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1권, 정조 대왕 행장(行狀)

정조 대왕 행장(行狀)

아, 대행 대왕이 하늘로 떠나신 그 다음달 병술일에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애지(哀旨)를 내려 삼공(三公)·구경(九卿)과 관각(館閣)·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여 정종(正宗)이라고 하고, 능호(陵號)를 올리게 하여 건릉(健陵)으로 하고, 시호(諡號)는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로 올렸다. 예에 이른바 위대한 공로가 있는 자는 위대한 영예를 받는다는 그것이다. 그리고 또 여러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행장·책문·비문·지문 등등을 지어올려 대례(大禮)를 충분히 돕고 동시에 그 훌륭한 아름다움을 천세 만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기에 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아뢰기를,

"우리 대행 대왕께서 재위 25년 동안에 그 성대한 덕과 깊은 사랑 그리고 굉장하고 위대한 사업들은 마치 천지 일월처럼 높고도 빛나서 사람들 뼛속 깊이 스며있고 귀와 눈에도 선하거니와 다만 춘저(春邸)에 드시기 이전의 탄생에서부터 자라나는 동안 궁곤(宮梱) 내에서의 한가로운 생활상은 외정(外廷)에서는 미처 보고 알지 못한 것들이 있는데 지금 그것까지도 모두 소상히 게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대내에서 행록(行錄)을 내려주시는 일은 바로 우리 열성조가 옛부터 해오셨던 일이기에 신들이 감히 죽기 무릅쓰고 청하는 바이옵니다."

했더니, 이에 따라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팔칙(八則)을 써서 내려주시고, 혜경궁(惠慶宮)이 십구칙(十九則)을 써 내려주셨다. 이에 신 이만수(李晩秀)는 삼가 읽고 나서 날듯이 기쁜 마음으로 피눈물을 닦고 다음과 같이 행장을 올리는 바이다.

아, 대행 대왕의 성은 이씨요 휘는 산(祘)이며 자는 형운(亨運)으로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손자이며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아들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혜빈(惠嬪)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따님이었다. 영종 명에 의하여 진종 대왕(眞宗大王)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 모후(母后)는 효순 왕후(孝純王后)이고, 풍양 조씨(豊陽趙氏) 좌의정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따님이시다.

왕은 영종 28년(1752) 임신 9월 22일(기묘) 축시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했는데 그 곳은 바로 숙묘(肅廟)가 계시던 곳이었다. 신미년 겨울 장헌 세자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두었더니 탄생하기 하루 전에 큰 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만 몇 십 마리의 용이 굼틀굼틀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을 본 도성의 인사들 모두는 이상하게 여겼었다. 급기야 왕이 탄생하자 우렁찬 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와도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으며 우뚝한 콧날에 용상의 얼굴과 위아래 눈자위가 펑퍼짐한 눈에 크고 깊숙한 입 등 의젓한 모습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영종이 거기 와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혜경궁에게 이르기를,

"이제 이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 사직에 대한 걱정은 없게 되었다."

하고는,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꼭 나를 닮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칭을 정하였다.

그후 백일(百日)이 채 안 되어 서고, 일년도 못 되어서 걸었으며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文字)를 보면 금방 좋아라고 하고 또 효자도(孝子圖)·성적도(聖蹟圖) 같은 그림 보기를 좋아했으며 공자처럼 제물 차리는 시늉을 늘 했다. 의복은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때가 묻고 솔기가 터진 것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노리개 같은 것은 아예 눈에 붙이지를 않았다. 첫돌이 돌아왔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고 읽었다는 것이다. 계유년 겨울 인원 성모(仁元聖母)에게 휘호(徽號)를 올릴 때에 왕은 유모의 부축없이도 포화(袍靴)를 갖추고 절하고 꿇어앉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예를 행하자 그를 본 왕비가 감탄하였다. 갑술년 8월에는 보양청(輔養廳)을 두었으며, 을해년 봄에 처음으로 주자가 쓴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영종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원손이 강을 마치고 나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금 겨우 네 살인데도 얼굴 생김이나 그 기상이 보통 애들과는 크게 다르니 하늘이 혹시 우리에게 복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때부터 지혜와 생각하는 바가 날로 발전하였으며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고 독서에 들어갔으므로 혜경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염려되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르자 그때부터는 남이 모르게 등불을 가려두고 세수하였다.

정축년 봄에 인원(仁元)·정성(貞聖) 두 성모가 잇따라 한 달 사이에 승하하셨는데 그때 왕은 이제 겨우 한 자 정도의 옷을 입을 만큼 자라 궤전(饋奠) 등의 예는 행할 수가 없었는데도 거처하는 곳이 빈전(殯殿)과 가까이 있어 아침 저녁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짚자리를 들고 망곡(望哭)을 하였다. 기묘년 2월 계해일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윤6월 경자일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립을 받았는데 거동 하나하나가 법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모습이 본받을 만하였다. 영종이 전상으로 오르도록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면복[冕] 차림으로 태사인 상보(尙父)에게서 단서(丹書)020) 를 받았듯이 오늘 이 책봉으로 하여 3백 년 종사(宗社)의 흥망이 너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너는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가깝고 쉬운 것부터 가르치기로 한다."

하고는, 《소학(小學)》 제사(題辭) 제3장의 16구절021) 을 손수 써서 내렸다.

그해에 정순 대비(貞純大妃)영종의 계비로 들어왔는데 왕은 그 대비를 혜경궁 섬기듯이 섬겼으며, 신사년 봄 영종의 거둥 때는 왕이 모시고 뒤를 따랐는데 운종(雲從) 거리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구경 나온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세손(世孫)을 만나보게 하였다. 환궁한 후 묻기를,

"오늘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슨 일이더냐?"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신이 선(善)을 하기를 바랐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선을 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예. 쉽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가 아뢰기를,

"쉽다고 생각되어야지만 비로소 용감하게 전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영종이 매우 기뻐하였다. 2월 을미일에 자(字)를 정하고 3월 기유일 학궁에 들어가 선성(先聖)을 배알한 후 박사(博士)에게 수업을 청해 《소학》을 강하는데 왕이 질문하기를,

"명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어느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그것이 혁연(赫然)하도록 하자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박사는 대답을 못했고 다리 주변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수많은 관중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성인(聖人)이라고 축하들을 했었다.

그달 정사일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를 행하고 임오년 2월 병인일에 청풍 김씨(淸風金氏) 증 영의정(贈領議政)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따님과 가례를 올렸는데 그가 바로 지금의 왕대비시다. 5월에 장헌 세자가 세상을 뜨자 왕은 슬픔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 지나쳐 시자(侍者)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경희궁(慶熙宮)에서 영종을 모시고 있으면서 낮이면 언제나 어좌(御座) 좌우를 떠나지 않고 밤이면 영빈(暎嬪) 곁으로 가 같이 밥먹고 같이 자면서 갖가지로 위로했으며 그후 갑신년 영빈의 병이 위독했을 때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급기야 상을 당해서는 임오년 상사 때 못지않게 슬퍼하였다. 그때 혜경궁창덕궁(昌德宮)에 있었는데 슬픔이 가슴에 맺혀 있어 자주 앓아누웠다. 왕은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곧 침식(寢食)을 폐했으며 날마다 새벽이면 수서(手書)를 올려 안녕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수저를 들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였다.

7월에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처럼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삼도록 명하고 세자궁에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을 두었다. 빈대(賓對)나 강연(講筵)에서 대소 신료들이 입시할 때면 왕에게 명하여 자주 시좌(侍坐)하도록 하고 혹 경전의 뜻을 변론하기도 하고 혹은 국정을 참여하여 듣도록 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빈대의 자리에서 묻기를,

"삼남(三南)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데 백성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느냐?"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곡식이 있어야 구제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곡식을 어디서 가져오겠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양혜왕(梁惠王)이 했던 것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영종은 웃으면서 이르기를,

"좋은 대답이다. 오늘 빈대하는 자리에서의 문답에 대해 너도 일찍 그 내용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라."

하였다.

계미년 봄에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을 불러 접견했는데 그때 《맹자》를 강하고 있을 때였다. 명흠《맹자》의 근본 취지가 뭐냐고 묻자, 왕이 말하기를,

"인욕(人欲)을 싹트지 못하도록 막고 천리(天理)를 존속시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명흠이 입지(立志)에 대하여 또 묻자, 왕이 말하기를,

"원하는 바라면 요(堯)·순(舜)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흠이 자리에서 물러나와 남들에게 말하기를,

"총명 영특하고 슬기로운 상지(上智)의 자질로서 이 나라의 복이다."

하였다.

갑신년 2월 임인일 왕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명했는데 효장 세자는 바로 진종을 말한다. 하루는 강관(講官)이 삼남(三南)의 굶주린 백성들에 대해 아뢰면서 옷은 헐벗고 얼굴빛은 누렇게 떳다고 하자, 왕이 한참 동안이나 가여워하는 표정이더니 그날 저녁밥 때는 고기를 들지 않았다. 영종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오늘 강관이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애기를 했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젓가락이 차마 가질 않습니다."

하였다.

을유년 봄 빈연(賓筵)의 자리에서 모시고 있을 때 영종이 이르기를,

"옛날 한 광무(漢光武)하남(河南)·남양(南陽)에 관하여 말한 명제(明帝)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었는데,022) 지금 나도 충주(忠州)의 포리(逋吏) 문제를 너에게 묻겠다. 지금 제신들 주장은, 왕법(王法)을 굽혀서도 안 되고 국가의 저축을 축내서도 안 된다고들 하는데 그 주장이 옳은가 틀린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열 명도 넘는 관리들에게 목숨을 부여하는 일이 바로 천지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큰 덕인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옛날 축낸 관곡을 받아 들이는 일에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노나라 임금은 부세의 율을 올리려고 했는데, 공자 제자들은 오히려 견감하려고 했으니 그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백성은 나라를 의지하여 살고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여 존재하는데 백성들이 풍족하다면 임금이 부족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부유하게 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어질고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농사때를 빼앗지 않으면 됩니다."

하였는데, 영종은 참 좋은 말이라고 하고는 각도의 묵은 포흠을 모두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겨울 왕이 큰 병을 앓았다. 영종은 너무 걱정이 되어 왕이 있는 집에서 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면서 서연(書筵) 날이 되면 친히 소대(召對)를 하고 왕이 그 소리를 듣게 하고는 세손이 좋아하는지의 여부를 좌우에게 물었는데, 좌우에서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그 말을 들은 영종 역시 기뻐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손이 마음가짐이 강해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신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을 편케 해주고 있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는 영종이 환후가 있어 여러 달을 위중한 상태에 있었는데 왕은 그때 큰 병을 앓고 난 후였으면서도 밤낮으로 시탕(侍湯)하면서 한발짝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을 모두 친히 부축했으며 한편으로는 조심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그해에 환후가 말끔히 낫자 이를 일러 모두 왕의 효성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부터서는 모든 조신들 입시 때 왕이 꼭 곁에서 모셨었다. 정해년 봄 영종이 적전(籍田)에 밭갈 때 영종은 쟁기를 잡고 다섯 번 밀고 왕은 일곱 번을 밀었다. 신묘년 봄에 종신(宗臣)인 이인(李䄄)이진(李禛)이 죄가 있어 영종이 진노하고, 하교하기를,

"그 싹을 막아버리지 않으면 나라의 뿌리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니 모두 탐라(耽羅)로 내쫓아버리라."

하여, 얼마 후 은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은 너무 슬퍼하면서 사람을 보내, 돌볼 것을 돌보고 그 영구를 호송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어느 척신(戚臣)이 말하는 자가 있자, 수찰(手札)로 답하기를,

"1만리 바다 밖에서 아우가 죽었다는 부음을 받고 부연 파도가 너무 넓고 멀어 널을 부둥켜 안고 통곡할 길은 없다 하더라도 옛날을 생각하고 오늘의 이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억누를 길이 없다. 이 세상에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요 끊을 수 없는 것이 윤리(倫理)인데 그 윤리를 지상으로 알고 실천하는 이가 성인(聖人) 아니었던가. 그대가 비록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한대도 어찌 굽어살피심이 없겠는가."

하였다.

임진년에 와서 영종의 연세가 날로 높아가자 뭇 신하들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영종은 겸양의 마음으로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에 왕은 손수 간곡한 상소를 올려 영종의 마음을 돌리기에 정성을 다했는데, 급기야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한 모퉁이 작은 나라에서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는데 너의 글월을 보고서야 내 어찌 감동을 않겠느냐."

하고는, 본의를 굽히고 따라주었다. 이에 을유년 이후 술잔을 올려 만수 무강을 빌고 성대한 공로를 금옥에 새긴 일들은 모두 왕의 효성에 감동을 받아 이루어진 일들이었던 것이다. 병술년 이후로는 성상의 체후가 정섭(靜攝)을 요할 때가 많았는데, 왕이 낮이면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밤이 되어도 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증세가 더하면 곧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면서 몸을 드러내놓고 신명(神明)께 기도하였다. 영종이 앉고 누울 때 좌우에서 혹 부축을 하면 곧 이르기를,

"동궁은 어디 있느냐. 내 몸에는 내 손자만큼 맞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왕은 너덧 살 때부터 늘 꿇어앉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바지 무릎 닿은 곳이 먼저 떨어졌는데 여덟 아홉이 되자 더욱더 장중하고 별로 말이 없었으며 조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하여 얼굴빛이 변하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어(褻御)·환첩(宦妾) 따위와는 별로 상대하여 말하지도 않았다. 왕이 고요히 앉아있는 것을 영종이 보고는 이르기를,

"네 학문이 이제 자리가 잡혔나보다."

하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세손의 성품이 보통과는 아주 달라 털끝만큼도 법도를 이탈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금원(禁苑)에 꽃이 필 때도 나를 따라서가 아니고는 한 번도 구경 나가는 일이 없고 날마다 독서가 일인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종 늘그막에는 허구한 날 시탕(侍湯)이었으나 병후가 조금이라도 덜하기만 하면 곧 서연(書筵)을 열었으며, 언제든지 성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려 파루가 너덧 번 쳐야 물러갔는데 가서는 또 촛불을 밝히고 책상 앞에서 글씨를 썼다. 그리고 닭이 울면 또 달려가 시탕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아들 정후겸(鄭厚謙)은 성질이 비뚤어지고 조행이 없었는데 옹주만을 믿고 매우 방자하게 굴었으며, 홍봉한(洪鳳漢)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자기 형 세력을 깔고 재상이 되었는데 자기쪽 무리들과 야합하여 말을 퍼뜨리기를,

"홍씨(洪氏)를 공격하면 이는 동궁(東宮)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면서 그것을 구실로 온 세상의 입을 막으며 위협을 가했다. 또 홍상간(洪相簡)·민항렬(閔恒烈) 등은 춘궁(春宮)을 드나들며 앞장서서 기사년 흉론(凶論)을 만들어냈으며, 상간의 겨레붙이 홍계능(洪啓能)은 이른바 유생(儒生)의 이름에 가탁하여 멀리서 조정의 권한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윤양후(尹養厚)·윤태연(尹泰淵) 등은 홍인한·정후겸을 위해 목숨을 건 무리들로서 번갈아가며 전임(銓任)과 융병(戎柄)을 잡고 있었다. 영종이 왕에게 국정을 이양할 뜻을 비치자 이들은 그 틈을 타서 저들끼리 서로 뭉치고 많은 당여(黨與)를 심어 국권을 농락하고 법을 무시하며 조정을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왕이 워낙 천질이 영명하고 고금(古今)에 통달한데다 척리(戚里)들이 국정에 간여하는 폐습을 무엇보다 싫어했기 때문에 그 적(賊)들에 대하여 조금도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았었다. 이에 그 적들은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들어가서는 상대의 속마음을 떠보는 방식으로 기회를 엿보고 나와서는 터무니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세손의 위치를 흔들어놓을 궁리만을 했고, 화완 옹주는 또 장기간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자기 자식을 위해 그 흉모를 온갖 방법을 다해 도왔다. 환첩이나 궁정의 하인들을 널리 조아(爪牙)로 포섭하고 왕의 동정만을 살폈지만 왕은 그를 미리 알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흔들리지도 않고 표면에 내놓지도 않고 그저 아무일 없는 듯이 태연하기만 했다. 게다가 또 영종이 성명하여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무서워했고 정순 왕비 역시 지성으로 도왔기 때문에 그 적들이 결국 농간을 피우지 못했었다. 을미년 봄에 와서 성상의 병환이 날이 갈수록 더하여 크고 작은 사전(祀典) 모두를 왕이 대신 행하도록 명했고, 10월 상참(常參) 때는 하교하기를,

"오늘 문을 나서보니 내 몸을 내가 잘 가누지 못하겠다. 어린 것이 좀 숙성하여 이러한 때 기무(機務)를 대신 처리하는 솜씨를 직접 내게 보여주면 그 아니 빛나는 일이겠느냐."

하니, 그로부터 적들은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성상의 병세를 숨김으로써 대리 청정을 못하게 막을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11월 계사일에 영종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다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정신도 기운도 더욱 쇠하여 공사(公事)를 수응할 수가 없는데 나라 일을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그 어린 것이 조론(朝論)을 아는지? 국사(國事)를 아는지? 이판(吏判)·병판(兵判)은 누가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지? 옛날에 우리 황형(皇兄)023) 께서는 ‘세제(世弟)가 좋을까, 좌우(左右)가 좋을까?’ 하신 하교가 있었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사정이 황형 시기와는 현격하게 다르지 않은가. 더구나 청정(聽政) 제도는 국조에서 예로부터 있어왔던 일 아닌가."

하니, 홍인한이 앞으로 나와 대답하기를,

"동궁은 조론을 알 필요가 없고 전관(銓官)도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에 있어서는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이 한숨을 쉬시며 이르기를,

"경들이 내 뜻을 모르는군. 차라리 내 손자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편이 더 났겠다."

하고는, 어제(御製) 《자성편(自省編)》《경세문답(警世問答)》동궁에게 진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며칠 후 영종은 공사를 동궁에게로 들여가도록 명하여, 승지(承旨)가 받아쓰려고 하자 인한이 또 손을 내저으며 못하게 하였다. 이에 영종이 이르기를,

"순감군(巡監軍)에 표지 붙이는 일을 중관(中官) 손에다 맡겨서야 될 일인가."

하니, 영의정 한익모(韓翼謩)가 아뢰기를,

"성명께서 위에 계시는데 그까짓 무리들을 걱정할게 뭐겠습니까."

하였다. 영종은 성을 내시어 제신들을 다 물러가도록 명하고, 이어 순청 감군과 이조·병조의 비점(批點)을 동궁에게서 받도록 명했다. 이때 성상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대보(大寶)·계자(啓字) 등을 다 동궁으로 옮겨두고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교를 내렸었지만 인한이 중간에서 말을 놀려 굳이 저지하는 바람에 성명(成命)이 오래도록 내려지지 못하고 사태는 위기일발의 상태로 치닫고 있어 무슨 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으나 조정 내에는 감히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다.

12월 병오일 전 참판 서명선(徐命善)이 소를 올려, 대리 청정을 막아온 인한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이어 한익모가 환관에게 다짐의 말을 했던 것을 논했다. 소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은 영종명선과 대신(大臣)·대신(臺臣)들을 빨리 입시하도록 명하고는 명선에게 소를 아뢰게 했다. 영종은 무릎을 치며 감탄과 치하를 하면서 제신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신 송영중(宋瑩中)은 내용이 너무 과격하다고 했고 상신(相臣) 김상복(金相福)은 말의 근거를 캘 것을 청했는데, 영종인한·익모는 사적(仕籍)에서 삭제하고 상복은 파직, 영중은 사직하도록 명하고 명선은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4일 후인 경술일에 왕을 명하여 모든 정사를 대리 청정하게 하자 왕이 세 번 소를 올렸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명분이 바르고 말도 사리에 맞고 이 나라가 안정을 찾는 길이니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다행한 일이요 너로서는 어버이에게 영화를 바치는 일이다.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우리 삼백 년 종국(宗國)을 잘 이끌어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 청정의 의절(儀節)을 정유년024) 에 했던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그로부터 3일 후인 계축일 영종경현당(景賢堂)에 나아와 청정 하례를 받았는데 왕은 곤복(袞服) 차림으로 조참(朝參)을 행한 후 백관으로부터 하례를 받고 그날 진찬(進饌)에서 구작례(九爵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뭇 신하들은 다 천세(千歲)를 불렀으며, 영종은 그를 돌아보며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으셨다.

청정을 시작한 왕은 진전(眞殿)과 태묘(太廟)를 배알하고 각 궁묘(宮廟)에 두루 절을 올렸으며 포고한 명령들이 모두 하늘의 법칙에 맞아 전부가 다 호응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실정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일을 반드시 대조(大朝)에 품신하여 행하고 감히 전결하는 일이 없었다. 궁관(宮官)에게 말하기를,

"궁관이 비록 사관을 겸하고는 있지만 간격없이 왕을 계도하는 것이 맡은 바 직분일진대 서연(書筵)에서 필요한 규감이 되고 경종이 되는 글이라든지 또는 국사에 관계되는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그때그때 의견을 개진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심상운(沈翔雲)신축년025) 역적의 손자로서 김상복(金相福)에게 부탁하여 자기 조계(祖系)를 고쳤으나 세상에서 인정해주지 않자, 정후겸(鄭厚謙)·홍낙임(洪樂任)에게 붙어 그들 심복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서명선의 상소가 들어가고 대리 청정의 명령이 내려지자 흉도(凶徒)들이 크게 불만을 나타내고는 상운을 끌어들여, 온실에서 자란 나무라는 말을 인용 그 내용으로 상서하게 하여 이미 내려진 명령을 번복하기 위한 계책을 안팎으로 매우 주밀하게 짜놓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그 상소를 보고는 이르기를,

"상운 문제는 충(忠)과 역(逆)이 뒤바뀌는 중대한 문제라서 주고받고 하는 과정을 광명(光明)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는, 영종께 그 사실을 아뢰니, 영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상운은 국문한 후 먼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하고, 이어 찬배(竄配) 이하의 문제들은 왕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병신년 1월 영지(令旨)를 내려 14개 조항에 달하는 시폐(時弊)를 열거하면서 중외의 신서(臣庶)들을 타이르고, 또 영을 내리기를,

"각 궁가의 조세 감면 대상의 전결(田結)에 있어 궁속(宮屬)들이 그를 빙자하기 때문에 그 피해를 백성들이 받고 있다. 명례궁(明禮宮)은 동궁(東宮)에 소속된 궁이니 우선 근본부터 밝힌다는 뜻에서 그를 탁지(度支)에다 귀속시키고, 다른 각 궁가들도 앞으로 차례차례 그 예를 적용하도록 하라."

했으며, 또 영(令)하기를,

"궁녀가 버젓이 시종의 반열에 있는관원앞을 지나가고 액례[紫衣]가 여리(閭里)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궁위(宮闈)의 기강이 어떻다는 것을 알 만하다. 게다가 환시(宦侍)나 추솔(騶率)들이 사부(士夫)인 양 행세를 하고 궁방(宮房) 관속들이 지방 고을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변괴가 아닐 수 없다. 중외(中外)로 하여금 낱낱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어느 연신(筵臣)이 크고 작은 과거 때 면시(面試)를 실시할 것을 말하자, 왕이 이르기를,

"선비 대우는 예(禮)와 성(誠)으로 해야지 먼저 의심부터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만 고관(考官)은 적임자를 골라 맡겨야 할 것이고 그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행문(倖門)만 막아버리면 그뿐이지 선비들을 꼭 틀에 묶어두고 서둘러 구비하기를 바랄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예로부터 임금들이 잘 다스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너무 서둘렀던 이들이 많은데, 나는 지금 대리 청정 이후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아 보려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된다."

하였다.

2월에 수은묘(垂恩廟)를 배알했는데 수은묘경모궁(景慕宮)의 옛 이름이다. 환궁하여 영종께 상소하기를,

"임오년026) 에 내리신 처분에 대해 신으로서는 그것을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金石)같이 지킬 것입니다. 가령 귀신 같은 못된 무리들이 감히 넘보는 마음을 먹고 추숭(追崇)의 논의를 내놓았을 때 신이 만약 그들의 종용을 받아 의리(義理)를 바꾸어놓는다고 하면 그는 천하에 대한 죄인이 되는 것은 물론 장차 종묘 사직에 대한 죄인이 될 것이며 동시에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그 당시 사실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그를 보고 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듣고 논의하는 자들도 있어 그 소문이 온 세상에 유포되어 사람들 귀와 눈이 그 이외는 듣도 보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신 개인으로서의 애통한 마음은 돌아갈 곳 없는 궁인(窮人)과도 같습니다. 시골 마을에 사는 필부와 서민이라도 비절한 인정이 있고 사리를 아는 자라면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무지하오나 역시 지워버릴 수 없는 그 마음만은 있는데, 지금 와서 높이 세자의 자리에 앉아 백료(百僚)들을 대할 때 어찌 마음이 애통하지 않겠으며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 니까.

만약 신이 애통해 하는 것이 전하께서 하신 처분과 혹시 상치되는 점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가 하신 처분은 바로 공정한 천리(天理)에 의하여 하신 것이요 신이 애통해 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인정(人情)인 것으로 이른바 아울러 행하여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또 《승정원일기》가 없을 경우 후일 그 처분에 대해 증빙자료가 없어진다고 한다면 그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국조(國朝)의 전례·고사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어 금궤(金匱)·석실(石室)에 담겨져 각 명산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천추 만대를 두고 이동을 하셔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 어찌 꼭 일기가 필요할 게 뭐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오직 전하의 처분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지만 신 자신이 처할 바로는 다만 저위(儲位)를 사양하고 종신토록 숨어 지내면서 그저 하루 세 때 삼가 기거(起居)를 살피는 직분을 다할 뿐인 것입니다. 말을 여기까지 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창자가 끊기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하늘에 호소할 길조차도 없습니다."

하였는데, 왕은 이 상소를 직접 써서 궁관(宮官)을 시켜 승지에게 전하게 하고는 자신은 백포(白袍) 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상소 내용을 들으니 슬프고 측은하게 느껴지는 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영종도 울고 제신들도 다 울었다. 그리고 이어 기거주(起居注) 기록 중 정축년 이후 임오년까지의 내용 중에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은 모두 실록(實錄)의 예에 따라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왕을 명하여 수은묘(垂恩墓)에 가 배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처음으로 묘문(墓門)에 들어선 왕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상설(象設) 앞에 엎드려 잔디를 쓰다듬으며 옷소매가 다 젖도록 목놓아 울다가 제신들이 교대로 아뢰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그 다음날 영종이 하교하기를,

"종통(宗統)을 바로 세워 3백 년 종국(宗國)을 확고히 하고, 일기를 세초하여 만세를 두고 자식된 마음을 풀었다. 어제 묘소의 광경은 듣기만 했으나 눈으로 본 듯이 선하다. 어찌 콧날이 시큰할 뿐이겠는가. 내 나이 21세 때 유서(諭書)와 도상(圖像)을 받았었는데, 《내훈(內訓)》을 보았더니 태종께서 효부 은인(孝婦銀印)을 소헌 왕후(昭憲王后)027) 에게 내린 일이 있었다. 지금 나도 그 고사(故事)를 따르겠다."

하였다. 그날로 세초에 관한 진하(陳賀)를 집경당(集慶堂)에서 거행한 후 어제 유서와 친필로 쓴 효손(孝孫) 두 글자로 은인(銀印)을 주조하여 집경당 뜰에서 친히 주었는데 그때부터 유서와 은인을 언제나 대가 앞에다 진열하기를 산개(繖蓋)보다 앞에 하였다.

3월 병자일에 영종이 승하하였다. 성상의 병세가 심상찮을 때부터 왕은 끼니도 들지 않고 눈도 안 붙이고 어탑(御榻)을 떠나는 일이 없이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둘러서서 증후를 살피게 했으며, 급기야 위독했을 때는 수장(水漿)도 입에 넣지 않고 곡성이 그치질 않았다. 이미 상을 당하여는 빈렴(殯斂) 등의 의식 절차를 왕이 몸소 다 살피고 계속 곡을 하면서도 점검할 것은 꼭 다 하여서 비록 정신 못차리게 창황한 즈음이었으나 모든 일이 하나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대신 이하 제신들이 사위(嗣位)할 것을 청하자 왕은 곡만 하고 승락을 하지 않아 여러 날을 두고 정청(庭請)을 했지만 그 일을 아뢰기만 하면 곡부터 하였다. 그러다가 성복일(成服日)에 와서야 비로소 마지못해 따르면서 이르기를,

"뭇사람들에게 부대껴 어쩔 수 없이 자리에는 올라야겠으나 그러나 면복(冕服) 차림으로 예를 거행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더욱 죄송함을 느끼게 한다. 그 예가 《서경》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나와있지만 그것이 예가 아니라고 평을 가한 소식(蘇軾)의 말이 집전(集傳)에 실려있다. 비록 양음(亮陰)의 제도는 못 행한다 하더라도 금방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을 입는대서야 될 일인가."

하였다. 그러나 제신들이 고례(古禮)와 국제(國制)가 그렇다는 것을 들어 강력히 청하니 왕은 울면서 따를 수밖에 없어 면복을 갖추고 유교(遺敎)와 대보(大寶)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받고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비를 왕대비(王大妃)로 혜빈(惠嬪)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빈(嬪)을 왕비로 책봉하고는, 하교하기를,

"종통(宗統)과 계서(繼序)는 중대한 일이기에 비록 손(孫)이 조(祖)를 승계하고 제(弟)가 형(兄)을 승계했더라도 그 할아버지와 그 형은 당연히 아버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왕대비 칭호도 사실은 손이 조를 승계한 그 의의를 부여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영종의 유지(遺旨)에 따라 효장 세자(孝章世子)진종 대왕(眞宗大王)으로 추숭하고 효순빈(孝純嬪)효순 왕후로 추숭했으며, 효장 세자 묘는 영릉(永陵)이라고 했다. 그후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추숭 제도가 주나라 때 시작이 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건국 초기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영릉 추숭도 그것이 선왕조 유지이기에 감히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내 본의는 아니다."

하였다. 면복을 벗고 다시 상복을 입은 다음 윤음을 내려 중외에 유시하기를,

"아, 과인(寡人)은 사도 세자 아들이다. 선왕이 종통을 중히 여겨 나로 하여금 효장 세자 뒤를 잇도록 명했던 것인데, 내가 전일 선왕께 올린 글월을 보면 불이본(不貳本)에 대한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예(禮)를 비록 엄밀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정(情) 역시 풀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니 제사 모시는 절차를 당연히 제이대부(祭以大夫)의 예028) 대로 해야 할 것이나 태묘(太廟)의 예와는 달라야 하고, 혜경궁 역시 당연히 경외에서 공헌(貢獻)하는 바가 있어야 하나 대비와는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그 절차를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그리고 만약 못된 귀신 같은 부정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의 논의를 할 경우는 여기 선왕의 유교(遺敎)가 있으므로 의당 거기에 맞는 법을 적용하여 선왕의 영령께 고할 것이다."하였다. 사도 세자에게 존호(尊號)를 추상하여 장헌(莊獻)이라고 하고, 수은묘(垂恩墓)영우원(永祐園)이라고 봉했으며, 사당은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고, 각종 모시는 의식 절차는 송(宋)의 복왕(濮王)에게 하던 의식.029) 을 따랐다. 그리고 축식(祝式)은 주자(朱子)가 정했던 대로 황숙부(皇叔父)라고 하고 종자(從子)라고 썼으며 오향(五享)030) 때는 희생과 아악을 썼다. 그리고 사당이 비좁다 하여 넓게 확장하고는 세종(世宗)종묘에 북장문(北墻門)을 두었던 것처럼 궁(宮)의 서쪽과 원(苑)의 동편에다 일첨(日瞻)·월근(月覲)·유첨(逌瞻)·유근(逌覲) 등의 문을 두고 매월 간소한 행차로 가 살피곤 했으며 《궁원의(宮園儀)》를 책으로 만들어 궁 안에다 두기도 하였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으면서 대종(大宗) 소종(小宗)의 논(論)을 저술하고 또 《상서(尙書)》에 있는 "마음은 예로 제어하고 일은 의리에 맞게 처리한다[以禮制心 以義制事]"라는 구절에 대해 강술한 바 있었는데, 지금 그 《궁원의》를 만든 것도 사실은 그것이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작을 추탈했는데, 광좌 등은 영종 을해년에 추탈했다가 그후 다시 복관(復官)된 자들로서 왕이 그때 와서 신축·임인 년간의 사건의 옳고 그름을 당연히 먼저 밝혀내야 한다고 하면서 을해년에 했던 처분대로 다시 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적신(賊臣) 김상로(金尙魯)영종 정축년031) 부터 실권을 쥔 재상으로서 암암리에 궁녀 문(文)의 아우인 문성국(文聖國)과 결탁하여 영종과 세자와의 사이에 참화가 일어나도록 만든 자였는데, 이때 와서 하교하기를,

"정축년 12월 25일 대행 대왕이 공묵합(恭默閤)에 납시었을 때 상로가 감히 앞자리에서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답하니 선왕께서 그를 풍도(馮道)에다 비유하셨고, 언젠가 내게도 하교하시기를 ‘상로는 네 원수다. 임오년 일을 훗날 다시 들먹일 것은 비록 없겠지마는 임오년으로부터 5년 이전부터 5년 후인 임오년에 일어날 사건을 양성한 자는 바로 일개 상로뿐이다.’ 하시기에 내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뒤늦게나마 당연히 역률(逆律)로 다스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였다. 또 윤음(綸音)을 내려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포고하고 그의 작호(爵號)도 삭탈했으며 성국에게도 노적(孥籍)의 법을 적용했다가 곧 선왕조의 금령(禁令) 때문에 두 적신에 대한 추탈과 노적은 집행을 보류하였는데 가을에 와서 문녀에게는 사사(賜死)를 했으니 그것은 인산(因山)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여름에는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박상로(朴相老)·최재흥(崔載興) 등을 친국했는데, 이는 왕이 춘저에 있을 당시 재한 등이 임오년 일을 징토(懲討)한다는 핑계로 요사스런 환관 이흥록(李興祿)·김수현(金壽賢) 등과 비밀히 결탁한 후 왕에게 소문을 전했는데, 왕이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의 간악상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미워했었다. 그런데 급기야 대상을 당하자, 시골 유생 이일화(李一和)를 시켜 상소하여 임오년 일을 다시 말하게 하고, 이덕사(李德師)의 상소문도 함께 올라왔는데 그 내용이 똑같았다. 이에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先王)을 무함한 역적이다."

하고는 재한·덕사 등을 친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박상로는 부도한 말을 발설했던 관계로 드디어 사시(肆市)를 하였고, 덕사·재한·재흥 등은 모두 법대로 처형했으며, 그해 가을 영남 사람 이도현(李道顯)이 또 덕사와 똑같은 내용의 상소를 하여 그도 그날로 친국 끝에 목을 베었다.

그때 대신들과 삼사(三司)는 인한(麟漢)후겸(厚謙) 모자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했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들이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사건이면 그것을 혐의롭게 여겨 불론에 부치는 것이 너그러운 도량인 것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의리(義理)가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명철한 임금들도 그러한 실수를 면하지 못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인한으로 말하면 그가 지은 죄가 대리 청정을 방해한 정도뿐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인한·후겸은 귀양을 보내고, 후겸 어미는 성 밖으로 내쫓았으며, 신회(申晦)는 관직을 삭탈하고, 윤양후(尹養厚)·윤태연(尹泰淵)은 다 먼 곳으로 정배하였다. 태연의 족제(族弟) 윤약연(尹若淵)은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투소(投疏)하여, 인한은 나라쪽 사람이라고 하고, 토역(討逆)의 논을 영합(迎合)이라고 주장했으므로, 왕이 그를 불러 다시 물었는데, 약연은 더욱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춘추(春秋)》의 법으로는 역적을 두둔하는 자도 역시 역적인 것이다."

하고, 드디어 약연을 역적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는 죄목으로 친국하였다.

홍지해(洪趾海) 부자와 형제 그리고 윤태연(尹泰淵)·민항렬(閔恒烈)·이상로(李商輅)·이선해(李善海)·이경빈(李敬彬) 등이 서로 짜고 모의를 해가며 암암리에 국가 전복을 도모해왔던 흉물스런 말과 문서가 비로소 모두 드러나 차례로 국문을 당했는데, 약연은 섬으로 정배되어 가다가 길에서 죽고, 항렬·선해는 복주(伏誅)되고, 상간(相簡)은 결안(結案)을 받고 지레 죽고, 상로 역시 지레 죽었으며, 지해·찬해(纘海)·경빈은 섬으로 정배되었다. 또 태연(泰淵)·상운(翔雲)·양후(養厚)를 국문했는데 상운낙임(樂任)·후겸(厚謙)의 사주를 받았던 죄목으로 사실을 고백하고 법에 의해 처형되고, 태연·양후는 사실 고백 후 지레 죽었다. 그리고 궁액[掖] 무리 70여 명을 색출하여 유사(有司)에게 회부했는데 그들은 모두 후겸·인한 등의 사인(私人)들로서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밖에 나와 선동을 일삼던 자들이었다. 유생 이명휘(李明徽)가 상소하여, 화양 서원(華陽書院)에다 황묘(皇廟)를 세우고 받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가 친국 끝에 섬으로 정배되어 가기도 했다.

가을에 대고(大誥)를 내려 역적들의 역모 실상을 포고하면서 끝에다 이르기를,

"이번 역적들은 그 대다수가 고가 대족(故家大族)이었기 때문에 그들 인척이나 친구들 사이에도 그들의 기미(氣味)에 물들고 그들 논의에 현혹된 자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나 그들 모두를 불문에 부쳐서 유신(維新)의 교화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하고,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인한·후겸의 12가지 큰 죄목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빨리 목벨 것을 청했으나 왕은 허락지 않았다. 제신들이 면대를 요청하고 강력히 주장하자, 왕이 이르기를,

"아직까지 처분을 보류해 온 것은 자궁의 마음이 불안하실까 염려스러워서였는데 오늘 자궁의 하교에 사은(私恩)을 돌봐서는 안 되고 왕법(王法)을 굽혀서도 안 된다고 하셨기에 그 덕음(德音)을 듣고서는 내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하고는 인한·후겸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던 것이다. 역적들을 다 베고는 《천의소감(闡義昭鑑)》 모양으로 책을 편찬하기 위하여 개국(開局)을 하도록 명하고 이듬해에 그 책이 완성되자 이름하여 《명의록(明義錄)》이라 하였다. 삼사가 후겸·인한 두 역적에 대하여는 그들 처자까지 연좌시킬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법이란 온 천하에 공평해야 하는 것으로 비록 지존의 임금이라도 자기 사의(私意)에 의해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을 결정해 집행하는 데 있어 죽기 전에 결안(結案)을 받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율문(律文)에 준하는 것이 바로 아조(我朝) 4백 년 간의 변함없는 상전(常典)이다. 아, 상로(尙魯)·성국(聖國) 같은 원수와 상로(商輅)·상운(翔雲) 같은 역적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었는데 후겸·인한 둘에게만 법을 그렇게 적용한다면 법이란 천하에 공평해야 한다고 하는 뜻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결안도 않고 역률(逆律)을 적용하는 일, 그 몸이 죽은 후에 처자 연좌를 추가 실시하는 일, 결안은 차률(次律)로 하고서 극율(極律)을 가하는 일은 모두 없애라."

하였다. 삼사가 또, 안겸제(安兼濟)후겸을 위해 연희궁(燕禧宮) 터에다 집을 지어 계룡산(鷄龍山)에 관한 비결대로 하려고 했다 하여 그의 죄도 다스릴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계룡산에 관한 말은 그것이 일개 비결에 의한 말인데 예로부터 군자(君子)가 일찍이 그러한 일로 사람을 죄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존의 제왕(帝王)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채확(蔡確)032) 을 공격하자면 공격할 말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거개정시(車蓋亭詩)로 죄안을 삼은 것은 원우(元祐) 시대의 현자들이 도리어 결과적으로 바른 것을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과 같은 꼴인 것이다. 겸제후겸에게 붙었던 그것을 그의 죄로 삼으면 그에게 맞는 죄인 것이다."

하고, 먼 변방으로 정배하였다.

인산(因山) 의례가 확정되고 조조(朝祖)의 예033) 를 행하려고 할 때 하교하기를,

"혼상(魂箱)을 놓고 조조(朝祖)를 행하는 것이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상례(喪禮)란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는 법이다.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보면 부하(負夏) 지방 어느 상주가 조조를 마치고 널을 옮겨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유(子游)가 그것이 실례(失禮)인 것을 비난하자 증자(曾子)자유가 자기보다 더 잘 안다고 훌륭하게 여겼다. 한 뜰안에서 다시 옮겨 전에 있던 자리로 온 것도 예가 아니라고 비난했거늘 하물며 혼상을 모시고 나와 태묘(太廟)에 하직을 고하고서 다시 되돌려 빈전(殯殿)으로 모신다면 후퇴는 없다고 하는 예에 비추어 볼 때 현격한 차이가 있는 정도 뿐이 아니다. 또 ‘넋은 평소 거처하던 곳으로 돌아온다.[魂返室堂]’라는 것이 바로 선유(先儒)들 말이고 보면 조조를 하면서 재궁(梓宮)을 모시고 하지 않고 혼상을 모시고 하는 것 역시 예의 본의에 비추어 볼 때 또 어떻다고 하겠는가.

고례(古禮)를 따르자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음이 있고, 주부자(朱夫子)도 그에 관한 정론이 없어 우리 나라 선정(先正)들 역시 어떻게 해보려다 못하고 말았으니 그 문제는 함부로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

하고, 대신들과 예관(禮官)이 논의하도록 명했다가 논의가 귀일이 안 되자 《오례의(五禮儀)》를 따르도록 명했다. 계빈(啓殯)을 하려 할 때도 하교하기를,

"세월이 흘러 인산(因山) 시기가 금방 닥쳤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을 더더욱 가눌 길이 없구나. 내가 다소나마 정례(情禮)를 펼 수 있는 길이라고는 제전(祭奠) 그 일뿐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우(返虞)에서부터 칠우(七虞),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히 제례를 행하였다. 왕은 계빈하는 날도 슬퍼하는 모습이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고, 처음에는 발인 행렬도 친히 따라가려고 했다가 예로부터 그러한 예는 없다는 강력한 만류로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하직절을 올렸던 것이다. 영가(靈駕)가 이미 멀어졌는데도 그때까지 노차(路次)에 우두커니 서서 슬픈 곡성이 공중에 메아리쳤으므로 그를 들은 백성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

그 다음달에 처음으로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이어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한 후 유사에게 명하여 각 전궁(殿宮)의 공선(貢膳) 규례를 정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그게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고려한 뜻에서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들에게 유익하다면 내 살갗인들 무엇을 아끼겠는가. 선왕께서 과인(寡人)에게 늘 말씀하셨던 일이 국가 용도가 바닥이 났다는 것과 백성들 생활이 옹색하다는 것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할 때 밤중에도 일어나 자리를 서성인다. 그리고 궁방(宮房)의 전결(田結)에 있어 지정량 이외에 더 받는 자가 있거나, 대(代)가 다됐는데도 회수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국용(國用)에 큰 손실을 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니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 온빈(溫嬪) 이하 여러 궁방의 전결에 있어서도 대가 다한 것과 더 받아온 것들은 그 모두를 호조에 귀속시키도록 명하고, 내시(內侍)로서 녹(祿)을 받는 자는 월말에 가서 이조가 그 사실을 아뢰도록 했는데, 이는 《주례(周禮)》에, 천관 총재(天官冡宰)가 모든 것을 다 총괄하여 관리하던 제도를 모방하는 뜻에서였다.

이보다 앞서 각 궁방의 전세 납입에 있어 해마다 무뢰배들을 궁차(宮差)로 임용해 각도로 나누어 보내 저들 멋대로 끌고 당기고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너무나 괴로워했다. 왕이 일찍부터 그 폐단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에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이다. 궁방의 전세 납부 제도가 수백 년을 두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왔던 것이 사실이다. 무뢰배들이 궁가를 빙자하고 각 고을을 횡행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혀왔기 때문에 기름진 땅들은 모두 궁장(宮庄)의 소유가 되고 힘없는 백성들의 목숨이 거의 궁가에서 보낸 원역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아내고 심지어 개와 닭까지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부터는 각 궁방의 전세 납입을 본읍(本邑)에서 곧바로 호조에다 납입하고 호조가 그것을 각 궁방에다 떼어주도록 할 것이며, 궁노(宮奴)·도장(導掌)을 내려보내 세액을 올리고 정해진 액수 이상을 거두어들이는 폐단은 일체를 혁파하도록 묘당(廟堂)의 신들이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 각도에다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신한부(信漢符)034) 는 그것이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기강이 해이하고 아무도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엄숙해야 할 궁금이 하나의 거리가 되어버렸다. 지금 즉위 초를 계기로 하여 옛 제도를 다시 살펴야 하겠으니 지금부터는 부신없이 무턱대고 들어오는 자는 병조로 하여금 살피고 단속하게 하라."

하였다.

과거 제도의 폐단에 관해 윤음(綸音)을 내려, 삼대(三代)시절 빈흥(賓興)의 법035) , 서한(西漢) 시대 현량(賢良) 선임 제도036) , 황조(皇朝)의 격옥(隔屋) 제도037) , 주자(朱子)공거의(貢擧議)038) 등을 들어 정부(政府)·관각(館閣)의 신하들 의견을 두루 들었으나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시행을 보류하고 말았다. 창경궁 내원(內苑)에다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영종 어제(英宗御製)의 편찬 인쇄가 끝나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관방(官方)이 송(宋)의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있으면서 용도(龍圖)·천장(天章)039) 의 제도 같이 어제(御製)를 모셔두는 곳은 없다. 광묘(光廟)규장각이라는 명칭은 있었으나 미처 건립을 못했고, 숙묘(肅廟) 때도 규장각 칭호는 있었지만 역시 건립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그 열성조의 뜻을 이어 열성조 어제를 모두 모으고 후원에다 규장각을 지어 송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열성조 모훈(謨訓)을 그곳에다 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술한 것도 그를 편차(編次)하는 관(官)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선왕조 시대에는 그를 편차했던 사람이 설사 그 일만 하고 직함은 없었을지라도 지금 그 각을 건립한 이상 직관을 두고 맡아 지키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편차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제학(提學)이 송(宋)으로 치면 바로 학사(學士)이고, 직제학(直提學)은 곧 의 직학사(直學士)이니 용도각(龍圖閣)의 학사·직학사처럼 규장각에도 제학·직제학을 두라. 그리고 또 직각(直閣)·대교(待敎)를 두어 의 직각(直閣)·대제(待制)를 둔 것 같이하면 그게 모두 근거있는 제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이조에 명하여 6명의 각신(閣臣)을 차출하도록 했는데, 제학은 일찍이 문형(文衡)이나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지냈던 사람으로 충용하도록 하고, 직제학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사람으로 직각은 응교(應敎) 또는 이조 낭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대교는 한림 권점을 받은 사람으로 각각 충용했으며 직각·대교는 뒤에 모두 권점을 했는데 즉위 초기 성명(聲明)의 치효가 사실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랑(銓郞) 임용에 있어 통청(通淸)의 법을 부활시켰다. 이보다 앞서 영종(英宗)이 전랑 선임에 있어 시끄럽게 다투는 폐단이 있다 하여 혁파한 지가 몇 년 되었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옛 제도를 부활시켜 격양(激揚)에 도움을 주자는 청이 있었기 때문에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가 기유년에 와서 도로 혁파하였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 척신(戚臣) 홍봉한(洪鳳漢)이 추숭(追崇)을 주장하면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켰는데 영종 임진년에 와서 역시 척신인 김귀주(金龜柱)가 상소하여 그 죄를 성토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지금 와서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정신(廷臣)들도 다 알 것이다. 그 당시 봉조하(奉朝賀)의 주청에 대해 논자가 그를 성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로부터 제왕(帝王) 집이라면 신하로서는 존경하고 근신해야 하는 것인데 김귀주 처지로서 주연(胄筵)에서 주고받던 말을 대조(大朝)에 상소로 올렸으니, 대조가 만약 그것을 나에게 물었다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을 했겠는가. 그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하고, 귀주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하도록 했다가 갑진년에 와서 뭍으로 나오게 했다.

그해 겨울에 하교하기를,

"언로(言路)는 국가로 치면 혈맥(血脈)인데 요즘 와서는 조용하기만 하고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으니 아마도 과인(寡人)이 과오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리를 물려받은 초기에 바른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위에 있는 사람이 통솔을 잘못하기 때문이기는 한 것이지만 말하는 것이 직분인 자들로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왜 죄가 아니겠는가. 양사의 제신들을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 한후익(韓後翼)이 정언(正言)으로서 투소(投疏)하면서, 을미년040) 에 정권을 주고받은 것이 대의 명분으로 볼 때 정상적인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마음으로 한 일도 아니라고 하여, 제신들이 그를 국문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그 상소 내용에 임금의 잘못을 신랄하게 열거했으니 무릇 문자(文字)에 있어 부분적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이 청명한 조정에서 할 일은 아닌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신상권(申尙權)이 군직에 있으며 올린 상소에 후익을 성토하면서 왕을 찬양하는 말이 많았는데, 이를 보고는 하교하기를,

"상권의 상소문은 바로 한 장의 상덕문(狀德文)이다. 과인이 등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실질적인 정책이나 실질적인 효과가 조야(朝野)에 미쳐갔겠는가. 만약 상권의 말대로라면 임금 잘못이나 현재 정사에 대해 하나도 논의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자를 죄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임금 자신이 높다랗게 앉아 스스로 성인인 양하는 폐단이 생길 것이다."

하고는, 그 상소문은 다시 돌려주고 그의 직을 삭탈하도록 하였다.

윤음(綸音)을 위조한 자가 있어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경기 지방을 비롯 호령(湖嶺) 사이에까지 유포를 시켰는데 무릇 7개 조항으로 된 것으로서 흉도(兇徒)들이 민심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기에 10여 명이나 체포하여 신문하였으나 모두가 시골에 살면서 잘못 전해들은 무리들이었다. 하교하기를,

"책할 것도 없다. 백성들을 자꾸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고, 정상을 참작하여 특명으로 방면하였다. 그리고 윤음을 내려 팔도 백성들을 일깨웠던 것이다. 원년(元年) 봄에 동북면에 기근이 들어 사신을 보내 북관(北關)의 진휼을 감독하게 하고, 두 도의 도신(道臣)·어사(御史)에게 유시를 내려 백성을 돌보고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정책을 강구하여 조목별로 들어 아뢰게 했으며, 각도로 하여금 도천(道薦)을 하게 하고, 또 경외를 막론하고 효행(孝行)과 절의(節義)가 특이한 자면 예조가 의정부와 논의하여 등급을 지어 아뢰도록 명하였다.

영릉(永陵)·홍릉(弘陵)을 배알하고, 3월에 친히 효명전(孝明殿) 연제(練祭)를 행한 후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를 향해 고개 숙이는 해바라기라면 곁가지인들 무슨 상관이며, 충성을 바치고 싶은 신하라면 왜 꼭 정적(正嫡)이어야 한다던가.’ 했는데 그 얼마나 훌륭한 성인의 말씀인가. 그러나 우리 나라는 명분(名分)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을 숭상하는 풍토라서 신분이 낮은 자에게 요직은 맡겨도 청직은 맡기지 않는 것이 이미 옛분들의 정론이 되어 왔다. 몇 해 전 대각(臺閣)의 통청(通淸) 문제만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이 선왕의 고심 끝에 나온 제도였지만 결국 유명무실이 되고 말았는데, 필부(匹夫)가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그도 천화(天和)에 손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 많은 서류(庶流)들은 그 수가 결코 적은 수가 아닐 텐데 그들 중에 어찌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준(才俊)의 선비가 없을 것인가. 그런데 목덜미가 말라붙고 귀가 누렇게 뜬 상태로 모두 방안에서 죽어가고 만다면 그 서류들 역시 내 신자(臣子)가 아니던가. 그들이 제 하고 싶은 짓을 못하고 제 포부를 못펴게 한다면 그는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두 전조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들 길을 터주고 인재 선발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대신과 논의를 거쳐 아뢰게 하라."

하고, 이조에 명하여 그 절목(節目)을 만들라고 하였다.

여름이 가물어 지제교(知製敎)가 기우제문(祈雨祭文)을 지어 올리자, 하교하기를,

"책축(冊祝)에, 죄와 책임을 자신이 지는 뜻이 없어서야 될 일인가."

하고, 다시 지으라고 명했다. 그후 얼마를 지나도 계속 비가 내리지 않자, 윤음을 내려 10가지 사항을 들어 자신을 꾸짖고 이어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승정원이 감선(減膳) 때는 다른 일 보는 것도 정지할 것을 여쭈니, 하교하기를,

"옛날 선묘(宣廟)가 정전을 떠나 있을 때 비현각(丕顯閣)이 비좁았던 관계로 법연(法筵)을 열지 못하자 선정신 율곡(栗谷)은 강원(講員) 수를 줄일지언정 법연을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더구나 감선은 피전(避殿)과는 또 다른데 강석을 여는 것이야 무슨 구애가 있겠는가. 수성(修省)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근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니 차후 감선이나 피전 때는 으레 강연을 열도록 여쭈라."

하였다.

친히 사단(社壇)에 가 기우제를 행하고 돌아와서는 그 다음날 친히 소결(疏決)에 임하여, 서울 외지를 막론하고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시신을 발굴하여 검시하는 법을 두 조(朝)에서 교시한 대로 그대로 따를 것을 법제화하라고 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은 각 지방 살인 사건에 있어 발굴 검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십년을 두고 사건이 미결로 남아 옥중에서 말라 죽은 자도 있다 하여 《무원록(無冤錄)》 규정대로 발굴 검시를 하도록 명했고, 영종(英宗)은 "주(周)나라 제도도 해골은 묻도록 되어 있는데 백골을 검시한다는 것은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몰래 매장한 것은 발굴 검시를 하고, 이미 공식으로 매장이 된 무덤은 검시하지 말라." 하고, 하교를 했던 것을 담당관들이 발굴 검시를 금한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서울과 지방에서 감히 발굴 검시를 못했기 때문에 조정 신료들이 누차 그에 대해 말해왔던 것이다. 이에 왕은 두 조정에서 받았던 수교(受敎)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하교 중에, 이미 매장이 된 것은 검시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발굴을 금한 뜻이 아니라 바로 백골 검시를 지적하신 것이다. 몰래 매장된 것은 검시를 하라는 것이 바로 숙조(肅祖) 수교인즉 새로 영갑(令甲)을 정할 것 없이 다만 두 조의 수교 그대로 준행하고 혹 해가 너무 오래된 것들은 함부로 발굴 검시를 말고 일단 계문(啓聞)하고 나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 을미년 증광시 정시(庭試) 때 신회(申晦)가 시관을 맡았는데 뇌물과 청탁이 판을 쳤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 후에 물의가 크게 일었다. 흉도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또 왕이 그 사실을 알까 두려워하여, 서연(書筵)에서 과거 문제에 대해 수작한 일이 있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는 정후겸·홍인한 무리가 좌우에서 협박과 제어를 가하여 동궁을 무함할 계책을 꾸몄었는데, 지금 와서 정신(廷臣)들이, 을미년의 방(榜)은 바로 그 역적들이 역모를 꾸미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로 이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을 삭제해버릴 것을 누차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원방(原榜)은 파하고 전시에 직부(直赴)할 자격을 은사받은 것으로 갑을을 매겨 홍패 방[紅榜]을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축년에는 방 전체를 구별을 두지 않고 삭제하면서 잘못 걸린 사람도 있었다 하여 윤익동(尹翊東) 등 8명에 대하여는 복과(復科)를 하기로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려(禁旅)는 옛날로 치면 호분(虎賁)이요 우림(羽林)이다. 각 궁전의 숙직과 호위를 맡고 대가를 곁에서 호위하는 직책이니 선임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재목도 적임자를 골라야 할 것인데 도리어 훈국(訓局)의 마병(馬兵)이나 금위(禁衛)의 기사(騎士) 대우만도 못한대서야 될 일인가.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 중의 일번(一番)은 선천(宣薦)으로 통하는 자리로 정하고 인재를 골라 늘 보충 임명하여 무인으로서 초사(初仕)하는 발판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병조를 맡고 있는 신하에게 명하여 장신(將臣)과 함께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또 그후에는, 기사(騎士)는 서류(庶類)에서 뽑도록 하고 그들 초사(初仕)도 선천으로 통하는 금군(禁軍)과 같은 예를 적용하도록 하였다.

7월에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왕은 언제나 조회를 파하고는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밤이 깊도록 책을 보시곤 했는데 그날 밤도 여느 때와 같이 촛불 아래서 책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보장문(寶章門) 동북 쪽에서 행랑채 지붕을 타고 오는 소리였다. 어좌(御座)가 있는 방의 지붕 중앙에 이르더니 기왓장을 던지고 자갈을 뿌리는 것이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왕은 도둑이 든 것을 알고 환시(宦侍)와 액예(掖隷)들을 불러 불을 밝히고 보게 했는데 도둑은 이미 달아나고 없고 지붕 중앙에는 기왓장 자갈 등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이에 숙직하던 위사(衛士)와 삼영문(三營門)의 밤을 지키던 군대들을 동원하여 담 안팎을 지키게 하고 금중(禁中)을 샅샅이 뒤졌으나 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액예 무리 중에 근본이 분명하지 못한 자들은 도태시키도록 명했다.

존현각 위치가 너무 노출되어 있어 간악한 무리들이 거침없이 들어오기 쉽다 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제신들이 청해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소를 옮겼다. 그런데 그해 8월에 또 도둑이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담을 넘어 들어왔다가 수포군(守舖軍)에게 체포되어 그를 신문했더니 원동(苑洞) 동임(洞任)인 전흥문(田興文)이 지난날 밤에 호위 군관(扈衛軍官) 강용휘(姜龍輝)와 함께 존현각 지붕 위로 잠입하여 난을 꾸미려고 했다가 못하고 지금 두 번째로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흥문·용휘 두 역적을 친국했더니 실은 홍술해(洪述海)의 자식 상범(相範)이 시킨 것이었다.

과거에 상간(相簡)은 곤장 아래서 죽고, 지해(趾海)·찬해(纘海)는 섬으로 정배되고, 술해(述海) 역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범한 장오죄로 사형에서 감제되어 섬으로 정배되어 갔으며, 계능(啓能)후겸·인한과 같은 무리였다는 이유로 역시 절도(絶島)로 귀양갔는데, 그 때문에 지해·술해의 자질(子姪) 처첩(妻妾)들이 밤낮으로 국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 대 권귀(權貴) 집안이라서 문생(門生)과 고리(故吏)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궁인(宮人) 액예 무리들과 암암리에 결탁을 하고 상당 기간 불궤(不軌)를 도모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상범용휘와는 서로 이웃에 살면서 그가 날쌔고 힘이 센 것을 알고는 천금을 주고 결탁해왔는데 흥문이 사는 곳이 금원(禁垣)과 가깝다 하여 그와도 합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용휘는 허리에 철편(鐵鞭)을 차고 흥문은 손에 칼을 들고 대궐에 들어가 만나는 사람이면 곧 죽이기로 하고 상범은 형세를 보아가며 접응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그날 밤 용휘흥문이 함께 존현각으로 올라가 기와를 뜯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시늉을 하여 우선 사람들 귀와 눈을 현혹시킨 뒤 부도(不道)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인데 갑자기 대궐 안이 발칵 뒤집힌 것을 보고는 그대로 달아났다가 급기야 거소를 옮기자 또 넘어 들어오다가 수포군에게 잡힌 것이다.

내응(內應)을 하기로 한 자들은 궁인(宮人)으로는 복빙(福氷)·수애(秀愛)·월혜(月惠)·금희(今喜)였고, 환관(宦官) 안국래(安國來), 액예 무리로는 강계창(姜繼昌)·김수대(金壽大)·김복상(金福尙)이었으며, 공모자로는 지해의 가객(家客)인 홍대섭(洪大燮)·홍필해(洪弼海)·홍신해(洪信海)였다. 상범을 국문한 결과 그들 역적 모의 내용이 흥문·용휘의 공초 내용과 똑같았고, 술해의 처 효임(孝任)은 무당과 결탁하여 흉물을 묻어두고 저주를 일삼았다. 그리고 홍계능(洪啓能)은 자기 아들 신해와 조카 홍이해(洪履海), 술해의 조카 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 이택수(李澤遂)·민홍섭(閔弘燮) 등과 함께 밀실에서 음모를 꾸며 이윤태갑동궁(桐宮)에 내쳤던 일과 계해 반정(癸亥反正)의 일을 명분으로 삼아 지해·술해·찬해 세 역적이 귀양살이 가 있는 곳을 드나들었는데 이들이 추대하려고 했던 자는 종신(宗臣)인 이찬(李禶)이었다.

