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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1권, 순조 8년 8월 1일 갑오 1번째기사 1808년 청 가경(嘉慶) 13년

비국의 유사 당상 서영보와 심상규를 소견하고 정사에 관해 논하다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를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바친 책자를 지금 바야흐로 고람(考覽)하고 있는데, 그 나머지는 언제쯤 공역을 마칠 것이며, 장차 몇 권이나 되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정서(正書)를 시작하였는데, 권수는 10책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행(燕行) 때 급포(給包)한다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당초에 정례(定例)는 삼(蔘)으로 포(包)를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은포(銀包)로 대신하고, 더러 잡물(雜物)을 섞어 쓰기 때문에 또한 잡포(雜包)라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신(功臣)에게 사패(賜牌)하는 전결(田結)과 노비(奴婢)는 본가에서 매번 죄다 절수(折受)하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공신에게 사패할 경우 원래 지명(地名)을 정하여 내려 준 일이 없었고, 본가에서 잡고 정하여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북관 개시(北關開市)가 폐단이 매우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근심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개시에 대한 법은 옛날에 정한 규례(規例)가 없었는데, 고(故) 북백(北伯) 신 이이장(李彛章)이 상호(商胡)의 나오는 수를 작정하여 어김이 없게 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여러 편(篇)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재용편(財用篇)은 경비(經費)를 출납(出納)하는 정사에 대해 갖추 진술하였고, 군제편(軍制篇)은 융무(戎務)를 절제하는 방도에 대해 상세히 실려 있으므로, 예람(睿覽)하시는데 매우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물편(貢物篇)은 진배(進排)한 물종(物種)의 값과 마련한 수효가 매우 많은데, 당초에 값을 정한 것이 오로지 적게 취한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공가(貢價)와 물가(物價)가 현저하게 다른 것이 매우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주(小註)에 실린 각 고을에서 진배하는 월령 삭선(月令朔膳) 또한 공가(貢價)를 회감(會減)070) 하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물선은 모두 해도(該道)의 저치미(儲置米)로 회감합니다."

하고, 서영보가 말하기를,

"혜청(惠廳)을 설치하기 전에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경기에서 먼저 대동법(大同法)을 시작하며 물산(物産)을 참작해서 가본(價本)을 상정(詳定)하고 매달 진상하는 여러 물종을 모두 대동(大同)과 저치미로 회감하였습니다."

하고, 심상규가 말하기를,

"판적(版籍)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이 가장 상세하게 갖추어졌습니다. 대개 옛날에 양역의 폐단은 실로 이것이 백성들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이었으므로, 숙묘조(肅廟朝)부터 이 상황에 깊이 진념(軫念)하여 호포(戶布)와 감포(減布)의 말을 어지럽게 올렸으나, 감포는 공용(公用)에 해롭고 호포는 갑자기 시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영묘조에 이르러 결전(結錢)을 처음 정하였는데, 이른바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와 선무포(選武布)의 명색이 모두 균역(均役)의 제도에 들어갔으니, 그것은 2필의 역사에 견주어 진실로 힘을 펴고 폐단을 구제하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폐단이 되어 도로 백성들의 원망이 많아졌으므로, 선왕조 때 일찍이 균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자, 마땅히 그 자손의 성쇠(盛衰)를 징험하겠다고 하교하셨습니다."

