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53권, 정조 24년 3월 28일 경진 4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오위 장 김도유를 접견하다

관서(關西)에서 경학 전공으로 추천받은 오위 장(五衛將) 김도유(金道游)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도유에게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 성(性)과 명(命)의 심오한 이치에 대해 후학으로서 비록 성급히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지난번 조대(條對)한 것을 보고 심(心)·성(性)에 관해 참된 공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평소 연구를 하면서 과연 어느 쪽에다 주력을 했는가? 성경(聖經)이나 현전(賢傳) 그 모두가 다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핍진하고 절실한 것으로 진짜 두고두고 노력해야 할 것으로는 사서(四書)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는데, 사서 중에서 종전에는 어느 책에다 주력을 했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대학(大學)》은 덕(德)으로 가는 문이고, 《중용(中庸)》은 도(道)를 밝히는 책이지요. 신이야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논어(論語)》·《맹자(孟子)》를 좋아하였으나 《중용》·《대학》을 읽고 외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서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은지 딱 지적하라고 하신다면 당연히 《중용》·《대학》을 들어 대답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보통 《중용》·《대학》을 늘 말하고는 있지만 《중용》《논어》·《맹자》에 비해 뜻이 더 심오하기 때문에 초학자로서는 공부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글이다. 독서(讀書)의 순서를 말하자면 《대학》을 먼저 읽는 것이 당연한데, 《대학》이라면 또 명덕(明德)이라는 것이 책을 펴자마자 첫 눈에 들어오는 총체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명제가 아니겠는가. 그대는 그 ‘명덕’ 두 글자에 대해 과연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신 같은 시골의 어리석은 자가 무슨 별다른 견해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 물으신 것이 ‘명덕은 본심(本心)이다.’라는 해석을 가리켜 하신 하교이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명덕은 본심이라고 한 그 해석에 대해 그대는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주자(朱子)는 장구(章句)에서,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아니하여 모든 이치가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라고 해석하였고, 옥계 노씨(玉溪盧氏)는 ‘본심’ 두 글자로 그 뜻을 발휘했는데 다 체득하고 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덕을 마음으로 풀이한 자도 있고 성품으로 풀이한 자도 있는데 장구의 해석으로 본다면 ‘허령’은 마음에 속하고,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 한 것은 성품에 속하고,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 한 것은 정(情)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주자장자(張子)058) 의 심통 성정(心統性情) 학설을 인용하면서, 가장 정밀한 풀이라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대체로 명덕을 오로지 성품에다만 소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또 ‘마음’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선과 악의 양면이 있기 때문에 마음 심(心) 자 위에다 반드시 근본 본(本) 자를 더 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며 또 그래야지만 비로소 완벽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주자 장구 내의 몇 구절도 자세히 음미해보면 ‘심(心)’·‘성(性)’ 등의 글자를 애당초 노출시키지 않았지만 심·성의 뜻을 스스로 알게 하고 있어 참으로 그대로 그려냈다고 할 만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옥계 노씨의 학설인 ‘본심’에 관하여는 이문성(李文成)059) 이 처음으로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분명하게 밝혀놓았지만 그 한 조항이 바로 《대학》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중용》은 그 전체의 관건이 뭐니뭐니해도 계신(戒愼)·공구(恐懼)인데 그에 대해서는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통관동정(通貫動靜)의 학설을 제창하여 문성공이 ‘본심’을 해설한 것과 함께 공로에 있어 두 분이 같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문원공이 만들어낸 학설이 아니라 바로 주자가 못다한 말을 뒤이어 불려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신독(愼獨) 공부는 어떠한 기미는 이미 발단이 되었으나 다만 그 형적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에서 하는 것으로 이발(已發)·미발(未發)로 따지면 당연히 이발 이후에 속하는 문제겠으나 보지도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언제나 계구(戒懼)한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지경(持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자가 장구에서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마음은 언제나 경외(敬畏) 속에 있어 남이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본상태 그대로의 천리(天理)를 존속시키는 길이다.’ 하였다. 주부자의 그 말이야말로 전성(前聖)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한 것으로서 ‘경외’ 그 두 글자로 계구를 풀이한 것이다.

