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의 내용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오직 우리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께서는 수렴(垂簾)하신 지 4년째 되는 계해년166) 에 난사(鑾司)에 명하여 염유(簾帷)를 철거하라고 명하시고 한가로이 장락궁(長樂宮)에 나가셨습니다. 1년이 지난 갑자년167) 겨울에 명년(明年)이 보갑(寶甲)이 곧 돌아오는 해라는 것으로 우리 성상께서 군정(群情)에 따라 직접 존호(尊號)를 올리셨으며 장차 요책(瑤冊)·금보(金寶)로 아름다운 공렬을 찬양하고 담로시(湛露詩)168) 와 균천악(鈞天樂)169) 으로 태평연(太平宴)을 거행하려 했습니다.
바야흐로 새해를 맞아 경사(慶赦)를 반포하자마자 왕후(王后)께서 갑자기 병환으로 옥체(玉體)가 미령(未寧)하셨으므로 주상께서 마음을 졸이며 걱정하면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라고 명한 다음 중외(中外)의 의술(醫術)에 능하다는 이름이 있는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의약(醫藥)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의술을 극진히 하여 온갖 방법을 다 기울이게 하였으나 능히 효험을 아룀이 없게 되자 또 묘사(廟社)와 산천(山川)에 기도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을축년170) 정월 12일 정유(丁酉) 오시(午時)에 창덕궁(昌德宮)의 경복전(景福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가 61세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이른바 하늘을 믿을 수 없고 이치는 추산(推算)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어루만지면서 미칠 수 없어 안타깝게 통곡하였으며 인산(因山)의 길일(吉日)을 점쳐 가리고 나서는 이에 신(臣) 이병모(李秉模)에게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므로 신이 엄중하여 감히 사양하지를 못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성후(聖后)의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신라(新羅) 김성(金姓) 왕(王)의 후손입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이르러 휘(諱)가 자수(自粹)이고 호(號)가 상촌(桑村)인 분이 있었는데, 효행(孝行)이 있었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벼슬자리를 가지고 불렀으나 스스로 여씨(麗氏)의 신하라는 이유로써 자신을 희생하여 절개를 세웠습니다. 우리 왕조(王朝)에 들어와서 높은 벼슬을 한 분이 잇따랐는데 휘가 홍욱(弘郁)이고 호가 학주(鶴洲)인 분은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충직(忠直)하고 과감히 말하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이분이 성후의 5세조(世祖)입니다. 증조(曾祖) 휘(諱) 두광(斗光)은 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조(祖)의 휘 선경(選慶)은 참의(參議)를 지냈는데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고(考)의 휘 한구(漢耉)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오흥 부원군(鼇興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憲)입니다. 배위(配位)는 원주(原州) 원씨(元氏)인데 원풍 부부인(原豊府夫人)에 봉해졌으며 현감(縣監)을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된 원명직(元命稷)의 따님입니다. 성후(聖后)께서는 숭정(崇禎) 기원(紀元) 1백 18년 을축년171) 11월 정축일(丁丑日) 축시(丑時)에 여주읍(驪州邑)의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습니다.
영종(英宗)정축년172) 에 정성 왕후(貞聖王后)가 훙서(薨逝)하시자 임금이 이에 문족(文族)으로써 가리고 덕행(德行)을 살펴서 기묘년173) 6월 왕비(王妃)로 책봉하였고 이어 가례(嘉禮)를 행하였습니다. 성후께서 이미 곤극(坤極)174) 의 정위(正位)에 오르신 뒤에는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을 주야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영묘(英廟)께서 이미 여든 살의 고령(高齡)이 되었는데 안에서 관인(寬仁)하고 공검(恭儉)한 정치를 도운 것이 18년 동안을 한결같이 하였습니다만, 일찍이 이르기를, ‘여군(女君)의 성교(聲敎)는 문지방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니,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정묘께서 그때 동궁(東宮)으로 있었는데 은애(恩愛)를 베푼 것이 매우 지극하였으므로 정묘께서 매양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廷臣)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을미년175) 무렵에 영묘께서 근력이 쇠하여 정사를 근면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역신(逆臣)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이 정묘의 영특하고 현명하면서 성덕(聖德)을 지닌 것을 시기하여 깊이 서로 빌붙어 교결하여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폭력으로 저지하면서 저위(儲位)에서 밀어낼 것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후겸의 어미 화완 옹주(和緩翁主)는 임금의 총애를 믿고 멋대로 방자한 짓을 하였으며, 일찍이 영선당(永善堂)에 있으면서 은밀히 선동하여 이들을 도왔습니다. 시변(時變)이 척완(戚畹)에게서 일어나고 화란(禍亂)이 궁성(宮省)에서 말할 수 없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성후께서는 정묘께서 탕선(湯膳)을 받드는 즈음에 돌보아 보호하면서 일찍이 반 걸음도 잠시 떠난 적이 없었으며 정후겸 어미의 사기(辭氣)를 살펴 화란의 싹을 미리 꺾어버림으로써 크게 대책(大策)을 도왔고 흉모(凶謀)가 시행되지 못하게 하여 천토(天討)가 마침내 행해지도록 하였습니다.
