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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4권, 순조 2년 8월 15일 계축 1번째기사 1802년 청 가경(嘉慶) 7년

숙종 대왕·영종 대왕의 어진을 양지당에서 선원전에 환안하다

숙종 대왕의 어진(御眞)과 영종 대왕의 어진을 양지당(養志堂)으로부터 선원전(璿源殿) 제1실 【중간에 있으면서 남향(南向)이다.】 과 제2실 【왼쪽에 있으면서 남향이다.】 에 환안(還安)하고 정종 대왕의 어진은 주합루(宙合樓)로부터 제3실 【오른쪽에 있으면서 남향이다.】 에 옮겨 모신 뒤 친히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환안(還安)할 시각이 되자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 공조 판서 민태혁(閔台爀), 승지 김완선(金完善), 가주서 서영보(徐永輔), 겸춘추 김치룡(金致龍)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숙묘(肅廟)의 어진(御眞) 3궤(机)와 영묘(英廟)의 어진 5궤를 받들고 소련(小輦)에 모셨다. 이어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숙묘의 어진 궤짝을 모시고 나와 제1실의 탑(榻)위에 환안하였는데 중간에 당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였다. 계사년의 2본(本)은 궤 속에 보관하고 무진년(戊辰年)의 1본을 펼쳐 모셨다. 영묘의 어진이 모셔진 궤를 모시고 나와 제2실 탑 위에 환안하였는데 왼쪽에 있으면서 남쪽을 향하게 하였다. 신축년의 본이 하나이고 계축년의 본이 둘이고 계미년의 본이 둘인데, 네 본은 궤 속에 보관하고 한 본은 모시고 나와 붉은 쪽지의 표제(標題)로써 서용보가 써서 붙인 뒤에 이어서 계사년의 대본(大本)인 팔순의 어진을 펼쳐 모셨다. ○이안(移安)할 시간이 되자 시임·원임 각신(閣臣)인 제학 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 원임 직제학 정대용(鄭大容), 직제학 이시원(李始源)·김근순(金近淳), 원임 직각 박종경(朴宗慶)·이존수(李存秀), 대교 이교신(李敎信), 분승지 이조원(李肇源)·임한호(林漢浩), 분가주서 홍병철(洪秉喆), 분사관 이석(李晳), 대축 민명혁(閔命爀)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주합루(宙合樓)의 앞뜰에 나아가 예를 행하기를 끝마치자 유사(有司)가 신여(神轝)를 주합루 아래 앞뜰 가운데로 모셨다. 시위(侍衛) 및 각 차비관(差備官), 섭좌통례 정내백(鄭來百), 섭우통례 원재명(元在明), 향로 차비(香爐差備) 김재창(金在昌), 향합 차비(香盒差備) 김계온(金啓溫), 수정장 차비(水精杖差備) 김이유(金履裕), 금월부 차비(金鉞斧差備) 박유원(朴綏源), 양산 차비(陽傘差備) 조후진(趙厚鎭), 일산 차비(日傘差備) 이희(李爔), 산선 차비(繖扇差備) 홍인모(洪仁謨)·김기후(金基厚), 분부총관 이익모(李翊模), 도사(都事) 심겸(沈鎌), 분병조 참의 김명순(金明淳), 정랑 심능섭(沈能燮)이 차례대로 섰다. 이만수가 정문의 자물쇠와 열쇠를 가지고 서쪽 계단 서쪽 사다리를 경유하여 주합루에 올라가 정문과 동서의 협문을 열었다. 시임·원임 각신, 승지와 사관 대축이 차례대로 누각에 올라가 탑 앞으로 나아갔고, 이만수 등이 감실[龕]을 열어 휘장[帕]을 열고 어진 4궤를 모시고 나왔다. 이만수·김조순이 한 궤를 받들고, 정대용·이시원이 한궤를 받들고, 김근순·박종경이 소본(小本) 한 궤를 받들고, 이존수·이교신이 소본 한 궤를 받들고, 정문을 경유하여 나와 동쪽 사다리쪽으로 내려왔다. 차비관이 각각 향로·향합·수정장·금월부·양산·일산 산선을 받들고 주합루 앞에 배열하고 이어서 선원전에 사용하여 신여를 봉안한 곳에 이르자 섭통례가 꿇어않아 신여에 올릴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이만수 이하의 관원들이 각각 궤를 받들어 신여에 모신 뒤 설면(雪綿)으로써 구멍을 메꾸고 다음에는 붉은 명주 수건으로 이리저리 묶어 수건을 덮고 휘장을 내리기를 끝마치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왔다. 섭통례가 꿇어않아 출발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드디어 신여를 모시고 서성문(西成門)을 통해 출발하고 각신 이하의 관원들이 모시고 따라가면서 영숙문(永肅門)을 나와서 만녕문(萬寧門)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소차(小次)로부터 나와 국궁(鞠躬)하고 공경히 문안에 맞이하였다. 