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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12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상차하여 《흥왕조승》 4편을 올리다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차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성수(星宿)를 보면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의 분야에 해당되었는데, 옛적에 단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 때는 도당씨(陶唐氏)314) 때와 일치하고 기자께서 봉해지신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과 서로 비슷한데다 중국의 교화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다만 왕씨(王氏)315) 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치고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단군기자께서 남겨주신 풍도를 까마득히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크게 열리고 운세가 밝게 트이면서 아조(我朝)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마침 황명(皇明)이 중원의 판도를 새로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는데 우리의 국호(國號)를 내려주고 면복(冕服)을 하사하는 등 내지(內地)의 나라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덕을 합쳐주고 귀신과 사람이 모두 도와주는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시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셨습니다. 이렇게 왕업(王業)을 일으켜 후대에 물려주고 대경(大經) 대법(大法)을 확립하여 시행케 하는 한편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선왕(先王)의 위대한 법도를 펴게 하자 문물 제도가 상(商)나라나 주나라 때보다도 빛나게 되면서 그 명성이 온 누리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로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316) 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습니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함께 예악(禮樂)이 행해지고 교화가 융성하게 펼쳐져서 집집마다 제사지내는 풍조가 이루어지고 어린 아이들도 시서(詩書)를 암송하는가 하면 말몰이꾼이나 양치기들까지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을 줄 알고 부엌에서 시중드는 여종이나 밥짓는 아낙네들도 다시 시집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동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기자 성인께서 펼치신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교화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행해지게 된 것이니, 아, 정말 성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근본이 없이 된 것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예로부터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윗대에서 덕을 쌓아 신령스러운 기운이 길러지고 선한 일을 하여 상서로움이 내려지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반드시 천명을 내려주어 후손을 창성하게 해 주는 것이니 이는 마치 높은 산과 큰 강물에 밑둥이 있고 근원이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각각 설(契)직(稷)에서 근본했던 것을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우리 나라의 조상으로 말하면 멀리 신라 때의 사공(司空)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빛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계속 자손이 번창하여 목조(穆祖) 때에 이르러서는 인의(仁義)를 행하여 왕업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는 공유(公劉)빈(豳) 땅에 거주했던 때의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익왕(翼王)도왕(度王)께서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면서 부지런히 왕업의 기틀을 더욱 다지셨고, 급기야 우리 환고(桓考) 때에 이르러 선대(先代)의 공적을 크게 드러내시자 민심이 귀의하여 끝내 대업(大業)의 성취를 보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태왕(太王)기(岐) 땅으로 옮겼을 때의 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경서에 이르기를 ‘나라가 장차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갖가지로 뒤섞여 나타난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징조들에 대해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전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하늘이 덕 있는 자를 돌보고 사방의 민심을 살펴본 데에 기인한 것으로서 산천이 신령스러운 현상을 드러내고 신명(神明)이 말없이 도와 준 까닭에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만 이렇듯 위대한 사적(事蹟)이 혹 패관(稗官)이나 야승(野乘)에나 보일 뿐 간행된 믿을 만한 서적은 없이 그저 입으로만 서로들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은 나름대로 유감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북방 변경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산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왕업을 일으킨 고적(古蹟)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답사하였는데, 