대체로 대본(大本)의 중(中)이니 본연(本然)의 성(性)이니 하는 말은 자사(子思)공자(孔子)의 깊은 뜻을 천명한 말이고, ‘계구는 경외에 속한다.’거나 ‘동정(動靜)을 통관(通貫)한다.’고 한 말은 주 부자가 또 자사의 은미한 뜻을 천명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경외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주경(主敬)인 것이고, 주경이 바로 주정(主靜)인 것이다.

‘정(靜)’ 이 글자는 원래는 악기편(樂記篇)의 인생이정(人生而靜)이라고 한 데서 발원한 글자로 주렴계(朱濂溪)060) 도 이르기를 ‘중(中)·정(正)·인(仁)·의(義)로 방향을 정하고 정(靜)을 목표로 한다.’ 하였는데, 경(敬)을 목표로 하자면 고요함[靜]이 당연히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나 고요함 그 자체가 위아래를 통틀어서 없는 곳이 없다면 움직이고 있는 순간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외(敬畏) 두 글자를 장구에서 특별히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주자가 계신(戒愼)·공구(恐懼)에 관해서는 늘 경외 속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풀이했고, 신독(愼獨)에 관해서는 또 형적은 비록 나타나지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작동이 된 상태라고 해석하였는데 그 해석들을 반복해서 음미해보면 저절로 춤이 춰지고 발이 굴러지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대학》의 명덕에 관해서는 문성공이 확실한 설명을 했고, 《중용》의 계구에 관한 뜻은 문원공이 들추어냈으니 당연히 문성·문원의 그에 대한 탁월한 견해와 체득의 소산이겠으나 원 내용은 모두 주자가 경전의 뜻을 밝혀놓았기 때문에 그를 근간으로 한 말로서 그 두 가지가 사실 《중용》·《대학》에 있어 책을 펴면 첫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뜻을 지닌 구절인 것이다."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중용》·《대학》에 있어 그 전체의 뜻이 책을 펴면 그 첫머리에 다 나타나 있기 때문에 역시 맨 첫머리 장(章)에다가 특별히 게시한 것이지만 어쨌든 주자가 그 깊은 뜻을 천발(闡發)한 점에 있어서는 참으로 성상이 하교하신 그대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학》은 원래 공씨(孔氏)의 유서(遺書)로서 증씨(曾氏)가 독자적으로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주자가 그 뜻을 들추어내고 나니까 증씨에게도 더욱 빛이 있게 되었고, 《중용》의 계구(戒懼)도 그 뜻을 주자가 처음으로 분석 해명하여 전성(前聖)이 미처 못한 말을 다 해놓았던 것이다. 그의 계왕 개래(繼往開來)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공부자 이후로는 그분뿐인데 그대도 과연 그를 철저히 믿고 존상(尊尙)하는가?"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공자 이후 집대성한 분으로는 주자 한 사람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높고 높은 태산 같은 맹자(孟子)의 기상,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 이치를 훤히 관조하는 듯한 주렴계(朱濂溪)의 기상, 봄바람 화창한 날씨 같은 정백자(程伯子)의 기상 그 어느 것 하나 후학들로서 존경하고 앙모할 만한 기상 아닌 것이 없지마는 그중에서도 주자는 모든 이의 장점을 다 모아 집대성을 하고 두고두고 후학들이 갈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 공로가 더욱 큰 것은 당연하다. 불행히도 총령(蔥領) 일파들이 왕수인(王守仁)·육구연(陸九淵) 쪽으로 흘러 중국에서 명색이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복장을 한 자들 중에도 주자가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것을 혹 모르는 자도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 문교(文敎)가 크게 발전하고 유현(儒賢)들이 배출되어 모두가 주자를 표준으로 삼고 있지마는 요즘 들어 주자를 존상하는 기풍이 점점 예전만 못해가고 있어 세상 장래를 생각할 때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머나먼 변지에 살고 있는 그대 같은 자를 그렇게 열심히 찾아 불러올린 것도 사실은 그대가 경전(經傳)에 밝고 주자를 존경하고 신봉하여 한 고을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해서이다. 