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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4월 16일 무술 2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권준이 암행한 지역의 민폐와 그 해결책을 아뢰는 별단을 올리다

권준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삼척봉산(封山)087) 가운데 황지(黃地)원덕(遠德) 두 산은 안동(安東)·봉화(奉化)·영월(寧越)·울진(蔚珍) 등 고을과 접경을 이루어 나무를 훔쳐가는 도둑이 이 네 고을에서 많이 들어와, 잘라가는 것은 그들인데 벌을 받는 것은 이쪽입니다. 이 때문에 본 경내 그 두 산 밑에 사는 백성으로서 수호군(守護軍)이 된 자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거의 다 흩어지고 없어 결국 아무도 수호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이제 접경 지점에 각기 그 고을로 하여금 방수군(防守軍) 몇 명을 배정해 두고 힘을 합쳐 지키게 하되 혹시 몰래 베어가는 일이 있을 경우 그들과 벌을 같이 받게 한다면 흩어져 없어지는 백성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벌목을 금하고 지키는 면에서도 더 나을 듯합니다.

봉화 고을은 강릉·삼척·울산 세 고을 봉산(封山)의 요긴한 목을 이루는 지대에 위치하여 세 고을에서 널판지를 훔쳐가려면 그 길을 통하게 되어 있으므로 봉화 고을이 널판지의 불법반출에 대한 책임을 전담하게 된 것입니다마는, 그에 파생된 폐단이 잘못된 규례를 만들어내 금판 장교(禁板將校)를 배정해 두고서 의무적으로 매달 훔친 널판지 3부(部)를 적발하여 바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둑이 없어 잡아낸 것이 없더라도 잘 지키지 못했다 하여 형을 가하고 곤장을 쳐 기어코 그 수효대로 관가에 바치게 하니, 장교가 된 자는 어쩔 수 없이 톱장이를 많이 데리고 직접 봉산으로 들어가 좋은 나무를 골라서 널판지를 켜 관가에 바칠 거리로 삼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찌 관가에만 바치겠습니까. 그러니 금하게 하려 시도했던 것이 결국 스스로 범하게 하는 꼴이 되었으며, 봉화에서 나무를 판다는 설이 그전부터 나돕니다. 당해 고을을 엄중히 단속하여 수효를 정해 받아들이는 규정을 영원히 혁파하도록 한다면 법 이외의 폐단을 없앨 수 있고 사리와 체면에도 합당하겠습니다.

1. 강릉의 영서(嶺西)는 모두 여섯 개의 창고088) 가 있고 피곡(皮穀)과 잡곡이 도합 2만 6천 40석인데 거주하는 사람이 적어 가구수가 46통(統)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누어 줄 수량을 응당 받아갈 통에 분배한다면 가구당 받는 수량이 많게는 1백 석 안팎에 이르고 적더라도 사오십 석을 내려가지 않을 판이니, 일년 내내 애써 농사를 짓는다 해도 장차 어디에서 이 수량을 마련해 바치겠습니까. 게다가 또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고 고을 아전의 농간에 일임한 상황이니, 곡식은 쭉정이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도망가는 백성이 끊이지 않아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으니, 분배하는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감해 주는 정사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동(嶺東) 각 창고의 경우에는 각종 공적으로 소비되는 곡물과 다른 고을로 옮겨가는 몫이 다 그곳에서 나가기 때문에 곡물 장부가 차츰 축소되고 유통이 간혹 끊깁니다. 그러니 차라리 영서의 곡물을 편리한 대로 좇아 환작(換作)하여 영동으로 옮겨둠으로써 저쪽에서 덜어내 이쪽에다 보탠다면 실로 두 쪽이 다 편리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1. 삼척 사미창(四美倉)의 피곡과 잡곡은 모두 3천 4백 5석인데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은 40통에 지나지 않으니, 한 가구당 배정받는 것은 거의 20석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강릉의 영서처럼 큰 폐단이 되지는 않지만 모곡(耗穀)을 계속 받아내기만 하고 오랫동안 소모하지 않고 있으므로 장차 곡물은 날로 자꾸 불어나고 백성의 수효는 날로 줄어들어 어떻게 변통하여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판국이니, 또한 적당한 수량을 고을 창고에서 환작하여 산중 백성을 보존하는 방도로 삼게 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만일 금년에 한 번만 이처럼 환작하고 그 뒤에 또다시 곡식이 쌓인다면 얼마 가지 않아 그 폐단은 도로 과거 와 마찬가지일 것이니, 삼척의 사미창이나 강릉의 여섯 창고나 다 같이 환자곡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해의 모곡에 상당하는 분량을 전부 다 써버리고 법정 수량이 넘어가게 남겨두는 일이 없게 한다면 실로 영구히 폐단이 없는 방안이 될 것입니다.

