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이 처음의 연석에서 진계한 것에 대한 처리안을 의논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의 처음 연석(筵席)에서의 거조(擧條)를 영상과 좌상도 모두 보았는가?"
하니, 영의정 서매수(徐邁修)가 말하기를,
"신이 과연 보았습니다만, 우상이 아뢴 내용은 말한 것이 모두 절실한 것으로 충애(忠愛)스런 정성이 사표(辭表)에 넘쳐흘렀으니, 가납(嘉納)하신 성의(聖意)에 대해 신은 진실로 흠앙하고 찬탄(贊歎)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깊이 체찰(體察)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의 거조 가운데 이우(李㙖)·박하원(朴夏源) 등의 일은 바로 근래에 관계되는 일이니, 으레 상량(商量)하여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크게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것이니, 상세히 살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하여 보니, 세초(洗草)007) 속에 들어가 있었다. 우상으로 하여금 두 글을 찾아서 들여오게 했는데 원본(原本)을 보니, 과연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를 살펴보건대, 선조(先朝)께서 세초할 것을 앙청한 것과 영묘(英廟)께서 특별히 세초할 것을 허락한 것은 대개 이런 등류의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문적(文蹟)을 세간(世間)에 남기고 싶지 않은 데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양조(兩朝)의 성의(聖意)가 이미 이와 같으니, 후사(後嗣)로서 준수(遵守)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차마 추후에 거론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도리어 원서(原書)를 찾아본 것을 후회하는 것은 물론 마치 영묘·경모궁(景慕宮)·선조(先朝)께 죄를 진 것만 같다. 경모궁이 간언(諫言)을 용납한 성덕(聖德)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흠앙하지만 조(祖)·자(子)·손(孫)은 본래 일체(一體)인데, 선조(先朝)께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할 수가 있겠는가? 경 등은 모두 선조의 구신(舊臣)들이니, 모쪼록 차례대로 상세히 진달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서매수가 말하기를,
"우상 이 처음의 연석에서 아뢴 내용은 진실로 세도(世道)가 이치에 틀린 것을 걱정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된 것을 우려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중대한 데에 관계되기 때문에 두 글의 원본(原本)을 보려 했던 것인데, 그것을 보고난 뒤에는 모골(毛骨)이 함께 송연하였으니 후회 막급이다. 이제 선조(先朝)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무릇 모년(某年)008) 에 관계된 모든 일은 전부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 이 서본(書本)을 찾아서 보니, 마치 내 마음이 죄를 얻은 것만 같다. 거조(擧條) 가운데 사설(邪說)이 유행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사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말하기를,
"신이 삼가 누누이 하교하시는 내용을 들어보니, 너무도 황공스러운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개 선조(先朝)께서 선세자(先世子)의 아름다운 덕을 천양(闡揚)하면서 반드시 ‘간언을 용납했다.[容諫]’는 두 글자를 제일의 의리로 삼은 것은 지극히 따르기 어려운 말을 가납(嘉納)한 성덕(聖德)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 이 거론하여 아뢸 적에 이 글이 세초(洗草)에 들어가 있는 것인 줄 몰랐는가?"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일기(日記)》를 세초(洗草)한 일은 신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글까지 아울러 세초 속에 들어간 데 대해서는 신이 당초에 과연 몰랐었습니다. 그때 간언을 용납한 성덕에 대해서는 늘 가정(家庭)에서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간신(諫臣)을 포증(褒贈)하는 것이 실로 천양(闡揚)하는 도리에 합당하겠기에 처음의 연석에서 우러러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언을 용납한 성덕에 대해서는 나도 또한 흠앙하고 있다. 그러나 모년(某年)에 관계된 모든 일은 이것이 선조(先朝)께서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포증하라고 청한 것은 절대로 불가한 것이다."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성교(聖敎)를 거듭 받들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누누이 번거롭게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에 관계된다고 해도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는 한 가지 일에 관계가 된다면 지금에 와서 포증하는 것이 또한 어찌 천명하는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선조 임자년009) 에 일종(一種)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네 글자[四字]의 흉언(凶言)을 전파시켜 일세(一世)의 인심을 속여 미혹시켰기 때문에 선조(先朝)께서 특별히 간언을 용납한다는 두 글자를 천양하는 방도로 삼은 것은 또한 세도를 걱정하는 만부득이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설(邪說)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는데 포증하는 한 가지 일은 실로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계하는 정사가 되겠기에 처음의 연석(筵席)에서 우러러 청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바에 대해 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 모년(某年)의 일에 대해 차마 거론할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선조의 성심(聖心)을 알 수 있고, 세초(洗草)할 것을 앙청한 데 대해 특별히 허락한 것에서 영묘(英廟)의 성의(聖意)를 또한 알 수 있다. 