그대는 그대 소회를 남김없이 다 말하라."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성상의 하교대로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를 부른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 도내의 인사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숭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추천을 받은 그대 같은 자들이 앞장서서 권장하면 그 고을 인사들이 바람 따라 움직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경학(經學) 중에서도 반드시 주자의 도(道)를 천명하기에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니, 도유가 아뢰기를,

"지금 풍습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는 것은 경술(經術)이 밝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이 살고 있는 곳은 패관 잡기(稗官雜記)를 전파하는 자가 아직은 없으니 잘만 가르치면 누가 주자를 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關西)에서는 초선(抄選)된 사람이 선우사업(鮮于司業) 단 한 명뿐인데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2백 년 전의 일이었는데 그대들이 처음으로 경학(經學) 추천에 뽑혔으니 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그대가 내려가서 근일 천거 대상에 든 사람들과 함께 각각 경전의 뜻을 밝히고 그중에서도 주자 학설을 그대들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가르치고 깨우쳐 근일 그대를 부른 것이 실지 효과가 있는 일이 되게 만든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대들은 노력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관서라고 해서 무예만 숭상하는 곳이라고 할 것이 아니다. 하(河)·삭(朔)제(齊)·노(魯)로 대우하면 역시 ·가 되는 것이다. 재능과 슬기는 처지나 문벌과는 관계가 없고 인재를 쓰고 안 쓰는 것이 지역의 원근과 무슨 관계이겠는가. 패수(浿水) 밖에서는 유신(儒臣)이라고는 선우 한 사람만이 왕조(王朝)에 올라왔을 뿐 그 이전이거나 이후이거나 다시는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은 그곳을 ·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늘이고 땅이고 만물이고 원래는 나와 일체(一體)인 것으로 하늘 땅이 자리가 잡혀야 만물이 자라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능사인 것으로 수도(修道)가 교(敎)라는 것도 역시 그 속에 있는 일인 것이다.

몇 해 전 평안도 관찰사에게 경의(經義)에 밝은 유생을 추천하도록 명하고 추천받은 자들에게 칠서(七書)·삼례(三禮)·춘추 강의(春秋講義)를 내려보내 각 조목별로 대답하게 했었는데, 그 대답한 것들을 보니 좌우에 찬 칼이 없으면서도 쪼갤 것은 쪼개고 자를 것은 잘라 금방금방 만들어놓은 말들이 다 조리에 맞아서 비록 금화(金華)에서 책을 펴들고 있는 무리들 중에서 찾아보아도 그만한 자들이 많지 않을 정도였다. 그 어찌 기특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 세 유생의 경우 드물게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지만 세 유생 중에서도 김도유는 그의 작문을 보았을 때 내용이 어느 정도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한 번 불러 오게 하고 싶었는데 근간에 올라와서 두 차례나 연석(筵席)에 올라 대답한 것은 또 작문보다도 더 훌륭했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이가 너무 많아서 서울에 오래 체류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니 그가 돌아갈 때 마땅히 보고 싶어하는 서책으로 골라 주도록 하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주자서백선(朱子書百選)》 각 1질씩을 하사하고 두 유생이 대답한 강의도 본도에서 간행하여 관서 지방을 권장하게 함으로써 또 서토(西土) 사람들로 하여금 주자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왕을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하라."

