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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53권, 정조 24년 2월 6일 기축 8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진하 정사 김재찬 등이 연경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단자를 올리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김재찬(金載瓚), 부사(副使) 이기양(李基讓)연경에서 출발했음을 치계하고, 보고 들은 것을 따로 적은 단자를 올렸는데, 내용에,

"백련교(白蓮敎) 난리가 있은 지 지금 이미 5년이 되어 신들이 관내(關內)에 막 들어갔을 때는 전하는 말들이 너무 많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관(館)에 도착한 후 널리 캐물은 끝에 근일에야 적확한 소식을 얻어들을 수가 있었는데, 과연 12월에 첩보(捷報)가 이미 도착하였고 남은 잔당들도 거의 다 소탕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병진년 봄에 사천(四川)에 사는 과부 제이(齊二)라는 여인이 ‘제이 과부’라고 자칭하면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대중을 유혹하였는데 이른바 백련교(白蓮敎)라는 이름으로 서로서로 선동하는 바람에 빈궁한 백성들이 호응하고 나서서 드디어 많은 무리가 떨쳐 일어나 널리 부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사천(四川)·섬서(陝西)·초(楚)044) ·예주(豫州) 일대를 출몰하며 관군(官軍)과 싸워 관군이 여러번 패하고 장졸들이 수도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또 군사가 동원된 지 벌써 오래여서 모든 경비가 거의 바닥이 났기 때문에 호부(戶部)에 명하여 각로(閣老)·구경(九卿)·과도관(科道官) 등과 다방면으로 상의하게 하여 드디어 관작을 파는 제도를 두었는데 주(州) 하나 현(縣) 하나에 각기 일정한 값을 정하고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중외에 인쇄 반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가경(嘉慶) 4년에 경략 장군(經略將軍) 만주 사람 늑보(勒保)가 군대 5만 명을 거느리고 제이를 무찔러 목베고 적의 우두머리 왕삼괴(王三槐)를 사로잡아 서울에다 바치자 황제가 늑보에게 유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짐이 왕삼괴의 공사(供辭)를 보니 자못 측은한 생각이 든다. 짐이 막중한 부탁을 받고 백성들을 부상자 대하듯 보살피며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야 할 처지인데 어찌 차마 몇 성(省)의 창생들로 하여금 난리에 죽어가게 할 것인가. 그것은 다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관리들이 덕의(德意)를 받들어 선양하지는 못하고 온갖 방법으로 토색질이나 하여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기 때문에 민심이 그렇게 급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화신(和珅)045) 과 결탁하여 우리 백성들만 그 고통을 당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그리고 교비(敎匪)도 원래는 그리 많지 않은 수였다. 그들이 양민들을 협박했기 때문인데 죽기 무서워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들로부터 노략질을 당하는 그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짐은 이미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는 것은 다만 불복자를 토벌하기 위함이지 양민들을 죽일 이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만약 적의 우두머리를 묶어 바치고 과거의 죄를 후회하고 새로운 공로를 세운 자는 그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일반 규정을 초월한 은택이 내려질 것이니 늑보를 시켜 각기 그 지방에다 이 유지를 두루 알리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이가 죽고 나자 그 일당인 냉천록(冷天祿)제이를 위해 복수를 한다고 하면서 무리를 모아 노략질을 일삼아 그 형세가 매우 불어났는데 늑보는 제 공로만 믿고 교만하고 나태하여 적을 보고서도 자신만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사천 총독(四川總督) 괴륜(魁倫)이, 적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놔두고 군율을 해이하게 다루며 군량까지 투식하고 있는 늑보의 죄상을 논하였습니다. 이에 황제는 늑보의 직을 빼앗고 잡아들여 하옥시킨 다음 내무부(內務府)에 명하여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 올리게 하고 만주 장수 액륵등보(額勒登保)를 경략 장군으로 삼아 늑보 대신 출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액륵등보가 군문에 이르러 장수와 병졸들을 잘 돌봐주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싸우기만 하면 공로가 있었답니다. 그리하여 냉천록이 크게 겁을 먹고 섬서감숙성 부근으로 도망가 거기에서 또 군대를 풀어 노략질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호부 상서(戶部尙書)인 만주 사람 나언성(那彦成)을 명하여 관동(關東) 흑룡강(黑龍江)의 군대 3천 명과 관군 수만 명을 인솔하고 섬서·감숙 지방으로 추격하여 액륵등보와 협공을 하게 하였던 바, 12월에 액륵등보가 적과 만나 대전 끝에 냉천록 이하 두령급 수십 명을 사로잡고 1천여 리나 추격해 들어가 사천은 모두 평정이 되었는데 섬서·감숙에 남아 있는 비도들이 험준한 지형을 점거하고 출몰하여 나언성은 그들과 싸우다가 패배를 당하고 부상까지 입었으며 수십 명의 장령과 1만여 명의 병정이 모두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그후 액륵등보가 군대를 그리로 옮겨 추격 끝에 많은 전과를 올리고 적도 거의 토평되어 현재는 1만여 명의 적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작년 12월 27일 현재의 첩보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황제가 유지를 내리기를 ‘액륵등보냉천록 이하 1개 부대의 비도들을 섬멸하고 아울러 수십 명의 두목을 사로잡고 적 수천 명도 죽였는데 그 주달한 내용을 본 짐으로서는 도와주신 황천에 깊이 감사드리며 또 이는 사실 황고(皇考)의 영령이 도와주시기도 한 것이다. 냉천록감숙·섬서 일대를 발판으로 화를 꾸며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하므로 그가 있던 성에 지시하여 능지 처참하도록 하고 사로잡힌 두목들은 모두 책임자를 지정하여 서울로 압송해 오도록 할 것이며 그 나머지 투항자들은 이미 과거를 뉘우치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상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경략 액륵등보에게는 어고(御庫)에 있는 비단·금·은을 상으로 내리도록 하라. 그 경략이 위임을 받은 이후로 여러 곳에서 적을 죽이는 등 자기 책임을 완수했는데, 머지않아 개선한 후에도 그대로 분수 이상의 힘을 발휘하여 온 세상을 깨끗이 맑힘으로써 위임했던 짐의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힘을 다했던 여러 장수와 병정들에 대해서도 모두 액륵등보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게 하고 관직과 돈·식량 등을 상으로 내려 고무 격려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42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044]
    초(楚) : 호남과 호북.