지금도 또한 그때와 다를 것이 없는데 영묘와 선조(先朝)께서 차마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만약 오늘날 포증을 시행한다면 죄를 얻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라 양조(兩朝)의 성의(聖意)를 저버리게 될까 두렵다."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소신(小臣)의 구구한 천견(淺見)에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은 대개 선조(先朝)께서 이 일로써 흉도(凶徒)들에게 무함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번 우러러 아뢴 것은 진실로 제방(隄防)이 혹 해이해질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설(邪說)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김달순이 말하기를,
"대개 박하원(朴夏源)의 무리는 의리에 죄를 얻은 자들인데, 한번 사유(赦宥)를 받은 뒤로부터 일종의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사설로 선동하여 의리를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거론한 조항에서 운운한 것은 바로 이런 등등의 부류들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비록 이우(李㙖)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세상에 어찌 만인소(萬人疏)가 있을 수 있습니까? 협박하고 무함하고 다그치려는 계교임을 알 수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에 관한 일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이지만,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일은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연석(筵席)에 나오기를 기다려 한번 환히 하유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 말한 것이다. 우상이 처음의 연석에서 청한 것에 대해서는 비답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종당에는 비답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의 무리가 기필코 의리와 겨루려고 하였고 심지어 진신(搢紳)들을 일망 타진하려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등등의 부류들에 대해 어찌 속히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우상 이 청한 것은 실로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상도 또한 아뢰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은 또한 여사(餘事)이기는 하지만 비답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서매수가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의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버티면서 윤허하지 않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비답을 내리겠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우선 거조(擧條)에 대한 비답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부교리 이상우(李尙愚)가 말하기를,
"이우·박하원에 대한 일은 대신이 이미 누누이 진달했는데도 아직껏 처분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이는 상하가 서로 버티는 일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의리가 점점 회색(晦塞)되어 제방(隄防)이 엄중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거조(擧條)에 대해서는 의당 비답을 내리겠다."
하였다. 사간 이인채(李寅采)가 말하기를,
"신은 추후 연석에 나왔기 때문에 대료(大僚)가 아뢴 내용과 상하의 수작(酬酢)을 상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이우 등의 일은 제방에 관계된 일이니 윤허를 아껴서는 안 됩니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과 옥당(玉堂)은 차이가 있는 것이니, 진계(陳啓)한 뒤 회포를 우러러 아뢰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아뢴 것은 격례(格例)에 어긋남이 있다."
하였다. 이인채가 말하기를,
"신이 전후 누차 언지(言地)를 더럽혔고 대개 진부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아뢴 것은 진실로 나라를 위한 공공(公共)의 분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 혁연(赫然)히 과감한 결단을 내려 천둥이 치듯 태풍이 불듯이 쓸어버리지 않는다면, 혹은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점점 회색되고 제방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의 일은 선조(先朝)에서 이미 환히 다 드러난 것이다. 의당 대신의 거조(擧條)에 대한 비답에서 하유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20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 [註 007]세초(洗草) : 존치(存置)할 가치가 없는 문서(文書)를 없애버림. 실록(實錄)이나 《선원보략(璿源譜略)》의 편찬을 마치고 그 원고(原稿)의 폐기, 또는 정세 변동이나 기휘 저촉(忌諱抵觸)에 의하여 보관할 필요가 없는 문서의 폐기 등을 이르는 말. 초(草)했던 원고나 폐기 문서를 물에 빨아 먹물을 빼고 환지(還紙)를 만드는 데 이용하였으므로, 세초(洗草)란 말이 생겼음.
