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사 이병모가 사학 괴수 주문모의 자수를 보고하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이달 12일에 사학(邪學)으로서 금오(金吾)에 자수한 자가 있었는데, 먼저 포청(捕廳)에서 반문(盤問)하였더니, 바로 국초에 나왔던 사학의 괴수 주문모(周文謨)였습니다. 주문모는 본래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니므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많이 있어서 문자(文字)를 써서 공초를 바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자수하였다고 하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지금 수탐하라는 명이 있었고, 그의 당류가 거의 모두 서치(鋤治)되었으므로 발붙이기가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또 언어가 익숙하지 못하고 행지(行止)가 불편하였으며, 만약 붙잡히게 되면 그 또한 용서받기 어려운 줄 알았기 때문에 자수하여 요행히 만에 하나라도 면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용모가 어떻던가?"
하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도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듣건대, 그 용모는 구레나룻이 자못 길고, 말쑥한 얼굴이 온화하고 관대해 보여 마치 문사(文士) 같은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대개 그는 소주(蘇州)사람으로 7세에 어미를 잃고 8세에 아비를 잃고는 그 고모에게 양육되었는데, 고모가 낮에는 수(繡)를 놓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고 밤에는 그에게 문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20세에 아내를 얻었는데, 3년 만에 그 아내가 죽으니 드디어 다시 장가들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서양의 학문에 종사(從事)하다가 인하여 북경(北京)의 천주관(天主館)에 전입(轉入)했다고 합니다. 이승훈(李承薰)이 사서(邪書)를 구입(購入)해 온 이후 정약종(丁若鍾)의 무리와 사사로이 서로 양인(洋人)과 왕래하여 교주(敎主)를 얻기를 요구하였는데, 천주관에 와서 머물고 있는 양인은 정해진 액수가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에 가게 되면 피인(彼人)들이 반드시 알게 되므로, 마침내 중국(中國) 사람으로서 와서 수업(受業)하던 자를 우리 나라에 내보내기로 하고, 갑인년145) 동지사(冬至使)가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그 변문(邊門)이 열리는 시기를 틈타 몰래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고 하였으니, 그 정절(情節)이 지극히 망측합니다."
하니, 본부에서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75면
- 【분류】사상-서학(西學) / 사법(司法)
- [註 145]갑인년 : 1794 정조 18년.
○領府事李秉模啓言: "今月十二日, 有以邪學自首於金吾者, 先自捕廳盤問, 則乃是鞫招所出之邪魁周文謨。 而本非我國之人也, 言語多不可曉, 以文字書納草供云矣。" 上曰: "何爲而自現云乎?" 秉模曰: "朝家方有搜驗之令, 而渠之黨類, 幾皆鋤治, 非但着足之甚難, 渠又言語未慣, 行止不便, 若見捉, 則渠亦自知難貰, 故爲此自現, 欲幸其萬一之得免矣。" 上曰: "容貌何如云耶?" 秉模曰: "臣則未見, 而聞其容貌, 則勒鬚頗長, 丰容溫潤, 如文士樣。 蓋渠以蘇州人, 七歲喪母, 八歲喪父, 養於其姑母, 姑母晝以鍼繡爲業, 夜以敎渠文字。 二十娶妻, 三年而喪其妻, 遂不復娶, 自兒時從事西洋之學, 仍以轉入於北京之天主館矣。 李承薰之購來邪書以後, 與若鍾輩, 私相往復於洋人, 要得敎主, 而洋人之來留館中者有定數, 一人之他, 彼人必覺, 故遂使中原人之來受業者, 出送於我國, 而甲寅年冬至使入去時, 乘其邊門之開, 而潛越以來云, 其情節, 極爲叵測矣。" 命推鞫于本府。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75면
- 【분류】사상-서학(西學)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