기해년176) 에는 역신(逆臣) 홍국영(洪國榮)이 감히 이심(異心)을 품고 은밀히 저사(儲嗣)를 위한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역종(逆宗)인 인(䄄)의 아들 담(湛)을 완풍(完豊)이라 호칭하고 이어 흉언(凶言)을 멋대로 하면서 국모(國母)를 위태롭게 하자, 성후께서 저사(儲嗣)를 넓혀야 한다는 방도에 의거 언교(諺敎)를 반포하여 보였고 또 지성으로 중궁(中宮)을 부호(扶護)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역적 홍 국영의 흉모가 이에 저지되었습니다.
병오년177) 에 이르러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훙서(薨逝)하자 국세(國勢)가 또다시 외롭고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죄상(罪相) 김상철(金尙喆)이 구선복(具善復)과 은밀히 역적 인(䄄)을 의지하고 흉모를 낭자하게 저질렀습니다만 정묘께서는 심적인 우애로 인하여 숨기고 참으면서 죄를 주지 않자, 성후께서 또 빈청(賓廳)에 언교(諺敎)를 내린 것이 전후 수천언(數千言)에 달하였습니다. 흉도(凶徒)들의 정적(情跡)을 통렬히 분변하면서 이르기를 ‘미망인(未亡人)이 굳게 지켜 행하는 것은 장차 대의(大義)를 밝혀 임금의 원수와 국가의 역적을 징토(懲討)하여 우리 방가(邦家)를 보존하기 위한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날이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태어난 해와 같게 여길 것이다.’ 하고, 드디어 탕제(湯劑)와 상선(常膳)을 모두 드시지 않았습니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이 때문에 목소리를 함께 하여 뜰에서 부르짖으니 정묘께서 마지못하여 역적 인을 강화부(江華府)로 내쳐 안치(安置)시켰고 구선복 등이 모두 복법(伏法)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묘께서는 형제간에 그리워하는 생각을 견딜 수 없어 해마다 번번이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또 일찍이 강화부 객관(客館)에서 인을 소견(召見)하고서 밤이 지새도록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후께서는 그 때문에 초조하고 당황하여 갑자기 이필(移蹕)하라는 명을 내리니, 정조께서 비로소 승여(乘輿)를 돌려 돌아왔고 역종(逆宗)은 도로 배소(配所)로 돌아갔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즉조(卽阼)하신 뒤에 이르러 인이 그의 아들을 데리고 위리(圍籬)를 뚫고 나갔으므로 대신 이하가 사형에 처할 것을 극력으로 청하였습니다만, 성후께서는 주상이 어리고 국가가 위태로워 지금의 걱정은 선조(先朝) 때와 또 다르다는 이유로써 드디어 경전(磬甸)178)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경신년179) 천붕(天崩)180) 의 변고를 당하여 종국(宗國)이 깃대의 술처럼 그지없이 위태로워지자 힘써 마지못해 뭇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정희 성모(貞熹聖母)의 고사(故事)대로 〈수렴 청정하였는데〉 성궁(聖躬)을 보호함에 있어 극진히 마음쓰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음식과 기거(起居)하는 일에 대해서도 오직 일념(一念)으로 허둥거렸습니다. 더욱 성학(聖學)을 보도(輔導)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날마다 돌려가면서 권강(勸講)하게 하였으며, 한 가지 명령을 발포하고 한 가지 일을 조처함에 이르러서도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고 조심하여 거의 하루 저녁도 침선(寢膳)을 편안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 정묘께서 평일 굳게 지킨 의리는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엄중하여 궁원(宮園)의 의절(儀節)을 태묘(太廟)에 버금가게 하였으며, 모든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은 것은 천지(天地)에 세워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스럽지 않은 그런 것들입니다. 임어(臨御)하신 지 25년 동안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켰습니다. 성후께서 수렴 청정한 초기에 특별히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의 뿌리는 하나도 의리이고 둘도 의리였으니, 하나라도 혹시 여기에 어긋난 것이 있으면 이는 대행조(大行朝)의 역신(逆臣)인 것이요 당저조(當宁朝)의 역신인 것이다. 