하고, 서영보가 말하기를,

"당(唐)나라의 조용조(調庸租)의 법으로 말하건대, 호조의 전세(田稅)는 조(租)이고 병조의 가포(價布)는 용(庸)이고 혜청의 대동(大同)은 조(調)인데, 대개 토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사람이 있으면 용(庸)이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끝내 상세하게 구비되지 못하여 황구(黃口)·백골(白骨)에게 징세(徵稅)하는 것이 곳곳에서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나라가 무사하지만, 만약 벗어나 불행한 일이 있으면 지금의 모양으로 어떻게 변란에 대처하겠는가? 대개 오위(五衛)를 혁파하고 군문(軍門)을 설치하고부터 외방의 군정(軍政)에 대한 폐단이 갈수록 더욱 이와 같아졌으니, 어떻게 하면 특별히 경장(更張)할 방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군문을 설치한 후부터 어영군(御營軍)·금위군(禁衛軍)·포보(砲保)·아병(牙兵)·기병(騎兵)·보병(步兵)의 명칭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상번(上番)하여 혹 베를 바치기도 하고, 또 족보(族保)·인보(隣保)가 있어 힘을 합해서 장송(裝送)하는 바탕을 삼기도 하지만, 그 나머지 속오군(束伍軍)의 경우에는 모두 지극히 가난하여 의뢰할 바가 없는 무리입니다. 대개 우리 나라는 고역(苦役)이 군정(軍丁)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신법(新法)을 만들 필요는 없고, 수토신(守土臣)을 엄중히 신칙하여 첨정(簽丁)에 대한 점검을 거듭 밝히면, 거의 실효(實效)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읍의 표하군(標下軍)과 양영(兩營)의 군사들의 번상(番上) 및 척후병(斥堠兵)·복병(伏兵)이 모두 속오군의 명색인데, 그 모양을 보면 소활(疏闊)함이 막심하다. 일차 사습(日次私習) 때에도 또한 좌작 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척계광(戚繼光)이 말하기를, ‘향곡(鄕曲)의 우매한 군졸도 시정(市井)의 교활한 무리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대개 향군은 기한(饑寒)을 갖추 겪어서 보통 때 근고(勤苦)하였으므로, 갑자기 적군과 대진(對陣)하여도 어모(禦侮)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소 연습하면, 둔하고 용렬하여 비록 효맹(驍猛)한 경군(京軍)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완급(緩急)에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논하면, 향군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군용(軍容)에 있어서 오로지 척법(戚法)만 숭상하는데, 월도(月刀)·십팔기(十八技)는 모두 적군과 대진하여 쓸 만한 법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송(宋)나라 악비(岳飛)는 군사를 쓰는 데 가장 익숙하였는데, 삼련(三練)의 법이 있었으니, 연수(練手)·연담(練膽)·연족(練足)입니다. 연수란 궁검(弓劍)을 교묘하게 쓰며 몸을 숨긴 채 적을 방어하는 것이고, 연담이란 지략(智略)을 운용하여 적을 보고도 굽히지 않는 것이고, 연족이란 버선에 모래를 담아 두었다가 적과 대진하면 벗어버리는 것이니, 대개 발을 가볍게 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또 연인(練人)·연목(練目)의 법이 있는데, 이것은 장수된 자가 스스로 깨닫는 신묘함입니다. 오늘날의 월도·십팔기가 비록 삼련의 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또한 전혀 쓸모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버선에 모래를 담는 법은 곧 갑옷을 무겁게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군사를 잘 훈련시키는 자가 군사들에게 철갑(鐵甲)을 겹쳐 입게 하였다가, 전쟁에 임해서는 벗어버리게 하였으니, 또한 몸을 가볍게 하여 용기를 배양하는 방도인 것이다. 근래에 군사들을 점열할 때 각각 초리(草履)·화구(火具)·전대(纏帶)·표자(瓢子)를 지니게 하는 것 또한 좋은 법이다."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군심(軍心)을 얻는 것이 근본이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은 말단입니다. 비록 구궁(九宮)·육화(六花)의 법이 있다 하더라도 인심을 잃는다면, 방촌(方寸)의 안이 모두 적국(敵國)이 될 것이니, 모두 장수 된 자가 수시로 지도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영문(營門)과 각 고을의 여러 진에는 군기(軍器)가 비치(備置)되어 있는데, 정교하고 예리하게 한다면 변란에 임하여 가져다 쓸 수 있겠는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근래에 이른바 수보(修補)한 것이 도리어 고물(古物)의 완전하고 튼튼한 것보다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조간자(趙簡子)동안우(董安于)로 하여금 진양(晉陽)을 관장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에 전죽(箭竹)으로 벽을 만들고 철촉(鐵鏃)으로 마룻대를 채웠으니, 옛사람의 나라를 위한 성력(誠力)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승지 이광익(李光益)이 말하기를,