역적들이 이렇게 세 길로 역적 모의를 했던 사실이 이제 와서, 모두 탄로가 나 차례로 잡아다 국문하여 모두 복주(伏誅)되었고, 계능만은 국정(鞫庭)에서 발악을 하다가 제 죄를 자백하고 지레 죽었으며, 계희(啓禧)·홍섭(弘燮)은 그 관직을 추탈했다. 계능이 누구를 추대하려고 한다는 설이 처음에 상길의 공사에서 나왔을 때 대신과 기타 신하들이, 역당(逆黨)의 전모가 아직 다 밝혀지기도 전에 왕실의 지친(至親)인 찬(禶)의 이름이 그들 추대 대상 속에 거론되고 있다 하여 그를 체포하여 신문할 것을 일제히 청했는데 이때 왕은 불끈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간 다음 오랫동안 장전(帳殿)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제신들이 누차 면대를 요구했으나 되지 않아 부득이 궁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사세가 급박하고 나라 형세 또한 위태하다고 극언을 하고, 궁성을 호위할 것을 청했으며 또 을 체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왕은 끝까지 허락지 않았다. 급기야 상길 등이 법에 의해 처형되자, 대신 이하 삼사(三司)·종친(宗親)·문관·음관·무관 할 것 없이 하루에 예닐곱 차례씩이나 전정(殿庭)에 엎드려 을 처형할 것을 계청했고, 관학(館學)의 유생들은 파하고 떠났으며, 심지어 전직 군교(軍校)와 의관·역관 그리고 각 아문의 이서(吏胥)에서 오부(五部)에 거주하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번갈아가며 글월을 올리고 강력히 다투고 하였으나 왕은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차(啓箚)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오늘 일로 말하면 관숙(管叔)·채숙(蔡叔) 때와 같은 사실은 있으나 관숙·채숙과 같은 마음은 없었는데 관숙·채숙을 다스리던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했는가 하면, 또 이르기를,

"나의 심정을 말로 하자니 소리가 먼저 흐느껴지고, 글월로 쓰자니 눈물이 먼저 종이를 적신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겨우 살아남은 인생 나 같은 자가 어디 또 있으랴. 형제라고 오직 3명의 서제(庶弟)가 있을 뿐인데, 이진(李禛)은 풍로(風露)에 시달리다가 불행히 일찍 죽고, 이인(李䄄)은 나이 들수록 병이 떠나지 않고 있는데, 하나가 다행히 병이 없기에 그가 잘 성장하고 자손도 번창하여 우리 선부(先父)의 자손들이 다 우리 조정에 서서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를 만분지일이나마 보답하게 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는데 어쩌다가 흉악한 역적 무리가 일어나 그들이 추대한다는 속에 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 부귀한 출신으로 생장하고 나이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추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나의 이 심정이야말로 옛 기록에서 찾아보아도 아마 둘도 없을 것이다. 은혜를 끊고 법을 집행한다는 것은 사실 차마 못할 일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이 아픔을 무어라 말하랴."

하였다.

친국이 끝나자, 대신들이 승여를 부여잡고 계속 청하니, 왕은 승여를 희정당(熙政堂)에다 멈춰두고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왕이 대내로 돌아가자, 대신들이 금오(金吾)와 여러 당상을 거느리고 왕부(王府)로 가 을 뜰에다 끌어다두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는데 은 거역을 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신들은 다시 대언(對言)을 청하고는, 그것만 보더라도 이미 신하로 자처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사(賜死)를 청했으므로 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왕은 너무 슬퍼 오랫동안 정사도 살피지 않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조를 하고 치상 절차를 돕게 했으며, 또 내수사에 명하여 예를 갖추어 안장하도록 하였다. 삼사(三司)가 그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그대들이 어찌 차마 그러한 사은(私恩)을 조금 베푸는 것까지 또 쟁집(爭執)하려 드는가."

하였다. 왕은 또 홍낙임(洪樂任)을 친국했다가 자궁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석(全釋)을 특명하고 정신들이 누차 쟁집하였지만 허락지 않았다. 《속명의록(續明義錄)》을 찬집하여 그해 역모 사건을 다스린 전말을 기록했는데 그 의례(義例)는 원편(原編) 체재를 그대로 따랐다.

제신들이 호위청(扈衛廳)을 혁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거기 있는 군관(軍官) 1천여 명도 우리 백성들인데 어찌 역적 하나가 거기에서 나왔다 하여 3개 청(廳) 소속들을 싸잡아 의심할 것인가. 조정 정령(政令)이 다 옳으면 먼 지방의 장사(將士)들도 창을 던져버리는 것이고, 사방 민심이 해이해지면 한 배 안의 사람들도 적이 되는 것인데 일개 호위청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뭐란 말인가. 지금의 3개 청도 원래 바꿀 수 없는 제도가 아니라 7개 청이 5개 청으로 되고 5개 청이 또 3개 청으로 된 것이니 그를 1개 청으로 통합하고 재예(才藝)가 우수한 자들을 정하게 뽑아 맡김으로써 옛 제도도 존속시키고, 용병(冗兵)도 없애고, 그들 마음도 위로가 되도록 하라."

하고, 이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은 아무리 대신이라도 훈척(勳戚)이 아니면 겸임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녀(巫女)들의 성안 출입을 금했으며,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묘를 둘러보고 의열묘를 두루 참배하였다.

겨울에 우레가 친 이변으로 하여 감선(減膳)을 하고 구언(求言)도 했으며, 2년 봄에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이 완성되었다. 그보다 앞서 하교하기를,

"송(宋)태조는 일개 평범한 임금에 불과했지만 죄수들이 시달리다가 죽을까를 염려하여 개국(開國) 초기에 각주의 장리(長吏)들에게 죄수들을 잘 돌보도록 명했고 또 무더운 여름이면 옥리(獄吏)에게 조서를 내려 5일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옥사도 깨끗이 청소하며 수갑 형틀 등도 세척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게 했으며 죄가 경미한 자는 즉결로 처리하여 내보내게 하는 등 해마다 그를 되풀이했는데, 송나라 역사가 수백년 이어진 것도 그 원인이 그런 데에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우리 열성조께서 인명을 존중하고 백성을 돌보신 훌륭한 덕화야말로 바로 우리 가문 전래의 심법(心法)인데 이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그 전통을 삼가 이어받지 않을까 보냐.

지금 더위가 다가오고 있는데 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들이 누차 고문을 당하고 난 뒤인데도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내버려두고 형을 집행할 자도 형 집행을 않고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지레 석방하기도 하고 있으니 이는 요행수를 바라는 문을 열어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으로서 무형(無刑)을 목표로 형을 시행하는 뜻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송조(宋朝)가 했던 일을 그대로 모방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형구(刑具)에 있어서는 그것이 각기 일정한 규격이 있는데 요즘 들으면 서울이나 외지 할 것 없이 옥을 다스리는 곳에서 법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경우가 퍽 많다는데 법이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어서 비록 임금이라도 감히 마음대로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관리들이겠는가."

하였다. 이어 형방 승지를 명하여 법부(法府)·법조(法曹)로 달려가서 법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각종 형구들을 가져다가 규격에 맞게 바로잡게 하고, 또 각도 열읍(列邑)에도 유시를 내려 형구를 서울의 것에 준하도록 하게 했으며, 또 각영(各營)에도 명하여 곤장 규격을 바로잡게 하고, 또 《대명률(大明律)》·《대전(大典)》·《속대전(續大典)》을 참고 절충하여 따로 알맞은 법전을 만들라고 했었는데 이때 와서 그 책이 완성되어 인쇄 반포하였다. 그리고 또 유척(鍮尺)을 만들어 그 책과 함께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음(綸音)을 내려 여러 유신(儒臣)들을 정중히 불렀었다.

통어영(統禦營)을 강화부(江華府)로 통합하고 교동(喬桐)을 부사(府使)로 강등했는데 그는 강화도를 삼도(三道)의 요충 지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조정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기유년에 와서 다시 옛날 제도대로 고쳤다.

대신(大臣)과 구경(九卿),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선왕의 부묘례(袝廟禮)를 거행할 날이 머지 않아 왕대비께도 책례를 올려야 할 텐데 자궁(慈宮)에게만 유독 글자 한 자의 칭호도 올릴 수 없단 말인가. 아, 내가 대의(大義)라면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신료(臣僚)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가령 그 예를 거행하자면 이존(貳尊)의 혐의가 있고 혹 압존(壓尊)과 관계가 되는데도 대의를 거스르고 자기 사의만을 내세워 억지로 숭봉(崇奉)하려고 한다면 이른바 그 숭봉은 내가 말하는 숭봉이 아닌 것이다. 이 일로 말하면 이미 이존의 혐의도 없거니와 또 양명(揚名)하여 부모를 현양하는 뜻에도 맞는 일이다. 그전 역사를 보아도 황자나 공주에게 호(號)를 주는 규정이 있었고, 본조(本朝)로만 말하더라도 순강(順康), 소령(昭寧)으로 가호(加號)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내 마음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찾아 그대들과 논의하여 실현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여, 이에 혜경궁(惠慶宮)으로 호를 올리기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내수사 노비들을 추쇄(推刷)할 때 추쇄를 맡은 관리들이 모조리 조사하여 찾아낸다고 핑계를 대고는 사속(私贖)을 하도록 농간을 뿌리고 백방으로 조종을 하면서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추쇄관이 간 곳이면 마을이 비어버렸고 영종이 공물을 감제해 주었던 혜택도 그 때문에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그 추쇄관 제도를 영원히 없애버리고 대신 각도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선왕조 을해년 전세 총수입에 의거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고, 선두안(宣頭案)에 있어서는 승정원 계문에 의해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 팔도에 반포하였다.

태학(太學)의 월강(月講) 제도를 거듭 천명하고 이어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였다. 하교하기를,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도 죽지 않고 여기 와 옛모습을 뵈오니 하늘이 다하고 땅이 다해도 이 설움 다할 길이 없고, 오늘 이 자리에 찬(禶) 마저도 없으니 슬픔이 가슴에 뒤엉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구나. 그의 아내야 무슨 죄이겠느냐. 특별히 석방하여 그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숨을 가누지 못했다. 효명전(孝明殿)에서 친히 대상(大祥)을 행하고는 하교하기를,

"선대왕 상기가 다해가고 담례(禫禮)가 곧 앞에 있는데 내 아무리 예가 정한 한계를 지키려 해도 지극한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으니 이 어인 까닭인가? 예(禮)에 이르기를 ‘대상 후에는 호관(縞冠)을 쓰고, 그달에 담제를 모시고, 한 달 넘어서는 풍악을 듣는다.’ 했고, 또 이르기를 ‘맹헌자(孟獻子)가 담제를 모시고 나서 악기를 매달아만 두고 울리지 않자 부자(夫子)께서, 남보다 한 단계 높다고 했다.’ 하였다. 나는 그것이 오늘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조 전례(國朝典禮)에는 담제 모시는 날 악기를 걸어두고 예에 정해진 대로 두들기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세월을 두고 슬퍼하던 끝에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한데 경쇠를 울리고 비단옷 입고 하는 것이 비록 예제(禮制)를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종고(鍾鼓) 관약(管籥)의 소리를 어떻게 차마 바로 그달에 금방 들을 수야 있겠는가."

하고, 대신 유신들과 많은 논의를 한 끝에 담월(禫月)에는 크고 작은 법악(法樂)을 달아만 두고 울리지는 말기로 규정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진종의 사친(私親) 정빈(靖嬪)041) 의 묘를 봉하여 수길원(綏吉園)이라 하고 사당은 연호궁(延祜宮)이라 했으며, 제례(祭禮)는 육상궁(毓祥宮) 제례를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병조 판서를 노부사(鹵簿使)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왕자(王者)의 백성은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 하였다. 비록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흉역(凶逆)이라 하더라도 그 악인의 우두머리를 없앤다면 협박 때문에 따랐던 자들은 풀어주어 그들 스스로 새사람이 될 길을 열어주고 그 마음을 고쳐먹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변함없는 이 마음은 천지신명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삼사(三司)가 징토(懲討)를 주장하며 아뢰어 온 것이 적어도 몇 십 차례가 되는데 그중에 어찌 협박으로 따랐던 무리들이 없겠는가. 한 사람이 징토를 받으면 근심하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 너그럽고 여유있던 세상에 비해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상반되고 있는가? 죄상이 가벼운 자는 말끔히 씻어주고 중범자가 없도록 더욱 엄밀한 방어를 해야지만 의리(義理)가 굳어져서 징토를 해도 거기에 전념할 수 있고 인심이 안정되어 개과천선도 할 것이니 삼사의 신들에게 그렇게 경계하라."

하였다.

5월에 효명전(孝明殿)에서 담제를 행하고 태묘(太廟)에 길제(吉祭)를 올린 후 영종 대왕(英宗大王)·진종 대왕(眞宗大王)을 올려모시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효종(孝宗) 묘정(廟庭)에다 배향하였다. 그리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문충공(文忠公) 조문명(趙文命), 충정공(忠靖公) 김재로(金在魯)영종(英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보다 앞서 병신년 여름에 하교하기를,

"옛날 효종 대왕 당시 선정신 송 문정공은 대왕과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밀에 참여하여 국가 대계를 획책했으니 바로 춘추(春秋) 대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았고 천재 일우로 만난 군신 사이였는데 지금까지 배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궐전(闕典)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도 향기로운 덕의 향내가 오를 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을지 누가 알겠는가. 혹자는 본조(本朝)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세종(世宗) 묘정에 배향된 것이라든지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인종(仁宗) 묘정에 배향된 것 같은 일은 실로 우리 나라에 있어 성헌(成憲)인 것이다."

하고, 영종 부묘(袝廟) 때 그대로 거행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정부가 회권(會圈)하여 영종 묘정에 배향할 공신(功臣)으로 최규서·민진원·조문명·김재로 이 네 상신(相臣)을 선정하여 들여오니, 하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도 대의(大義)를 앞세워 국가 정책을 결정하였으니 나라 위해 몸을 바친 충절로 보아서는 묘정에 배향되어 마땅하다. 다만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선조(先朝)를 생전에 섬기지 못했던 그것인데, 고 중신(重臣) 민진후(閔鎭厚)도 그가 생전에 그 왕조를 섬기지 못했었지만 역시 배향된 바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참고할 만한 근례(近例)이고, 고사(故事)로는 송(宋)의 장준(張浚)효종(孝宗)의 정책 수립 때 공로가 있었는데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다른 왕조 때 있었던 일이라 하여 묘정 배향에 난색을 보였지만 양만리(楊萬里)가 단독으로, 당연히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일이 우리가 원용할 만한 고사인 것이다."

하여, 모든 신하들 의견이 일치되었으므로 이때 와서 함께 배향의 예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들 하례를 받고 대사면령을 내린 후 하교하기를,

"부묘례가 잘 끝나고 하례 의식도 이미 거행되었다. 선왕의 자리에 앉아 선왕의 예를 행하자니 너무 조심스럽고 두렵구나. 선왕께서 50년을 두고 마음 쓰신 것이 모두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한다는 그것이었으므로 오늘 내가 계술(繼述)해야 할 일도 그보다 더한 것은 없는 것이다. 내 어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식 돌보듯이 하셨던 선왕의 그 성스러운 뜻을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고, 팔도(八道)의 해묵은 적미(糴米) 10만 석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자전(慈殿)·자궁(慈宮)에 존호를 올리고 황단(皇壇)을 배알했는데, 이때부터 삼황(三皇)의 휘신(諱辰)이면 반드시 망배례(望拜禮)를 올리고 그 예가 끝나면 명조(明朝) 사람으로서 척화(斥和)했던 신하들의 후손을 불러 접견한 후 위로도 하고 혹은 수록(收錄)도 했으며 혹은 유학이나 무술을 시험보여 시상도 하였다. 하교하기를,

"음악이 치도(治道)에 관계된 바가 큰데 나는 천성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종률(鍾律)의 척도를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음악이 옛 음악에서 유래된 것일진대 역시 성(聲)을 듣고 그 음(音)을 찾아보고 음의 뿌리는 마음에서 찾아야 하는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만약 짧은 소리를 느슨하게 바꾸고 급한 소리를 여유있는 소리로 바꾼다면 쇠세(衰世)의 음을 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제 3년이 지난 뒤이니 이제부터는 사방에서 날마다 들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하고 우리 모든 장악관(掌樂官)들은 늘 완만한 절주를 익히고 어지러운 가락은 연주하지 말 것이며 간성(奸聲)을 멀리하고 화음(和音)을 되찾아 후인들을 일깨우고 도우려 하시던 우리 영묘(英廟)의 뜻을 뒤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주(濟州)라면 푸른 바다 저 밖인데 근래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부황이 들었다 한다. 지금 본주 목사의 장문(狀聞)을 보니 전복을 따느라 고생하는 모습들이 눈앞에 선하다. 차라리 어공(御供)을 줄일지언정 우리 백성들을 그렇게 힘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연례(年例)로 전복을 바치는 일을 영원히 제감하라고 명하고는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의 유의(遺意)인 것이다."

하였다.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백관들 조참(朝參)을 받고 대고(大誥)를 선포했는데, 무릇 4개 조항으로서 민산(民産)·인재(人材)·융정(戎政)·재용(財用)에 관한 것이었다. 몇 천 마디에 달하는 누누한 설명을 하고 끝에 가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뭇 신하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보다 앞서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대신들에게 언문 교지를 내려 사족(士族) 중에서 빈어(嬪御)를 골라 두어서 널리 후사를 구할 것을 명했었는데, 이에 대해 대신(臺臣) 박재원(朴在源)이 자전 언교 내에 곤전(坤殿)의 병환이 심해 후사를 둘 희망이 없다는 하교가 있는데 훌륭한 의원들을 맞아다가 정성을 다해 치료해볼 것을 청한 상소를 하였다. 이때에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이 빈어 간선에 응하고 있을 때라서 국영재원의 상소 내용에 화가 나서 공식 석상에서 욕설을 하는 등 꼭 중상을 하고야 말 기세였다. 그러나 왕은 그 충절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원이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고, 급기야 국영이 물리침을 당한 뒤에는 특별히 정경(正卿)을 주어 그 충절을 표창했었다.

대신들과 삼사(三司)가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청을 가지고 해를 넘겨가며 강력히 다투었는데, 왕은 제신들을 불러 인견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윤허를 아끼는 것은 그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선왕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큰 죄에 빠지게 될 경우 선왕이 그것을 모르셨다고 친다면 이는 선왕의 밝음에 손상을 주는 일이고, 선왕이 그것을 알고도 처리를 안 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왕의 덕에 누가 되는 일 아니겠는가. 옛날 성묘(成廟)께서는 ‘이 꽃이 다 피고 나면 다시는 꽃 없으니[此花開盡更無花]’ 하는 시구를 외우셨는데 그때 삼사는 그에 대해 그 이상 쟁집(爭執)을 못했었다. 지금 신하들은 어쩌면 그리도 옛 신하들 같지 않다는 말인가. 비록 대의(大義) 앞에서는 사사로운 친분은 무시된다고 하지마는 그의 뿌리를 생각한다면 선왕의 골육(骨肉)이요 왕실의 지친(至親) 아닌가. 그에게 차율(次律)을 적용하는 것이 내가 바로 선왕을 저버리지 않는 길인 것이다."

하고, 그의 작호(爵號)를 삭탈하고 교동부(喬桐府)에다 안치하였었다.

가을에 공충도(公忠道) 도신이 밀계(密啓)하여, 서명완(徐命完) 등이 나라를 원망하고 흉언을 하고 다닌다고 말해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했더니 그 흉언의 근원이 바로 한후익(韓後翼)·홍량해(洪量海)·심혁(沈𨩌) 등에게서 나온 것인데 후익은 바로 병신년042) 에 흉소(凶疏)를 투소했던 자였다. 하교하기를,

"후익 상소 내에 기사(機事)니 기심(機心)이니 한 말은 그것이 바로 상대를 욕하고 꾸짖는 말투였지만 그가 언론을 맡은 직책에 있는 자였기 때문에 특별히 참고 이해를 했던 것인데 그 역적이 그렇게까지 마음먹고 있었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하고는, 후익을 친국했다. 양해도 역모를 했다는 승복을 받고 법에 의해 처형되었다.

노량진(露梁津)에서 대대적으로 군대 사열을 하면서 하교하기를,

"오위(五衛)의 법도 옛날 그대로 다시 살리지 못하고, 오영(五營) 제도도 개혁을 못해 그 근본이 바로잡혀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기껏해야 결과는 말단적인 것이나 손질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더구나 지금 열성조에서 쓰던 법에 따라 열무(閱武)의 예식을 행하려고 하면서 병조 판서를 대중군(大中軍)이라고 부르고 대중군 위에 대장군(大將軍)으로 부를 사람은 더 없으며, 또 오영의 대장들도 각 영장(營將)이라고만 하고 각 영장 이외에 삼군(三軍)을 통솔할 사람이 없으니 교습(敎習)이라 해봐야 연병장에서 조련하는 식이다. 임시(臨視)한다는 것이 결국 자장(自將)하라는 뜻인데, 당당한 천승(千乘)의 지존이 몸에다 갑옷을 두르고 주장(主將)의 일을 대신 행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조련을 하지 않을 때는 본영(本營)이 오영도 통솔하지 않고 있다가 조련을 임시하는 날에 와서야 오영으로 하여금 병조 판서 명령대로 움직이라고 한다는 것은 위 아래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일이다. 내 비록 군려(軍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일찍이 듣건대 조두(俎豆)의 예에 있어 대소(大小)가 서로 질서를 유지하고 존비(尊卑)가 서열이 분명해야지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근거없는 예와 내리 행하는 절차를 일체 혁파하고 의절(義節)을 다시 정하도록하라."

하였다. 육신(六臣)과 사충(四忠) 및 문렬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사당에다 사제(賜祭)하였는데 노량진 물가에 있는 사당들이었다. 그리고 명릉(明陵)·소령원(昭寧園)·수길원(綏吉園)을 배알하였다. 하교하기를,

"녹수(錄囚)043) 제도가 시작은 당(唐)에서 되고 완전히 갖추어지기는 송대(宋代)에 와서 되었으니 모두 5일에 한 번씩 녹수를 해왔는데, 우리 나라에서 10일에 한 번씩 기록하여 아뢰고 있는 것은 자못 옛날 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10일 동안에야 비록 잘못되는 죄수는 없다 치더라도 남모르는 억울함이 있을 경우 죄수 스스로 어디에다 말하겠는가. 이후로는 해조에서 옛날 제도 그대로 5일에 한 번씩 녹수를 하고 그리고 중들은 도성(都城) 출입을 못하도록 금하라."

하였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용도를 아끼는 일은 궁위(宮闈)에서부터 솔선해야 한다. 비록 태관(太官) 추인(酋人)044) 이 필요로 하는 물자라도 쓸데없는 것들은 절약해야 하는데 더구나 궁위의 쓸데없는 비용이겠는가. 궁인들 공억(供億)부터 즉위 초기에 우선적으로 바로잡도록 하라. 지금 대전(大殿)에는 궁인이라는 명목이 없고 다만 오래전부터 있어온 궁인으로서 자전(慈殿)에 소속된 자들만은 아직 혁파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흉년이 들고 민생이 곤궁할 때 당연히 절약하고 줄일 방법이 있어야겠으니 호조에 물어 조치하라. 그것이 중인(中人) 1천 호(戶) 재산 정도는 될 것이다."

하였다. 계유년045) 에 소속이 옮겨진 궁인들 공억에 대해 그를 영원히 없애기로 하였고, 이보다 앞서 원년에는 대전에도 궁인 명목을 없앴었는데 지금 와서 또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당(唐)나라 때부터 사형(死刑)을 결정할 때는 그 옥사의 내용을 충분히 갖추어서 그것을 기록하여 아뢰고, 또 결심 때는 상세하게 복심하였으며, 형 집행을 하는 날은 천자(天子)가 재계하는 마음으로 따로 있으면서 먹는 것도 소식을 하고 풍악도 울리지 않았다. 우리 나라도 해마다 섣달이면 사형 집행을 했는데 그보다 3개월 전에 상세한 복심을 거치고 복심도 반드시 3차에 걸쳐 실시했었다. 그런데 정부(政府)가 정무 처리를 직접하는 제도가 바뀌고부터는 그 권한이 형조로 이관되어 상세히 복심하는 제도가 대시(待時) 죄수에게만 적용되고 부대시(不待時) 죄수에게는 적용이 안 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입법(立法)의 근본 취지이겠는가. 대체로 대역 부도(大逆不道)나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들은 차라리 대신이 직접 국문에 임하고 삼사(三司)가 옥사를 안찰하므로 그런대로 상세히 복심하는 뜻이 있지만 부대시(不待時) 죄수에 있어서는 대신·삼사는 그 사실조차 살필 수가 없고 다만 일개 율관(律官)의 소견으로 어느 법조문을 적용하여 안(案)을 꾸며서 옥관(獄官)에게 올리면 옥관은 붓을 놀려 자기 서명할 자리에 서명만 근엄히 하는 식이니, 어찌하여 대시 죄수에게는 그리도 신중을 기하면서 부대시 죄수는 그리도 소홀히 다루는 것인가. 지금부터 이후로는 꼭 구전(舊典)을 따라 일단 형조가 평의한 다음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다시 상세한 복심을 마친 후 비로소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를 밀도살한 종신(宗臣) 이인(李䄄)의 집 궁노(宮奴)를 법에 의해 엄중 처벌할 것을 형조가 청하자, 하교하기를,

"왕손(王孫)이 법을 어기며 소를 도살하고 금리(禁吏)를 구타한 짓들이 모두 내 낯부끄러운 일들이다. 밀도살에 대한 속전(贖錢)을 내수사로 하여금 물게 하고 왕손 집에서는 징수하지 말라."

하였다.

3년 봄에 황단(皇壇)에서 망배례를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단향(壇享) 때의 악장(樂章)은 당연히 명조의 구묘영송신곡(九廟迎送神曲)을 써야 하고 일무(佾舞)도 명조의 친왕국(親王國)에서 인조묘(仁祖廟)에 제사 모실 때 쓰는 일무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하교하기를,

"명조 악장에는 ‘우리 성조(聖祖)를 오시게 하사’라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 자손을 도우사’라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명(明)나라 천자(天子)의 제사를 모시면서 그러한 구절들을 써도 맞을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인조묘 제의(祭儀)에는 등가(登歌)·헌가(軒架)046) 가 없고 황단 제의에는 등가와 헌가를 단 위와 단 아래다 설치하는데 지금 일무만을 6줄에서 8줄로 늘리면 무(舞)는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악(樂)만 안 갖춰진 경우가 되니 예에 어긋난 악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쓰고 놔두는 게 허물이 더 적을 것이다."

하였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국(局) 안에 있는 여러 능도 다 배알했다. 여름에는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교육은 오교(五敎)보다 더 큰 교육이 없는데 오교가 제대로 보급이 안 되고 있으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형조가 강상죄를 처리한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깜짝 놀라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강상에 관계된 죄인은 비록 죽을 죄 이하라도 반드시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여 아무 의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법률로써 단죄하여, 교육을 우선하고 형벌은 뒤로하는 내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투서(投書)한 죄인 이진후(李鎭厚)를 친국한 뒤에 하교하기를,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일이니 친국·정국 때 비가 오거나 혹 날씨가 더우면 초둔(草芚)이라도 쳐서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숨도 좀 돌리고 기운도 가라앉혀 가면서 그들 속이 시원하도록 할 말을 다 하게 하라."

하였다.

5월이 되자, 해마다 5월 13일에서 21일까지는 집무에 관한 사항을 여쭙지 말라고 명했다. 그것은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이날만 되면 혼자 따로 지내면서 마치 임오년에 일을 처음 당했을 때처럼 비통해 왔었는데 이해에 영조의 복제를 마치고 나서 비로소 이렇게 명령한 것이다.

가을에는 영릉(寧陵) 배알을 계획했는데, 이해가 성조(聖祖)047) 가 승하한 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와 훈련 대장을 불러 하교하기를,

"군사가 1백 리 밖 나들이를 하려면 그 군용(軍容)이 더욱더 질서 정연해야 할 것이다. 옛날 당 현종(唐玄宗)여산(驪山)에 가 강무(講武)를 하다가 군법(軍法)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 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 곽원진(郭元振)을 법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 하교 역시 명장 서사(命將誓師)와 같은 뜻으로 한 것이니 각기 노력하라."

하고, 대가 앞에 있는 신전(信箭)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대리 청정 초기에 선왕께서 저것을 내게 주시고 언제나 사행(師行) 때면 저 화살을 대가 앞에다 꼭 세워두게 하셨는데, 그것은 정벌(征伐)을 단독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하였다. 광나루에 이르러 용주(龍舟)를 타고는 하교하기를,

"임금은 이 배와 같고 백성은 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을 대하니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시고 사신(詞臣)을 불러 명(銘)을 지으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하였다.

남한 산성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병자년 일이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다고 하셨던 성조의 하교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구나.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당연지사처럼 잊어가고 있고 대의(大義)에 대한 관심도 점점 희미해져 북녘 오랑캐를 피폐(皮幣)로 섬겼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있으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아니 가슴 아픈 일인가. 이렇게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고 경비가 모자라는 시기에 왜 꼭 먼 길을 가야만 하겠는가마는 또 이 기해년을 당하여 영릉(寧陵) 행차를 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이 어디 천리(天理)요 인정(人情)이겠는가."

하였다.

경기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사당에 사액(賜額) 해줄 것을 청하니, 대로사(大老祠)로 사액을 하고 어제(御製)에 어필(御筆)로 된 비를 사정(祠庭)에다 세웠다. 대가가 이천(利川)을 지날 때 길 옆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에 널려있었으며, 어떤 머리 하얀 늙은이가 길을 막아서서, 우리 임금 좀 뵙기를 원한다고 아뢰자,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 아직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쳐갈 만한 정사나 명령이 하나도 없었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천리를 멀다 않고 왔으니 나로서는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영릉(寧陵)영릉(英陵)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윤음(綸音)을 내려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 부로(父老)들을 개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연도의 백성들에겐 1년치 조세를 감면하였다. 광주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인묘(仁廟) 갑자년에 색다른 중 각성(覺性)이라는 자를 얻어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라 명하고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각 사찰에 나누어 있게 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그들이 조련도 잘 하려 들지 않고 힘든 역사가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니 일단 유사시 그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고,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그 폐단을 없애도록 명했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 안에서 하는 훈련과 야간에 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장사(將士)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내렸으며, 성 안팎을 두루 둘러보고는 그곳 형편(形便)과 고적(古蹟)에 대해 낱낱이 물었다.

행행 8일 만에 비로소 환궁했는데 우레의 이변이 있어 감선(減膳)을 하고 자신을 책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그로부터 10일 후 천둥이 또 크게 치자 감선 5일을 하고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과 멀리 있다던가.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경(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이 성내시면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고 감히 장난으로 실없이 여기지 말라.’ 하였다. 가령 과인이 통렬히 자기 자신을 극복 책망하고 한껏 노력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미 성난 하늘의 마음도 다시 즐겁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재앙을 겪고서도 다만 옛모양 그대로 지내면서 구습을 씻어버리고 유신(維新)을 도모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서로 잊어버려 나랏사람들 전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흐리멍덩한 굴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상대국의 철검(鐵劒)이 예리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도리어 광대놀음이나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짚더미에 불을 붙여놓고 그 위에 앉아 편안하다고 하는 꼴인 것이다. 자신을 책망하기에 바빠서 직위가 있는 자의 궐실(闕實)을 언급할 겨를이 없으므로 광필(匡弼)의 책임이 있는 우리 신하들은 나의 득실에 대해 바른말을 해달라."

하였다.

처음에 홍국영(洪國榮)을미년048) 이전부터 주연(胄筵)을 드나들며 특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아 4년 동안에 벼슬이 재열(宰列)에 오르고 중한 병권도 두루 맡았으므로 제가 잘나 그리 된 것으로 알고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종하여 그 권세가 세상을 좌우할 만큼 조정 모양이 점점 문란해져 갔었다. 왕은 그의 간악상을 훤히 알고서도 은인 자중하느라 티를 내지 않았었다. 급기야 홍빈(洪嬪) 상을 당하자 국영이 스스로 세(勢)가 간 것을 알고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이국(移國)을 해보려고 앞장서서 주장하기를,

"저사(儲嗣)를 두기 위해 빈어(嬪御)를 또다시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고는, 인(䄄)의 아들 이담(李湛)을 기화(奇貨)로 삼아 그의 군호(君號)를 완풍(完豊)으로 고치고는 우리 생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홍빈의 수빈관(守殯官)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말을 들은 자는 뼈가 시렸지만 그의 위세에 눌려 길거리에서도 눈짓만 할 뿐이었다.

역적 송덕상(宋德相)은 유자라는 명칭을 가탁한 자로서 홍국영의 부름을 받고 와 모든 언행을 오직 국영 시키는 대로만 해왔는데 이때 와서 저사에 관한 일로 투소(投疏)를 하면서 그 내용에 "무슨무슨 일은 아래 있는 자가 감히 지적해서 할 말은 못되지만 그러나 성상께서도 틀림없이 생각해보신 바 있을 것입니다. 신이 숙위 장신(宿衛將臣)을 대해서도 그 일이 제일가는 일이라고 했었습니다." 한 대목이 있었다. 그가 말한 숙위 장신이란 바로 국영을 말한 것이고 그 일이란 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이었다. 이에 적들의 모사가 날이 갈수록 긴박하여 화기(禍機)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왕도 이제는 단안을 내리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그러나 그와의 관계를 끝까지 보전하고 싶었고 또 적도들의 수가 많아 그들의 흉모를 예측하기 어려운 점도 고려해서 짐짓 밖에다 선시(宣示)는 않고 조용히 앞으로 불러 그의 죄상을 세며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국영은 감히 항명(抗命)을 못하고 부신을 반납하고 나갔는데 그에게 특별히 삼자함(三字啣)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을 이장할 때 숭품(崇品)의 종신(宗臣)에게 쓰는 예를 쓰도록 명하고 아름다운 시호도 내렸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시법(諡法)이란 지극히 중대한 제도이며 더구나 충(忠)자 같은 글자는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는 글자인 것이다. 지금 홍문관이 의정한 시호를 보면 단례(斷例)로 비추어볼 때 좀 분수에 넘친다 싶은 혐의가 있잖은가."

하고, 옛 시법을 다시 수명(修明)하라고 명했다.

4년 1월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받고 홍낙순(洪樂純)을 삭출하였다. 낙순국영의 숙부였는데 국영이 물리침을 받고 물러난 뒤에도 낙순은 아직까지 상직(相職)을 거머쥐고 있으면서 그 여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실권을 움켜쥐려 하였고 국영은 또다시 들어올 기회를 넘보면서 문형(文衡)을 맡아 그것으로 치사(致仕)한 것을 물리는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때는 서명선(徐命善)이 영의정이었고 그의 형 명응(命膺)이 문형을 맡고 있었는데 대신(臺臣) 이보행(李普行) 등이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탄핵하자, 하교하기를,

"내가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에 실권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져서 죽이고 살리고 위엄을 보이고 복을 주고 하는 권한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나라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그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일은 모두가 대신(大臣) 한 사람이 저지른 죄인 것이다."

하고, 낙순은 삭출하고, 보행은 섬에다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승하한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가 수차(袖箚)로 홍국영의 죄를 성토했는데, 저사(儲嗣)를 널리 구하는 방법을 막았다는 죄목이었고, 삼사에서도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강력히 청하였으므로 국영을 전리(田里)로 방출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대각(臺閣)에서 올린 탄핵문이 날마다 공거(公車)에 쌓였는데, 왕이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인재를 고르는 데 있어서는 상대가 중인(中人) 이하일 것으로 기대해야만 할 것이다. 《명의록(明義錄)》이 만들어졌을 때 그가 곧 의리(義理)를 아는 장본인이었고 그와 사귄 사람도 나라편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을미 병신년 이후로 세상이 자주 변하여 국맥(國脈)이 적지 않게 손상되었는데 지금 그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한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아무 사심없이 서로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차 상대를 공격하기만을 일삼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데 가령 한 사람이 다치게 되면 국맥도 그만큼 손상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후한 말엽에 명분론(名分論)이 준엄했던 까닭에 조조(曹操)가 비록 곁을 맴돌며 한(漢)을 넘보았지만 감히 스스로 손을 대지는 못하고 핑계가 천자(天子)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기에 순문약(荀文若)049) 같이 내노라 했던 자도 역시 몸바쳐 그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난번에 있었던 일들이 그와 다를 게 뭐겠는가. 제신들이 만약 진정과 안정을 바라는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조정은 텅 비고 말 것이다. 어디 그럴 수야 있는 일인가."

하였다.

화빈(和嬪) 윤씨(尹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판관(判官) 윤창윤(尹昌胤)의 딸이었다. 가을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천둥으로 인해 구언(求言)의 윤음을 내렸었다.

5년 1월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다른 능들도 두루 배알했는데, 그해가 신축년으로 바로 영조가 세자 책봉을 받은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사충사(四忠祠)050) 에 제(祭)를 내리고, 증 참의(贈參議) 김성행(金省行)에게 가증(加贈)할 것과 고 학생(學生) 서덕수(徐德修)에게 집의(執義)를 추증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강제(講製)를 익힐 문신(文臣)을 뽑아 아뢰는 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근래 나이 젊은 문관(文官)들이 겨우 과거에 급제만 하면 책이라고는 아예 덮어버리는 풍습이 점점 고질화되어 쉽게 바로잡혀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경(專經)이니 월과(月課)니 하는 규정들이 있기는 해도 하다말다 해 일정한 법도가 없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다. 국가에서 권과(勸課)하는 방법이 이미 잘못되었으니 신진(新進)들이 태만한 것을 그들에게만 책임지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지금 옛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인재를 만들어내는 길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독서당만으로는 너무 단조롭고 지제교는 조금 취약한 점이 있으므로 만약 문신(文臣) 당하관들 중에서 나이를 제한해서 사람을 널리 뽑아 매월 경사(經史)를 강하게 하고 열흘마다 정문(程文) 시험을 보여 근만(勤慢)에 따라 상벌을 실시하면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데 있어 일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의정부에 명하여, 승문원의 문신들을 참상(參上)·참외(參外) 할 것 없이 나이 37세 이하인 자들을 뽑아 아뢰고 내각(內閣)이 강제에 관한 절목을 만들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왕이 강제에 임한 문신들에 대한 권과와 그들을 인재로 만들어내는 방법에 있어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그들에 대한 은우(恩遇)도 각신(閣臣) 다음가는 수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신축년 선임 이후 무릇 10차에 걸쳐 선임을 했는데 지금 공경 대부(公卿大夫)인 자들 태반이 다 강제에 임했던 문신들이다. 또 하교하기를,

"문강(文講)과 무강(武講), 문제(文製)와 무사(武射)는 마치 수레바퀴나 새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무강·무사 시험을 문강·문제하는 문신들 예에 준하여 실시하도록 명했다.

창덕궁(昌德宮)의 도총부(都摠府)를 이문원(摛文院)으로 명명하고 어필로 편액을 썼는데, 그 원이 옛날에는 금원(禁苑)에 있던 것을 지대가 너무 깊숙하다 하여 영숙문(永肅門) 밖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이때 와서 간신들이 상차하여, 원을 옮기는 것이 편리하다고 아뢰어, 허락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규장각에 임어하여 새롭게 정무를 볼 때 전직 각신(閣臣)들이 시강관(侍講官)·강서관(講書官) 자격으로 모두 책을 끼고 당(堂)에 올라 경의(經義)를 강설하고 치도(治道)에 대해서도 각기 소견을 개진했으며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득실까지도 모두 거론했었는데 그들이 비록 논사(論思)의 책임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자리는 응지(應旨)의 자리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있으면 각기 다 털어놓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예수(禮數)와 의식 절차는 대략 학궁(學宮)에 임어할 때의 의식을 모방했고, 선왕조 때 임어하여 일 보시던 고사(故事)도 참고했으며 송(宋)나라 때 원(院)에 행행했던 사실들도 참작해서 아뢰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내로 돌아올 때는 홍문관도 들러 두루 임어했었는데 그것은 《논어》에서도 말했듯이 그 예를 아끼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3월 신축일에는 이문원에 행행하여 《근사록(近思錄)》의 도체편(道體篇)을 강했는데 그 때도 전임 각신들이 반을 나누어 당에 오르고 홍문관 영사(領事) 이하는 강(講)을 들었으며 강을 마치고는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 홍문관으로 행행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들과 《심경(心經)》을 강했는데 내각과 홍문관의 신하들이 전(箋)을 올려 그 일을 축하했었다. 규장각이 건립된 지는 몇 해 되었으나 모든 제도가 제대로 마련이 되지 못했었는데 홍국영이 축출당한 후로는 조정 분위기가 깨끗해졌고 왕은 왕대로 치적을 높이기에 더욱 노력하였으므로 이제 온갖 제도가 모두 완비되었다. 그런데다 거듭 여러 각신으로 하여금 고금을 참작하여 하나하나 차근차근 수거(修擧)하도록 하여 각(閣)의 규모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이에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삼고 본각은 내각(內閣)에다 소속시켜 제학(提學) 이하는 겸직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강화도 어고(御庫)에 봉안되어 있던 책보(冊寶)와 서적들은 다시 각을 지어 간직해 두고 그 각을 이름하여 외규장각(外奎藏閣)이라 하였다.

《팔자백선(八子百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왕이 문장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서 선발하여 간행한 것이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동쪽 적전(籍田)에서 보리 베는 것을 구경한 다음 노주례(勞酒禮)를 행했는데 이는 영종이 하던 고사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면하였다. 왕은 언제나 정월이면 반드시 권농(勸農)의 윤음을 내려왔었는데 그날은 보리 수확 구경을 하고 노주례를 행했던 끝이었기에 거듭 독려를 한 것이다. 큰비가 내려 사문(四門)에다 영제(禜祭)를 행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를 둔 자로서는 가장 걱정거리가 장마와 가뭄 그리고 도둑이니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위에다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윗사람도 항상 두려움과 경계 속에서 감히 사치하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때문인 것이다. 이 좋은 말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풍속이 되어 담당관이 등문(登聞)을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아, 나라 전역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도성 안의 백성들이 겪는 고락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다. 혹시 도성 안에 고달픔을 한탄하는 소리가 있는데도 내가 들어 알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임금된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이어 한성부와 포도청에다 경계령을 내렸던 것이다.

8월에는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이달이 영조가 세자로 책봉된 달인데다가 그날은 숙묘(肅廟)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던 신축년 8월 보름날 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수레가 덕수천(德水川)에 당도했을 때 소를 몰고 지나가는 도둑이 있어 뒤 따르던 자가 그 사실을 알리자, 검암(黔巖)의 발장(撥將)을 명하여 소는 몰아다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도둑은 불문에 부쳤었는데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후사로 세운다는 명령이 내렸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왕이 일주갑 전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바 있어 능 배알을 마치고는 어제(御製)로 그 사실을 기록한 비(碑)를 파발의 관사 앞에다 세우고 어진(御眞)을 그려 규장각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였다. 그리고 각신(閣臣)이 쉬는 날에도 숙직을 하면서 봉심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두었는데 이는 멀리는 천장각(天章閣)에서 한 일을 모방한 것이고 가까이는 태령전(泰寧殿)의 의식을 취한 것이다.

호서(湖西) 사람 연덕윤(延德潤) 등이 송덕상(宋德相)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네 도에 통문을 보내 저들끼리 서로 선동을 일삼자, 도신(道臣)이 그 사실을 아뢰어왔고 제신들은 일제히 국청을 개설할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왕부(王府)를 번거롭게 할 것까지 없다 하며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하여 죄상에 따라 적절한 처리를 하도록 하고 덕상삼수(三水)로 귀양을 보냈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서북(西北) 지방은 바로 국경 지대로서 곳에 따라 문(文)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무(武)를 장려하기도 해야 하는데 근래 들어서는 습속이 점점 해이하여 무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모두 유명(儒名)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풍기가 시들하고 연약하여 변경 방어가 염려스러울 정도로 허술하니 내 매우 걱정되는 바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 까닭을 찾아보자면 전적으로 용사(用捨)에 달려 있는 것으로, 도솔(導率)하는 공효는 정주(政注)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대신(大臣)과 장신(將臣) 그리고 병조 판서는 서북 지방 무변(武弁)의 수용 정책에 대해 숙의하여 통합된 의견을 아뢰라."

하였다.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 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사태사(四太師)051)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6년 봄에 홍릉(弘陵)을 배알하고 이어 여러 능도 배알했으며,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다. 오랫동안 가물자 왕은 정전(正殿)을 피하고 친히 우사단(雩祀壇)에 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일산을 떼어버린 보여(步輿)를 타고 단에 이르러 직접 희생과 기물을 살펴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복 차림으로 노상에 앉았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러 의금부와 형조의 경미한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환궁한 뒤에도 오히려 곤복을 벗지 않고 난간을 의지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과연 비가 내렸다.

가을에는 권홍징(權泓徵)·송덕상(宋德相)·송환억(宋煥億)·문인방(文仁邦)·백천식(白天湜)·이경래(李京來)를 친국하고 해서(海西)에 사신을 보내 신형하(申亨夏)·박서집(朴瑞集) 등을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게 했다. 권홍징은 흉서(凶書)를 투서한 자이고, 형하서집덕상을 두둔하면서 음흉하고 끔찍한 저의를 가지고 글을 써서 서로 돌리는 자들이었으며, 인방·천식·경래 등은 요사한 글과 말로 서로 붕당을 결성하고 유언을 만들어내면서 난리를 일으킬 음모를 꾸민 자들로서 그들끼리는 부서(部署)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그들 모두는 덕상을 유일한 의지로 삼고 있었다. 차근차근 친국을 받고 사실을 토로한 다음 홍징·인방·천식·경래는 법에 의해 주륙을 당하고, 덕상은 지레 죽었으며 환억은 먼 섬에 위리 안치되고, 형하 등은 각기 정상을 참작하여 정배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러한 옥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연루자도 점점 늘어났으며 각도에서 밀계(密啓)하는 글들이 길에 이어져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일들이 결국 죄없는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리라는 것을 깊이 우려한 나머지 윤음을 내려 국영·덕상 등의 범죄상을 포고하고 그 말미에다 이르기를,

"오늘 역옥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은 진정과 안정[鎭安] 두 글자이다. 그 무리들을 다 찾아내고 숨겨진 내용까지 다 들추어내어 모조리 죽여없애고야 말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바가 아니다. 요즘 병영이나 곤수들에게서 올라온 것들이 아뢰지 않아도 될 것을 아뢴 경우가 간혹 있는데 집에다 비결 따위를 간직해둘 경우 그에 따른 처벌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그것이 무슨 문서인지조차 모를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만약 그 케케묵은 종이 한 조각까지 요언(妖言)이요 불궤(不軌)로 규정을 한다면 그 얼마나 불쌍하고 동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외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으나 그러나 역졸(驛卒)들의 왕래가 많아 도로가 시끄럽고 추적이다 체포다 하여 마을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다 또 고을마다 돌면서 정탐(偵探)을 하고 우연한 말 한마디까지 적발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국가의 본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심이 흔들려 안정을 송두리째 잃을 염려도 있으니 너희 크고 작은 신료들은 반드시 상대를 깨우치는 방법과 용서하는 마음을 강구하고 갖도록 각자 명심하고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라. 비록 제방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되지만 혹시라도 함정이 넓어지게 말 것이며 차라리 죄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함께 새로워지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기 6년이 되도록 정교가 확립되지 않아 악한 자가 선한 자로 변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죄에 걸리는 자만 날이 갈수록 많아져 감옥이 빌 만큼 교화가 이뤄질 희망은 안 보이고 수레에서 내려 울 일052) 만 늘 있으니 내 거듭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바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근일에 역적들이 비결 쪽지를 가지고 백성을 현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아니한 소치이다."

하였다. 이에 유술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긴다[崇儒重道]는 윤음을 내려, 이조에서는 문학(問學)의 선비들을 골라 뽑게 하고, 각도의 방백(方伯)들에게는 경(經)에 밝고 행실이 얌전한 자들을 추천하도록 명했으며, 소현(紹賢)·화양(華陽) 두 서원에 사제(賜祭)하였다.

왕은 초기부터 유술 숭상을 급선무로 삼아 문묘(文廟)에 배향된 국조 제현(諸賢)들을 모두 표장(表章)하고 혹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도 했으며, 혹은 그들 유문(遺文)에 대해 친히 제(題)를 쓰기도 했고, 또 혹 그들 자손을 녹용(錄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문하의 여러 유생들까지도 모두 은총을 베풀었다.

경기·호서·영남에 기근이 들자 윤음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구휼 정책을 강구하도록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도하 백성들 생활 방편이 오로지 기호(畿湖)에 달려 있는데 기호 지방이 흉년이라 하여 내 오래 전부터 도하 백성들 걱정을 해왔던 터이다. 우리 나라 발매(發賣) 제도는 바로 한(漢)나라 때 진대(振貸)와 같은 것이니 한성부 진휼청으로 하여금 미리 호구를 조사하여 쌀 발매 정책을 정확히 세워두게 하라."

하였다.

9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탄생했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 소생이었다. 영우원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완성되었다. 당초 세조(世祖)정축년053) 에 대제학(大提學)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 이상 4대의 보감을 찬술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국조보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후로 계속된 왕조가 이 4조의 뒤를 이어 속성(續成)을 시도했으나 미처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숙종(肅宗)경신년054) 에 와서야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선묘보감(宣廟寶鑑)》을 편찬하고, 영조(英祖)경술년055) 에는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해 올렸었다. 그러나 여러 국조의 보감이 하나의 통일 체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었는데 신축년 가을에 와서 《영종실록(英宗實錄)》이 완성되자, 왕이 대신·각신들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50년에 걸친 훌륭한 덕과 위대한 사업은 역사에도 이루 다 기록 못할 것들이지만 실록은 석실(石室) 금궤(金櫃)에 깊이깊이 비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오직 이 보감이라는 것이 비사(秘史)와는 조금 성질이 다르니 체제는 비록 편년체(編年體)를 쓰더라도 되도록 유양(揄揚)하는 쪽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 실록이 편성되었으니 이제부터 보감을 엮는 일을 시작한다면 나 개인에 있어서도 선왕의 교훈을 빛내고 공업을 천양하는 도리에 있어 유감됨이 없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찬성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조 때 이루어진 보감 외에는 선조·숙종 두 국조의 보감이 있을 뿐 그 밖의 12국조는 아직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지금 그 모두를 함께 편집하여 이상 세 국조의 보감 및 영묘 보감(英廟寶鑑)을 합쳐 한 책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각 국조 실록들을 강화도에서 모셔오게 하고, 또 12명의 사신(詞臣)을 차출하여 편찬을 각기 분담하도록 했으며, 또 전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서명응(徐命膺) 등에게는 교정을 맡겨 무릇 7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보감이 완성을 보았는데 총 68권으로 된 책을 활자로 인쇄하였다. 제신들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자, 왕은 법전(法殿)에 나아가 친히 받고는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고사(故事)에도 매 실(室)마다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周)나라가 종묘에 보기(寶器)를 진열해둔 일, 또는 송(宋)나라가 궁전에다 옥첩(玉牒)을 간직했던 일들을 모방하여 입묘(入廟)할 때 반드시 그것들을 다 봉안해 왔었다. 이 보감도 그 내용이 선왕의 공덕을 들추어내 후손들에게 복을 물려준 내용인즉 사실 서서(西序)의 대훈(大訓)056) 과 그 규모가 같다. 비록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완염(琬琰)이나 제도를 소명하는 새장(璽章) 같은 것으로도 오히려 그 소중함을 비유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다만 그동안 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못하여 성대한 예를 행하는 데 부족한 바가 있었기에 3백여 년을 두고 아직 궐전(闕典)으로 남아있었던 것이지만 열조(列朝)의 보감이 찬란하게 다 이루어진 오늘에 있어서야 어찌 감히 그를 경건히 비궁(閟宮)에다 바치고 그것을 이 나라 고유의 예로 삼아 우리 자손 만세에까지 영원한 교훈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책보(冊寶) 올리는 의식 절차를 참고 모방하여 보감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다 친히 올리고 각 실에도 따로따로 두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윤음을 내려 대소 신료의 의견을 물어 영종(英宗)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고 원자(元子) 호칭을 정한 다음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고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견휼(蠲恤)의 정령을 내렸으며 이어 대사면령을 중외에 내려 죄수 3천여 명을 석방시켰다.

7년 1월 조참(朝參)을 앞두고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공경 백집사(公卿百執事)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 되어버렸다. 한 해 벽두의 조참은 즉위한 맨 처음과 다를 바 없고 더구나 지금 보감도 올렸고 원자 호칭도 정해졌으니 위로 선왕의 뜻을 잘 계술(繼述)하는 방법에 있어서나 아래로 자손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김에 있어서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내일 문간에 들어설 때 대신(大臣) 삼사(三司)는 물론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좋은 교훈 좋은 설계가 될 만한 의견들을 각기 개진하라."

하였다. 제신들이 제각기 소회를 개진하자, 그를 다 받아들이고, 경기·호서·영남 3도의 도신(道臣)들에게 유시를 내렸으며, 또 내탕(內帑)의 전초(錢椒)를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진휼한 일이 옛부터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꼭 익주(益州)의 기근을 다스린 한기(韓琦)청주(靑州)의 수재를 구제한 부필(富弼)을 들먹인 까닭은 그들이 오직 하나의 ‘성(誠)’으로 철두철미하게 백성들을 돌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있는 정성을 다해 송(宋)의 한기·부필만이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각도에서 효열(孝烈)을 뽑아 아뢰자, 하교하기를,

"신하에 있어서는 충(忠)이요 자식에 있어서는 효(孝)이며 부인에 있어서는 열(烈)인데 그것은 시골 마을의 필부 서민들조차도 해내기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집안이겠는가. 우리 화순 귀주(和順貴主) 같은 사람은 탁월하다고 할 만하다. 옛부터 제왕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데 오직 우리 가문에 그러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이 나라 정신(貞信)을 대변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 가범(家範)에 있어서도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하고, 이어 그 문(門)을 열녀문으로 정표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정순 대비(貞純大妃)·경모궁(景慕宮)·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더 올렸는데 그는 자손에게 많은 복을 주었다는 뜻를 표한 것이었다.

대신과 예관(禮官)이 입대를 요구하여 아뢰기를,

"우리 성상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7년이 되도록 공덕을 나타내는 존호 올리는 예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여 온 나라 신민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공경히 송축하기를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배나 더 슬퍼지는구나. 경들이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불효한 죄를 더 보태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라를 맡고 있는 대신들에게 미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되어 내 매우 부끄럽다. 나의 지금 이 말은 사실 내 진심에서 나온 말이니 경들은 내 마음을 체득하고 이해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제신들이 누누이 청했지만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각신(閣臣) 정지검(鄭志儉)이 상차하여 청하기를,

"송(宋)의 홍매(洪邁)가, 그날그날 보고 들은 성어(聖語)를 기록하여 수주관(修注官)에게로 보내게 하자고 했던 고사(故事)를 본따 경연(經筵)에 오를 때마다 성어를 유심히 들어뒀다가 물러나와서 기록하고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그것을 다시 증정(證正)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주자어류(朱子語類)》의 예처럼 본각(本閣)에다 간직해 두는 것을 법제화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는데 그것이 바로 《일득록(日得錄)》이 되었다. 그후 내각에다 유시하기를,

"《일득록》을 만든 이유는 대개 근래 기주관(記注官)의 기록이 틀린 데가 많기 때문에, 가령 경의 문답(經義問答) 내용이나 시정(時政)에 관한 의견 교환 같은 것은 근신(近臣)들이 신진(新進)들보다는 이해가 더 깊으므로 꼭 송나라 고사대로 본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관성(觀省)의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너무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하여 포장(鋪張)만 한다면 그 기록을 본 후인들이 지금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 점을 각신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날이 가물어 감선(減膳)을 하고 또 구언(求言)도 했다가 이튿날 비가 내려 예조가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약간 내린 것도 다행은 다행이나 한 자쯤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이어서 금방 복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성(修省)의 자세를 어찌 비가 좀 온다 하여 흐트러뜨릴 수 있겠는가. 도움을 바라던 나머지라서 좋은 말을 듣고 싶으니 제신들은 그 뜻에 부응하여 나의 마음을 펴낸 그 유시가 형식에 불과한 일개 공문서로 끝나버리지 말게 하라."

하여, 경재(卿宰) 이하 그 뜻에 따라 소를 올린 사람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가을에는 건원릉(健元陵)·원릉(元陵)을 배알했으며, 영희전(永禧殿)을 개수했다. 그에 즈음하여 하교하기를,

"옛날 선왕조 때는 종묘·궁전을 개수하게 되면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이안청(移安廳) 앞에 나와 계시다가 다시 원위치에 봉안을 하고서야 비로소 소차(小次)로 들어가시곤 했는데 그는 이 소자(小子)가 그때마다 흠앙(欽仰)했던 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안일을 취하여 하시던 대로 계승할 생각을 안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곧 개수 장소로 나가 몸소 공역를 감독했으며 밤이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나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옥(獄)이라면 다 신중을 기하는 것이 제왕(帝王)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인데 나는 사리 판단을 원활히 못 해 한 죄안을 심의 결정할 때마다 전도 착란을 일으키기 일쑤다. 모든 관직 제수나 재정 출납 또는 강제(講製) 초록 발췌 등에 있어서도 모두 장부를 두어 기록하고 있는데 더구나 형옥(刑獄) 처리 관계에 있어 어찌 이미 끝난 사안이라 하여 다시 두고두고 연구 검토를 안 해서야 될 일인가. 지금 이후로는 의금부와 형조의 결옥안(決獄案) 중에서 긴요한 부분은 초록해 두었다가 그달 말에 가서 기록해 아뢰고 매년 계삭(季朔)에는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언젠가 내원(內苑)의 와린평(臥麟坪)을 지나다가 한 토실(土室)을 가리키며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저것이 옛날 이른바 북사옥(北寺獄)이라는 것으로 궁중에서 죄지은 자들을 가두었고 저 옥에도 형구(刑具)가 있다. 나는 궁중과 부중(府中)이 일체라고 생각되어 죄인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맡겨 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고 토실은 이용 않기로 했기에 지금은 저 터만 있는 것이다."

하였다.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상소하여, 선비들을 선발 입재(入齋)시킬 것을 관·각·묘당의 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후 과거(科擧) 문제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결과, 대소과(大小科) 제도를 고치자는 것, 생획과(栍畫科) 정원을 늘리자는 것, 원점과(圓點科)를 부활시키자는 것 등이었는데 그 모두를 보류한 채 아직도 짤막한 비답 하나 내리지 않고 있는 까닭은 그럭저럭 지내면서 변통을 안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폐단이 법 때문이 아니고 바로 인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법이야 현행의 법이 조종조에서 만든 금과 옥조가 아닌가. 인재만 얻어 맡긴다면야 유교(儒敎)가 진흥되지 않고 사풍(士風)이 진작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게 뭐겠는가. 구경재(九經齋)를 다시 설치할 것도 없고, 연영원(延英院)을 모방할 필요도 없으며, 성균관 유생이니 사학 유생이니를 따져 구별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직 ‘득인(得人)’ 그 두 글자가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급선무이니 경들은 각별히 인재 찾기에 힘쓰라."

하였다.

그해에 6개 도(道)가 기근이 들었는데 왕은 그것을 크게 걱정하여 날마다 담당 신하를 불러 접견하고 황정(荒政)을 강구하였다. 그때가 또 마침 탄신(誕辰)이었는데 왕은 하교하기를,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인데 외지의 곤수(閫守)와 목백(牧伯)들이 모두 전문을 올려 축하를 표하고 있지만 내가 마음 조이고 있는 것이 우리 백성들 문제뿐이다. 백성들은 지금 신음 중에 있어 그 아픔이 바로 내 아픔과 같은데 축하는 무슨 축하란 말인가."

하고, 각도에 윤음을 내려 도신들로 하여금 별도로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경계하였다. 또 영동(嶺東)의 9개 군이 다른 곳에 비해 더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하는 한편 포항(浦項) 창고의 곡식을 옮겨다 구제하게 하기도 했으며, 향축(香祝)을 내려 바다 등지에 제사를 올리어 일이 잘 되도록 빌게 하기도 하였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흉년이 들면 부황나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백성들 어느 누가 왕정(王政)의 구제 대상이 아니겠는가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호소할 곳 없고 가장 불쌍한 것들이 어린 것들이다. 심지어 길가에 버려진 것들을 거리에 그대로 방치해두어 죄 없이 죽고 마는데 그것이 어찌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겠는가. 광제원(廣濟院)이니 육영사(育嬰社)니 하는 좋은 제도들이 있어도 예와 지금이라는 시대의 차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를 다 그대로 거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서울은 팔방(八方)의 표준이 되는 곳이니 우선 여기서부터 그 제도 비슷한 것을 시행함으로써 각 지방이 차근차근 본받도록 하는 것이 실로 인정(仁政)의 시작에 합당할 것이다."

하고, 이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만들어 그를 인쇄해서 중외에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매 월말이면, 몇 명씩이나 수양(收養)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실시하고 있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울러 아뢰라고 하였다.

8년 1월 조참(朝參)을 앞두고 왕이 문신 중에서 선발되어 대직(臺職)을 맡은 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새로 대직을 맡았으니 언론이나 풍기 제재에 있어 틀림없이 볼 만한 것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선발을 받은 문신이라면 남다른 은례(恩禮)와 청고한 지망(地望)이 경악(經幄)에 뒤질 것이 없으니 내 우선 그대들에게서 직언 당론(直言讜論)을 듣고 싶은 것이다. 간관(諫官)이란 직책은 마치 조양(朝陽)의 봉이요 전상(殿上)의 호랑이여서 백관들 모두가 다리를 떠는 바이니 그 직책에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옛날부터 대각을 욕되게 한다는 벌이 있었다. 그대들이 추천 물망에 오르자마자 기회가 또 마침 연방(延訪) 시기이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각자 숨김없이 바른말을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태학 유생들을 불러 강을 하게 하고는 식당(食堂)을 개설하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정자(程子)가 승사(僧舍)의 회식(會食) 광경을 보고는,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있다고 감탄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태학의 식당이겠는가. 질서 지켜 나오고 나이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질서정연하여 참으로 볼 만하다. 내 그래서 제생(諸生)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부추나물에 소금국이 비록 박하기는 해도 내주(內廚)의 진수성찬보다 맛은 더 좋으니 경들도 각기 한번 배불리 먹어 보라."

하였다. 원점(圓點)에 관한 법을 검토했으며, 묘당(廟堂)과 이조의 신하들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는 뛰어난 인재들을 천거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그리고 재앙을 입은 각도에 윤음을 내리고 별도의 진휼할 물자를 하사하기로 하였다.