따라서 감히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단연코 용서하지 않겠으니, 이런 뜻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 매양 연석(筵席)에 임어하실 적마다 선왕(先王)의 의리를 굳게 지키고 선왕의 지사(志事)를 드러내어 밝힐 것을 거듭거듭 계칙하고 면려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척신(戚臣) 홍낙임(洪樂任)이 의리를 등지고 공의(公議)를 이기려고 다투면서 와언(訛言)을 유포(流布)시켜 인심을 현혹시켰는데 정묘께서 누차 조정에서 근심하는 탄식을 하였습니다만, 은총으로 의리를 덮어 곡진하게 목숨을 보전(保全)시켰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기탄없이 방자한 짓을 하였으므로 정신(廷臣)들이 이에 말하기를, ‘흉측한 계획을 마구 떠들어대면서 전례(典禮)를 의란(疑亂)시키고 있으니 지금 만약 풀을 제거하면서 그 뿌리까지 제거하지 않는다면 마구 번져 불어난 뒤에는 도모하기 어렵게 됩니다.’ 하니, 성후(聖后)께서 하교하기를, ‘나는 선왕(先王)의 성심(聖心)을 나의 마음으로 삼고 있으니 기필코 시종 곡진히 보호하려 한다.’ 하였는데 오랜 뒤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서양(西洋)의 사교(邪敎)가 십수년 전부터 점차로 여항(閭巷) 사이로 침투해 들어가 성하여짐에 따라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화색(貨色)으로 서로 꾀어 도당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이들은 형헌(刑憲)을 범하는 것을 밥먹는 것처럼 여기고 도거(刀鋸)를 보기를 즐거운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겼으므로 정조께서 마음속으로 항상 걱정하였었습니다. 이때 이가환(李家煥)·정약종(鄭若鍾) 등이 화심(禍心)을 품고 은밀히 이역(異域)을 왕래하면서 요서(妖書)를 널리 전파하였으므로 그 기세가 불꽃처럼 치성하여 명분(名分)을 혼란시키고 풍교(風敎)를 더럽혀서 이천(伊川)181) 이 머리를 풀어 흐트리는 모양을 하는 오랑캐가 될 것이라는 탄식 정도 뿐만이 아니라 장차 녹림당(綠林黨)182) ·황건적(黃巾賊)183) 의 변란이 있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성후께서 대간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국문하여 다스리라고 명하니, 대신 가운데 이런 때 경솔히 큰 옥사(獄事)를 일으킨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기는 사람이 있자 성후께서 말하기를, ‘이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금수(禽獸)가 되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다스릴 경우 혹 난(亂)을 초래(招來)하게 될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나라가 더렵혀져 망하는 것보다는 어찌 깨끗하게 보존하여 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외(京外)를 대대적으로 수색, 체포하여 그 괴수(魁首)는 베고 그 도당들은 분산시킨 다음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신명(申明)시켜 각각 간사하고 더러운 기운을 규찰하게 하니, 즉시 깨끗이 맑아졌습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에 이르러서는 더욱 잊지 않고 유념하면서 걱정했는데 일찍이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은 진실로 백성을 돌보아 구휼할 수 있는 계책이 있으면 일에 따라 제품(提稟)하라. 비록 몸소 물과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찌 아끼겠는가? 백성들의 폐단 가운데 환곡(還穀)은 명색(名色)이 무수히 많아 서리(胥吏)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이를 연유하여 생기니, 묘당에서는 좋은 방책에 따라 상의하라.’고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구관(句管)하고 있는 호조곡(戶曹穀)에 이름을 붙여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가 〈귀할 때는〉 싼 값으로 방출하도록 하여 대략 상평창(常平倉)의 옛 법제를 모방해서 만들게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백성들에게 절박한 폐해를 입히는 것은 욕심이 많은 관리보다 더한 것이 없다. 현재 탐풍(貪風)이 크게 성하여 날마다 심해지고 달마다 더해만 가니, 염치를 배양하고 법방(法防)을 엄중히 한 후에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 묘당에서는 폐단의 근원을 강구하여 과조(科條)를 엄중히 세워 획일적으로 준수하여 실제의 효험이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수의(繡衣)184) 의 포폄(褒貶)과 제도(諸道)의 전최(殿最)가 서로 틀리는 경우가 많자, 하교하기를, ‘수령(守令) 가운데 파척(罷斥)시킨 것은 태반이 세력이 없는 음관(蔭官)이고 현족(顯族)은 모두 양리(良吏)로 되어 있는데, 세력이 약한 음관만이 치우치게 잘 다스리지 못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또 탁지(度支)185) 의 경비(經費)가 부족하고 양서(兩西)의 민고(民庫)가 텅 비었다는 것으로 매우 진념(軫念)하여 경신년 인산(因山)의 역사(役事) 때 도감(都監)의 비용을 모두 장용영(壯勇營)에서 담당하게 하였으며, 신유년186) 1년 동안 탁지의 비용도 또한 장용영에서 획송(劃送)하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양서(兩西)에 소재(所在)한 장용영의 곡식은 일체 각 해도(該道)의 민고(民庫)에 넘겨 주었으며, 대신의 의논에 따라 특별히 장용영을 혁파하였습니다. 