"안주(安州)의 군기고(軍器庫) 가운데에 수십 개의 큰 항아리를 묻어 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납촉(蠟燭)·고유(膏油)로서, 겉면은 먼지 흙과 다름이 없으나, 가운데에 있는 것은 흡사 신성(新盛)한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설시(設始)하여 미리 대비하는 뜻이 어찌 깊고 원대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기 가운데 궁시(弓矢)·간척(干戚)·창검(鎗劍)·총포(銃砲) 중 어떤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開闢)한 후에 곧 궁시(弓矢)가 있었으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호시(弧矢)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부족한 것은 음습(陰濕)할 때 조화를 운용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명중시키는 것이 2, 3백 보(步)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이 가까워진 후에야 비로소 편전(片箭)을 쏘게 되는데, 재빠르고 굳세고 멀리 쏘아야만 가장 군중(軍中)의 정교한 기술로 여겼으나 모두 조총(鳥銃)에 뒤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총포의 제도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옷을 뚫고 뼈를 꿰뚫어 사람이 확실하게 죽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총포가 나오면서 명장(名將)이 없었다는 말은 과연 믿을 만하다."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주(周)나라 때부터 이미 이 제도가 있었는데, 명(明)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은 화거(火車)에 포를 적재하고, 싸울 때에는 적과 대진하여 연달아 쏘고 그쳤을 때에는 겉에서 둘러싸 성을 만들었으니, 이른바 태산(泰山)의 높이와 삼척(三尺)의 한계는 거마(車馬)가 능이(凌夷)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훈국에서도 아직 그 제도가 있었으므로, 효묘(孝廟)께서 특별히 1백여 냥(兩)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고, 이광익이 말하기를,

"왜국(倭國)에서는 오로지 총포를 숭상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임진란을 겪고부터 이 법이 구비되었는데, 명목 또한 많습니다."

하고, 서영보는 말하기를,

"나라의 대정(大政)에 있어서 경비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없으면, 나라는 나라다울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의 경용(經用)이 고갈되었는데, 집집마다 혜택을 입게 하는 방책은 양전(量田)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두루 간국(幹局)에 통달한 사람을 양전사(量田使)·균전사(均田使)로 차출하여 그 세금과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머지 은결(隱結)을 적발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속여서 바치는 한탄이 없고 나라는 경용이 넉넉해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에게 반사(頒賜)하는 녹봉이 1년 동안 얼마나 되며, 한(漢)나라의 만석군(萬石君)이란 것은 또한 작위(爵位)의 높고 낮은 것으로 따졌는가, 녹봉이 많고 적은 것으로 따졌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1년 동안 반사할 녹봉은 합계가 1만 7천여 석이 되는데, 군자창(軍資倉)에는 이 수가 있지 않습니다. 한나라 만석군은 석분(石奮)071) 의 부자(父子) 5인의 질록(秩祿)이 각각 2천 석이었으므로, 합쳐서 계산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적(糶糴)의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10분의 1을 모곡(耗穀)으로 받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하였으며, 재해를 입은 해에 고루 나누어 주면 백성들이 과연 실효(實效)를 받는가?"

하니, 심상규가 말하기를,

"항상 고루 흩어 주었다가 거두어 들이는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늘어나 많습니다. 모곡을 받는 것으로 말하면, 바로 참새나 쥐가 먹어서 줄어든 것인데, 이것을 백성들에게 더 취하여 그 줄어든 것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1석마다 1두(斗) 5승(升)을 취하여 혹 공곡(公穀)에 돌리거나 혹은 관용(官用)을 만듭니다. 모곡을 받아들이는 제도는 《대전(大典)》에 실려 있지 않고 《속전(續典)》에 비로소 보이는데, 세종조(世宗朝) 때에는 대구(大丘)의 적모(糴耗)를 견감해 주었고, 선묘조(宣廟朝) 때에는 모곡이 조금 있다는 계사(啓辭)가 있었으니, 환곡(還穀)에 모곡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제도 또한 오래 된 것입니다."

하고, 서영보가 말하기를,

"재(災)란 시재(施災)하는 것을 말합니다. 토지가 있는 백성은 농사가 흉년이 들면, 횡렴(橫斂)할 수 없으므로, 집재(執災)할 때 황손(蝗損)·해손(海損)을 미처 옮기지 않거나 늦게 옮겼다는 등의 명색으로 각각 재감(裁減)하는데, 바로 위에서 덜어 백성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서북(西北)에서는 비총(比摠)으로 본도에서 회감(會減)하고, 삼남(三南)에서는 집재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하고 감사가 묘당에 보고하면, 비로소 계품하여 구획(區劃)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그 지역에서 제급(除給)하는 것이 아니므로, 백성들이 받는 혜택은 적고 나라에서 줄여서 받아들이는 것은 많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06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왕실(王室) / 구휼(救恤) / 신분(身分) / 재정-진상(進上) / 사법-법제(法制) / 무역(貿易)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인사(人事) / 외교-야(野) / 농업(農業)

  • [註 070]
    회감(會減) : 받을 것과 줄 것을 상쇄하여 회계 처리하는 것.
  • [註 071]
    석분(石奮) :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사람.