마치 풍패(豊沛)317) 고을에 가서 대풍가(大風歌)318) 를 직접 듣는 듯 하염없이 감회에 젖어들었으면서도 신의 자질로는 어떻게 표현하여 드날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곧 이어 또 실록(實錄)을 찬수(纂修)하는 임무를 외람되게 맡게 된 기회에 궁중에 비장(秘藏)된 귀중한 사료(史料)들을 얻어 볼 수가 있었는데, 훌륭한 제도와 문물들은 모두 《보감(寶鑑)》에 실려 있었지만 오랑캐를 물리치고 영토를 개척한 공로 등은 모두가 고려조(高麗朝)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근거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 책만은 즉위하기 이전의 사적을 자세하게 기재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책은 전적으로 공적을 노래로 찬송하는 것을 위주로 해서 대요(大要)와 세목(細目)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항목별로 비유를 들면서 멀리 고사(古史)를 인용하는 등 기사체(記事體)와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또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은 관계로 앞뒤의 순서가 어긋나고 세대를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워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로서 후세에 전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나름대로 《고려사(高麗史)》《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뽑아 취집한 다음 연대를 분류해서 관련 사실들을 한데 묶고, 물러가서는 또 《여지승람(輿地勝覽)》《능전지(陵殿誌)》·《송경지(松京誌)》와 개국 초기의 문집들을 널리 상고한 뒤 왕업을 일으킬 때의 사실을 언급한 부분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저것을 인용하여 이것을 증명하고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여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항목을 달리하면서도 내용을 일관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오직 책으로 완성되어 간행된 것만을 자료로 택하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어설픈 기록들은 감히 뒤섞어 넣지 않음으로써 가능한한 근엄하면서도 정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사체(事體)가 중해지게 하는 동시에 크나큰 업적을 드러내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3편(編)으로 만든 다음에 분명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북쪽 지방의 고적(古蹟)을 덧붙이고 열조(列朝)의 공적을 기술하여 드날리는 말을 각각 기재하는 한편 그 아래에는 사신(詞臣)이 찬양하며 칭송한 말들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4편으로 만든 다음에 이름을 《흥왕조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거칠기만 하고 보잘것없이 미천한 신이 어떻게 감히 역사를 기술하는 중대한 일을 의논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관각(館閣)의 관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옛날로 말하면 태사(太史)의 직책에 해당되기에 어리석고 망령된 것을 헤아리지 않고 문득 찬술하게 되었으니 참람되게 행동한 죄를 실로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손을 씻고 정성스럽게 재계한 뒤 차자를 올리며 삼가 책을 바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효성을 다해 선인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고 조상의 덕을 정성껏 추모하여 적도(赤島)에 비(碑)를 건립하고 경흥(慶興)의 저택을 기념케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독서당(讀書堂)치마대(馳馬臺)와 같은 고적들을 발굴하여 선조의 공적을 선양하는 등 아무리 먼 시대의 것도 모두 드러내 보여 주었으며 심지어는 상산(象山)319) 의 유지(遺址)에까지 모두 비석을 세워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에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아,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신이 올리는 책을 보시고 마음속에 느껴지시는 것이 있거든 한가하실 때에 특별히 살펴보도록 하시고 내각에 보관하여 빠진 역사를 보충하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 열조(列祖)께서 계속 쌓아 오신 덕업(德業)과 왕업을 일으킬 때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던가를 그런대로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선대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후손들을 잘살게 해 줄 계책을 꾀함에 있어서도 늘 이를 생각하며 어긋나지 않게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러면 만세토록 태평 시대를 누리면서 끝없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상의 공적을 드러내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린 것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 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는데, 《서경》이훈(伊訓)무일(無逸) 편은 경계해 주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시경》현조(玄鳥)생민(生民) 편은 전적으로 칭송하며 노래를 부른 것이라 하겠다.

기술(紀述)하는 체재(體裁)로 쓴 삼대(三代)320) 의 기록으로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이는 훌륭한 사관(史官)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대체로 볼 때 그 일이 너무도 공경스럽고 그 의리가 지극히 컸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일 따름이다.