대개 이를 설치한 것은 곧 정묘 때 정의(精義)의 일단(一端)이었으나 경신년 이후에는 백성과 나라의 사세가 또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을 설치하고 혁파하는 것은 그 법규가 똑같은 것입니다. 일찍이 공상(供上)하는 것 60가지를 감파(減罷)시켰었는데 염유(簾帷)를 철거하고 난 뒤에 또 45가지의 공상을 출부(出付)시키고서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많지는 않지만 또한 국가의 비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뒷날의 비용을 생각하여 의금(衣衾) 같은 차림을 일체 모두 미리 준비하여 두었고 또 백금(白金) 3천 냥과 각색 비단 붙이를 조처해 준비하여 두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비슷한 일을 들어 상구(喪具)를 준비하는 신하에게 계칙하여 삼가 유의(遺意)를 따라서 하게 하였는데 팔방(八方)에서 이런 내용을 전해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습니다. 인재(人材)를 기용함에 있어는 악인을 내치고 선인을 등용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서 말하기를, ‘전조(銓曹)에서 단지 절차에 따라 미루어 안배만 할 뿐이라면 이는 한 사람의 정리(政吏)만으로 충분하다.’ 하였으며, 사경(私徑)을 막는 데 대해서는 말하기를, ‘나는 조정과 정령의 일을 사친(私親)에게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밀히 사경을 통하여 나에게 알리는 사람이 있으면 이는 나의 정령에 폐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언로(言路)를 여는 것에 대해서는 조정에 있는 대소 신료(臣僚)들에게 하유하기를, ‘무릇 나의 몸의 잘못된 덕과 조정의 득실에 관계된 것은 각각 환히 숨김없이 진달하라. 비록 초야(草野)의 소원한 사람이라도 혹여 싫어하여 소외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의 논주(論奏)가 있을 적마다 처음에는 자성(慈聖)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하지 못했었던 것도 곧이어 고리를 굴리듯이 따랐으며 일이 궁액(宮掖)에 관계된 것은 더욱 개납(開納)한다는 말을 내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또한 괴귀(怪鬼)의 무리들이 날뛰는 습관을 매우 미워하여 통렬히 공척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 현감(縣監) 홍이유(洪履猷)의 무리가 한 사람의 상신(相臣)을 축출하기 위해 선신(先臣)187) 의 기해년188) 상소의 글귀를 거짓으로 날조하고 계속해서 신축년189) ·임인년190) 의 대의리(大義理)를 괴란(壞亂)시키자 성후(聖后)께서 번번이 그 간사함을 통촉하고 그 죄를 바루라고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논이 수렴 청정하기를 청하는 때를 당해서는 성후께서 경도(經道)를 지키는 뜻에 따라 열 번이나 아뢰었어도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끝에 가서 마지 못해 허락하였는데, 수렴 청정하는 날에 이르러 특별히 하교하기를, ‘내가 수렴(垂簾)하고 있는데 어린 임금이 시좌(侍坐)하고 있는 것은 매우 명위(名位)를 바르게 한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다시 나는 〈임금을〉 따라 수렴하는 것으로 써서 반포하라.’ 하였으며 수렴을 철거할 때를 당하여는 대신(大臣)과 재집(宰執)들을 불러서 하교하기를, ‘내가 부덕(否德)한 몸으로 오래도록 부당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주상(主上)의 춘추(春秋)가 장성하고 성학(聖學)이 날로 증진되고 있어 만기(萬機)를 총괄하여 결단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한결같이 그대로 눌러 앉아 있으면서 국체(國體)를 보존시키고 대경(大經)을 바루는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자충(慈衷)으로 결단을 내려 즉시 철거하라고 명하였으니, 아! 그 덕과 공은 태사(太史)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감히 만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그려 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연륜(筵綸)과 교령(敎令) 및 장주(章奏)의 문자(文字) 가운데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환히 드러나 있는 것에서 뽑아내어 스스로 간엄(簡嚴)한 체제(體制)에 따랐을 뿐입니다.