지진이 일자, 하교하기를,

"지난달에는 혜성이 나타나더니 오늘 새벽에는 또 지진 소리가 들리니 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분발 노력하여 수성(修省)의 도를 다할 때가 아니겠는가. 아, 백천 가지 병폐는 다 언로(言路)가 막혀 있기 때문인데 구언(求言)의 기회를 간혹 마련해 봐도 입바른 말은 들을 수가 없고 다만 남의 비밀을 들춰내는 풍조만 일고 있으니 이는 구언이 오히려 말을 않은 것보다 더 심한 피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이나 시정(時政)의 폐단에 관한 것이니 내일 빈연(賓筵)에서는 삼사(三司)가 각기 광구(匡救)에 관한 말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건원릉·원릉을 배알하고, 오부(五部)의 기민들을 뽑아 값을 내려서 쌀을 지급해 주었는데 대체로 2만여 호(戶)에 달했다. 또 도하(都下)에 돈이 말랐던 관계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빈대(賓對)를 실시할 때 공시(貢市)의 사람들을 직접 불러 여러 가지 폐단에 관해 물은 다음 하교하기를,

"작년에 6개 도가 흉년이 들었던 관계로 중외를 막론하고 먹고 살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눈에 선하다. 더구나 왕도(王都)는 팔도의 본거지로서 자기 힘으로 씨부리고 수확하는 길도 없는데다 조적(糶糴)의 혜택마저도 없으니 이 흉년을 당해 모두가 곤경에 빠질 수밖에 또 있겠는가. 옛날 선왕조 때는 언제나 도하의 백성들을 진념하여 돌봐주시고 조세나 환곡을 정지하거나 감면해 주곤 했는데 그 후덕하신 뜻을 이 소자(小子) 평일에 늘 보고 느껴왔던 터이다. 지금 내가 문에 나와 묻고 있는 것도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하고는, 각영(各營) 각사(各司)의 돈 15만 꿰미를 이자 없이 구전(口錢)도 떼지 말고 공시 백성들에게 대차해주도록 명했다.

대빈(大嬪)의 묘를 수리하고 하교하기를,

"선왕조에서는 대빈궁의 시사(時祀) 절사(節祀), 묘도(墓道)의 수봉(修奉)은 늘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했는데 내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옥(京獄)의 검험(檢驗) 규정이 지방 각도에 비해 소략한 점이 많다 하여 비변사에 명해 검험 규정을 다시 강정해서 형조와 한성부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가을에 역적 김하재(金夏材)가 소매 속에 흉서(凶書)를 넣고 입궐하여 전향 승지(傳香承旨)에게 보였는데 그 흉서 내용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신치운(申致雲), 이천해(李天海)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경연 신료들이 분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치를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히 국청을 열어 사실을 밝힐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급기야 하재(夏材)가 법에 의해 베임을 당하고 나자, 경연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세상에 무슨 하재가 둘씩이나 있겠는가? 그 자가 재열(宰列)에도 드나들었고 전임(銓任)도 맡은 때가 있었으니 그와 서신 왕래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야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그 모두를 불태워버리라."

하였다.

8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책봉하고 영릉 배알 길에 나섰다. 대가가 월산 대군(月山大君) 사당을 지날 때 하교하기를,

"듣자니 대군의 강사(江舍)가 그 자손들이 흩어져 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풍월정(風月亭) 현판만 아직 남아 있다는데 선릉(宣陵)과 지극히 우애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전송되고 있는 터에 하사 집 하나도 대를 이어 지키지 못한대서야 그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호조가 값을 변상하고 되찾도록 하라."

하였다.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인정전에서 조참을 행하면서 뜰에 있는 제신들에게 유시하기를,

"금년 이날이 바로 우리 선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회갑(回甲) 날이다. 이 문은 선왕께서 납시던 문이요, 이 조정은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정이다. 이날 이 의식이 어찌 관첨(觀瞻)을 위한 것이겠는가. 이 공고한 기반과 영광스런 경사가 뿌리 있게 전래되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지금 이 뜰에 나와 있는 제신들도 옛날 선왕을 섬기던 사람 아닌 자 누가 있겠는가. 혹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그대 조부가 우리 선왕을 모시고 대대로 충정(忠貞)을 바쳐 그것을 자손인 그대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우리 어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도와 다스려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선왕의 덕을 천양하고 업을 이어가며 길이 후손들을 복되게 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고, 서로 공경하고 협동하고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왕실을 돕는 일은 신하들이 할 일이다. 아, 그대들이여, 각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여 나 한 사람을 떳떳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

하였다.

사대신(四大臣)과 삼장신(三將臣)·사절도(四節度) 그리고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齊), 증 판서(贈判書) 이정숙(李廷熽)에게 제를 내리고, 증 판서 조성복(趙聖復), 증 참판 김성행(金省行)은 정려(旌閭)를 했으며, 고 상신(故相臣)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 고 판서(故判書) 이만성(李晩成)의 손자를 임용하였다. 하교하기를,

"학성군(鶴城君)은 그가 갑술생(甲戌生)인데 내 그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옛날 이날에는 시위(侍衛)로 참여했었는데 금년 오늘에는 또 보검(寶劒)으로 시위하고 있으니 어찌 그를 표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잔치와 풍악을 내렸다.

9월에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를 올리고 영종 대왕(英宗大王)·정성 왕후(貞聖王后)·정순 대비(貞純大妃)·경모궁(景慕宮)·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올렸으며,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은 후 중외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였다.

천둥이 일자 하교하기를,

"밤에 번쩍번쩍 꽝꽝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비록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인자하신 하늘이 그렇게 분명한 경고의 뜻을 보이셨으니, 자신을 반성하고 살펴볼 때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옛날에도 10월에 천둥이 일면 감선을 했었다. 그런데 10월 절후(節候)가 26일에 이미 들어 있어 달은 9월이라도 9월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3일을 감선했고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각기 교지에 응하여 글월을 올렸다.

겨울에, 각신(閣臣)들로 하여금 《일성록(日省錄)》을 편수하라고 명했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하룻동안 한 일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때 와서 기거주(起居注) 기록이 착오와 누락이 많다 하여 별도로 편수하도록 명하고 증자(曾子)의 일삼성(日三省) 뜻을 따 《일성록》 이라고 명명하였다.

9년 1월 사단(社壇)에다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단향(壇享)은 옛날로 치면 바로 방구(方邱)057) 이다. 질그릇 바가지를 쓰고 형기(鉶器)에 국을 담아 땅바닥을 쓸고 제사를 올리면 그 영령이 넓은 바다와 같아 어디고 없는 곳이 없으므로 주·부·군·현을 막론하고 사직(社稷)에 관한 책임은 다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보면 여러 도의 사단이 황폐한 곳이 많아 단의 담들이 무너지고 살문[箭門]이 쓰러지고 했는데도 수재(守宰)들이 그를 성황당 등 다른 단들이나 똑같이 보아 정성들여 제사 모시는 막중한 곳을 나무하고 꼴 먹이는 장으로 묵혀버렸다고 하니 제사도 의식대로 모시지 않고 제물도 정결할 리 없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수령이라면 그 직책 중에서 민사(民社)를 관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거기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야 볼게 뭐가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각읍에 경계의 공문을 보내 사단을 다시 수리하고 그곳을 지키는 교졸(校卒)을 둘 것이며, 표를 세워 경계를 정하여 잡인들이 못 드나들도록 각별히 금지하고, 매 월초 월말에 영문(營門)에다 그 현황을 보고하면 영문에서는 그것을 다시 예조에 보고하여 근만(勤慢)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양호(兩湖)의 수운(水運)이 시간이 많이 걸려 기한을 넘기기 일쑤이고 걸핏하면 또 물에 잠기곤 하여 경비는 점점 바닥이 나가고 그 지방의 거주민에게 끼치는 폐단도 많았다. 왕은 그를 걱정하여 대신 이하 제신들 의견을 물어 한강의 배를 대오로 짜는 제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4개 진(鎭)의 별장(別將)들로 하여금 각기 관할을 정해 따로따로 맡아서 거리의 원근에 따라 소요되는 기일을 정하고, 안배된 물량을 다시 운반하여 각 창고에다 나누어 저장하게 함으로써 우선 어려운 인력 동원비를 줄이고 이어 호송에 관한 법규까지 정하게 하는 등 비변사로 하여금 그에 따른 세부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도에 명해 의승(義僧)들의 교구(矯捄) 방안을 각별 강구하여 시행하게도 하였다.

태릉(太陵)·강릉(康陵)을 배알하였다.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 상변하여 이율(李瑮)·양형(梁衡)·홍복영(洪福榮)·문양해(文洋海)·주형채(朱亨采)·김두공(金斗恭) 등을 친국했는데, 복영홍낙순(洪樂純)의 자식으로서 국영(國榮)·낙순의 죄가 탄로나자 복영이 국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불궤(不軌)를 저지를 생각으로 이율·양형·문양해 등과 짜고 비결에 가탁하여 거짓말을 퍼뜨리고 영남 하동(河東) 땅을 근거지로 돈을 모으고 집을 짓고서 불일간 거사를 하려고 모반 준비가 완료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국청에서 신문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귀신을 끌어다 대고 성명도 없는 것들을 끌어대면서 그 옥사를 갈팡질팡하게 만들려고 하였고, 각도에서는 도신(道臣)·수신(帥臣)의 밀계(密啓)가 하루에 너댓 차례씩 올라왔는데 이때 상이 하교하기를,

"병신·정유년 이래로 난역(亂逆)이 늘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에 죄 지은 무리들이 난리가 일어나고 화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터무니없는 말로 허풍을 치며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요사스럽고 사리에 당치도 않은 허다한 말들이 각지에 전파되고 있으나 그들의 진짜 소굴은 지금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지리산·묘향산이 그 둘레가 비록 넓고 멀다고 해도 만약에 진짜 문양해 공초대로 그 속에 선원(仙苑)이 있고 이인(異人)이 있다면 몇 개 읍의 교졸(校卒)을 동원해서 깊은 골짝에서 정상까지 빗질을 하다시피 뒤졌는데도 마을 하나 없고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단 말인가. 부질없이 죄 없는 백성들만 겁을 먹고 떠들썩하게 되어 열 집 되는 마을에 일곱 여덟 집이 다 비게 만들었다. 설사 불량한 무리들이 혹 딴 뜻을 먹고 있다고 해도 그것쯤이야 소추(小醜)에 불과하지 평민들하고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 비록 대궐 속에 깊이 앉아 있어 자세히 듣지는 못했으나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 침식(寢食)을 달게 여길 수 있겠는가. 빨리 각도로 하여금 모든 수포(搜捕)와 규찰(糾察)에 관한 일은 그 일체를 정지하여 우리 백성들이 마음놓고 생업을 즐기면서 각기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어른을 위해 죽을 마음이 있게 하라."

하였다.

역적들이 다 법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김두공(金斗恭)김하재(金夏材) 조카로서 처음에는 상변한답시고 국정에서 하재의 흉서를 외우던 자였는데 결국 사실을 자백하고 복주되었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하교하기를,

"남쪽에는 관아를 두고, 북쪽에는 환시를 두어 그 한계가 대단히 엄하여 한 번이라도 그 한계를 넘어섰다 하면 그를 규제하는 국가의 법이 있었으니, 열성조에서 그들을 심하게 억제하여 수문(守門) 전령(傳令) 이외에는 조정(朝政)에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했었다. 우리 선왕조 때는 또 환시(宦寺)에 대해 더욱 엄한 규제를 했었는데 내가 즉위한 이후 꼭 그대로 할 생각이었다. 특히 궁중에 있으면서 가까이 좌우에서 모셔온 자들이 불순한 무리들과 온갖 방법으로 결탁하여 대내(大內)를 넘보기 위해 어두운 밤에 왕래하는가 하면 좋은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곤 했는데, 지금도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 등 충절을 바친다는 무리들이 역적을 모의했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치솟는다. 그로부터 역옥(逆獄)이 한 번 일어나면 뒤이어 곧 환옥(宦獄)도 한 번 일어나곤 했는데 전후 그 국옥(鞫獄) 때마다 나는 되도록 너그럽게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 사건에 환관이 관련되어 있으면 그는 조금도 용서치 않았었다. 더구나 무신인 경우 그 활동범위에 있어 엄한 한계를 두어야 할 것이 문신에 비해 훨씬 더한데, 요즘 들어보면 중일제(中日製) 시장(試場)이나 구궁(舊宮) 터에서 기율이 문란하기가 그보다 더할 수 없어 활 쏘다 말고 웃고 떠들고 한다 하니 그 몹쓸 습관이 그대로 점점 자라가게 내버려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병조의 장은 각청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상세하게 타일러서 깨닫고 무서워할 줄을 알게 하라."

하였다.

7월 1일 일식이 있었는데 서울과 외방에 유시를 내려 구식(救食) 제도를 재정비하게 하였다. 그 전에는 각 관아에서 잘못된 전례만을 답습하여 그날 입직한 낭관만 구식에 참여해 왔었는데 지금 와서 옛 법을 다시 살려 장관(長官)이 행사하게 하였고 이어 구식 도구도 재정비하였던 것이다.

명릉(明陵)영우원(永祐園)을 배알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경제(經制) 서적으로는 세종(世宗)《육전등록(六典謄錄)》을 시작으로 하여 세조(世祖) 때는 《육전》을 절충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들었고, 성종(成宗) 때는 《속록(續錄)》, 중종(中宗)《후속록(後續錄)》, 숙종(肅宗)《집록통고(輯錄通考)》, 영조(英祖) 때는 《속대전(續大典)》을 만들었는데 이때 와서 대신(臺臣)들 말이, 즉위 이후 받은 교령(敎令)으로서 장래 영식(令式)이 될 만한 것이면 그를 유별로 모아 책을 만들어서 시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왕이 이에 이르기를,

"《속대전》갑자년058) 에 만들어진 것이고 선왕의 교령은 갑자년 이후 것도 많지만 어떻게 감히 근대 것만 전폭적으로 취하고 전대의 것은 소홀히 다룰 것인가. 그 뿐 아니라 원전(原典)·속전(續典)이 각기 따로따로 있으면 참고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있으니 원전과 속전 및 옛 교령 지금 교령을 모두 합해 한 책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두서너 경재(卿宰)가 그 일을 맡아하고 대신(大臣)이 모두를 총괄하게 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이름을 《대전통편》이라 하고 중외 각지에 나누어 보냈다. 그리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대전통편》에 새로 더 넣은 조항은 나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으로 사율(死律)에 관한 사항은 감히 일개 조도 더 넣지 않았다."

하였다.

진장각(珍藏閣)에 나아가 황조(皇朝)의 어필(御筆)과 어화(御畵) 그리고 열성조의 어제(御製)·어필·어화·고명(誥命) 두루마리들을 열람하다가 영종조에서 편찬한 《갱장록(羹墻錄)》을 발견하고는 하교하기를,

"열성조의 치법(治法) 정모(政謨)가 모두 이 속에 들어있다. 보감(寶鑑)은 체제가 편년체(編年體)이고 이 녹(錄)은 부류별로 모아놓은 것이어서 내용은 같은 내용이지만 열람하기 편리하기로는 녹이 더 긴요하니 이도 속성(續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 내각의 제신들에게 명하여 지문(誌文)·행장(行狀)·보감·실록(實錄) 및 정원일기(政院日記) 등에서 뽑아 부류 별로 편찬하여 장차 주연(胄筵)강의 때 참고 자료가 되도록 하게 하였다.

《병학통(兵學通)》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군제(軍制)는 오로지 《병학지남(兵學指南)》 만을 적용해 왔는데, 왕이 너무 소루한 것을 걱정하여 새로 조련에 관한 정식(程式) 등을 부류대로 모으고 또 강(綱)과 목(目)을 따로 세워 한 질의 책을 만들어 인쇄 반포하였다.

네 국조(國朝)의 어제·어필비를 서울 동남방에 위치한 관왕묘(關王廟) 안에다 세웠다.

10년 1월 1일 일식이 있어 감선·구언을 하고 인정문에 나아가 조참을 받았다. 그리고 경재(卿宰)와 시종(侍從)들은 앞으로 나와서 소견을 아뢰고 백관들은 써서 올리라고 명했는데 대신에서부터 위사(衛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63명이 그에 응하자, 그를 다 친히 보고 비답까지 내렸었다.

조관(朝官)은 나이 80이상, 서민은 나이 90이상이면 매해 말에 서울의 경우 오부(五部)가 찾아내고, 지방인 경우는 그 지방관이 직접 방문한 후 한성부 또는 각 감영에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고, 세초를 기해 가자(加資)에 관한 하비(下批)를 하면서 부인(夫人)의 봉작(封爵)도 그에 준해 하도록 하였는데, 일백 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동지중추를 주고, 급제 연한이 일주갑을 넘긴 자는 대소과를 막론하고 자급 하나를 특가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했으며, 한성부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임자 없는 해골을 모두 묻어주도록 했는데 모두 37만 9백 79곳이나 되었다.

효릉(孝陵)·희릉(禧陵)을 배알하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에게 제(祭)를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 능원(陵園) 행행 때면 각 조(朝)의 국구(國舅)와 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 그리고 당시에 등용되어 군신간 의기가 상합했던 명경(名卿)들 묘에도 두루 잔을 부어 추선(追先)의 감회를 표했었다. 영우원을 배알했다.

여름에 옹막리(甕幕里)에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 3백여 호가 연소되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하내(河內)에 화재가 났을 때 급암(汲黯)이 국가 법령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임의로 창고를 열어 이재민 구호를 했는데 한(漢) 무제(武帝)는 그를 오히려 가상히 여겼었다. 급암은 일개 사신(使臣)이었으면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직분을 다했었는데 하물며 윗사람이 되어 어찌 일부 일부(一夫一婦)인들 살 터전을 잃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불러 외읍에 적용하는 휼전(恤典)을 모방하여 구제해주게 했다.

영우원 배알 때 전염병이 드세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하교하기를,

"푸닥거리는 예부터 있어왔던 예이니 서둘러 실시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사방 교외에다 별려제(別厲祭)를 차리도록 명하고, 또 한성부에 명하여 관할 내의 방곡(坊曲)에 알려 양반 상사람 할 것 없이 자기 자력으로 약물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은 의사(醫司)가 의원을 지정하여 그로 하여금 진찰도 하고 약물도 공급하도록 하게 하고 그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

5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죽어 왕은 슬픈 생각에 겨를이 없는 처지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날마다 유사(有司)들을 단속하여 민간의 유행병 치료에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생명이 살아났다.

예조가 무신년 복제(服制)대로라면 자최 기년(齊衰朞年)이어야 하고, 《상례보편(喪禮補編)》대로라면 참최 삼년(斬衰三年)이어야 한다 하여 품지(稟旨)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상제(喪制)는 당연히 《상례보편》과 수교(受敎)를 따라야 하지만 ‘정(正)’과 ‘체(體)’ 그 두 글자에 매우 중대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은 아니다.’라거나 반대로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니다.’라고 하는 문제에 있어 오늘의 상황에서는 모두 혐의가 없지 않다. 따라서 오늘로서는 감히 수교대로 따라야 한다고 무작정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고는, 자최 기년으로 정했던 것이다.

지난번에 군신들이 최복(衰服) 차림에 백화(白靴)를 착용하자, 하교하기를,

"그 가죽신이라는 것이 원래 고제(古制)가 아니어서 당(唐)이나 송(宋)이 인습하여 써오기는 했어도 이미 옛뜻은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나라는 평상시 복장도 그들이 하는 대로 흉내내자면 그도 미처 못할 입장인데 더구나 최복이라면 그 얼마나 예를 갖추고 있는 옷인데 그 밑에 신발을 가죽신으로 착용해서 될 일인가?"

하고, 삼신으로 바꾸도록 명했었다.

문효 세자효창(孝昌) 묘원에다 장사하고, 사당은 문희(文禧)라고 하였다. 의열묘(義烈墓)·의소묘(懿昭墓)를 배알하고 효창에도 갔었다.

9월에는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죽었다. 정릉(貞陵)을 배알하였다.

겨울에 자전(慈殿)이 언문으로 된 교서를 내려, 암암리에 국권을 바꿀 계획을 꾸며온 국영(國榮)의 죄악상을 열거하고 이어 5월, 9월 연이어 상변(喪變)이 났는데도 제신들이 죄인 다스리는 일을 늦추고 있는 죄를 책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 원임 대신 모두가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뵙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빈청(賓廳)에서는, 이담(李湛)에 대해서는 관작삭탈과 함께 적(籍)을 파버리고, 인(䄄)은 왕법(王法)으로 처단할 것을 계청했는데, 그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리라고 하였고 제신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강력하게 청했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서 김상철(金尙喆)의 자식 김우진(金宇鎭)이 근신(近臣)으로서 상께 죄 지은 일이 있었는데 뒤에 와서 병신년 봄에 있었던 옥사(獄事)를 핑계 삼아 왕을 현혹시키고 제 죄를 숨길 계책으로 유양(揄揚)의 논을 발론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정상을 미워하여 그 직을 삭탈하였고, 구선복(具善復)임오년059) 에 죄 지은 일이 있었지만 오래도록 병권을 쥐고 있으면서 날이 갈수록 죄악이 익어가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양사(兩司)가 일어나, 우진이담을 위해 혼인을 권했다 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얼마 후 이담의 외삼촌 송낙휴(宋樂休)가 상변하면서, 이담 스스로 자기는 김상철과는 사생을 함께하는 처지이므로 우진이 만약 죄를 당하면 독약을 먹고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고, 또 선복은 자기 아들 구이겸(具以謙)을 시켜 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안부도 묻고 한다고도 말하였다. 이에 우진·선복을 국문했는데 우진은 후일을 생각해서 그랬다고 실토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하고 제주도에다 위리 안치하도록 명했고, 선복·과 서로 사통하고 지낸 전후 정상이 모두 탄로나서 법에 의해 복주되었으며, 선복의 조카 구명겸(具明謙)과 가까운 인척으로서 서로 얽혀있었다 하여 국문한 다음 법대로 처치하였다. 그리고 상철(尙喆)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삼사(三司)가 청했으나 왕은 그가 일찍이 원상(院相)을 지낸 바 있다 하여 극형을 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을 법대로 처리할 것을 백관들이 정청(庭請)까지 하였으나 왕은 그때마다 차마 못 듣겠다는 하교만을 내리면서 나흘 동안이나 문을 닫고 수라를 물리치기까지 했는데 대신 이하가 합문에 엎드려 관을 벗고 청하자 을 감형하여 섬에다 안치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문관·음관·무관과 유생(儒生)에 시민(市民)들까지 번갈아가며 상소했지만 모두 따르지 않고 과 그 아들들을 모두 강화도에 안치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신 이하가 잇따라 소를 올려 강력한 주장을 하자, 하교하기를,

"옛날에 양 효왕(梁孝王)의 옥사060) 가 너무도 끔찍했는데 효경제(孝景帝)양 효왕 무(武)를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전숙(田叔)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오늘의 조정 신료들은 그 전숙에 대한 죄인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왜 그리도 경제와 같이 대해 주지 않는 것인가. 여름 가을에 겪은 일들이 마치 백년이나 지나온 것 같다. 조정에 나와서나 사석에 들어가서나 남에게 꺼림한 얼굴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호소하는 소리들을 들으면서부터는 마음이 바람 앞의 깃발처럼 흔들려 새벽까지 잠도 못 이루고 끼니가 되어도 먹지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 흰머리가 하나하나 생겨나는 것이다. 만에 하나 내 뜻을 따라주지 않고 계속해서 소란을 피운다면 나도 나대로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더구나 지금 섣달 그믐이 하루 이틀 밤밖에 남지 않았으니 명년 정초부터서는 번거롭고 시끄러운 것들은 싹 씻어버리고 좀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경들에게 거듭 바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도 두루 깨우쳐 모두 편안한 안식처를 갖게 하라."

하였다.

11년 1월 자전(慈殿)께 존호를 더 올렸고, 종묘 사직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하여 군신들이 공덕을 천양할 것을 청해오다가 이때 와서 책보(冊寶)를 올렸었다. 효창묘에 갔었고, 2월에는 건원릉·원릉을 배알했다. 경술일에 수빈(綏嬪) 박씨(朴氏)와 가례를 올렸는데 주부(主簿) 박준원(朴準源)의 딸이었고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으로 정했다. 지난해 겨울 자전이 언교(諺敎)를 내려 빈(嬪)을 간택하라고 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 그 예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름에는 원주(原州) 사람 김동익(金東翼)·정진성(鄭鎭星)제천(堤川) 사람 유득겸(柳得謙) 등의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그들을 체포 국문하고 곧 사신을 원주 감영으로 보내 조사하게 하여 그 역적들 모두가 법에 의해 복주되었다. 그해 봄부터 기호(畿湖) 사이에 유언비어가 갑자기 떠돌아 촌민들이 모두 도망가 숨는 바람에 온 마을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가 며칠 지나서야 안정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와서 상변한 자가 있어 알고 보니 바로 동익 등이 선동한 것이었다.

어제 비문을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에다 세웠는데 그곳은 바로 환조(桓祖)태조(太祖)가 살던 마을이고 정종(定宗)·태종(太宗)이 탄생했던 터로서 그해 정미년이 바로 탄생한 회갑(回甲)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일단 생각이 선조들 공렬을 천양하는 데 있어 경흥(慶興)적지(赤池)적도(赤島), 덕원(德源)용주리(湧珠里) 등지에다도 모두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

조시위(趙時偉)제주도에 위리 안치하도록 명했다. 시위가 경자년 이후로 척리(戚里)를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 우지하고 임인년 문효 세자의 탄생 때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하기도 하여 조정 신료들이 해를 넘겨가면서 그를 국문할 것을 청해왔었는데 그때 와서 그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가을에는 명릉(明陵)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기임각(祈稔閣)에 나아가 수확 광경을 구경한 다음 술을 내려 농부들 노고를 치하했다. 수길원(綏吉園)을 또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머물러 그곳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한 다음 양주(楊州)·고양 두 읍의 묵은 적곡을 특별 감면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이 어제(御製)를 편찬하여 올렸으며 어제 기(記)를 순안(順安)율원정(栗園亭)에다 걸었는데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손수 심은 것이었다.

겨울에 천둥이 일어 감선·구언을 하고, 기곡제(祈穀祭)에 있어 섭행하는 의식과 기곡제도 대사(大祀)로 승격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제신들과 논의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왕조 갑오년에 희생의 품등을 더 높이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성상의 그 뜻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단향 의식도 옛날에는 미비되었다가 지금 와서야 갖추어졌는데 그것은 본사(本祀) 의식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춘향·추향 그리고 섣달 대향(大享) 때도 서계(誓戒)에 있어 친림(親臨) 절차는 없었다. 선왕조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의 옛 제도를 따랐던 것인데 시향(時享)에 있어서도 향사 의식을 그렇게 높였다면 더구나 기곡제 같은 대제(大祭)에 있어서야 말할 게 뭐 있겠는가. 내년 봄부터는 상신(上辛)의 기곡제는 춘향·추향 및 섣달 대향 때 의식을 그대로 준용하고 서열도 대사 서열로 승격시키라."

하였다.

연행(燕行) 때의 문단(紋緞) 금령을 거듭 강조하였다.

《문원보불(文苑黼黻)》061) 이 완성되었는데 바로 이 나라 문원(文苑)의 장정(章程)이었다.

12년 1월 하교하기를,

"명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무신년 정월 을해일에 천자 위에 올라 즉위 원년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했었는데 그해가 다시 돌아왔고 간지(干支)로 쳐서 이달에 마침 그날이 들었으니 어찌 그냥 넘기겠는가."

하고, 그날 두 봉실(奉室)을 배알하였다.

3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선대왕이 위무를 선양하여 병란을 평정하신 해요 달이다. 음모가 영남·호남에서 꾸며져 기전(畿甸)까지 곧바로 밀고 올라왔는데 실지(失志)한 무리들이 내응을 하고 밖에서는 부정한 도당들과 힘을 합하고 있었으므로 그때의 아슬아슬함이란 위태롭기 머리털 하나 사이였었다. 그때 만약 신속하신 결단이며, 불살(不殺)의 성무(聖武)며,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계책을 연석(宴席) 사이에서 세워 승리의 기세를 잡은 것이며, 하늘이 돕고 사람들이 따라준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거세고 흉측한 무리들을 수습하고 교화하여 잠시잠깐 사이 이 나라를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겠는가. 그때 그날은 돌아왔건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이 높고 물은 맑은 것일 뿐이니 그때를 추억하며 느끼는 이 소자(小子)의 마음으로서 어찌 충성과 노고에 보답으로써 옛날 나라를 편케 하셨던 분들이 받은 아름다운 천명에 대해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책훈(策勳)되고 순절(殉節)한 신하들 그리고 고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에게는 제물을 내리고, 고 재신(宰臣) 홍경보(洪景輔)·오광운(吳光運)에게는 시호를 추증했으며, 고 영백(嶺伯) 황선(黃璿)의 후손을 찾아 기용했었다. 그리고 또 각도에 명하여 당시 정벌에 참여했던 장사로서 현재 살아있는 자와 의를 위해 싸우다 순절한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모두 포장(褒奬)하고 수록(收錄)하도록 했으며,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도 시호를 내리고 제주까지 내렸다.

왕은 임오년 이전의 자기 직분을 다했던 신하들을 추념하여 서지수(徐志修)·이이장(李彛章)·윤숙(尹塾)·임덕제(林德躋)·한광조(韓光肇)·조중회(趙重晦)·임성(任珹)·이원익(李元翼) 등을 모두 표장(表奬)하였다. 특히 이종성에 대하여는 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지킨 충성을 칭찬하면서 은례(恩禮)가 남달랐으며 한익모(韓翼謩)는 그 이름이 《명의록(明義錄)》에 올라 있었는데 그가 임오년에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그의 충절을 인정하고 죄는 씻어버렸다.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고, 가을에는 정릉(靖陵)선릉(宣陵)을 배알하기 위해 대가가 서빙고(西氷庫) 나루에 머물러 있었는데 밤 사이 강물이 불어 선창이 불완전했으므로 제신들이 수레를 돌릴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선창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나 그를 맡아 관리하는 자가 따로 있고, 거가(車駕)는 이미 만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떴는데 어찌 작은 물줄기 하나에 막혀서 어가를 그냥 돌릴 것인가."

하였다. 여러 장신(將臣)과 호조·공조의 판서, 도신(道臣)·수령(守令)들을 명해 힘을 합하여 과천(果川)·광주(廣州)의 백성들을 독려하게 하였는데 거기에 대가 수행 군병(軍兵)과 좌우의 구경꾼들까지도 모두 앞을 다투어 부역을 한 바람에 날이 저물기 전 역사가 끝나 대가가 강을 건넜다. 능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가가 선창에 이르자 과천·광주의 거민들을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어제 언덕 양편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부역하는 것을 보니 민심을 알 만하다 향적(餉糴)의 첨가분을 특별히 감제해 주라."

하였다.

온릉령(溫陵令) 최창국(崔昌國)이 상소하여 중묘(中廟)에 배향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의 출향(黜享) 문제를 대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그 세 사람의 죄는 숨기기 어려운 죄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야사(野史)로도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들을 아직까지 출향 않은 것을 가지고 궐전(闕典)이요 흠사(欠事)로 삼은 것은 사람 마음은 다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며 공론이 어떻다는 것도 알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선왕조에서도 이르시기를 ‘복위(復位) 이후 세 신하들은 묘정에 배식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두려워하는 마음이야 세 신하에게 있지, 어찌 높이 위에 계시는 성모(聖母)께 무슨 그러한 마음이 있겠는가.’ 하셨듯이 도량 넓고 덕이 후하신 성후(聖后)로서야 어찌 자질구레하게 그따위 일에 마음 쓰시겠는가. 그리고 사왕(嗣王)의 도리로서도 오직 그 중흥(中興)의 업적을 중히 여기고 넓은 도량 후하신 덕을 그대로 본받는 것 그것이 계술(繼述) 아니겠는가. 바다같이 넓고도 깊은 성후의 가르치심이 분명히 기주(記注)로 남아 있으니 그 셋 출향 문제는 그대로 접어두라."

하였다.

겨울에 우통례(右通禮) 우정규(禹禎圭)가 상소로 부인들 다리에 관한 폐단을 말하였으므로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그를 금지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은 결과 제신들 모두가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윤음을 내리기를,

"선왕께서 왕위에 계시던 50년 동안 가장 큰 시정 목표로 삼으신 것이 다섯 가지 있는데 감필(減疋)·준천(濬川)·금주(禁洒)·호혼(互婚)·거체(去髢)이다. 이 가운데 위의 두 건은 벌써 시행되어 수십 년 동안 백성들이 사랑으로 돌봐주신 혜택도 입었고 물에 잠기는 걱정도 면할 수가 있었으나 아래 세 건은 잠시 시행하다가 금방 그만두었는데 그것이 물론 선왕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술은 그것이 제사를 중히 여기는 뜻도 있고 백성들 생명을 중히 여기는 뜻도 있어 금하는 것도 성덕(聖德)이요 터놓은 것도 성덕이므로 감히 다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호혼의 이해(利害)에 이르러서는 감히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다리를 얹는 것으로 이는 꼭 고쳐야 하고 또 고쳐지기도 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 얹는 것을 금하는 일은 그것이 바로 선왕의 뜻을 밝히고 훌륭한 사업을 이어가는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 부녀자들이 다리 얹는 일은 일체 고쳐야 할 것이다. 이 명령이 내려진 이상 오직 시행이 있을 뿐 다시 반복은 없을 것이며 금석(金石)은 부서질지언정 이 금령은 늦춰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조정에 있는 모든 신료(臣僚)들 그 누가 감히 다리 얹는 일을 다시 거론하여 듣기 번거롭게 하겠는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집 가장(家長)이 벌을 받는 것으로 유사가 따로 있어 처리해나갈 것이다."

하고, 사목(事目)을 만들어 팔도에 반포하도록 명했다.

관북(關北)에 기근이 들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이어 북관(北關)의 기민정책을 감독하게 하였다. 의열궁(義烈宮) 묘호를 고쳐 선희(宣禧)라고 하였다.

13년 봄에 영릉(永陵)·순릉(順陵)·공릉(恭陵)을 배알하고 또 장릉(長陵)을 배알한 후 하교하기를,

"조상의 고향조차도 조심하고 존경하는 것인데 하물며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겠는가. 선왕조 신해년에 본릉으로 옮겨 심은 것은 효묘(孝廟)가 손수 소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던 고사를 따른 것으로서 지금 저렇게 푸른데 만약 표를 해두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영종이 손수 심은 잣나무를 구리로 에워싸게 하고서 ‘수식(手植)’ 두 글자를 새겨두었다.

그때 왕은 원침(園寢)을 옮길 뜻을 이미 결정하고 신해년에 있었던 일에 느끼는 바 있어 먼저 장릉(長陵)을 배알한 다음 홍릉(弘陵)·창릉(昌陵)·명릉(明陵)을 두루 배알했고 7월에는 영우원을 옮겨 모실 절차를 정하였다. 왕은 즉위 초부터 원침의 형국이 너무 좁고 자리도 좋지 않다 하여 계절 따라 살피러 올 때마다 근심 걱정에 싸였었고 언젠가는 또 지사(地師)를 명하여 선릉(先陵)의 표해둔 곳과 기호(畿湖)의 여러 산들을 답사하게 하였던 바 지난 기해년에 정해두었던 수원(水原)화산(花山)이 가장 좋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와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대례(大禮)를 서둘러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은 대신(大臣)·각신(閣臣)·예관(禮官)·종친(宗親)·의빈(儀賓) 그리고 문관·음관·무관 2품 이상을 다 불러 그 상소문을 보이자 입을 모아 이르기를,

"도위(都尉)의 상소야말로 종묘 사직을 위한 한도 끝도 없는 대계(大計)이온데 감히 이의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울면서 하교하기를,

"산리(山理)가 있는지 없는지 그야 내가 어떻게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유(先儒)들도 선조의 묘자리가 편하면 자손이 편하다[彼安此安之說]고 한 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그러한 이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겠으나 그러나 그 술인(術人)들 말만 믿고 경솔하게 영역(瑩域)을 옮긴다는 것은 필부·서인으로서도 그래서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일이겠는가. 다만 나에 있어서는 너무나 원통한 한이 수십 년을 두고 지금까지도 밤낮 마음에 맺혀 있어 부모의 장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 흙이 피부에 닿는다는[土親膚] 이 세 글자만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것이다. 도위가 상소문 내에다 5개 조항을 열거했는데 그것은 도위 일개인의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내 뜻이 먼저 정해져 있는데 다행히도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니 옮겨 모시는 일을 서둘러야겠다. 그런데 옮겨 모시자면 수원화산만한 곳이 없다. 신해년의 의궤(儀軌)가 있고 옛분들의 문자에도 이미 정론이 있으니 이제야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수원 그 한 곳을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 오늘까지 기다려주었으니 그것이 어디 사람 힘으로 될 일인가."

하여,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칭하하였다. 이에 대신과 예관 그리고 서운관·장작감의 제신들을 명하여 우선 영우원 봉심부터 하게 했는데 여러 사람들 의견이 도위의 상소 내용과 꼭 들어맞았고 또 새로 지정한 수원 땅도 봉심하게 했는데 모두가 하늘이 만들어둔 길지라고 하여 이에 화산계좌(癸坐)062) 바닥에다 원침을 정하고 계축년 영릉(寧陵) 천장 때와 신해년에 장릉(長陵) 천장 때의 의궤를 참고 모방하여 행하기로 하였다. 원침을 정한 후에는 또 상설(象設) 일을 계획하도록 하면서 총호사(摠護使)에게 하교하기를,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자기 어버이에게까지 절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인의 교훈일진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하여 되도록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보고 싶다."

하고, 병풍석(屛風石)과 와첨(瓦簷) 그리고 상석(裳石)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원침 상설에 있어 무엇이든지 최고를 쓰려고 한 것은 광릉(光陵)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성조(聖祖)의 수교(受敎)도 있는데 만약 이 뒤의 사왕(嗣王)이 오늘의 이것을 보고서 혹시라도 제도에 벗어나는 일을 다시 한다면 그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다."

하였다.

8월 병진일에 구원(舊園)을 배알하고 원침을 열 공사를 계획했으며 경신일에는 신원(新園)의 원호를 ‘현륭(顯隆)’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수원의 부치(府治)를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이전했는데 신원(新園) 역사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행궁(行宮)을 설치했으며 과천(果川)·시흥(始興)에다도 모두 행궁 설치를 하고 사근평(肆覲坪)에는 창사(倉舍)를, 안양참(安養站)에는 발사(撥舍)를, 노량(鷺梁)에다는 진정(鎭亭)을 각각 두어 원침 배알 때 연로(輦路)가 머물 곳을 마련하였다.

임술일 구원에 가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다음 원침을 열게 된 사유를 고하고 을축일에 원침을 열었는데 왕은 그때 면복(緬服)을 입고 수도각(隧道閣)에 있으면서 너무 슬퍼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슴이 치밀어올라 곡도 제대로 못하다가 제신들이 강력하게 청한 뒤에야 비로소 수레를 돌렸다. 어떤 의논하는 자가 본생 부모에게는 예(禮)로 보아 면복이 없는 것이라고 하자, 왕이 듣고는 울면서 이르기를,

"내가 옛날 최마(衰麻)를 입어보지 못했기에 지금 추복(追服)한다는 뜻으로 이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것이니 예로 본들 무슨 큰 잘못이랴."

하였다.

10월 갑인일 구원에 가 현궁(玄宮)을 꺼내고 길흉 간의 의장(儀仗)이 펼쳐진 가운데 찬궁(欑宮)에다 빈소를 꾸몄는데 현궁의 체백을 모시고 나올 때 왕은 허겁지겁 울부짖으면서 걸어서 영순(靈輴) 뒤를 따랐고 빈소가 차려진 뒤에는 엎드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새벽까지도 곡성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하여 성상의 체후가 갈수록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발인 행사 등 모든 일과 신원 역사 등을 지시하는 데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날 왕이 울면서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옛 광중에 그렇게까지 갖가지 재해가 있었는데도 차마 28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현궁을 거기에다 모셔두었으니 나의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나 그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다소라도 풀리려는지. 이제 제사 모시는 절차와 원침 주변에 갖출 것을 다 갖추어서라도 그것으로나마 작은 정성을 표해야겠다."

하면서, 말 따라 눈물이 계속 흘렀던 것이다. 그리고 빈소가 차려진 후 각종 제사와 아침·낮·밤의 궤전(饋奠)에 있어서도 그를 모두 친히 행하고 제물 올리는 일만 대행시켰는데 대체로 양암(亮陰) 의식을 취한 것이고 또 우제(虞祭)가 아니면 목욕하지 않는다는 예(禮)의 뜻도 따른 것이었다.

정사일에 상여가 떠나면서 독진(纛津)으로 강을 건넜는데 그전에는 으레 용주(龍舟)를 써왔으나 그때 처음으로 부교(浮橋)를 이용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발인 뒤를 따를 계획이었으나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강어귀까지만 왔다가 환궁하였고 이튿날 새벽에야 뒤쫓아 출발하여 수원부(水原府)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때 상여는 이미 신원에 도착해 있었다.

기미일 신원에다 현궁을 내리고 그날 밤 원침 주변의 공역(工役) 과정을 친히 살펴본 다음 날이 밝아서 어가를 돌려 과천에서 저녁을 나고 그 이튿날 환궁했는데 빈소를 열었을 때부터 현궁을 내릴 때까지는 하늘이 맑고 겨울 날씨가 봄 같다가 대가가 돌아오자마자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서 날씨가 몹시 추워져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았다.

왕이 친히 지문(誌文)을 쓰고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지문이란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인데 차마 쓰지 못할 것을 쓰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도 말을 했다. 그 이유는 양궁(兩宮)063) 의 사랑과 효성을 밝히고 그리하여 이 소자(小子)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유궁(幽宮)에 간직하여 백세 후의 참고가 되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내탕전(內帑錢) 십만 꿰미를 내려 수원의 치소(治所)를 옮기고 집 짓고 하는 데 쓰도록 했으며, 이어 수원 백성들에게 유시하기를,

"이 화산은 그전부터 영기가 모여진 곳으로서 원침을 정하기로 결의하고 드디어 옮겨 모시는 일을 마쳤으니 이 고을은 바로 나의 묘가 있는 고을이며 너희들은 바로 이 고을 백성들이다. 나는 앞으로 너희들을 내 식구처럼 여기고 먹을 것도 넉넉하게 하고 가산도 풍족하게 해주어 너희들로 하여금 생활의 안정을 누리고 생업을 즐기도록 하여 내가 할 책임을 다하고 내 마음도 여유있게 가지리라. 보통 행차하는 연로가에도 은택이 베풀어지는 것인데 하물며 이 고을 이 백성들이겠느냐. 원침 부근의 면리(面里)와 그곳에서 옮겨간 백성들은 앞으로 십년 동안 복호(復戶)하고, 읍 전체의 면리는 일년 동안 복호할 것이며, 온천 행행의 행차를 두 번씩이나 본 부로(父老)들은 조관(朝官)인 경우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이면 가자(加資)하고, 수원 관내의 유자와 무인에 대하여는 내년 봄 전성(展省) 때 과거시험을 보일 예정이니 너희들도 내가 너희들을 무마하려고 하는 이 충심과 지성을 이해하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원침을 잘 보호하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왕이 원침 옮겨 모시는 일을 하려면서 내사(內司) 관원을 강화도로 보내 인(䄄)을 불러들여 남 모르게 성 안에까지 들어왔었는데 조정 신료들은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자전(慈殿)이 누차에 걸쳐 언교(諺敎)를 내려 제신들을 책망했으므로 대신 이하가 청대를 했는데 만나는 것을 불허하였고 문을 밀치고 들어갔어도 접견을 하지 않았다. 자전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을 그 배소로 다시 압송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대신들이 금부의 당상관과 포도 대장으로 하여금 자전이 시킨 대로 받들어 거행하도록 했는데 왕은 그 즉시 수레를 챙기라 하여 돈화문(敦化門) 밖까지 이르렀다. 이에 재신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수레를 잡고 늘어졌기 때문에 수레가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부득이 대내로 돌아왔다. 그해부터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제신들은 아무도 모르게 을 서울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뜻밖에 대가가 친히 가서 그를 만나보기도 하면서 별영(別營)·태창(太倉) 남영(南營)·북영(北營) 등 여러 곳을 행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군대를 시켜 호위했기 때문에 문을 밀치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뜰에 가서 간하려 해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왕은 원래 도량이 넓고 선(善)이라면 금방 따랐지만 유독 그 일에 있어서만은 일체 권도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늘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그를 두고 이른바 주공(周公)의 과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공의 심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내 마음도 이해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제신들이 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왕은 곧 화를 내고 꾸짖었으며 대성(臺省)에다 금방(禁榜)을 걸어두고 그 문제라면 말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말할 책임이 있는 자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치세(治世)의 일이겠는가. 나도 마지못해 하는 일이다. 시간을 두고 조정 분위기가 다소 안정이 되면 그때는 하나도 숨길 것 없이 문호를 활짝 열 것이니 그동안은 억지로 쟁집하지 말라."

하였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사당에 사액(賜額)을 내려 지덕(至德)이라고 하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에게는 사제(賜祭)를 하였다. 왕은 언제나 국가 초기의 우수했던 일족들을 생각하여 진안 대군(鎭安大君) 무덤 앞에도 비를 세우고, 의안 대군(宜安大君) 묘에도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며, 단종(端宗) 때의 다섯 종신(宗臣)에게는 단(壇)을 쌓고 제사까지 지냈다.

14년 봄에 왕이 병석에 누워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원상회복이 되었는데 이때 제신들이 경하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뜻밖의 재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했다가 병이 들어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으니 자신을 나무라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감히 무슨 하례를 받을 것인가."

하였다.

동북(東北)면과 양서(兩西)에 기근이 들어 유민(流民)들이 서울까지 들어오자 왕은 조묘를 배알하고 연(輦)을 운종가(雲從街)에다 세워두고는 유민들을 불러 위로한 다음 식량과 옷가지를 내려주고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 유민들을 각기 본도로 배를 태워 보내고 도신(道臣)과 수령들에게 죄를 내리도록 하고 이어 각도에 경계를 내려 안집(安集)시키고 무마하는 정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주위 산들을 두루 살펴본 다음 독성 산성(禿城山城)으로 가 경진년064) 온천 행행 때 구경 나왔던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하고는 쌀을 내려주었다.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이어 계성사(啓聖祠)에다 술잔을 올렸는데 그해가 공부자(孔夫子)주부자(朱夫子)가 태어났던 해였기 때문이었다.

황단(皇壇)에 망배(望拜)를 올리고 중국인 아병(牙兵)을 불러 접견한 다음 하교하기를,

"이 나라로 모시고 돌아왔던 중국 사람들에 대해 효종(孝宗)께서는 궁궐 밑에서 붙여 살게 했으며 왕위에 오르신 뒤에는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가구수대로 식량을 공급해주게 하고 뒤이어 곧 훈련원 아병으로 편입시켜 어업(漁業)에 종사하며 살아가게 했었는데 요즘 와서 풍습이 그전만 못하여 심지어는 열무장(閱武場) 안에서 가왜초(假倭哨) 노릇을 하게까지 하고 있으니 중국 천신(薦紳)의 후예들인 그들로서 어떻게 그리도 누추한 일들을 할 것인가. 너무 한심스럽고 애석한 일이다. 오늘이 바로 황단에 망배하는 날이어서 옛 성군에 대한 그리운 감회를 풀래야 풀 길이 없는데 바로잡았으면 좋을 일까지 날짜를 끌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고, 중국인들에 대해 아병이라는 이름 대신에 용호영(龍虎營)의 금려(禁旅), 진무영(鎭撫營)의 의려(義旅)·장려(壯旅)들처럼 한려(漢旅)로 호칭을 고쳤다. 그리고 30명으로 인원수를 정해 제향 때 신탑(神榻)을 받드는 일 또는 제찬 차리고 걷고 하는 일을 맡게 하여 충의(忠義)가 하는 일을 대신하게 하고, 또 황단을 수직하는 관(官)도 중국인 자손들이 맡도록 정하여 한려끼리 돌아가며 하게끔 절목(節目)을 만들어 준행하게 하였다.

의소(懿昭)의 묘를 배알하였다.

6월 정묘일에 사자가 탄생하여 호칭을 원자(元子)로 정하고 백관들 하례를 받았는데, 중외의 신서(臣庶)들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내가 하늘이 내리신 복을 받고 말없이 도우시는 조종(祖宗)의 덕분으로 경술년 계미월 정묘일에 원자가 탄생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성현(聖賢)이 나시던 해이며, 이날은 또 자궁(慈宮)께 수(壽)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게다가 궂은비마저도 활짝 개여 햇살이 그림 같고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에 둘러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원자 울음소리가 품안에서 나오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어깨가 부딪치고 발에 차이면서 뛰어나와 거리를 메워서 있는 그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이라도 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에게는 하늘의 복을 누릴 만한 덕도 인심을 얻을 만한 선정도 없는데 나 한 사람의 기쁨에 대해 하늘이 기뻐해 주시고 사람들이 기뻐해주니 내 장차 무엇으로 하늘에 보답하고 사람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상제가 이 나라를 돌보사 우리에게 조윤(祚胤)을 주셨으니, 오늘로부터 국가 운명이 다시 계속될 것이며, 오늘로부터 조종의 공덕이 다시 유지될 것이며, 주(周)나라본지(本支)의 시065) 도 오늘을 시작으로 읊어질 것이며, 한(漢)나라반석(磐石) 노래066) 도 오늘을 시작으로 퍼질 것이다. 위로 자전과 자궁께서 애타게 바라시던 마음을 풀어드렸고, 아래로 신서(臣庶)들이 우러러 기다리던 숙원을 이루어준데다가 생년 생일까지 성인이 태어나신 해 또는 자궁의 수를 비는 경사스러운 날과 맞아떨어져 우리가 만년 억년 끝이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셈이 되었으니, 난들 어찌 하늘에 보답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에게 보답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여러 번 베풀어 온 은혜를 한번 더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를 담당하고 있는 신(臣)은 재용이 떨어져간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들 마음이 화합하면 하늘 마음도 화합하여 비올 때 비오고 볕날 때 볕나 만물이 풍성하고 시절도 풍년이 드는 법이다. 더구나 경술년이라면 예부터 풍년 든 해가 많지 않았던가."

하고, 이어 대사(大赦)를 했는데 그때 풀려난 자가 모두 1천 1백 54명이었고, 서울 외지 할 것 없이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이상, 사서(士庶)는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모두 가자(加資)를 했는데 그 수가 2만 5천 8백 10명에 달했으며, 1백 세 노인에게는 쌀과 육류를 내리고 각도의 해묵은 적곡 중 병신년 봄 이전의 문부에 마감 정리된 양만큼 모두 줄이거나 면제해주는 일을 단행했으며, 결세(結稅)·어세(漁稅)·염세(鹽稅)·장세(場稅)·사세(寺稅) 등 당연히 조세 항목에 들어있는 것들도 그 수를 감제(減除)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하교하기를,

"자궁의 하교에 ‘내가 그전에는 생일이 돌아와도 반가운 생각이 없었는데 명년부터는 그날이면 음식 차려 잔치도 하고 즐기기도 해야겠다.’ 하셨다. 내가 40년간이나 자궁을 모셔오면서 한 가지도 자궁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하교를 받고 나니 이제 자궁 뵈올 면목이 조금 서는 듯하다."

하였다.

가을에는 주교(舟橋) 제도를 정하였다. 왕이 원침을 옮겨 모시고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전성(展省)할 예정을 세우고 강을 건널 때 용주(龍舟)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주교로 바꿔보도록 묘당(廟堂)에 명하여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상의 마음에 안 맞아서 상이 직접 생각을 짜내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고 그대로 실시했다.

그해에 큰 풍년이 들었는데,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말하는 연신(筵臣)이 있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으로서는 풍년이 들면 그것이 최상의 상서이지 그 외의 다른 상서들은 바랄게 없는 것이다. 더구나 금년에는 큰 경사까지 겹치지 않았는가."

하고, 도형(徒刑)·유형(流刑)에 처해진 자의 처첩(妻妾)이 유배지로 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해 허가해주도록 명했는데 그 역시 그해의 특별 은총이었다.

겨울에 건원릉(健元陵)목릉(穆陵) 원릉(元陵)을 배알했고, 《무예도보(武藝圖譜)》가 완성되었다. 경모궁(景慕宮) 대리 청정 당시 척계광(戚繼光)의 곤봉(棍棒) 등 6기(六技)에다 죽장창(竹長槍) 등 12기(十二技)를 더 보태 그것이 바로 18기(十八技)였는데, 왕이 거기에다 또 기창(騎槍) 등 4기(四技)를 더 늘리고 원도보(原圖譜)와 속도보(續圖譜)를 합쳐 인쇄하여 쓰도록 명했다.

15년 봄에 비변사에 명하여 원침 행행 때의 정례(定例)를 만들게 하고 정례 당상관을 차출하여 매 행행 때마다 그 일을 맡아 거행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각 궁방(宮房)이 도서(圖署)를 남발하여 외읍(外邑)을 야금야금 침탈하는 폐단을 금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임진년 이후로 토지와 토지 사이의 한계가 흐려져 주객(主客)을 구분하기 어려운 틈을 타 호우(豪右)들이 그를 독차지했기 때문에 공전(公田)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고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절수(折受) 제도를 창안했던 것이지만 그로부터 2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토지 사이의 경계가 이미 그어져 있으니 절수라는 명칭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속세(屬稅)의 법과 함께 중간에 다 포기했어야 했는데 절수라는 이름만 붙이면 금방 면세(面稅)를 해왔던 그 제도에 대해 늘 개운찮은 생각이 있어왔던 터다. 지금 궁방들이 도서를 남발하는 그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 나머지야 알 만한 일이 아닌가. 지금 새로 발족한 장영(壯營)이라고 거기에는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도 없고 멋대로 팔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지금부터서는 엄한 단속을 재삼 강조하여 궁방이고 영문(營門)이고 아문(衙門)·조신(朝臣) 할 것 없이 별도로 하사받은 토지라고 하더라도 그 절급(折給)한 공문서에 만약 재가 인장이 찍혀있지 않으면 수령이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그 즉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왕은 항상 단종조 제신들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감회가 있어 어가가 노량(露梁)을 지날 때면 곧 육신사(六臣祠)에다 제물을 내리곤 하였다. 경기도 유생들이 상언(上言)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도 그 충효와 절의가 육신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창절사(彰節祠)에다 추향(追享)할 것을 청해 왔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일전에도 노량을 지나다가 육신사가 나오기에 수레를 멈추고 탄식도 하고 행전(行殿)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어나는 감회를 금할 길이 없어 촛불을 밝히게 하고 유제(侑祭)의 글월을 입으로 부르며 쓰게도 했었다. 육신이야 물론 더없이 훌륭하지만 금성(錦城)·화의 같은 이들도 종실 속에서 그와 같은 절의가 나왔다는 것 그 얼마나 더욱 장한가. 그 두 사람 외에도 사육신(死六臣) 못지않은 이들이 많으니 지금 추배(追配) 때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사실 절의를 장려하고 충절을 포양하는 국가 정령에 부합되는 일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다방면으로 고찰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그때 영월부(寧越府)에 화재가 있어 불탄 민가 사이에 자규루(子規樓) 옛 터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단종이 기거하던 곳이었다. 도신이 그 사실을 알려오자, 왕이 이르기를,

"일이 마치 뭐가 느껴져서 그리된 것 같구나."

하고, 이에 장릉 백성(柏城) 밖에다 단을 쌓아 당시 순의(殉義)한 제신들을 추배하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도록 명했는데, 정단(正壇)에 32인, 별단(別壇)에 1백 98인, 사실이 분명치 않은 자 8인, 연좌당한 자 1백 90인이었고 이어 배식록(配食錄)을 만들었던 것이다.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즉위 초부터 마음에 늘 잊혀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균역(均役)에 관한 이해(利害) 문제와 사노(寺奴)에 관한 폐단인데, 균역에 있어서는 감포(減布)067) 정책이 바로 만세까지 미칠 혜택인데도 그를 맡아 관리하는 신하가 왕의 의도대로 잘 집행을 못했던 것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늘 주장하시기를, 어염세(魚鹽稅)는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선무포(選武布)068) 는 결과적으로 백성을 속이는 일이라고 하셨으므로 나도 선왕의 뒤를 이어 그것을 바로잡고 개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수요를 대체시킬 만한 재원이 없어 당장 논의는 못하고 있어도 내가 장영(壯營)을 신설한 것은 나대로의 뜻이 있어서 한 일로 단시일에 무슨 효과를 기대하기란 사실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사노 문제는 지금 백성들 뼈에 사무치는 폐단으로 노비에 관한 법보다 더한 것이 없어 선두안(宣頭案)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치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쇄관(刷官) 제도는 아주 없애서 폐단이 다소나마 바로잡혀지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각도에서는 찾아내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어 그 병은 고칠 약이 없다. 말하는 자들 중에 혹자는, 금년부터 시작하여 신해년에 제정한 법069) 을 다소 수정해서 쓰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자는 기한이 만료되기를 기다려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또 과거 응시의 길을 열어주어 스스로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혹자는 보충대법(補充隊法)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그 읍에서 신공(身貢)을 받아 균역청(均役廳)으로 하여금 그 대신 값을 주고 사서 쓰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다 미봉책에 불과한 말들이고 일단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그 이름을 없애버리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정해진 명분을 하루아침에 싹 없앨 수도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천(私賤)들이 덩달아 너도나도 본받을 염려도 있다. 그렇다면 사노 폐단은 끝내 바로잡을 수 없는 문제란 말인가."

하고, 이어 널리 각도에 자문을 구하라고 명했으나 결국 정론을 못 찾고 말았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한성부가 집들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고 했다고 아뢰자, 각신(閣臣)과 옥당·사관 등을 오부(五部)·사교(四郊)·팔강(八江) 등지로 나누어 보내 위로하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그 일은 비변사 낭관들이 할 일이로되 특별히 그대들을 보내는 이유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에서 잊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가을에 각도에 명하여 납육(臘肉)을 호서(湖西)의 예대로 경청(京廳)이 공물로 환산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과거에는 경영(京營)에 엽치군(獵稚軍)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옛날의 응사계(鷹師契)이다. 사냥을 나갈 때면 언제나 그 사냥꾼들이 열씩 백씩 무리를 지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마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하는 변고까지 있었으므로 왕은 그 폐단 때문에 꿩사냥을 하지 말고 대신 값으로 바치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는 또 멧돼지나 노루사냥도 꿩사냥과 다를 바 없다 하여 그것 역시 공물로 환산하여 하도록 명했다.

궁인(宮人) 이씨(李氏)에게 수칙(守則)이라는 작첩과 정렬(貞烈)이라는 호를 내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을 표하여 ‘수칙 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고 하였다. 이씨는 그전에 경모궁(景慕宮)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여인으로서 늙어 머리가 희도록 초막집을 그대로 지키며 사람들과도 접촉을 하지 않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느끼는 바 있어 표이(表異)의 은전을 특별히 베풀었던 것이다.

사릉(思陵)을 배알하고 어진(御眞)을 베껴왔는데 선왕조 때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베끼던 고사대로 한 것으로서 한 장은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경모궁망묘루(望廟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현륭원 재실(齋室)에다 봉안하였으니, 아침 저녁 정성(定省)의 뜻을 담은 것이다. 뒤에 화령전(華寧殿)에다 봉안하고는 각신(閣臣)에게 이르기를,

"열성조가 다 휘호(徽號)가 있는데 영릉(英陵)효묘(孝廟) 두 조(朝)만은 휘호를 받지 않으셨다. 내 어찌 감히 두 조의 성절(盛節)을 뒤따를 수 있겠는가마는 신축년 표제(標題) 때부터 제신들이 많은 말들을 했었는데 이제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리고 또 연월(年月)만으로 표제한 일은 또 열성조에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하였다.

겨울에 호남의 도신(道臣)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자기 아비가 죽었는데 제사도 모시지 않고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렸다고 아뢰었다. 그 당시 일종의 사도(邪徒)들이 서양(西洋)의 야소(耶蘇) 교리에 젖어들어 연경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여 저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익히고 하였는데, 그는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홀대하고 임금도 어버이도 다 버리고 윤기(倫紀)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명분(名分)이 뒤범벅된 교리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저들끼리 당여(黨與)를 결성하는 등 경기 지역과 양호(兩湖) 사이에서 나날이 번성 일로에 있었다. 그중의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권일신(權日身) 등이 더욱 두드러진 자들이었으며 최필공(崔必恭)·이존창(李存昌)도 밑바닥 층에서는 가장 깊이 빠져있는 자들이었다. 유사가 그들을 잡아두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형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덕으로 인도함만 못한 것이다. 내 장차 그 서적은 불태워버리고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만들겠다."

하고는, 서울과 외지를 막론하고 집에 서양 서적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모두 관에 자수하도록 명하여 책은 모아 불태우고 가환·약용·승훈 등은 견책하여 저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게 했으며 일신필공은 형조로 송치하고 존창은 호옥(湖獄)에다 가두는 등 형을 가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여 되도록 감화(感化)를 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그 도계(道啓)를 보고나서는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패역 무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충·상연에게 모두 대벽(大辟)을 적용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양의 강한 기운이 쇠퇴하면 음의 재앙이 고개를 들듯이 사설(邪說)이 퍼지는 원인은 정학(正學)이 밝지 않아서인 것이다."

하고, 묘당(廟堂)과 각도에 명하여 경(經)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들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또 명(明)나라 말 청(淸)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패관 소설[稗官小品] 종류를 단속하고, 연경에 가서 서적 구입을 못하도록 금법을 거듭 엄히 했다. 그리고 영남 선비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은 것은 바로 선정(先正)들의 유풍(遺風) 때문이라 하여 옥산(玉山)·도산(陶山) 등 서원(書院)에 제를 내리기도 하였다.