하고, 드디어 본도에 명하여 김도유 등이 경의에 대해 조목별로 대답한 것들을 편찬 간행하여 《관서빈흥록(關西賓興錄)》이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또 함경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경지(經旨)를 이해하고 공령(功令)에 능한 유생들을 탐방하여 아뢰게 하였으며, 조문(條問) 및 어제(御題)를 내려 시험보인 후 우등을 한 9명에게는 급제를 내리고 경학에 조예가 있는 유생은 직을 제수했으며 관서의 예와 같이 그들 저작도 편찬 간행하게 하고 이름하여 《관북빈흥록(關北賓興錄)》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53면
  • 【분류】
    인사(人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사급(賜給)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註 058]
    장자(張子) : 장재(張載).
  • [註 059]
    이문성(李文成) : 이이(李珥).
  • [註 060]
    주렴계(朱濂溪) : 주돈이(周敦頤).

○召見關西經工被薦人五衛將金道游。 上謂道游曰: "天人性命之奧, 雖非後學所可驟語, 而觀於向來條對, 亦可知心性上工夫之眞有所存。 平日講究之際, 果從何處用力乎? 聖經賢傳, 何莫非服膺處, 而喫緊切近, 眞積力久, 尤莫要於四書, 四書之中, 前所用力者, 爲何書?" 道游曰: "《大學》爲入德之門, 《中庸》爲闡道之書。 臣有何知識, 而始好《論語》《孟子》, 誦讀於《庸》《學》尤不敢放忽。 若言四書之中何者爲好, 則當以《庸》《學》二書爲對。" 上曰: "人有恒言, 必曰《庸》《學》, 而《中庸》則比之《論》《孟》, 尤爲深奧, 初學用工, 難以遽議。 讀書次第, 固當以《大學》爲先, 《大學》之中, 明德又爲開卷第一義。 爾於明德二字, 果有所理會者否?" 道游曰: "如臣下土愚陋, 安有別般見解? 而今此下詢者, 抑以 ‘明德本心’ 之訓, 指敎者乎?" 上曰: "是矣。 明德本心之訓, 爾果何如看得?" 道游曰: "朱子章句, 釋之以人之所得乎天, 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 玉溪 盧氏, 以本心二字, 發揮其旨, 儘有見得矣。" 上曰: "明德有以心言者, 有以性言者, 而就章句中見之, 則虛靈屬心, 具衆理屬性, 應萬事屬情。 此朱子所以又引張子心統性情之說, 以爲最精者也。 蓋明德, 旣不可專屬於性。 而若謂之心, 則心又有善惡, 此所以心字之上, 必下本之一字, 然後始爲完備。 而詳味章句中數語, 則初不露出心性等字, 而自諳心性之義, 眞可謂盡出矣。" 上, 又曰: "玉溪本心之說, 李文成 《聖學輯要》, 始加表章, 此一條, 卽《大學》之最要處也。 至於《中庸》, 一篇之關鍵, 在於戒愼、恐懼一節, 文元公 金長生, 有通貫動靜之說, 此學文成之發揮本心, 二家可謂同功, 而此亦非文元之創說, 卽亦推衍朱子之餘旨者也。 愼獨工夫, 在於幾已發跡未著之時, 固可屬之於發以後事, 而恒存戒懼於不覩不聞之中, 則此非持敬而何? 朱子章句有曰: ‘君子之心, 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於本然。’ 夫子此言, 可謂發前聖所未發, 以敬畏二字, 釋戒懼。 大抵大本之中本然之性, 思聖闡孔聖之微意, 戒懼屬敬畏, 通貫動靜, 朱夫子又闡子思子之微意。 