가만히 삼가 생각건대, 후비(后妃)의 덕은 주(周)나라의 태임(太任)·태사(太姒)보다 더 성대한 이가 없습니다만 시인(詩人)이 찬미하여 읊조린 것은 갈담(葛覃)·규목(樛木)·사제(思齊) 등편(等篇)에 불과할 뿐입니다. 송(宋)나라의 선인 고태후(宣仁高太后)는 만난 시기가 달랐기 때문에 당시에 여중 요순(女中堯舜)이라는 칭송이 있었습니다만 그 사적(史跡)을 읽어보면 오히려 한두 가지 비평할 만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아! 우리 태모(太母)께서는 태임·태사 같은 성덕(聖德)으로 원우(元祐)191) 같은 시기를 만나서 덕화를 널리 유포하여 온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으니, 그 은혜를 보답하려고 한다면 하늘처럼 끝이 없어 보답키 어렵습니다. 시종(始終)을 따져서 논한다면 간악한 신하의 마음을 꺾어 대책(大策)을 도운 것은 성후의 현명함이요, 기미를 먼저 환히 알아서 국세를 공고히 한 것은 성후의 의리요, 대의(大義) 잡기를 엄격히 하여 세도(世道)를 안정시킨 것은 성후의 정직함이요, 사경(私逕)을 막아 궁위(宮闈)를 엄숙하게 한 것은 성후의 엄격함이요, 숨겨진 고통을 살펴 백성의 생활을 평안하게 한 것은 성후의 인애(仁愛)요, 공봉(供奉)을 절감하여 경용(經用)을 넉넉하게 한 것은 성후의 검소함이요, 더러운 사교(邪敎)를 씻어내어 더렵혀진 풍속을 새롭게 한 것은 성후의 결단인 것입니다. 양궁(兩宮) 사이의 정의(情義)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흡잡을 수 없는 정도이고 용단을 내려 염유(簾帷)를 철거함으로써 그 끝을 올바르게 한 것은 또 어찌 선인 태후(宣仁太后)가 비슷하게나마 따라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처음 정묘께서 성상(聖上)을 위하여 배위(配位)를 간택하여 혼일(婚日)이 이미 정해졌는데 선어(仙馭)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시자 적신(賊臣) 권유(權裕)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모의를 품고 드디어 흉소(凶疏)를 올리니, 그 지의(指意)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후께서는 온화한 마음으로 통찰(洞察)하여 현혹되거나 동요되지 않은 채 대례(大禮)를 제때에 거행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억만년토록 이어갈 관저(關雎)·인지(麟趾)의 교화를 이룩할 기반을 다졌으니, 이는 자애로움으로 감싸는 하늘 같은 은덕인 것으로 이제야 더욱 형용하여 칭송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 태모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은 진실로 이미 극치점에 이르렀습니다만, 또한 우리 정묘와 우리 전하(殿下)께서 하늘에서 타고난 지극한 효성으로 성실하고 전일하게 마음과 뜻을 받들어 항상 법칙을 어기지 않은 데 연유된 것으로, 자덕(慈德)은 더욱 높아지고 성효(聖孝)는 더욱 빛나게 되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영묘 임진년192) 에 뭇 신하들이 예순(睿順)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고, 병신년193) 에 성철(聖哲)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정묘 무술년194) 에 병환이 나은 길사(吉事)가 있자 또 장희(莊僖)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계묘년195) ·갑진년196) ·정미년197) ·을묘년198) 에 잇따라 혜휘 익렬 명선 수경(惠徽翼烈明宣綏敬)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습니다. 성상(聖上) 갑자년199) 에 광헌(光獻)이란 존호를 올렸고 또 융인(隆仁)이라고 올릴 것을 의논하였으며 빈전(殯殿)에 책보(冊寶)를 추후에 올렸는데 대신 서매수(徐邁修) 등이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솔하고 가서 시호는 정순(貞純), 휘호는 소숙 정헌(昭肅靖憲), 전호(殿號)는 효안(孝安)으로 올렸습니다. 산릉(山陵)은 원릉(元陵)과 같은 등성이에 가려 정하였고 6월 계축삭(癸丑朔) 20일 임신(壬申)에 왼쪽에 부장(祔葬)하였습니다. 이는 성후(聖后)께서 평소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는 지원(志願)에 조금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09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166]계해년 : 1803 순조 3년.