1. 강릉부 동쪽 7리 지점에 두 군데의 벌렬(伐列) 제방이 있으나 본디 수원(水源)이 없어 제방 아래 민전(民田)이 혜택을 입지 못하므로 부(府) 남쪽의 큰 냇물에 보를 쌓아 곧장 제방 밑에까지 물이 지나가 천여 석을 수확하는 관개용수가 되고 있으니, 이 제방은 만 섬의 물을 담아두더라도 소용이 없는데 게다가 또 바짝 말라 있습니다. 부 남쪽 십 리 지점에 또 해남(海南) 제방이 있는데 수리(水利)가 없기는 벌렬과 마찬가지입니다. 긴 냇물이 그 주변을 안고 흘러 제방 아래 모든 들판이 다 혜택을 입어 제방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신은 은밀히 다닐 때 그 내막을 알아보고 여론을 들어보았더니, 모두 말하기를 ‘제방은 사실 쓸모없지만 토질만은 매우 좋아 여러 차례 영부(營府)에 정소(呈訴)하여 개간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나라의 법이 엄중하여 함부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말로 지시가 내려 민심이 안타까워한 지 오래이다.’ 하였습니다. 그 길이와 너비를 헤아리고 과식(科式)으로 참작해 보았더니, 1백여 석의 씨를 부릴 수 있고 짐[負]을 매기면 10여 결(結)이 될 만하였습니다. 백성에게 개간을 권장하는 오늘과 같은 시기에 기름져서 충분히 개간할 만한 땅을 버려두고 묵혀 한탄만 하게 할 수는 없으니,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협의 처리하게 하여 백성에게 농사를 지어 먹게 허락하고 그 결부(結負)에 대해서는 영읍(營邑)의 의논을 들어 경계를 갈라 정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평릉역(平陵驛) 복호(復戶)는 한 가구당 50부(負)이고 은계역(銀溪驛)은 한 가구당 1백 부씩이었는데, 가정(嘉靖) 22년089) 전쟁을 치른 뒤에 은계역이 피폐해졌다 하여 평릉·상운(祥雲) 두 역의 가포(價布) 총 6백 50냥을 입거전(入居錢)이란 명목으로 해마다 은계로 보냈습니다. 그 뒤에 세상이 태평해진 지 오래되어 평릉·은계·상운이 다 똑같은 형편인데 입거전을 보내는 일은 예전과 변함이 없다가 강희(康熙) 무인년090) 어사 정호(鄭澔)가 연석(筵席)에서 품의한 뒤에 2백 50냥을 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평릉·상운 두 역이 요즘 또 피폐해져 지탱하기 어려우니, 이제 그 4백 냥 가운데 그 절반을 줄인다면 그런대로 두 역이 소생할 방도가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각 조항에서 논열한 것을 모두 감사에게 엄중히 당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57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치안(治安) / 군사(軍事)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과학-지학(地學) / 농업-임업(林業) / 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註 087]
    봉산(封山) : 나라에서 일반 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하는 산.
  • [註 088]
    여섯 개의 창고 : 동창(東倉)·서창(西倉)·우계창(羽溪倉)·연곡창(連谷倉)·대화창(大和倉) 등을 말함.
  • [註 089]
    가정(嘉靖) 22년 : 1543 중종 38년.
  • [註 090]
    강희(康熙) 무인년 : 1698 숙종 24년.