○甲午朔/召見備局有司堂上徐營輔沈象奎。 上曰: "向來所進冊子, 今方考覽, 其餘則何當訖工, 而將爲幾卷乎?" 榮輔曰: "方始正書, 而卷數則可爲十冊矣。" 上曰: "行時給包者, 是何物乎?" 榮輔曰: "當初定例, 則以蔘爲包, 而近來則代以銀包, 或參用雜物, 故亦曰雜包矣。" 上曰: "功臣賜牌田結、奴婢, 自本家每盡折受乎?" 榮輔曰: "功臣賜牌, 元無定地名賜給之事, 自本家執定願受矣。" 上曰: "近來北關開市, 弊端甚多云, 何以則可無此患乎?" 榮輔曰: "開市之法, 古無定規, 故北伯臣李彛章, 酌定商出來之數, 無得違越矣。" 上曰: "《萬機要覽》諸篇中, 何者爲最切要乎?" 榮輔曰: "財用篇, 備陳經費出納之政, 軍制篇, 詳載戎務節制之方, 深有助於睿覽。 而貢物篇, 則進排物種價直, 磨鍊數爻甚多, 而當初定價, 專出於薄取之意, 故貢價與物價懸殊者, 甚多矣。" 上曰: "小註所載月令朔膳之自各邑進排者, 亦以貢價會減乎?" 象奎曰: "各邑進上物膳, 則皆以該道儲置米, 會減矣。" 榮輔曰: "惠廳設置之前, 故相臣李元翼, 先始京畿大同法, 參酌物産, 詳定價本, 月令進上朔膳諸種, 皆以大同儲置會減矣。" 象奎曰: "版籍爲本, 而其中良役變通, 最爲詳備。 蓋昔良役之弊, 實是生民切骨之冤, 故粤自肅廟, 深軫此狀, 戶布、減布之說, 紛然而進, 而減布則有害公用, 戶布則猝難施行。 至于英廟, 以結錢創定, 而所謂漁ㆍ鹽ㆍ船稅、選武布名色, 皆入均役之制, 其視二匹之役, 固可謂紓力捄弊。 而到今爲弊, 還多民怨, 故先朝嘗有均役主張之人, 當驗其子孫盛衰之敎矣。" 榮輔曰: "以之調、庸、租法言之, 戶曹田稅, 租也, 兵曹價布, 庸也, 惠廳大同, 調也。 蓋有土則有租, 有人則有庸, 有戶則有調。 而我國此制, 終未詳備, 黃口、白骨之徵, 在在皆然矣。" 上曰: "昇平日久, 國無事, 而若脫有不幸, 則以今貌樣, 何以應變乎? 蓋自五衛罷而軍門設, 外方軍政之弊, 轉益如是, 何以則可有別般更張之策乎?" 象奎曰: "自軍門設置之後, 有御營軍、禁衛軍、砲保、牙兵、騎兵、步兵之名, 此則皆是上番, 或納布, 且有族保、隣保, 以爲合力裝送之地, 而其餘束伍軍者, 皆是至貧無賴之類也。 蓋我國苦役, 莫甚於軍丁。 今不必更生新法, 嚴飭守土之臣, 申明其點簽, 則庶見實效矣。" 上曰: "各邑標下、兩營番上及斥堠、伏兵, 皆是束伍軍名色, 而見其貌樣, 踈闊莫甚。 其於日次私習之時, 亦能知坐作進退之節乎?" 榮輔曰: "戚繼光有言曰, ‘鄕曲愚迷之卒, 勝於市井油滑之徒。’ 蓋鄕軍, 則備經饑寒, 尋常勤苦, 故倉卒臨(陳)〔陣〕 , 可以禦侮。 而其常時錬習, 則鈍滯茸闒, 雖不及於京軍之驍猛, 若論緩急可恃, 則恐莫如鄕軍矣。" 上曰: "我國軍容, 專尙法, 而月刀、十八技, 皆是臨陣可用之法乎?" 榮輔曰: "岳飛用軍最精, 有三練之法, 練手、練膽、練足也。 練手者, 妙用弓劍, 藏身禦敵也, 練膽者, 運用智略, 見敵不屈也, 練足者, 貯沙於襪, 臨陣則脫。 蓋爲輕足勇赴也。 又有練人、練目之法, 此則爲將者自得之神。 而今之月刀、十八技等藝, 雖不及三練之法, 而亦不爲全然無用矣。" 上曰: "沙襪之法, 卽重甲之意也。 古者善練兵者, 使之重被鐵甲, 臨戰則脫去, 亦輕身養勇之道也。 