《악통(樂通)》이 완성되었다. 왕은 주자가 인정한 채원정(蔡元定)《율려신서(律呂新書)》가 미처 관현(管絃)에 올려지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그를 다시 손질해서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임인년 봄에 숙종조(肅宗朝) 고사를 본따 무예(武藝) 출신 및 일찍이 영의 교위를 지냈던 자 30명을 선발하여 번(番)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행랑채에 숙직하게 하고, 을사년에 와서 그를 장용위(壯勇衛)라 칭했으며, 또 척계광(戚繼光)의 남군(南軍) 제도를 모방하여 5개 사(司)에 25초(哨)를 두고 그해에 금려(禁旅)의 1번 50명을 감하여 장용위로 옮겼다. 그리고 액외 내금위(額外內禁衛) 규정을 준용하여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를 두고 10명은 사부(士夫)로 충원했으며, 또 선기대(善騎隊) 3초를 두어 훈련 도감의 경기 지역 승호군(陞戶軍)을 그것에 이속시켰다. 기마병·보병 합하여 경향(京鄕)의 군대가 3천 4백 50명이었는데 병조의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 규정을 준용하여 병방을 두고 군무(軍務)를 맡아보게 하고는 그를 이름하여 장용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백성으로부터 많은 조세를 거두어들이던 내수사 장토(庄土)를 없애고 양서(兩西)에는 둔전(屯田)을 두었으며 내외를 막론하고 필요 이상의 경비와 필요 이상의 인원을 줄이고 내탕의 돈을 출자하여 곡식을 각도에다 쌓아두고 병영의 용도에 쓰도록 했다. 그리고 또 제조(提調)를 두어 일찍이 호혜당(戶惠堂)070) 을 지낸 사람을 골라 임명하였다.

16년 1월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2월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했다. 규장각(奎章閣)에 대제학을 두어 문형(文衡)이나 권점을 받은 사람으로서 왕지(王旨)를 기다려 의망하고, 내각 시임제학(提學)이 재상 제수를 받으면 자연 올라가 대제학이 되고, 과거 직각(直閣)을 지낸 자는 사인(舍人), 전관(銓官) 자리가 나는대로 곧바로 의망하고, 과거 대교(待敎)를 지낸 자는 남상(南床)071) , 궁함(宮銜) 자리에 곧바로 의망하도록 격식을 정했다.

여름에 윤구종(尹九宗)을 친국하였다. 구종혜릉(惠陵)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던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내가 선왕(先王)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 비록 재일(齋日)을 당했지만 친국을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가 공초를 바쳤는데 진술 내용이 패역 무도하여 지레 죽고 말았었다.

영남 유생 이우(李瑀) 등이 막중한 일임을 빙자하여 의리(義理)를 구현한다는 구실로 임오년 일을 상소로 진술하였다. 왕은 그들을 불러 경(經)과 권(權)의 한계에 관해 개유하고 연본(筵本)을 가지고 돌아가 그 지방 인사들에게도 알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 상소 이후로 장주(章奏)가 쉴새없이 올라오고 관학 유생들까지도 장주를 올려 기어이 관철하려고 하였으므로 왕이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준엄한 하교를 내려 제신들이 합문 밖에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그 어느해 일에 대해서는 감히 한 번도 분명하고 속시원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과연 원수를 숨겨두고 원한을 잊어서 한 일이겠는가? 옛날 선왕께서 갑신년 2월 20일에 대신 이하 제신들을 진전(眞殿) 문 밖에다 부르시고 어필로 손수 쓰신 구주 문자(口奏文字)072) 를 반포하시며 이르기를 ‘만약 아무해의 일을 들먹이는 자가 있으면 구(耉)·휘(輝)·경(鏡)·몽(夢)073) 에게 적용했던 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해야지만 네가 드러내지 못한 죽은 네 아비의 뜻을 밝힐 수 있을 것이고, 원통하고 애석한 내 마음도 설명할 길이 있을 것이며, 세신(世臣)들도 너의 본심과 아울러 네 아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대신 이하 제신들을 또 재전(齋殿)으로 불러 종통(宗統)을 바로잡는 일에 대한 윤음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 당시 사실들은 모두 내가 병신년에 상소한 이후 세초(洗草)해 버렸지만 윤음과 진전에 올렸던 구주 문자(口奏文字)는 여전히 사고(史庫)와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그후 전석(前席)에서 다짐을 했었는데 만약 선왕이 승하하신 후 이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여 갑신년에 했던 대답을 모두 번복해버리면 그게 어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 해야 하는 도리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당시 하교 시의 ‘통석(慟惜)’ 그 두 글자는 바로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니 내 그를 폐부에 새겨두었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제하려 해도 억제할 수 없는 것이 그 슬픔이요 막아버리려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감정이라서 부자간 천륜으로 볼 때 그 원수가 저기 있어 앉으나 서나 눈에 걸리었다. 그리하여 우선 임시 권도로 을미년 주토(誅討) 때 내가 직접 그 일을 대신 맡았는데 이는 꼭 선왕이 자리에 계실 때 하려고 해서였던 것이고, 그 이듬해 병신년 봄에는 내가 대리 청정을 하면서 눈물 어린 진정소를 올려 천지간 망극한 은총을 받고 차마 볼 수 없는 당시 기록들을 모두 세초(洗草)해 버리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성상께서는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사자대(思子臺)·망자궁(望子宮)074) 보다 훨씬 더 낫고 나도 이제 지하에 가면 볼 낯이 있겠다.’ 하시고,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하례를 올리도록 했으며 호(號)를 주신다는 윤음과 함께 어제의 유서(諭書)와 어필로 된 은인(銀印)을 내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묘(墓)를 전성하도록 명하셨는데 이상이 대체적인 선왕의 본뜻이었던 것이다.

병신·정유 이후로 자주 일어난 역옥(逆獄)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해 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지만 나의 집념은 바로 겉으로는 정사에서 형적(形迹)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는 내 할 도리를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다스릴 자는 다스리고 하여 위로 성은(聖恩)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아래로 내 이마에 땀이나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다만 조정 신하들은 북면(北面)하고 나를 섬겨 발걸음이 뜸하지 않아서 그 이면(裏面)을 아는 자들인데, 이에 대하여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나에게 극진히 처분하지 않아서 을해년 이전의 주토와 같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난적(亂賊)·역신(逆臣)이 아니겠는가. 30년 한 서린 마음으로 어떻게 차마 그 왕언(王言)을 말하며 그 장주(章奏)를 볼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사실은 점점 묻혀져 결국 차마 들출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후생들이 그 막중한 사실을 전혀 모르게 될 듯하여 영남 유생들이 왔을 때 불러서 접견하고 비답도 내렸는데 그것은 우선 그들을 효유(曉諭)해야겠다는 급급한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을 짐작하는 자는 그 비답을 보고 틀림없이 슬피 울었을 것이고 우매한 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신자(臣子)들이 어찌 차마 그 사건을 놓고 그것을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 협잡질을 할 계기로 삼기 위해 은연중 임금이 원수를 숨겨주고 원한을 잊고 있는 것처럼 책임을 위에다 돌리면서 감히 그들을 징토(懲討)한다는 데 가탁하여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다반사처럼 지껄이고 다닐 것인가. 그렇게 되면 조선 천하에 이른바 임금이란 자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밝히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경들은 그 방법을 생각해보라."

하여, 그 하교를 계기로 중외가 모두 왕의 의중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하던 환단(圜壇)이다. 이 땅에 이 나라를 단군(檀君)이 처음 세우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무더기를 쌓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국(大國)으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지 않았어도 참람된 데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원래 혐의가 있는 일이면 그를 분명히 하는 데 엄했기 때문에 광묘(光廟) 이후로 ‘환단’을 고쳐 ‘남단’으로 불러왔다. 대체로 군·국·주·현(郡國州縣)이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 제 올리는 곳으로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촐하게 모시는 정성이야 환단이거나 남단이거나 그 이름이 다르다 하여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문헌상으로 빠져 있고 담당자들은 그들대로 인습에만 젖어왔기에 현재 행하고 있는 의식은 도리어 채소만으로 간단히 차리는 농잠(農蠶) 제사만도 못한 실정이니 그를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신과 논의하여 올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에 광릉(光陵)을 배알하고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사서인은 나이 80세로서 지난 병진년과 을해년 선왕의 행행 광경을 구경하고 지금의 행행까지 본 자에게는 모두 한 자급씩 더해주고 나이 1백 세가 된 자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얹어주었으며 백성들에게는 그해의 향곡(餉穀)과 적곡(糴穀)에 있어 모비(耗費)분을 특별히 견감하였다.

17년 정월 초하룻날 선원전(璿源殿)에 잔을 올렸다. 왕은 즉위한 이후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 배알을 해왔었는데, 그날은 영종의 나이 만 1백 세가 되는 날이라 하여 대신(大臣)·경재(卿宰)·시종(侍從) 모두 반열에 참여하도록 명하고 예를 마친 후에는 지난 병신년 이전에 본 품계에 있었던 아경(亞卿)·하대부(下大夫)에겐 모두 한 급씩 가자하고 경외(京外)의 백세 노인들에게는 가자와 함께 쌀과 비단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초하룻날 아침에 묘궁(廟宮) 배알을 하고 나니 나도 선왕과 똑같은 마음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행여 먹을 것을 대줄까 바라는 저 삼방(三方)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 굶주려 구렁을 메우지나 않았는지? 밤낮으로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때라고 간절하지 않겠는가마는 올해 배알 끝에 그날의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한 바 있다."

하고, 홍화문(弘化門)에다 연(輦)을 멈추고 수계(隨計)의 관리를 불러 접견했는데 하나는 그 문이 바로 선왕조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던 문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탕에서 내린 진휼한 물자를 그들로 하여금 먼저 돌아가 장리에게 반포하게 하고자 함에서였다. 그리고 이어 내탕의 돈과 후추를 삼남(三南)으로 나누어 보내 진휼 물자에 보태게 하였다.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전의 명인 석학들이 모두 내수사(內需司)를 없애야 한다고 말들 했는데 실지로 살펴보면 우리 나라 내수사는 당나라 때 덕종(德宗)현종(玄宗)이 사용(私用)하던 경림고(瓊林庫)·대영고(大盈庫)와는 다르다. 궁중의 1년 치 씀씀이가 각기 일정한 수량이 정해져 있는데 지금 만약 내수사를 없애고 탁지부에다 맡긴다면 탁지부로서는 어떻게 운영해나갈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되도록 절약하여 1년 쓰고 난 나머지를 다른 창고 하나에다 별도로 저장하고 그 이름을 보민고(保民庫)라 하여 수재나 한해에 대비하게 하고 있는데 전후로 나간 진휼 물자도 다 거기에서 나간 것이다."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수원부(水原府)화성(華城)이라 이름했으며, 부사(府使)를 승격시켜 유수 겸 장용 외사(留守兼壯勇外使)라고 하고,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의 병방(兵房)을 장용사(壯勇使)로 고치고, 문첩(文牒)에는 대장(大將)이라는 칭호를 써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칭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이라고 하듯 했으며, 또 도제조를 두어 마치 경리영(經理營) 도제조를 삼공(三公)이 으레 겸임하듯 하는 식으로 했다. 그리고 호위 대장(扈衛大將)도 같은 청(廳)으로 소속시켜서 내영 외영 제도를 비로소 완비하였다.

3월에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태어났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시임·원임의 각신(閣臣)과 각신의 자제들 그리고 승지·사관 등을 불러 39명 수를 채웠는데, 그것은 그해가 계축년이고 그달이 모춘(暮春)이었기 때문에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신들을 명해 내원의 볼 만한 곳을 마음껏 구경하게 하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내려 각기 흐르는 물가에 와 마시고 읊게 했다가 밤이 되어서야 파했는데 그를 두고, 태평성대의 성대한 일이었다고 한때 전송하였었다.

그때는 경사가 거듭 겹치고 조야(朝野)가 안정된 시기였다. 왕은 화기를 불러들이고 국가 운명을 장구히 하자면 백성들의 답답증을 풀어주고 막혀있는 것을 터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에 양전(兩銓)에 명령을 내려 일대 회탕(恢蕩) 정책을 펴도록 하고 혹은 중비(中批)를 내리기도 하였으므로 가끔은 몇 10년씩 묵혀 있다가 비로소 갓을 털고 일어선 자도 있었다.

가을에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내 그 아무해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차마 말못할 것들이기에 감히 말하지도 않지마는 금등(金縢) 한 가지 일만은 경들에게 말 한마디 해두고 싶었는데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선왕께서 언젠가 휘령전(徽寧殿)에 납시어 사관(史官)도 물리치고 어서(御書)로 된 문자 하나를 신위(神位) 밑 요 속에다 넣어두셨는데 병신년에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세상에 알릴 때 비로소 꺼내보았었다. 경들도 한번 보라."

하고는, 금등 등본(謄本) 두 구절을 꺼내보였는데, 영조경모궁(景慕宮)의 죽음을 뒤늦게 슬퍼하여 쓴 어제였었다. 이에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지역 내의 여러 능들도 두루 배알했다.

겨울에 대신 이하 제신들이 자전(慈殿)과 자궁(慈宮) 그리고 경모궁에 대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 또 왕에게도 존호 올릴 것을 청하자, 자궁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내게도 존호를 올리겠다고 하니 경들이 임방(林放)만 못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존호 올리는 제도가 비록 삼대(三代) 이후에 비롯된 제도이나 그동안 명철한 임금들이 모두 그 일을 행하고 그 제도를 더 다듬고 손질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위로 하늘의 사랑에 보답하고 아래로 뭇 백성들 뜻을 따라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현상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전장(典章)이 있어 나도 일찍이 선왕께 정성을 다해 빌고 간청하자 그 겸손하신 선왕께서도 애써 당신 뜻을 굽히고 따라주신 일이 있었다. 나라고 어찌 감히 유별나게 많은 사람들 뜻을 어기고 물리치기야 하겠는가마는 내 말을 듣고도 내 뜻을 거스른다면 그는 결코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차마 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예(禮)가 원래 인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의리에 의하여 예가 제재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숭봉(崇奉)은 내가 말하는 숭봉과는 다르다. 의리를 공연히 경전에 기록해 놓기만 하는 것은 감히 하지도 않을 뿐더러 차마 할 수도 없다. 천년 이후에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체득하여 나로 하여금 내 초지(初志)를 이루게 하리라. 나의 초지라면 오직 ‘장순(將順)’ 그 두 글자뿐이다."

하였다.

18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인정전에 나아가 자전의 오순(五旬)과 자궁의 육순(六順)을 축하하고 이어 조관은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 자와 80이 못 되었어도 부부가 해로하고 있는 자는 모두 1계(階)씩 올려주도록 명했는데 도합 7만 5천 1백 45명이나 되었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돌아와 또 경모궁을 배알했는데, 바로 장헌 세자(莊獻世子) 탄신이었다. 그해 그날은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궁(宮)과 원(園)을 연거푸 배알하고 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했는데 제신들의 강력한 청에 의하여 그 이튿날에야 비로소 환궁했다.

삼경(三經)·사서(四書)를 새로 인쇄하여 관각(館閣)·사고(史庫)·태학(太學)에 각기 나누어 두게 하고 또 주합루(宙合樓)에다도 두도록 명하고는 각신에게 이르기를,

"잘 지키도록 하라. 옛날 영릉(寧陵)에다는 《심경(心經)》을 순장했었고 병신년 산릉(山陵) 때는 《소학(小學)》을 순장 했었는데 나도 장차 그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5월에 재거(齋居)하면서 윤음을 내리기를,

"탕(湯)은 간하는 말이면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덕이 있었고, 순(舜)은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넓은 도량이 있어 천고를 두고 헤아려봐도 오직 그 두 성인(聖人)이 있었을 뿐이다. 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몇 번이고 자꾸 하시던 그 말씀이 꼭 어젯밤에 들은 듯하다. 늘 말씀하시기를 ‘내가 허물이 있거나 없거나 남들이 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내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들추어내더라도 나는 그를 개의치 않겠다.’ 하고는 그 말을 대전 벽에다 써 걸어두시고 문호를 활짝 열으셨으니 그 도량의 큼이야말로 바로 하늘과 땅 그것이었다. 그런데 조정 신료들은 나삼(羅蔘)에 관한 그 한 가지만을 가지고 그리도 크고 넓으신 도량에 대해 찬양을 하려고 하였으니 그는 표주박 하나로 바다를 헤아리려는 격이다.

아, 경진·신사 두 해에 있었던 일들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진신(縉紳)·장보(章甫)들이 바르고 극한적인 간언을 많이 하였으나 한 사람에게도 죄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비답까지 하셨다. 경연 석상에서 무언가 아뢴 자가 있었을 때도 이르시기를 ‘남의 신하라면 당연히 서지수(徐志修) 같이 청대하여 면전에서 사실을 아뢰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고 그에게 전석(田錫)이 초고 불태운 것075) 은 잘못이며 주창(周昌)처럼 대들면서 대답하기는076) 어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가 최후에 한 말 한마디는 듣기 매우 거북한 망언이었지만 내 그에게 죄를 내리지 않았다.’ 하였다. 그때 그 연신(筵臣)은 황공한 마음에 땀을 흘리며 물러가 그 사실을 그의 가승(家乘)에다 기록해 두었는데 그후 선왕은 또 곧 구언(求言)의 성지를 내려 그로 하여금 할 말을 다 하도록 하였다.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그것을 띠에다 쓰고 폐부에 새겨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재작년에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는 상소는 그 내용이 공적으로 공분(公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적으로 개인 감정을 풀어보자는 것이었는가? 거기에 만약 조금이라도 사(私)가 끼어 있었다면 그 짓을 차마 하는 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깨끗이 맑은 하늘에 무지개를 드리우려고 하는 것은 그게 무슨 심통이란 말인가. 재계하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고 앉아서 아침이 되도록까지 촛불을 밝히고 눈물을 섞어가며 여기에 내 속마음을 쏟아놓았는데 행여 이 기록이 아름다운 성덕을 드러내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 소자로서도 장차 지하에 돌아가 뵈올 면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찌 내년 봄 옥책(玉冊)에다 빛나는 호를 올릴 때의 의문(儀文)에다 비할 것인가."

하였다.

오래 가물어 기우제를 올리고 하교하기를,

"아래로 정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항양(恒暘)077) 의 허물이 되어 그 징험이 가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자에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는 것을 역사에는 없던 일이라고 하지 말라. 극에 도달하면 다시 원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진대 무릇 논사(論思)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내 마음의 선한 단서를 확충시키도록 하라. 말이란 꼭 적절해야지만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고 ‘몽둥이 하나로 치면 한 줄기 몽둥이 자국이 나고, 손바닥으로 후려치면 손바닥만큼 붉은 자국이 남는다.’078) .’ 하는 구절을 삼사와 제신이 듣게 외워주었다.

가을에는 왕이 앓고 있는 부스럼이 오래도록 낫지 않고 게다가 또 가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왕은 걱정이 되어 대신, 육경과 비변사 제신들을 묘당에 모이게 하여 가뭄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게 했으며 중외에 명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했고, 또 삼남(三南) 도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숨어 있는 인재 발굴과 함께 억울한 사정이 있는가도 살피게 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다. 《인서록(人瑞錄)》이 만들어졌다. 왕이 그해에 큰 경사가 있었다 하여 자전과 자궁에게 하례를 올리고 중외에 많은 은총을 내린 다음 육경(六卿) 이상의 기로신을 불러 그 의의와 범례를 지정해주고는 그에 따라 경외의 은총 입은 노인들을 차례로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라고 하고 이름을 《인서록》이라 하여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인쇄 반포하게 하였다.

겨울에는 화성(華城)의 성 쌓던 일을 정지시켰다. 계축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그때 와서 6도에 기근이 들자 왕은 누차 공사를 정지시키려 했으나 제신들 주장은, 성 쌓는 일이 재정을 축내는 일도 아니고 백성을 병들게 만드는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성을 쌓는 것도 소중함을 위해서이며 정지시키는 것도 역시 소중함을 위해서인 것이다. 지금 삼남과 경기 지역이 가을을 맞고서도 믿고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고 서북 지방 역시 어려운 실정이어서 자전과 자궁에 올리던 것들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성 쌓는 일이 아무리 중하다지만 같은 중한 것이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것은 정지하면서 저것은 정지를 안 할 것인가. 한 나라의 재화(財貨)는 일정한 양이 있어서 농사지을 백성들의 해를 이어갈 양식 아니면 기민을 먹일 호구할 거리밖에 안 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너희들 농사와 기민 먹이는 일 다 놔두고 우리 성 쌓는 일에만 종사하라.’ 한다면 그것이 사리에 닿을 일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흉년에 토목 공사를 하면 오히려 주휼(賙恤)까지 겸하는 일이 된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에서 했던 일과 범희문(范希文)절서(浙西)에서 한 일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개 군이나 일개 진(鎭)에서 시행할 정책일 뿐이지 나야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나라 전체의 백성이 모두 내 적자(赤子)들인데 그 수많은 부황난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도 장사도 말고 오직 성 하나 쌓는 곳에 붙어서 일하고 먹으라고 한다면 살린대야 몇 사람이나 살리겠는가. 지금 해야 할 일로서는 모든 정신을 구황 정책 그 한 일에만 집중시켜야 한다."

하고, 이어 화성부에 윤음을 내려 그 역사를 정지하게 하였다가 을묘년에 가서야 성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각 지방에 큰 기근이 들고 삼남(三南)은 더했는데 왕은 각신과 승지들을 나누어 보내 위로의 윤음을 내리고 배에다 곡식을 싣고 가 탐라(耽羅) 백성들을 먹이게 하였다. 왕은 탐라가 먼 바다 속에 있는 땅이라 하여 더욱 먼 곳을 회유하는 생각으로 흉년 소식만 들으면 언제나 다른 지방에 우선해서 진휼하였고 배가 갈 때는 반드시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해신(海神)에 제사하도록 하였다.

《주서백선(朱書百選)》이 만들어졌다. 왕이 주자서(朱子書)를 가장 좋아하여 《어류(語類)》《대전(大全)》에서 뽑아 《선통(選統)》·《회영(會英)》·《회선(會選)》 등의 책을 만들고 또 서독(書牘)에서 뽑아 묶어 《백선(百選)》을 만들어 활자로 간행하였다.

19년 봄에 정순 대비·경모궁·혜경궁에 존호를 더 올리고 즉위 20년의 하례를 받았다. 문관은 시종(侍從) 이상, 무관은 곤수(閫帥) 이상, 음관은 준직(準職)이상으로 나이 61세인 사람에게는 모두 1급씩 가자(加資)했는데 그해의 은총을 나누기 위한 뜻인 동시에 작상(爵賞)이 너무 함부로 내려지는 것도 고려해서였다. 자전·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예를 행하면서 곤전(坤殿)도 함께 참여했는데 그날이 바로 장헌 세자의 환갑이었기 때문이다. 윤2월에는 자궁을 모시고 화성(華城)에 행행하여 현륭원을 배알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화성에 들려 성 내의 군사 훈련과 야간 훈련을 사열하고 봉수당(奉壽堂)에 나아가 자궁께 찬(饌)을 올리면서 칠작례(七爵禮)를 행하고 이어 신풍루(新豊樓)로 옮겨 본부(本府)의 사민(四民)에게는 쌀을 내리고 기민들에겐 죽을 내렸다. 그리고 낙남헌(洛南軒)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뭇 노인들이 잔을 올려 수를 빌었다. 그리고 원(園) 밑에 사는 백성들은 복호 2년, 화성 백성들은 복호 1년씩을 명하였다. 능원(陵園) 행행 때면 탁지부 신하가 정리사(整理使)가 되는 것이 옛날부터의 조례였는데 그 해부터는 원에 행행 때 안팎으로 정리사를 두어 모든 사무를 맡아 처리하게 하고 정리하고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곡식을 사서 3백 주현(州縣)에다 나누어 보관해 두고 이름하여 정리곡(整理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거두거나 나누어주는 데는 일정한 규정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또 제주도의 진휼할 물자로 보태기도 하여 사랑의 은총이 미치는 범위를 넓히기도 하였다. 화성의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교궁(校宮)에다 경서(經書)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정동준(鄭東浚)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동준이 시종관으로 있던 시절부터 상의 후한 사랑을 받아 벼슬이 이경(貳卿)에까지 이르렀는데 왕명을 사칭하고 성상을 속이면서 그의 마음과 하는 짓이 괴상 망측하였다. 그리하여 언자(言者)가, 그의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청했었는데 동준은 그후 곧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참(朝參) 때 그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불태워버리라고 명하고 이어 일대 출척(黜陟)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어필로 된 성적비(聖蹟碑)를 정주(定州)달천(㺚川)에다 세웠는데 태조(太祖)가 개선한 자리이고 선묘(宣廟)가 주필(駐蹕)했던 곳이다.

선희궁(宣禧宮)을 배알하고 세심대(洗心臺)에 나아가 제신들에게 술을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해마다 이때면 내가 꼭 이 대에 오는 것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정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옛 을묘년 나라 경사 때 고 중신 박문수(朴文秀)가 여러 경재(卿宰)들과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쁨과 축의를 표했었는데 그때 영성군(靈城君)의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는 운대가 바로 이곳이다. 금년 역시 천재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이니 경들도 전인(前人)들이 했던 것처럼 이 태평 연월을 한번 빛나게 장식해보게나."

하였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고 고기 낚고 하다가 존덕정(尊德亭)으로 가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옛부터 내원 놀이에는 척리(戚里)가 아니고는 참여하지 못했었다. 외신(外臣)으로서 내연(內宴)에 참여한다는 것은 각별한 대우인 것이다. 옛날 인조가 계해년 반정 이후로 훈신(勳臣)들을 융숭히 대우하여 이러한 잔치에서 모시고 놀게 하면서 마치 한식구처럼 대했었는데, 효종은 즉위 초부터 훈귀(勳貴)의 폐단을 완전히 없애고 사림(士林)들을 초대해 두고는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여 마치 어수(魚水)요 천향(天香)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등대(登對)했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또 조정에 분열이 생겨 숙종조부터 선왕조까지는 부득이 또 척리들과 밀착하지 않을 수 없어 금중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 아니었는데 그것은 시기와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현자를 가까이하고 척리는 멀리해야 하겠다는 것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 맨 먼저 내각(內閣)부터 세웠었는데 그것은 문치(文治)를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아침 저녁 좌우에다 두고 그들로부터 계옥(啓沃) 헌납(獻納)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좋은 벼슬을 주어 기반을 굳혀주고 남다른 예로 대우도 하며 심지어는 잔치에서 꽃구경 낚시놀이까지도 꼭 내각 신료들과 함께 해왔었다. 아울러 그들의 자질(子姪) 형제까지도 모두 자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면서 번거로운 예는 생략하고 오직 사랑으로 대해 자리 전체가 즐거움에 싸여 해마다 거의 상례로 되풀이 해왔으니 임금 신하 사이의 간격없는 만남이라든지 그 영광 그 은총이야말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하로서 그러한 기회를 얻기란 극히 어려웠으리라고 할 만도 한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근일에 와서 귀근(貴近)의 폐단이 극에 이르고 말았다. 전진이 있으면 후퇴가 있고 이완이 있으면 긴장이 있는 것이 이치이니 이 뒤를 이어 척리가 슬슬 나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사대부(士大夫)를 친근히 하는 것이 바로 나의 타고난 성품이고 또 마음써 해온 터다. 몇 십 년 그래오던 것을 지금 중도에 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자리에 오른 제신들은 모름지기 각자 자신을 깨우치는 마음으로 오늘의 내 이 말을 잊지 말라."

하였다.

어제로 된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온양(溫陽)의 행궁(行宮)에다 세웠는데 바로 경모궁(景慕宮)이 경진년 온천에 갔을 때 홰나무 세 그루를 직접 심어둔 곳이었다.

여름에 환조 대왕(桓祖大王)의혜 왕후(懿惠王后)영흥(永興) 본궁(本宮)에다 올려 모셨다. 그보다 앞서 그해가 환조(桓祖)의 탄생 팔회갑(八回甲)이라 하여 대신을 함흥(咸興)으로 보내 본궁에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했는데 그를 계기로 함흥 유생들이 소를 올려, 영흥 본궁에 옛 전사청(典祀廳) 자리가 있으므로 당연히 제향(躋享)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이어 이문원(摛文院)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가 정례(情禮)에 맞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대신과 예관을 보내 고례(古禮)에 따라 본궁에다 위판(位版)을 만들고 길일(吉日)을 정해 올려 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풍패루(豊沛樓)에다 양로연(養老宴)을 베풀도록 명했다.

두 본궁의 의식(儀式)이 만들어졌다. 건국 초기에 경도(京都)에는 계성전(啓聖殿)이 있고 함흥·영흥에는 본궁이 있었는데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위판을 모셔둔 곳으로서 원묘(原廟) 제도를 써왔다. 그리고 종전에는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전사관을 별도로 차출하여 제사를 모시게 했던 것인데 예조 판서와 봉상시가 관리를 제대로 못하여 옛법을 어기고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답습해 온 것이 많았으므로 왕이 그 의식 절차를 바로잡도록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술독 술잔 등도 새것으로 바꾸고 해마다 의폐(衣幣) 향축(香祝)을 봉하여 반드시 하루 전부터 재계하고 직접 그 일에 임하게 해왔던 것인데 환조를 올려 모신 예를 마치고는 각신(閣臣)을 명하여 그 의식을 만들어 인쇄하여 본궁에다 두도록 하였다.

6월 정유일에 자궁에 찬을 올리고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61세인 자에게는 궁전 뜰에서 술을 내렸으며,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고, 각도에 윤음을 내려 향음주례(鄕飮洒禮)를 실시하라 하였다.

가을에는 조적(糶糴)을 문제로 책문(策問)을 내어 태학생과 여러 음관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대책을 쓰게 하였다. 연신에게 말하기를,

"조적은 바로 사창(社倉) 제도의 후신으로서 모곡(耗穀)이래야 쥐가 먹고 새가 먹어 축난 것에 불과한데 도신(道臣) 수령(守令)이 그 모곡을 받아 관용(官用)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벌써 정당한 도리가 아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그걸 가져다 쓰면서 마치 정당한 법에 의한 것처럼 한다면 그 얼마나 구차한 일이겠는가. 더더구나 분류(分留)079) 가 갈수록 정확하지 못하여 산간 연해 지방이 모두 병이 들고 경외의 각 아문에는 이것저것 문서만 많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이용하여 농간을 뿌리니 피해받는 쪽은 백성들인 것이다. 지금 그것을 바로잡자면 우선 진분(盡分)이라는 이름부터 없애야 하는데 그리 하자면 걸리는 데가 많아 결행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겨울에 선희묘의소묘를 배알했다. 그해에는 경모궁의 오향제(五享祭)와 속절(俗節) 삭망(朔望) 때의 제사를 모두 친히 행했는데 어떤 때는 며칠씩 그냥 재전(齋殿)에 머물기도 하였으니, 그해가 회갑(回甲) 해였기 때문이었다.

수어 경청(守禦京廳)을 없애고 수어사(守禦使)는 남한산성을 진무하면서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겸하게 하였다.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를 편찬하였다. 왕은 충절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하는 길이라면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유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 대해서는 그를 최고로 여겨 그들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편집하고 충무공《전서(全書)》, 충민공《실기(實紀)》라 하여 인행(印行)하였다.

사옹원이 오지그릇을 정교하고 화사하게 굽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0년 봄에 사단(社壇)에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내탕의 돈 일만 꿰미를 내려 호남백(湖南伯)으로 하여금 곡식을 사 제주도 기민들을 구제하도록 명했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황단(皇壇)을 배알하고 대향(大享) 때의 희생과 기물을 살펴본 다음 하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의하면 정확(鼎鑊)을 살펴보는 일, 척개(滌漑)를 감시하는 일, 명수(明水)를 눈여겨보는 일, 이 모두를 친림(親臨)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단향 의식에는 다 섭행(攝行)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자못 상국을 상국으로 받드는 도리가 아니다. 내 마땅히 친림하여 살펴보리니 그렇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있자, 하교하기를,

"부덕한 사람이 20년이나 자리에 있었으니 무슨 재이인들 부르지 않을까마는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는 이변은 금시 초유의 일이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자신을 책해야 할 모든 일에 있어 그 어찌 감히 예사로이 형식만 취할 것인가. 옛 선왕조에 관상감에서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는 보고가 있었을 때 시사(試士)에 있어서는 그것이 직언을 들을 수 있고 인재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정지하지 않았었고 대향에 있어서는 섭행을 하도록 했었다. 하늘을 받들고 선조를 받드는 일이 두 길이 있을 수 없고 재계를 할 때는 무엇보다 마음이 전일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여름 대향을 섭행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뜻으로 빈대(賓對)를 행했다.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문선왕(文宣王) 묘무(廟廡)에 종사(從祀)하였다. 그전부터 경외의 유생들이 누차에 걸쳐 배식(配食)을 청해왔었으나 정중을 기하기 위해 허락지 않고 있다가 그때 와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선 이후로 앞장서서 성리(性理)를 천명하고 도의 근원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는 문정공 한 사람 뿐이다. 그의 시에 ‘하늘과 땅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중니가 원기라면 자양080) 은 진수이지.[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 한 것을 보면 그의 학식이 다른 유자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 만한 것으로 문정은 우리 나라의 주돈이(周敦頤)이다. 두 정씨장횡거·주자가 다 성묘(聖廟)에 배식되었는데 주자(周子)만 누락이 되었다면 두 정씨장횡거·주자의 마음이 편할 이치가 있겠는가. 가령 오현(五賢)081) 이하로 성묘에 종사된 그 유자들이 여기 있다면 틀림없이 문정공에게 앞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하고, 그렇게 거행할 것을 명했으며 또 그 행검에 비해 시호가 만족하지 못하다 하여 ‘문정(文靖)’을 ‘문정(文正)’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했다. 구리로 활자를 만든 것이 세종(世宗) 갑인년에 시작된 것인데 왕이 예각(藝閣)에 명하여 갑인자(甲寅字)를 기본으로 하여 글자를 주조하게 한 것이 전후 30만 자였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책을 인쇄하게 하고, 뒤에 또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하여 갑인년 겨울부터 창경궁 옛 홍문관(弘文館)에다가 인쇄소를 설치하고는 모든 어정(御定) 어명의 책들을 모두 거기에서 인쇄하고 편찬하게 하고서 이름하여 주자소라고 하였다.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왕이 존주의 의리에 대해 자나깨나 선왕의 뜻을 이어갈 생각으로 언제나 황단(皇壇)에 망배를 하고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를 봉심하게 했으며, 영원사(寧遠祠)·무열사(武烈祠)에 제를 올리게 하고, 이 제독(李提督) 사당에 편액을 달고 해마다 제사를 모시게 했으며, 이 총병(李摠兵)·석 상서(石尙書)의 후손들을 찾았다. 삼학사(三學士)082) 후예들을 발탁하여 등용하고 칠의사(七義士)083) 들을 한꺼번에 제사지내고 용만(龍灣)에 있는 두 사당에 선액(宣額)하고 달천(㺚川)에 있는 묘에다는 어필의 비를 세웠다. 김응하 장군의 큰 절의를 장려하고, 이유길(李有吉)의 유손(遺孫)을 찾았으며, 임인관(林寅觀) 등 95명에 대하여는 박작(泊汋) 물가에다 단을 쌓고 한관(漢冠)을 끝까지 간직한 넋들을 위로했다. 의(義)를 지키고 척화(斥和)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표장(表奬)하고 기록으로 남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드러내 밝혔으며,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도 모두를 다 세상에 알렸다. 충신(忠臣)·의사(義士)의 단을 세웠으며 정충(旌忠)·상무(尙武)의 비문을 지었고,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익호 장군(翼虎將軍) 김덕령 등 여러 사람에 대해 다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제말(諸沫)·양대박(梁大樸) 자손들을 다 녹용(錄用)했는데 그때 와서 열조(列朝)에서 존주했던 사실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겨울에는 정호인(鄭好仁)·성덕우(成德雨)를 친국한 후 다 귀양 보냈다. 호인은 병판(兵判)으로서 달력을 반사(頒賜)하는 단자를 뽑아 올리면서 홍낙임(洪樂任)을 빼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덕우는 이조의 당상관으로서 홍수영(洪守榮)을 제관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왕이 진노하여 그러한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제신에게 하교하기를,

"만약 이 두 사람의 현재 드러난 죄만 가지고 논한다면 틀림없이 친국까지 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할 것이나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만인(萬人)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고 백세(百世)가 되도록 본받게 하고 싶어서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경》에 이른바, 그 상형(祥刑)084) 을 잘 살피라고 한 것으로 지금부터는 모두가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나라의 법에 저촉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춘추(春秋)》가 만들어졌다. 삼전(三傳)085) 이 똑같이 경(經)에 실려 있는데 그중의 좌씨전(左氏傳)이 역사서로서는 가장 자세하게 되어 있으나 다만 경과 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학자들이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때문에 사신(詞臣)에게 명해 주자(朱子)《강목(綱目)》 범례를 따라 경을 강(綱)으로 하고 전(傳)은 목(目)으로 하여 인행하게 하였다. 선조 때에 일찍이 경전을 합해 강목이라고 했으나 미처 간행을 못했었고, 세종 병진년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주해(註解)한 것은 바로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였는데 였는데 이번 그 책도 그 의례(義例)라든지 연갑(年甲)까지도 양조(兩朝)에서 했던 것과 꼭 같이 하여 그 역시 계술(繼述)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청대하여 동궁(東宮) 책봉례를 거행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술년 원자가 태어난 이후로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져 있고 신인(神人)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서경》에도 이르기를 ‘비록 어려도 원자(元子)이시니’ 했듯이 성왕(成王)이 보위(寶位)에 이미 올랐는데도 주공(周公)은 그때까지도 원자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원자라는 명호가 정해진 바에 책봉의 시기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리고 책봉례를 행하고 뒤이어 관례(冠禮)·가례(嘉禮)까지 함께 치르고자 하는데 《예기》에도 ’하나를 행하면 셋이 좋아진다.’086) [一行三善]고 말한 것처럼 나도 그래서 천천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사부에게 나아갈 나이이니 우선 사부(師傅)부터 정해두었다가 봄이 되면 개강(開講)을 하도록 하라."

하고, 곧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했다.

21년 봄에 각도에 윤음을 내려 늙은이를 쉬게 하고, 농부들 노고를 치하하고, 모든 일을 공경하고,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이르기를,

"《소학(小學)》이라는 책은 바로 학교에서 처음 가르치는 차제(次第)요 절목(節目)으로서 나같이 과매(寡昧)한 사람으로도 선왕께서 인도하시고 열어주신 그 은혜에 힘입어 동습(童習)의 나이에 날마다 배웠던 것이 다소의 힘이 되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요즘 와서는 배우는 방법도 변하고 가르치는 성의도 부족하여 그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보는 자가 없다. 내 그를 두려워하여 내각 신료를 명해 그 훈의(訓義)에 맞게 고증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 같은 책도 그것이 치교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 구실을 할 만한 책으로서 《소학》과 함께 없어서 안 될 책이니 그를 합해 한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고 하라. 그리고 또 하루만 실시해도 사방이 풍동(風動)할 수 있는 예로는 향음주례(鄕飮洒禮)가 그것인데 옛날 우리 세종조 때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을 베푸시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의 반하(頒下)도 역시 그 무렵에 하셨던 것이다. 나 소자도 어찌 감히 그를 본받아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향약(鄕約)도 그것이 백성을 순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데 많은 힘이 되기 때문에 주부자(朱夫子)가 매 월초면 향약을 읽는 일을 하였던 것이고 나도 그래서 향약의 효과가 향음주례 못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도 익히고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기무(機務) 여가에 향음주례에 관한 의식과 향약 조례 등을 분류 제정하도록 하라. 과연 그 제도가 법 뿐이요 말 뿐인 것이 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완악한 자라도 융통성을 보일 것이며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현명해질 것이다."

하고, 내각에 명하여 《오륜행실(五倫行實)》《향례합편(鄕禮合編)》을 인쇄 배포하라고 했다.

원자 좌·우유선(左右諭善)을 두었다.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춘저(春邸)에 있을 때 빈료(賓僚)들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원자는 현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단정하고 바른 선비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다. 좌우에서 보익(輔翼)하는 이 중에 학식 행검이 훈도(薰陶)의 영향을 주기에 알맞은 자가 지금 세상이라고 왜 없으랴만 모름지기 생소한 야인으로서 세상 물정에 숙달되지 아니한 자라야 비로소 엄탄(嚴憚)의 효과가 있을 것이니 그 점을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호조가 조선(漕船)에 관한 사목(事目)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선박으로 운반하는 일은 사실 군사 정책과도 관계가 있어 옛 주관(周官) 제도에서부터 한(漢)·당(唐)·송(宋)·명(明)에 이르기까지 물자 운반선이 바로 전선(戰船)이기도 했는데 그 역시 병농(兵農)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 나라는 조창(漕倉) 제도가 비록 군사 정책과 직접 상관은 없지마는 그 실제는 두 영(營)에서 대동미를 이리저리 옮겨주는 것이나 훈련 도감의 삼수량(三手粮)이라는 것이나 곡식이 필요할 때 그 필요한 양의 곡식을 대주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슨 사정이 달라졌을 때는 그 달라진 사정에 상응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인데, 유독 조운 그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은 변통성 없이 옛날대로 고수할 것이 뭐 있겠는가. 전선으로도 이용한다는 뜻을 이미 말한 바도 있으니 선박 건조처의 영곤(營閫) 읍진(邑鎭) 들을 엄히 단속하여 견고하고 정밀하게 건조해서 조곡(漕穀) 운반에도 겸용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화성(華城)의 성가퀴·망루 등을 두루 둘러보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효묘(孝廟)가 후원에다 척뇌당(滌惱堂)을 지어두고 내구마(內廐馬)를 타고서 중관(中官)에게 고삐를 잡히고 날마다 그 당에 가셨었는데 그것이 사실은 힘든 일을 익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말을 타고 힘든 것을 연습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가법(家法)인 것이다. 나도 금원(禁苑)에서 군무 관계로 전좌(殿座)하게 되었을 때면 반드시 말을 타는데 그는 열성조 고사(故事)를 따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온종일 말을 달려도 피로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원자(元子)가 사부(師傅)·유선(諭善)과 상견례를 행했다. 왕이 사부와 유선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이 예를 행하게 된 것은 하늘과 조종(祖宗)이 도와주신 것이다. 사부에게 나아가는 데도 절차가 있고 체모가 있기 마련인데 내 비록 배읍(拜揖)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그 강독(講讀)하는 소리를 처음 듣고 마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경들이 잘 보도해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원자가 강독을 마치고 여가만 있으면 언제나 곁에 앉도록 명하고 화려한 복장 기름진 음식은 몸과 입에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말하기를,

"나도 어려서부터 독서할 때 반드시 과정(課程)을 두었었는데 요즘은 원자를 위해 여가 때의 공부를 더하고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도 기억하지만 옛 선왕께서는 농사를 아주 중히 여겨 밭 갈고 김맬 철이면 언제나 성남(城南) 들로 일찍 나가셔서 직접 살피곤 하셨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곳 부로(父老)들이 성적(聖蹟)을 못잊어하고 성덕(聖德)을 칭송하면서 그곳에다 대(臺)를 세우고 이름하여 성경(省耕)이라고 하고 있다. 나도 어가를 모시고 누차 수행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고, 각신을 명하여 대호(臺號)를 써서 돌에 새겨 세우게 하고, 또 동쪽과 서쪽 두 교외에다 각기 대 하나씩을 더 세우라고 했다.

왕은 삼황(三皇) 그리고 열성(列聖)들 휘신(諱辰)를 당하면 언제나 소선(素膳)을 들이게 하였는데, 빈연(賓筵)의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근고(近古) 이전에는 공공연한 자리에서 회반(會飯)을 할 때면 쇠고기를 먹지 않았었고, 국기(國忌)를 당하여 재계 때면 조정 신료들도 모두 이틀간 소사(蔬食)를 했었다. 그것은 선왕조 초기까지도 그랬었고 오직 대향(大享)의 태뢰(太牢)와 진연(進宴)의 대선(大膳)에서만 비로소 쇠고기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까닭 없이는 소를 잡지 않았던 고인들의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법은 간곳없고 각 궁방(宮房)들까지도 각기 딸린 푸줏간이 있다니 만약 법을 집행하는 유사(有司)들이 먼저 궁방부터 엄히 단속했더라면 그렇게 함부로 법을 어기고 금형을 범하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가을에 장릉(章陵)을 배알하고 본군의 부로(父老)들 병고를 물었으며, 1년간 복호를 하고 갑인년 행차 때 그 행차 광경을 구경했던 나이 70, 80인 사람에게는 각기 1급씩 가자(加資)하였다. 그리고 이어 민회묘(愍懷墓)를 살피고 현륭원도 배알하였다.

22년 봄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화성부(華城府)에 묵으면서 이르기를,

"원침(園寢)을 모신 지 지금까지 10년이 되도록 아직 이 부와 이곳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친 적이 없었으니 그것이 어찌 내 본의이겠는가. 성지(城池)가 아무리 든든하다 해도 어찌 뭇 백성들 마음이 성이 되어주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들 마음부터 든든해야 일심으로 가꾸고 보호할 것이다. 을묘년 정리곡(整理穀)을 각도에다 분산 배치한 것은 그것이 비록 사랑과 은혜를 널리 베풀자는 뜻이었으나 3백 개의 주군(州郡)을 상대로 주고 걷고 하는 과정에서 어찌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름이 정리곡이라면 모곡은 더 받지 않아야 그 제도를 둔 본의에 맞는 것이니 그 정리곡을 모두 화성부에 소속시키고 모든 본부로부터 받는 곡(穀)에 대하여는 모곡 징수를 영원히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하교하기를,

"벌레가 벼와 원침의 나무들을 해치고 있다면 그를 잡아 없애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주관(周官)서씨(庶氏)·전씨(剪氏)087) 도 그 때문에 두었던 직(職)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불에 태워 묻어버리는 것은 당(唐)의 요숭(姚崇)이 처음으로 했는데 그후 역대로 그렇게 시행해서 그것이 성헌(成憲)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근자에 원침의 나무들을 벌레가 해치고 있어 나무를 심었던 10개 읍을 시켜 잡아 없애라고는 하였으나 그 벌레라는 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生物)이기 때문에 늪지대로 몰아내버리는 것이 불에 태워 죽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하면 생물을 살리는 덕도 그 속에 있는 것 아닌가. 듣기로는 벌레가 날아 바다로 들어가서 어하(魚蝦)로 변했다고 복파(伏波)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생생한 증험088) 이 아직도 전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 벌레들을 잡아 구포(鷗浦) 어귀에다 던져버리라."

하였다.

경외의 사형수들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소결(疏決)할 때에 전례대로 정전에 임어하지 않은 까닭은 내 마음에 저으기 말못할 슬픔이 있어서이다. 천하 만사가 모두 내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것인데 심도(沁都) 일을 생각하면 내 마음을 도려내는 듯하여 정전에 앉아 유배보내는 무리들을 놓고 가부를 평론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당상들만 해조에 모여서 사형수의 안(案)만을 여쭈라고 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그때 가뭄이 너무 심해 모를 제때에 내지 못했으므로 각도에다 다른 곡물을 대신 심도록 권장했었다.

가을에는 경릉(敬陵)·창릉(昌陵)을 배알하고 그 구역 내에 있는 여러 능도 배알했다.

장용 외영(壯勇外營)에 오위(五衛) 제도를 창설했다. 국조의 군제(軍制)가 처음에는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었다가 삼군부가 오위(五衛)로 바뀌면서 부(部)와 통(統)을 정하고 군대를 선출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민(民)과 병(兵)을 통합하여 군대를 농민에 붙이는 제도를 두었었다. 그러다가 그후 군문(軍門)을 설치하고 영사(營司)를 두면서 위(衛) 제도는 폐지되었다. 화성(華城)은 원래 경기 관내의 중진(重鎭)이기에 마병·보병의 군대 편제가 그 규모에 있어 훈련 도감과 비슷했었는데 계축년에 영(營)으로 승격된 후로는 국초에 함경도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했던 것처럼 친군위 3백 명을 두고 보군(步軍) 26개 초(哨)를 두었다가 뒤이어 용인(龍仁) 등 5개 읍의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정예하고 건장한 자를 뽑아 12개 초를 더 둠으로써 규모를 일영 오사(一營五司)로 만들었다. 그리고 또 본부 및 본부에 소속된 읍의 민병들을 뽑아 서로 번갈아가면서 성을 지키게 하는 제도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司)·초(哨)의 명칭을 바꿔 위(衛)·부(部)로 하고 1개 영을 5개 위로, 5개 위는 25개 부로 편성하여 내외 영군(營軍)이 총 5천 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절목을 비변사가 만들어 올리자, 왕은 여러 무장(武將)들에게 이르기를,

"화성이 군대 편제에 있어 다른 곳보다 먼저 옛날의 부·위 제도를 채택했는데 그도 의리와 관계가 있는 일이다."

하였다.

《오경백편(五經百篇)》을 완성했다.

《주역》·《서경》·《시경》·《춘추》·《예기》에서 99편을 취하고 《중용》·《대학》《예기》 속에다 그대로 두었으며 주자(朱子)의 장구서(章句序)를 그 끝에다 붙여 두었는데 이는 마치 《맹자》 맨 끝에다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여놓은 것과 같은 뜻089) 으로 판을 새겨 간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근세에 와서 시율(詩律)이 점점 음절이 촉박해지고 의미도 건조하다 하여 두보(杜甫)·육유(陸游)의 시 전편을 운(韻)에 따라 분류하여 인쇄 반포하였는데 그 모두가 백성을 계도하고 풍속을 순화시키기 위한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10월 기축일에는 각도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했는데 그것은 다음해인 기미(己未)년이 바로 영묘(英廟)가 적전(籍田)을 친히 갈았던 해인데다 그달의 월건(月建)이 축(丑)이었기 때문에 토우(土牛)090) 로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왕이 왕위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럴수록 선진(先進)의 법을 따르기에 노력하여 명령이나 정교(政敎)를 오직 근본을 중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쪽으로 실시 선포하였기에 농서(農書)를 올려온 자도 경외를 막론 4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반궁(泮宮)에다는 선제(璿題)를 내려 일차 유생(日次儒生) 소외(召巍) 등에게 시험을 보이고 법온(法醞)을 내렸으며, 세종조(世宗朝)에서 화종(畵鍾)을 내리고 효종조(孝宗朝)에서 은배(銀盃)를 내렸던 것처럼 늘 쓰시던 은배를 특별히 내리면서 그 은배 복판에다 전서(篆書)로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고 새겨넣었는데 그 역시 손님에게 잔치를 베푸는 《시경》 녹명장(鹿鳴章)의 뜻으로 선비들을 예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경연에 참여한 제신들과 응제한 제생들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시를 지어 읊도록 하고 또 친히 서문을 써 그 책 머리에다 싣게 하고 그것을 새겨 명륜당(明倫堂)에다도 걸어두게 했으며 또 그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 반포하게 하면서 이름하여 《태학은배시집(太學銀盃詩集)》이라고 하였다.

왕은 왕위에 오르고부터 많은 인재를 길러내고 올바르게 계도할 방법에 깊은 관심을 두고 월강(月講) 순시(旬試) 제도를 실시하여 혹 그 자리에 나가 친히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시제를 나눠주고 각자 재능을 재보기도 했으며, 혹은 경의(經義)를 강론하게 하여 학문의 깊이를 두드려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왕은 그 시권을 직접 살펴보고 대책 내용도 친히 열람한 다음 혹자에게는 급제를 내리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벼슬을 주어 권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령문(功令文)을 편집 인쇄까지 하기도 했으며 여러 하사품도 많이 내렸고 은총과 영광 또한 전대에 없을 정도였으므로 온 나라 전체가 모두 빈흥(賓興) 대상이 되어 신해년에는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이 만들어지고 임자년에는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계축년에는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 갑인년에는 《탐라빈흥록(眈羅賓興錄)》, 을묘년에는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정시문정(正始文程)》, 경신년에는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이 각각 있게 되었다.

대정(大政) 시행을 앞두고 하교하기를,

"서한(西漢)에서 관리 선임을 중히 여겼던 것은 그게 바로 근본을 공고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인재 등용에 있어 과거 시험으로 등용을 하고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자가 도리어 음관이나 무관만큼도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국가 조세도 맡아 관리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외지로 나가 자목(字牧)의 일도 맡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혹은 한미한 자리에서 갑자기 올라온 자로 하여금 묘당의 계획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기 때문에 금곡(金穀)이나 갑병(甲兵)에 있어 깜깜하기가 마치 소경이 주판 만지는 격이니 그야말로 등용된 자가 이쪽에서 바라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지금 만약 새로 임용된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지방의 작은 고을에 가 그곳 관리의 일을 익히고 우장(郵障)의 일까지도 겸임하게 하여 민생의 질고(疾苦)를 잘 알도록 했다가 그가 일소(馹召)로 왔을 때에 꾸밈없는 말과 글로 폐단을 제거할 대책을 낱낱이 개진하게 한다면, 구중 궁궐이 아무리 깊다 해도 사방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아 백성과 나라에 도움되는 것이 일개 수의 어사를 보내는 것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그 대양책을 각별히 강구해 보도록 하라."

하고, 이어 문관·음관·무관을 서로 바꿔가며 임용하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23년 봄에 유행병이 만연하여 경외에 사망자가 12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왕은 그것을 크게 우려하여 은휼(隱恤)의 은전을 광범위하게 시행하는 한편, 또 하교하기를,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면 비록 여기(厲氣)가 아니더라도 모든 이름 모를 병이 유행할 때는 모두 별도의 여제(厲祭)를 지내고 또 교외 광장에다 단을 쌓아 죽은자에게 위령제도 지냈는데 그는 주(周)나라 때 벽책(疈磔) 제도에서 비롯되어 후세에 남아온 것으로 역시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예(禮)에 없는 것이라도 할 만한 일이면 다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주공(周公)이 예서에다 기록해둔 것이고 우리 열성조에서도 다 해왔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를 거행치 않는다면 그는 신인(神人) 사이를 좋게 만드는 도리가 아니니 북쪽 교외에 가 여제를 지내고 동·서·남의 교외에서는 위령제를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각도에 명하여 모두 벽고(疈辜)의 예를 거행하도록 했었다.

건륭(乾隆)의 부음을 전달할 칙사가 올 참이었다. 청(淸)나라에 대한 복제로 옹정(雍正) 을묘년에 쓴 구례091) 가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제신들 모두가 다 실례(失禮) 중에 또 실례이고 불이참(不貳斬)092) 의 뜻에도 어긋난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제신들 복색(服色)은 바로 고인들이 말했던, 띠풀로 얽어매고 종이로 싸고 한다는 것으로 사실 체제가 맞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 나라 예제(禮制)가 비록 불완전한 점이 많지만 성조(聖祖) 때 《예기》증자문(曾子問)을 놓고 강론해가면서 비로소 군신들의 복제를 바로잡았고 선왕조 때 《상례보편(喪禮補編)》이 만들어지면서는 예전의 잘못되었던 점들을 깨끗이 씻을 수가 있었다. 다만 그 복제는 우리 국내에서 행하는 복제이고, 청국에 대한 복제는 을묘년 이전의 제도를 그냥 그대로 쓰자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 복제까지 고칠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관이나 복색을 《상례보편》 그대로 따르자면 도리어 먼저 것보다 더 중복(重服)이 될 혐의가 있고 또 불이참(不貳斬)이라는 말도 바로 황조(皇朝)와 제후국의 분별을 지적해서 한 말인데 그렇게 말할 경우 대일통(大一統)이라는 의리로 볼 때 장애가 없겠는가? 어차피 그럴 바에야 그냥 옛날 그 복제대로 입고서 억울함과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심정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낫겠다."

하였다.

《아송(雅誦)》이 만들어졌다. 왕은 시 3백 편 이후로 사무사(思無邪)의 근본 취지를 터득한 시로는 오직 주자(朱子)의 시가 그것이라고 여겨 손수 간추려서 인쇄 반포하고 경연(經筵)·주연(胄筵)의 강의 자료로 쓰게 했으며, 또 그를 존경각(尊經閣)에다 두고 유생들 월강(月講) 자료로도 삼게 했다.

경희궁(慶熙宮)에 행행하였다. 그때가 원릉(元陵) 휘신(諱辰)이었는데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석방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제신들이 강력히 반대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모궁을 배알하고 윤음을 내려 여러 신료들에게 포고하기를,

"아, 그 옛날 그 친애하시던 마음씨가 어느 왕보다도 월등하셨다. 병자년 그 무렵 덕성각(德成閣)에서 《통감(通鑑)》을 강하다가 효문제기(孝文帝紀)회남왕(淮南王) 사건을 놓고는 일일이 분석을 하셨는데, 그때 눈물이 옷깃을 적신 연신(筵臣)도 있었었다. 지금 정씨의 처가 죽지 않고 늙고 병들어 있는데 그 옛날 하시던 그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임오년 이전 정씨의 처와의 지극했던 정리를 놓고 그때를 가만히 거슬러 생각해보면 그때는 비록 그를 공론에다 맡길 수밖에 없었으나 오늘 와서는 또 꼭 이렇게 해야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옛날 좋았을 때와 같이 오가고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오늘 내가 선왕의 그 뜻을 받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감히 옛날의 그 뜻을 이어왔다고 할 것인가.

한(漢)·당(唐) 이후로는 옛 성인의 시대와 거리가 멀고 도(道)도 점점 빛을 잃어 온 세상이 하나같이 골육 상잔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병들어 죽었는데 곡(哭)은 무슨 곡이냐.’라고 말을 남겨 후세에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난적(亂賊)은 죽여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임금이라면 다 듣기 좋아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용감한 자나 비겁한 자나 구별 없이 다 잘하는 말들이면서 특히 ‘전의친(全懿親)’ 이 세 글자에 대해서는 모두가 쉬쉬하고 지사(志士)도 함구를 하는 실정이다. 지금 옛날에 그렇게도 우애하시던 그 마음을 본받기 위해 정씨의 처가 그러한 죄를 지었는데도 오늘 와서 다 풀어줬다는 것을 국사(國史)에도 기록하고 야승(野乘)에도 기록하면서 이르기를 ‘그의 죄는 물론 용서할 수 없는 죄이나 옛날의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기 위하여 법을 굽히고 사랑을 편 것이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명의(明義)에 있어서도 최고의 명의가 되는 것이며 우리 국가로서도 억만년 두고두고 받을 복록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 이날이 바로 우리 단경 성후(端敬聖后)093) 가 복위(復位)되어 능(陵) 봉하는 일을 독려하던 제신들이 일을 마치고 복명하던 때와 간지(干支)가 같은 때이고 또 주량(舟梁)094) 보갑(寶甲)도 그해에 있었으니 주구(珠邱)를 바라볼 때 슬픈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예관으로 하여금 날을 정하게 하고 대신을 보내 온릉(溫陵)에 가 잔 올리는 일을 대신 행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연경에 가는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주자서(朱子書)에 대해 마음을 써 외우고 익히면서 그 대전(大全)을 가지고 요약해서 《회영(會英)》을 만들고, 부류별로 모아 《선통(選統)》을 만들고, 가려 뽑아서 《백선(百選)》을 만들고, 개괄적으로 골라 《절약(節約)》을 만들고, 또 모아서 《회선(會選)》을 만들었으나 그밖에 또 《춘추(春秋)》의 뜻과 맞는 것으로 대일통(大一統)의 문자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대전》·《어류(語類)》 또는 《유서(遺書)》와 이경(二經)·사서(四書)의 《전의(傳義)》·《장구(章句)》·《집주(集註)》·《혹문(或問)》 그리고 《계몽(啓蒙)》·《가례(家禮)》·《시괘고오(蓍卦考誤)》·《창려고이(昌黎考異)》에서 《위씨계(魏氏契)》·《초사(楚辭)》·《통서(通書)》·서명(西銘)·태극도(太極圖) 등에 대한 해설 같은 모든 저술을 한데 모아 전서(全書)를 만들고 그 편집이 끝나면 그것을 선성(先聖)의 사당에 고한 후 간행하여 주부자(朱夫子)장주(漳州)에서 했던 것095) 처럼 해보고 싶다. 그리고 《춘추》를 먼저 간행하려는 것은 역시 대일통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은미한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다만 《어류》는 그 의례(義例)의 사소한 오류가 많고 지록(池錄)과 요록(饒錄) 두 본096) 이 비록 정밀하고 좋다고 해도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이 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또 각 부문별로 분류된 것으로는 장경부(張敬夫)수사 언인(洙泗言仁)충정공(忠定公) 조여우(趙汝愚) 유송조 제신 주의(有宋朝諸臣奏議) 같은 것이 일찍이 고정(考亭) 선생으로부터 지적을 받기 전만해도 그 은미한 표현과 중대한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곳이 있었는데 그 《어류》라고 어찌 주부자의 본뜻 그대로이겠는가. 그를 고정(考定)할 때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므로 모름지기 미(眉)·휘(徽)·건안(建安) 제본과 대조하여 진면목(眞面目)을 얻어내야지만 전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대전(大全)으로 말하더라도 태주(台州)의 주장(奏狀)이 민판(閩板)에는 수록이 안 되어 있고, 육왕첩(陸王帖)·매화부(梅花賦) 같은 것도 누락되고 실려 있지 않으니 사행(使行)이 연경을 가게 되면 《대전》의 진짜 본과 《어류》의 각본을 꼭 구매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것을 빙자하여 다른 잡서가 경계 밖으로 나갔을 때는 왕부(王府)에 그것을 단속하는 법이 엄연히 있으니 누구도 감히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경봉각(敬奉閣)을 황단(皇壇) 곁으로 옮겨 지었다. 각이 옛날에는 동룡문(銅龍門) 왼편에 위치하고 있어 청(淸)나라 칙서를 소장해둔 곳과 서로 이웃해 있었는데 그때 와서 특별히 옮겨 짓도록 명하고 영종(英宗) 어필인 경봉(敬奉)·흠봉(欽奉)의 편액을 걸었으며,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황제의 어필 또는 어화(御畵)로 된 병풍과 홍무(洪武) 25년 이후의 고인(誥印)을 모셔두었다.