○進別單曰: "三陟封山中, 黃地遠德兩山, 與安東奉化寧越蔚珍等邑接界, 偸賊多從四邑而至, 犯斫在彼, 抵罪在此。 以故本境兩山下居民之爲守護軍者, 不堪其苦, 幾皆散亡, 畢竟至於守護之無人。 今於接界處, 使各其邑, 定置防守軍幾名, 以爲竝力禁護, 而有或偸斫, 與之同罪, 則非但此無散亡之民, 亦於禁護之方, 似有勝焉。 奉化之爲邑, 處在三邑, 封山咽喉之地, 三邑偸板, 只由此路, 則此所以奉化官之專掌禁板, 而末流之弊, 仍成謬例, 定置禁板將校, 而每朔責捧偸板三部。 當朔雖無所執捉, 謂以不善防禁, 而刑之杖之, 期於依數納官, 則爲將校者, 勢不得已多率鉅匠, 身入封山, 擇其好箇木理而作板, 以爲官納之資。 如是之際, 豈但官納而已? 其所以禁之者, 適所以犯之, 而奉化木販之說, 自前有之。 嚴飭該邑, 定數捧納之例, 永爲革罷, 則可除科外之弊端, 亦於事面, 誠爲得宜。 一, 江陵嶺西, 凡有六倉, 皮雜各穀, 合爲二萬六千四十石零, 而人居尠少, 戶不過四十六統。 假令以當分之數, 分排於應受之統, 則每戶所受, 多至於百石內外, 少不下四五十石, 雖使終歲力作, 將安所辦此備納乎? 況又官府隔遠, 一任邑吏之幻弄, 則只是虛殼而已。 以此民之逃散者, 項背相望, 十室九空, 此不可無量宜裁減之政。 而至於嶺東諸倉, 各樣公下, 他邑移轉, 皆從此出, 故穀簿漸縮, 巡還或絶。 毋寧以嶺西之穀, 從便換作, 移置嶺東, 減損於彼, 裒益於此, 則實爲兩便之道。 一, 三陟四美倉皮雜各穀, 合爲三千四百五石零, 而附近居民, 不過四十統, 則每戶所受, 殆近二十石。 此雖不至如江陵嶺西之爲弊, 而耗上加耗, 積久不洩, 則將至於穀日益多, 民日益少, 而莫可區處之境, 亦宜量宜換作於邑倉, 俾爲山民支保之道, 實合事宜。 誠使今年換作, 止於一番如此, 其後又復委積, 則不幾何而弊將如前, 無論之四美, 之六倉, 每於捧還之時, 計其當年耗條, 幷皆用下, 毋或法外之留置, 則實爲永久無弊之道。 一, 江陵府東七里, 有伐列堤堰二處, 而本無水源, 堤下民田, 不得蒙利, 故築洑於府南大川, 直過堰底, 而至於千餘石之灌漑, 則今此之堰, 雖貯萬斛之水, 亦無所用, 而又況乾涸。 府南十里, 又有海南堤堰, 其無水利, 一如伐列。 而長川抱流, 堤下一坪, 皆已蒙利, 而堰之有無, 無足關係。 臣於潛蹤時, 適尋形止, 採取物議, 則擧以爲 ‘堰固無用, 而土則信美, 屢呈營府以爲開墾之計, 而輒以法意甚重, 有難擅便爲題, 民情之嗟惜久矣’ 云云。 量其長廣, 參以科式, 則落種可爲百餘石, 執負可爲十餘給。 當此勸民耕墾之日, 不可使膏腴可墾之地, 一任其荒廢無用之歎, 特令廟堂議處, 許民耕食, 而若其結負則收議營邑, 以爲區劃之地, 恐合事宜。 一, 平陵驛復, 每戶五十負, 銀溪每(名)〔戶〕 百負, 而嘉靖二十二年兵亂之後, 以銀溪之凋弊, 平陵祥雲兩驛價布, 合六百五十兩, 稱以入居錢, 每年輸送於銀溪矣。 其後時平已久, , 等是一體, 而入居則猶復如前, 康熙戊寅, 御史鄭澔筵稟後, 除減二百五十兩。 兩驛, 近又凋弊, 難以支保, 今若就其四百兩之中, 又減其半, 則庶幾爲兩驛蘇捄之方。" 備邊司覆奏: "諸條論列, 竝嚴飭道臣施行。"


  •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57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치안(治安) / 군사(軍事)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과학-지학(地學) / 농업-임업(林業) / 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