近來軍點時, 各持草履、火具、纏帶、瓢子, 亦是好法矣。" 象奎曰: "得軍心, 本也, 練軍藝, 末也。 雖有九宮、六花之法, 若失人心, 則方寸之內, 皆爲敵國, 皆在爲將者, 隨時指導也。" 上曰: "京外營門及各邑諸鎭, 有軍器備置而能精利, 可以臨亂取用乎?" 榮輔曰: "近所謂修補者, 反有損於古物之完固矣。 昔趙簡子, 使董安于, 掌治晋陽, 乃以箭竹爲壁, 鐵鏃充棟, 可見古人爲國誠力矣。" 承旨李光益曰: "安州軍器庫中, 有數十大甕埋置者, 乃是蠟燭、膏油也, 外面則與塵土無異, 而存諸中者, 宛若新盛。 然古人設始預待之意, 豈不深遠乎?" 上曰: "我國軍器中, 弓矢、干戚、鎗劍、銃砲, 何者爲最緊乎?" 榮輔曰: "開闢之後, 卽有弓矢之制, 故人之生也, 必有弧矢。 但欠陰濕之時, 造化莫運, 且其所中, 不過二、三百步, 故敵近然後, 始發片箭, 疾勁遠射, 最爲軍中之精技, 而皆不免巽於鳥銃矣。" 上曰: "銃砲之制, 未知創在何世, 而穿甲透骨, 人無不立死, 所謂銃砲出而無名將者, 其言果信矣。" 象奎曰: "自時已有此制, 而天將祖承訓, 以火車積砲, 戰則臨陣連放, 止則外圍作城, 所謂泰山之高、三尺之限, 車馬之不得凌夷者此也。 訓局尙有其制, 故孝廟特造置百餘兩矣。" 光益曰: "倭國, 專尙銃砲, 故我國自經壬辰, 此法備具, 名目亦多矣。" 榮輔曰: "有國之大政, 莫重於經費。 古語云, ‘國無三年之蓄, 國不得爲國。’ 顧今經用匱竭, 戶惠之策, 莫若量田, 若以周通幹局之人, 差爲量田、均田之使, 均其稅役, 摘發餘隱, 則民無冒納之歎, 國有裕用之效矣。" 上曰: "百官頒祿, 一年爲幾許, 而之萬石君者, 亦以爵之高下, 爲祿之多少乎?" 象奎曰: "一年頒祿, 合爲一萬七千餘石, 而軍資倉, 則不在此數矣。 之萬石君, 石奮之父子五人, 各秩二千石, 故合而計之矣。" 上曰: "糶糴之法, 其來已久, 十一取耗, 創在何時, 而災年分俵, 則民果受實效乎?" 象奎曰: "常平散斂之法, 其來已久, 而我朝因之, 名色滋繁。 耗之爲言, 乃是雀、鼠之耗縮, 而加取於民, 以補其縮之謂也。 每石取一斗五升, 或歸公穀, 或作官用。 取耗之制, 不載《大典》, 始見於《續編》, 而世宗朝減大丘糴耗, 宣廟朝有稍在耗穀之啓, 還穀取耗, 其制亦久矣。" 榮輔曰: "災者, 施災之謂也。 有土之民, 年事失稔, 則不可橫斂, 故執災之時, 以蝗損、海損, 未移晩移等名色, 各爲裁減, 乃是損上恤民之意也。 西北則以比摠, 會減於本道, 三南則執災報營, 而監司轉報廟堂, 始乃啓稟區劃。 而此非卽地除給者, 故民之蒙惠少, 國之減捧則多矣。"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06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왕실(王室) / 구휼(救恤) / 신분(身分) / 재정-진상(進上) / 사법-법제(法制) / 무역(貿易)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인사(人事) / 외교-야(野) / 농업(農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