- [註 008]
모년(某年) : 장헌 세자(莊獻世子:사도 세자)가 죽은 해인 임오년(1762)을 가리킴.- [註 009]
임자년 : 1792 정조 16년.○甲寅/次對。 上曰: "右相初筵擧條, 領、左相, 皆見之乎?" 領議政徐萬修曰: "臣果得見, 而右相所奏, 語皆切實, 忠愛之悃, 溢於辭表, 嘉納之聖意, 臣固欽仰贊歎之不暇。 而古人云, ‘言之非艱, 行之惟艱。’ 伏願深加體察焉。" 上曰: "右相擧條中, 李㙖、朴夏源等事, 係是近來事也, 固當商量處分。 而至於朴致遠、尹在謙事, 事在久遠, 大關義理, 不可不議審爲之。 故考見《政院日記》, 則入於洗草中。 使右相覓納兩書, 而得見原本, 則果是不忍見、不忍聞之事。 以此看之, 先朝所以仰請洗草, 英廟所以特許洗草, 蓋出於不欲以此等不忍見、不忍提之事, 留其文蹟於世間也。 兩朝之聖意旣如此, 則在後嗣遵守之道, 豈忍追提乎? 予反追悔其原書之推見, 而有若得罪於英廟、景慕宮、先朝矣。 景慕宮容諫之聖德, 予固欽仰, 而祖、子、孫自是一體, 先朝所不忍見、不忍道之事, 予豈可褒贈於今日乎? 卿等皆先朝舊臣也, 須次第詳陳可也。" 邁修曰: "右相之初筵所奏, 儘出於憂世道之訛謬, 慮義理之晦塞矣。" 上曰: "事係至重至大, 故欲見兩書之原本矣, 及其得見之後, 則毛骨俱竦, 追悔莫及矣。 今以先朝之心爲心, 則凡關係某年者, 皆是不忍聞、不忍道者也。 今此書本之推見, 於予心若得罪者然矣。 擧條中有曰邪說流行,’ 邪說者, 何謂也?" 右議政金達淳曰: "臣伏聆縷縷下敎, 不勝惶悚之極。 而蓋先朝之闡揚先世子之德美也, 必以容諫二字爲第一義, 蓋至難從之言, 有其嘉納之聖德矣。" 上曰: "右相擧條仰奏時, 不知此書之入於洗草中耶?" 達淳曰: "《日記》洗草事, 臣亦知之, 至於此書之幷人洗草中, 臣初果不知。 而其時容諫之聖德, 常於家庭間聞知矣。 褒贈諫臣, 實合闡揚之道, 故所以初筵之仰奏矣。" 上曰: "容諫之聖德, 予亦欽仰。 而凡於事關某年, 則是先朝所不忍聞、不忍道者也。 今此褒贈之請, 萬萬不可矣。" 達淳曰: "荐承聖敎, 臣何敢縷縷煩陳? 而雖係不忍聞之事, 若涉於闡揚德美之一事, 則到今褒贈, 亦豈非闡明之道乎? 先朝壬子年, 一種不逞之徒, 傳播四字之凶言, 誑惑一世之人心, 故先朝特以容諫二字爲闡揚之道, 亦出於憂世道迫不得已之聖意也。 邪說尙未底定, 褒贈一事, 實爲彰癉之政, 故所以仰請於初筵者也。" 上曰: "卿之所奏, 予意則不然矣。 某年事之不忍提、不忍道, 先朝聖心可知, 而特許其洗草之仰請, 則英廟聖意, 亦可知矣。 今亦與其時無異, 而英廟先朝所不忍爲者, 若施褒贈於今日, 則非但如有得罪, 恐負兩朝之聖意矣。" 達淳曰: "小臣區區淺見之所以痛迫者, 蓋爲先朝之以此受誣於凶徒故也。 向來所以仰奏, 寔出於恐隄防之或弛矣。" 上曰: "邪說云者, 何所指也。" 達淳曰: "蓋朴夏源輩, 得罪於義理者, 而一自蒙宥之後, 一種怪鬼之徒, 煽動邪說, 欲爲傷害義理, 故擧條中云云, 正謂此等類矣。" 邁修曰: "雖以李㙖言之, 世豈有萬人疏乎? 可知其脅持誣逼之計, 伏望亟降處分焉。" 上曰: "李㙖、朴夏源事, 到今猶屬餘事。 朴致遠、尹在謙事, 欲待大臣、三司之登筵, 一番洞諭, 故玆言之。 而右相初筵所請, 不得不賜批, 從當有批答矣。" 邁修曰: "李㙖、朴夏源輩, 必欲角勝義理, 至欲網打搢紳, 此等之類, 豈可不亟下處分乎?" 左議政韓用龜曰: "右相所請, 實出於嚴懲討之意。 領相亦有所奏, 伏願處分焉。" 上曰: "李㙖、朴夏源, 亦是餘事, 而從當賜批矣。" 邁修曰: "李㙖、朴夏源事, 不必如是靳持矣。" 上曰: "俄有賜批之敎, 姑俟擧條批答可也。" 副校理李尙愚曰: "李㙖、朴夏源事, 大臣已縷縷陳達, 而處分尙未下焉, 此非上下相持之事也? 如此則義理漸晦, 隄防不嚴矣。" 上曰: "大臣擧條, 當賜批矣。" 司諫李寅采曰: "臣追後登筵, 大僚所奏, 上下酬酢, 不能詳聆, 而李㙖等事, 事係隄防, 不可靳持者。 亟降處分焉。" 上曰: "臺臣與玉堂有異, 陳啓後, 當以所懷仰奏。 而今此所奏, 有違格例矣。" 寅采曰: "臣前後屢叨言地, 率多陳腐之言。 而今此所奏, 寔出於爲國公共之憤。 此等處若不赫然果斷雷厲風飛, 則或恐義理由是而漸晦, 隄防由是而益壞矣。 伏願亟降處分焉。 上曰: "李㙖事, 先朝已有洞悉者。 當於大臣擧條之批諭之矣。"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20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 [註 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