  • [註 045]
    화신(和珅) : 원래 만주족으로서 청나라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고 태학사(太學士)까지 되었는데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면서 너무 탐욕만을 일삼다가 고종이 죽고 인종(仁宗)이 뒤를 이었을 때 여러 신하들의 탄핵으로 하옥되어 결국 자진하게 하였음. 《청사(淸史)》 열전(列傳) 권35.

○進賀正使金載瓚、副使李基讓, 以自燕離發馳啓, 進聞見別單曰: "敎匪之難, 今已五年, 臣等纔入關內, 傳說極多, 莫可憑信。 故到館後, 廣加探訪 近得的報, 則果於十二月捷報已到, 餘寇幾盡勦平。 蓋丙辰春間, 四川寡婦齊二者, 自稱齊二寡婦, 挾左道惑衆, 號爲白蓮敎, 轉相煽動, 窮民響應, 衆遂大振, 旁掠城池, 出沒于川、陝、楚、豫之間, 官軍屢敗, 將卒死者, 不知爲幾。 且軍興已久, 經用殆乏, 命戶部, 博議于閣老、九卿、科道等官, 遂定鬻官之制, 凡知州知縣, 各有定價, 刊成事例冊子, 頒于中外。 嘉慶四年, 經略將軍滿人 勒保, 率兵五萬, 擊斬齊二, 擒賊首王三槐, 獻俘于京, 四月皇帝諭勒保, 略曰: ‘朕閱王三槐供詞, 殊爲惻然。 朕承付托之重, 視民如傷, 恐一夫不獲, 豈忍令數省蒼生, 罹於鋒鏑哉? 總緣親民之吏, 不能奉宣德意, 多方婪索, 竭其膏血, 因而激變至此。 而無非交結和珅, 使我百姓當之, 能不痛心? 且敎匪原屬無多。 脅迫良民, 愚民畏死, 被其裹掠, 唉彼不得已之苦情, 朕已知之詳矣。 命將出師, 只討不庭, 斷無誅戮良民之理。 如有縳獻賊首, 悔罪立功者, 不但宥罪, 當格外邀恩, 着勒保遍諭各自地方。’ 齊二旣死, 其黨冷天祿, 謂報齊二之讎, 聚衆大掠, 其勢甚盛, 而勒保恃功驕惰, 玩寇自保, 四川摠督魁倫, 論勒保縱賊慢軍偸弄兵食狀。 皇帝怒革勒保職, 拿下獄, 命內務府覈聞, 以滿將額勒登保爲經略將軍, 代勒保出征。 額勒登保到軍撫恤, 將士得其死心, 戰輒有功。 冷天祿大懼, 走至陝、甘, 復縱兵大掠。 更命戶部尙書滿人 那彦成, 帥關東黑龍江兵三千及官軍數萬, 追至 , 與額勒登保夾攻, 十二月額勒登保遇賊大戰, 擒冷天祿及頭領數十人, 追奔至千餘里, 四川悉平, 惟餘匪, 據險出沒, 那彦成, 與戰見敗, 爲賊所傷, 將領數十, 兵丁萬餘, 皆戰沒。 額勒登保, 移兵追擊, 斬獲甚多, 幾皆討平, 見今賊衆, 只有萬餘人, 此在上年十二月二十七日捷至。 皇帝諭曰: ‘額勒登保, 勦殺冷天祿, 一股賊匪, 幷擒頭目數十員, 殺賊數千, 覽奏之下, 深感皇天默佑, 寔賴皇考靈顯。 冷天祿 一帶, 爲禍已久, 罪不容誅, 着所在該省凌遲處死, 生擒頭目, 幷着卽委妥員拿解來京, 其餘投降者, 旣已悔過自新, 毋庸苛治。 經略額勒登保, 着在御庫賞賜大緞金銀。 該經略自委任以來, 能殺賊數處, 克荷其任, 今奏凱在邇, 仍須分外出力, 蕩平一淸, 庶不負朕委任之佇望也。 所有當時出力之武弁兵丁等, 俱着額勒登保査奏, 賞給官銜錢糧, 以示皷勵云。"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42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