- [註 167]
갑자년 : 1804 순조 4년.- [註 168]
담로시(湛露詩) :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으로, 천자가 제후에게 연회를 베풀어 줄 때 읊는 시가(詩歌)임. 여기서는 대비(大妃)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연회를 베푼다는 뜻으로 쓰였음.- [註 169]
균천악(鈞天樂) : 아주 미묘(微妙)한 천상(天上)의 음악.- [註 170]
을축년 : 1805 순조 5년.- [註 171]
을축년 : 1745 영조 21년.- [註 172]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註 173]
기묘년 : 1759 영조 35년.- [註 174]
곤극(坤極) : 왕후(王后).- [註 175]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176]
기해년 : 1779 정조 3년.- [註 177]
병오년 : 1786 정조 10년.- [註 178]
경전(磬甸) : 공족(公族)이 사죄(死罪)가 있으면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에게 목을 매어 죽이도록 한 고사(故事). 경우전인(磬于甸人).- [註 179]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註 180]
천붕(天崩) : 임금의 승하.- [註 181]
이천(伊川) : 정이(程頤)의 호.- [註 182]
녹림당(綠林黨) :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워 즉위하자 왕광(王匡)·왕봉(王鳳) 등은 반민들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을 근거지로 도적이 되어 관군(官軍)에 대항하였음.- [註 183]
황건적(黃巾賊) : 후한(後漢) 말기 장각(張角)을 수령으로 하여 일어난 난당(亂黨). 머리에 황건(黃巾)을 썼으므로 황건적이라고 불렀음.- [註 184]
수의(繡衣) : 어사.- [註 185]
탁지(度支) : 호조(戶曹).- [註 186]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187]
선신(先臣) : 이병모(李秉模)의 아버지 이연(李演).- [註 188]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註 18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90]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1]
원우(元祐) :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의 연호.- [註 192]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註 193]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註 194]
무술년 : 1778 정조 2년.- [註 195]
계묘년 : 1783 정조 7년.- [註 196]
갑진년 : 1784 정조 8년.- [註 197]
○誌文:
