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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6권, 순조 4년 12월 10일 을축 3번째기사 1804년 청 가경(嘉慶) 9년

이경일·서매수·황승원·한용귀·한만유 등이 사창법에 대하여 논의하다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조적법(糶糴法)은 처음에는 비록 백성을 위해 설치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백성을 해치는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대개 이예(吏隷)가 석(石)을 나누는 것, 알곡식을 빈 쭉정이로 바꾸는 것, 읍주인(邑主人)이 꾸어 주기를 바라는 것 등 그 폐단 되는 것이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환곡(還穀)을 받으라는 명령을 들으면 모두 두통이 나 콧날을 찡그리기 때문에 돈으로 환곡을 막아버리는 자도 있고 받아 나가다 버려두고 가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전례에 의거해 징봉(徵捧)하니, 힘있는 백성은 온갖 계책을 써서 받지 않지만, 고할 데 없는 잔약(殘弱)한 백성들은 치우치게 많은 석(石)을 받아 심지어 1호에 10석, 혹은 수십 석이 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름은 비록 환곡을 나누어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받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해마다 쫓아와 외치고 채찍질 하며 잔약한 백성들로부터 수십 석의 곡식을 백징(白徵)하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선조(先朝) 때 환곡의 고질적인 폐단을 특별히 진념(軫念)하시어 심지어 책문(策問)을 내어 교구(矯捄)하는 방도를 순문(詢問)하기까지 하셨으나, 아직까지도 대양(對揚)하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창(社倉) 1조(條)만이 교구할 수 있을 것이며, 선조 때의 책문 가운데도 또한 사창에 대해 하교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주자(朱子)의 사창의 규칙에다 우리 나라의 조적법을 참고하여 전례에 의거해 모곡(耗穀)을 취한다면 백성들도 즐거이 따르고 백징의 폐단도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절목(節目)을 만들어 내고 환곡의 폐단이 가장 심한 양남(兩南)과 양서(兩西)에 행회(行會)하되, 백성이 원하는 것을 따라 설시(設施)해야 할 것입니다. 각면(各面)에 사창 하나를 두는 뜻을, 청컨대 먼저 좌상(左相)과 연석(筵席)에 등대(登對)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소서."

하니, 좌의정 서매수(徐邁修)는 말하기를,

"사창법의 뜻은 본디 백성을 위한 것이니 본떠 시행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만, 절목에 관한 일은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을 것 같으니, 우선 몇몇 고을에 시험해 그 편리 여부를 보고 민정(民情)이 과연 편리하게 여긴다면 차차 설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행 이조 판서 황승원(黃昇源)은 말하기를,

"옛날 숙묘조(肅廟朝) 때 사창에 관한 일로 절목을 만들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시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한결같이 사창법을 따라 설행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 같으나, 신의 적은 견해로는 다시 헌의(獻議)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행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사창의 유법(遺法)이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예와 지금은 시의(時宜)가 다르니, 폐단이 없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한두 읍(邑)에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한만유(韓晩裕)는 말하기를,

"현재 주(州)·읍(邑)에 외창(外倉)이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 또한 사창의 유의(遺意)인 것입니다. 그러나 같지 아니한 것은 관(官)·민(民)의 구별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전적으로 존위(尊位)의 손에만 맡겨 버린다면, 폐단이 없으리라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약간의 크고 작은 읍부터 시행하여 심한 장애가 없고 난 뒤에 여러 도(道)에 미루어 시행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행 대호군 채홍리(蔡弘履)·행 호군 이인수(李仁秀)·행 도승지 서형수(徐瀅修)·행 부호군 박종경(朴宗慶)의 헌의(獻議)도 대략 같았다. 하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헌의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사창은 지금의 공곡(公穀)과 같지 아니하다. 지금의 공곡은 그 모곡(耗穀)이 허다히 공용(公用)이 되고 있으니, 과연 서로 장애되는 것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다시 십분 폐단이 없을 방도를 강구하여 뒷날 연석(筵席)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96면
  • 【분류】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右議政李敬一啓言: "糶糴之法, 始雖爲民而設, 今反爲厲民之資。 蓋吏隷之分石也, 精穀之換虛殼也, 邑主人之乞貸也, 其所爲弊, 不一其端。 民聞受還之令, 則擧疾首蹙頞, 故有以錢防還者, 有受出棄置而去者。 而當秋, 則依例徵捧, 有力之民, 百計不受, 無告殘氓, 偏受多石, 至有一戶十石, 或數十石者。 名雖分還, 實不受去。 況每年追呼鞭撻, 白徵數十石穀於殘民者, 天下寧有是耶? 粤在先朝, 特軫還穀之痼弊, 至於發策, 詢問矯捄之道, 而訖未有對揚之人, 可勝歎哉? 惟有社倉一條, 可以矯捄, 而先朝策問中, 亦有社倉之下敎矣。 今以朱子社倉之規, 參以我國糶糴之法, 依例取耗, 則民必樂從, 而可無白徵之弊。 爲先成出節目, 行會於還弊最甚之兩南、兩西, 使之從民願設施。 各面一倉之意, 請先爲下詢於左相及登筵諸臣。" 左議政徐邁修曰: "社倉法意, 本自爲民, 倣而行之固好, 而節目間事, 似不無拘掣之端, 姑先試之於數三邑, 觀其便否, 民情果以爲便, 則次次設施, 恐好矣。" 行吏曹判書黃昇源曰: "昔在肅廟朝, 以社倉事, 至於成節目, 而未果行矣。 今若一遵社倉法設行, 則似有實效, 以臣諛見, 無容更議。" 行禮曹判書韓用龜曰: "社倉遺法, 非不美矣, 而古今異宜, 難保其無弊。 姑先試可於一、二邑, 似好矣。" 兵曹判書韓晩裕曰: "見今州邑, 莫不有外倉, 是亦社倉遺意。 而所不同者, 官、民之別也。 今若專付尊位之手, 則難保其無弊。 臣意先從若而大小邑試行, 無甚掣礙然後, 推行於諸道好矣。" 行大護軍蔡弘履、行護軍李仁秀、行都承旨徐瀅修、行副護軍朴宗慶議略同。 敎曰: "僉議如此, 當試可。 而古之社倉, 則非如今之公穀。 今之公穀, 則其耗穀, 多爲公用, 果無相礙乎? 須更講究十分無弊之道後, 筵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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