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관 홍석주가 문견 별단을 올리다
서장관 홍석주(洪奭周)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리기를,
"1. 금년 윤2월 사이에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궁궐로 돌아와서 이미 자금성(紫禁城)의 신무문(神武門)을 들어갔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검(劍)을 뽑아 들고 호위(護衛)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매우 황급한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오직 친왕(親王)과 근신(近臣) 6인이 몸으로 막아서 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2인은 몸에 여러 군데 창상(創傷)을 입은 후에야 겨우 그 도둑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데, 그 도둑은 곧 편호(編戶)의 백성인 진덕(陳德)이었다고 합니다. 군기 대신(軍機大臣)으로 하여금 신문하게 하였더니, 단지 말하기를, ‘기한(飢寒)이 닥쳤으나 사경(死境)에서 구제할 방도가 없어서 차라리 속히 죽으려고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 육부(六部)의 대신으로 하여금 연일 형장을 가해 국문(鞫問)하게 하였더니, 비로소 말하기를, ‘길몽(吉夢)과 기이한 복서(卜筮)가 있어서 바랄 수 없는 자리를 외람되게 희구(希求)하였습니다.’ 하고, 마침내 기꺼이 공범(共犯)을 끌어대지 않았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구문(究問)하기를 청하자, 유시하기를, ‘미친 개가 사람을 물었을 경우에는 원래 시킨 자가 없는 것이다. 온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짐의 골육(骨肉)인데, 어떻게 차마 흉범(凶犯)으로 하여금 끌어대게 할 수 있겠는가? 곧 처결하게 하되, 오직 진덕과 두 아들만 베어서 고가(藁街)에 머리를 매달고, 나머지는 비록 진덕의 지친이라 하더라도 아울러 파급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으며, 또 급변(急變)이 일어나는 즈음에 1백여 명의 시위하던 사람들이 모두 수수 방관(袖手傍觀)하였다 하여 전지를 내려 준절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1. 안남(安南)은 여씨(黎氏)가 이미 멸망한 후 완광평(阮光平)이 대신 그 나라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완광평의 아들 완광찬(阮光纘)이 죄를 짓고 민월(閩越)에 도망가 있는 자들을 불러들여 변방의 행려(行旅)를 겁략(劫掠)했으며, 작년에 이르러서는 농내국장(農耐國長) 완복영(阮福暎)과 서로 공격하여 싸우다가, 그들에게 패배당해 나라를 버리고 몰래 도망쳤다고 합니다. 완복영이 그 칙인(勅印)을 획득한 다음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치고, 그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은 본말(本末)을 아뢰자, 인하여 완복영을 안남에 봉하고 국호(國號)를 ‘월남(越南)’이라고 고쳤다 합니다.
1. 광동(廣東)의 땅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인데, 생업(生業)을 잃은 곤궁한 백성들이 서로 선동하여 도둑이 되었으므로, 여러 번 초안(招安)을 행하였으나 점차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 합니다. 올해 봄·여름 사이에 나언(那彦)·성호도(成瑚圖)·영아(靈阿) 등을 보내어 기회를 타서 초토(剿討)하게 하였는데, 여러 번 싸워 모두 이기고 참칭(僭稱)하던 황아정(黃亞程) 등을 사로잡음으로써 이제 이미 소탕하여 평정하고 개선(凱旋)을 아뢰어 논공(論功)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천성(四川省)의 도둑을 평정하기도 전에 광동의 도둑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으며, 강남(江南)의 숙주(宿州) 한 지경에도 또한 적비(賊匪)의 소요로 황지(潢池)에서 병기(兵器)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 없는 해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 천초(川楚)의 적비(賊匪)는 8년 동안이나 근심거리가 되어 왔는데, 이제 이미 차례로 초멸(剿滅)하여 평정하였으며, 지난해 겨울 사이에는 이미 크게 승리한 것을 고묘(告廟)하고 논공 봉상(論功封賞)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당(餘黨)이 만연되어 산동(山峒)에 출몰하고 있으므로, 경략 대장군(經略大將軍) 액륵등보(額勒登保)와, 참찬 대신(參贊大臣) 덕릉태(德楞泰)와, 사천 총독(四川摠督) 늑보(勒保) 등이 아직도 진(鎭)에 머물러 있어 여러번 혈전(血戰)을 겪었고, 제독(提督)과 대장(大將)도 또한 싸우다가 죽은 자가 많았는데 봄·여름 사이에 다시 연승(連勝)을 거두어 지금은 서남 지방 한쪽에는 남아 있는 비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이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에 가는 길에서 여러번 돌아오는 전사(戰士)들을 만났는데, 역참(驛站)의 수레와 말 때문에 동네가 떠들썩하였으니, 그 돌아오는 자가 이와 같다면 그 〈전장(戰場)에〉 가는 자도 또한 알만 합니다. 