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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권, 순조 즉위년 11월 8일 병술 2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서유린 형제에 관해 장령 이안묵이 상소하다

장령 이안묵(李安默)이 상소하여 서유린(徐有隣) 형제에 대해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자년149) 여름을 당하여 영남(嶺南)의 만인소(萬人疏)가 나온 뒤에 서유린의 소장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 소장의 대지(大旨)를 외면만 갑자기 보면 아름다운 덕을 천양(闡揚)하는 뜻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한 데에는 충역(忠逆)과 사정(邪正)의 다름이 있는 것이니 공적인 의리에 의거해서 한 것은 충(忠)이고 정(正)인 것이며 사적인 협잡(挾雜)에 의거해 한 것은 역(逆)이고 사(邪)인 것입니다. 이른바 의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정대한 대의리(大義理)는 영원히 천하에 할 말이 있을 만한 것인데 아래에서 대양(對揚)한 사람으로 고(故) 문충공(文忠公) 김종수(金鍾秀), 문충공(文忠公) 유언호(兪彦鎬), 지금의 영상 심환지(沈煥之) 등과 같은 여러 사람이 있어 처음부터 일비(一臂)의 도움을 주었고 이를 지켜 수행함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들어와서 고하고 나아가서 말한 것이 성덕(聖德)을 높이고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방도로 삼았으니, 이들은 신이 이른바 천양함이니 충(忠)이요 정(正)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협잡이란 무엇입니까? 일종(一種)의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칭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빙자하여 이를 위협하는 자료로 삼아 기필코 우리의 의리(義理)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윤강(倫綱)을 멸절시켜 국가에 화(禍)를 끼친 뒤에야 말려고 하였으니, 을미년150) ·병신년151) 의 일이 무신년152) ·기유년153) 에 근본하여 같은 맥락을 이루어 온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흉도(凶徙)들이 구실로 삼아서 역(逆)을 하고 사(邪)를 하게 된 소이(所以)인 것입니다. 무릇 그 사정(邪正)이 향배(向背)의 사이에 여기에서 나오면 저기로 들어가게 마련인데,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서유린의 형제가 을미년·병신년에 여러 역적들이 한창 사납게 날뛸 때를 당하여 과연 스스로 앞장서서 징토(懲討)했었습니까? 또한 사류(士類)의 여러 사람이 대양(對揚)하고 천명(闡明)할 때 과연 마음을 같이 하고 소리를 똑같이 냈었습니까? 앞에서는 징토한 적이 없고 뒤에서는 잘 대양하지 못하고도 근밀(近密)한 반열에서 많은 세월 동안 어물거리고 주저하면서 일찍이 일언 반구도 이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다가 갑자기 영남(嶺南) 사람의 뒤에서 나서고 있으니, 그 정적(情迹)에 어찌 의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영호(營護)하는 무리들이 과연 별도의 사람이 아니라 앞에서 창도하면 뒤에서 뇌동(雷動)하여 기쁨과 슬픔을 서로가 기다려 왔은즉, 그가 비록 입술이 석 자나 되게 길다고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배치(背馳)했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 세도(世道)가 함닉(陷溺)되어 쌓여 온 빌미가 치료하기 어렵고 의리(義理)가 회색(晦塞)하여 그 고질(痼疾)은 갈수록 더욱 극심했습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24년인데, 그 고심(苦心)하면서 지성으로 오직 이 풍속을 바로잡는 그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삼아 저훼(沮毁)한 자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달갑게 여겨 5월 그믐날의 처분(處分)에 관한 대훈(大訓)이 있게 되었고 이어 말명(末命)을 짓기에 이르렀으므로, 나약한 자가 교화를 따르고 완악한 자가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침(仙寢)154) 이 식기도 전에 묵은 습성을 다시 부려서 혹은 의리를 말하기 싫어하여 대찬(代撰)하는 글에서 이를 빼기도 하고 혹 드러내어 사당(私黨)을 비호할 경우에는 사유(赦宥)의 법전을 베풀기를 청하여 시험해 보기도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자신이 전관(銓官)이 되어서는 역얼(逆孼)을 초사(初仕)에 검의(檢擬)하였으니, 이와 같은 거조는 바로 선조(先朝) 때에는 감히 부리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막히고 완악한 무리는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어서, 갑자기 함께 의리의 마당으로 이르기를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사직(辭職)하였으나, 예사 비답을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41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註 149]
    임자년 : 1792 정조 16년.
  • [註 150]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151]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 [註 152]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153]
    기유년 : 1729 영조 5년.
  • [註 154]
    선침(仙寢) : 임금의 능인데, 여기서는 시신을 가리킴.

○掌令李安默疏, 論徐有隣兄弟。 略曰:

當壬子夏, 嶺南萬人疏出後, 徐有隣之章繼之。 其疏大旨, 以外面驟看, 則似若出於闡揚德義之意, 而爲此者有忠逆、邪正之異, 以義理之公者忠也正也, 以挾雜之私者逆也邪也。 所謂義理者, 何也? 惟我先大王至嚴至正之大義理, 可以永有辭於天下, 在下對揚者, 有若故文忠公 金鍾秀文忠公 兪彦鎬、今領相沈煥之等諸人, 自初藉手, 秉執極嚴, 入告出語, 以爲尊聖德正世道之方焉, 此則臣所謂闡揚, 而曰忠曰正者也。 所謂挾雜者, 何也? 一種怪鬼輩, 敢藉不忍言不敢道之說, 要作威脅之資, 必欲毁壞我義理, 殄滅我倫綱, 禍人家國而後已焉, 而乙、丙之所以本於戊、己一串貫來者是也。 此則凶徒所以藉說而爲逆爲邪者也。 凡其邪、正向背之間, 出乎此, 則入於彼焉, 未知有隣兄弟, 方當乙、丙諸賊鴟張之時, 果能自拔而懲討乎。 亦於士類諸人對揚闡明之時, 果能同心而齊聲乎? 由前而無所懲討, 由後而不能對揚, 處邇列許多年間, 宛轉媕婀, 曾無一半辭及此, 不先不後, 忽爲嶠人之後殿者, 情迹其無疑乎? 畢竟營護之輩, 果非別人, 而前唱後喁, 欣戚相須, 則渠雖喙長三尺, 又何以自解也? 臣所謂背馳者, 亶出於此。 嗚呼! 世道之陷溺, 積祟難醫, 義理之晦塞, 沈痼愈甚。 先大王臨御二紀, 苦心至誠, 惟是矯俗一事。 而嘗試沮毁者, 甘心蘖芽, 至有五晦處分大訓, 仍作末命, 則庶幾懦者率化, 頑者知懼。 而仙寢未冷, 宿習復售, 或厭說義理, 刪沒於代撰之文, 或顯護私黨, 則探試於請宥之典, 甚至身爲銓官, 檢擬逆孽於初仕, 則似此擧措, 又是先朝所未敢售者。 而梗頑難變, 猝無偕底之望云云。

仍辭職, 例批。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41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