惟我大行大王大妃垂簾之四年癸亥, 命鑾司撤簾帷, 就閒長樂。 粤一年甲子冬, 以明年寶甲載周, 我聖上, 因群情, 親上尊號, 將以瑤冊、金寶, 贊揚供休, 《湛露》、《勻天》, 賁开太平。 歲籥方新, 慶赦纔頒, 而后遽有疾不豫, 上煼煎憂遑, 命設侍藥廳, 招聚中外名能醫術者, 使之同參醫藥。 技殫百方, 罔克奏效, 則又命禱于廟社、山川。 而竟以乙丑正月十二日丁酉午時, 昇遐于昌德宮之景福殿, 春秋六十有一。 嗚呼! 豈所謂天不可諶, 而理不可推者歟? 我殿下攀號靡逮, 旣卜因山之吉, 乃命臣秉模, 俾爲幽宮之誌, 臣嚴不敢辭。 臣謹按, 后姓金氏, 籍慶州, 新羅金姓王之後。 至麗末, 有諱自粹, 號桑村, 有孝行。 我太宗大王, 徵以官, 自以麗氏臣, 殺身以立節。 入我朝, 簪組蟬奕, 至諱弘郁, 號鶴洲, 官至觀察使, 以忠直敢言, 名於世, 寔后五世祖也。 曾祖諱斗光, 贈贊成, 祖諱選慶參議, 贈領議政, 考諱漢耉, 領敦寧府事, 封鰲興府院君, 贈領議政, 諡忠憲。 配原州 元氏, 封原豐府夫人, 縣監贈判書命稷之女也。 后以崇禎紀元百十八年乙丑十一月丁丑丑時, 誕降于驪州邑私第。 英宗丁丑, 貞聖王后薨, 王乃擇以門族, 審以德行, 以歲之己卯六月, 冊封王妃, 仍行嘉禮。 后旣正位坤極, 小心翼翼, 夙夜靡懈。 英廟已躋大耋, 而所以內資寬仁恭儉之治者, 十八年如一日。 嘗曰, ‘女君聲敎, 不出房闥, 參預朝政, 非美事也。’ 正廟時在東宮, 而恩愛篤至, 正廟每涕淚而言于廷臣。 乙未間, 英廟倦勤, 逆臣洪麟漢、鄭厚謙等, 忌正廟英明有聖德, 深相附結, 力沮聽政, 謀傾儲位。 而厚謙之母和緩主, 恃愛自恣, 嘗在永善堂, 潛煽以助之。 時變起戚畹, 禍釀宮省, 岌乎殆哉, 而后翊護正廟湯膳之際, 未嘗跬步暫離, 而察厚謙母辭氣, 逆折亂萌, 丕贊大策, 使凶謀不得售, 而天討遂行。 己亥, 逆臣洪國榮, 敢懷異圖, 陰沮儲嗣大計, 以逆宗䄄之子湛, 號爲完豐, 仍肆凶言, 圖危國母, 后以廣儲嗣之道, 布示諺敎, 又以至誠, 扶護中宮。 榮賊之謀乃沮。 及至丙午, 文孝世子薨逝, 國勢又復孤危。 罪相金尙喆, 與具善復, 暗挾逆䄄, 凶謀狼藉, 而正廟以因心之友, 隱忍而不之罪, 后又下諺敎於賓廳, 首尾數千言。 痛辨汕徒之情跡曰, ‘未亡人所秉執, 將以明大義, 討君讎國賊, 保我邦家, 則雖死之日, 猶生之年,’ 遂盡廢湯劑常膳。 大臣、三司, 因以齊聲庭籲, 正廟不得已出置逆䄄于江華府, 善復等皆伏法。 而正廟不勝鬱陶之思, 歲輒召見, 又嘗於江館, 召接䄄, 經宿不返。 后爲之焦遑, 遽下移蹕之命, 正廟乃始旋轝, 還配逆宗。 逮聖上卽阼之後, 䄄率其子, 穿棘而出, 大臣以下, 力請置辟, 后以爲主少國危, 目下憂虞, 異於先朝, 遂命磬甸。 當庚申崩坼之變, 宗國危於綴旒, 后勉循群請, 行貞熹聖母故事, 而保護聖躬, 靡不用極, 飮啖起居之節, 一念憧憧。 尤以輔導聖學爲急務, 命大臣、閣臣, 輪日勸講, 以至發一令措一事, 憂勤惕厲, 幾乎寢膳之不能一夕安也。 嗚呼! 正廟平日所秉執之義理, 至精至嚴, 宮園之儀, 亞于太廟, 凡所得爲而爲, 不得爲而不爲者, 可以建天地而不悖, 俟百世而不惑。 臨御二十有五年, 守之如金石。 后於垂簾之初, 特下敎曰, ‘大行大王盛德大業, 一則義理, 二則義理, 一或違越於此, 大行朝逆臣也, 當宁朝逆臣也。 敢有爲嘗試之計者, 斷不饒貸, 曉諭中外。’ 自是厥後, 每臨筵以固守先王義理, 闡明先王志事, 申申飭勵。 先是, 戚臣洪樂任, 背馳義理, 角戰公議, 流布訛言, 詿惑人心, 正廟屢發隱歎於中朝, 而以恩掩義, 曲加全保。 至是, 益無所忌憚, 廷臣乃言, ‘其譸張凶圖, 疑亂典禮, 今若鋤草, 而不祛其根, 則滋蔓難圖。" 后敎曰, ‘予以先王聖心爲心, 必欲終始曲保,’ 久而後從之。 西洋邪敎, 自十數年前, 浸盛於閭巷間, 滅倫敗常, 貨色以相誘, 嘯聚徒黨, 犯刑憲如飮食, 視刀鋸如樂地, 正廟心常患之。 時李家煥、丁若鍾等, 包藏禍心, 潛通異域, 廣播妖書, 熾若炎火, 混名分瀆風敎, 不但爲伊川被髮之歎, 將有綠林、黃巾之變。 后因臺啓, 命鞫治, 大臣有以此時輕興大獄, 難之者, 后曰, ‘不治則人胥爲禽獸而國亡。 治之亦恐召亂, 與其汚國而亡, 豈若潔而亡?’ 蒐捕京外, 殲其魁, 散其黨, 申明五家統之法, 俾各紏察邪穢之氣, 卽日廓淸。 至於恤民之政, 尤惓惓焉。 