至於各司官員之借送下隷者, 論罪官長, 使之痛加禁斷。 而今乃比前尤甚, 邸吏輩莫可支堪云。 分付成均館、四學、京兆, 一切嚴禁, 後若如此, 則先自大司成京兆堂上, 從重論勘。" 敎曰: "年前大臣, 以此事提奏, 而今又聞大臣所奏, 其弊至今猶在云。 士習如此, 實爲慨歎。 依所奏嚴飭京兆尹、國子長論勘事, 亦爲申明定式。" 吏曹判書南公轍啓言: "淸州 萬東廟, 卽先正臣宋時烈臨命, 托其門人權尙夏, 義起創建者也, 此是古人一間茅屋, 祭昭王之義。 而其後推上朝廷, 增其制度, 官供祭需, 事體之尊重, 亞於大報壇, 今不可以私設祠院論矣。 今聞其廟門, 新經回祿, 不成廟貌, 而以本廟財力, 無以經紀云。 昔在英廟朝故相臣閔鎭遠, 筵白廟事, 增置祭田。 其後修樂之役, 又自朝家, 助給軍丁, 至今爲士林之美談。 今此廟門改建, 事役不至浩大, 若得如干物力, 可以措劃。 若自朝廷顧助, 則此雖一事, 聽聞甚好, 故敢達。 令該道道臣, 從速改建後, 以公穀會減之意分付"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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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