그런데 섬서(陝西)·파촉(巴蜀)의 만 리 길에 심지어 영고탑(寧古塔)·흑룡강(黑龍江) 부근의 군병을 징발(徵發)하였으니, 군사가 피로하고 재물이 탕갈되었음을 미루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신이 귀로(歸路)에서 또 들은즉 영평(永平)의 군사가 사천성에 징발되어 나갔던 자들이 7천 인이 되었는데, 지금 살아서 돌아온 자는 3천 인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근년에 남쪽 변방에서는 잇달아 흉년이 들어 유민(流民)이 관문 밖으로 많이 나갔으므로, 황제가 비적들이 그 사이에 섞일 것을 염려하여 부도통(副都統) 책파극(策巴克)에게 특별히 명하여 앞에 가서 조사해 살피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년 5월 사이에 관문을 나가서 마침 복건성(福建省)의 유민을 만났는데, 구문 제독(九門提督)에게 정문(呈文)한 자가 말하기를, ‘간민(奸民) 유문희(劉文喜) 등 6인이 변방 밖에 진을 치고 웅거하여 유민들을 불러 모은 다음 나무를 몰래 베고 상려(商旅)들을 약탈하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제독이 이에 의거하여 황제에게 주품(奏稟)하자, 황제가 부도통에게 명하여 그대로 머물러 조사하게 하였으며, 여순(旅順)의 수군(水軍)과 수암현(岫巖縣)의 군사들을 조발(調發)하여 고려구(高麗溝)·장자도(獐子島) 등지에 주둔하여 모여 있는 비적(匪賊)을 엄습하여 그 수범(首犯) 4인을 체포하였는데, 유독 유문희(劉文喜)·고학언(顧學彦) 2인은 아직도 잡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이 돌아오는 길에 심양을 지나가다가 듣건대, 심양 장군 부곤(富坤)이 바야흐로 변경을 살피고 돌아왔는데, 전임(前任) 봉황성장(鳳凰城將) 갱녕(賡寧)이 뇌물을 받고 간사한 사람을 용서한 까닭에 체포해서 심양에 계류(繫留)하고 있는데, 적몰(籍沒)하여 찬적(竄謫)하는 데 해당된다고 합니다. 또 듣건대, 고려구·장자도 등의 지방에는 심양과 봉황성으로부터 군사를 조발하여 갈대를 베어 내고, 인하여 군사를 머물러 두고 방수(防守)하려 한다고 하는데, 이 한 조항은 일이 길에서 들은 것이므로 확실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67면
- 【분류】외교-야(野)
○書狀官洪奭周, 進聞見別單。
一。 今年閏二月間, 皇帝自圓明園回宮, 已入紫禁城之神武門, 忽有一人, 拔劎突起於仗衛之間, 諸臣皆倉皇失措, 惟親王近臣六人, 以身捍蔽。 其二人身被數創而後, 僅能獲盜, 其盜卽編戶民人陳德也。 令軍機大臣訊之, 則但云, ‘迫於飢寒, 無以救死, 寧求速死耳。’ 又令六部大臣, 連日刑鞫, 始言, ‘有吉夢、異卜, 希凱非望,’ 終不肯招引同情。 諸臣竝請究問, 諭以, ‘猘犬噬人, 原無主使。 擧朝臣工, 皆朕骨肉, 何忍令凶犯扳扯乎? 卽令處決, 惟誅德及二子, 懸首藁街, 餘雖德至親, 竝不波及。’ 又以急變之際, 百餘侍衛, 皆袖手旁觀, 降旨切責。 一。 安南, 黎氏旣亡之後, 阮光 平代有其國, 光平之子光纉, 招納閩越之逋逃, 刦掠邊郵之行旅。 及至昨年, 與農耐國長阮福暎, 互相攻戰, 被其所敗, 棄國潛逃。 福暎獲其勅印, 遣使呈繳表, 陳其興兵報仇之本末, 仍以福暎封於安南, 而改國號曰: "越南" 云。 一。 廣東之地, 本是猺獞之巢穴, 而失業窮民, 相煽爲盜, 屢行招安, 輾轉滋熾。 今年春、夏間, 遣那彦、成瑚圖、靈阿等, 相機勦討, 屢戰皆捷, 獲其僭號之黃亞程等, 今已掃平, 奏凱論功云。 而川寇未平, 廣盜繼起, 江南之宿州一境, 亦有賊匪之擾,潢池弄兵, 可知其無歲無之。 一。 川、楚賊匪, 八年爲患, 今已次第勦平, 前年冬間, 旣以大捷, 告廟論功封賞。 而餘黨蔓延, 出沒山峒, 經略大將軍額勒登保、參贊大臣德楞泰、四川摠督勒保等, 尙今留鎭, 屢經血戰, 提督、大將, 亦多陣亡, 春、夏之間, 復獲連勝, 今則西南一隅, 無復遺燼云。 而臣於遼 瀋之路, 屢逢戰士之還歸者, 傳車遞馬, 閭里騷然, 其歸如此, 其去可知。 而陝、蜀萬里之路, 至發寧古塔、黑龍江之兵, 則師勞財匱, 可以推見。 臣於歸路又得聞, 永平戰士之調赴川省者, 爲七千人, 而目今生還, 不滿三千云。 一。 近年南邊, 連爲失稔, 流民多出關外, 皇帝慮匪徒之雜於其間, 特命副都統策巴克, 前往査察。 以今年五月間出關, 而適値福建流人, 有呈文於九門提督者, 稱: ‘奸民劉文喜等六人, 屯據邊外, 招募流民, 偸斫木植, 行劫商旅’ 云, 提督據此奏稟皇帝, 命副都統, 仍留査辨, 調發旅順水師及岫巖縣兵役, 掩捕高麗溝、獐子島等地, 屯聚賊匪, 拿其首犯四名, 惟劉文喜、顧學彦二人, 尙未斯得云。 臣於反命之路, 行過瀋陽, 聞 ‘瀋陽將軍富坤, 方自察邊回還, 而前任鳳城將賡寧, 以其受賂容奸之故, 逮繫瀋陽, 當籍沒竄謫’ 云。 又聞 ‘高麗溝、獐子島等地方, 自瀋陽、鳳城, 調發兵丁, 芟去蘆葦, 仍欲留兵防守’ 云。 而此一款, 則事係塗聽, 未敢的信。"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467면
- 【분류】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