嘗敎曰, ‘廟堂諸臣, 苟有保恤民生之策, 隨事提稟。 雖以身蹈水火, 予豈惜之? 民弊中還穀, 名色無數, 吏胥奸弊, 由此而生, 廟堂從長相議。’ 以備局句管戶曹穀爲名, 賤糶貴糴, 略倣常平古法制。 又曰, ‘生民切害, 莫急於貪吏。 目下貪風之盛, 日甚月加, 養廉恥嚴法防, 然後可以拯救民生。 廟堂講究弊源, 嚴立科條, 畫一遵守, 俾有實效。’ 嘗以繡衣褒貶, 諸道殿最多相左, 敎曰, ‘守令罷斥, 太半是無勢蔭官, 顯族皆是良吏, 弱蔭偏爲不治乎?’ 又以度支經費之不足、兩西民庫之蕩然, 深加軫念, 庚申因山之役, 都監所費, 皆令壯勇營擔當, 辛酉一年度支之用, 亦命壯營劃送。 兩西所在壯營穀, 一付諸該道民庫, 用大臣議, 特罷壯營。 蓋其設置, 卽正廟精義之一端, 而庚申以後, 則民國事勢, 又不容不通變, 其設其罷, 其揆一也。 嘗減罷供上六十, 撤簾後, 又出付四十五供上, 曰, ‘此雖不多, 亦可以稍補國用。’ 又慮他日之用, 衣衾之具, 一皆預備, 且以白金三千兩, 各色緞屬, 爲之措置。 聖上擧似, 而飭敦匠之臣, 敬遵遺意, 八方傳誦, 感泣不已。 用人材, 則以激濁揚淸爲務, 曰, ‘銓曹但以節次推排爲事, 則一政吏足矣。’ 杜私徑則曰, ‘予不欲以朝廷政令間事, 問於私親。 有從密逕告知予者, 爲予政令之累。’ 開言路, 則諭在廷大小曰, ‘凡係予躬之闕德, 朝廷之失得, 其各洞陳無隱。 雖草野踈蹤, 毋或嫌外。’ 每諸臣有所論奏, 初雖不槪於慈心, 旋卽轉圜如流, 事關宮掖, 尤無不言下開納, 亦未嘗不深惡痛斥於怪鬼跳踉之習。 前縣監洪履猷輩, 欲逐一相臣, 誣捏其先臣己亥疏句, 轉而壞亂辛、壬大義理, 后輒燭其奸, 命正其罪。 當廷議之請垂簾也, 后以守經之意, 十啓靳兪, 末乃勉許, 及垂簾之日, 特敎曰, ‘予則垂簾, 沖子侍坐, 殊非正名位之意。 更以予則從以垂簾書頒。’ 及其撤簾也, 召大臣宰執, 敎曰, ‘予否德, 久居不當之地。 今主上春秋長盛, 聖學日進, 萬機可以總斷, 予豈可一向蹲仍, 不思所以存國體正大經乎?’ 斷自慈衷, 立命撤之, 嗚呼! 之德之功, 太史將不勝其書矣。 臣何能摸畫萬一哉? 謹就筵綸敎令及章奏文字之昭布耳目者而撮之, 自附簡嚴之體。 而竊伏惟念后妃之德, 莫盛於周之任、姒, 然詩人之所詠美, 不過《葛覃》、《樛木》、《思齊》諸篇而已。 有宋 宣仁高太后, 以所値之不同, 當時有女中堯舜之稱, 而讀其史, 尙不能無一、二可議焉。 猗! 我太母, 以任、姒之聖, 遭元祐之時, 德化旁流, 寰宇寧謐, 欲報之恩, 昊天無極。 而其終始而論之, 折奸萌以贊丕策, 后之明也, 炳幾先以鞏國勢, 后之義也, 嚴秉執以靖世道, 后之正也, 杜私逕以肅宮闈, 后之嚴也, 察幽隱以奠民生, 后之仁也, 節供奉以紓經用, 后之儉也, 蕩邪穢以新汚俗, 后之斷也。 至若兩宮之間, 人無間然, 勇撤簾帷, 以正其終, 又豈宣仁之所能彷彿也哉? 初正廟爲聖上擇配, 厥祥已定, 而仙馭遽賓, 賊臣權裕, 謀欲沮遏, 遂投凶疏, 指意叵測。 后穆然玄覽, 不眩不撓, 大禮以時, 以基我億萬年《關雎》、《麟趾》之化, 蓋慈覆之天, 於是乎益無能名焉。 嗚呼! 太母之盛德至善, 固已極摯, 而亦由我正廟曁我殿下至孝根天, 洞洞屬屬, 承意順志, 動不違則, 慈德愈隆而聖孝彌光, 於乎休哉! 英廟壬辰, 群臣上尊號曰睿順, 丙申加上尊號曰聖哲, 正廟戊戌憂吉, 又上尊號曰莊僖, 癸卯、甲辰、丁未、乙卯, 連上尊號曰惠徽翼烈明宣綏敬。 聖上甲子, 上尊號曰光獻, 又議上曰隆仁, 而追進冊寶於殯殿, 大臣徐邁修等, 率諸宰, 上諡曰貞純, 徽號曰昭肅靖憲, 殿號曰孝安。 山陵卜於元陵同原, 以六月癸丑朔二十日壬申, 祔左焉。 此可以少慰后平昔密邇之志願也歟! 【領府事李秉模製。】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09면
-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註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