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12일 무오 4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국청에 참여했던 대신들이 정약종에게 부대시율을 적용할 것을 요청하다

죄인 정약종(丁若鍾)의 문서(文書)와 일기(日記) 가운데 그 아비를 향해 망측한 말과 나라를 향해 부도한 말이 있었으므로 국청에 참여했던 시임·원임 대신과 금오 당상이 서로 뒤좇아 청대(請對)하고 말하기를,

"정약종은 결단코 잠시도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제 이미 사실대로 자백하였으니, 부대시(不待時)087) 의 율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그의 정절이 이미 탄로되었으니, 잠시도 천지 사이에 목숨을 붙여 둘 수가 없겠지만, 단지 지금 옥사를 다스리는 것이 소홀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포졸(捕卒)을 내보내어 체포하게 하였으나,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자들이 있고, 체포된 자들도 구핵(究覈)하는 것이 미진하니, 그 소굴을 타파하는 도리에 있어서 앞질러 먼저 법을 적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우선 다른 죄인들이 바친 공초를 살펴보고 법을 적용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자교(慈敎)가 진실로 지극히 마땅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극도로 흉패한 말을 들었으니, 일각이라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므로, 구대(求對)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개 그 문서 가운데 그 아비가 사학(邪學)을 금하였기 때문에 원수같이 보기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그 아래에 성상에 대한 부도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신들이 신해년088) 무렵에 형관(刑官)으로서 옥사를 다스렸었는데, 그 당시 저 무리가 스스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사학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말하였으므로 모두 살려 주고자 하시는 성의(聖意)로 특별히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시고, 최필공(崔必恭)과 같은 자는 심약(審藥)으로 차임(差任)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진실로 우두머리를 모두 모른다고 하여 단서를 알아낼 방도가 없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놈은 결단코 부대시(不待時)의 율을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교주(敎主)와 소굴을 알아내지 못한 채 단지 이 놈에게만 법을 적용한다면, 교주와 소굴을 위하는 다른 놈들은 반드시 이 놈에게 전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옥체(獄體)에 있어서 결단코 경솔하게 앞질러 법을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단지 엄중히 추핵(推覈)하여 기필코 그 소굴을 알아낸 후에 정법(正法)함이 옳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발포(發捕)하게 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미처 체포하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국가의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다. 만약 수일 안에 죄다 체포하지 못한다면, 금오 당상과 좌포장·우포장을 마땅히 각별히 논죄(論罪)할 것이니, 이로써 신칙하도록 하라. 이러한 때에 국청을 설치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다. 사학을 기어코 소탕하여 다시는 ‘사학’이라는 두 글자를 입문(入聞)하는 일은 없은 후에야 경들은 대양(對揚)하는 책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되니, 각별히 엄중하게 추핵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65면
  • 【분류】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

  • [註 087]
    부대시(不待時) : 때를 가리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일. 봄·여름철에는 사형 집행을 중지하고 가을철 추분(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십악 대죄(十惡大罪) 등 중죄(重罪)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였음.
  • [註 088]
    신해년 : 1791 정조 15년.

○非人丁若鍾文書日記中, 有向父罔測之說、向國不道之說, 參鞫時ㆍ原任大臣、金吾堂上, 相率請對以爲: "若鍾, 斷不可晷刻容貸。 今旣輸款, 當用不待時之律矣。" 大王大妃敎曰: "渠之情節, 旣已綻露, 不可晷刻容貸於覆載之間, 而但今番治獄, 未免踈虞。 發捕而有姑未就捕者, 就捕而亦有未盡究覈者, 其在打破窩窟之道, 不宜徑先用法。 姑觀他罪人納供用法, 似未晩矣。" 領府事李秉模曰: "慈敎, 誠至當矣。 然旣聞其窮凶絶悖之言, 不容一刻按住, 故至於求對。 而蓋其文書中以爲, ‘渠父禁渠邪學, 故至於仇視,’ 其下, 卽向上不道之說矣。" 左議政李時秀曰: "臣等辛亥年間, 以刑官治獄矣。 其時渠輩自稱, ‘不作詐言, 而更不浸染’ 爲言, 故以欲竝生之聖意, 特命盡放。 而如崔必恭者, 至差審藥矣。 今乃如是, 而眞箇窩主, 則皆曰不知, 端緖無可得之道, 寧不痛惋乎? 此漢, 則斷當用不待時之律矣。" 大王大妃敎曰: "不得敎主窩窟, 而只用法於此漢, 則他漢之爲敎主窩窟者, 必推諉於此漢。 然則其在獄體, 決不可徑先用法。 但當嚴覈, 期於得其窩窟, 然後正法可也。" 又敎曰: "發捕屢日, 多有未捉得者云, 此亦國綱所關。 數日內, 若不盡捕捉, 則金吾堂上、左ㆍ右捕將, 當各別論罪, 以此申飭。 此時設鞫, 萬不得已也。 期於掃蕩, 更無邪學二字之入聞者, 然後卿等不負對揚之責, 各別嚴覈也。"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65면
  • 【분류】
    사법(司法)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