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 목만중이 이익운의 죄를 논하는 상소문
지사(知事) 목만중(睦萬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이익운이 군부(君父)를 안중에 두지 않고 조정을 상시(嘗試)한 죄를 이미 옥당의 차자와 대간의 계사에서 다 말하였습니다만, 을묘년153) 에 사옥(邪獄)을 다스릴 때 그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일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돌아온 것은 비단 전해지는 말이 낭자할 뿐만이 아니라 이미 호남의 유통(儒通)에 올랐습니다. 두 집안에서 혼자 몸으로 두 집을 서로 연결시켜 별원(別院)을 사서 차지하고는 날마다 사도(邪徒)와 더불어 모여 설법(說法)하고 스스로 표호(標號)를 가수헌(嘉樹軒)이라 하며 여러 차례 황사영(黃嗣永)의 초사(招辭)에 들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형 이정운(李鼎運)은 곧 그 아들의 생부(生父)인데, 그가 죽었을 때 사도의 괴수인 이가환(李家煥)이 친척도 사생(師生)도 아니면서 상복을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히 괴이쩍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혈당(血黨)·사우(死友)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 아들이 아비처럼 섬긴 자는 홍낙민(洪樂敏)이고, 결교(結交)한 자는 황사영(黃嗣永)·이학규(李學逵)입니다. 지휘를 듣고 휴척(休戚)을 같이 했으니, 이는 실로 귀와 눈이 있는 자라면 익히 아는 바입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아무리 그가 교활하다 할지라도 감히 한 마디도 스스로 변명할 수 없는 것인데, 홀로 유통을 가리켜 가짜 유통이라 하면서 핑계댈 패병(欛柄)으로 삼으니, 그 계책이 또한 소루합니다. 대개 사도(邪徒)들이 체포당한 뒤 그 아비가 약간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홀로 법망을 벗어났고, 스스로 재상의 아들임을 의지하여 다시 도망한 무리들의 소굴이 되었는데, 쥐구멍을 막지 못하여 불꽃이 장차 이르고 집을 이은 게구멍이 큰 파도를 막지 못해 반드시 하늘까지 뒤덮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대승기탕(大承氣湯)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선비를 밖에서 찾아 구하지 못했던 나머지, 문하의 한 유생이 신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자를 취하여 스스로 통수(通首)를 삼았던 것이고, 한 유생은 일로 인해 잠시 나갔으나 평소에 강토(講討)한 것이 있었으므로 또한 그 이름을 썼던 것입니다. 저 유생이 조금 다른 견해가 있어 과연 깜짝 놀라고 괴이쩍게 여겼다면, 어찌 노여운 기색과 꾸짖는 말로 즉시 절교를 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까지 몇 십 년 동안 신의 집에 머무르면서 조금도 그런 기미가 없었습니다. 이익운이 말한 바 ‘소매에 편지를 넣고 찾아와 보였는데, 그 편지가 아직도 있다.’는 것은 사정이 이러합니다. 대개 들으니, 그 편지는 이익운이 그 집안의 객으로 하여금 속여서 빼앗아간 것이라 하고, 그 유생은 시종 찾아가 보지 않았다 합니다. 그리고 유생의 아비가 지난 가을 서울로 들어오자 여러 가지로 꾀어 와서 조문케 하고는, 지금 이에 끌어 맞추어 말을 하면서 천청(天聽)을 속이니, 임금에게 고하는 사체가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그 아들의 물고(物故)는 앞도 뒤도 아닌 통문이 나온 다음날 있었고, 병이 없던 소년이 아침에 말을 타고 들어갔다가 저녁에 시체가 되어 나왔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사(三司) 중에 유한녕(兪漢寧)·박명섭(朴命燮)의 상소가 모두 명백하게 말하고 드러나게 배척하였으며, 호군(護軍) 최중규(崔重奎) 또한 말을 하였던 것이니, 비단 이윤행(李允行) 한 사람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누차 나왔다.[屢出]’는 데서의 ‘누(屢)’란 글자를 가지고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면서, 유독 홍재영(洪梓榮)의 공초만 끌어대고 있지만, 거기에는 ‘같이 배운 자는 정동(貞洞)의 이명호(李明鎬)이고, 지난해 가을 이명호를 찾아가 만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윗구절의 ‘함께 배웠다.’는 말을 잘라 버리고 단지 아랫구절의 모호한 말만 진달하였으며, 또 황사영의 초사와 같은 것은 그냥 두고 논하지 않았으니, 비록 위로 천청을 속이고자 하지만 유독 천지와 귀신은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까? 신이 더욱 해괴히 여기고 분해 하는 것은 감히 선조(先朝)께서 그 아들에게 이름을 내려 주신 것과 그 자신이 오랫동안 향안(香案)을 모신 것을 가지고 자중(藉重)하는 밑천으로 삼고 있는데, 미치고 어리석은 어린아이가 끝내 사학에 물들게 됨을 어찌 미리 올챙이 적에 통촉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이미 선조의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고, 선왕의 척사(斥邪)하시는 하교를 받들었었는데, 집안에서 사학(邪學)을 양성하였고 차마 다시 일이 발생한 뒤에 엄호(掩護)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상소에서 심환지(沈煥之)·김관주(金觀柱)에게 해를 입었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심환지가 당로(當路)하고 있던 날 앞서는 승탁(陞擢)했고 뒤에서는 안번(按藩)하게 하였습니다. 대간의 상소가 준열하게 나온 뒤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였는데, 단지 말감(末勘)만을 청하여 대략 통탄해 하는 말은 없고 현저하게 애석해 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심환지·김관주에게 미움을 당한 것이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까? 그가 서울에서 지체하며 배회한 것은 무슨 그만두지 못할 일이 있었던 것인데, 죄명이 모두 벗겨지지 아니하고 아비의 죽음에 막 장례를 치르자마자 허둥지둥 와서 강루(江樓)를 차지하였으니, 식자들이 진실로 이미 그 부정(不靖)한 버릇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안되어 사얼(邪孼)이 날뛰고 인심이 궤열(潰裂)되자 이달에는 한 통, 다음달에는 한 상소로 배포(排鋪)한 기괄(機括)이 모두 이가환 등 여러 역적들에 대해 환신(幻身)·호법(護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격을 당한 사람은 모두 평소에 척사(斥邪)하던 사람이고 추켜올린 사람은 곧 그 집안을 추부(趨附)하던 무리였으니, 지목하는 바가 돌아갈 곳이 있고 종적을 가리기 어려웠으며, 필경에는 그 자신이 투소(投疏)하여 진짜 속셈이 죄다 드러났습니다. 신은, 아마도 이 무리들은 끝내 교화되기 어려워 다시 사람 무리에 낄 수 없을 것이니, 그 끼쳐질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이익운(李益運)의 일은 그 자식을 위한 마음은 인지상정이니, 경의 말 또한 너무 과격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96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가족(家族) / 사상-서학(西學)
- [註 153]을묘년 : 1795 정조 19년.