헌릉(獻陵)을 배알하고 이어 현륭원을 배알했다.

안으로 대신(大臣)과 전관(銓官), 밖으로 각도의 방백(方伯)들로 하여금 조정 관료나 유생 할 것 없이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하는 자면 그를 각자 추천해 올리라고 명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 사제(私第)와 치마대(馳馬臺)에다 어필로 된 구기비(舊基碑)·성적비(聖蹟碑)를 곡산(谷山)에다 세웠다.

장헌 세자(莊獻世子) 저술의 세 책을 엮어 펴냈는데 수집·교정에서부터 지우고 고치고 오려붙이고 하는 일까지 모두 어수(御手)를 거쳤다. 나라 사람들이 애송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있었는데 왕은 손때가 묻어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내부(內府)에 간직해 두었다가 그때 와서 직접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장차 열성(列聖)이 남겨놓은 교훈의 글과 함께 높이 모시고 오래 전하도록 하여 미처 못다한 효성을 거기에나마 표해보려는 뜻이었다.

《대학유의(大學類義)》가 만들어졌다. 진덕수(眞德秀)가 쓴 《대학연의(大學衍義)》구준(丘濬)이 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가장 긴요하고 더욱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들을 추려 뽑아 손수 평점하고 채집한 것들이었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그 내용이 치도(治道)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누차에 걸쳐 감정(勘定)을 가해오다가 이때 와서야 비로소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간행까지는 못했었는데 규장각(奎章閣)이 어제로 편집하여 올렸다.

24년 1월 초하룻날 아침에 원자를 책봉하여 왕 세자로 삼았다. 그날로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돌아와 집복헌(集福軒) 바깥채에서 대신과 각신(閣臣)·예관(禮官)을 불러 인견한 후 하교하기를,

"원자의 금년 나이가 11세인데 책봉례를 지금까지 늦춰 잡은 것은 무언가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역(易)》에서는 쉽고 간단한 것을 귀히 여겼고, 《예기》에서도 삼선(三善)이 있으며 우리 현묘(顯廟)의 고사를 보더라도 관례·책봉례·가례 이 삼례(三禮)를 한 해에 모두 거행했었다. 천년 만년을 두고 자손에게 교훈을 주시고 편안한 복을 주신 것이니 그 어찌 오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 관례·책봉례를 같이 거행하도록 명하고 또 이어 가례도 그 해에 치루었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책봉례가 정해지자 왕은 그 예를 맡아 거행할 제신들을 대할 때마다 늘 옛날 애기를 하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곤 했는데 현륭원을 배알하고는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오늘이야 내가 어떻게 차마 이 원을 하직하고 돌아가겠는가."

하고는 잔디 위의 한데에 엎드려서 목이 쉬도록 흐느껴 울었다. 제신들이 울며 청한 끝에 저녁 무렵에야 재전(齋殿)에 들어 머물다가 이튿날 환궁했다.

예조가 책봉례 의식 절차에 관해 아뢰자, 하교하기를,

"내가 오늘과 같은 유모(孺慕)의 마음으로 예(禮)대로 하기 위해 임전(臨殿)을 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예도 인정(人情)에서 우러나는 것이기에 인정에 맞으면 천리(天理)에도 맞는 법이다. 더구나 공조(公朝)의 예가 사례(士禮)와는 비록 구별이 있다지만 며느리 맞이한 집에서도 사흘 동안은 풍악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였다. 옛날 우리 세종 대왕께서도, 그때의 수수(授受) 과정을 보면 우리 태종 대왕보평전(報平殿)에서 내신(內臣)에게 동궁을 모시고 오도록 명하여 대왕이 계시던 내전(內殿)에서 대보(大寶)를 넘겨주심으로써 그 길로 왕위에 오르셨던 것이다. 요(堯)가 명하고 순(舜)이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장(典章)이었겠는가마는 예가 그렇게도 간편하셨다. 그것이 이 소자가 일심으로 본받고 따라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삼가례(三加禮)에 있어서도 명빈(命賓)·책저(冊儲)·전책(傳冊) 임전(臨殿) 등의 예들은 모두 생략하라. 그리고 예를 마친 후의 하의(賀儀)도 전(殿)·궁(宮)에 한꺼번에 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어찌 감히 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임권은 못하겠으니 권정례(權停禮)로 하도록 하고 춘궁의 하례 의식도 현묘(顯廟) 시절에 했던 전례대로 역시 권정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을유일 왕세자가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 바깥채에서 거행했다. 예를 마친 후 왕은 왕세자와 함께 진전(眞殿)·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예를 마치고 나니 종묘 사직이 더욱 소중해지고 하늘에 계신 영령들께서도 틀림없이 기뻐하고 계실 것이지만 나의 마음을 더욱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 원릉을 배알한 후 그 국내의 각능도 배알했다.

혜경궁(惠慶宮)이 부스럼으로 인하여 열흘이 넘게 편찮았는데 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심에 쌓여 옷도 벗을 사이 없이 친히 약을 바르고 하느라 어수(御手)마저 부을 정도였다. 그때 와서 모든 증상이 쾌차되어 제신들이 하례를 거행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자궁 마음이 그리 거추장스럽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빈(世子嬪)을 처음 간택했는데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간선되었으니 전 참판 김조순(金祖淳)의 딸로서 바로 지금의 곤전(坤殿)이다. 처음 간택을 하려면서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간택이라는 것이 옛 예가 아닌 것이다. 선정(先正)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일찍이 그에 대한 격언(格言)을 했었으나 국조(國朝)에서 해오던 일이라서 감히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였다.

여름에 유신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여 전관(銓官)을 논핵하자, 왕은 준엄한 하교를 내리고 그를 귀양보냈다. 즉위 이후 오늘까지 왕이 외곬으로 지켜왔던 대의(大義)와 인재의 용사(用舍)에 관한 근본 취지, 시속을 바로잡기 위해 고심했던 문제 등에 관한 여러 천백 마디 내용을 연신들에게 펴보이고 이어 그를 연본(筵本)으로 등사하여 조신(朝紳)들에게 반사하도록 명했었다.

왕이 그해에 와서 경사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에 병이 되어 자주 편찮을 때가 있었는데다 시탕(侍湯)하느라 또 피로가 겹쳐 6월 초부터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갔다. 그러면서도 승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내 병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8일에 이르러 병이 크게 악화되어 대신 이하 제신들이 와내(臥內)에 들어가 증후를 살펴보니 왕은 이미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들릴락말락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신들이 귀기울여 들어보니 바로 수정전(壽靜殿) 세 글자를 들먹이고 있는 것으로 수정전은 곧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있는 곳이었다. 왕의 생각은 아마 자성(慈聖)께 무언가 고해야 할 말이 있었던 듯한데 이미 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왕은 그날 유시(酉時)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끝내 승하하고 말았는데 당시 춘추가 49세였고, 곁에 있던 이들은 대신과 각신·승지·사관(史官)들일 뿐 환시(宦侍)나 궁첩(宮妾)들은 한 사람도 가까이 없었다. 대상(大喪)의 그날 심산 궁곡의 농부에서부터 심지어 아낙과 어린애들까지도 마치 자기 부모를 여읜듯이 모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11월 갑신일 자시(子時)를 기해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에다 해좌(亥坐)로 장례를 모셨는데 거기가 바로 건릉(健陵)이다. 아, 원통하여라.

왕은 하늘에서 타고난 총명과 슬기에다 너그럽고 인자하고 검소한 마음씨를 지녔다. 육경(六經)을 기본으로 하여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이치를 터득하고 삼고(三古)에 뿌리를 둔 예악(禮樂) 성명(聲明)의 치적을 남기었다. 도(道)는 우주(宇宙)를 요리할 만했고, 덕(德)은 당(唐)·우(虞) 시대를 재현시킬 만했으며, 공(功)은 만세를 위해 태평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만하여 무슨 덕 하나 혹은 행위 하나만을 들어 명명(命名)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경천 위지(經天緯地)한 것을 일러 문(文), 예악(禮樂)이 다 잘 갖추어진 것을 일러 성(成), 대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확실한 공로를 세운 것을 일러 무(武), 끊임없이 덕을 닦고 업을 개척하는 것을 일러 열(烈), 사물의 이치를 다 알고 천성대로 하는 것을 일러 성(聖),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을 일러 인(仁), 올바른 길을 걷고 화평을 지향하는 것을 일러 장(莊), 선왕의 뜻을 이어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일러 효(孝), 나의 정직으로 상대를 심복시키는 것을 일러 정(正)이라고 하였다.

왕은 15년간을 춘궁(春宮)에 있으면서 문침(問寢) 시선(視膳)의 일이 아니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적(經籍) 연구에 몰두하여 분전구색(墳典邱索)097) 수사낙민(洙泗洛閩)098) 기타 구류(九流) 백가(百家)의 전적에서부터 우리 나라 선유(先儒)들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융회 관통하였고 또 성리(性理)의 원리와 학문하는 방법 그리고 옛 성인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과 과거 현자들이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오한 이치도 역시 다 연구하고 찾아냈던 것이다. 급기야 왕위에 올라서는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제때에 대지 못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좌우에다 책을 두고서 밤을 낮삼아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 자신 수양의 방법에 있었서는 이르기를,

"극기(克己)는, 자기 성격이 그쪽으로 치우쳐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부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너무 조급한 것이 병인데 ‘자신을 많이 책하고 남은 적게 책하라.’는 공자의 교훈을 읽고서 자기 기질을 변화시켰던 여백공(呂伯恭)에 대해 내 늘 그를 흠모하면서도 그대로 못하고 있다."

했고, 또 이르기를,

"내가 무슨 학문으로 이룬 공부가 있겠는가. 다만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 참고하는 데서 다소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선비라면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래서 ‘홍의(弘毅)’ 이 두 글자에 대해 많은 음미를 해왔었다."

하였다.

학문하는 법을 논하면서도 이르기를,

"직내 방외(直內方外), 그 공정을 터득해야 천덕(天德)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직내란 바로 경(敬)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뜻을 견지하는 것이고, 방외란 바로 의(義)를 말하는 것으로 가령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같은 것이다. 사람이 성인이 되게 가르치고 현인이 되게 가르치는 성인의 말씀 천 마디 만 마디가 궁극적으로는 그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모름지기 평상시에 마음을 잘 지키고 천성을 함양하여 그 마음이 언제나 내 속에 존재하고 의리가 항상 내 속에서 밝아야지만 비록 단사 표음(簞食瓢飮)으로 삭막한 고을에 있더라도 천지를 메우고도 남을 호연지기가 그대로 있는 것이고, 또 아무리 거록(鉅鹿) 진터에서 큰 전쟁을 구경하고 동정(洞庭) 넓은 들에서 아홉 마당의 주악을 하더라도 허명 정일(虛明靜一)한 내 마음은 변함없는 그대로 있어야 비로소 큰 군자(君子)가 될 수 있고 큰 사업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했으며, 또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나 강력하게 실천을 못하는 까닭은 다만 그것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문이 물격(物格) 지지(知至) 정도에 이르면 그는 이미 그 지위가 8, 9분(分)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의(誠意) 이하의 공부는 다만 그 본령(本領)을 그대로 가지고서 적재 적소로 거기에 맞게 늘 써나가는 것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문장(文章)에 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문장이라는게 도(道)가 있고 술(術)이 있는데 그 도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술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장이라면 당연히 육경(六經)을 주축으로 삼고 자사(子史)를 보조역으로 하여 최고의 목표를 주자서(朱子書)에다 두어야지만 그 내용이 순정(醇正)하여 도와 술에도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 전설 따위나 주워모은 자질구레한 작품들은 그것이 사람 심술을 제일 못쓰게 만드는 것들이므로 경술(經術)·문장에 뜻을 둔 선비라면 비록 상을 주더라도 그런 것들은 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는 작가(作家)가 되려고도 해보았고 또 경학(經學)에도 종사해보았고 그리고 또 단정하게 공수하고 무릎 꿇는 것과 법도 있게 걷는 그 방면에도 공부를 해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제왕(帝王)의 학문은 보통 선비와는 또 달라 그보다 더 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심성(心性)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두고 세밀 또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문장짓고 쓰는 그러한 일에다 내 심력을 허비할 것이야 뭐가 있겠는가. 가령 은하수처럼 떠오른 그 상태를 가지고 말하자면 크고 둥근 옥돌 같은 것이 제왕의 문장 격식이요, 꾸밈없는 소박한 거문고가 태고의 가락인 것이며, 성문(聖門)의 말세는 좋은 구름 화창한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명불측의 변화를 일으켰을 때는 아무리 예원(藝苑)의 문장가라도 그것으로는 얘기 거리가 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다 찾아 나열해 놓으면 아무리 전문지식이 있는 큰 선비라도 그렇게까지 해박할 수가 없을 만큼 끝도 없으면서도 모두가 절주에 맞아 《서경》전모(典謨), 《시경》아송(雅頌)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하였다.

왕이 책으로 꾸며놓은 《존주휘편(尊周彙編)》은 의리를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고, 《대학유의(大學類義)》는 옛것을 가져다 오늘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륜행실(五倫行實)》·《향례합편(鄕禮合編)》은 민속을 올바르게 계도하기 위함이었고, 《팔가선(八家選)》·《두륙집(杜陸什)》은 문장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며, 자양자(紫陽子)의 여러 책들은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열기 위해 만든 책들이었다. 그리고 만년에 와서는 촌음을 아끼는 공정으로 복희(伏羲) 선천(先天)의 역(易)에 정력을 집중하였는데 그 책은 아직 여기 있건만 서언(緖言)을 들을 수는 없어 주(周) 문왕(文王)이 후세를 걱정했던 뜻인 공자가 십익(十翼)으로 발휘했던 내용들이 말학도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뭇 어리석은 자들을 계발하게도 못하고 말았으니 아, 이 도(道)가 막힐 징조가 아닌가.

그리고 왕이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통한, 아름다운 종묘(宗廟)와도 같고 수많은 백관(百官)과도 같은 저술을 신들이 명을 받아 편집 교열한 것으로는 삼집(三集)으로 된 《홍재전서(弘齋全書)》 1백 권이 있다. 그 책 머리에다 어서로 기록하기를,

"내가 세 살 때부터 수업하기 시작하여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에 대해 약간 들은 바 있으므로 애당초 나 자신이 수사(修辭)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기무(機務)를 살피고 모든 일들을 경륜하는 동안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고 찬란한 공업들을 근사하게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 내 어찌 문장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학문은 추노(鄒魯)를 우두머리로 여기고, 치교(治敎)는 삼대(三代)의 것을 제일로 여겼으며, 덕(德)에 나아가는 계제로는 격물·치지·성의·정심[格致誠正]이었고, 풍속을 선도하는 법으로는 예의 염치(禮義廉恥)였으며, 문장은 의사만 전달되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政敎)에 반영한 것으로는 규장각을 건립하여 집현(集賢)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최고의 우문(右文) 정책을 지향했고, 호당(湖堂) 제도를 모방하여 영선과[英選]를 설치함으로써 인재 양성의 지남(指南)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교 삼물(五敎三物)099) 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상서(庠序)를 세우고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술(邪術)을 물리쳤으며 경전을 존숭하고 패설류는 물리쳤다. 많은 선비들을 오게 하여 가빈(嘉賓)으로 대우하고 서로 연마하도록 격려하고 권장하여 한 조정에 모여 함께 가도록 길을 열어주었기에 당시 선비들은, 비록 작고 볼품없는 재주까지 위아래로 다 살피시는 왕의 덕화에 의해 고무되고 진작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1천 5백 년이나 뒤에 요(堯)·순(舜) 문(文)·무(武)의 전통을 이어 이 땅에 사도(師道)가 엄연히 위에 있었던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힘쓸 것을 생각하라."

했고, 전(傳)에는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떠나고 없으니 이제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했듯이, 왕이 그래서 문(文)이 된 것이다.

왕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자품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백관들을 올바르게 감독 관리하고 명분과 실상을 종합 검토하여 일처리를 했다. 질(質)을 중시했던 은(殷)과 문(文)을 중시했던 주(周) 그리고 강(綱)을 앞세웠던 한(漢)과 목(目)에 치중했던 당(唐)의 제도들을 두루 알맞게 적용했었다. 그리하여 교화가 간 곳마다 이루어지고 정형(政刑)이 바람처럼 백성을 고무 진작시켜 얼마 있으면 온 나라가 한 덩어리가 되고 그로부터 다소의 세월만 더 걸리면 대성공이 있을 뻔했었다. 남단(南壇)의 제향 의식을 바로잡고, 기곡제[祈穀]를 대사(大祀)로 승격시켜 원구(圓邱) 방택(方澤)의 의의를 갖추었다. 늦은 봄이면 예복에 면류관 차림으로 황단을 배알했으며 경각(敬閣)을 세워 중국 조정에 대한 생각을 표시하고, 한려(漢旅) 제도를 두어 중국 유민의 후예들을 위로했다. 제사 빈객의 예를 친히 보살펴 옛부터 내려온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며, 환묘(桓廟) 올려 모시는 의식을 8회 서갑(瑞甲)의 해에 거행하고는 의폐(衣幣)와 책축(冊祝)을 해마다 꼭 직접 주었고 변두(籩豆) 올리는 일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경건히 거행하게 하여 원묘(原廟)에 대한 예가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 황조(皇祖)를 세실(世室)에 올려 모심으로써 50년에 걸친 그의 치적을 천양하고 백세불천의 덕이 있음을 보였으며, 궁원(宮園)에서 행할 의식을 피눈물을 흘리며 제정했는데 모든 절차가 법도에 알맞고 인정으로 보나 예제로 보나 유감될 것이 없었다.

대현(大賢)을 성무(聖廡)에 모시게 하여 유술(儒術)이 흥성했고 화궁(華宮)에서 뭇 늙은이들을 대우하는 등 은총을 널리 베풀었다. 연사(燕射)의 예를 거행하여 군자(君子)다운 다툼을 구경하고 향음주례[鄕飮]를 익히게 하여 왕도(王道)가 어렵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길·흉·군·빈(吉凶軍賓)의 대례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의문(儀文)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경례와 곡례를 참작하지 않음이 없었고 고금을 통틀어 고증하여 인정에도 어긋남이 없고 천리에도 맞게 모든 예제가 찬란하게 갖추어졌으니 이는 예가 이루어진 것이다.

담월(禫月)에도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던 것은 헌자(獻子)의 남은 슬픔 그것이었고, 술잔 올리고 풍악 울림은 노래자(老萊子)의 봉양 잘하는 그것이었다. 아송(雅誦)을 편찬하여 시(詩) 교육을 널리 보급하고 《악통(樂通)》을 저술하여 음률의 원류를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악관(樂官)을 명하여 격조없는 가락을 지양하고 화평의 음을 되찾도록 했는데 그게 바로 일창삼탄(一唱三歎)의 유음(遺音)이라는 것이었다. 어찌 그뿐이랴. 금슬(琴瑟)과 생용(笙鏞)을 울려 빛나는 조종들을 오시게 하고, 종고(鍾鼓)와 관약(管籥)을 우리 백성들과 함께 즐겨 화기가 감돌고 소리도 아름다웠기에 하늘도 땅도 함께 호응하여 반수(泮水) 뜰에서는 해묵은 옥경[磬]이 나타났던 것이니 이는 모든 것이 찬란했던 영릉(英陵) 시절을 이 몸이 직접 보았던 것으로 그만하면 악(樂)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한부(信漢符)를 만들어 궁성 안이 엄숙해졌으며, 노부사(鹵簿使)를 두어 의장 시위가 정연해졌다. 태상(太常) 제도를 바로 고쳐 범절이 명확하였고, 대정(大庭)에는 표(標)를 두어 조정이 보기에 숙연했다. 관부(官府) 군현(郡縣)에 기록없는 곳이 없고, 양형(量衡)·율도(律度)가 다 일정한 기준이 있었으며 정책 수립과 인재 등용, 국가 경제와 민생 문제 등 모든 분야에 다 정해진 법과 기율이 있어 하나의 대전(大典)이 성헌(成憲)으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한 왕조의 체제가 질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니 그만하면 법도(法度)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공(百工)들은 서로가 서로를 스승으로 삼고 모든 일들은 다 잘 되어갔다. 강기(綱紀)가 정연하여 조정 정사가 잘되었고, 예양(禮讓)이 흥행하여 민속이 순화했고, 기상이 맑고 깨끗하고 규모가 크고 원대하여 치도(治道)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도(道)를 이탈없이 지키고 있기에 천하가 동화되어 만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왕도 그래서 공을 이루었던 것이다.

왕은 타고난 용지(勇智)에다 세상을 덮을 만큼 신무(神武)하여 비록 백 년 승평(昇平)을 유지하고 북소리 한 번 내지 않았었지만 중국을 개연하게 여겨 이 땅덩러리 전체를 한번 뒤흔들고 싶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병신·정유년 이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겼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신기(神機)를 써서 뭇 흉물들을 소탕하고 국가 운명을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으며 팔과 겨드랑 밑에서 권간(權奸)들이 재주를 뿌리기도 했으나 담소하면서 그들을 물리쳐 하루가 다 안 가서 조정이 깨끗해졌다. 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손에는 법의 칼을 들고서 사안에 따라 각기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데 사람들은 감히 그 깊이를 엿볼 길이 없어 마치 비와 이슬이 내리다가도 바람이 일고 벼락이 떨어지고 하면서도 하늘 자체는 아무 동요없이 하늘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았었다.

조정 진신 중 혹 한 사람이라도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비록 평소 존경하고 총애하고 예우했던 자라도 그것 때문에 법대로 처리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고 대의(大義)가 걸려있는 선악을 가리는 데는 더욱 엄하였다. 그리하여 궁(宮)과 부(府)가 일체가 되고 속과 겉이 다를 것이 없었으며 궁액(宮掖) 무리들도 감히 함부로 궁중 출입을 못해 안으로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밖으로 먼 지방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마치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이 손가락을 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어느 사람이거나 마치 밝은 촛불이 눈앞을 훤히 비추고 있는 듯하여 국가 대계를 정하는 데 있어 발언하는 자들이 뜰을 메웠는데 왕은 그 중지를 다 받아들인 다음 한 마디로 독자적인 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이 막힘없이 잘되었으며 무슨 일이든지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행할 정도로 뭇 신하들이 다 승복하고 오직 자기들 직무 수행에 분주했다.

국조의 군영(軍營) 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병폐로 여겨 내외의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다시 옛날과 같은 위부(衛府)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든 무신은 모두 그 길을 통해 진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성질이 사납고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라도 모두 멍에와 채찍을 가해 통솔 범위 안에 있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대로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천 금려(宣薦禁旅)를 두어 무인들 발신의 길을 열어놓았고, 서북인들에게 무예를 장려하여 뛰어난 재목을 구하려고 했다. 전영(前營)을 없애 쓸모없는 병졸을 도태시키고, 양진(兩鎭)을 두어 묵어있는 국토를 넓혔으며, 남쪽 교외에서 대 사열을 하면서 노군(勞軍)의 예를 제정하고, 화성 초루에서 밤 조련을 시켜 성가퀴를 오르는 용감성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그전에 마음먹었던 일을 뒤쫓아 실현해보려고 《무예도(武藝圖)》를 증보하기도 했고 《병학통(兵學通)》을 편찬해서 척계광의 병법을 통달하려고도 했다. 황제(黃帝)·위료자(尉繚子)의 저술이나 팔진(八陣)·육화(六花)100) 의 진법도 성명의 눈앞에서는 파죽지세여서 비록 전쟁 속에서 늙은 숙장(宿將)이라도 왕이 가끔 고문을 구하면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또 활쏘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였다. 그러나 50발을 쏠 경우에 항상 그 하나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내원(內苑)에 나아가 조련하고 진법을 익히게 하면서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구경하고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꿩고기 굽고 탁주를 두루 하사하여 장사들을 먹이면서 소무(昭武)의 악(樂)으로 여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영릉(寧陵)의 철장(鐵杖) 목마(木馬)와도 같은 뜻이었다. 《역(易)》에 이르기를,

"사(師)는 대중이란 뜻이요, 정(貞)은 바르다는 뜻이니 대중을 바르게 지도한다면 왕(王)이 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왕은 그래서 무(武)가 된 것이다.

왕은 왕도(王道)를 존중하고 패도(覇道)는 취하지 않는 것을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고, 현자를 신임하고 척리를 멀리하는 것을 인재 등용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을 교육 지표로 삼고, 허례를 버리고 내실을 힘쓰는 것을 백성 교화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순화시키는 것을 세상을 이끌어가는 권형(權衡)으로 삼았던 것이다. 넓은 도량은 태조(太祖)를 닮았고, 높고 빛난 문장은 세종(世宗)을 본받았으며, 영무(英武)하기는 광묘(光廟)와 같았고, 지행(至行)은 효릉(孝陵)을 닮았었다. 화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일은 선조(宣祖)를 뒤따랐고, 자나깨나 국력 배양에 힘쓰고 대의(大義)를 만천하에 밝힌 것은 효묘(孝廟)와 짝할 만했으며, 현사(賢邪)를 가려 진퇴시키고 매사에 용단이 있었던 것은 숙조(肅祖)의 정치 솜씨였고, 만민이 지향할 표준을 세우고 우리 세신(世臣)들을 보호한 일은 영고(英考)의 마음씀 그것이었다.

봉모당(奉謨堂)을 건립하여 열성조의 신장(宸章) 보한(寶翰)을 모셔두고 19조(朝)의 《보감(寶鑑)》을 편찬하여 태실(太室)에다 두었다. 그리고 다시 《갱장록(羹墻錄)》을 꾸며 선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동시에 선세의 뜻을 뒤따라 실현했으며, 그밖에 적도(赤島)의 비(碑), 귀주(歸州)의 명(銘), 곡주(谷州)의 기(紀), 율원(栗園)의 편(扁), 검암(黔巖)의 갈(碣) 등등 무릇 성적(聖蹟)이 지나간 곳이나 왕실의 뿌리가 되는 고장이면 이렇듯 다 세상이 알게 표장(表章)하였다. 심지어 옛 동판을 모방해 활자를 주조하여 책들이 계속 전해지게 하였고, 남다른 총애의 표시로 술잔을 하사했던 일을 계승함으로써 출중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해마다 두 번 반시(泮試)를 시행하여 중엽(中葉)에 있었던 좋은 제도를 재현하고, 한 달이면 여섯 차례 빈대(賓對)하여 성조(聖祖)의 선정 구현에 몰두했던 일을 본받았다. 관예(觀刈)의 예를 거행하여 농삿일을 권하고 가체(加髢)의 습속을 금하여 사치 풍조를 없앴다.

그밖에도 범위를 가일층 확대하여 충절을 포장하고 공덕을 보답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황폐한 사당에 총광(寵光)을 내려 태백(泰伯)·중옹(仲雍)의 고상한 뜻을 표출하기도 하고, 단을 쌓아 명의 방효유(方孝孺)연자령(練子寧)의 높은 절의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풍성(風聲)을 수립하기도 했다. 곽(郭)·이(李)·순(巡)·원(遠)101) 과 공로가 같은 이들을 나란히 실어 기울어진 국운을 다시 일으킨 공적들을 기록했고, 한(韓)·악(岳)·사(謝)·정(鄭)102) 과 지조가 같은 이들을 똑같이 포상하여 나라 빼앗긴 억울한 마음으로 아픔을 참고 견딘 그들 뜻을 추모하기도 했다. 신축·임인년간에 순국(殉國)했던 자, 기사년의 항의(抗義)했던 자, 무신년의 종정(從征)했던 자, 임오년의 진절(盡節)했던 자들에 대하여도 혹은 즉석에서 감회를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그날 그때를 추상도 해보면서 숨어있는 사실 하나하나를 다 찾아 내어 그에 맞는 은유(恩侑)와 총록(寵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국초 이래 유문(儒門)의 여러 현자들에 대해서도 그가 남긴 저술을 읽고는 마치 아침에 만나고 저녁에 만날 듯이 그를 사모하여 예에 맞게 조두(祖豆)와 분필(芬苾)을 마련하였다. 그야말로 왕은 조종(祖宗)의 자리를 지키고 조종이 하던 정사를 그대로 하면서 가까운 신하를 대하면 곧 조종의 교목(喬木)이라고 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면서는 조종의 적자(赤子)라고 했으며,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 계획 하나 명령 하나까지도 그 모두를 조종의 것을 이어받아 그대로 실현하였다. 이렇듯 꼭 옛법만을 따랐기에 허물도 없었고 잊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제도 하나라도 고치려면 아주 조심조심 신중을 기하여 만년 억년을 두고 조종 유업을 후세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서경》에 이르기를 "대단하다 문왕(文王)이 남긴 교훈이여, 그를 잘 계승하였다 무왕(武王)의 열(烈)이여." 하였듯이 왕도 그래서 열(烈)이 된 것이다.

왕은 생지(生知)의 슬기와 재주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크나큰 육합(六合)에서부터 머나먼 천세(千歲)와 삼교(三敎)의 같고 다른 점, 백대(百代)의 치세와 난세, 심지어 건문(乾文)·지지(地志)·갑병(甲兵)·전곡(錢穀)·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이치는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말은 역시 《시(詩)》·《서(書)》·《예(禮)》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음양(陰陽) 운행의 묘리라든지 이기(二氣) 굴신의 오묘함 같은 것은 신들로서는 들어보지 못했었다.

왕은 남에게 총명(聰明)을 자랑한 적이 없었지만 매양 자리에 임하면 계독(啓牘)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밖의 묘모(廟謨)·대장(臺章)·융정(戎政)·시사(試事)·형옥(刑獄)·재부(財賦)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좌우에서 쉴새없이 주달해도 그를 대응하는 데 있어 늘 여유가 있었다. 왕은 말하기를,

"옛분들이 오관(五官)을 일시에 함께 썼던 것은 꼭 재주만 남달라서가 아니라 다만 분수(分數)에 밝았던 것이다."

했는데,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왕에게는 다 득(得)이 되었던 것이다.

남의 좋은 점을 취하기를 마치 강하(江河)가 터지듯이 했다는 대순(大舜)과 같이 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맞으면 아무리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화기에 찬 얼굴로 받아들였고, 뭇 신하들도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그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었으며 말이 혹 성상 뜻에 거슬려도 위노(威怒)를 가한 적이 없었다. 사리에 닿는 말이면 그를 따르기를 구슬을 굴리듯 했으며 대각(臺閣)을 중히 여겨 언젠가 언자(言者)가 승여(乘輿)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정신(廷臣)이 그에게 죄 내릴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까마귀나 솔개의 새알을 깨뜨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 직무에 대해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줄 일이 아니다."

하였다. 구언(求言)의 하교를 자주 내리면서 언젠가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는 성왕 만년(晩年)까지도 바른 말 격한 논쟁을 하는 자들이 많았었는데 근일에는 할 말을 과감하게 하는 자가 없으니 내가 간언을 하게 만드는 성의가 없어서인가?"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선(善)이 다 왕의 것이었던 것이다.

현자를 목마르듯 찾아 경술(經術)로 발신한 자도 있고, 문학(文學)으로 한 자도 있고, 재유(才猷)로 두각을 내민 자도 있고, 세록(世祿)이나 훈구(勳舊)로 나온 자도 있었는데 혹은 그의 재능을 성숙시키기 위해 두고 기르기도 했고, 혹은 그 선발을 엄격하게 하여 초천(超遷)하기도 했으며, 혹은 남들이 다 버린 속에서 추려내는가 하면 혹은 쌓인 죄를 탕척하고 쓰기도 하여 맛에 따라 모양에 따라 각기 그의 생김새대로 이동하고 말뚝감은 말뚝으로 쓰고 문설주감은 문설주로 썼다. 하늘이 사(私)가 없고 바다가 물을 가려 받지 않듯이 능력만 있으면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를 적재 적소에 썼던 것이다.

침전(寢殿)에다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 팔황(庭衢八荒)’이라는 네 글자를 침전 벽에다 대서로 써서 걸었으며, 또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하여 그 서(序)를 썼는데, 서에 이르기를,

"달은 하나요 물의 흐름은 일만 개나 되는데 물은 이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太極)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이다."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갖가지 재주가 모두 왕의 쓰임이 됐던 것이다. 지학(志學)의 나이 때부터 그 조예가 벌써 상성(上聖)의 경지에 가 있었으나 도(道)를 바라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여 발분 망식을 하고 순서를 따라 가고 또 갔다. 경신년103) 년에 와서까지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듯이 겸손하기만 하여 자신을, 나이 50에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다는 거원(遽瑗)에다 비유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성인 중에도 더욱 성인이었던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기 천성을 다 찾아 그대로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면 모든 물건에 대하여도 그리할 수 있고, 모든 물건에 대해 그리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왕은 그래서 성(聖)이었던 것이다.

왕은 우애도 대단하여 언젠가 은신군(恩信君) 사당에 가서는 손수 술잔을 올리고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이어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고 친히 비문까지 써 세웠으며, 영묘(英廟)의 여러 귀주(貴主) 및 두 군주(君主)에 대해서도 빈틈없는 사랑의 뜻을 보이며 늘 이르기를,

"어버이 마음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하였다. 화완 옹주(和緩翁主)가 하늘에 닿은 죄가 있었지만 법을 어겨가며 너그럽게 용서하고는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몹시 사랑했던 사람이다."

했으며, 찬(禶)이 역적들의 기화(奇貨)가 되어 종묘 사직이 위태위태했었는데 뭇 신하들의 청에 못이겨 비록 사랑을 끊고 법으로 처치하기는 하였어도 오랜 세월을 두고두고 그를 생각하고 또 몹시 슬퍼했었다. 그리고 또 인(䄄)이 나라의 화근이 되어 자전이 누차 윤음을 내렸고 여론도 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처음에는 그를 가까운 섬에다 안치하면서 처자식도 다 함께 있게 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다 대주다가 끝에 가서는 1년에 1번 소견하며 정신(庭臣)들의 강력한 항쟁도 아랑곳 않고 이르기를,

"척포 두속(尺布斗粟)의 비난을 한(漢) 문제(文帝)는 면치 못했었는데 오늘의 전은(全恩) 그 한 일이야 어찌 역사에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의 처지를 말하면 동기간이라고는 그 한사람 뿐인데 제신들은 어떻게 차마 정유년에 있었던 일을 나더러 되풀이하라는 것인가?"

하였다.

조정 신료들에 대해서도 그들 사정을 속속들이 다 살펴 아무리 작은 사정이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고 죽고 살고 하는 즈음에 있어서는 더더욱 보살핌이 지극했었다. 언젠가 봄이 되어 꽃구경을 하기로 했다가 하교하기를,

"상신(相臣)이 죽어 빈소에 있는데 어떻게 놀이를 할 것인가. 두궤(杜蕢)가 술잔을 올렸던 것104) 은 그런 뜻에서였던 것이다."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여 마치 부상자 보듯 하였고 방백(方伯)·수재(守宰)를 면전에 불러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구제의 길을 개유하는가 하면 혹은 각도에 수의 어사(繡衣御史)를 보내 법을 범한 자를 응징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게도 했으며 혹은 조근하러 온 관원을 불러 백성들 질고(疾苦)를 묻기도 했다. 비 한번 내리고 볕 한번 나는 것까지도 신경쓰며 걱정하기를 마치 농부가 자기 농사 걱정하듯 했으며 측우(測雨)하는 그릇 점풍(占風)하는 장대 등을 설치하고 상신(上辛)날이면 사직에 제사지내 풍년의 경사가 있기를 빌고, 정월 초하룻날은 윤음을 내려 농기를 잃지 말도록 미리 권고했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하면 그때마다 마치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듯이 오로지 제휼(濟恤)에만 전념하여 창고를 열어 진구하고, 곡식을 배로 실어다 먹이게도 했으며, 내탕의 것을 덜어내어 돕기도 하고, 곡식 환자를 정지시켜 백성들이 숨을 돌리기도 하였다. 막중한 공헌(貢獻)도 견감해 주고 정당한 왕세(王稅)도 수를 감하는 등 황정(荒政)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벽 위에다 표기해 두고 늘 눈을 돌려 점검했으며 날마다 낭묘(廊廟)의 신들을 접견하고 진구책을 강구했다. 위로와 독려가 어느 도이든 안 간 곳이 없었고 민정을 면밀히 파악하여 만리가 뜰 앞에 훤했으며 사랑이 미치는 곳에 어느 남정 하나 아낙 하나도 굶어 구렁에 굴러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시정(市井)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내무(內貿)의 명칭을 없애고 궁노(宮奴)의 폐단을 단속했으며, 노비(奴婢)인 백성들을 위해서는 추쇄관(推刷官)을 혁파하고 선두안(宣頭案)을 바로잡았으며, 산골 백성들을 위해 엽군(獵軍)을 철폐하고 궁결(宮結)에 세금을 내게 하고, 바닷가 백성들을 위해 대선(隊船)을 창설하고 어수(魚鱐)로 정하였다. 전복 진공을 견감하여 제주도 백성들 어깨를 쉬게 하고, 산삼 진공 수를 감해 서도 백성들 힘이 풀리게 했으며, 사랑의 은전을 베풀어 갓난애들까지도 은택이 입혀졌고, 매장 정책을 실시하여 무덤에까지 사랑이 미쳤다. 한 마디로 어느 백성 하나 사랑을 입지 않은 자 없었고 그리하여 윤음이 한 번 내리기만 하면 백성들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왕의 얼굴은 점점 옛날 안색이 아니었으니 그는 우근(憂勤)이 너무 지나친 까닭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병석에서의 마지막 음성까지도 누누이 강조한 것이 농사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니 아,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왕은 형옥(刑獄)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오직 불쌍하고 가엾은 마음으로 단 한 명이라도 잘못된 억울함이 있을까를 염려한 나머지 각도의 녹안(錄案)을 친히 열람하느라 여러 자루 촛불을 다 태웠고, 언제나 몇 십 안건을 심리하거나 혹 판하(判下)할 때면 시신(侍臣)들이 받아쓰기에 해가 다 저물어도 왕은 일찍이 권태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왕은 이르기를,

"옥사 처리에 있어서는 어떠한 선입견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살릴 수 있는 자를 살리려고 하지 꼭 죽어야 할 자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옥안(獄案)에 관련이 되어 있는 자의 성명은 잊어버리질 않는데 그것은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의로 하여 그리되는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형(刑)은 정치의 보조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 목숨이 비록 중하다 해도 사건이 윤기(倫紀)나 교화(敎化)와 관련이 있으면 꼭 법에만 구애받을 것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전후 여러 역도들이 저들 스스로 천헌(天憲)을 범했으나 그 우두머리만을 죽이는 데 그치고 추종자들은 다스리지 않았다. 흉악한 무리[龍蛇]를 교화시키는 것이, 항상 대역죄인을 사형시키는 것[鯨鯢之戮] 보다 많았다. 왕은 그가 일찍이 근밀(近密)에 있었던 자면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더라도 그를 극률(極律)로 처단하지는 않았고 중세 이후로는 그의 범행이 지극히 중한 자가 아니면 왕부(王府)의 나졸을 내보내지 않았었다. 왕은 이르기를,

"4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실(漢室)의 발판은 풍류 독후(風流篤厚) 금망 소활(禁網疏闊) 이 열덟 글자에 있었던 것이다. 나도 지금 그 자신이 악역(惡逆)을 범했거나 이름이 죄안에 꽉 박혀버린 자가 아니면 모두 소탕(疎蕩)해버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조정에는 대죄에 걸린 사람이 없고 세상에는 애매하게 죄를 당한 집이 없다면 그 어찌 화기(和氣)를 불러 일으키고 국가 운명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비는 바로 그 길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에 두 《명의록(明義錄)》을 만들어 국가의 법과 기강을 정하고 또 흠휼(欽恤)의 법칙을 만들어 제도를 바로잡고 불평의 소지를 없앴다. 죄인을 처자까지 벌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이 배소에 따라가려고 하면 허락했으며, 오래 숨겨졌던 억울함도 모두 왕의 수레 앞에서 호소할 길을 열어주고, 은혜는 저멀리 변방 수졸에게까지 미쳐갔었다. 그뿐 아니라 예경(禮經) 교훈에 따라 나무도 계절에 맞춰 벌채하게 하고, 황충을 바다에 버리게 하여 무릉(武陵)에서 했던 대로 하는 등 작고 꿈틀거리는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살자고 하는 큰 덕화 속에 있었으니 전(傳)에 이른바, 어버이를 사랑하고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고 만물을 사랑한다

는 것으로 왕이 그래서 인(仁)이 된 것이다.

왕은 성학(聖學)이 하나에서 열까지가 다만 경(敬)이라는 글자 한 자에 있다고 생각하고 동정(動靜)을 통하여 그것을 기르고 내외(內外) 구별없이 그것을 닦아 정중한 자세로 남면(南面)을 하고서 언제나 전전긍긍 깊은 못가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였다. 하늘을 섬기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상제를 대하고 있는 듯이 무릇 햇볕이 비치는 곳이면 조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대소변을 볼 때에도 북쪽을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질풍(疾風) 뇌우(雷雨)가 있으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밤을 세워 안절부절 못했으며, 친히 종묘(宗廟)에 제사 모시면서도 예를 갖춘 몸짓으로 문 밖을 나오면서는 조심조심 몸둘 바를 몰라 했고 오르내리며 술잔을 올릴 때는 민첩하기 새가 날듯했기에 제사를 돕는 백관들도 엄숙하고 화목했었다.

언젠가 겨울 제사에 초헌(初獻)을 마친 후 밤이 너무 추웠던 관계로 제신들이 소차(小次)로 드실 것을 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예복 차림으로 끄덕않고 서 있었는데 제사가 끝났을 때는 하늘은 이미 동이 트고 예복 위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리고 혹시 섭행을 명할 때는 꼭 근신(近臣)을 보내 가서 살피게 하고 재전(齋殿)에 납시어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다가 제례가 끝난 다음 비로소 휴식을 취했다. 철마다 모시는 크고 작은 모든 제사에 있어서도 거의 꼭 재거(齋居)하기 때문에 1년이면 재거하는 날이 3분의 2가 되었다.

언젠가 몹시 더운날 빈연(賓筵)에 납시어 하교하기를,

"오늘은 더워서 경들로 하여금 일찍 물러가라고 할 생각이 문득 들었었는데 그것이 바로 들뜬 생각이었다."

하고는, 하루 해를 다 보내고 파조(罷朝)하였다. 그리고는 잔치를 열어 가까이 대하면서 예수(禮數)를 줄이고 활짝 웃어보였는데 그 따스하기가 마치 한 가정의 부자(父子) 사이와도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법전(法殿)으로 나갈 때 군신들 모두가 엎드려 머리를 숙였는데 빈연에서 나왔을 때는 땀이 등에 젖어있었다.

왕은 비록 병석에 누워 있을 때라도 속옷바람으로 신료들을 접견한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빈료(賓僚)나 양방(兩坊)의 관을 역임한 자이면 그가 비록 음관(蔭官)이라도 관직 명칭으로 부르고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퇴조(退朝)하여 사석에 있을 때라도 척원(戚畹)들은 감히 조정(朝政)에 간여를 못했으며 궁중 측근 무리들도 공사(公事)가 아니면 감히 함부로 어전에 오지를 못했었다.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할 때가 많고 환관(宦官)·궁첩(宮妾)들을 접견할 때는 적다고 한 그 말에 대해서만은 내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정사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놓지 않고 게으른 빛 없이 조참(朝參)·상참(常參)·윤대(輪對) 어느 것 하나 폐한 적이 없고 신하들의 장차(章箚)와 중외에서 들어온 주독(奏牘)도 체류된 것이 없었다. 하룻동안 전궁(殿宮) 문안이 끝나고 나면 곧 신하들을 접견하고 밤 깊은 줄을 모르는 때가 많았고 궐문이 열리기도 전에 명령이 내려지는 것이 날마다 보통이었다. 왕은 이르기를,

"수성(守成)의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을 걱정하고 하여 자기 직분만 다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하였다. 절제와 검소를 몸소 실천하여 여러 번 세탁한 옷도 입었으며 곤복(袞服)이 아니고는 비단을 입지 않았다. 어선(御膳)도 하루 두 끼에 불과했고 음식 역시 서너 가지에 불과했으며 침전(寢殿)은 장식도 안 한데다 낮고 좁아 비가 오면 새는 곳이 있었다. 왕은 이르기를,

"도(道)에 뜻을 두고서 궂은 옷 궂은 음식을 부끄러워하면 그런 자와는 얘기할 것도 없다고하지 않았는가. 성인(聖人)이 소박한 옷 입고 낮은 궁실에서 살고 했기에 덕업(德業)이 날로 전진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위의(威儀)는 반드시 갖추어 언제나 거둥 때면 행차가 질서 정연하여 마치 먹줄로 그어놓은 듯했으며 반항(班行)과 의위(儀衛)도 제자리를 벗어남이 없었고 어좌(御座) 곁에는 도서(圖書) 궤안(几案)들이 각기 일정한 자리가 있었다. 왕은 이르기를,

"경재잠(敬齋箴)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며 그 첨시(瞻視)를 존엄히 하라고. 그렇게 외모를 절제하는 것은 속 마음을 수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아무렇게나 지내다가 집에 들어가 부형(父兄)을 섬기고 밖에 나와 군장(君長)을 섬기려고 하면 장차 무엇이 그 밑받침이 될 것인가. 횡거(橫渠)가 그래서 사람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예(禮)부터 가르쳤던 것이다."

하였다.

급기야 나라에 원량(元良)이 있자, 더욱 교육 방법을 솔선수범으로 하기 위하여 순서있게 유도하는 것이 규범이 있고 법칙이 있었으며, 자신의 소리와 자신의 몸이 바로 상대의 표준이 되고 법이 되어 말하지 않아도 자연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신년 책봉을 받고 관례를 올릴 때 예를 갖춘 모습이 의젓하였는데 그것은 평상시 본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정제하고 장중하고 정직하여 상대로 하여금 경의를 일으키게 한다."

했듯이, 왕은 그래서 장(莊)이 된 것이다.

왕이 영종(英宗)을 섬기면서 하늘에서 타고난 지극한 성품으로 10년 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도 오직 조심조심으로 일관했었는데 효손(孝孫)이라는 칭호를 내린 일이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병신년 국상을 당한 후로 휘일(諱日)만 되면 재계하고 슬피 사모하기를 2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태묘(太廟) 배알 때도 13실(室)105) 에 이르면 언제나 몸을 굽히고 단정히 서 마치 그 위(位)에서 무엇인가를 본 듯이 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을 배알하여 비바람 추위 더위에도 폐한 일이 없었고, 또 봄 가을이면 각능을 두루 배알하면서 계절 따라 갖는 감상이 가까운 조상이라 하여 더 후하게 하는 일은 없었으나 유독 원릉(元陵)에만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행행하여 죽도록 사모하는 뜻을 표했었다.

자전(慈殿)·자궁(慈宮)을 섬기면서도 하루 세 번이라도 화한 얼굴 유순한 태도로 의중을 미리 알아 기쁘게 해드리고 물심양면으로 모자람이 없었기에 사랑과 효성이 한데 어우러져 궁위(宮闈) 사이에 화기가 가득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나라에 일이 있으면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내 일찍이 자전께 여쭙지 않고 행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자전 배알 때는 언제나 전문(殿門)을 바라보고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걸으면서, 우리 가법(家法)이 그렇다고 했고, 만수전(萬壽殿)을 수리하면서는 전문 밖에다 막차를 설치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하다가 공사가 끝나서야 내전으로 돌아왔으며, 원릉(園陵) 행행 때는 비록 종일 힘들게 움직였어도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리 날이 저문 뒤에 입궐했더라도 맨 먼저 동조(東朝)로 갔는데 그것은 바로 나갈 때 고하고 돌아와서는 뵙는[出告反面] 뜻이었던 것이다.

을묘년에 술잔을 올리고는 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로서 믿고 우러러 보는 곳이라고는 우리 자궁뿐인데 지금 이 고장에서 이 예를 거행하게 되어 지극한 소원이 대강 풀린 셈이다."

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갑자년은 바로 자전의 육순(六旬)에다 자궁의 칠순(七旬)이 되는 해여서 그때 가서 경례(慶禮)를 다시 거행하기로 하고 뿔잔을 화궁(華宮)에 간직해 두게 하고서 좋은 그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어(仙馭)가 이미 떠나고 말았으니, 아, 원통하다.

비궁(閟宮)에 대해서는 지극한 슬픔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 일생을 두고 슬피 사모하였고, 정(程)·주(朱)의 예를 절충하여 축식(祝式)을 따로 정하고 춘추(春秋) 대의에 따라 주토(誅討)를 가하기도 했었다. 금등(金縢)의 글이 나타나 왕의 효성이 세상에 더욱 알려졌는가 하면 괴대(槐臺)를 세워 후세에 영원한 혜택을 남겼으며, 제사 의식과 기물을 다 갖추어 향사가 예에 어긋남이 없었고,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전성(展省)도 거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즉위하던 그날 내린 그 윤음이야말로 바로 몇 십 가지 대의(大義)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대의여서 우리 신들이 죽도록 높이높이 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하늘이 길택(吉宅)을 주어 면례(緬禮)를 잘 치루었는데 광지(壙誌)를 지어 숨겨진 빛을 드러내고 발인 의식을 성대히 하여 종사(終事)를 잘 마무리했으며, 원호(園號)를 높여 숭보(崇報)를 나타내고 상설(象設)을 갖추어 체제(體制)를 존엄하게 했다. 그리고 화성[陪京]에다 행궁(行宮)을 두어 원침을 수호하는 곳을 더 장엄하게 꾸미고, 어진(御眞)을 재전(齋殿)에 모셔 정성(定省)의 마음을 거기에다 썼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해마다 원침 배알 때면 지지대(遲遲臺)에다 행차를 멈추고 시간을 끌며 멀리 바라보면서 차마 금방 길을 뜨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공부자가 부모(父母)의 나라를 떠나면서는 머뭇머뭇했던 그 뜻이었던 것이다.

경신년 봄 행행 때 읊은 어시(御詩)에

밤을 새운 화성땅 돌아보면 멀기만 해

지지대 서서 자꾸 또 머뭇거리네

했었는데, 그 시를 쓰고는 왕의 행차가 그곳을 다시는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슬픔을 삼키고 아픔을 씹으며 임금 노릇하는 것도 좋은 줄을 몰랐기에 24년간 왕위에 있었으나 뭇 신하들이 감히 휘호 올릴 것을 청하지도 못했었고, 또 당(堂)을 노래당(老來堂)이라 이름하고 누(樓)를 신풍루(新豊樓)라고 이름한 것은 우리 신들로서는 차마 말못할 성상의 은미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서 그 모두가 성상의 효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요(堯)·순(舜)의 도는 효제(孝悌) 그것이다."

했듯이, 왕이 그래서 효(孝)가 된 것이다.

왕은 광대(廣大)한 영역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고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정미(精微)를 기했으며, 최고 고명(高明)의 경지에 오르고 그리고 중용(中庸)의 도를 통달했는데 이는 도학(道學)의 바름이었고, 천지 사이에다 내놓아도 어긋남이 없고 백세 후에 다시 보아도 의혹될게 없었으니 이는 의리(義理)가 올바른 것이었으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나서 조정(朝廷)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 나서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자 모든 백성, 모든 일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는 다스리는 법과 규모가 바른 것이었다. 성조(聖祖)로부터 정일(精一)의 전통을 이어받고 성자(聖子)에게는 연익(燕翼)의 교훈을 물려주어 시작에서 끝까지가 완성되었으니 이는 왕자(王者)로서 크게 정상의 도리를 따른 것이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이란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상대가 발라지는 것이다."

했듯이, 왕이 그래서 정(正)이 된 것이다.

아, 주공(周公) 이전에는 성인(聖人)이 윗자리에 있었으나 주공 이후로는 성인이 아랫자리에 있었다. 윗자리에 있을 경우에는 그의 도(道)가 행해지지만 아래에 있으면 학(學)이 밝아지는 법이니 ·공자·주자가 환경은 비록 달랐으나 그 공로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왕은 공자·주자의 학으로써 ·의 도를 맡아 사문(斯文)을 크게 개척하셨으니, 5백 년을 주기로 한 분씩 세상에 나타나는 명세(命世)의 인물이 바로 왕이었는데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그 수명을 제한했기에 성인과 성인이 주고받던 전통을 이제 다시 찾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고 학이 밝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했듯이 그 역시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 원통하여라.

