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자를 입계토록 전교하다
예조 판서 이만수가 아뢰기를,
"‘삼가(三加)014) 의 예가 끝나면 빈(賓)이 자(字)를 부른다.’는 말이 예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왕세자의 자를 정하는 데 있어서도 미리 좋은 날을 가려 의정부 이하 관원들을 명초하여 그들의 회의 결과를 입계(入啓)해서 낙점을 받은 다음에야 예문에 따라 일을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세자의 자를 정할 좋은 날을 이달 안으로 가려서 입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글을 내려보낸 다음에 좋은 날을 가려서 서면으로 입계하여 낙점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 책례 때에 전하께서 정전에 나가시어 책례를 선포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때에 가서 하교할 일로 하명하셨습니다. 의주 절목에 대해서 지금 계하를 받아야 하는데, 친히 나가시는 것으로 마련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의 요즘 정력으로는 자력으로 하기 어렵겠다. 그러나 의주 절목은 서면으로 입계하라. 그러면 그때에 가서 하교할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례 때 삼가(三加)의 옷과 책례 때의 옷에 대해서는 삼가 예문에 따라 거행하겠거니와, 왕세자가 처음 방에서 나갈 때의 옷에 대해서는 신묘년·경술년의 전례에 따라 쌍계(雙髻)·옥잠(玉簪)·아청직령(雅靑直領)·조대(縧帶)로 마련하시기 바라오니, 상의원으로 하여금 만들어 들여오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삼가의 옷도 모두 전궁(殿宮)에서 마련하여 내리는데, 더구나 이것이겠는가. 그리고 아청직령의 경우는 《오례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선왕들이 입었던 옷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겠으나, 이번에는 강학(講學) 때에 입은 옷을 그대로 입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의례(儀禮)》를 상고해보니 ‘빈(賓)이 단술을 주면 관자(冠者)가 자리의 서쪽에서 절하고 술잔을 받으며, 빈은 동쪽으로 향하여 답배(答拜)를 한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자리의 서쪽에서 절한다는 것은 남쪽을 향하여 절한다는 뜻이요, 빈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답배를 한다는 것은 성인(成人)과 예(禮)를 함에 있어 주인(主人)에게 답배할 때와 달리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자리의 서쪽에서 절한다.’는 것이 ‘서쪽을 향하여 절한다.[西向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 유신(儒臣) 정경세(鄭經世)가 남(南) 자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술년 등록에서는 대신이 정경세의 논의를 끌어다 연품(筵稟)하여 ‘남쪽을 향하여 절한다.[南向拜]’로 바로잡았으니, 이번에도 여기에 따라서 마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례의》의 관례 의식은 《개원례(開元禮)》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참고하였는데, 그 설위조(設位條)에 의하면 담 밖[序外]의 장막 안에는 ‘찬물(饌物)을 의치(擬置)한다.’는 글만 실려 있고, 예석(醴席)의 남쪽에는 단술병과 술잔을 두는 곳만 설치되었을 뿐, 찬품(饌品)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황조(皇朝)의 예에 의거해서 술과 찬품을 함께 서계(西階) 위에 차리는 것이 예의(禮意)에 합당할 듯합니다. 청컨대 이것으로 의주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절할 때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는 절차에 대해서는 정미년에 번잡한 의식이라는 하교로 인하여 그만두었으니, 이번에도 이 규례에 따라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례 때의 교서(敎書)는 본디 《오례의》에 실린 글이 있기 때문에, 따로 지어서 중첩으로 쓰지 말자는 뜻으로 지난 경술년 대신의 연품을 인하여 법식을 정해서 시행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오례의》의 본문(本文)을 베껴서 하루 전에 대내에 들여보냈다가 당일에 들이고 내기를 주청해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책인(冊印)과 교명(敎命)을 대내에 들여오고 대내에서 내주고 하는 절차와 원본·부본을 대내에 들여오는 절차까지도 모두 잠시 보류하고자 하니, 이 또한 의당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2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註 014]삼가(三加) : 관례(冠禮) 때 맨 처음에 치포관(緇布冠)을 쓰고, 다음에 피변(皮弁)을 가(加)하고, 그 다음에 작변(爵弁)을 가하는 일을 말한다.
○禮曹判書李晩秀啓言: "三加禮成, 賓字之載在禮文。 王世子定字, 先期擇吉, 政府以下, 命招會議入啓, 受點然後可以依禮文擧行。 定字吉日, 請以今月內推擇以入。" 敎曰: "待書下, 擇吉日, 書入受點。" 又啓言: "王世子冊禮時, 殿下臨殿宣冊, 臨時下敎事命下矣。 儀注節目, 今當啓下, 以親臨磨鍊乎?" 敎曰: "以予近日精力, 難以自力。 儀節則書入。 而臨時當下敎矣。" 又啓言: "冠禮時三加服色, 受冊時服色, 謹依禮文擧行, 而王世子初出房時服色, 請依辛卯、庚戌年例, 以雙䯻、玉簪、鴉靑直領、縧帶磨鍊, 請令尙衣院造入。" 敎曰: "三加服, 皆自殿宮措備內下, 況此乎? 至於鴉靑團領, 非《五禮儀》所在, 列朝所御, 可考而知, 今番則仍着講學時服色。" 又啓言: "謹稽《儀禮》, ‘賓授醴, 冠者筵西拜受觶, 賓東面答拜。’ 註以爲: ‘筵西拜(東)〔南〕 面拜也, 賓答拜於西序東面者, 明成人而爲禮, 異於答主人。’ 《五禮儀》則以筵西拜爲西向拜, 故儒臣鄭經世以爲南字之誤。 庚戌謄錄, 大臣引其論, 以 ‘南向拜’ 筵稟釐正, 請今番亦依此磨鍊。" 允之。 又啓言: "《五禮儀》冠禮儀, 參用《開元禮》、《大明會典》, 而設位條, 序外之帷, 只載 ‘擬置饌物’ 之文, 醴席之南, 只設醴尊加勺之所, 而饌品位置, 則初不槪見。 依皇朝禮醴, 饌同設於西階上, 似合禮意。 請以此釐正儀注。" 允之。 又啓言: "王世子以二品以上拜禮時, 控首節次, 丁未年以煩文, 因下敎除之矣。 請今番亦依此例。" 允之。 又啓言: "冠禮時敎書, 自有《五禮儀》所載之文, 勿爲別撰疊用之意, 庚戌因大臣筵稟, 定式施行矣。 請今番亦以《五禮儀》本文書寫, 前一日內入, 當日請出入用。" 敎曰: "冊印敎命內入內出之節, 與正副本內入之〔節〕 , 亦欲安徐, 此亦當如是。"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2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