蓋常存敬畏, 卽主敬也, 主敬, 卽主靜也。 靜之一字, 原於樂記所謂人生而靜者, 而周濂溪亦曰: ‘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 主敬之工, 固當以靜爲本。 而徹上徹下, 無乎不在, 則亦豈不通貫於動時乎? 此所以特言敬畏二字於章句也。 朱夫子於戒愼恐懼, 則旣釋之以常存敬畏, 於愼獨則又釋之以跡雖未形, 幾則已動, 反覆潛玩, 實不覺手舞足蹈矣。 《大學》明德之說, 表章於文成, 《中庸》戒懼之旨, 發揮於文元, 此固文成文元之見得卓乎, 而其實則皆原於朱夫子之發明經旨, 此二段, 實爲《庸》《學》之開卷第一義矣。" 道游曰: "《庸》《學》一部之旨, 已具於開卷之初, 此所以特揭於首章, 而朱夫子闡發之道, 誠如聖敎矣。" 上曰: "《大學》, 孔氏之遺書, 而曾氏之獨得其傳者也, 至於朱子之發揮, 尤有光於曾子, 《中庸》戒懼之旨, 亦至朱夫子而後, 始盡剖析, 發前未發。 繼往開來之功, 眞是孔夫子後一人, 爾果能篤信而尊尙之否?" 道游曰: "孔子之後, 集大成者, 只是朱子一人。" 上曰: "孟子之泰山巖巖, 濂溪之觀天地生物氣象, 程伯子之春風和氣, 何莫非後學之所當尊慕, 而朱子則集群賢而大成, 開來學於無窮, 其功爲尤大。 不幸葱領一泒, 流爲, 而中國之號爲冠儒服儒者, 或不知朱子之可尊。 我國則不然, 文敎丕闡, 儒賢輩出, 莫不以朱子爲標準, 而近日尊尙之風, 漸不如前, 於世道誠非細慮。 如爾者之居在遐陬者, 如是勤求招徠, 爲其能明習經傳, 尊信朱子, 爲一鄕之所推也。 爾其悉言所懷。" 道游曰: "臣何敢仰塞聖敎乎?" 上曰: "招爾亦爲道內人土之知朝廷所尙也。 自爾等入於薦剡之中者, 須思所以倡勸之方, 則一鄕之人, 亦豈無風動之效乎? 經學之中, 亦必以闡明朱子之道爲務也。" 道游曰: "顧今習俗日貿者, 經術不明之致。 臣之所居之鄕, 無稗官雜記之傳播者, 善敎之, 則孰不尊朱子乎?" 上曰: "關西只有鮮于司業一人爲抄選, 于今近二百年, 而爾等初登經學之薦, 豈不貴乎? 爾於下去之後, 與近日薦剡中諸人, 各以經義中朱夫大子書, 訓牖於爾等力所及處, 俾近日宣召有實效, 則其幸如何? 爾等勉之。" 仍敎曰: "關西莫曰尙武。 待以, 則是亦齊、魯已矣。 才智不拘地閥, 用捨何界遠邇? 浿水以外, 惟鮮于儒臣一人, 登於王朝, 由前由後, 閴然無聞者, 不以待也。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天地位然後萬物育。 卽聖人之能事, 而修道之敎, 亦在其中。 年前命箕伯, 以明習經義之生薦之, 旣薦之下, 七書、三禮、春秋講義, 俾各條對, 及見其對, 未有左右之佩劍, 而能剖析劈斷, 開口便說, 雖求之於金華橫經之列, 未易多得。 豈不奇且美哉? 在三儒, 可謂曠有之盛擧, 三儒中金道游, 卽其文可知其所存。 竊欲一致之, 近因上來, 再登筵席所對, 又勝於其文。 而惜其年已篤老, 勢難久滯京中, 於其還也, 當以所欲見之書。 與之。 《朱子書節要》《朱子書百選》各一帙賜給, 與兩儒所對講義, 令本道刊印, 爲關西之勸, 俾西土之人, 知尊朱子所以尊王也。" 遂命本道編刊金道游等經義條對, 名曰《關西賓興錄》。 又命關北道臣, 採訪解經旨嫺功令儒生以聞, 下條問及御題試之, 優等九人賜第, 經工生除職, 編印其作如關西例, 名曰《關北賓興錄》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53면
  • 【분류】
    인사(人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사급(賜給)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