신은 지식이래야 성인의 깊이를 알기에 부족하고 문장이래야 그 덕과 모든 아름다움을 그려내기에 부족하지만 그러나 10년을 유악(帷幄)에 있으면서 남다른 은총과 예우를 입었었고 또 대화가 오고 가는 법연에서도 모셔본 적이 있기에 감히 턱도 없는 한두 소견을 내세워 하늘의 태양을 묘사해보려고 한 것이다. 백세 이후에 이 참람된 행위를 용서하고 그 뜻을 슬프게 보아줄 자가 있을 것이다. 【행 지중추부사 이만수(李晩秀)가 제술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94면
  •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 [註 020]
    단서(丹書) : 주 무왕(周武王) 당시 천하 다스리는 법으로 붉은 참새가 물고 왔다는 붉은 글씨로 된 책. 《대대례(大戴禮)》 무왕 천조(武王踐祚).
  • [註 021]
    《소학(小學)》 제사(題辭) 제3장의 16구절 : 소학 제사(小學題辭) 중에서 애친 경형 충군 제장(愛親敬兄忠君悌長)에서부터 이배기근 이달기지(以培其根以達其枝)까지의 16구절을 이름. 《소학(小學)》.
  • [註 022]
    한 광무(漢光武)가 하남(河南)·남양(南陽)에 관하여 말한 명제(明帝)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었는데, : 광무제 당시에 각 군현의 간전(墾田)·호구(戶口) 등 기록이 부실한 것들이 많아 그를 정확히 조사해 올리도록 했는데, 진류(陳留) 고을에서 하남(河南)·남양(南陽)은 조사할 수가 없다는 서간(書簡)을 올렸다. 그것을 본 광무가 성을 내 따져묻자 명제가 장막 뒤에 있다가 듣고서 말하기를 "하남은 제성(帝城)이기 때문에 근신(近臣)들이 많이 살고, 남양은 제향(帝鄕)이기 때문에 근친(近親)들이 많이 살고 있어 그 전택(田宅)들이 제도 이상으로 화려한 것이 많을 것이므로 어느 것을 어떻게 표준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연감류함(淵鑑類函)》 제왕부(帝王部).
  • [註 023]
    황형(皇兄) : 경종(景宗)을 이름.
  • [註 024]
    정유년 : 왕 세자가 청정하기 시작한 해임.
  • [註 025]
    신축년 : 1721 경종 1년.
  • [註 026]
    임오년 : 1762 영종 38년.
  • [註 027]
    소헌 왕후(昭憲王后) : 세종 비(世宗妃) 심씨(沈氏).
  • [註 028]
    제이대부(祭以大夫)의 예 : 장사의 예는 망인(亡人)의 신분에 맞게 하고, 제례는 그 제사를 모시는 아들의 신분에 따라 올리는 것. 아버지는 사(士)이고 아들이 대부(大夫)이면 장례는 사의 예로 치르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모심 《중용(中庸)》.
  • [註 029]
    복왕(濮王)에게 하던 의식. : 복왕은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生父)였는데,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영종은 자기 생부인 복왕을 황고(皇考)라고 칭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형이라는 뜻으로 황백(皇伯)이라고 하였다. 《송사(宋史)》 권240.
  • [註 030]
    오향(五享) : 다섯 번의 제향. 1년 4계절의 첫달과 섣달 납일(臘日)에 제향을 올림.
  • [註 031]
    영종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 [註 032]
    채확(蔡確) : 송(宋)의 간신(姦臣) 중의 한 사람. 진사(進士)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모두 교묘한 중상 모략으로 옥사를 일으킨 후 남의 자리를 빼앗아 앉았기에 사대부들은 입을 모아 그를 꾸짖었다. 그가 안륙(安陸)에 있으면서 언젠가 거개정(車蓋亭)에 가 놀며 시(詩) 10수를 읊었는데 그 시가 왕실을 헐뜯은 내용이라 하여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양도(梁燾) 등이 연달아 소장을 올려 확에게 죄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송사(宋史)》 권471.
  • [註 033]
    조조(朝祖)의 예 : 발인(發靷)하기 하루 전에 축(祝)이 혼백(魂魄)을 모시고 사당에 가는 것을 일러 조조(朝祖)라고 하는데, 이는 그 망인이 생전에 먼 곳으로 출타하려면 반드시 사당에 와 고하던 의식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오학록(吾學錄)》.
  • [註 034]
    신한부(信漢符) : 신부(信符)와 한부(漢符)로서 신부는 대궐에 드나드는 하례(下隷)에게 병조(兵曹)가 발행하는 신표이고, 한부는 궁정 출입의 관비(官婢)들이 차고 다니는 신표이다.
  • [註 035]
    빈흥(賓興)의 법 : 대사도(大司徒)가 육덕(六德)인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 육행(六行)인 효우목인임휼(孝友睦婣任恤), 육예(六藝)인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로 만민을 가르쳐 그에 능통한 자가 있으면 그를 추천하여 쓰게 했던 법. 《주례(周禮)》 지관(地官).
  • [註 036]
    서한(西漢) 시대 현량(賢良) 선임 제도 : 한 무제(漢武帝)가 천하에 조서(詔書)를 내려, 현량 방정(賢良方正), 직언 극간(直言極諫)의 선비를 천거하라고 한 제도.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 [註 037]
    격옥(隔屋) 제도 : 명대(明代)에 과거장의 간사한 짓을 막기 위해 발로 사이를 막아 서로 통래를 못하게 하고, 방을 따로 정해 치도(治道)를 짜내게 하였다. 그리고 안에서는 고시관(考試官)이 맡아보고, 밖에서는 감시관(監試官)이 맡아보면서 또 제조관(提調官)으로 하여금 총괄적으로 살피게 하였음. 《홍재전서(弘齋全書)》 권26 윤음(綸音).
  • [註 038]
    공거의(貢擧議) : 선거(選擧)에 있어 시부(詩賦) 출제를 지양하고 경(經)·자(子)·사(史)·시무(時務)로 나누어 시험을 보여야 한다는 주희(朱熹)의 주장이다. 《송사(宋史)》 권156.
  • [註 039]
    용도(龍圖)·천장(天章) : 송(宋)나라 때 태종과 진종의 어제를 모셔둔 두 전각 이름.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
  • [註 040]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041]
    정빈(靖嬪) : 진종의 생모 이씨(李氏).
  • [註 042]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 [註 043]
    녹수(錄囚) : 죄수 신상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시로 조사 기록하는 것. 《한서(漢書)》 하무전(何武傳).
  • [註 044]
    추인(酋人) : 술 빚는 일을 맡은 관리. 주인(酒人).
  • [註 045]
    계유년 : 1753 영조 29년.
  • [註 046]
    등가(登歌)·헌가(軒架) : 궁중의 음악. 등가는 당상악(堂上樂)으로 노래를 주로 하고 현악기가 주인데 반해 헌가는 당하악(堂下樂)으로서 대례(大禮)·대제(大祭) 때 많이 쓰이고 악기로는 쇠북·경쇠·북 등 타악기가 주종을 이룸.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 [註 047]
    성조(聖祖) : 효종(孝宗)을 말함.
  • [註 048]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 [註 049]
    순문약(荀文若) : 후한(後漢) 때 영음(潁陰) 사람 순욱(荀彧). 문약(文若)은 그의 자임. 조조(曹操)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그 공로로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지기도 했는데, 뒤에 조조가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다가 조조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자진하였음. 《후한서(後漢書)》 권100.
  • [註 050]
    사충사(四忠祠) :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 [註 051]
    사태사(四太師) :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을 이름. 《고려사(高麗史)》.
  • [註 052]
    수레에서 내려 울 일 : 우(禹)가 길을 나섰다가 죄인을 보면 수레에서 내려 울면서 이르기를 "요순(堯舜)의 백성들은 모두 다 요순과 똑같은 마음이었는데, 지금 과인(寡人)이 임금이 되고 나니 백성들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어 내 그것을 슬퍼하노라." 하였다 한다. 《설원(說苑)》 군도(君道).
  • [註 053]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054]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055]
    경술년 : 1730 영조 6년.
  • [註 056]
    서서(西序)의 대훈(大訓) : 왕이 죽은 후 그가 평소 귀중히 여기던 물건들을 챙겨 진열하는 것. 성왕(成王)이 죽자, 적도(赤刀)·대훈(大訓)·홍벽(弘璧)·완염(琬琰)을 서쪽 행랑에다 두었다고 했음. 대훈(大訓)은 삼황(三皇)·오제(五帝)의 글을 말한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고명(顧命).
  • [註 057]
    방구(方邱) : 토지에 제사하던 단(壇).
  • [註 058]
    갑자년 : 1744 영조 20년.
  • [註 059]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 [註 060]
    양 효왕(梁孝王)의 옥사 : 한 경제(漢景帝) 때 태후가 양 효왕 무를 후사로 삼으려 했는데 원앙(袁盎)이 반대하자, 양왕은 자객을 시켜 원앙을 죽였다. 경제가 이 옥사를 전숙(田叔)에게 맡기자 전숙은 정치적으로 해결하길 권하여 양왕이 무사할 수 있었다. 《한서(漢書)》 권37 전숙전(田叔傳).
  • [註 061]
    《문원보불(文苑黼黻)》 : 정조 11년(1787)에 간행된 22책으로 된 책 이름. 이조 초기 이후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문장을 모은 책으로 옥책문(玉冊文)·반교(頒敎)·위유(慰諭)·교명문(敎命文)·죽책문(竹冊文)·애책문(哀冊文)·제문(祭文)·상량문(上樑文)·국서(國書)·노포(露布) 등등이 수록되어 있음.
  • [註 062]
    계좌(癸坐) : 북동쪽.
  • [註 063]
    양궁(兩宮) : 영조(英祖)와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말함.
  • [註 064]
    경진년 : 1760 영조 36년.
  • [註 065]
    본지(本支)의 시 : 조상의 덕화로 그 자손들이 백세를 두고 번성하리라는 내용의 시.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지집(文王之什).
  • [註 066]
    반석(磐石) 노래 : 한 고제(漢高帝)가 자손들을 봉하면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그 영토를 들쭉날쭉 서로 엇물리게 배정하였으므로 그를 일러 반석지종(磐石之宗)이라고 하였음. 《사기(史記)》 문제기(文帝記).
  • [註 067]
    감포(減布) : 영조(英祖) 연간에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종래 양포세(良布稅)라는 명목으로 2필씩 받아오던 것을 1필씩으로 감하였음. 감필(減疋).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19.
  • [註 068]
    선무포(選武布) : 각 지방의 군관 중에서 무술시험을 거쳐 선출한 군관을 일러 선무 군관이라 하는데 그 군관에게 주는 보포를 말한 것.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20.
  • [註 069]
    신해년에 제정한 법 : 영조(英祖) 7년(1731) 봄에 제정한 공·사천법(公私賤法). 아들은 부역(父役)을, 딸은 모역(母役)을 따르게 하였음.
  • [註 070]
    호혜당(戶惠堂) : 호조 판서.
  • [註 071]
    남상(南床) : 홍문관 정자.
  • [註 072]
    구주 문자(口奏文字) : 영조(英祖)가 진전(眞殿)에다 왕세손(王世孫)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주달한 문자. 《영종실록(英宗實錄)》 권103.
  • [註 073]
    구(耉)·휘(輝)·경(鏡)·몽(夢) : 조태구·유봉휘·김일경·박필몽.
  • [註 074]
    사자대(思子臺)·망자궁(望子宮) : 궁전 이름. 무고 옥사로 인해 죄 없이 죽은 여태자(戾太子)를 가련히 여겨 한 무제(漢武帝)가 지은 궁전. 《한서(漢書)》 여태자전(戾太子傳).
  • [註 075]
    전석(田錫)이 초고 불태운 것 : 송(宋)의 전석(田錫)이 간의 대부(諫議大夫)·사관 수찬(史館修撰)을 역임하면서 사건만 발생하면 할 말을 다하여 그의 봉소(封疏)가 53권에 달했는데 나중에 그 봉소 모두를 불태워버렸다. 《송사(宋史)》 권293.
  • [註 076]
    주창(周昌)처럼 대들면서 대답하기는 : 주창(周昌)이 원래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입바른 말을 잘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太子)를 폐하려고 하자 주창이 화를 내면서 더욱 더듬거리는 말로, 면전에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사기(史記)》 권96 장승상전(張丞相傳).
  • [註 077]
    항양(恒暘) : 제철에 맞지 않게 계속해서 뜨거운 햇볕이 나서 모든 물건을 말리는 것은 임금이 정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았음. 《시경(書經)》 홍범(洪範).
  • [註 078]
    ‘몽둥이 하나로 치면 한 줄기 몽둥이 자국이 나고, 손바닥으로 후려치면 손바닥만큼 붉은 자국이 남는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34, 논어(論語) 16에 언급되어 있는 말로, 정조가 당시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이란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하여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인용한 내용이다. 《정조(正祖)》 18년 7월 11일조.
  • [註 079]
    분류(分留) : 환곡(還穀) 방출 때 쓰던 한 가지 방법.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했던 곡물을 추수가 끝난 후 일정한 이식을 붙여 받아들였던 것을 이듬해 봄 다시 방출할 때 그 재고량의 절반은 창고에 쌓아두고 나머지 절반을 방출하는데 그 쌓아둔 절반을 유(留)라고 하고 방출된 절반을 분(分)이라고 함. 《대전회통(大典會通)》 호전(戶典).
  • [註 080]
    자양 : 주자를 말함.
  • [註 081]
    오현(五賢) : 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
  • [註 082]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윤집·오달재.
  • [註 083]
    칠의사(七義士) : 병자 호란 이후 청주(淸主)를 죽이고 명(明)과 우리 나라 국권을 회복하려다가 사전에 그 사실이 청에 발각되어 청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우리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황일호(黃一皓)·최효일(崔孝逸)·차충량(車忠亮)·차예량(車禮亮)·안극함(安克諴)·장후건(張厚健)·차맹윤(車孟胤). 《존주휘편(尊周彙編)》 권13.
  • [註 084]
    상형(祥刑) : 형벌이란 원래 상서롭지 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써서 불선(不善)을 제거하고 선한 자가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면 결과적으로 대단히 상서로운 것이라는 것. 《서경(書經)》 여형(呂刑).
  • [註 085]
    삼전(三傳) : 좌전·곡량전·공양전.
  • [註 086]
    ’하나를 행하면 셋이 좋아진다.’ : 나이 어려 아직은 더 배워야 한다고 양보하는 한 가지 일을 하면 자식 노릇하는 도리를 알게 되고, 신하 노릇하는 도리를 알게 되고, 자제 노릇하는 도리를 알게 되어 부자(父子)·군신(君臣)·장유(長幼)의 세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 《예기(禮記)》 문왕 세자(文王世子).
  • [註 087]
    서씨(庶氏)·전씨(剪氏) : 서씨는 사람을 해치는 벌레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고, 전씨는 좀 등 기물(器物)을 갉아먹는 벌레 제거를 맡은 관직. 《주례(周禮)》 추관(秋官) 사구(司寇).
  • [註 088]
    복파(伏波)가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생생한 증험 : 후한(後漢)의 복파 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무릉 태수(武陵太守)가 되자 황충이 모두 바다로 날아들어가 어하(魚蝦)가 되었다고 함. 《동관한기(東觀漢紀)》.
  • [註 089]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여놓은 것과 같은 뜻 : 송(宋)의 정호(程顥)가 죽은 후 정호의 아우 정이(程頤)가 묘표(墓表)를 쓰면서 맹자 이후 그 도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명도 선생 한 사람뿐이라는 뜻을 밝혔는데, 그 글이 《맹자》 7편 맨 말미의 장하주(章下註)로 실려 있다. 《오경백편(五經百篇)》 말미에 주희(朱熹)의 장구서(章句序)를 붙인 것도 주희가 유일한 도통 전수자임을 밝힌 뜻이라는 것임.
  • [註 090]
    토우(土牛) : 흙으로 만든 소. 옛날에 입춘(立春) 전날 흙으로 소 형상을 만들어 대문 밖에다 세워 두고 그로써 겨울 추위를 마지막 보내고 농경(農耕)을 권장하는 뜻을 보였음. 《예기(禮記)》 월명(月令).
  • [註 091]
    옹정(雍正) 을묘년에 쓴 구례 : 영조(英祖) 11년(1735) 8월에 옹정제 청 세종(淸世宗)이 죽었는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그의 복(服)으로 생포(生布)로 만든 단령(團領)을 가를 훔치지 않고, 생마대(生麻帶)에다 생포로 싼 사모(紗帽)를 썼었음.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1.
  • [註 092]
    불이참(不貳斬) : 참최(斬衰)복은 두 번 입지 않음. 우리 나라는 명(明)을 천자(天子)의 나라로 여겨 그 나라 황제(皇帝)가 죽었을 때 참최를 입었으므로 다시 청(淸)나라 황제를 위해 참최를 또 입을 수는 없다는 것.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1.
  • [註 093]
    단경 성후(端敬聖后) : 중종의 원비 신씨(愼氏).
  • [註 094]
    주량(舟梁) : 왕가의 친영(親迎)을 이름. 문왕(文王)이 태사(太姒)를 위수(渭水) 곁에서 친영하면서 배로 교량을 만들어 이용한 데서 나온 말임.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
  • [註 095]
    장주(漳州)에서 했던 것 : 주희(朱熹)가 광종(光宗) 때 장주(漳州)를 맡아 다스리면서 그곳 풍속이 예(禮)를 모르고 석씨(釋氏)를 신봉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옛 상장(喪葬)과 가취(嫁娶)의 의식을 추려 뽑아 늘 게시해두고 부로(父老)들이 그것을 익혀 자기 자제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남녀가 승려(僧廬)에 모여 전경회(傳經會)를 갖는 것 등을 금하였음. 《송사(宋史)》 권429.
  • [註 096]
    지록(池錄)과 요록(饒錄) 두 본 : 《어류(語類)》는 송(宋)의 여정덕(黎靖德)이 140권으로 편찬하기 이전에 이도전(李道傳)이 요덕명(廖德明) 등 32인이 기록해둔 43권에다 장흡록(張洽錄) 1권을 증보하여 지주(池州)에서 발간한 지록(池錄)이 있고, 도전의 아우 성전(性傳)이 황간(黃幹) 등 42인이 기록한 46권을 수집하여 요주(饒州)에서 발간한 요록(饒錄)이 있으며, 채항(蔡抗)이 양방(楊方) 등 32인이 기록한 것을 26권으로 편집해서 역시 요주에서 발간한 요후록(饒後錄)이 있다. 또 오견(吳堅)이 이상 3개 록(錄)에 수록된 것 이외의 29인과 또 아직 간행이 안 된 4인의 기록을 증보하여 건안(建安)에서 간행한 20권의 건록(建錄) 등이 있고 그것을 분류 편집한 것으로 황사의(黃士毅)가 미주(眉州)에서 발간한 미본(眉本) 또는 촉본(蜀本)과 왕필(王佖)이 휘주(徽州)에서 발간한 휘본(徽本) 등이 있음.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子部) 유가류(儒家類).
  • [註 097]
    분전구색(墳典邱索) : 옛날의 전적을 이른바 삼분(三墳)·오전(五典)·구구(九丘)·팔색(八索)이라 하였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12년.
  • [註 098]
    수사낙민(洙泗洛閩) : 공자(孔子)의 학통인 수사학(洙泗學)과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그리고 민중(閩中)의 주희(朱熹)의 학문을 말한다.
  • [註 099]
    오교 삼물(五敎三物) : 오륜(五倫)과 향삼물(鄕三物). 부자 유친(父子有親)·군신 유의(君臣有義)·부부 유별(夫婦有別)·장유 유서(長幼有序)·붕우 유신(朋友有信)과 1. 육덕(六德)인 지·인·성·의·충·화(智仁聖義忠和), 2. 육행(六行)인 효·우·목·인·임·휼(孝友睦婣任恤), 3. 육예(六禮)인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
  • [註 100]
    육화(六花) : 진(陣) 치는 법. 당(唐)의 이정(李靖)이 제갈 양(諸葛亮)의 팔진도(八陣圖)를 기본으로 하여 만든 진법. 육화진(六花陣)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 오지(吳志).
  • [註 101]
    곽(郭)·이(李)·순(巡)·원(遠) : 당(唐)의 곽자의(郭子儀)·이광필(李光弼)·장순(張巡)·허원(許遠)을 말한다. 곽자의와 이광필은 안(安)·사(史)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워 세상에서는 이(李)·곽(郭)이라고 불리웠으며, 장순은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수양(睢陽)에서 그 고을 태수(太守) 허원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서(唐書)》 권136·137·192.
  • [註 102]
    한(韓)·악(岳)·사(謝)·정(鄭) : 송(宋)의 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사방득(謝枋得)·정소남(鄭所南)을 말한다 한세충은 북송(北宋)이 망하자 수병(水兵)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진회(秦檜)의 책략에 의해 병권(兵權)을 빼앗기고는 서호(西湖)에 숨어 살며 여생을 보냈고, 악비는 역시 금(金)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중 화의(和議)가 일어나 글르 반대하다가 진회의 참소로 천추의 한을 품고 옥중에서 죽었으며, 사방득은 의병을 일으켜 원(元)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그곳 수도로 압송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고, 정소남은 송나라가 망하자 일생을 원(元)에 대한 적개심으로 보내며 조송(趙宋)만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소남·사초(思肖) 등으로 바꾸고 앉아도 꼭 남쪽을 향해 앉았다 한다. 《송사(宋史)》 권365·425.
  • [註 103]
    경신년 : 1800 정조 24년.
  • [註 104]
    두궤(杜蕢)가 술잔을 올렸던 것 : 진(晉)의 대부(大夫) 지도자(知悼子)가 죽어 장례를 치르기 전에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이조(李調)를 데리고 술을 마시며 풍악을 울리자 두궤(杜蕢)가 술잔을 들어 사광·이조에게 각각 한 잔씩을 먹이고 자신도 한 잔 마시고서 흉일(凶日)에는 원래 주악을 않는 것인데 지도자(知悼子)가 죽어 시신이 아직 집에 있으니 그런 흉일이 없는데도 사광이 태사(太師)로서 그것을 임금께 고하지 아니했으므로 그 벌주를 마셔야 했고, 이조는 측근의 신하로서 임금 잘못을 두고 보았으므로 마셔야 하고, 자기는 재부(宰夫)로서 자기 영역 이외의 일을 간섭한 죄로 벌주를 마셨다고 했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
  • [註 105]
    13실(室) : 영묘(英廟)의 실.

○行狀。 嗚呼! 大行大王賓天之越翼月丙戌, 我嗣王殿下, 誕降哀旨, 命三公、九卿、館閣、三司之臣, 上廟號曰正宗, 陵號曰健陵, 諡號曰文成武烈聖仁莊孝。 禮所云大行受大名也。 又命諸詞臣, 撰進狀、冊、碑、誌之文, 以克襄大禮, 以昭示盛美于千萬世, 臣等稽首泣而奏曰: "我大行大王, 光御二十有五年, 盛德深仁, 宏謨大業, 巍巍奕奕, 如天地日月, 入人肌髓, 被人耳目, 惟春邸以前誕聖毓德之際, 宮梱之內, 燕閑之中, 外廷之所未及覩記者, 不可不表揭, 而該載內下行錄, 卽我列聖故事, 臣等敢昧死以請。" 於是, 貞純大妃, 書下八則, 惠慶宮書下十九則。 臣晩秀, 謹盥讀揚扢, 抆血上狀曰。 嗚呼! 大行大王姓, 諱, 字亨運, 英宗大王之孫, 莊獻世子之子。 母惠嬪 豐山 洪氏, 領議政鳳漢女。 以英宗命, 爲眞宗大王之嗣, 母后孝純王后, 豐壤 趙氏左議政豐陵府院君 文命女。 王, 以英宗二十八年壬申九月二十二日己卯之丑時, 誕降于昌慶宮景春殿, 卽肅廟所嘗御也。 辛未冬, 莊獻世子夢, 神龍抱珠入寢, 像夢中所覩, 畫揭宮壁, 誕降前一日, 天大雷雨, 流雲布濩, 彩龍數十, 蜿蜒騰空, 都人士咸覩而異之。 及降覃訏之音, 發如洪鍾, 宮中皆驚, 隆準龍顔, 河目海口, 日表儼若長成。 英宗臨視喜甚, 語惠慶宮曰: "得此兒, 宗社無憂乎。" 手撫額曰, 是酷類予。 卽日定號爲元孫。 未百日而立, 未周歲而步, 自未語, 見文字則輒有喜色, 喜觀孝子圖、聖蹟圖, 常效夫子設俎豆之儀。 衣不御華美, 汙綻而旡斁, 玩好之物, 未嘗寓目。 流虹之初回也, 晬盤百玩, 一無顧焉, 端坐展書讀之。 癸酉冬, 上徽號于仁元聖母, 王具袍靴行禮, 拜跪陞降, 不待阿母, 六宮聳歎。 甲戌八月, 設輔養廳, 乙亥春, 始受紫陽《小學》, 英宗語筵臣曰: "元孫講訖, 猶不釋卷, 今纔四歲, 體貌氣象, 大異凡兒, 天將祚宋歟?" 自是知思日進, 未明而興, 盥櫛讀書, 惠慶宮慮其過勤, 戒勿夙興, 每遮燈而盥, 不使人知。 丁丑春, 仁元貞聖兩聖母, 連月禮陟, 時王, 始衣若干尺, 未及行饋奠之禮, 而所御之堂地邇殯殿, 聞朝晡哭聲, 輒携藁薦望哭。 己卯春二月癸亥, 冊王世孫, 閏六月庚子, 受冊于明政殿, 周旋中規, 禮儀可象。 英宗命陞殿, 敎曰: "昔周武王服冕, 受丹書于師尙父, 今者冊封, 三百年宗社興替, 繫爾一人。 爾在沖齡, 當以淺者近者敎之。" 手書《小學》題辭第三章十六言賜之。 是歲, 貞純大妃膺迎渭之禮, 王, 事大妃如事惠慶宮, 辛巳春, 英宗動駕, 王陪焉, 駐輦雲從街, 使觀光士民, 仰覩世孫。 還宮問曰: "今日觀光者衆, 期望於汝何事也?" 王對曰: "望臣之爲善也。" 曰: "爲善易乎?" 對曰: "易也。" 諭善徐志修奏曰: "以爲易然後, 方能勇進也。" 英宗大喜。 二月乙未定字, 三月己酉齒學, 旣謁先聖, 請業於博士, 講《小學》。 王問曰: "明命在吾身, 指何境界, 欲求赫然, 作何工夫?" 博士不能對, 圜橋觀者數萬, 相顧賀曰聖人也。 是月丁巳, 冠于景賢堂, 壬午春二月丙寅, 行嘉禮, 淸風 金氏贈領議政淸原府院君 時默女, 今王大妃。 夏五月, 莊獻世子薨, 王哀毁踰度, 侍者不忍仰視。 侍英宗慶熙宮, 晝則常處御座左右, 夜則在暎嬪之側, 一飯一寢, 寬慰周至, 後甲申, 暎嬪病篤, 竭誠扶護, 及喪, 悲痛如壬年。 時惠慶宮, 在昌德宮哀疚澟綴, 頻有不安節。 王, 聞輒廢寢食, 每曉上手書承安後, 方進膳, 如是者日三四。 秋七月, 命依皇明故事, 以世孫爲東宮, 設春桂坊官。 凡賓對講筵大小諸臣入侍, 頻命王侍坐, 或辨論經旨, 或參聽朝政。 嘗於賓筵問曰: "三南告歉, 何以濟民?" 王對曰: "有粟則可濟。" 曰 "何處得粟來," 對曰: "如梁惠王事亦可也。" 英宗笑曰: "善。 今日賓對問答, 欲使汝早知之也。" 癸未春, 召接贊善宋明欽, 時講《孟子》, 明欽仰問《孟子》宗旨, 王曰: "遏人欲存天理也。" 明欽請問立志, 王曰: "所願則也。" 明欽退語人曰: "聰明英睿, 上智之姿, 東方之福也。" 甲申春二月壬寅, 命以王爲孝章世子嗣承宗統, 孝章世子, 卽眞廟也。 一日講官奏三南飢民, 鶉衣菜色狀, 王惻然久之, 是日夕膳, 舍肉不御。 英宗問其故, 對曰: "今日講官, 語飢民事, 心焉惻傷, 不忍下箸也。" 乙酉春侍賓筵, 英宗曰: "昔 光武明帝 河南南陽之對, 予今以忠州逋吏事, 問於汝。 諸臣以爲王法不可屈, 國儲不可縮, 其言是否?" 王對曰: "十數官吏之傅生, 卽天地好生之大德。 豈徵捧舊逋之比乎?" 曰: "君欲加賦, 而孔門弟子欲蠲稅, 何也?" 對曰: "民依於國, 國依於民, 百姓足, 君誰與不足也?" 曰: "如何可以富民?" 對曰: "君仁而愛民, 民可使富也。" 曰: "如何爲愛民?" 對曰: "不作無益, 以奪民時也。" 英宗曰: "善哉言乎。" 遂命減諸道舊逋。 是冬, 王遘大疾。 英宗憂甚, 卽王所居之堂, 隔障而御, 値書筵日, 親行召對, 使王聽之, 問左右曰: "世孫喜否?" 對曰 "喜," 英宗亦喜。 又敎曰: "世孫執心固, 雖病不示呻痛色, 安予心也。" 丙戌春, 英宗患候, 又屢朔沈重, 王新經大疾之餘, 日夜侍湯, 跬步不離, 坐臥起居, 親自扶將, 洞屬憂煎, 傍人爲感。 是歲翼瘳之慶, 咸稱睿孝所格也。 自是歲, 凡朝臣入侍, 王必侍坐。 丁亥春, 英宗親耕于耤田, 英宗五推, 王七推。 辛卯春, 宗臣有罪, 英宗震怒, 敎曰: "此不防漸, 則國本不可安也, 竝投耽羅。" 未幾死于謫。 王聞之, 大傷悼, 遣人庀恤, 護其柩以歸, 戚臣有以爲言, 手札答曰: "承聞弟訃於萬里海外, 烟波渺闊, 末由撫柩痛哭, 感古愴今, 摧咽難抑。 難得者兄弟, 不可廢者倫理, 聖人, 人倫之至也。 雖煩上徹, 豈無俯燭?" 壬辰, 英宗寶籌日隆, 群臣請擧揄揚之禮, 英宗謙讓不許。 王手疏懇祈, 積誠回天, 英宗敎曰: "一隅靑邱, 祖依孫孫依祖, 見爾章, 予安得不感?" 廼屈意從之。 蓋乙酉以後, 稱觴祝岡之慶, 摸金鏤玉之禮, 皆感王之孝也。 丙戌以後, 聖候多在靜攝, 王晝未嘗離側, 夜未嘗解衣, 一有添谻, 則遑遑涕泣, 露禱神明。 英宗每坐臥, 左右或扶侍, 則曰: "東宮安在? 莫如我孫之便於體也。" 王自四五歲, 常喜跪坐, 衣袴當膝處必先敝, 八九歲以後益莊默, 無疾聲遽色。 褻御宦妾, 罕與接語。 英宗見王靜坐曰: "汝學入定乎。" 語筵臣曰: "世孫性度絶異, 無一毫走作意。 禁苑花發之時, 非從予則未嘗遊賞, 日以讀書爲事, 非勉强而然也。" 及英宗晩年, 長在侍湯, 而聖候小減, 則輒開書筵, 每候上安寢, 更漏四五下而退却, 明燭對案書。 鷄鳴則趨而侍。 時和緩主之子鄭厚謙, 傾邪無行, 倚主橫甚, 洪鳳漢之弟麟漢, 席其兄據相職, 與其黨揚言曰: "攻洪氏, 不利於東宮也。" 以鉗脅一世。 洪相簡閔恒烈等, 出入春坊, 倡爲己巳凶論, 相簡之族啓能托儒名遙執朝權。 尹養厚尹泰淵等, 爲死黨, 迭據銓任戎柄。 乘英宗倦勤, 潛相紏結, 布植黨與, 弄權蔑法, 壞亂朝政, 王睿質英明, 洞覽古今, 尤惡戚里干政之弊, 對諸賊未嘗假以色辭。 諸賊等大懼, 入以窺覘嘗試, 出以譸張誣毁, 謀欲動搖儲宮, 和緩主又長處禁中, 爲其子助凶百端。 宦妾掖隷之類, 廣置爪牙, 伺王動靜, 王炳幾應變, 不撓不露, 夷然若無事。 且賴英宗聖明, 不威而嚴, 貞純聖母, 至誠輔翊, 賊謀不得售。 至乙未春, 聖候日沈綿, 大小祀典, 皆命王攝行, 冬十月行常參, 敎曰: "今日臨門, 不可自强。 沖子夙成, 此時代聽機務, 親見於予, 豈不光鮮乎?" 自是諸賊益懼, 以諱聖候, 爲沮戲代聽之計。 十一月癸巳, 英宗召見時原任大臣, 敎曰: "近日神氣益薾, 公事無以酬應, 言念國事, 夜不能寢。 沖子知朝論乎? 知國事乎? 知吏判、兵判之誰可爲乎? 昔我皇兄, 有世弟可乎, 左右可乎之敎, 今之時, 尤不啻皇兄時? 況聽政自有國朝故事乎?" 洪麟漢挺身對曰: "東宮不必知朝論, 不必知銓官, 至於國事, 尤不必知也。" 英宗歔欷曰: "卿等不知予意。 毋寧使我孫, 知予心法也。" 命以御製《自省編》《警世問答》, 進講于東宮。 居數日, 英宗命公事, 入于東宮, 承旨欲承書, 麟漢揮手止之。 英宗曰: "巡監軍付標, 付中官之手可乎?" 領議政韓翼謩曰: "聖明在上, 此輩不足憂。" 英宗怒, 命諸臣退, 仍命巡監軍及吏兵批, 受點于東宮。 時聖意已決, 大寶、啓字, 皆移置東宮, 上敎日三四降, 而因麟漢遊辭力沮, 成命久不下, 事機岌嶪, 變在呼吸, 而朝無敢言者。 十二月丙午, 前參判徐命善上疏, 請正麟漢沮格代聽之罪, 且論韓翼謩質言閹竪事。 英宗聞疏, 趣命命善及大臣臺臣入侍, 命善讀奏疏。 英宗擊節嗟賞, 顧問諸臣。 臺臣宋瑩中曰: "深文也。" 相臣金相福, 請問言根, 英宗麟漢翼謩刊仕籍, 相福罷職, 瑩中削職, 特擢命善爲都摠管。 越四日庚戌, 命王代聽庶政, 王三上疏, 批曰: "名正言順, 東國再安, 於予萬幸, 於爾榮親。 莫敢少忽, 扶我三百年宗國。" 仍命聽政儀節, 依丁酉故事。 越三日癸丑, 英宗景賢堂, 受聽政賀, 王具袞服, 行朝參, 受百官賀, 是日進饌, 行九爵禮。 群臣皆呼千歲, 英宗顧笑甚樂。 王旣聽政, 謁眞殿、太廟, 歷拜諸宮廟, 發號施令, 動合天則, 已有雷動風行之效, 而每事必稟大朝, 罔敢自專。 語宮官曰: "宮官雖兼史, 其職啓沃也, 文義箴警, 宜於書筵政令得失, 關於國事, 隨處陳規, 補予不逮。" 沈翔雲以辛丑逆竪之孫, 囑金相福改祖系, 不齒於世, 托跡鄭厚謙洪樂任, 爲其腹心, 當是時, 徐命善之疏入, 而代理之命下, 凶徒大恚, 募翔雲上書引溫室樹之語, 欲翻覆成命, 內外排布甚密。 王覽其書曰: "翔雲事, 大關忠逆, 授受之際, 不可不光明也。" 奏于英宗, 命義禁府, 鞫翔雲, 竄絶島, 廼命竄配以下, 小朝裁斷。 丙申春正月, 下令旨, 陳時弊十四條, 飭諭中外臣庶, 又令曰: "各宮免稅田結, 宮屬憑藉, 弊及小民。 明禮宮屬於東宮, 宜先淸本, 付之度支, 各宮次第用此例。" 又令曰: "紅袖之突過從班, 紫衣之作挐閭里, 可見宮闈之紀綱。 宦侍騶率之擬於士夫, 宮房下屬之行惡外邑, 尤係變怪。 令中外執奏。" 筵臣有以大小科面試言, 王曰: "待士以禮以誠, 不宜先疑。 只當擇任考官, 恢公道杜倖門而已, 豈可拘束士子, 汲汲責備乎? 從古人辟, 多不免求治太速之病, 聽政後一二事, 矯弊猶恐其太速也。" 二月, 拜垂恩廟, 廟景慕宮舊號也。 旣還宮, 上疏于英宗曰: "壬午處分, 臣當信之如四時, 守之如金石。 假使怪鬼不逞之徒, 敢生希覬之心, 肆發追崇之論, 而臣乃爲其慫慂, 移易義理, 則是實爲殿下之罪人, 亦將爲宗社之罪人, 萬古之罪人。 至於《喉院日記》, 盡載其時事實, 見者傳之, 聞者議之, 流布一世, 塗人耳目, 臣之私心哀痛, 殆窮人之無所歸也。 夫閭巷匹庶之有情理悲切者, 終身含痛, 如不欲生。 臣雖愚頑, 亦有此一段不泯之心, 而今乃高臨貳極, 儼對百僚, 豈不有痛于心, 有泚于顙乎? 若以爲臣之哀痛, 或有礙於殿下之處分云爾。 則殿下之處分, 卽天理之公也, 臣之哀痛, 亦人情之極也, 所謂竝行而不悖也。 若又以爲無日記則無以徵信處分云爾。 則國朝典故, 俱在簡牒, 金匱石室, 藏之名山, 千秋萬代, 移動不得, 又安用日記爲也? 嗚呼! 日記之存不存, 在殿下處分之如何, 而臣之所以自處者, 唯有遜避儲位, 沒身屛處, 只以一日三時, 恭修起居之職而已。 言至於此, 不覺腸摧心裂, 籲天無從也。" 王手書疏, 令宮官傳于承旨, 以白袍黑帶 露伏尊賢閣前庭以俟。 疏入, 英宗敎曰: "聞此疏, 予心傷惻, 無以爲諭。" 英宗泣, 諸臣皆泣。 於是命就起居注中, 丁丑以後至壬午, 語屬不忍聞者, 依實錄例, 洗草于遮日巖。 乃命王, 拜垂恩墓。 王初入墓門, 哀痛不自勝, 俯伏象設之前, 撫莎哽咽, 衣袖盡濕, 諸臣迭奏, 晩始回駕。 翌日英宗敎曰: "正宗統爲三百年宗國, 洗日記, 伸子心於萬世。 昨聞墓所光景, 怳若目睹。 豈特酸鼻? 予年二十一歲, 受諭書圖像, 曾見內訓, 獻陵賜孝婦銀印於昭憲王后。 今予當追故事。" 是日行洗草陳賀于集慶堂, 御製諭書, 親書孝孫二字, 鑄銀印親授于堂庭, 自是諭書銀印, 常陳駕前, 先於繖蓋。

〔○〕三月丙子, 英宗昇遐。 自聖候沈篤, 王不御膳, 不交睫, 不離御榻, 令諸大臣, 環侍以候, 及大漸, 不進水漿, 哭不輟聲。 旣擧哀, 殯斂儀節, 王躬自察視, 且哭且檢, 雖蒼黃崩剝之際, 卒事無一違於禮。 大臣諸臣, 請嗣位, 王哭不許, (廷)〔庭〕請屢日, 啓至則輒哭。 及成服日, 始勉從, 敎曰: "迫於群情, 忍將踐位, 而冕服行禮, 於予心益覺怵然。 此禮見於《康王之誥》, 蘇軾譏其非禮, 載在集傳。 亮陰之制, 雖不得行, 釋衰從吉, 其可乎?" 諸臣以古禮與國制, 力請, 王泣而從之, 具冕服受遺敎大寶于殯殿門外, 卽位于崇政門。 尊王妃爲王大妃, 惠嬪惠慶宮, 冊嬪爲王妃, 敎曰: "宗統大繼序重, 雖以孫繼祖, 以弟繼兄, 祖與兄當爲禰位。 今日王大妃稱號, 竊附以孫繼祖之義也。" 遵英宗遺旨, 追崇孝章世子眞宗大王, 孝純嬪孝純王后, 孝章墓曰永陵。 後敎筵臣曰: "追隆之禮, 昉於成, 而予則曰在建邦之初則可也。 永陵追崇, 卽先朝遺意, 雖不敢不行, 非予本意也。" 旣釋冕, 反喪服, 下綸音, 諭中外曰: "嗚呼! 寡人, 思悼世子之子也。 先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前日上章於先王者, 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禮雖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享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禮, 而不可與太廟同, 惠慶宮, 亦當有京外貢獻之儀, 而不可與大妃等。 其令所司, 講定節目以聞。 怪鬼不逞之徒, 藉此而有追崇之論, 則先王遺敎在焉, 當以當律論, 以告先王之靈。" 追上思悼世子尊號曰莊獻, 封垂恩墓永祐園, 廟曰景慕宮, 尊奉儀節, 遵 濮王故事。 祝式用朱子定論, 稱皇叔父從子, 五享用牲用樂。 以廟貌狹隘, 拓而廣之, 倣世宗朝宗廟北墻門遺規, 建日瞻月覲逌瞻逌覲之門於宮之西苑之東, 每月簡威儀, 以時展省, 編《宮園儀》, 藏于宮。 王在春邸, 著大宗、小宗論, 又講《尙書》 ‘以禮制心以義制事’ 之旨, 宮園之禮, 實本於斯。 追奪李光佐趙泰億崔錫恒官爵, 光佐等, 英宗乙亥追奪後, 又復官, 至是, 王以辛壬義理, 宜先闡明, 命遵乙亥處分。 賊臣金尙魯, 自英宗丁丑, 爲柄相, 潛結宮人文女之弟聖國, 搆禍兩宮, 至是敎曰: "丁丑十二月二十五日, 大行大王, 御恭默閤, 尙魯敢以罔測不道之語, 仰對前席, 先王譬之馮道, 嘗敎予曰: ‘尙魯, 汝之讎也。 壬午事, 雖不更提於他日, 前壬午五年之歲, 釀壬午五年後兆, 卽一尙魯而已。’ 予聞命拜稽, 銘諸心腑。 當追施逆律以正君臣之大義。" 又下綸音, 布告文女罪惡, 奪其爵號, 聖國亦施孥籍之典, 旋以先朝禁令, 寢兩賊追孥, 及秋賜文女死, 蓋待因山禮成也。 夏, 親鞫李德師趙載翰朴相老崔載興等, 王在春邸, 載翰等假托壬年懲討之義, 陰結妖宦李興祿金壽賢等, 轉聞于王, 王時在沖年, 察其奸而心惡之。 及大喪, 使鄕儒李一和上章, 言壬年事, 德師之疏竝徹, 疏語同。 敎曰: "此誣先王之逆。" 乃親鞫載翰德師等。 相老發不道說, 遂肆于市, 德師載翰載興等皆正法, 是年秋, 嶺南人李道顯, 又上疏如德師疏, 卽日親鞫誅之。 時大臣三司, 請正麟漢厚謙母子之罪, 敎曰: "從古人君, 事關於己者, 嫌不論, 認作寬弘之度, 不覺漫漶義理, 此明王哲辟之不能免也, 予豈爲是哉。 況麟漢負犯, 不特沮戲代理而已哉?" 竄麟漢厚謙, 厚謙母出置城外, 削申晦職, 尹養厚尹泰淵竝遠配。 泰淵族弟若淵, 以玉堂投疏, 以麟漢爲國邊人, 以討逆之論, 謂迎合, 王召問之, 若淵奏語益悖。 王曰: "春秋之義, 護逆亦逆。" 遂親鞫若淵以黨逆輸款。 洪趾海父子兄弟, 尹泰淵閔恒烈李商輅李善海李敬彬等, 交結謀議, 潛圖翻覆之凶言凶書, 始皆呈露, 次第就鞫, 若淵島配道死, 恒烈善海伏誅, 相簡結案徑斃, 商輅亦徑斃, 趾海纉海敬彬島配。 又鞫泰淵翔雲養厚, 翔雲以受嗾樂任厚謙, 納款正法, 泰淵養厚輸款徑斃。 出掖屬七十餘人付有司, 皆諸賊之私人內覘外煽者也。 儒生李明徽上疏言, 華陽書院不宜建奉皇廟, 親鞫島配。 秋下大誥, 布示諸賊逆節, 末曰: "今者諸賊, 多出故家大族, 姻婭親友之間, 漸染其氣味, 訛惑其論議者, 必多其人, 皆從罔治之意, 俾底維新之化。" 大臣率百官, 臚列麟漢厚謙十二大罪, 請亟誅之, 王猶不許。 諸臣求對力爭, 王曰: "尙靳處分, 恐慈心之不安, 今日慈敎, 若曰私恩不可伸, 王法不可屈, 承此德音, 予志定矣。" 乃命麟漢厚謙竝賜死。 諸賊旣誅, 命倣《闡義昭鑑》, 開局纂書, 越明年書成, 命曰《明義錄》。 三司以兩賊孥籍爲請, 敎曰: "法者天下平, 雖人君之尊, 不可以私意低昻也。 是以斷死罪, 未死而捧結案, 旣死而必準律文, 卽我朝四百年不易之常典也。 噫! 讎如尙魯聖國, 逆如商輅翔雲, 尙不可低昻, 兩賊, 若是用律, 豈法者天下平之義乎? 自今未結案而用逆律, 身已死而追施孥籍, 次律結案而加以極律, 竝除之。" 三司以安兼濟厚謙作舍燕禧舊基, 欲應鷄龍之妖讖, 請正其罪, 敎曰: "鷄龍之說, 卽一讖說, 從古君子, 未嘗以此等事罪人。 況帝王之尊乎? 此政先儒所謂攻蔡確不患無辭, 而以車蓋亭詩爲案者, 元祐諸賢, 反不免捨正之歸者也。 兼濟之附麗厚謙, 以此定罪, 於渠當耳。" 配之邊遠。 因山禮定, 將行朝祖之禮, 敎曰: "以魂箱行朝祖, 載於《喪禮補編》, 夫喪禮, 有進而無退。 《禮》之檀弓, 負夏主人旣祖推柩而反之, 子游譏其失禮, 曾子多之。 戶庭之內, 推而反之, 猶譏其失禮, 況以魂箱出辭太廟, 還奉殯殿, 其視無退之禮, 不啻徑庭。 又況魂返室堂, 卽先儒之言, 朝祖不以梓宮, 而以魂箱, 於禮意又何如也? 欲準古禮, 則古今異宜, 朱夫子未嘗講定, 我朝先正, 亦欲行而未果, 此不可遽議也。" 仍命大臣禮官議, 議不一, 命依《五禮儀》。 將啓殯, 敎曰: "日月不居, 因山奄迫, 崩殞之痛, 益復靡逮。 予所以粗伸情禮者, 卽祭奠一事。" 自返虞至七虞卒哭, 皆以親祭行事。 王, 自啓殯日, 哀痛如袒括之初, 初欲親隨靷行, 諸臣以古無是禮力請, 拜辭於興仁門外。 靈駕旣遠, 猶佇立路次, 哀音上徹, 百姓聞之無不泣。 翼月始拜元陵, 歷拜永祐園, 命有司, 釐正各殿宮貢膳定例, 頒于八道兩都。 敎曰: "此雖一事, 重民隱之意也。" 敎曰: "利於國利於民, 則肥膚何惜? 先王所以諄諄於寡人也, 國用告乏, 民産如罄。 言念民國, 中夜繞榻。 至於宮房田結, 有法外加受者, 有代盡未收者, 不但大損國用, 尤是貽害小民, 令所司査正。" 仍命溫嬪以下諸宮房田結, 代盡及加受者, 竝屬戶曹, 命內侍受祿人, 月終吏曹啓聞, 以寓《周禮》天官冡宰無不統攝之義。 先是各宮房稅納, 每歲以閑雜人, 充宮差, 分往諸道, 橫挐操縱, 民不勝其苦。 王夙聞其弊, 敎曰: "予自卽阼以來, 懷保軫恤之念, 幾乎忘寢與食。 宮納之爲民害, 屢百年于玆。 無賴之輩, 憑藉宮家, 橫行列邑, 侵虐下民, 膏腴之地, 盡屬宮庄, 黎庶之命, 殆係宮差。 剝膚椎髓, 害及鷄犬, 哀彼民斯, 何以聊生? 自今各宮房稅納, 自本邑, 直納戶曹, 戶曹劃給宮房, 宮奴、導掌之差送, 加稅橫歛之弊, 一切革罷, 令廟堂之臣, 講定節目, 頒之諸道。" 敎曰: "信漢符, 所以嚴宮禁也, 近來紀綱解弛, 暋不畏法, 肅肅淸禁, 作一街路。 際今初服, 宜復古制, 自今無符攔入者, 令兵曹察飭。" 下科弊綸音, 以三代賓興之法, 西漢賢良之選, 皇朝隔屋之制, 朱子貢擧議, 歷詢政府館閣諸臣, 竟以議不咸, 寢之。 建奎章閣昌慶宮之內苑, 英宗御製編印告成, 敎曰: "我朝官方, 悉遵制, 而獨未有御製尊閣之所如龍圖、天章之制。 光廟朝有奎章閣之名, 而未及設施, 肅廟朝有奎章閣之稱, 而未及建置。 肆予繼列朝之志事, 集列朝之御製, 乃建奎章閣于後苑, 以奉列聖朝謨訓, 有制閣之意也。 予之所製, 亦不可無編次之官, 先朝編次人之, 設有其事, 無其官, 今爲尊閣, 命官典守, 以實編次人之名, 允合其意。 我朝提學, 卽之學士, 直提學, 卽之直學士, 依龍圖閣學士直學士例, 置奎章閣提學直提學。 又置直閣、待敎, 以倣之直閣待制, 則設施有據。" 乃命選部, 差閣臣六員, 提學用曾經文衡兩館提學人, 直提學用曾經副學人, 直閣用曾經應敎吏郞人, 待敎用翰圈人, 直閣、待敎, 後皆圈點, 初元聲明之治, 權輿於是。 復銓郞通淸之法。 先是英宗以郞選紛競之弊, 革之有年, 議者請復古規, 以補激揚, 王許之, 至己酉還罷。 王, 在春邸, 戚臣洪鳳漢, 以追崇之說, 眩惑睿聽, 英宗壬辰, 戚臣金龜柱, 上疏討其罪。 至是敎曰: "予之秉執之嚴, 廷臣之所知。 奉朝賀頃年之奏, 論者之聲討宜也, 而從古帝王家, 人臣之所敬愼, 則以金龜柱地處, 以冑筵酬酢, 疏陳大朝, 大朝若俯問于予, 則予將何辭仰對? 此豈非懍然處乎?" 仍命龜柱 黑山島荐棘, 至甲辰出陸。 冬敎曰: "言路, 國家之血脈, 近日寥寥無進言者, 豈以寡人惡聞其過而然乎? 嗣服之初, 莫聞讜直之言, 實由在上者之不能導率, 而當言之地, 豈無含默之咎? 兩司諸臣, 竝罷其職。" 韓後翼以正言投疏, 以乙未授受之大義, 謂之機事機心, 諸臣請鞫問, 批曰: "其疏盛陳袞闕, 文字抉摘, 非淸朝之美事。" 不允。 申尙權, 以軍銜, 疏討後翼, 疏中多贊揚語, 敎曰: "尙權疏, 卽一狀德之文。 寡人登極未幾, 有何實政實效之及于朝野? 如尙權之言, 則袞闕時政, 無一可論哉? 此而不罪, 必啓人主巍然自聖之弊。" 仍命給其疏, 削其職。 有僞造綸音者, 搆成浮言, 流行於畿甸湖嶺之間, 凡七條, 蓋凶徒欲煽動民心也。 有上變者, 逮問十餘人, 皆鄕曲傳訛之類。 敎曰: "不足誅也。 無爲繹騷平民也。" 特命酌放。 下綸音, 曉諭八方民庶。 元年春, 東北告饑, 遣使監賑北關, 下諭兩道道臣、御史, 命賙濟利民之策, 條列以聞, 飭諸道道薦, 又命京外孝行節義卓異者, 禮曹就議政府, 區別以聞。 拜永陵弘陵, 三月親行孝明殿練祭, 敎曰: "昔我宣祖大王之敎曰: ‘葵藿傾陽, 不擇旁枝, 人臣願忠, 豈必正嫡?’ 大哉聖人之言也。 然我國規模, 重名分尙地閥, 許要不許淸, 已有古人定論。 頃年臺閣通淸, 實出於先王苦心, 而反歸有名無實, 噫匹夫含冤, 足傷天和? 況許多庶流, 其麗不億, 則其間豈無才俊之士, 可以爲國需用? 而枯項黃馘, 其將駢死於牖下, 嗟彼庶流, 亦我臣子? 使不能得其所展其抱, 則寡人之過也。 其令兩銓之臣, 疏通奬拔之方, 議大臣以聞。" 仍命吏曹, 著成節目。 夏旱, 知製敎撰進祈雨祭文, 敎曰: "冊祝, 無罪己責躬之意可乎?" 命改撰。 已而久不雨, 下綸音, 以十事靑躬求言, 承政院以減膳時停視事稟, 敎曰: "昔宣廟避正殿, 以丕顯閣之狹窄, 不得開法筵, 先正粟谷, 言講員可減, 法筵不可停。 況減膳與避殿有間, 何妨於開講乎? 修省之時, 益宜勤勵, 此後減膳避殿時講筵, 依例稟旨。" 親行禱雨于社壇, 回鑾翌日, 親臨疏決, 命京外殺獄掘檢之法, 一遵兩朝受敎, 著爲式。 初肅宗, 以京外殺獄, 不得掘檢, 有數十年不決, 瘦死獄中者, 命開檢一從《無冤錄》, 英宗又敎: "以文猶掩骸, 白骨檢驗, 無異再被殺, 凡匿埋者檢驗, 已瘞者勿檢。" 有司錯認以堀檢之禁, 京外不敢開檢, 廷臣屢以爲言。 王取覽兩朝受敎, 敎曰: "先朝下敎中, 已瘞勿檢者, 非禁掘也, 卽指白骨檢驗也。 匿埋檢驗者, 卽肅祖受敎, 不當新定令甲, 只依兩朝受敎, 遵而行之, 或有年數已久者, 毋得輕自開檢, 啓聞後施行。"

〔○〕初乙未慶科庭試, 申晦主試, 關節肆行, 榜後物議大譁。 凶徒自知其犯, 且得睿聰俯燭, 假托書筵有科事酬酢, 輩, 左右脅制, 爲誣逼儲宮之計, 至是廷臣, 以乙未榜, 爲諸賊作逆機紐, 屢請削榜。 乃罷原榜, 以恩賜直赴, 定甲乙, 改修紅榜。 辛丑以一榜混削, 有枉罹之歎, 復尹翊東等八人科。 敎曰: "禁旅, 古之虎賁羽林也。 宿衛於殿廊, 陪扈於駕側, 不可不重其選擇其材, 而反不如訓局馬兵禁衛騎士。 內禁衛、兼司僕中, 一番定爲宣薦之窠, 取才充差, 作爲武弁初仕之階。" 仍命本兵之臣, 與將臣成節目行之。 後又以騎士屬之庶類, 初仕如宣薦禁軍之例。 秋七月, 盜入大內。 王每罷朝, 御尊賢閣, 覽書至夜分, 是夜, 燭下展書, 忽聞足聲, 自寶章門東北緣廊上來。 至御座中霤, 擲瓦散礫。 王靜聽察其有盜, 命宦侍掖隷, 火而燭之, 盜已逸而瓦礫尙縱橫霤上。 乃調宿衛士及三營踐更軍, 守備垣之內外, 遍索禁中不獲。 命復衛將五夜巡更之古例, 汰掖屬中根泒不明之類。 諸臣以尊賢閣淺露, 易令奸宄攔入, 請移御, 於是移御昌德宮。 八月, 盜又越昌德宮景秋門垣, 爲守舖軍所捕納, 詰之則苑洞田興文, 曩夜與扈衛軍官姜龍輝, 潛入尊賢閣霤上, 謀欲稱亂而未果, 今又再擧也。 乃親鞫興文龍輝二賊, 實洪述海之子相範所使也。 初相簡杖斃, 趾海纉海島配, 述海亦以海藩犯贓, 減死島配, 啓能窩窟, 亦竄之絶島, 之子姪妻妾, 日夜怨望國家。 又其屢世權貴, 多門生故吏, 潛結宮人掖屬, 謀爲不軓者有日。 相範龍輝隣居, 知其有勇力, 以千金結納, 以興文之居近禁垣, 與之合謀。 龍輝腰鐵鞭, 興文手利劍, 約入闕逢人輒殺, 相範觀變接應, 其夜龍輝興文, 同登尊賢閣, 撤瓦布沙, 作魍魅狀, 先眩人視聽, 將售不道, 忽聞闕中大索逸去, 及移御, 又欲潛越, 爲舖軍所捕。 內應者宮人福氷秀愛月惠今喜也, 宦官安國來也, 掖屬姜繼昌金壽大金福尙也, 同謀者, 趾海之家客洪大燮洪弼海洪信海也。 乃鞫相範作逆情節, 一如興文龍輝之供, 而述海之妻孝任, 締結妖巫, 作咀呪埋凶之變。 洪啓能與其子信海履海, 述海之姪相吉相格李澤遂閔弘燮等, 陰謀密室, 以太甲 桐宮癸亥反正爲說, 與三賊, 往復謫中, 而所欲推戴者, 宗臣也。 諸賊三塗作逆之謀, 於是盡綻, 次第拿鞫, 皆伏誅, 惟啓能鞫庭肆惡, 承款徑斃, 追奪啓禧弘變爵。 初啓能推戴之謀, 發於相吉之供, 大臣諸臣, 以逆黨未盡究覈, 而以王室至親, 名入推戴, 齊聲請逮問, 王遽起入小次, 久不出御帳殿。 諸臣屢求對, 不得排闥而入, 極言事機急迫, 國勢危疑, 請宮城扈衛, 又力請逮, 王終不許。 及相吉等伏誅, 大臣、三司、宗親、文蔭武百官, 伏殿庭, 日六七啓請誅, 館學儒生罷散, 前銜軍校醫譯各司吏胥, 以至五部坊民, 交章力爭, 王猶不許。其答箚啓有曰: "今日事, 有之跡, 無之情, 而斷以之法, 實非所忍也。" 又曰: "予之情事, 欲諭則聲已咽, 欲書則淚先滋。 孤露餘生, 豈有如予者? 鴒原之懷, 惟有庶弟三人, 風露所祟, 不幸早死, 年紀差長, 疾病常纏, 唯幸而無恙, 每以爲庶幾成立, 宗英繁衍, 使先父之子孫, 立我朝廷, 庶報劬勞之萬一, 而凶逆作孽, 而名出於推戴。 嗚呼! 生長綺紈, 蒙未知識, 渠豈知推戴之爲何事也? 予之情事, 求之古牒, 未有倫比。 斷恩伸法, 實所不忍。 言之及此, 摧痛何喩?" 及罷親鞫, 大臣攀輿迭請, 王駐輿熙政堂, 至不得前。 王旣還內, 大臣率金吾諸堂, 往王府, 致于庭, 令自盡, 拒不從。 大臣復求對言, 卽此已無臣節矣, 請賜死, 王不得已頷之。 及聞就法, 王傷慟久不視事, 命有司, 助以賵襚之典, 又命內司, 備禮安葬。 三司請寢成命, 敎曰: "爾等豈忍於似此私恩之少施, 更欲爭執乎?" 又親鞫洪樂任, 王欲仰慰慈心, 特命全釋, 廷臣屢爭不許。 撰《續明義錄》, 敍是年治逆源委也, 義例從原編。 諸臣請革扈衛廳, 敎曰: "彼千餘軍官, 亦吾民耳, 豈可以一凶賊之出, 混疑三廳所屬也? 朝廷之政令得宜, 則淄靑將士, 可以投戈, 四方之民心解弛, 則舟中諸人, 可爲敵國, 何規規於一扈衛廳哉? 今之三廳, 本非不易之規, 自七廳而爲五, 五而至三, 合設一廳, 精抄其才藝之優者屬之, 以存古規, 以除冗兵, 以慰軍心。" 仍命扈衛大將, 雖大臣, 非勳戚勿兼。 禁巫女出入城闉, 幸懿昭世孫墓, 歷拜義烈墓。 冬以雷異減膳求言, 二年春, 《欽恤典則》成。 先是, 敎曰: "之藝祖, 卽一中主, 慮獄囚之瘦死, 開國之初, 命諸州長吏, 恤繫囚, 又以盛暑詔獄吏, 五日一檢視, 灑掃獄戶, 洗滌杻械, 貧者給食, 病者給藥, 小罪卽決遣, 歲以爲常, 趙累百年綿遠, 未必不基於斯。 況我列祖欽恤之盛德, 卽我家傳授心法, 予小子敢不式克欽承? 今當暑月, 死囚之滯獄者, 屢被拷掠之餘, 繫之枷而鎖以杻, 當刑而不刑, 當殺而徑放, 適足爲啓僥倖之門, 殊非刑期無刑之義。 一倣朝故事, 擧而行之。 至若刑具, 制各有度, 近聞京外決獄之地, 率多不遵法者, 法者, 天下平也, 雖人主, 不敢低昻, 況乎命吏哉?" 仍命刑房承旨, 馳往法府、法曹, 取苔杖枷杻之不如法者, 準視釐正, 下諭諸道列邑, 刑具視京師, 又命各營, 校正棍制, 又命參互《大明律》《大典》《續大典》, 斟酌損益, 彙成一書, 至是書成, 印頒于京外。 造鍮尺與書同頒。 下綸音, 敦召諸儒臣。 合統禦營于江華府, 降喬桐爲府使, 以沁都爲三道之要衝也。 後因廷議參差, 己酉還復舊制。 召見大臣九卿三司長官, 敎曰: "先王祔禮不遠, 將進冊于東朝, 獨於慈宮, 不得上一字之稱? 嗚呼! 予之秉執之大義, 臣僚之所領會。 禮或近於貳尊, 事或涉於壓尊, 拂義任私, 强欲崇奉, 則所謂崇奉, 非吾所謂崇奉也。 至於玆事, 旣無貳尊之嫌, 又協揚名之義。 求之前史, 皇子公主有錫號之規, 言乎本朝, 順康 昭寧, 有加號之禮, 予所以義起於中, 而欲講而行之也。" 廼議定惠慶宮進號之儀。 先是內司奴婢之推刷也, 刷官, 假托査括, 幻弄私贖, 操縱百端, 惟賂是索, 刷官所到, 村里爲空, 英廟減貢之惠, 閼而未究。 至是, 乃永革刷官, 命各道道臣, 一依先朝乙亥比摠施行, 宣頭案, 由承政院啓聞, 著爲節目, 頒之八路。 申明太學月講之式, 拜永祐園。 敎曰: "孤露不死, 來謁象設, 穹壤罔極, 今日行禮, 獨不在, 悲慟交中, 無以爲懷。 其妻何罪? 特爲放釋, 以奉其祀。" 仍流涕掩抑者久之。 親行大祥于孝明殿, 敎曰: "先大王喪制垂終, 禫禮在卽, 予雖强從禮防, 奈此難抑至哀, 何哉? 《禮》曰: ‘祥而縞, 是月禫, 徙月樂。’ 又曰: ‘孟獻子禫, 懸而不樂, 夫子曰, 加於人一等。’ 予竊以爲今日之所當法也。 國朝典禮, 禫之日, 陳軒懸如禮振作, 慨廓之餘, 孺思益切, 鳴玉被袗, 縱循禮制, 鍾皷管籥之音, 豈忍遽聞於當月乎?" 仍博議大臣儒臣, 命禫月大小法樂, 懸而不作, 著爲式。 封眞廟私親靖嬪墓, 爲綏吉園, 廟爲延祜宮, 祭禮遵毓祥宮例。 始以兵曹判書爲鹵簿使。 敎曰: "孟子曰: ‘王者之民, 皞皞如也。’ 雖振古所無之凶逆, 殲彼元惡, 縱厥脅從, 必啓自新之路, 俾圖革心之方。 斷斷此心, 屋漏所知。 近日三司懲討之啓, 不下幾十, 則安知無脅從之類乎? 一人致討, 愁菀者幾人? 然則其視皞皞之世, 何甚相反? 輕罪使之滌瑕, 重犯愈益嚴防, 然後義理固而專於懲討, 人心定而可以遷改, 其飭三司之臣。" 夏五月行禫祭于孝明殿, 吉禘于太廟, 躋祔英宗大王眞宗大王, 以文正公 宋時烈, 追配于孝宗廟庭。 以忠獻公 金昌集忠貞公 崔奎瑞文忠公 閔鎭遠文忠公 趙文命忠靖公 金在魯, 配享于英宗廟庭。 先是丙申夏, 敎曰: "昔在孝宗大王時, 先正 文正公, 昭融契合, 密勿謨猷, 卽春秋大義也。 以若知遇, 際會配享之禮, 迄不行焉, 非但朝家之闕典, 於昭在上之靈, 安知不有待於芬苾焄蒿之時乎? 議者以本朝所無爲說, 而如翼成公 黃喜之追配世宗, 文敬公 金安國之追配仁宗, 實我朝之成憲也。" 命於英宗祔廟時, 擧以行之。 政府會圈, 英宗配享功臣, 以崔奎瑞閔鎭遠趙文命金在魯四相臣議入, 敎曰: "故相臣金昌集決策之大義, 殉身之危忠, 實合廟庭之配食。 所以疑難者, 未及逮事於先朝也, 故重臣閔鎭厚, 未嘗逮事而亦入配享, 近例之事旁照者也, 張浚, 有功於孝宗, 建策時議者, 有事在異朝, 難於配庭之論, 而楊萬里獨以爲當配, 故事之可援用者也。" 諸臣詢同, 至是同行配食禮。 是日, 御仁政殿, 受百官賀, 大赦。 敎曰: "祔禮順成, 賀儀已擧。 踐位行禮, 冞切警懼。 先王五十年苦心, 亶在於愛民如子, 今日繼述之道, 無越乎此。 豈可無施惠於民, 以追我先王若保之聖意乎?" 仍命蕩減八道舊糴十萬石。 上尊號于慈殿、慈宮, 拜皇壇, 自是, 三皇諱辰, 必行望拜之禮, 禮成, 每召見皇朝人斥和諸臣後孫, 奬慰收錄, 或試儒武施賞。 敎曰: "聲音之關於治道大矣, 予雅不好聲音, 未嘗講究乎鍾律尺度, 而今樂之由古樂, 亦不過尋聲而求諸音, 由音而求諸心也? 今若變促爲緩, 更急以舒, 則可免衰世之音也。 玆當三年不爲之餘, 宜求四方日聞之道, 凡我掌樂之官, 肄其嘽緩之節, 祛其惉懘之操, 毋近奸聲, 以復和音, 以追踵我英廟啓佑後人之意。" 敎曰, 濟州卽滄海之外, 近因歲歉, 民生頷顑。 今覽本牧狀聞, 採鰒艱辛之狀, 如在目中。 寧損御供, 豈勞吾民?" 仍命永減年例貢鰒, 敎曰: "此先王遺意也。" 御仁政門, 受百官朝參, 宣大誥, 凡四條, 曰民産也, 曰人材也, 曰戎政也, 曰財用也, 屢數千言, 末以懋實之方, 求助群臣。 先是, 貞純大妃, 下諺敎于大臣, 命揀選士族, 置諸嬪御, 以廣求儲嗣, 臺臣朴在源上疏, 以慈敎中有坤殿患候, 嗣續無望之敎, 請廣延良醫, 殫誠調治。 時洪國榮之妹應嬪選, 國榮怒其疏語, 公坐叱罵, 必欲中傷。 王深察其忠, 在源終免於罪, 及國榮屛斥, 特贈正卿以旌之。 大臣三司, 以鄭致達妻置辟之請, 閱歲力爭, 召見諸臣, 敎曰: "予之靳允, 非謂無罪也, 受先王之慈愛, 陷於大戾, 以先王爲不知也, 則傷先王之明, 以先王爲知而不處分也, 則累先王之德。 昔成廟, 誦此花開盡更無花之句, 其時三司, 不能爭執。 今之臣何不如古之臣耶? 雖曰大義滅親, 思其所自出, 則先王之骨肉也, 王室之至親也。 用以次律, 此予所以不負先王也。" 乃削其爵號, 安置喬桐府。 秋, 公忠道臣密啓言, 徐命完等, 怨國凶言狀, 遣使按覈, 凶言根因, 出於韓後翼洪量海沈𨩌, 後翼卽丙申投凶疏者也。 敎曰: "後翼疏中機事機心之語, 卽詬罵口氣, 而以其言者之故, 特加含容, 豈意賊情之至斯?" 乃新鞫後翼量海𨩌, 以謀逆承款伏誅。 大閱于露梁, 敎曰: "五衛之法未復, 五營之制未革, 旣不得正其本, 則亦不過治末之歸而已。 矧今仰述列朝成典, 將行閱武之禮, 而以兵曹判書, 號曰大中軍, 而大中軍之上, 更無大將軍之稱, 又以五營大將, 謂以各營將, 而各營將之外, 亦無統三軍之人, 則所敎習者, 場操之式也。 所臨視者, 自將之意也, 寧以堂堂千乘之尊, 躬擐鎧甲, 替行主將之事乎? 且於不操之時, 使本營不統五營, 及其臨操之日, 令五營聽命本兵, 此又鑿柄之甚者。 予雖不閑軍旅, 而嘗聞俎豆之禮, 小大相維, 尊卑有序之義, 決不若玆。 凡係無稽之禮, 下行之節, 一切革罷, 更定儀節。" 賜祭六臣四忠及文烈公 朴泰輔祠, 祠在露梁之濱也。 拜明陵昭寧園綏吉園。 敎曰: "錄囚始於, 而備於, 皆五日一錄囚, 我朝十日一錄啓, 殊非古制。 十日之間, 雖有枉被之囚, 幽冤安得以自達乎? 此後該曹五日一錄囚, 一依古制, 禁緇徒毋得入都城。" 冬敎曰: "節用先自宮闈始。 雖在大官酋人之供, 無用則尙節省, 況宮闈無用之費乎? 宮人供億, 御極首先釐正。 今則大殿無宮人名目, 累朝流來宮人屬於慈殿者, 尙未蘇革, 當此歲歉民窮之時, 宜有節省之道, 問于度支。 可代中人千家之産。" 癸酉移屬宮人供億, 永爲省罷, 以補經用, 先是, 元年罷大殿宮人之名, 至是又有是敎。 敎曰: "自世斷死刑也, 獄具而錄奏, 臨決而詳覆, 行刑之日, 天子齋居, 食素不擧樂。 我朝每歲季冬, 斷死刑, 先三月詳覆, 覆必三焉。 自政府署事之規罷, 政歸法曹, 詳覆之法, 但行於待時之囚, 不行於不待時之囚, 是豈立法之本意哉? 凡大逆不道及罪犯綱常之類, 大臣莅鞫, 三司按獄, 猶有詳覆之意, 至於不待時之囚, 大臣三司, 不得閱實其事, 但以一律官之見, 攛那律文搆案, 而上于獄官, 獄官涉筆占位, 署惟謹, 何其愼於待時之囚, 而忽於不待時之囚也? 今後須遵舊典, 自刑曹議讞, 報議政府, 議政府更加詳覆, 始許登聞。" 刑曹請宗臣家潛屠宮奴, 照法嚴處, 敎曰: "王孫之違法屠牛, 敺打禁吏, 莫非予靦然處。 屠牛贖錢, 令內司償之, 勿徵於王孫家。"

