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순조실록10권, 순조 7년 12월 13일 경진 2번째기사 1807년 청 가경(嘉慶) 12년

이익운이 죽은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본래 자식을 낳지 못하여 신의 형의 아들을 데려다 아들로 삼고, 옛날 선조(先朝) 때 이름을 짓고 자(字)를 지어 주었습니다만, 나이 겨우 약관에 갑자기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운 기미가 암암리에 엿보이고는 드디어 터무니없이 갱감(坑坎)케 하고, 이르지 못하는 데 없는 참독한 말이 원숭이의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신은 능히 배를 가르고 창자를 터뜨려 그 억울함을 밝힐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또 신이 자애(慈愛)하지 못한 죄였습니다. 전후로 신을 협지(協持)한 것은, 하나는 신의 아들이 신유년150) 가짜 유통(儒通)을 만났다는 것이요, 하나는 신 자신이 채제공(蔡濟恭)의 심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은 채제공에 대해 어린 아이 적부터 수업하여 그 문에 드나든 지 거의 40년입니다. 더욱이 병집(秉執)한 것이 같고, 진퇴 또한 같았습니다. 선조(先朝)께서 신을 취하신 것이 여기에 있었음은 또한 온 세상이 같이 아는 바입니다. 경신년151) 대휼(大恤)을 당한 뒤 심환지(沈煥之)·김관주(金觀柱)고주(孤注)152) 가 전적으로 채제공에게 있었고, 신은 그 무리들의 눈 속의 못이 되었으므로, 병사를 옮겨 먼저 공격하는 계책이 맨먼저 신의 몸에 미쳤던 것입니다. 신의 아들이 요절한 것이 때마침 가짜 유통의 뒤에 있었는데, 평소 신을 미워하던 자들이 그것을 기화(奇貨)로 여겨 ‘이것으로 인해 오멸(汚衊)하면, 마치 악취에 젖고 불결한 것을 뒤집어 쓴 것처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듯 없는듯, 그러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생각케 하여 밝힐 증거가 없고 벗어날 길이 없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이윤행(李允行)의 상소가 나와 오로지 유통을 증거로 삼았는데, 앞서는 유통을 뛰우고 이어 대장(臺章)을 올려 전후로 조응(照應)한 것이 손바닥을 가리키듯 환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짜 유통을 꾸며내던 날 응모(應募)하는 사람이 없자, 원래 시골에 있고 서울에 들어오지 아니한 두 유생(儒生)을 모록(冒錄)하여 유통이라 가칭(假稱)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혹 기미와 모의가 탄로될 것을 염려하여 허위로 기록한 유생에게 편지를 보내 ‘바야흐로 하늘까지 뒤덮은 화색(禍色) 때문에 대승기탕(大乘氣湯)의 법을 써서 이익운 부자를 성토하는 일이 있기에, 그대들의 이름으로 반중(泮中)에 통문(通文)을 뛰운다.’고 하자, 모록된 유생이 놀라움을 헤아릴 수 없는지라 그 편지를 소매에 넣고 신을 찾아와 보였습니다. 지금 그 편지가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또 그가 핑계댄 것은 곧 신의 아들의 이름이 옥초(獄招)에 누차 나왔다는 것인데, ‘누차’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의 말이 아닙니다. 한번 홍낙민(洪樂敏)의 아들 홍재영(洪梓榮)의 공초(供招)에 나왔던 것인데, 그 말은 경신년 가을 신의 아들을 찾아보자, ‘나라의 금법(禁法)이 지엄하여 사도(邪徒)를 모두 체포하고 있으니, 너는 장차 그것을 배워 죽으려고 하는가?’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홍재영의 말은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신의 아들이 허물이 없음이 이에 더욱 밝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기 자신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함도 옳고 아들을 위해 거짓을 신변(伸辨)함도 옳다. 조정에서 어찌 그것이 불가하다 하겠는가? 접때 두서너 재신(宰臣)이 연명하여 상소한 일은 곧 전에 없던 괴이한 버릇이었다. 그때 처분한 뒤로 두려워 위축하는 뜻을 가지지 않고 다시 한 유신(儒臣)의 상소가 있었으나, 그 지위가 낮고 생소한 까닭을 위하여 특별히 관대히 용서하였다. 그런데 이 소장이 또 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관위(官位)가 그 사람에 비할 바 아닌데도, 감히 이런 버릇을 쓸려고 하는가? 이제 연석(筵席)에서 대신에게 하교한 바 있었다. 기폐(起廢)는 본디 기폐일 뿐이고, 기강은 본디 기강일 뿐이다. 지사(知事) 이익운에게 간삭(刊削)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95면
  • 【분류】
    정론(政論) / 변란(變亂) / 사상(思想) / 사법(司法)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50]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 [註 151]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152]
    고주(孤注) : 노름꾼이 도박에서 계속하여 잃을 때 최후에 나머지 돈을 다 걸고 마지막 모험을 하는 일.

李益運疏。 略曰:

臣本不育, 取臣兄之子爲子, 而昔在先朝, 命名而字之, 年纔弱冠, 遽至夭折。 不覺駭機之暗地傍伺, 遂使白地坑坎無所不至之慘言, 至及於猿腸寸斷之地。 臣不能剚腹決腸, 以白其冤, 此又臣不慈之罪。 前後持臣者, 一則臣子之遭辛酉僞通也, 一則臣身之爲蔡濟恭腹心也。 臣於濟恭, 童年受業, 出入其門, 殆四十載。 矧又秉執所同, 進退亦同。 先朝之所取於臣者在此, 而抑亦擧世之所共知也。當庚申大恤之後, 輩之孤注, 專在於濟恭, 而臣爲渠輩眼中之釘, 故移兵先擊之計, 首及臣身。 臣子之夭, 適在僞通之後, 平日之媢疾臣者, 視作奇貨, 以爲 ‘因此汚衊, 則如熏惡臭, 如蒙不潔, 使聽聞者, 似有似無, 其然不然, 無證可明, 無路可脫。’ 未幾李允行之疏出, 而專以儒通把作證左, 其先發儒通, 繼進臺章, 前後照應, 瞭如指掌。 粧出僞通之日, 應募無人, 則不得不冒錄原在鄕不入京之兩儒, 假稱儒通, 而或慮機謀之綻露, 至有貽書于僞錄儒生曰, ‘方有滔天禍色, 用大承氣湯之法, 聲討李益運父子事, 以君輩名, 通文于泮中’, 冒錄儒生, 驚怪莫測, 袖其書而來見臣。 今其書在, 臣焉敢誣也? 且其藉口者, 卽曰臣子之名, 屢出獄招, 而屢之云者, 非實際語也。 一出於樂敏之子梓榮之招, 而其言曰, 庚申秋, 往見臣子, 則以爲, ‘邦禁至嚴, 邪徒盡捕, 汝將爲其學而欲死乎?’ 梓榮之言, 不過如斯, 則臣子之無累, 此尤明證云。

敎曰: "爲己訟冤可也, 爲子伸誣可也。 朝家豈謂不可乎? 向來數三宰臣聯疏之擧, 卽無前之怪習。 伊時處分之後, 不有悚蹙之意, 復有一儒臣之疏, 而爲其位卑生踈之故, 特爲寬恕。 此章又出此人, 官位非其人之比, 而敢售此習乎? 今筵有所下敎於大臣。 起廢自起廢, 紀綱自紀綱。 知事李益運, 施以刊削之典。"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95면
  • 【분류】
    정론(政論) / 변란(變亂) / 사상(思想) / 사법(司法)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