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을 송환시켜 달라는 치계
제주 목사(濟州牧使) 한정운(韓鼎運)이 치계(馳啓)하기를,
"지난 신유년091) 8월에 이국인(異國人) 5명이 본주(本州)에 표류해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능히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같은 해 10월에 비국(備局)의 행회(行會)092) 로 인해 저들 5명을 이자(移咨)하여 성경(盛京)에 입송(入送)하였는데, 5명 중 1명은 도중에 병사하였고, 대국(大國)에서 도로 출송(出送)하였으므로, 저 네 사람은 도로 본주로 돌아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을축년093) 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조금 지각이 있으나 그 통하는 말이란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이해하기 곤란하고 그 배운 글은 어로(魚魯)를 분별하지 못할 판입니다. 그 나라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나라를 그려 보이는데,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켜 보입니다만, ‘막가외’란 나라 이름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유구(琉球)에서 표류해 온 사람에게 사정을 물을 적에 그 사람들이 유구의 표류인을 보고서 발광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었으므로, 유구 사람이 모여 앉아 있는 곳에 불러들여 얼굴을 맞대게 했더니, 한참 동안 서로 보고도 처음에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조금 있다가 유구 사람 중에 궁평(宮平)이라 이름하는 자가 드러나게 알아차리는 기색이 있어 두서너 마디 말을 나누며 흔연히 서로 대면했는데, 이른바 막가외란 말에 그 사람이 넓적다리를 치고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눈물을 비처럼 흘렸습니다. 유구 사람 통사(通事) 경필진(慶必進)이 그 사정을 궁평에게 물었더니, ‘임술년094) 경에 중국인 32명과 조선 사람 6명이 폐국(弊國)에 표류해 왔기에, 폐국에서 배를 정하여 양국의 표류인을 중국 복건성(福建省)으로 호송하였으나, 바다 가운데서 큰 바람을 만나 여송국(呂宋國)으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수초(水梢)로 같이 표류하여 그 나라에 다섯 달을 머물렀으므로, 그 나라의 사람을 대개 알게 되었고, 수로(水路)를 좇아 복건성으로 돌아가 복건성에서 각각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이 사람을 보고 이 말을 들었으니, 아마도 여송국의 사람인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듣고 보니 심히 기이하였습니다. 또 그 막가외의 국호(國號)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 또한 여송국의 관음(官音)으로 말한 것인즉, 아마도 그가 여송국의 사람임은 정녕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같이 실어 나라로 돌아가서 여송국에 전송(轉送)하라는 뜻으로써 여러 가지로 글을 써서 달랬으나, 다른 나라의 표류인은 싣고 가기 어렵다며 계속 거절하였습니다. 이제 유구 표류인의 문답으로 보건대, 여송에서 복건까지는 배가 서로 통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고, 이미 그 국호를 안 뒤라면 본국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유치해 두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번에 이치를 논하여 치계하니, 청컨대 머물러 있는 저 세 사람을 다시 이런 뜻으로 성경에 이자(移咨)하고 입송(入送)하여 본국으로 전송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유구 사람의 말하는 바로 말미암아 비로소 여송국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뜻밖이니, 기이하다 하겠다. 여송은 복건성과 대개 배가 서로 통하나 제주는 성경(盛京)으로 이미 곧장 부탁하는 전례가 없으니, 본국에 전송하는 등의 절차를 묘당(廟堂)에서 품지(稟旨)하여 분부토록 하라. 그리고 길에 올랐을 때의 고휼(顧恤)하고 양식을 주는 방도와 거느려 보낼 때 주접(住接)하고 간검(看檢)하는 절차를 혹시 털끝만큼도 소홀히 하지 말아서, 이방(異邦)에 기우(寄寓)한 종적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회유(懷柔)하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이른바 여송에 관한 사실을 여러 글에서 상고해 보았더니, 민장(閩漳)과 멀지 아니한데, 지금은 불랑기(佛郞機)에 병합된 바 되었습니다. 