〔○〕三年春, 望拜皇壇, 有言壇享樂章, 當用皇朝《九廟迎送神曲》, 佾舞當用皇朝親王國祭仁祖廟之制者。 敎曰: "皇朝樂章, 有曰 ‘格我聖祖,’ 又曰 ‘佑余子孫,’ 我朝之祭天子, 用此句語, 未知其當也。 仁廟儀則無登歌、軒架, 皇壇儀, 登歌、軒架, 設於壇上壇下, 今但就佾舞增六爲八, 則是舞備而樂不備也, 與其用失禮之樂, 莫若倚閣之爲寡過也。" 拜元陵, 歷拜局內諸陵。 夏拜永祐園, 敎曰: "敎莫大於五敎, 五敎不敷, 厥咎誰執? 每聞法曹決綱常之罪, 未嘗不怵然而懼。 自今罪關綱常者, 雖死罪以下, 必審閱究覈, 明知無疑, 然後斷以律, 以副予先敎後刑之意。" 親鞫投書罪人李鎭厚, 敎曰: "刑人殺人, 欲以生道殺之也, 親鞫庭鞫, 遇雨或値熱, 設以草芚, 俾得緩喘下氣, 輸其辭盡其情。" 夏五月, 命每年五月十三日, 至二十一日, 勿稟視事。 蓋自春邸, 遇是月, 齋居悲痛, 如壬年之初, 是年元陵制訖, 始有成命。 秋, 將拜寧陵, 以聖祖陟方之舊甲也。 召兵曹判書、訓鍊大將, 敎曰: "師行百里之外, 軍容尤當整齊。 昔 玄宗講武驪山, 因軍法失宜, 置兵部尙書郭元振於法。 今玆之敎, 若命將誓師, 其各勉之。" 指駕前信箭曰: "聽政初, 先王以此錫予, 每當師行, 必立此箭於駕前, 蓋專征伐之意也。" 至廣津, 御龍舟, 敎曰: "君猶舟也, 民猶水也。 予今御舟臨民, 益切兢惕。 昔聖祖作舟水圖, 命詞臣撰銘, 此意也。" 次南漢, 敎曰: "丙子事, 宛如昨日, 追念日暮道遠之聖敎, 不覺涕出。 人心漸狃, 大義轉晦, 北走之皮幣, 不以爲恥, 思之及此, 寧不痛心? 當此民力凋殘經費匱乏之時, 豈必作遠道行幸, 而逢此己亥之歲, 不有寧陵之行, 則亦豈天理人情乎?" 京畿儒生等, 疏請賜額文正公 宋時烈祠之在驪州者, 額曰大老祠, 豎御製御筆碑于祠庭。 駕過利川, 挾道觀光之民, 漫山遍野, 老白首者, 或遮道而奏曰, 願見吾君, 顧謂諸臣曰: "予無一政一令之澤及於民, 民如是不遠千里來, 予爲之愧惕也。" 謁寧陵英陵, 還次利川, 下綸音, 諭三州父老, 駕過沿路, 減租一年。 次廣州, 敎曰: "仁廟甲子, 得異僧覺性者, 命爲八道都摠攝, 召募僧軍, 分住各刹, 而近年以來, 組練不勤, 勞役不恤, 緩急何足恃也?" 仍命守臣, 蠲其弊。 御西將臺, 行城操夜操, 犒饋將士, 周覽城內外, 歷詢形便古蹟。 行幸八日, 始還宮, 有雷異, 減膳下責躬敎, 越十日, 又大雷, 減膳五日。 敎曰: "天遠乎人哉? 在方寸間。 經曰: ‘敬天之怒, 無敢戲豫。’ 使寡人, 痛自克責, 奮勵抑畏, 則庶可底豫已怒之天心。 纔經災沴, 只是依舊樣子, 維新濯舊之功, 置之相忘, 使一國之人, 駸駸入於含糊鶻突之中, 曾不悟楚之鐵劍利, 而反爲倡優拙焉, 所謂厝火積薪, 安於其上者也。 急於責躬, 未暇及於有位之闕失, 惟我匡弼之臣, 直言我得失。" 初, 洪國榮, 自乙未前, 出入冑筵, 特被寵簡, 四年之間, 位至宰列, 歷掌重兵, 貪天爲功, 日益驕縱, 權傾一世, 朝象漸亂。 王, 燭其奸, 隱忍未發。 及洪嬪喪, 國榮自知勢去, 轉生移國之計, 乃倡言曰: "廣儲嗣之擧, 不可再也。" 以之子, 作爲奇貨, 改其君號爲完豐, 恒言曰, 吾之甥也。 爲洪嬪守殯官, 聞者骨顫, 而威勢所壓, 道路以目。 賊臣宋德相, 假稱儒名, 膺召而至, 坐立言動, 惟國榮所使, 至是投疏言儲嗣事, 有曰: ‘某樣道理, 非在下者所可指陳, 而必有商量於聖念。 臣對宿衛將臣, 以此事爲第一義。’ 宿衛將臣, 卽國榮, 而此事指事也。 於是, 賊謀日急, 禍機迫在呼吸, 王, 乃決意乾斷, 而顧欲保全其終始, 且慮賊徒寔繁, 凶謀難測, 姑不宣示於外, 前席數其罪, 使之引退。 國榮不敢抗命, 納符而出, 特假三字銜。 恩信君 改葬, 命用崇品宗臣禮, 賜以美諡。 敎曰: "諡法至重, 至於忠字, 尤不宜輕加。 今見弘文館議諡律之斷例, 得無汰哉之嫌乎?" 仍命修明古諡法。 四年春正月, 受朝參于仁政門, 黜洪樂純樂純, 國榮之叔也, 國榮旣屛斥, 樂純尙據相職, 藉其餘焰, 圖握國柄, 國榮又覬覦, 復入以文衡, 爲落致仕之階。 時徐命善爲領揆, 其兄命膺爲文衡, 臺臣李普行等交章覈之, 敎曰: "予任非其人, 權移於下, 殺活威福之柄, 將至莫可收拾, 豈忍不思矯革, 坐視國家之亡乎? 今日之事, 莫非一大臣之罪。" 仍命樂純削黜, 普行島置。 拜明陵, 以禮陟舊甲也。 吏曹判書金鍾秀, 袖箚討洪國榮, 沮遏廣儲嗣大策之罪, 三司交章力請, 命國榮放之田里。 時臺閣彈章, 日積公車, 敎筵臣曰: "人才當責以中人以下。 《明義錄》成, 其人便作義理主人, 交其人爲其國邊人也。 乙丙以後, 世道屢變, 國脈之傷, 固已不少, 顧今對症之策, 莫如聚首同心, 精白寅協。 而搏擊爲事, 寧靖無日, 傷一人, 國脈隨以益傷, 豈不懍然乎? 東京之末, 名論崢嶸, 曹操徘徊於鼎之傍, 而不敢躬自犯手, 托以挾天子之義, 如荀文若之自好, 亦未免委身事之。 向來事, 何異於是? 諸臣若不體予鎭安之意, 其將空朝廷而後已。 寧有是哉?" 行和嬪 尹氏嘉禮, 判官昌胤女。 秋, 拜永陵, 冬雷, 下綸音求言。 五年春正月, 拜元陵, 歷拜諸陵, 以是歲辛丑, 卽英廟冊儲舊甲也。 賜祭于四忠祠, 命贈參議金省行加贈, 故學生徐德修贈執義。 行抄啓文臣講製之法, 敎曰: "近來年少文官, 纔決科第, 束閣書籍, 習俗轉痼, 矯革未易, 雖有專經之規, 月課之式, 作輟無常, 名實不符。 朝家勸課, 旣乖其方, 新進怠忽, 不暇專責。 今欲倣古設敎, 爲作成之道, 則湖堂太簡, 知製稍氄, 若就文臣堂下中, 限其年廣其選, 月講經史, 旬試程文, 較勤慢行賞罰, 未必不爲振文風之一助。" 命議政府, 抄啓槐院文臣參上、參外三十七歲以下人, 令內閣, 著成講製節目行之。 王於講製文臣勸課作成, 至誠不倦, 恩遇亞於閣臣。 自辛丑選以後, 凡十選, 今之公卿大夫, 太半是講製文臣也。 又敎曰: "文講武講, 文製武射, 如車輪鳥翼, 不可偏廢。" 命宣傳官試講試射, 依講製文臣例。 以昌德宮之都摠府, 爲摛文院, 御筆扁之, 院舊在禁苑, 以地太邃嚴, 移住永肅門外, 至是, 閣臣箚陳移院便宜, 可之。 敎曰: "當臨奎章新署時, 原任閣臣, 以侍講官講書官, 幷挾冊升堂, 講說經義, 敷陳治道, 以至寡躬闕遺, 朝政得失, 雖非論思之任, 是日是筵, 無異應旨。 苟有所蘊, 俾各悉陳。" 禮數儀度, 略倣臨學宮之儀, 兼考先朝臨署故事, 參酌有幸院事蹟, 以啓。 還內時歷臨玉署, 傳不云乎, 蓋取愛其禮之意。 三月辛丑, 幸摛文院, 講《近思錄》道體篇, 時原任閣臣, 分班升堂, 弘文館領事以下聽講, 講訖宣饌。 仍幸弘文館, 與經筵諸臣, 講《心經》, 內閣玉堂諸臣, 進箋稱謝。 奎章閣建置有年, 儀制草創, 及國榮屛斥, 朝著淸明, 王益勵爲治, 百度畢張。 申令諸閣臣, 酌古參今, 次第修擧, 閣規煥然大備。 以校書館爲外閣, 屬之內閣, 提學以下, 付兼銜。 以江華御庫奉安冊寶書籍, 建閣藏弆, 名曰外奎章閣。 《八子百選》成, 王, 憂文體日下, 手選《八家文》印行。 夏, 拜永祐園, 觀刈于東耤, 行勞酒禮, 遵英宗故事也。 旣回鑾, 下綸音于八道兩都, 勸農政。 王每於元正, 必下勸農綸音, 是日, 以觀刈禮成, 申加蕫勸。 大雨, 禜于四門, 敎曰: "有國之虞, 在於水旱盜賊, 不可不聞于上。 而上之人, 恒存戒懼, 不敢作侈泰之念, 亦惟在是。 善乎李文靖之說也。 近來忌諱成俗, 有司未嘗登聞, 寧不慨然? 噫! 匝域蒼生, 皆吾赤子。 而都民休戚, 所係尤重。 城闉之中, 或有愁困之歎, 而予莫聞知, 是豈作元后之意也?" 仍飭京兆捕廳。 秋八月, 拜明陵, 以是月英廟建儲之月, 是日肅廟誕彌之日也。 英廟在潛邸, 辛丑八月之望, 拜昭寧園, 回駕至德水川, 有盜牽牛而過, 從者以告, 命黔巖撥將, 牛還其主, 盜則勿問, 及還都, 建儲命下。 至是, 王追感舊甲, 旣謁陵, 御製紀其事, 建碑撥舍之前, 摹寫御眞, 安奉于奎章閣之宙合樓。 始定閣臣豹直奉審之規, 遠倣天章閣故事, 近取泰寧殿成式也。 湖西人延德潤等, 爲宋德相伸卞, 發通四道, 互相煽動, 道臣以啓, 諸臣齊請設鞫。 王曰, 不足煩王府也, 遣使按覈, 分等酌處, 乃竄德相三水府。 冬, 敎曰: "西北係是邊圉, 揆文奮武, 隨地而異, 而挽近以來, 習尙漸弛, 以武爲恥, 皆慕儒名, 風氣委弱, 邊防踈虞, 予甚病之。 靜究厥由, 專在用舍, 導率之效, 不出政注。 大臣將臣本兵之長, 爛商西北武弁收用之政, 劃一以聞。" 修檀君、箕聖、三國、高麗始祖王陵。 王於異代勝國, 尤眷眷於崇德象賢之典, 徧酹首露王陵, 新羅諸王陵, 正三聖祠祭儀, 號溫祚王廟曰崇烈殿, 賜額高麗四太師祠。 六年春, 拜弘陵, 歷拜諸陵, 夏, 拜永祐園。 久旱, 王避正殿, 親禱雨于雩祀壇, 屛繖蓋, 御步輿, 至壇親眂牲器, 自朝至夜, 盛服露坐, 禮成回輿, 至雲從街, 疏放金吾刑曹囚。 旣還宮, 猶臨軒不脫袞服以待, 已而果雨。 秋, 親鞫權泓徵宋德相宋煥億文仁邦白天湜李京來, 遣使海西按覈申亨夏朴瑞集等。 泓徵, 投凶書者也, 亨夏瑞集, 營護德相, 爲文相告, 指意陰憯, 仁邦天湜京來等, 妖書妖言, 結黨興訛, 陰謀稱亂, 部署已具, 而皆以德相爲依歸。 次第就鞫輸款, 泓徵仁邦天湜京來伏誅, 德相徑斃, 煥億絶島荐棘, 亨夏等酌配。 時, 鞫獄繼發, 株連漸廣, 諸路密啓, 絡續於道。 王, 深慮濫及無辜, 下綸音, 布告國榮德相諸賊罪犯, 末曰: "今之治逆, 鎭安二字, 爲第一急務。 必欲窮其黨與, 發其隱情, 期於劓殄無遺, 則非予之所欲聞也。 近日營閫之登聞, 或有不必啓而啓者, 家藏讖緯, 自有其律, 而無怪乎遐土愚民之不知爲何書? 若以故紙斷簡, 歸之於妖言不軌之科, 則豈不大可哀矜乎? 外方之景象, 雖不得目見, 而驛卒旁午, 道路騷擾, 追捕間發, 閭里駭懼, 又或偵探, 遍於巷陌, 摘發及於偶語, 則大非朝家之本意, 而抑恐人心波蕩, 靡所底定, 咨爾大小臣工, 必以開曉之道, 參恕之念, 各自銘佩, 競相勉勵。 雖使隄防不弛, 勿令坑阱或廣, 寧失不經, 惟務咸新。 臨御六載, 治敎不立, 遷善者未聞, 而罹辟者日衆, 無望空圄之化, 徒煩下車之泣, 予於是, 重爲之慙歎。" 又敎曰: "近日諸賊之符讖惑民, 正學不明之致也。" 下崇儒重道綸音, 飭選曹, 甄拔問學之士, 命諸道方伯, 薦進經明行修者, 賜祭紹賢華陽書院。 王, 自初元, 以崇儒術爲先務, 國朝配食文廟諸賢, 悉加表章, 或遣官致酹, 或親題遺文, 或錄用其子孫。 以至及門諸儒, 竝施寵典。 畿甸、湖西、嶺南饑, 下綸音, 慰諭民人, 飭賙求之政。 又敎曰: "都民生理, 專係畿湖, 畿湖判歉, 予之憂都民久矣。 我國發賣, 卽之振貸也, 預令京兆賑廳, 商確抄戶賣米之政。" 九月, 文孝世子誕生, 宜嬪成氏所誕也。 拜永祐園, 冬, 《國朝寶 鑑》成。 初, 世祖丁丑, 命大提學申叔舟, 撰太祖太宗世宗文宗四朝寶鑑, 是爲《國朝寶鑑》。 自是, 列朝相承, 屢欲續成以繼四朝, 而竟未遑焉。 至肅廟庚申, 工曹參判李端夏, 編進《宣廟寶鑑》, 英廟庚戌, 大提學李德壽, 編進《肅廟寶鑑》。 而列朝寶鑑, 未有一統成書, 辛丑秋, 《英宗實錄》告訖, 王, 語大臣閣臣曰: "先王五十年盛德大業, 史不勝書, 而實錄則石室金櫃, 其藏甚秘, 惟寶鑑爲書, 與秘史稍異, 雖存編年之體, 務主揄揚之方。 今因實錄編成, 仍始寶鑑纂修之役, 在予一人, 光前謨闡先烈之道, 庶乎無憾。" 諸臣一辭仰贊。 又敎曰: "光廟撰成寶鑑之後, 只有宣廟肅廟兩寶鑑, 十二朝尙爲闕文, 今宜幷加編輯, 與三寶鑑及《英廟寶鑑》, 合成一書, 永垂無窮。" 乃命奉來列朝寶錄于沁都, 差詞臣十二人, 分掌纂輯, 又命原任大提學李福源徐命膺等校正, 勒成寶鑑, 閱七月書成, 凡六十有八卷, 印以活字。 諸臣具箋以進, 王, 御法殿親受, 敎曰: "國朝故事, 每室玉冊金寶, 倣廟之陳寶器殿之藏玉牒, 必皆奉安于入廟之時。 夫寶鑑爲書, 所以揄揚功德, 垂裕來嗣, 則實與西序大訓, 同其規模。 而雖琬琰之表徽, 璽章之昭度, 猶不足以喩其重。 特因虞謨未備, 殷禮有待, 三百餘年, 尙爲闕典, 今列朝寶鑑燦然咸秩, 曷敢不祗獻閟宮, 永垂邦禮, 以與我子孫萬世哉?" 乃參倣上冊寶儀節, 親上寶鑑于宗廟、永寧殿, 分藏于各室。 越翼日, 下綸音, 詢于大小臣工, 尊英宗爲世室, 定元子號, 受百官賀, 下蠲恤之政于八道兩都, 大赦中外, 疏放凡三千餘人。

〔○〕七年春正月, 將行朝參, 敎曰: "近來公卿百執事, 噤默成習。 歲初朝參, 無異一初, 況今寶鑑親上, 元子定號, 上而繼述之道, 下而貽燕之謨, 其要無過於諮詢。 明日臨門, 自大臣三司, 至于庶僚, 必陳嘉謨嘉猷。" 諸臣各陳所懷, 竝嘉納, 諭京畿、湖西、嶺南三道道臣, 又下內帑錢椒, 以補賑資曰: "歉歲開賑, 從古何限, 而必稱益州, 靑州, 以其一箇誠字, 貫徹民情也。 盡吾誠做去, 毋令專美有宋。" 諸道以孝烈抄啓, 敎曰: "在臣爲忠, 在子爲孝, 在婦爲烈, 閭閻匹庶, 猶以爲難, 矧在帝王家乎? 若我和順貴主, 可謂卓然。 從古帝王家所無, 而獨我家有之, 不但東方貞信之有徵, 豈不有光於我家家範之懿乎?" 仍命旌其門曰烈女。 加上尊號于貞純大妃景慕宮惠慶宮, 推錫衍之慶也。 大臣禮官求對, 言曰: "我聖上臨御七年, 尙未擧上號之禮, 以發揮功德, 一國臣民之所抑鬱顒祝, 臣等敢以請。" 王曰: "聞此語, 予心一倍悲痛。 卿等所以揄揚, 適增予不孝之罪。 予不能見孚於體國之臣者, 深可愧也。 今予此言, 實出心曲, 惟望卿等之體諒也。" 諸臣縷縷仰請, 終不許。 閣臣鄭志儉, 上箚請: "倣洪邁日得聖語, 關送修注官故事, 每登筵諦聽聖語, 筵退謹識, 歲終證正, 依《貞觀政要》《朱子語類》例, 藏之本閣, 以爲式。" 許之, 是爲《日得錄》。 後諭內閣曰: "《日得錄》之作, 蓋爲近日記注多爽誤, 如經義問難時政酬酢, 近臣領會, 勝於新進, 不但遠倣有故事, 竊欲爲觀省之資。 今若務從溢美, 但欲鋪張, 則後之觀此錄者, 謂今時何如? 閣臣不可不知。" 夏旱, 減膳求言, 翌日雨, 禮曹請復膳, 敎曰: "膚寸固幸, 盈尺是期, 有難便令復膳。 修省之心, 豈以得雨而或弛? 求助之餘, 切欲聞昌言, 諸臣其卽應旨, 俾予敷心之諭, 毋歸應文之科。" 卿宰以下應旨陳疏, 凡四十餘人。 拜永祐園, 秋, 拜健元陵元陵, 永禧殿有修改之役。 敎曰: "昔在先朝, 凡有廟殿修改, 則每整衣臨御于移安廳前, 還安畢, 始入小次, 此小子之所嘗欽仰者。 今何敢自暇自逸, 不思繼承之圖乎?" 仍駕詣, 躬蕫功役, 日未夕告完, 行酌獻禮。 敎曰: "庶獄庶愼, 帝王之令節, 而予則燭理未周, 每決一案, 輒不免顚錯。 凡官職遷除, 財用出入, 講製抄拔, 皆有案簿, 況此刑獄決折, 豈可以已決而更不屢致意也? 今後禁府刑曹決獄案抄錄肯綮, 待月終錄啓, 每年季朔, 成冊子以啓。" 嘗過內苑臥麟坪, 指一土室, 語侍臣曰: "此古所謂北寺獄也, 宮中有罪者囚之, 此獄亦有刑具。 予念宮府一體, 凡罪人付有司勘斷, 土室則廢不用, 只有古址。" 大司成閔鍾顯上疏, 請選士入齋, 議館閣廟堂之臣, 批曰: "予於御極以後, 以科擧事收議, 曰大小科改制也, 曰栍畫科增額也, 曰圓點科復講也, 一例留中, 尙靳數字之批者, 非欲因循而不思變通也, 誠以弊不由法, 正患不得其人。 顧今見行之法, 祖宗朝金科玉條也。 能得人而任之, 何患乎儒敎之不興, 士風之不振也? 九經齋不必復也, 延英院不必倣也, 泮儒學儒, 不必別揀也。 惟得人二字, 最爲矯弊之急務, 卿等另加詢訪。" 是歲六道告饑, 王, 大加憂惕, 日召接有司之臣, 講究荒政。 時値誕辰, 敎曰: "今日, 卽予生朝也, 藩閫牧伯, 率皆奉箋稱賀, 而惟予一心憧憧者吾民。 民方殿屎, 恫若在己, 安用賀爲?" 仍下綸音于諸道, 飭道臣另思備預之方。 又聞嶺東九郡之災, 最於諸道, 遣使宣諭, 移浦項倉穀以濟之, 降香祝祭海瀆, 以祈利涉。 冬, 敎曰: "荒年饑歲, 吾民之頷顑顚連者, 孰非王政之在所拯濟, 而其中最無告最可矜者, 童稚也。 至於道傍遺棄之類, 置之街巷, 無罪就死, 天地生物之意, 豈亶然哉? 廣濟院育嬰社良法, 古今異宜, 有難一朝遍行, 而京師八方之所表準, 略倣遺規, 先從此始, 以爲就次取則之地者, 實合仁政之權輿。" 仍命著成《字恤典則》, 印頒中外。 每月終, 以收養數爻, 搜訪有無登聞。 八年春正月, 將行朝參, 王, 謂抄啓文臣之爲臺職者曰: "爾輩新入臺地, 言論風裁, 必多可觀。 且抄啓文臣恩禮之渥, 地望之淸, 無遜於經幄, 直言讜論, 予欲先聞於邇列。 諫官之職, 如朝陽之鳳, 殿上之虎, 百僚股栗, 居是職而不言者, 古有辱臺之罰。 爾輩通擬之初, 又値延訪之會, 須各正言不諱。" 御春塘臺, 召講太學儒生, 設食堂, 語諸臣曰: "程子見僧舍會食, 歎其有三代威儀, 況賢關之食堂乎? 皷進齒坐, 秩然可觀。 予故樂與諸生共之。 薤鹽雖薄, 勝於內廚珍饌, 卿等其各一飽。" 仍飭圓點之法, 申命廟堂選部之臣, 薦進草野之彦。 下綸音于被災諸道, 賜別賑資。 地震, 敎曰: "前月有星孛之變, 今曉聞地動之響, 此何等時, 君臣上下, 政宜抖擻奮勵, 以盡修省之道? 噫! 百千病敗, 皆坐言路之不闢, 間或値求言之會, 未聞鯁直之論, 徒啓訐揚之風, 是求言之害, 反甚於不言。 予所欲聞者, 卽寡躬愆尤, 時政疪纇, 明日賓筵, 三司各陳匡救之說。" 拜健元陵元陵, 抄五部饑民, 減直給米, 凡二萬餘戶。 又以都下錢荒, 御仁政門行賓對, 召貢市人親詢弊瘼, 敎曰: "昨年六道告歉, 中外艱食之狀, 森然在眼。 況王都, 八方之本, 旣乏稼穡之服力, 又無糶糴之沾漑, 値此荒年, 那免胥溺之患? 昔在先朝, 每軫都民眷恤, 停減之德意, 予小子平日仰睹者。 今者臨門俯詢, 亦出繼述。" 仍命以各營各司錢十五萬緡, 除其利殖, 禁其口錢, 散貸貢市民。 修大嬪墓, 敎曰: "先朝於大嬪宮時節祀享, 墓道修奉, 必敬必飭, 予何敢少忽?" 以京獄檢驗之規, 比諸道多踈略, 命備邊司, 講定檢驗事目, 頒之秋曹京兆。 秋, 賊臣金夏材, 袖凶書入闕, 投之傳香承旨, 其凶書, 卽之所不道也, 筵臣莫不骨顫膽掉, 憤不欲生。 齊聲請設鞫究覈, 及夏材伏誅, 敎筵臣曰: "世豈有二夏材乎? 賊出入宰列, 歷踐銓任, 人之書牘往來, 不是異事。 竝付于火。" 八月, 冊封文孝世子, 拜永陵。 駕過月山大君祠宇, 敎曰: "聞大君江舍, 因子孫流落, 轉賣于人, 而風月亭扁額尙留云, 宣陵友于之寵, 至今傳誦, 而不得世守賜第, 豈非欠事? 令度支贖還。" 拜眞殿, 行朝參于仁政殿, 諭在庭諸臣曰: "今年今日, 卽我先王御極之回甲也。 是門, 先王所御之門也, 是朝, 先王所受之朝也。 是日是儀, 豈爲觀瞻? 蓋示以鞏基篤慶之有自也。 顧今造庭諸臣, 孰非昔年逮事之人? 其不然者, 卽乃祖乃父迪我先后世篤忠貞, 以遺爾子孫。 曷可不同休共戚, 相助爲理耶? 闡揚繼述, 永裕後昆, 其責在予, 寅協精白, 乃心王室, 其責在臣。 咨! 爾臣工, 各供其職, 毋納予一人于匪彝。" 仍賜祭于四大臣、三將臣、四節度及達城府院君 徐宗悌、贈判書李廷熽, 旌贈判書趙聖復、贈參判金省行閭, 錄用故相臣鄭澔閔鎭遠、故判書李晩成孫。 敎曰: "鶴城君, 卽甲戌生也, 每見不覺感愴。 昔年今日, 以侍衛進參, 今年今日, 又以寶劍侍衛, 豈可不表章?" 特賜几杖, 賜宴給樂。 九月, 親享太廟, 上尊號于英宗大王貞聖王后貞純大妃景慕宮惠慶宮, 御仁政殿, 受百官賀, 大赦中外, 拜永祐園。 雷, 敎曰: "夜聞轟燁之異, 雖不大聲以色, 仁天之警告, 如是丁寧, 反躬省檢, 曷任悸恐? 故事, 十月雷, 始減膳。 而十月節候, 已在於二十六日, 不可以九月言。" 減膳三日, 三司之臣, 各陳應旨之章。 冬, 命閣臣, 修《日省錄》。 王, 自春邸, 凡一日事爲, 輒有記識, 至是以起居注之多錯漏, 命別爲編錄, 取曾子日三省之義, 名曰《日省錄》。 九年春正月, 祈穀于社壇, 敎曰: "我國之壇享, 卽古之方邱也。 陶匏鉶羹, 掃地將事, 而明靈洋洋, 如水之在, 州、府、郡、縣, 莫不有社稷之責。 近聞諸路社壇, 多不修治, 壇壝剝落, 箭門頹圮, 而守宰視之若城隍諸壇, 使莫重禋祀之地, 鞠爲樵牧之場云, 享禮之不遵儀式, 祭品之不能精潔, 於此可知。 夫守令之職, 民社爲重, 此不致誠, 餘何足觀? 令該曹, 關飭各邑, 修治社壇, 置守護校卒, 定其標限, 另禁雜人, 每朔月終, 報營門, 自營門轉報儀曹, 以考勤慢。" 兩湖漕轉, 愆期臭載, 經用漸匱, 民邑交弊。 王憂之, 詢于大臣諸臣, 設京江船作隊之法。 令四鎭別將, 管轄句檢, 量其道里, 定其期日, 排以再運, 分以各倉, 減其刁蹬之費, 申以護送之規, 令備邊司, 著成節目行之。 命諸道另行義僧矯捄之方。 拜泰陵康陵。 前縣監金履容上變, 親鞫李瑮梁衡洪福 文洋海朱亨采金斗恭等, 福榮, 樂純子也, 國榮樂純之罪旣著, 福榮怨國, 謀不軌, 與洋海等, 托妖讖煽訛言, 聚貨結舍於嶺南之河東地, 指日擧凶, 反形畢具。 及鞫訊, 援引神鬼無名之類, 欲疑亂獄情, 諸道道帥臣密啓, 日四五上, 敎曰: "丙丁以來, 亂逆層生, 釁孽之種, 每懷思亂樂禍之心, 假托譸張誑惑人心, 許多妖悖之說, 宣播諸路, 而渠輩之眞箇窩窟, 固自如耳。 智異香山, 幅員雖闊遠, 若仙苑異人等事, 眞如賊之招, 則動幾邑之校卒, 邃壑絶頂爬櫛無遺, 無一村舍無一人跡? 徒使無罪平民疑懼繹騷, 十室之村, 七八皆空。 設或有不逞之徒, 陰懷異志, 此特小醜耳, 在平民何有? 予深居九重, 雖未之聞, 而每一思, 惟寢食奚甘? 亟令諸道, 凡屬搜捕紏察之事, 一切罷之, 使吾民安業樂産, 各有親上死長之心。" 諸賊伏法, 斗恭, 賊之姪也, 初稱上變, 鞫庭誦賊凶書, 納款伏誅。 夏拜永祐園, 敎曰: "南衙北寺, 防分截嚴, 一或踰越, 國有常憲, 猗歟列朝痛抑此輩, 守門傳令之外, 不使與朝政。 逮我先朝, 尤嚴於宦寺, 予於卽阼以後, 一念仰述。 而特以處在宮省, 昵陪左右, 不逞之徒, 百岐締結, 窺覘大內, 則昏夜往來, 圖占淸宦, 則貨賂公行, 效忠輩之逆節, 每一思惟不覺髮竪。 從玆以往, 一番逆獄, 輒出一番宦獄, 予於前後鞫獄, 輒思從寬, 而事係閹竪, 未嘗或貸。 況若靺韋之臣, 防限之嚴, 視文臣尤宜逈別, 近聞中日之場, 舊宮之基, 紊亂莫甚, 決拾笑語幾乎相襍云, 羸豕之漸, 決不可任其滋長。 本兵長聚會各廳武士, 詳細曉諭, 俾知警畏。" 秋七月朔日有食之, 飭京外救食之規。 先是, 各司襲謬例, 只以入直郞救食, 至是申明古法, 長官行事, 仍飭救食器械。 拜明陵、永祐園。 《大典通編》成。 我朝經制之書, 世宗《六典謄錄》, 世祖折衷《六典》, 著《經國大典》, 成廟朝有《續錄》, 中廟朝有《後續錄》, 肅廟朝有《輯錄通考》, 英廟朝有《續大典》, 至是臺臣有言, 卽阼後受敎可著爲令式者, 宜分類編書, 以便施行。 王曰: "《續典》成於甲子, 而先王敎令之後於甲子者尙多, 其敢專於近而忽於遠乎? 且原典、續典, 各爲一書, 艱於考據, 宜取二典及舊今受敎, 通爲一編。" 其令二三卿宰, 掌其事, 大臣總之, 書旣成, 名曰《大典通編》, 頒行中外。 語筵臣曰: "《通編》新增條, 予所難愼者, 事係死律, 不敢增一條。" 詣珍藏閣, 閱皇朝御筆御畫, 列聖御製、御筆、御畫、誥命諸軸, 得英宗朝所編《羹墻錄》, 敎曰: "列聖朝治法政謨, 盡在是矣。 寶鑑則編年也 是錄則彙類也, 其義則一, 而便於覽省, 則又要且切矣, 不可無續成之擧也。" 命內閣諸臣, 抄出誌狀寶鑑實錄, 及《政院日記》, 分授纂成, 將備冑筵進講也。 《兵學通》成。 國朝軍制, 專用《兵學指南》, 王病其踈繆, 彙輯場操程式, 立綱分目, 編印以行。 建四朝御製、御筆碑于東南關王廟。 十年春正月朔日有食之, 減膳求言, 御仁政門受朝參。 命卿宰侍從進前奏事, 百官書進所懷, 自大臣至衛士, 凡三百六十三人, 皆賜親覽賜以優批。 命朝官年八十, 士庶年九十以上, 每歲末, 京則五部搜訪, 外邑則地方官躬親訪問, 報于京兆及巡營以聞, 歲初加資下批, 夫人封爵準此, 過百歲人付同中樞, 大小科回榜人, 特加一資, 著爲式, 命京兆, 大行京外掩骼之政, 凡三十七萬九百七十九所。 拜孝陵禧陵, 賜祭文靖公 金麟厚。 每陵園幸行, 徧酹列朝國舅、王子、公ㆍ翁主及名卿之登庸際遇者, 以志追先之感。 拜永祐園。 夏, 甕幕里火, 延燒三百餘戶, 敎曰: "河內失火, 汲黯以便宜發倉賑貸, 漢帝嘉之。 夫, 一使臣, 猶能不負其職, 況爲人上者, 寧使一夫一婦, 失其所哉?" 遣使慰諭, 召大臣備堂, 倣外邑恤典賙給之。 拜永祐園時, 疹疫熾行, 敎曰: "禳祭, 古禮也, 不可緩也。" 命設別勵祭于四郊, 命京兆之臣, 曉諭所管部內坊曲, 無論班族常賤, 藥物無以自辦者, 醫司揀定醫人, 診疾給藥以啓。 五月, 文孝世子薨, 王, 方悲遑未暇, 而日飭有司, 救恤民間疹患, 所全活甚多。 禮曹以戊申服制, 則齊衰朞年, 《補編》則斬衰三年, 請稟旨, 敎曰: "喪制, 當遵《補編》受敎, 而正體二字, 義理所係甚大。 則 ‘體不正,’ ‘正不體,’ 在今日俱不能無嫌。 受敎之遵奉, 似非今日之所敢遽議。" 乃以齊衰朞年行之。 先是, 群臣衰服, 用白靴, 敎曰: "靴之爲物, 本非古制, , 之襲用, 已失古意。 我朝常服之效尤, 尙云未遑, 況持衰之服, 何等禮制, 而獨於屨制用靴可乎?" 命改以麻屨。 葬文孝世子孝昌墓, 廟曰文禧。 拜義烈墓懿昭墓, 歷臨孝昌墓。 秋九月, 宜嬪成氏喪逝。 拜貞陵

〔○〕冬, 慈殿下諺敎, 布示國榮陰圖移國之罪惡, 又以五九月喪變, 責諸臣緩討之罪。 於是, 時原任大臣, 率卿宰求對, 不許接, 賓廳啓, 請奪其爵, 絶其籍, 斷以王法, 命付火, 諸臣排闥力請, 終不許。 先是, 金尙喆之子宇鎭, 以近臣獲罪于上, 假托丙申春獄事, 發揄揚之論, 爲熒惑迷藏之計。 王, 惡其情狀, 削其職, 具善復有壬年負犯, 而久掌戎柄, 稔惡日甚, 至是, 兩司以宇鎭勸婚, 請鞫。 已而之母舅宋樂休上變, 言自言與金尙喆同死生, 宇鎭被罪, 服毒自斃狀, 且言善復, 使子以謙, 饋問事。 廼鞫宇鎭善復, 宇鎭以顧瞻他日輸款, 特命減死耽羅荐棘, 善復前後關通、䄄湛情節畢露伏誅, 善復之姪明謙, 以之切姻交相締結, 逮鞫正法。 三司請正尙喆之罪, 王, 以曾經院相, 不加誅。 百官庭請置於法, 屢降不忍聞之敎, 閉閤却膳凡四日, 大臣以下伏閤免冠, 命減律島置。 文蔭武百官儒生市民, 迭上疏, 皆不從, 命及諸子, 竝置沁都。 大臣以下聯疏力爭, 敎曰: "昔獄至憯秘, 孝景力保 , 賴有田叔之忠耳。 惜乎, 今日廷臣, 非田叔之罪人乎? 且其待予, 何太不若孝景? 夏秋所經歷, 如閱百劫。 出朝入燕, 未嘗眎人以疚容, 自聞廷籲, 心如風纛, 曉不寢旰不食, 種種者忽覺數莖白矣。 萬有一不率敎, 依舊棼泯, 予自有準擬之者。 矧今歲除, 隔一兩宵, 自明年元正, 滌煩省鬧, 期收怡養之效, 申望卿等。 遍牖群蒙, 夬底寧息。" 十一年春正月, 加上尊號于慈殿, 以再安宗社, 群臣請闡揚功德, 至是, 上冊寶。 臨孝昌墓, 二月拜健元陵元陵。 庚戌行綏嬪 朴氏嘉禮, 主簿朴準源女, 宮號曰嘉順。 前年冬, 慈殿下諺敎揀嬪, 至是禮成。 夏原州金東翼鄭鎭星, 堤川柳得謙等謀逆事發, 逮鞫, 尋遣使按問於原營, 諸賊伏誅。 是年春, 畿湖之間, 訛言忽起, 村民奔竄, 閭里殆空, 數日乃定, 至是有上變者, 卽東翼等所煽惑也。 建御製碑于咸興 歸州洞, 卽桓祖太祖舊里, 定宗太宗誕降之基, 以是歲丁未誕降回甲也。 王一念孝思, 惟在於追揚祖烈, 慶興 赤池赤島, 德源 湧珠里, 皆建碑紀蹟。 命趙時偉 耽羅荐棘。 時偉, 庚子以後, 自稱戚里, 藉弄朝權, 壬寅邦慶, 颺言曰: "定號不宜早也。" 至是, 廷臣閱歲請鞫, 有是命。 秋, 拜明陵昭寧園, 御祈稔閣觀穫, 賜酒勞田夫。 又拜綏吉園, 還次高陽, 召見父老, 特減二邑舊糴。 奎章閣編進御製, 揭御製記于順安 栗園亭, 仁元聖后手種也。 冬雷, 減膳求言, 以祈穀攝儀陞大祀當否, 議諸臣。 敎曰: "先朝甲午增牲品之敎, 聖意可認。 且壇儀之昔缺今備, 不獨本祀儀爲然, 春秋及臘大享誓戒, 無親臨之儀。 至先朝, 始遵復中華舊制, 時享儀文之增衍尙然, 況祈穀大祀乎? 自來春上辛, 祈穀用春秋及臘大享儀, 陞列於大祀。" 申嚴燕行紋緞之禁。 《文苑黼黻》成, 卽國朝文苑章程也。 十二年春正月, 敎曰: "皇 太祖高皇帝, 以戊申正月乙亥, 卽天子位, 開元洪武, 年甲重回, 日干又適在是月, 豈可虛度是日?" 乃拜奉室。 三月, 敎曰: "是年是月, 卽我先大王揚武戡亂之年若月也。 陰謀煽自嶺湖, 急鋒直抵畿甸, 內結失志之輩, 外連不逞之徒, 綴旒之形, 危如一髮。 倘非威斷若神, 聖武不殺, 制勝樽俎, 天人助順, 顧何以收鯨鯢化龍蛇, 奠磐泰於指眄之頃也? 舊甲云回, 徒見山高而水淸, 則以小子追感之心, 曷其不酬忠報勞, 以答前寧人攸受休哉? 仍賜祭策勳殉節諸臣及故相臣崔奎瑞, 贈謚故宰臣洪景輔吳光運, 收錄故嶺伯黃璿後孫。 又命諸道, 搜訪從征將士生存者, 倡義殉節泯沒者, 悉加褒奬收錄, 賜謚故領議政李宗城, 加以恩酹。 王, 追念壬午以前盡分諸臣徐志修李彛章尹塾林德躋韓光肇趙重晦任珹李翼元等皆加表奬。 於李宗城, 每稱危身衛國之忠, 恩禮特殊, 韓翼謩, 名在《明義錄》, 而以壬年樹立, 詡其忠而滌其罪。 夏, 拜永祜園, 秋, 將拜靖陵宣陵, 駕次西氷庫津頭, 江水夜漲, 船艙未完, 諸臣請回鑾, 敎曰: "船艙小事, 卽有司存, 車駕旣發, 萬民所瞻, 豈可阻一衣帶之水, 遽回鑾蹕乎?" 仍命諸將臣戶工判道臣守令, 竝力蕫役果川廣州民人, 隨駕軍兵, 左右觀光人, 亦爭先趨役, 日未暮役畢, 駕渡江。 拜陵回鑾, 至船艙, 召見果川廣州民人, 敎曰: "昨日民人之挾岸觀光者, 爭先赴役, 民情可見。 特除餉糴之耗。" 溫陵令 崔昌國, 疏請中廟配享臣朴元宗成希顔柳順汀黜享, 議大臣, 敎曰: "三人者之罪, 可謂難掩, 國乘載焉, 野史傳之, 以撤黜之尙遲, 爲闕典欠事, 人情所同, 公議可見。 然先朝若曰: ‘復位之後, 三臣者, 不過庭食而已, 怵焉之心, 宜在三臣, 高高在上, 有何怵焉?’ 以聖后弘量懿德, 豈區區於此等事。 在嗣王之道, 重中興之業, 體弘懿之德, 可謂繼述也。 聖謨洋洋, 昭在記注, 三臣黜享, 其置之。" 冬, 右通禮禹禎圭, 疏言婦人髢髻之弊, 召大臣諸臣, 問申禁便否, 諸臣皆言, 禁之便。 下綸音曰: "先王五十年成憲之大者, 其目有五, 曰減疋也, 曰濬川也, 曰禁酒也, 曰互婚也, 曰去髢也。 上二件, 擧而措之, 累數十年民蒙字恤之澤, 人免沈墊之患, 而下三件之暫施旋格, 非出先王本意。 然行酒, 重祀典也, 重民命也, 禁亦聖德, 行亦聖德, 決不敢更或議, 到互婚利害, 姑未敢質言, 最是宜革而易祛者, 莫勝於加髦。 故禁加髢, 卽明聖志紹盛烈之一端。 國中婦女加髢, 一切革祛。 令出惟行, 不惟反, 金石可泐, 此禁不可弛。 凡厥臣僚之立予朝者, 孰敢更以加髦一事煩聞乎? 不從令者, 家長坐罰, 卽有司存焉。" 仍命著成事目, 頒之八方。 關北饑, 遣使慰諭, 仍監北關賑政。 改義烈宮廟墓之號曰宣禧。 十三年春, 拜永陵順陵恭陵, 又拜長陵, 敎曰: "桑梓猶恭敬止, 況手澤所存乎? 先朝辛亥, 遷奉本陵, 遵孝廟手種松杉故事, 至今鬱然, 若不表識, 後人何知?" 命英廟手種栢樹, 銅以圍之, 刻手植二字。 時遷園之聖意已決, 追感辛亥故事, 先謁長陵, 歷拜 弘陵昌陵明陵, 秋七月, 定永祐園遷奉之禮。 王, 自卽阼初, 以園寢之形局淺狹, 不叶于吉, 時節展省, 怵惕憂懼, 嘗分命地師, 歷審先陵占標及畿湖諸山, 惟水原 花山己亥舊占處最吉。 至是錦城尉 朴明源上疏, 請亟擧大禮。 廼召大臣、閣臣、禮官、宗親、儀賓、文蔭武二品以上, 以疏示之, 咸曰: "都尉疏, 實宗社無疆之大計, 敢有異議乎?" 王, 泣而敎曰: "山理有無, 予何質言? 而觀於先儒彼安此安之說, 亦不可謂無是理, 然偏信術人, 輕移塋域, 在匹庶尙不可, 況國家至重至大之禮乎? 惟予至慟至恨, 夙宵結轖, 數十年于玆, 念到土親膚三字, 寧欲無知。 都尉疏中五條論列, 非都尉一人之言。 今幸予意先定, 詢謀僉同, 惟當亟圖遷奉之禮。 欲求遷奉, 莫如水原花山。 辛亥儀軌, 古人文字, 已有定論, 從此宿願可遂。 水原一區之天慳地秘以待今日, 豈人力所及乎?" 諸臣齊聲稱賀。 仍命大臣禮官雲觀將作諸臣, 先審永祐園, 僉見與都尉疏沕合, 又審水原新占地, 咸稱天作吉兆, 乃定園寢于花山癸坐之原。 取癸丑遷寧陵, 辛亥遷長陵儀軌, 參倣行之。 旣定園, 經始象設之役, 敎摠護使曰: "不以天下儉其親, 聖訓也, 以予固所自盡之道, 務欲盡其美。" 廼用屛風石瓦簷裳石之制。 又敎曰: "予於園寢象設, 以靡不用極之意, 一遵光陵制度。 而聖祖受敎在焉, 後嗣王, 若觀今日而或復踰制, 則非予本意也。" 八月丙辰, 拜舊園, 商度啓園工役, 庚申, 上, 新園號曰顯隆。 移水原府治于八達山下, 以新園將始役也。 仍設行宮, 又於果川始興, 皆置行宮, 肆覲坪置倉舍, 安養站置撥舍, 鷺梁置鎭亭, 以備拜園時輦路所御也。 壬戌, 詣舊園, 行酌獻禮, 告啓園事由, 乙丑啓園, 王, 受緬服, 就隧道閣, 哀痛不自持, 膈氣上升, 哭不成聲, 諸臣力請, 始回鑾。 議者或言本生親, 禮無緬服, 王, 聞之泣曰: "予於昔日, 不得衰麻, 今欲寓追服之意也, 少伸至痛, 於禮也何悖?" 冬十月甲寅, 詣舊園, 出玄宮, 陳吉凶儀仗, 成殯于欑宮, 方玄和之奉出, 王, 皇皇攀號, 步從靈輴, 及成殯, 俯伏擗踊哭, 徹曉不止。 聖候益澟綴, 而指導靷行諸事, 新園工役, 無一不整勅。 是日, 王, 泣語諸臣曰: "舊壙災害, 若是極備, 忍奉玄宮於二十八年之久, 予之不孝也。 而今以後, 庶慰終天之痛。 至於籩豆之薦, 儀物之備, 亦可以一分伸誠。" 仍涕隨言下。 凡成殯後各祭及朝晝夕饋奠, 皆親行, 而代奠, 蓋用亮陰之制, 且取禮非虞不沐之義也。 丁巳, 靈轝發, 由纛津渡涉, 舊例用龍舟, 至是創行浮橋之制。 王, 初欲隨靷, 爲寬慰慈心, 到江頭還宮, 翼曉追發, 次水原府, 靈轝已到新園矣。 己未詣園, 下玄宮, 是夜親審園上工役, 天明回駕, 夕次果川, 翼日還宮, 自啓殯至下玄宮, 天氣淸朗, 冬候如春, 鑾駕纔回, 大雨雪以風, 寒威陡嚴, 蓋天相之也。 王, 親製誌文, 敎諸臣曰: "誌者, 將以傳後, 而不忍書而書, 不忍言而言。 所以明兩宮之慈孝, 而恔予小子之心也。 其藏于幽宮, 以俟百世。" 下內帑錢十萬緡, 以給水原移邑營室之用, 諭水原民人曰: "是府花山, 鍾靈有自, 議定園寢, 遂擧遷奉之禮, 是府, 卽予松楸之鄕, 爾等是鄕之民也。 予之視爾等, 如視家人, 裕其食足其産, 俾知安生樂業之方, 庶可以盡予責寬予思。 尋常蹕路, 猶施恩澤, 況是鄕是民乎? 園所附近面里及徙居民人, 復十年, 通一邑面里, 復一年, 父老之再瞻溫幸羽旄者, 朝官七十以上, 士庶八十以上人加資, 境內儒武, 俟來春展省之行, 欲設科試之, 爾等知予撫摩之苦心至誠, 一乃心力, 共護園寢, 永世毋替。" 初, 王將行遷奉之禮, 遣內司官, 召於沁都, 潛入城裏, 廷臣莫有知也。 慈殿屢下諺敎, 責諸臣, 大臣以下求對不許, 排闥亦不召接。 慈殿命中使, 押還配, 諸大臣令禁堂捕將, 奉慈旨擧行, 王遽命駕至敦化門外。 諸臣攀輿以死爭之, 輿不得前, 不得已還內。 自是歲, 歲一召至京, 輒不令諸臣聞, 而出其不意, 駕臨見之, 幸別營、太倉、南營、北營諸處。 秘其命令, 捍以兵衛, 排門者不得入, 叩陛者不得徹。 王大度豁如, 從善如流, 而獨於此事, 一切用權度。 每語諸臣曰: "此所謂周公之過也。 尙論者, 庶諒予心也。" 諸臣語及事, 又輒以威譴臨之, 揭禁榜于臺省, 使不得言。 敎曰: "禁切言者, 豈治世之事? 予不獲已也。 徐待朝著稍靖, 洞開不諱之門, 其勿强爭也。" 賜額讓寧大君祠曰至德, 仍賜祭孝寧大君。 王每念國初宗英, 樹碑於鎭安大君之塋, 置戶於宜安大君之墓, 端廟五宗臣, 至擧壇侑之典。 十四年春, 王違豫, 浹月始平復, 諸臣請稱慶, 敎曰: "不存旡妄之戒 致煩惟疾之憂, 自訟之不暇, 何敢受賀?" 東北兩西饑, 流民達于京師, 王拜廟宮, 駐輦雲從街, 召流民慰諭, 給糧米襦袴, 分遣宣傳官, 津送本道, 罪道臣守令, 仍飭諸道, 安集撫摩之政。 拜顯隆園, 周諗岡麓, 仍臨禿城山城, 召見庚辰溫幸時父老人給米斛。 謁文廟, 仍親行啓聖祠奠酌禮, 以是年孔夫子朱夫子降彩之年也。 望拜于皇壇, 召見漢人牙兵, 敎曰: "漢人之陪歸東土者, 孝廟命使寄接宮底, 及登寶位, 令內需司, 計口給糧, 旋編訓局牙兵, 漁業資生, 近日風習不如古, 甚至閱武場中, 或作假倭哨, 渠輩以中朝薦紳遺裔, 爲此至鄙之役, 豈勝歎惜? 今日, 卽皇壇望拜日也, 下泉之感, 無地可伸, 所欲矯捄, 豈或踰日?" 仍革漢人牙兵之名, 倣龍虎營之禁旅, 鎭撫營之義旅、壯旅, 改稱漢旅。 定三十額, 掌祭享時奉神榻設饌撤饌等事, 以代忠義, 以皇朝人子孫, 定皇壇守直之官, 以漢旅隨次遷轉, 著成節目行之。 拜懿昭墓

〔○〕夏六月丁卯, 聖嗣誕生, 定號元子, 受百官賀, 諭中外臣庶曰: "今予欽承皇穹之篤棐, 祖宗之默祐, 歲庚戌月癸未之丁卯, 元子誕生, 是年聖賢以降之年也, 是日慈宮上壽之日也。 積雨忽晴, 景晷如畫, 彩虹亘於廟井, 神光繞於宮林, 此非天與之喜乎? 叶律之聲, 纔出於抱, 肩磨足蹴, 髫白溢街者, 其欣欣之色, 蹲蹲之狀, 卽乃身乃家之私福, 不是之甚, 此非人與之喜乎? 予無享天之德, 得人之政, 而予一人有喜, 天喜之人喜之, 予將何以答天而報人? 帝眷東顧, 錫我祚胤, 凝圖定命, 係屬自今日, 祖功宗德, 維持自今日, 家本支之什, 詠自今日, 室磐石之謠, 播自今日。 上副殿宮顒企之望, 下慰臣庶翹竚之情, 而生年生日, 又能叶聖期而添慶節, 以永孚我萬億年無疆之休, 則予其可已於答天? 而如欲答天, 又可不於報人乎? 屢施不一施乎, 有司之臣, 莫曰經用之告匱。 人心和則天心和, 雨暘時而物阜歲登。 況庚戌之自古屢豐也乎?" 仍大赦, 凡一千一百五十四人, 京外朝官七十以上, 士庶八十以上加資, 凡二萬五千八百一十人, 百歲老人給米肉, 諸道舊糴丙申春以前勘簿者, 幷行蠲免, 結稅、漁稅、鹽稅、場稅、寺稅等, 應列於稅摠者, 分數減除。 敎筵臣曰: "慈敎若曰: ‘昔我逢生朝, 輒無佳悰, 自明年是日, 將飮食讌樂。’ 予奉慈宮四十年, 無一事仰慰慈心, 今承此敎, 拜慈宮有顔矣。" 秋, 定舟橋之制。 王旣行遷奉之禮, 將歲一展省, 以江路渡涉之用龍舟法不便, 改用舟橋之制, 命廟堂, 撰進節目, 未稱上旨, 乃親自運思, 爲《舟橋指南》行之。 是歲大熟, 筵臣有言甘露降, 王曰: "人主以豐登爲上瑞, 外此禎祥, 非所求也。 況今年自有大慶乎?" 命徒流人妻妾願從者, 依律文許施, 亦是年覃恩也。 冬拜健元陵穆陵元陵, 《武藝圖譜》成。 景慕宮代理, 就戚繼光棍棒六技, 增竹長槍等十二技, 是爲十八技, 王, 又增騎槍等四技, 命裒合原續圖譜, 鋟印以行。 十五年春, 命備邊司, 著園幸定例, 差定例堂上, 每當行幸, 句管擧行。 拜顯隆園, 禁各宮房圖署侵漁外邑之弊, 仍敎曰: "壬辰之後, 疆界混淆, 主客難分, 豪右兼竝, 公田日蹙。 故相柳成龍, 創爲折受之制, 今過二百年, 疆界已定, 折受稱號之尙此循襲, 已無義。 竝與屬稅之法, 而中間抛棄, 名以折受, 則輒許免稅, 嘗所切慨者。 今因宮房圖署事, 擧一足可反三。 壯營新出, 安知無射利之徒, 藉賣之擧乎? 自今申加嚴飭, 無論宮房營門衙門及朝臣, 別賜與土地, 折給公文, 若非啓下, 守令報于巡營, 隨卽狀聞。" 建莊陵配食壇。 王, 每曠感於端廟諸臣, 駕過露梁, 輒賜祭六臣祠。 京畿儒生等上言, 訟和義君 忠孝大節, 與六臣無異, 請追享於彰節祠, 敎曰: "日前駕過露梁, 出六臣祠, 駐蹕咨嗟, 行殿宿次, 不禁起感, 侑祭之文, 呼燭呼寫。 六臣固卓卓, 如錦城和義等, 似此節義之出於宗英, 尤豈不奇壯? 此兩人外, 多不下於死六臣者, 今於追配之時, 一體施行, 實合於朝家奬節褒忠之政。 令內閣弘文館, 博考以稟。" 時, 寧越府火, 燒民舍, 子規樓舊址出, 卽端廟所曾御也。 道臣以聞, 王曰: "事若有相感者。" 乃命設壇于莊陵栢城之外, 配食殉義諸臣, 春秋侑祀, 正壇三十二人, 別壇一百九十八人, 事未詳八人, 坐收司一百九十人, 仍編成配食錄。 御賓筵, 語大臣曰: "予自初元, 嘗所耿耿者, 卽均役利害寺奴痼瘼, 而均役則減布之政, 卽萬世之惠澤, 而有司之臣, 不善對揚。 先王每以魚鹽稅, 近於榷利, 選武布歸於罔民爲敎, 予欲一番矯革, 以爲繼述之道。 而給代之需, 實難遽議, 壯營之設, 予有微意, 而姑非可以時月責效也。 寺奴則生民切骨之瘼, 莫如奴婢之法, 每見宣頭案, 未嘗不若恫在己。 刷官之永革, 庶幾捄得一分, 而諸道搜括之弊, 依舊莫可救藥。 議者或言, 自今年釐成辛亥摠爲可, 或言許其限滿, 從良爲可, 或言開其赴擧而拔身爲可, 或言設補充隊之法爲可, 或言自該邑收貢, 使均廳給代爲可, 皆不過彌縫之論, 苟欲捄弊, 惟當去其名。 而箕聖以來已定之名分, 不可一朝蕩然, 且有私賤效尤之慮。 然則寺奴之弊, 終不可捄耶?" 仍命博詢諸道, 竟無定議。 夏, 大水, 漢城府以漂壓戶聞, 命閣臣、玉堂、史官, 分往五部、四郊、八江慰諭, 敎曰: "此備郞職耳, 特遣爾等者, 欲使蚩氓, 知朝家惓惓之意。" 秋, 命諸道臘肉, 依湖西例, 京廳作貢以納。 先是京營獵雉軍, 卽鷹師舊契。 而每放獵, 獵軍十百爲群, 男婦老少, 橫行峽野, 繹騷閭里, 往往有殺越之變, 王, 特軫其弊, 命革雉獵, 幷許代捧, 至是, 又以猪獐鹿, 無異獵雉, 亦命作貢。 賜宮人李氏爵守則號貞烈, 表其居曰守則李氏之家。 李氏嘗承恩於景慕宮, 老白首守窮廬, 不接人面, 王聞而興感, 特施表異之典。 拜思陵, 摹寫御眞, 遵先朝十年一寫之故事也, 一本奉安于宙合樓, 一本奉安于景慕宮 望廟樓, 一本奉安于顯隆園齋室, 以寓晨夕定省之義也。 後奉華寧殿, 語閣臣曰: "列朝皆有徽號, 英陵孝廟兩朝不受號。 予敢曰追兩朝盛節乎, 自辛丑標題時, 諸臣多以爲言, 于今十年。 又只以年月標題, 此又列朝所無之例也。" 冬, 湖南道臣, 以尹持忠權尙然父死不祭, 燒毁祠版啓。 時, 一種邪徒, 潛襲西洋耶蘇之術, 購書燕肆, 轉相敎習, 其法誣天慢神, 背君遺親, 斁滅倫紀, 混淆名分, 誘惑蚩氓, 交結黨與, 畿甸兩湖之間, 日盛月熾。 李家煥丁若鏞李承薰權日身, 其尤著者, 而崔必恭李存昌, 亦下流中最稱沈溺。 有司執以奏, 王曰: "齊之以刑, 不如道之以德。 予將火其書而人其人。" 命京外家藏西洋書者, 自首于官, 聚以火之, 譴斥家煥若鏞承薰, 使之自新, 致日身必恭於秋曹, 囚存昌於湖獄, 以刑以諭, 期於感化。 至是, 王見道啓, 驚曰: "不圖悖逆之至於斯也。 持忠尙然, 竝用大辟。" 又敎曰: "陽剛衰而陰沴作, 邪說之肆行, 由於正學不明。" 命廟堂及諸道, 各擧經明行修之士, 又飭初稗官小品之學, 申嚴燕行購書之禁。 以嶺土人士, 獨不染邪學, 卽先正遺風, 賜祭玉山陶山書院《樂通》成。 王, 嘗以朱蔡之《律呂》, 未反被之管絃爲恨, 檃括爲書。 設壯勇營。 先是, 壬寅春, 遵肅廟故事, 選武藝出身及曾經營校者三十人, 分番直明政殿南廊, 乙巳稱壯勇衛, 又倣戚氏南軍之制, 置五司二十五哨, 是年減禁旅一番五十人, 移設壯勇衛。 用額外內禁衛之規, 設額外壯勇衛, 十人以士夫充之, 又置善騎隊三哨, 以訓局京畿陞戶移屬之。 馬步京鄕軍三千四百五十, 用兵曹別付料兵房之規, 設兵房領軍務, 號曰壯勇營。 罷內司庄土之厚斂於民者, 設屯田於兩西, 減內外冗費冗額, 出帑錢儲穀諸道, 以備營用。 又置提調, 曾經戶惠堂人差除。 十六年春正月, 拜顯隆園, 二月拜永陵。 置奎章閣大提學, 以文衡圈中人, 待旨差擬內閣, 時任提學拜相, 陞付大提學, 曾經直閣人舍銓隨窠直擬, 曾經待敎人南床官銜, 亦直擬, 著爲式。 夏, 親鞫尹九宗九宗, 過惠陵不下馬事發。 敎曰: "以先王之心爲心, 雖値齋日, 不可不親鞫。" 及納供, 供語悖逆, 旋徑斃。 嶺南儒生李㙖等, 憑藉莫重, 假托義理, 疏陳壬午事。 王, 面諭經權之大義, 命以筵本歸告一路人士。 嶺儒疏後章奏迭上, 學儒等又封章欲徹, 特召大臣諸臣, 嚴敎震疊, 諸臣免冠閤外。 乃敎曰: "自予御極以後, 於某年義理, 不敢一番明言洞諭, 予果匿讎忘怨乎? 昔先王甲申二月二十日, 召大臣諸臣於眞殿門外, 頒御筆手書口奏文字曰: ‘語到某年事者, 斷以之律。’ 又若曰: ‘如是然後, 可以明汝未暴之先志, 而予之慟惜之心, 可以有辭, 世臣又可知汝本心及先志。’ 又召大臣以下於齋殿, 下正宗統綸音。 其時事實, 皆入於丙申年上疏後洗草中, 惟綸音及口奏眞殿之文字, 尙在史庫及《政院日記》。 予於伊後, 質言於前席, 若於先朝賓天之後, 謂可以惟意所欲, 一反甲申之對, 則是豈事死如事生之義乎? 且況聖敎中慟惜二字, 卽追悔之聖意, 予奉以銘肺, 死且瞑目。 然不可抑者, 至痛也, 不可遏者, 至情也, 大倫所在, 血讎在彼。 於是乎參前倚衡, 求權於經, 先之以乙未誅討, 以身替當, 而必欲及於先朝在宥之時, 翌春丙申, 以陳情之疏, 泣籲於代聽之後, 獲蒙天地罔極之恩, 特命以不忍見之文字, 竝付洗草。 聖敎若曰: ‘此擧勝於思子之臺望子, 予有歸見地下之顔。’ 仍命行百官賀, 而書下錫號之綸音及御製諭書御筆銀印。 仍命予展省于墓, 此先朝本意大略也。 自丙申、丁酉以後, 屢起之逆獄, 無不本之於某年義理, 而予之所執, 政在於外而形迹不露, 內而義理自伸, 默運致討, 上不負聖恩, 下不泚吾顙。 廷臣之北面於予者, 於此若有一毫謂予未盡分處, 殆若乙亥以前之誅討者, 非亂賊乎, 逆臣乎? 以三十年含茹之心, 豈忍言絲綸, 忍見章奏? 而星霜浸遠, 事實漸晦, 將以不忍提, 而後生不知莫重之義, 嶺儒之來也, 召見賜批, 出於急於曉諭。 則領會者見必痛泣, 迷昧者聞當戰慄而已。 爲今日臣子, 忍於此事, 爲因此逞私挾雜之計, 以匿讎忘怨, 隱然歸之於上, 而乃敢托以懲討, 茶飯說去於公私話頭? 則朝鮮世界, 所謂君長者, 果何如人也? 其所闡揮之方, 卿等思之。" 於是, 中外始曉然。 敎曰: "今之南壇, 卽昔日郊祀之圜壇。 我東建邦, 創自檀君, 而史稱自天而降, 壘石行祭天之禮。 以其不受大國之分茅, 而不至於僭逼也。 我朝嚴於別嫌明微之義, 光廟以後, 圜壇之號改曰南壇。 蓋用郡國州縣, 各祭風師、雨師之制, 而若乃致敬致潔之誠, 豈或以圜壇南壇之殊稱而有間也? 文獻脫遺, 有司襲謬, 見行之式, 反不如農蠶釋菜, 不可不亟修。 議大臣釐正。" 秋, 拜光陵, 朝官之年七十, 士庶之年八十, 仰覩先朝丙辰乙亥幸行及今幸者, 幷加一資, 年至百歲人加給米肉, 民庶特蠲當年餉穀糴穀之耗。 十七年春正月朔, 酌獻于璿源殿。 王御極以後, 每月朔望, 必拜眞殿, 是日, 以英宗寶曆, 恰滿百歲, 命大臣、卿宰、侍從參班, 禮旣成, 命亞卿、下大夫之丙申以前在本品者, 竝加一資, 京外百歲老人, 加資賜米帛。 敎曰: "元朝祗謁廟宮, 尤當以先王之心爲心。 念彼三方待哺之民, 其能獲免滿壑否, 宵旰念念, 何時不切, 而是日是心, 益切於是年是拜之餘。" 駐輦弘化門, 召見隨計之吏, 一則以是門, 卽先朝賜米四民之門也, 一則以內下賑資, 俾先歸布長吏也。 仍以內帑錢椒, 分下三南, 以補賑資。 語筵臣曰: "前輩名碩, 皆以罷內需司爲言, 而夷考其實, 則我朝內司, 與瓊林大盈有異。 宮中一年之用, 各有定數, 今罷內司而付度支, 則度支將無以策應矣。 予於御極以後, 務極節省, 一年用餘, 別儲一庫, 名曰保民庫, 以備水旱之用, 前後賑資, 亦賴此耳。" 拜顯隆園, 號水原府華城, 陞府使爲留守兼壯勇外使, 置判官以佐之。 改壯勇營兵房爲壯勇使, 文牒稱大將, 如御營使之稱御營大將, 置都提調, 如經理營都提調三公例兼。 而扈衛大將合廳屬之, 內外營之制始備。 三月, 淑善翁主生。 賞花于內苑, 召時原任閣臣, 閣臣之子若弟及承旨、史官, 以足三十九人之數, 蓋是年癸丑是月暮春, 倣蘭亭禊會也。 命諸臣, 縱觀內苑諸勝, 宣以酒饌, 使各臨流觴 詠, 旣夕而罷, 一時傳爲太平盛事。 時, 吉慶荐臻, 朝野靜謐。 王, 以導迎迓續之方, 莫先於疏鬱振滯, 飭勵兩銓, 大行恢蕩之政, 或下中批, 往往有淹滯數十年, 始彈冠者。 秋, 御賓筵, 敎大臣諸臣曰: "予於某年事, 皆屬不忍言不敢道, 惟金縢一事, 欲一言于卿, 而含哀茹痛, 尙未發說矣。 先朝嘗臨徽寧殿, 屛去史官, 以御書一文字, 藏于神位下褥席中, 丙申文女罪惡昭市時, 曾亦奉考。 卿等其奉覽也。" 仍出示金縢謄本二句, 蓋英廟追悼景慕宮之御製也。 王掩泣, 諸臣莫不流涕。 拜元陵, 歷拜局內諸陵。 冬, 大臣諸臣, 請擧揄揚之禮於慈殿、慈宮及景慕宮, 又請晉號于王, 以仰稟殿宮爲批, 末曰: "上號予躬之請, 曾謂卿等不如林放乎? 上號之制, 雖昉於三代以後, 明王哲辟, 莫不講行而修明之者, 其仰答天眷, 俯循輿情, 以賁太平之休象。 亦自有我家典章, 予嘗積誠祈懇於先朝, 以先朝撝謙之德, 猶且勉屈聖衷。 予何敢獨自違却, 而聞予之言, 拂予之意, 決非仁人君子之所忍爲。 禮固緣情, 義以制禮。 特以人所謂崇奉, 非吾所謂崇奉。 不敢不忍以第一等義, 空載於經傳, 千載之下, 庶有知予心者, 恕予而體予, 俾予遂初志。 卽惟曰將順二字。"