아, 우리 국가에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임금들이 계속 뒤를 이으시어 하늘과 땅처럼 빛나게 된 것은 실로 왕업을 일으킨 고장의 성스러운 사적에 기초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날리는 책 1부(部)를 여태까지 지체시키면서 편찬하지 못한 것은 다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였지 그럴 겨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감》을 찬수할 때에도 삼가 열성(列聖) 19인의 큰 계책과 위대한 업적만을 기록했을 뿐 왕업을 일으키기 이전의 일들에 대해서는 기술하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나 소자(小子)는 밤이나 낮이나 선왕(先王)의 마음으로 열조(列朝)의 마음을 추급해 헤아리고 열조의 마음으로 성조(聖祖)321) 의 마음을 체득해 보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하여 옛날에 거하시던 유적지를 기념하고 왕업을 일으킬 때의 상서로움을 드러내어 영원히 자손에게 무궁한 복을 끼쳐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한두 개의 정민(貞珉)322) 에 새겨서 조금이나마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은혜를 갚으려는 정성을 표시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이 《용비어천가》를 근거하고 궁중에 비장된 사료를 뽑아 낸 뒤 연대별로 분류하고 관련 사실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종합적인 책으로 저술해냈으니, 이것이야말로 옛날 태사(太史)의 직분을 수행한 것이라 하겠다. 경이 올린 《흥왕조승》 2책(冊)을 가져다 경건한 자세로 열람하고 경의 정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각으로 하여금 이를 간행하여 보관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 나라의 보배로 삼게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24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註 314]
    도당씨(陶唐氏) : 요(堯)임금을 말함.
  • [註 315]
    왕씨(王氏) : 고려.
  • [註 316]
    발해(渤澥) : 황해(黃海).
  • [註 317]
    풍패(豊沛) :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으로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일으켰음.
  • [註 318]
    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가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고향인 패(沛) 땅을 들러 친족과 옛 친구들을 모아놓고 향연을 베풀며 불렀던 노래임.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 [註 319]
    상산(象山) : 곡산(谷山)의 옛 이름.
  • [註 320]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321]
    성조(聖祖) : 태조(太朝)를 가리킴.
  • [註 322]
    정민(貞珉) : 비석.

○知中樞府事洪良浩上箚, 進《興王肇乘》四編曰:

"洪惟我東方有國, 粤自邃古, 檀君首出, 箕子東來。 自玆以降, 分爲三韓, 散爲九夷, 及至, 始得混一, 而其敎則儒釋相半, 其俗則華戎交雜。 然而地近, 星應箕斗, 故檀氏之起, 竝於陶唐, 箕聖之封, 肇自周武。 蓋其風氣相近, 聲敎攸漸, 衣冠悉遵華制, 文字不用番梵, 或稱小中華, 或稱君子之國, 與夫侏𠌯左袵之俗, 逈然不同。 而第自王氏之世, 壤接靺鞨, 媾連蒙元, 故禮敎不興, 倫紀不明。 擊刺以爲能事, 叛亂殆無虛歲, 之遺風, 漠然不可見矣。 何幸天開鴻荒, 運屆熙明, 我朝之興。 適會於皇, 肇造區夏之時, 錫號賜冕, 視同內服。 乾坤與之合德, 神人爲之夾助, 於是乎我太祖大王, 以聖神之姿, 當千一之運, 南征北伐, 奄有三韓。 創業垂統, 立經陳紀, 斥佛老之異敎, 敷先王之大法, 文章煥乎, 聲明耀于寰海。 琉球入貢, 暹羅獻款, 兀良哈源了浚之屬, 相率而聽約束。 西連渤澥, 東盡瑟海, 橘柚之包, 貂豽之皮, 自南自北, 筐篚相望。 魚鹽之饒, 可埒於, 繭絲之利, 不讓於。 禮樂興行, 風化昭融, 家習俎豆, 童誦詩書, 馬厮羊竪, 皆服三年之喪, 竈婢饁婦, 亦恥再醮之行。 蓋自東方生民以來, 所未嘗有, 而箕聖九疇之敎, 始行於今日, 猗歟盛矣。 此豈無所本而致哉? 竊稽自古帝王受命, 必因其先世積德毓靈, 作善降祥。 天必命之, 克昌厥後, 如高山大河, 有宗有源。 之本於稷契, 經史可按也, 惟我國祖, 遠自新羅司空。 潛光未顯, 瓜瓞遠延, 至于穆祖, 居仁行義, 肇基王跡, 其猶公劉之居乎。 曰若翼王, 曰若度王, 屢遷厥居, 克勤克長, 曁我桓考, 丕篤前烈, 人心歸附, 終成大業, 其猶太王之遷乎。 經曰: ‘國之將興, 必有禎祥。’ 當此之時, 奇祥異徵, 錯落環偉, 北方之人, 至今傳說。 蓋由天眷有德, 監觀四方, 山川之效靈, 神明之默佑, 自有不期然而然者矣。 惟此盛蹟, 或見於稗官野乘, 而未有刊行之信書, 只憑口耳之相傳, 臣竊恨之。 廼於曩歲, 待罪北塞, 遍覽山川, 興王古蹟, 無不目寓而身履, 如到豐沛之鄕, 親聞大風之謠, 緬焉興感, 顧無以鋪張揚厲也。 尋又獲叨實錄纂修之任, 得窺金櫃石渠之秘, 則憲章制度之盛, 雖載於《寶鑑》, 而攘夷拓地之功, 皆屬於勝國, 無可以徵據。 惟《龍飛御天歌》一書, 備載龍潛勝蹟, 而是書也專以歌頌功烈, 發凡起目, 故逐段設譬, 遠引古史, 有異記事之體。 亦無編年之序, 先後失次, 世代難詳, 不足爲信史而傳後也。 臣於是, 竊就《麗史》《龍飛歌》, 私自鈔輯, 分年繫事, 退又博考《輿覽》《陵殿誌》《松京誌》, 國初文集有及於興王時事者, 蒐羅採摭。 援彼證此, 刪繁就簡, 異條同貫。 而只從刊行成書, 不敢混及於私藏漫錄, 務歸謹嚴而精, 寔所以重事體也彰鴻烈也。 旣以裒成三編, 然後附以北方古蹟之昭著流傳者, 各載列朝記述發揮之辭, 下及詞臣揄揚贊頌之語。 摠爲四編, 名之曰《興王肇乘》。 自顧眇末鹵莾之賤, 何敢與議於秉筆之重事? 而官忝館閣, 是古太史職也, 不揆愚妄, 輒有撰述, 僭越之罪, 實無所逃。 玆敢盥手齎誠, 隨箚祗獻。 伏惟我聖上, 以繼述之孝, 篤追遠之誠, 建赤島之碑, 紀慶興之宅。 讀書之堂, 馳馬之臺, 闡古蹟而揚先烈, 無遠不顯, 以至象山之遺址, 亦皆立石而表章之。 數百年未遑之典, 於是大備, 於乎至矣。 今臣所進, 有槪聖衷, 則淸燕之暇, 特賜澄省, 藏諸內閣, 以補闕史。 我列祖德業之積累, 開創之艱難, 庶可昭垂於來許。 而亦於守成裕後之謨, 念玆在玆, 不愆不忘, 太平萬世, 惟無疆休矣。"

批曰: "彰祖烈而揚先休, 莫詳於《詩》《書》, 而《伊訓》《無逸》, 主於告戒, 《玄鳥》《生民》, 專於謌頌。 紀載之體, 三代無傳焉, 非無良史氏也, 蓋其事至敬, 其義至大然耳。 猗歟我國家, 聖繼神承, 如天地之悠久, 如日月星辰之昭昭, 實本於豐沛聖蹟。 而尙稽一部揄揚之編, 特不敢也, 非未遑也。 此所以《寶鑑》纂次之日, 敬書十九聖洪謨盛烈, 而興王以前則不得述焉也。 予小子夙夜一念, 以先王之心, 追列朝之心, 以列祖之心, 體聖祖之心。 紀陶復之基, 闡長發之祥, 以永貽萬子孫無疆惟休者。 乃以一二貞珉之刻, 少寓追遠報本之誠。 今卿據《龍飛之歌》, 抽金樻之藏, 分年繫事, 著爲一統信書, 此古太史之職也。 取卿所進《興王肇乘》二冊敬閱之, 深感卿誠。 令內閣開印奉藏, 庸作我家之琬琰。"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24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