신여가 정숙문(正肅門) 밖 악차(幄次)에 이르자 섭통례가 꿇어앉아 신여를 내릴 것을 아뢰어 청했다. 이만수 등이 신여의 앞에 나아가 휘장을 열고 묶은 것을 풀고 수건을 들고서 차례대로 궤를 받들어 소연(小輦)에 모신 뒤 수건을 덮고 휘장을 내리기를 앞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끝마치자 임금은 다시 소차로 들어가고 각신 이하의 관원들은 소연을 모시고 따라가면서 정숙문으로 들어가 선원전 제3실 문밖에 나아갔다. 섭통례가 꿇어앉아 소연을 내려놓을 것을 아뢰어 청하니, 이만수 등이 휘장 및 수건을 열고 차례대로 어진의 궤를 받들어 제3실 탑 위에 모셨는데 오른쪽에 있으면서 남쪽을 향하게 하였다. 신축년의 것은 대본이 하나이고 소본이 하나이며 병진년의 것은 소본이 하나인데, 세 본은 궤 속에 보관하고, 신해년의 대본(大本) 하나를 펼쳐서 봉안하고 나서 각신 이하의 관원들이 물러갔다. 임금이 소차로부터 나와 전내(殿內)로 들어가 봉심한 뒤에 다시 소차로 나아갔다. 다례(茶禮)를 올릴 시각이 되자 임금이 전정(殿庭) 판위(版位)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올라가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이어서 제1실에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리고 술잔을 잡아 잔을 올리고 승지 김종선(金宗善)에게 명하여 고유문(告由文)을 읽도록 하였다. 끝마치자 임금이 다음은 제2실과 제3실에 나아가 세 번 향을 올리고 술잔을 잡아 잔을 올렸다. 끝마치자 내려와 자리로 돌아와 사배례를 행하고 이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3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癸丑/肅宗大王御眞、英宗大王御眞, 自(養忘堂)〔養志堂〕 , 還安于璿源殿第一室、 【當中南向。】 第二室。 【左南向。】 正宗大王御眞, 自宙合樓, 移安于第三室, 【在右南向。】 親行茶禮。【還安時至, 領議政沈煥之、右議政徐龍輔、戶曹判書趙鎭寬、工曹判書閔台爀、承旨金完善、假注書徐永輔、兼春秋金致龍, 進詣養志堂, 奉肅廟御眞三(樻) 〔櫃〕英廟御眞五櫃, 安于小輦。 隨詣璿源殿, 奉出肅廟御眞櫃, 還安于第一室榻上, 當中南向。 癸巳二本櫃藏, 戊辰一本展奉。 奉出英廟御眞櫃, 還安于第二室榻上, 在左南向。 辛丑本一, 癸丑本二, 癸未本二, 四本櫃藏, 一本奉出, 以紅籤標題, 徐龍輔書寫粘付後, 仍爲展奉癸巳大本八旬御眞。 移安時至, 時、原任閣臣提學李晩秀金祖淳、原任直提學鄭大容、直提學李始源金近淳、原任直閣朴宗慶李存秀、待敎李敎信、分承旨李肇源林漢浩、分假注書洪秉喆、分史官李哲、大祝閔命爀, 具朝服, 入就宙合樓前庭, 行禮訖, 有司進神轝於樓下前庭當中。 侍衛及各差備官、攝左通禮鄭來百、攝右通禮元在明、香爐差備金在昌、香盒差備金啓溫、水精杖差備金履裕、金鉞斧差備朴綏源、陽傘差備趙厚鎭、日傘差備李爔、繖扇差備洪仁謨金基厚、分副摠管李翊模、都事沈鐮、分兵曹參議金明淳、正郞沈能燮, 以次序立。 晩秀持正門鑰匙, 由西階西梯陞樓, 進開正門及東西夾門。 時ㆍ原任閣臣、承、史、大祝, 以次陞樓, 進詣榻前, 晩秀等, 開龕啓帕, 奉出御眞四櫃。 晩秀祖淳奉一櫃, 大容始源奉一櫃, 近淳宗慶奉小本一櫃, 存秀敎信奉小本一櫃, 由正門出, 降自東梯。 差備官各奉香爐、香盒、水精杖、金鉞斧、陽傘、日傘、繖扇, 宙合樓前排, 仍用于璿源殿, 至神轝奉安所, 攝通禮跪, 啓請陞轝。 晩秀以下, 各奉櫃安于神轝, 以雪綿補空, 次以紅紬巾, 交結覆帕降帳訖, 降復位。 攝通禮跪, 啓請進發, 遂奉神轝, 由西成門進發。 閣臣以下陪從, 出永肅門, 入萬寧門內。 上具遠遊冠、絳紗袍, 出自小次鞠躬, 祗迎于門內。 神轝至正肅門外幄次, 攝通禮跪, 啓請降轝。 晩秀等, 進詣神轝前, 啓帳解結, 擧帕以次奉櫃, 安于小輦, 覆帕降帳, 如前儀。 訖, 上還入小次, 閣臣以下陪從小輦, 入正肅門, 詣璿源殿第三室戶外。 攝通禮跪, 啓請降輦, 晩秀等啓帳及帕, 以次奉御眞櫃, 安于第三室榻上, 在右南向。 辛丑大本一, 小本一, 丙辰小本一, 三本櫃藏, 辛亥大本一展奉, 訖, 閣臣以下退出。 上出自小次, 入殿內奉審後, 還詣小次。 茶禮時至, 上入就殿庭版位, 行四拜禮。 陞詣盥洗位盥手, 仍詣第一室, 三上香, 執盞獻盞, 命承旨金宗善, 讀告由文。 訖, 上次詣第二室、第三室, 三上香, 執盞獻盞。 訖, 降復位, 行四拜禮, 仍爲還內。】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3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