〔○〕十八年春正月朔朝, 御仁政殿, 行慈殿五旬, 慈宮六旬賀儀, 命朝官七十以上, 士庶八十以上, 未八十而偕老者, 竝加一階, 凡七萬五千一百四十五人。 拜顯隆園, 回鑾, 又拜景慕宮, 卽莊獻世子誕辰也。 是年是日, 聖慕冞切, 連謁宮園, 哀疚過度, 諸臣力請, 翼日始還宮。 新印三經、四書, 分藏于館閣、史庫、太學, 又命藏于宙合樓, 謂閣臣曰: "謹守之。 昔寧陵《心經》殉, 丙申山陵, 殉《小學》, 予將繼述也。" 夏五月齋居日, 下綸音曰: "有弗咈之德, 有莫禦之量, 歷稽千古, 只有此二聖人而已。 嗚呼! 尙記申申之諭, 怳若隔晨。 若曰: ‘我有過無過, 人皆仰之。 彰我之過, 由余容之。 訐直之言, 於我何有?’ 特書殿壁, 洞闢不諱之門, 範圍之大, 天地莫量。 廷臣之欲, 以羅蔘一事, 贊揚包荒之大度者, 特一蠡之測耳。 嗚呼! 忍言庚辛之際乎? 縉紳章甫, 投匭公車, 而不惟不罪, 無一人不優批。 有白于筵席者曰, ‘人臣之義, 當以徐志修之求對面陳, 爲正。 乃責諭以田錫之焚藁非矣, 周昌之抗對難矣。 ‘最後一說, 雖甚妄酸, 余亦不加之罪。’ 筵臣惶汗而退, 記之家乘, 旋降求言之旨, 俾許盡言。 予小子, 敢不書紳銘腑, 以親心爲心乎? 再昨年所謂未徹之疏, 公而齎憤乎? 私而逞憾乎? 此而涉一私字, 是可忍, 孰不可忍? 而敢欲螮蝀於太淸乃爾乎? 齋宵明發, 坐待享時, 呼燭和淚, 瀉此血腔, 倘使此諭, 仰助於揚徽闡美, 予小子庶有歸拜之顔。 豈比於來春顯冊渙號之儀文也哉?" 久旱祈雨, 敎曰: "人事不修於下, 故恒暘之咎, 其應爲暵。 近日言路之不闢, 莫曰史乘之所未有。 極必反, 理固然, 凡在論思言責之列者, 事之可言, 竭論無諱, 以充予心之善端。 言須剴切, 可以感人。" 一捧一條痕, 一摑一掌血之句, 爲三司諸臣誦之。 秋, 王有癤候, 久未復常, 又久旱不雨, 聖懷憂勤, 命大臣六卿籌司諸臣, 會于廟堂, 講消弭之策, 廣求直言于中外, 又諭三南道臣, 訪幽隱察冤鬱。 拜明陵《人瑞錄》成。 王, 以是年大慶, 旣稱賀于殿宮, 大覃恩中外, 乃召耆臣六卿以上, 指授義例, 編次京外蒙恩老人之數, 作爲一書, 名曰《人瑞錄》, 印布壽傳。 冬, 停華城城役。 自癸丑始築, 工幾完, 至是, 六道告歉, 王屢欲停役, 諸臣言工役之不傷財不病民。 敎曰: "城役爲所重也, 停役亦爲所重也。 顧今三南畿甸, 方秋顚連, 西北亦奏艱食, 殿宮獻御, 猶且停免, 則城役雖重, 自有層節, 豈可此停而彼不停哉? 一國財貨, 只有此數, 非耕民嗣歲之糧, 則卽賑民糊口之資, 今曰 ‘捨汝耕賑, 從我城役,’ 是豈理也哉? 或曰, 歉年興作, 可兼賙恤, 以朱子 南康故事, 范希文 浙西已跡爲說, 而此特一郡一鎭之政, 予君臨一國, 一國之民, 皆吾赤子, 不能使百億萬頷顑之類, 不農不商, 仰食於一城之役, 則所活者幾何? 爲今之道, 莫如聚會精神於荒政一事。" 仍下綸音于華城府, 停其役, 至乙卯, 城始成。 諸路大饑, 三南尤甚, 分遣閣臣承旨, 賚綸音慰諭, 船粟往哺耽羅之民。 王, 以耽羅處絶海, 尤勤柔遠之念, 每聞饑荒, 軫恤先於諸道, 泛舟之役, 必親製文祭海神。 《朱書百選》成。 王最喜朱子書, 選《語類》《大全》, 爲《選統》《會英》《會選》諸書, 復取書牘約之爲《百選》, 活字印行。 十九年春, 加上尊號于貞純大妃景慕宮惠慶宮, 受卽阼二十年賀。 命文侍從以上, 武閫帥以上, 蔭準職以上六十一歲人, 幷加一資, 蓋推是年之恩, 而又恐爵賞之太濫也。 陪慈殿、慈宮, 行禮于景慕宮, 坤殿同詣, 是日, 卽莊獻世子周甲誕辰也。 閏二月, 陪慈宮, 幸華城, 展拜顯隆園, 還御華城, 閱城操夜操, 御奉壽堂, 進饌于慈宮,行七爵禮, 御新豐樓, 賜本府四民米, 饋饑民粥。 御洛南軒, 行養老宴, 群老進爵獻壽。 仍命園底居民, 復二年, 華城居民, 復一年。 舊例陵園幸行, 度支之臣爲整理使, 而自是歲園幸, 置內外整理使, 辨理諸務, 以整理餘錢作穀, 分置三百州縣, 名曰整理穀。 斂散如式, 又補耽羅賑資, 以廣慈恩。 謁華城聖廟, 賜經書臧獲于校宮。 奪鄭東浚官爵。 東浚自簪筆, 厚被上眷, 官至貳卿, 而矯旨誣聖, 情跡叵測。 言者請明正其罪, 東浚旋自斃。 乃因朝參, 命收其告身焚之, 仍行大黜陟之政。 竪御筆聖蹟碑于定州 㺚川, 太祖旋凱, 宣廟駐蹕舊基。 拜宣禧宮, 御洗心臺, 宣醞諸臣。 王曰: "每年此時, 必臨此臺, 予豈爲暇豫而然哉? 蓋爲景慕宮初建時所卜之基也。 昔乙卯邦慶時, 故重臣朴文秀, 與諸卿宰, 會弼雲臺, 以伸歡祝, 靈城詩句, 尙今傳之雲臺, 卽此地。 今年, 卽千載難逢之會, 卿等亦修前人故事, 以賁飾太平也。" 賞花釣魚于內苑, 御尊德亭, 語諸臣曰: "自古內苑之遊, 非戚里, 不得與。 以外臣, 與內宴異數也。 在昔長陵癸亥以後, 眷遇勳臣, 曲宴陪遊, 禮同家人, 孝廟初服, 痛革勳貴之弊, 招延士林, 契合密勿, 魚水天香, 尙傳宋文正登對故事。 而朝著分裂之患又作焉, 自肅廟朝, 至先朝不得不托肺腑於戚畹之臣, 出入禁臠, 非外朝之比, 時勢使然耳。 予自春邸, 深知右賢左戚之義, 御極之初, 首建內閣, 非爲賁飾文治, 蓋欲朝夕左右, 藉其啓沃獻納之益。 故好爵以縻之, 優禮以待之, 以至燕閑花釣, 必與諸閣臣同焉。 竝與其子姪兄弟, 而皆許赴筵, 簡其禮數, 接以恩意, 一堂歡樂, 歲以爲常, 其眷遇榮寵, 可謂從古人臣之所難得, 而畢竟貴近之弊, 至於近日而極矣。 進退弛張, 理之常也, 安知戚臣之不繼此而進也? 然親近士大夫, 卽予素性也苦心也。 行之數十年, 今不可中塗而廢, 登筵諸臣, 須各警惕, 毋忘予今日之諭也。" 竪御製靈槐臺碑于溫陽行宮, 卽景慕宮庚辰溫幸時, 手植三槐之地也。 夏, 追躋桓祖大王懿惠王后永興本宮。 先是, 以是年爲桓祖誕降之八回甲, 遣大臣, 行酌獻禮于咸興本宮, 咸興儒生, 疏陳永興本宮, 有典祀廳故蹟, 宜擧躋享之禮。 王感悟, 拜眞殿, 仍御摛文院, 召大臣諸臣詢議, 僉曰允合情禮, 乃遣大臣禮官, 遵古禮, 造位版于本宮, 卜吉日躋享。 仍命設養老宴于豐沛樓。 兩本宮儀式成。 國初, 京都有啓聖殿, 咸興永興有本宮, 所以奉先王先后位版, 蓋用原廟之制也。 舊令內需司, 別差典祀享, 宗伯太常, 不能管攝違古規, 而襲謬例者寢多, 王特命釐整儀節。 煥新樽罍, 歲封衣幣香祝, 必宿齋躬莅其事, 及桓廟躋享禮成, 命閣臣, 編成儀式, 鋟印藏于本宮。 六月丁酉, 進饌于慈宮, 朝官六十一歲人, 宣醞殿庭, 御弘化門, 賜米四民, 下綸音于諸道, 講鄕飮酒之禮。 秋, 以糶糴發策, 命太學生及諸蔭官條對。 語筵臣曰: "糶糴, 卽社倉遺意, 耗穀不過雀鼠之耗, 而道臣守令之以耗穀, 爲官用者, 已非正當道理。 況自朝廷取用, 便若經法, 豈非苟簡之甚乎? 又況分留漸淆, 山沿俱病, 京外各衙, 簿書多端, 吏緣爲奸, 民受其弊。 今欲矯捄, 則莫如先祛盡分名色, 而事多掣礙, 未之果也。" 冬, 拜宣禧墓懿昭墓。 是年景慕宮五享及俗節朔望祭, 皆親行, 或仍留齋殿, 至數日, 以回甲之歲也。 罷守禦京廳, 以守禦使出鎭南漢, 爲廣州留守。 編《李忠武全書》。 王, 於尙忠敉功之方, 靡有闕典, 而以忠武公 李舜臣忠愍公 林慶業爲最, 輯其遺文遺事, 忠武《全書》, 忠愍《實紀》, 印行之。 禁廚院燔甆侈巧之制。 二十年春, 祈穀于社壇, 下帑錢萬緡, 命湖南伯, 貿粟以濟耽羅饑民。 拜顯隆園。 拜皇壇, 省大享牲器, 敎曰: "《大明集禮》, 審鼎鑊 視滌漑, 監明水, 皆親臨, 而壇享儀則攝行, 殊非宗周之義。 予當親臨省視, 其令釐正。" 夏, 白虹貫日, 敎曰: "否德忝位二十年, 無災不召, 而虹貫之異, 卽所初有。 凡係側身責躬之方, 其敢循常應文? 昔在先朝, 有雲觀虹貫之報, 而試士則以來言得人之意, 不停, 大享則命攝。 敬天奉先, 豈有二致, 而齋心之時, 貴在專一。" 夏享命攝儀。 以求助之意, 行賓對。 從祀文靖公 金麟厚文宣王廟廡。 先是, 京外儒生, 屢請配食之典, 鄭重不許, 至是, 敎曰: "我朝以後, 首闡性理, 洞見大原, 惟金文靖一人。 其詩曰: ‘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 卽此可見學識之超出群儒, 文靖, 我東之周子也。 兩侑聖廟, 而周子獨漏, 則兩之心其安乎? 使五賢以下從祀諸儒, 在必讓與於文靖。" 仍命擧以行之, 又以諡歉於行, 改文靖文正。 設鑄字所, 範銅爲字, 始自世宗甲寅, 王命芸閣, 以甲寅字爲本, 前後鑄三十萬字。 爲印書之用, 後又有整理字, 自甲寅冬, 設印所于昌慶宮之舊弘文館, 凡御定命編之書, 皆於此編印, 至是, 號鑄字所。 命編《尊周錄》。 王於尊周大義, 寤寐繼述, 每望拜皇壇, 遣官審宣武祠, 致侑寧遠祠武烈祠, 扁李提督祠堂, 歲祀不祧, 訪李摠兵石尙書後孫。 甄三學士之裔, 腏七義士之享, 宣額於龍灣之兩祠, 篆首於撻川之遺塋。 奬金將軍之大節, 訪李有吉之遺孫, 林寅觀等九十五人, 設壇泊汋之濱, 以慰漢冠之獨葆於秉義。 斥和諸臣, 表奬存錄, 闡發無遺, 壬辰樹勳立慬之臣, 靡不揭厲。 建忠臣義士壇, 撰㫌忠、尙武碑, 紅衣翼虎諸人, 皆有紀事, 諸沫梁大樸子孫, 皆命錄用, 至是, 彙輯列朝尊周事實, 著成一書。 冬, 親鞫鄭好仁成德雨竝竄之。 好仁以兵判, 修入頒曆單, 不拔洪樂任, 德雨以銓堂, 差洪守榮享官, 王震怒有是處分。 敎諸臣曰: "若論二人著見之罪, 則必以親問爲過中, 而今予此擧, 欲使萬人知懼, 百世取則。 《書》所謂監于玆祥刑也, 今以後咸知象魏之高懸, 莫干邦憲。" 《春秋》成。 三傳, 竝列于經, 而《左氏》最詳於國史, 獨經傳不相統屬, 學者病之。 命詞臣, 依《朱子綱目》例, 以經爲綱, 以傳爲目, 印行之。 宣廟朝, 嘗以經傳爲綱目, 未及梓行, 世宗丙辰, 註解《通鑑綱目》, 卽思政殿訓義, 是書義例年甲, 寔符兩朝故事, 亦繼述之意也。 大臣禮堂求對, 請擧東宮冊禮, 王曰: "庚戌以後, 名號已定, 神人有托。 曰: ‘雖小元子哉。’ 成王已登寶位, 而周公尙以元子稱之。 元子定號之後, 封冊豈有早晩乎? 且冊禮後, 冠禮、嘉禮欲竝行如禮, 所謂行一三善, 予之必欲遲遲者此也。 明年, 卽就傅之年, 先備師傅之官, 待春開講。" 仍設講學廳。 二十一年春, 下綸音于諸道, 誕誥休老勞農廣敬因本之義, 又曰: "《小學》一書, 卽學校始敎之次第節目也, 以予寡昧, 尙賴先王導迪之恩, 記在童習之年, 粗收日講之力, 邇來學渝而敎弛, 此書隨而束閣。 予爲是懼, 爰命內閣之臣, 就訓義而攷證之。 且《三綱二倫行實》等篇, 爲輔治勵世之具, 與《小學》書, 不可偏廢, 釐爲一篇, 命之曰《五倫行實》。 一日禮行, 風動四方, 惟《鄕飮酒》近之, 粤我世宗盛際, 創行養老宴, 《三綱行實》之頒下, 亦在其時。 予小子其敢不修述焉? 鄕約之於化民成俗, 亦易爲力, 朱夫子蓋嘗月朝讀約, 予故曰鄕約之效, 不差於《鄕飮酒》。 亦不可不講而明之, 機務之暇, 彙成鄕飮儀式, 鄕約條例。 苟使是擧, 不歸於徒法徒言, 則何頑之敢梗, 何愚之不明乎?" 仍命內閣, 印行《五倫行實》《鄕禮合編》。 置元子左右諭善。 語大臣曰: "予在春邸, 多賴賓僚資益之力, 元子方在沖齡, 尤宜端方之士。 左右輔翼, 學識行檢, 可合薰陶者, 今世亦豈無其人, 而必須得踈野不軟熟者, 方有嚴憚之效, 此意不可不知。" 戶曹進漕船事目, 敎曰: "漕轉之政, 兼寓戎務, 自昔官之制, 以至, 漕船卽戰船, 此亦兵農相寓之一端。 我朝漕倉之法, 雖不涉於戎務, 其實則與兩營之移劃大同, 訓局之三手糧, 同其義。 救時之政, 自有時措之宜, 獨於漕轉一事, 豈可膠守? 戰船試用之意, 旣發言端, 嚴飭造船營閫邑鎭, 堅造精製, 以爲兼運漕穀之方。" 拜顯隆園。 周覽華城城堞樓櫓, 謂諸臣曰: "孝廟滌惱堂於後苑, 御內廐馬, 使中官執鞚, 日臨是堂, 實出習勞之聖意, 蓋跨馬習勞, 卽我家法也。 予亦於禁苑, 以戎事殿座, 必騎馬者, 追列聖故事。 雖終日馳驅, 不覺其勞也。" 夏四月, 元子與師傅、諭善, 行相見禮。 王, 召見師傅、諭善, 敎曰: "今日行禮, 皇天祖宗之默佑也。 就傅之節, 自有體貌, 予雖未見其拜揖之儀, 初聞講讀之聲, 予心嘉悅。 卿等其善輔導也。" 自是, 元子講學之暇, 每命侍坐, 華盛之服, 膏腴之味, 勿令近口體。 嘗語筵臣曰: "予自少讀書, 必有課程, 而近爲元子, 益增三餘之工矣。" 敎曰: "記昔先朝, 惟農是重, 耕耘之節, 夙駕親省, 每在城南之野, 至今父老, 攀聖蹟而頌聖德, 臺其地而名之曰省耕。 予屢陪鑾蹕, 尙今記有。" 仍命閣臣, 書臺號刻石以表之, 又命各築一臺於東西兩郊。 王, 嘗遇三皇及列聖諱辰, 輒御素膳, 語賓筵諸臣曰: "近古以上, 公坐會飯, 不食牛肉, 國忌齋戒, 朝臣皆蔬食兩日。 先朝初年猶如此, 惟大享之太牢, 進宴之大膳, 始用牛肉, 卽古人無故不殺牛之義。 而今則此法蕩然, 各宮房皆有所屬牛肆云, 執法之有司, 先自宮房而嚴加操切, 豈有冒濫犯禁之弊乎?" 秋拜章陵, 詢本郡父老疾苦, 復一年, 甲寅, 瞻旄者年七八十人, 各加一資。 仍歷幸愍懷墓, 拜顯隆園

〔○〕二十二年春, 拜顯隆園, 次華城府, 曰: "陪奉園寢, 今爲十年, 尙無惠澤之及於是府是民者, 此豈本意也? 城池雖完, 終不若衆心之成城? 民心固然後, 拱護可專。 乙卯整理穀之分置各道, 雖出廣慈惠之意, 三百州郡斂散之際, 安得無弊? 名以整理穀, 則不復取耗者, 設置之本意也, 仍以整理穀屬之華城府, 凡本府之穀, 永除其耗。" 夏, 敎曰: "蟲損嘉禾宰樹, 安得不捕而除之? 庶氏剪氏之職, 爲是設耳。 掘坑焚瘞, 始於姚崇, 歷代因之, 遂爲成憲。 近者園寢桑梓, 有蟲損之害, 使植木十邑捕除, 而是蟲卽蠢動之生物, 驅而放菹, 勝於烈而焚之。 宜令曰生之德, 竝行於其間? 嘗聞蟲入海, 化爲魚蝦, 伏波之治武陵, 明驗尙傳? 其令投之鷗浦海口。" 疏決京外死獄, 語諸臣曰: "予於疏決, 不如例臨殿者, 予心竊有隱忍衋傷者。 天下萬事, 莫不有絜矩之義, 念及沁都, 予心如割, 以何心臨殿評論可否於流放之類乎。 此所以只令諸堂, 會直該曹, 只稟死囚之案者也。" 時久旱, 移秧愆期, 飭諸道代播之政。 秋, 拜敬陵昌陵, 歷拜局內諸陵。 創壯勇外營, 五衛之制。 國朝軍制始創義興三軍府, 三軍變爲五衛, 定部統而作選井之法, 摠民兵而成寓農之規。 逮夫設軍門置營司, 而衛法廢。 華城, 素稱畿輔重鎭, 而馬步軍制, 略倣訓局, 癸丑陞營之後, 依國初永安道馬軍稱親軍衛之例, 置親軍衛三百人, 置步軍二十六哨, 仍抄龍仁等五邑束伍之精壯者, 增置十二哨, 成一營五司。 又以本府及屬邑民兵, 創爲守城之制, 互相分隷。 遂改司哨之名, 而定衛部之法, 以一營分五衛, 五衛摠二十五部, 內外營軍, 摠爲五千。 備邊司成節目以進, 語諸武將曰: "華城軍制, 先復衛部之舊制, 是亦義理所關也。" 《五經百篇》成。 取《易》《書》《詩》《春秋》《禮記》九十九篇, 置《庸》《學》《禮記》中, 以朱子章句序, 附其下, 以倣《孟子》卷末附明道墓表之義, 剞劂印行。 又以近世詩律之漸就噍殺, 取杜甫陸游全律, 分韻印頒, 皆導民化俗之至意也。 冬十月己丑, 下綸音于諸道, 勸農政救農書, 以明年己未, 卽英廟親耕耤田之年, 是月建丑, 土牛祈年之義也。 王, 臨御已久, 益懋從先進之方, 絲綸政敎, 一以敦本務實爲先, 京外進農書者, 凡四十餘人。 下璿題于泮宮, 試日次儒生召巍等人, 宣以法醞, 遵世宗朝賜畫鍾, 孝宗朝賜銀盃故事, 特撤常御銀盃錫之, 篆其腹曰我有嘉賓, 蓋以《鹿鳴》燕賓之禮, 禮士也。 仍命與筵諸臣, 應製諸生賦歌詩, 以詠其事, 又親綴銘詩序以弁之, 刻揭于明倫堂, 彙爲集, 命鑄字所印頒, 名曰《太學恩盃詩集》。 王, 自御極, 深念導迪作興之方, 修明月講旬試之式, 或臨軒而親試, 或頒題而較藝, 或講義而叩學, 躬考其券, 親閱其對, 賜第以勸之, 筮仕而奬之。 功令之文, 至登編印, 賜賚便蕃, 恩榮曠絶, 爰及八方, 莫不賓興, 辛亥有《瓊林聞喜錄》, 壬子有《嶠南賓興錄》, 癸丑有《關東賓興錄》, 甲寅有《耽羅賓興錄》, 乙卯有《豐沛賓興錄》《正始文程》, 庚申有《關北關西賓興錄》。 將行大政, 敎曰: "西京之重吏選, 卽敦本愛民之意也。 今也不然, 用人旣用科目, 而侍從之列, 反不若蔭武, 內而不得爲掌賦之官, 外而不得爲字牧之任。 又或平地推躋, 使之參聞廟謨, 金穀甲兵, 茫昧如瞽者之鋪籌, 眞所謂所用非所求。 若使新進文臣, 試吏下邑, 兼及郵障, 習知民生之疾苦, 及其馹召而來也, 簉言退牘, 歷陳除弊祛瘼之策, 則九重雖邃, 四野在邇, 其有裨於民國, 遠勝於一遣衣繡之行, 令廟堂, 另究對揚。" 仍飭文蔭武互差之政。 二十三年春, 有輪行之疾, 京外死亡凡十二萬, 王大加憂厲, 廣施隱恤之典。 又敎曰: "稽之故事, 雖非厲氣, 凡屬無名之疾, 皆別設厲祭, 設壇郊場, 慰祭死傷, 昉於成疈磔遺制, 爲民靡不用極之意。 無於禮者, 猶可義起, 況周公載之禮, 我列聖行之? 則不修而擧之, 非和神人之道, 行厲祭于北郊, 慰祭于東西南郊。" 仍命諸道, 皆擧疈辜之禮。 乾隆傳訃勅將至。 舊例, 訃服制, 用雍正乙卯之式, 諸臣皆言失禮之中又失禮焉, 且乖不貳斬之義。 王曰: "諸臣服色, 卽古人所謂茅纏紙裹, 不成體制者也。 蓋我國禮制, 猶多未遑, 至聖祖講《曾子問》, 始正群臣服制, 先朝《喪禮補編》成, 一洗千古之陋。 而惟於國內行之, 至於淸國服制, 則仍用乙卯以前之制, 蓋出於不屑改爲也。 今欲一遵《補編》冠服, 或以爲有反復重之嫌, 不貳斬之說, 卽指皇朝侯服之分而言也, 以此爲說, 亦無礙於大一統之義耶? 無寧仍舊貫, 以寓忍痛含冤之意可也。" 《雅誦》成。 王, 以後於三百篇, 得思無邪之旨者, 惟朱子詩爲然, 手選印頒, 講於經筵、冑筵, 藏之尊經閣, 作儒生月講之編。 幸慶熙宮。 時値元陵諱辰, 特命全釋鄭致達妻, 諸臣力爭不從。 居數日, 謁景慕宮, 下綸音, 布告群工曰: "嗚呼! 昔年因心之愛, 卓越百王。 丙子年間, 講《通鑑》德成閤, 至孝文淮南王事, 縷縷剖析之旨, 筵臣有泣沾襟者。 今鄭妻不死而老且病, 以昔年所以某年前, 處於鄭妻之至情至義, 默究敻溯, 則在初載雖任他公議, 在今日必當有是擧。 是擧之不足, 又當源源如平昔。 若不奉承於今日, 敢云紹述於昔年? 以往, 聖遠道晦, 滔滔一轍, 骨肉相殘, 故朱子有 ‘病死何哭’ 之語, 以警後世。 大抵誅亂賊之義, 人君之所樂聞者, 夫夫也, 皆能言之, 無賢愚勇㤼之分, 特於全懿親三字, 便成忌諱, 志士緘口。 今欲體昔年篤友之心, 以鄭妻之所坐, 有今日之命釋, 國史書之, 野乘記之, 曰 ‘罪固難貰, 屈法伸恩’ 者, 以歸美闡徽於昔年云爾。 則此所以爲明義之大頭䐉, 而我國家億萬斯年之福, 將自今伊始矣。" 夏五月, 敎曰: "是年月日, 卽我端敬聖后復位封陵敦匠諸臣復命之時也, 舟梁寶甲, 又在是年, 瞻望珠邱, 愴慕冞新。 卽令宗伯卜吉, 遣大臣攝行酌獻之禮於溫陵。" 秋, 諭赴燕使臣曰: "予於朱子書, 苦心誦習, 就一部大全, 略之爲《會英》, 類之爲《選統》, 鈔之爲《百選》, 槪之爲《節約》, 集之爲《會選》, 而竊又有契於《春秋》之旨, 擬成大一統文字。 欲以《大全》《語類》《遺書》與二經四書之《傳義》《章句》《集註》《或問》《啓蒙》《家禮》《蓍卦》《考誤》《昌黎》《考異》, 以至《魏氏》《契》《楚》人之《辭》《通書》《西銘》《太極傳解》等群書, 裒爲全書, 待編成告于先聖之廟而印行, 欲述朱夫子 漳州故事。 《春秋》之先刊, 自有微意於大一統者存焉。 但《語類》義例多氄駁, 《池饒》, 兩本雖稱精善, 黃文肅尙不滿其意。 若其分門分部者, 張敬夫之類《言仁》, 趙忠定之類《奏議》, 蓋嘗見正於考亭函丈之際, 則微言大義, 鬱而未彰, 是豈朱夫子本旨? 考定之時, 宜加詳審, 須與眉、徽、建安之本, 而見得眞面目, 可以成書。 雖以大全言之, 台州奏狀, 不載於閩板, 且如《陸王》《帖》, 《梅花》《賦》, 逸而不列, 使行入燕, 另購《大全》眞本與《語類》各本。 若或藉此而雜書又出柵外, 王府自有關和, 孰敢干之?" 移搆敬奉閣於皇壇之側。 閣舊在銅龍門之左, 與勑所棄之地相隣, 至是特命移設, 揭英宗御筆敬奉、欽奉之扁, 奉藏太祖神宗毅宗三皇御筆御畫障子及洪武二十五年以後誥印。 拜獻陵, 仍拜顯隆園。 命朝士儒生之專治朱子書者, 內而大臣銓官, 外而諸道方伯, 各令薦進。 建御筆神德王后私第舊基碑馳馬臺聖蹟碑于谷山府。 編成莊獻世子睿製三冊, 自彙輯釐校, 以至塗改剪貼之事, 悉經御手。 睿學之淵邃, 國人所誦, 而王感慕手澤, 藏之內府, 至是始躬成編帙。 蓋將與列聖謨訓, 尊閣壽傳, 以寓不洎之孝思也。 《大學類義》成。 取眞德秀 《大學衍義》, 丘濬 《衍義補》, 節略其最切要尤鑑戒者, 手批採輯者也。 王, 自春邸, 喜是書之有裨治道, 屢加勘定, 至是始成。 未及印行, 奎章閣, 編進御製。 二十四年春正月朔朝, 冊元子爲王世子。 是日拜景慕宮, 還御集福外軒, 召見大臣、閣臣、禮官, 敎曰: "元子今爲十一歲, 封冊之禮, 尙今遲遲者, 蓋有待耳。 《易》貴易簡, 《禮》有三善, 亦粤我顯廟故事, 竝擧冠、冊、嘉三禮於一歲之中。 貽謨燕翼於千於萬, 豈非今日之所可仰遵乎?" 仍命竝擧冠、冊之禮, 仍行嘉禮於是年。 拜顯隆園。 冊禮旣定, 王, 每對敦匠諸臣, 語及昔年, 未嘗不玉涕沾襟, 及拜園, 敎諸臣曰: "今日予又忍辭園而歸耶?" 露伏莎上, 嗚咽失聲。 諸臣泣請, 向夕次齋殿, 翼日回鑾。 禮曹以冊禮儀節啓, 敎曰: "以予今日孺慕, 若禮臨殿, 於予心安乎? 禮緣人情, 順於人情處, 合於天理。 況公朝之禮, 雖別於士禮, 娶婦之家, 三日不擧樂。 昔我世宗大王授受之際, 我太宗大王, 於報平殿, 命內臣陪侍春宮而來, 所御內殿, 傳以大寶, 遂登九五之位。 承, 是何等典章, 而其禮之至簡猶如此。 此豈非予小子一心仰述者乎? 三加禮, 命賓冊儲禮, 傳冊臨殿則皆寢之。 禮成後賀儀, 當竝行於殿宮。 予何敢不受? 亦何可臨殿, 以權停禮行之, 春宮賀儀, 亦遵 廟位儲時例, 權停。" 二月乙酉, 王世子行冠禮、冊禮于集福外軒。 禮旣成, 王, 與王世子, 謁眞殿、太廟、景慕宮, 掩泣語諸臣曰: "今日行禮, 宗社增重, 洋洋陟降, 必當悅豫于上, 而予之情事, 益無以爲懷矣。" 拜元陵, 歷拜局內諸陵。 惠慶宮有癤候, 浹旬愆和, 王, 晝宵焦憂, 衣不解帶, 親自傅藥, 御手爲腫。 至是諸症夬復, 諸臣請擧賀儀, 王, 以慈心, 不欲張大, 不許。 行世子嬪初揀之禮, 安東 金氏膺選, 前參判金祖淳女, 今坤殿也。 將行初揀, 語筵臣曰: "揀擇之禮, 非古也。 先正李文成, 嘗有格言, 而國朝故事, 亦不敢廢也。" 夏, 儒臣金履載疏論銓官, 王, 嚴敎投配。 以初元以後, 秉守之大義, 用舍之本旨, 矯時正俗之苦心, 敷示筵臣, 凡屢千百言, 仍命以筵本謄頒朝紳。 王於是歲, 遇慶疚懷, 頻有愆候, 且積勞於侍湯之節, 自六月初, 有癤候, 日益沈劇。 而敎承旨曰: "民事不可緩也。 勿以予病而或滯也。" 至二十八日, 疾大漸, 大臣諸臣, 入候臥內, 王, 已不能語, 而微微有玉音。 諸臣諦聽, 則乃壽靜殿三字, 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也。 蓋聖意, 若有仰告于慈聖而莫之及也。 嗚呼! 痛矣。 竟以是日酉時, 昇遐于昌慶宮迎春軒, 春秋四十九, 侍疾者大臣、閣臣、承旨、史官而已, 宦侍宮妾, 無一或近焉。 大喪之日, 深山窮谷, 田夫野叟, 以至愚婦孩童, 莫不奔走號呼, 如哭其父母。 冬十一月甲申子時, 葬于顯隆園之東第二岡亥坐之原, 是爲健陵。 嗚呼! 痛矣。

〔○〕王聰明睿知, 本乎天, 寬仁恭儉, 本乎心。 天人性命之學, 本乎六經, 禮樂聲明之治, 本乎三古。 道可以範圍宇宙, 德可以陶鑄, 功可以爲萬世開太平, 有非一德一行之所能名言也。 謹按諡法, 經天緯地曰文, 禮樂明具曰成, 保大定功曰武, 秉德遵業曰烈, 窮理盡性曰聖, 施仁服義曰仁, 履正志和曰莊, 繼志成事曰孝, 以正服之曰正。 王, 養德春宮十有五年, 非問寢視膳, 則潛心經籍, 惟日孶孶, 自墳典邱索、洙泗洛閩之書, 九流百家之編, 以至東方儒先文字, 靡不融會而貫穿, 凡性理之頭臚, 問學之津筏, 千聖相傳之旨訣, 前賢未發之蘊奧, 靡不硏賾而探躡。 及御極, 一日萬幾, 宵衣旰食, 而淸燕有暇, 左右縹緗, 仰思俯索, 夜以繼晝。 其自修則曰: "克己從性偏難克處克將去。 予之病在於褊急, 呂伯恭讀躬自厚而薄責於人之訓, 遂變化氣質, 予嘗慕之而未能也。" 又曰: "予豈有問學工夫? 而特以經歷之多艱, 不能無動心忍性之益。" 又曰: "士不可以不弘毅。 予於弘毅二字, 深味之也。" 其論學則曰: "識得直內方外之工, 可語天德王道。 直內, 敬也, 如持志, 方外, 義也, 如養氣。 聖人千言萬語, 敎人做聖做賢, 其要在此。" 又曰: "人須於平日存養, 使此心常存, 此理常明, 雖簞瓢陋巷, 而浩然塞乎天地者, 未嘗泯也, 雖觀大戰於鉅鹿之壁, 張九奏於洞庭之野, 本體之虛明靜一, 固自如也, 方可以爲大君子做大事業。" 又曰: "人之不能力行, 只是他知之不眞。 學問到得物格知至, 已占八九分地位。 誠意以下, 特將此本領, 點綴提醒而已。" 其論文章則曰: "文章有道有術, 道不可不正, 術不可不愼。 文者, 當宗主六經, 羽翼子史, 會極於朱子書, 然後其辭醇正而道術庶不差。 稗官小品之書, 最害人心術, 士之有志於經術文章者, 雖賞之, 不觀。" 又曰: "予始留意於作家, 又從事於經學, 亦嘗用工於端拱曲跪規行矩步, 今而思之, 未覺有補於身心。 且帝王之學, 與韋布不同, 自有大於此者, 心性理氣, 猶不必毫分縷辨, 況詞章述作, 何足費吾心力? 其發爲雲漢, 則弘璧大球, 皇王之體裁也, 朱絃疏越, 邃古之音調也, 慶雲和風, 聖門之辭氣也。 神明變化則藝苑作者, 不足語其工, 搜羅剔抉則專門弘儒, 不足涉其博, 灝灝渢渢, 與《典謨》《雅頌》相表裏。" 其載諸竹素, 則曰《尊周彙編》, 所以正義明理也, 曰《大學類義》, 所以援古鏡今也, 曰《五倫行實》《鄕禮合編》, 所以導正民俗也。 曰《八家》《選》《杜陸》《什》, 所以丕變文體也, 曰《紫陽子》諸編, 所以繼往開來也。 晩年惜陰之工, 亹亹乎伏羲先天之易, 而韋編猶在, 緖言莫攀, 竟使周文憂患後世之意, 孔聖十翼發揮之辭, 不得嘉惠末學啓發群蒙, 嗚呼! 道之否矣。 至於五十年躬行心得, 著見於宗廟之美, 百官之富者, 臣等所承命編校, 有《弘齋全書》三集一百卷。 御製識其藏曰: "予自三歲授書, 粗聞君子之大道, 未始以修辭自許也。 然而酬酢機務, 經綸事爲之間, 形容其言語, 刻畫其聲烈, 則自有不期工而工者, 豈予好文而然哉?" 學則宗鄒魯, 治則尙三代, 入德則曰格、致、誠、正, 範俗則曰禮義廉恥, 而辭達而已。 措之政敎則建奎閣而修集賢之制, 爲右文之立極, 設英選而倣湖堂之規, 爲作人之指南。 五敎三物, 大興庠序, 明正學而闢邪術, 崇經訓而絀稗品。 來汝多士, 接以嘉賓, 磨礱激勸, 彙征于朝, 凡一世絲粟毛髮之才, 莫不皷舞振作於鳶魚飛躍之中。 儼然師道之在上, 以接之統於千五百年之後。 經曰: "念終始典于學。" 傳曰: "文王旣歿, 文不在玆乎?" 王之所以爲文也。 王, 以不世出之姿, 有大有爲之志。 蕫正治官, 綜核名實。 斟酌乎文, 經緯乎目。 精神敎化之所流行, 政刑風采之所皷動, 庶幾乎朞月而化, 三年有成矣。 正南壇之享儀, 陞祈穀於大祀, 以備圓邱方澤之義。 維暮之春玄端, 邃延祗拜皇壝, 建敬閣以識周京之念, 設漢旅以慰殷士之裔。 親眂鼎鑊, 以遵會典之舊, 擧桓廟躋享之儀於八回瑞甲之年, 衣幣冊祝, 歲必躬賚, 籩豆薦獻, 有司虔將, 而原廟之禮始正。 隆皇祖於世室, 闡五紀之化, 而觀七廟之德, 宮園之儀, 泣血撰次, 隆殺得中, 情文無憾。 以至躋大賢於聖廡, 而儒術興, 養群老於華宮, 而慈恩覃。 擧燕射而觀君子之爭, 講鄕飮而知王道之易。 凡吉凶軍賓之大, 儀文度數之末, 莫不參伍經曲, 博極今古, 緣情協理, 粲然畢具, 禮之成也。 停禫月之樂, 獻子之餘哀也, 奏康爵之譜, 老萊之善養也。 乃編雅誦, 以廣詩敎, 廼著《樂通》, 以究律原。 乃命司樂之官, 禁繁促而返和平, 一唱三歎之遺音也。 以至琴瑟笙鏞, 格我烈祖, 鐘皷管龠, 同我百姓, 氣和聲和, 天地之和應之, 而泮水之庭, 古磬出焉, 英陵盛際, 於吾身親見, 則樂之成也。 修信漢之符, 而省闈嚴, 置鹵簿之使, 而仗衛整。 釐太常之式, 而享祀明, 列大庭之標, 而朝儀肅。 官府郡縣, 莫不有志, 量衡律度, 莫不有則, 籌謨銓注, 邦用民數, 莫不有考, 而一部大典, 監于成憲, 秩然一王之制, 法度之成也。 於是乎百工相師, 庶績咸熙。 綱紀振勵, 而朝政成, 禮讓興行, 而民俗成, 氣象淸明, 規度宏遠, 而治道成。 《易》曰: "聖人久於其道, 而天下化成。" 王之所以爲成也。 王, 天挺勇智神武, 蓋世雖昇平百年, 桴皷不警, 而慨然中朝有駕軼八紘之志。 丙丁以前, 閱歷艱虞, 默運神機, 掃蕩群凶, 奠國勢於泰山磐石之安, 肘腋之間, 權奸弄柄, 而談笑而黜之, 不終日而朝著廓淸。 摠攬王綱, 太阿在手, 舒慘弛張, 人莫敢窺其際, 如雨露風霆, 錯行竝流, 而天體凝然, 未嘗有動。 廷紳一或干科, 雖嘗所尊寵禮遇者, 不以恩廢法, 而大義所在, 尤嚴於淑慝之分。 宮府一體, 表裏洞達, 宮掖之屬, 不敢恣出禁闥, 內自朝廷薦紳, 外至遐陬民庶, 如身使臂, 如臂使指。 人人若光明之燭, 照臨眼前, 訏謨定命, 發言盈庭, 而謀之貴衆, 斷之貴獨。 一言而定, 沛然若無事, 每有施措, 令出惟行, 群臣慴服, 奔走率職。 嘗病國朝軍營之弊, 創壯勇內外營, 以復衛府節制, 凡靺韋決拾之臣, 莫不由此而進。 以至桀鰲不羈之類, 亦皆駕馭鞭策, 咸入彀中。 嘗曰: "壯營之設, 非嚴宿衛也, 非備陰雨也。 予有精義存焉。" 於是乎置宣薦禁旅, 以開發軔之階, 飭西北武技, 以求超乘之材。 罷前營, 以汰冗兵, 建兩鎭, 以拓荒土, 南郊大閱, 定勞軍之禮, 華譙夜操, 演登埤之勇, 增《武藝圖》, 以追昔年之志事, 編《兵學通》, 以盡戚氏之奇正。 而黃帝 尉繚之書, 八陣六花之法, 聖聰所遇, 如刃破竹, 老於行間之宿將, 往往顧問, 不能對焉。 其於射藝, 得於天分。 大衍之數, 恒存其一, 物不可盈也。 每暇日, 御內苑, 錬伍肄陣, 以觀坐作擊刺, 歲寒雪下, 燔雉盪醪, 以飮將士, 侑以昭武之樂, 蓋我寧陵鐵杖木馬之志也。 《易》曰: "師, 衆也, 貞, 正也, 能以衆正, 可以王矣。" 王之所以爲武也。 王以尊王黜伯, 爲出治之本, 以右賢左戚, 爲用人之基, 以崇儒重道, 爲敷敎之首, 以祛華懋實, 爲化民之先。 以明天理淑人心, 爲御世之權衡。 恢廓之度, 符乎太祖, 嵬煥之文, 法乎世宗, 英武若光廟, 至行若孝陵。 勘平禍亂, 嘉靖邦家, 遹追乎宣祖, 寤寐風泉, 昭揭大義, 克配乎孝廟, 進退賢邪, 威斷有赫, 肅祖之治體也, 建其皇極, 保我世臣, 英考之心法也。 於是乎建奉謨堂, 尊閣列聖宸章寶翰, 編十九朝《寶鑑》, 藏于太室。 申以《羹墻》《錄》, 以揚先徽而追先志, 赤島之碑, 歸州之銘, 谷州之紀, 栗園之扁, 黔巖之碣, 凡聖蹟所過, 篤慶所本, 必皆表章而闡發。 以至倣範銅之古字而簡編壽傳, 繼賜盃之殊寵, 而譽髦蔚興, 歲再泮試, 稽中葉之徽規, 月六賓對, 儀聖祖之勤政。 修觀刈之禮而農功勸, 申加髦之禁而侈風革。 若其褒忠奬節崇德報功, 亦必以是而推廣之, 挹 之高標, 則寵光被於荒祠, 表方練之危節, 則風聲樹於尺壇。 之竝揭而紀匡恢之舊績, 之齊褒而追含忍之遺志。 辛壬之殉國, 己巳之抗義, 戊申之從征, 壬午之盡節, 或起感於卽地, 或紆想於舊甲, 恩侑寵錄, 無隱不闡。 國初以來, 儒門諸賢, 讀其書而慕其人, 若將朝暮而遇, 俎豆芬苾, 有秩其禮。 蓋惟王, 踐祖宗之位, 行祖宗之政, 遇臣隣則曰祖宗之喬木也, 撫烝黎則曰祖宗之赤子也, 一言一動, 一謨一令, 惟祖宗是繼是述。 而亦必率由舊章, 不愆不忘。 未嘗不兢兢致愼於琴瑟之更絃, 以貽萬億年堂搆之業。 《書》曰: "丕顯哉! 文王謨。 丕承哉! 武王烈。" 王之所以爲烈也。 王, 生知睿哲, 無所不通。 六合之大, 千歲之遠, 三敎之同異, 百代之治亂, 以至乾文、地志、甲兵、錢穀、醫藥、卜筮, 靡不寓目而經心, 曰理一而已。 然而雅言常在《詩書》, 執禮於兩儀運行之妙, 二氣屈伸之奧, 臣等之所不得聞也。 王, 未嘗以聰明示人, 而每臨筵啓牘山堆, 廟謨、臺章、戎政、試事、刑獄、財賦, 一時竝擧, 左右迭奏, 而應之尙有餘暇。 嘗曰: "古人五官竝用, 不但兼人之才, 只是分數明。" 蓋天下之理, 皆爲王之得也。 取人爲善, 如大之若決江河, 一言契旨, 雖踈遠卑賤之言, 必康色而受之, 群臣登筵, 必假之顔導之使言, 言或拂聖意, 未嘗加之威怒。 法語之從, 捷如轉環, 重臺閣言者, 或犯乘輿, 廷臣請罪之, 王曰: "烏鳶破卵, 鳳凰不至。 是言袞職, 可奬不可罪也。" 屢下求言之敎, 嘗曰: "先朝晩年, 尙多危言激論, 近日無敢言者, 予無來諫之誠而然歟?" 蓋天下之善, 皆爲王之有也。 急賢如渴, 有以經術進者, 有以文學進者, 有以才猷進者, 有以世祿勳舊進者, 或老其才而儲養之, 或峻其選而超遷之, 或簡拔於衆棄之中, 或滌蕩於積罪之餘, 酸醎鑿枘, 不枉其性, 椳臬扂楔, 各當其材。 天無私覆, 海不擇流, 人莫不自效其尺寸之能。 嘗扁寢殿曰: ‘蕩蕩平平室。’ 書 ‘庭衢八荒’ 四大字於殿壁, 又著 ‘萬川明月主人翁序,’ 有曰: "月一也, 水之類, 萬也, 水者, 世之人也, 月者, 太極也, 太極者, 吾也。" 蓋天下之才, 皆爲王之用矣。 自志學之齡, 造詣已躋上聖之域, 而望道如未見, 發憤忘食, 循序力進。 至庚申, 猶謙謙若虛, 自比於蘧瑗之五十知非, 此所以聖而益聖也。 傳曰: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參天地之化育。" 王之所以爲聖也。

〔○〕王, 篤於友于, 嘗臨恩信君之廟, 手自奠酌, 天淚汍瀾, 寵以節惠之典, 賁以宸翰之碑, 於英廟諸貴主及兩郡主, 恩意周摯曰, ‘以親心爲心也。’ 和緩主有滔天之罪, 而曲加寬貸曰, ‘先王所寵愛也。’ 爲賊奇貨, 宗社幾危, 雖迫於群請, 割恩置法, 而追念傷衋, 久益不衰。 䄄又爲國禍本, 慈綸屢降 輿憤日沸, 而始則置之近島, 妻孥與俱, 廩餼相續, 終又歲一召見, 不恤庭臣之爭, 嘗曰: "尺布斗粟之譏, 猶不能免, 今日全恩一事, 豈不有光簡冊乎? 況以予情事, 只有同氣一人, 諸臣豈忍使予復行丁酉之擧乎?" 於朝臣, 曲察下情, 無微不燭, 存歿之際, 隱恤尤至。 方春將賞花, 敎曰: "相臣在殯, 豈可遊衍乎? 此擧之義也。" 愛民視之如傷, 或面諭方伯、守宰, 察民隱而救民瘼, 或分遣繡衣, 刺匪法而伸無告, 或召見朝正吏, 詢民疾苦。 一雨一暘, 聖慮憧憧如農夫之憂其苗, 置測雨之器, 竪占風之竿, 上辛方社, 夙祈西成之慶, 元日溫綸, 預勸東作之節。 每遇災歲, 一念濟恤, 如救焚拯溺, 發倉以賑之, 船粟以哺之, 捐帑藏以補之, 停糴餉以寬之。 貢獻之重而蠲之, 王稅之正而減之, 荒政之要, 標記壁上, 以備常目, 日接廊廟之臣, 講究賙賑之策。 慰諭董飭, 遍於諸道, 十行一札, 階前萬里, 仁恩所曁, 匹夫匹婦, 無顚連溝壑之患。 罷內貿之名, 戢宮奴之弊, 爲市井之民也, 革推刷之官, 正宣頭之案, 爲奴婢之民也。 出宮結而撤獵軍, 爲峽野之民也, 創隊船而定魚鱐, 爲江海之民也, 蠲貢鰒而民息肩矣。 減貢蔘而西民紓力矣, 著字恤之典而澤被嬰孩矣, 行掩埋之政而恩及邱隴矣。 蓋無一民而不被其仁, 每絲綸一下, 民莫不感激涕泣。 而天顔非昔之歎, 蓋因憂勤之過也。 以至憑几末音, 亦諄諄於民事之不可緩, 於乎至矣。 其於刑獄, 兢兢致愼, 哀矜惻怛, 惟恐一夫之冤枉, 親閱諸道錄案, 筵燭屢跋, 每審理或判下累十案, 侍臣承書至暮, 而王未嘗有倦色。 嘗曰: "斷獄不可有適莫。 予常求生於可生, 不求生於必死。" 又曰: "予於獄案干連姓名, 亦不忘遺, 非予有記性也, 誠之所到也。" 又曰: "刑者, 所以輔治, 人命雖重, 事在倫紀敎化邊, 則不當徒拘於法。" 前後諸逆, 自干天憲, 而誅止其魁, 脅從罔治。 龍蛇之化, 常多於鯨鯢之戮。 曾廁近密者, 雖罪犯罔赦, 未嘗斷以極律, 中歲以還, 非干犯至重者, 邏騎不發於王府。 嘗曰: "家四百年基業, 在於風流篤厚禁網疏闊八字。 予欲使今之世, 除非身犯惡逆, 名在鐵案, 則竝加疏蕩。 朝無罹辟之人, 世無見枳之家, 豈非導迎和氣祈天永命之本乎?" 於是, 揭《明義》《錄》, 以懸象魏, 制欽恤典則, 以正關和。 禁追孥之法, 許從配之願, 覆盆之冤, 畢達輦路之籲, 挾纊之恩, 遠及邊戍之卒。 以至伐樹以時, 引禮經之訓, 放蟲於海, 用武陵之規, 肖蝡動植之物, 咸歸於曰生之大德, 傳曰,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王之所以爲仁也。 王, 以聖學之徹上徹下, 只在一敬字, 動靜互養, 內外交修, 恭己南面, 常有戰兢臨履之戒。 事天, 一念對越, 容光所照, 未嘗跛倚, 更衣便旋, 未嘗北向, 曰北辰所居也。 遇疾風雷雨, 恐懼怵惕, 竟夕不遑寧, 親祼宗廟, 周旋出戶, 縮縮如不容, 陞降薦獻, 趨進翼如, 百辟駿奔, 莫不肅雍。 嘗冬享, 初獻旣成, 諸臣以夜寒, 請入小次, 王不應, 端圭植立, 及徹天已曙, 霜氣在袞冕上。 其或命攝, 則遣近臣眂其事, 出御齋殿, 明燭以候, 聞享禮畢乃休。 凡時節大小諸享, 率必齋居, 一歲中齋日, 居三之二。 嘗大暑, 御賓筵, 敎曰: "今日熱, 輒有卿等夙退之意, 此浮念也。" 仍竟日始罷朝。 曲宴晉接, 簡其禮數, 天笑爲新, 溫然若家人父子。 俄而出御法殿, 群臣皆伏抑首, 筵退汗浹背。 雖寢疾, 未嘗以褻衣見臣僚, 曾經賓僚兩坊官者, 雖蔭官, 稱其職而不斥其名。 雖退朝燕居, 戚畹之臣, 不敢干朝政, 中涓之類, 非公事則不敢輒至御前。 嘗曰: "接賢士大夫時多, 接宦官宮妾時少, 予於此庶無愧色。" 勤於政事, 念念靡懈, 凡朝參、常參、賓對、輪對, 未嘗或廢, 諸臣章箚, 中外奏牘, 未嘗或滯。 一日間殿宮承安之暇, 輒引接臣隣, 多至夜分, 禁鑰未開, 命令已下, 日以爲常。 嘗曰: "守成之君, 只當以勤政憂民, 盡其分。" 躬自節儉, 衣御屢澣, 非袞服則未嘗御錦緞。 御膳日不過兩時, 味不過三四皿, 寢殿樸陋湫隘, 雨則有漏床床。 嘗曰: "志於道而恥惡衣惡食, 不足與議。 聖人之菲衣卑宮, 德業所以日進也。" 整飭威儀, 每動駕蹕路, 井井如畵繩墨, 班行儀衛, 無或失其次, 御座之側, 圖書几案, 各有定處。 嘗曰: "敬齋箴曰, 正其衣冠, 尊其瞻視。 制其外, 所以養其內。 今人平居不收歛, 入而事父兄, 出而事君長, 將何所據也? 此橫渠敎人, 必以禮也。" 及國有元良, 益念身敎之方, 循循善誘, 有範有則, 聲律身度, 不言而喩。 庚申之受冊也, 三加七章, 禮容儼若, 蓋亦觀法於平日也。 傳曰: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王之所以爲莊也。 王, 事英宗, 至性根天, 十年侍湯, 執玉奉盈, 孝孫之錫號, 古未有也。 自丙申大恤, 値諱日則齋穆悲慕, 二十年如一日, 每謁太廟, 至十三室鞠躬拱立, 若有見於位者。 每月朔望, 必拜眞殿, 風雨寒暑, 未嘗或廢, 每春秋歷謁諸陵, 濡露之感, 無豐于昵, 而惟於元陵, 間歲一幸, 以展終身之慕。 事慈殿、慈宮三朝愉婉, 先意承歡, 志物咸備, 慈孝兩至, 宮闈之間, 和氣融融如也。 嘗曰: "國有大小事, 予未嘗不稟慈聖而行。" 每謁慈殿, 望殿門, 必下輿步詣曰, 我朝家法也。 萬壽殿有修繕之役, 設次於殿門外, 躬蕫其事, 工訖乃還內, 陵園行幸, 雖歷日勞動, 回鑾傍暮而纔入闕, 先詣東朝, 蓋出告反面之意也。 乙卯進爵, 王, 喜曰: "以予孤露, 所仰戴者, 惟我慈宮, 臨是地行是禮, 至願粗伸矣。" 後十年甲子, 卽慈殿六旬, 慈宮七旬, 重擧慶禮, 此其時也, 仍命蔵兕觥 于華宮, 以待景運方回, 而仙馭已邈, 嗚呼! 痛矣。 其於閟宮, 至痛在心, 哀慕終天, 定祝式, 程朱折衷之禮也, 行誅討, 春秋微顯之旨也。 金縢出而睿孝益彰, 槐臺建而睿澤永垂, 磬筦尊爵, 享祀不忒, 日瞻月覲, 展省無曠。 而卽阼日綸音, 卽大義數十中第一義, 則臣等之所沒世鑽仰者也。 及夫天與吉宅, 禮成擧緬, 撰壙誌以發潛光, 煥輴儀以賁終事, 隆園號以顯崇報, 備象設以尊體制。 設行宮於陪京, 以壯拱護之地, 安御眞於齋殿, 以替定省之儀。 每歲拜園, 駐蹕遲遲之臺, 瞻望夷猶, 不忍旋駕, 卽夫子遲遲去父母國之義也。 庚申春幸, 有御詩曰: ‘明發華城回首遠, 遲遲臺上又遲遲, 嗚呼詩成而鑾蹕不復臨矣。 至若含哀茹痛, 無樂爲君, 在宥二紀, 群臣不敢陳揚徽之請, 堂曰老來, 樓曰新豐, 聖人微意, 非臣等之所忍言, 而莫非聖孝之攸推也。 傳曰: "堯舜之道, 孝悌而已," 王之所以爲孝也。 王,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道學之正也, 建天地而不悖, 俟百世而不惑, 義理之正也, 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而萬民萬事無不正, 治法征謨之正也。 精一之傳, 祗承于聖祖, 燕翼之謨, 付畀于聖子, 成始成終, 王者之大居正也。 傳曰: ‘大人者, 正己而物正。’ 王之所以爲正也。 嗚呼! 由周公以前, 聖人在上, 由周公以後, 聖人在下。 在上則其道行, 在下則其學明, 此所以所遇則異, 而其功則一也。 王以之學, 任之道, 大啓斯文, 以應五百命世之作, 而斯民無祿, 天嗇其壽, 聖聖相傳之統, 遂不可復徵。 子曰: ‘道之不行也, 學之不明也, 我知之矣。’ 蓋亦氣數之使然歟? 嗚呼! 痛矣。 臣識不足以測知聖人, 文不足以形容德美, 而十年帷幄, 偏被恩遇, 亦嘗廁跡於都兪賡歌之筵, 輒敢以一二管蠡之見, 欲摹畫天日。 百世之下, 尙或恕其僭而悲其志云爾。 【行知中樞府事李晩秀製。】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實錄附錄終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94면
  •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