○丙戌/知事睦萬中疏。 略曰:
今玆李益運之眼無君父, 嘗試朝廷之罪, 己悉於堂箚臺啓, 而當乙卯治邪之時, 其子之棄父逃走, 事過始還, 非但傳說狼藉而已, 已登於湖南儒通矣。 兩家獨身, 二宅相連, 而買占別院, 日與邪徒, 聚會設法, 私自標號曰嘉樹軒, 屢入嗣永之招者是也。 渠兄鼎運, 卽其子之生父, 而其死也, 邪魁家煥非親戚非師生, 而爲之加麻, 人皆駭矚。 而渠則恬然不怪, 苟非血黨死友, 豈至於是乎? 其子之所父事者, 樂敏也, 所交結者, 嗣永、學逵也。 惟指揮是聽, 惟休戚是同, 此實有耳目者之所稔知也。 凡此數事, 雖以渠之狡黠, 不敢措一辭自明, 而獨指儒通爲僞通, 以爲藉口之欛柄, 其計亦踈矣。 蓋當邪徒就捕之後, 以其父之略有勢力, 獨爲漏網, 自倚宰相之子, 復作逋逃之藪, 鼠竇不塞, 烈慆將至, 延屋蟹穴, 不防洪濤, 必至滔天。 此時不得不急下大承氣湯也, 故士不外索取之, 門下一儒生, 現住臣家, 自爲通首, 一儒生則因事暫出, 而講討有素, 故亦書其名。 彼儒生, 稍有異同, 果爲驚怪, 則豈不怒色誶語, 卽地告絶? 而今幾十年, 宿留臣家, 少無幾微。 益運所云, ‘袖書來見, 其書尙在’ 者, 蓋聞其書, 則益運使其客, 賺取攫去, 而其儒生, 則終始不爲往見。 儒生之父, 昨秋入京, 則多方句引, 使之來弔, 而今乃湊合爲言, 欺罔天聽, 告君之體, 果如是乎? 其子之物故, 不先不後, 正在通文翌日, 無病少年, 朝焉騎馬而入, 暮以屍出, 人皆致訝。 故三司中如兪漢寧、朴命爕之疏, 皆明言顯斥, 而護軍崔重奎亦言之, 不但李允行一人而已。 渠以屢出之屢字, 謂之爽實, 獨引梓榮之招有曰, ‘同學者, 貞洞 李明鎬, 上年秋往見明鎬’ 云云。 而今乃截去上句同學之語, 只陳下句糢糊之語, 又如嗣永之招, 存而不論, 雖欲上欺天聽, 獨不畏天地鬼神乎? 臣之尤所駭憤者, 敢以先朝錫名於其子、渠身之久侍香案, 爲藉重之資, 而狂駭一童子之終染邪學, 何以預燭於蝌蚪時也? 渠旣荷先朝罕世之恩, 承先王斥邪之敎, 而釀成邪學於家室之內, 忍復掩護於事發之後乎? 渠疏以見害於煥、觀爲言, 而煥之當路之日, 先之以陞擢, 繼之以按藩。 臺疏峻發之後, 廟堂稟處, 而只請末勘, 略無痛惋之辭, 顯有愛惜之心, 見嫉於煥、觀者, 亦如是乎? 渠之遲回京輦, 有何不可但已之事, 而罪名未盡除, 父死纔葬, 忙忙來據江樓, 識者固已慮其有不靖之習矣。 曾未幾何, 邪孽跳踉, 人心潰裂, 今月一通, 來月一疏, 排鋪機括, 純是幻身護法於家煥諸賊。 被攻者, 皆平昔斥邪之人, 噂者, 卽渠家趨附之徒, 指目有歸, 踪跡難掩, 畢竟身自投疏, 眞贓畢露。 臣恐此輩終難率化, 復廁人類, 則其流之弊, 有不可勝言。
批曰: "李益運事, 爲其子之心, 人之常情, 卿言亦大過激矣。"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96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가족(家族)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