본디 통공(通貢)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땅히 사신의 왕래가 없으니, 북경(北京)에 입송하여 본국에 전송(轉送)하는 것은 실로 난편(難便)하겠습니다. 또 임술년에 성경 예부(禮部)에서 이자하여 도로 보낸 일이 있었으니, 또 여송이란 이미 없었던 나라를 유구 사람이 우연히 인정한 말에 경솔히 의거하여 자문을 갖추어 성경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 절사(節使)가 가는 길에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이 일을 가지고 예부에 상세히 탐지해 보고서, 만약 회송(回送)할 길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 다스려 보내어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주 목사가 보고한 바를 보건대, 같이 실어 나라로 돌아가 여송에 전송하라는 뜻으로써 글로 유구 사람에게 달래자, 저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표류인이라 하여 실어 가기 어렵다며 계속 거절하였다고는 합니다만, 이미 인근에 있는 나라라 또한 왕래하는 길이 있을 것이니, 이번에 만약 조정의 지위(知委)095) 로써 다시 유구의 표류인에게 효유(曉諭)한다면, 마땅히 듣지 않을 수가 없어 일이 심히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만약 아직도 바람을 기다리느라 출발하지 않고 있다면, 이에 의거해 거행할 것을 청컨대 제주 목사에게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곧 유구 사람이 곧장 돌아간 일로 인해 붙여 보내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85면
- 【분류】외교(外交)
- [註 091]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 [註 092]
행회(行會) : 정부(政府)의 지시·명령을 각 관사의 장이 그 부하에게 알리고 실행 방법을 논정(論定)하기 위한 모임.- [註 093]
○濟州牧使韓鼎運馳啓以爲:
去辛酉八月, 異國人五名, 漂到本州, 而書、言俱不能通, 不知爲何國人, 故同年十月, 因備局行會, 彼人五名, 移咨入送于盛京, 五名中一名, 在途病故, 而大國還爲出送, 故彼人四名, 還到本州矣。 其中一人, 乙丑年因病物故, 所存三人中一人稍有知覺, 而其所通言, 鴂舌聲牙, 其所學書, 魚、魯莫辨。 語其國, 寫其國, 每稱 ‘莫可外’, 遙指東南方。 而 ‘莫可外’ 國名, 曾所未聞。 適丁琉球漂人問情之時, 彼人等, 要見琉球漂人, 發狂叫呼, 故招入于琉球人會坐處, 使之接面, 則脈脈相看, 初若不知, 俄而琉球人中宮平爲名者, 顯有知得之色, 數三句語, 欣然相接, 所謂 ‘莫可外’, 彼人摶髀跳出, 叫噪頓首, 泣涕如雨。 琉球人通事慶必進, 問其事狀于宮平, 則以爲: "壬戌年分, 中國人三十二名、朝鮮人六名, 漂到弊國, 而自弊國, 定船隻, 護送兩漂人於中國福建省之路, 在洋中遭大風, 漂人於呂宋國。 渠以水梢, 同爲見漂, 留其國五箇月, 其國人物, 大槪知得, 而從水路回福建, 自福建, 各歸本國矣。 今見此人, 又聞此語, 恐是呂宋國人’ 云, 故聞甚奇異。 又問其 ‘莫可外’ 國號, 答曰, ‘此亦呂宋國之官音云爾, 則其爲呂宋國人, 丁寧無疑。’ 故以使之同載回國, 轉送呂宋之意, 多般書諭, 而他國漂人, 浼浼却之。 今以琉球漂人問答觀之, 呂宋之於福建, 舟楫之相通, 可以推知, 旣知其國號之後, 不思所以送回本國之道, 一向留置, 有所不忍。 故敢此論理馳啓, 請留住彼人三名, 更將此意, 移咨入送于盛京, 以爲轉送本國。
敎曰: "由此琉球人之所言, 始識呂宋國之居生事實, 出於匪意, 可謂奇異。 呂宋之於福建, 蓋有舟楫之相通, 濟州之於盛京, 旣無直付之前例, 轉送其本國等節, 自廟堂稟旨分付。 在道時顧恤給糧之道, 領送時住接看檢之節, 毋或一毫踈忽, 使異邦羇旅之踪, 知我國懷柔之意。" 備局啓言: "所謂 ‘呂宋’ 事, 考之諸書, 則與閩、漳不遠, 而今爲佛郞機所竝。 自非通貢之國, 宜無使价之往來, 則入送北京, 轉送本國, 實爲難便。 且於壬戌, 纔有盛京禮部移咨還送之事, 則又不可以呂宋已無之國, 徑據琉球偶認之言, 而具咨更送于盛京。 今番節使行, 使任譯輩, 將此事狀, 詳探于禮部, 如可以有路回送云爾, 則其時治送, 亦爲未晩。 今見該牧使所報, 以同載回國, 轉送呂宋之意, 書諭琉球之人, 則彼雖以他國漂人, 難以載去, 浼浼却之云, 而旣是隣近之國, 亦有往來之路。 今若以朝廷知委, 更爲曉諭於琉球漂人, 則宜無不聽, 事甚便好。 彼人如尙待風未發, 依此擧行事, 請分付該牧使。" 從之, 旋因琉球人徑歸, 不得付送。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85면
- 【분류】외교(外交)
- [註 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