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세에 관한 서장관 한치응의 별단
서장관(書狀官) 한치응(韓致應)이 별단(別單)을 올렸다. 그 내용에,
"1. 재작년에 태상황(太上皇)의 칙지(勅旨)를 받들어, 효숙 황후(孝淑皇后)를 위해 27개월 동안 거상(居喪)한 다음에 황귀비(皇貴妃) 유호록씨(鈕祜祿氏)를 황후로 세우도록 명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5월로 그 기한이 찼으므로 바로 칙지대로 준행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황후의 부친 공아랍(恭阿拉)은 규례에 따라 일등후(一等侯)로 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당 행해야 할 황후 책봉의 의식은 다시 27개월이 지나 상복을 벗게 되는 가경(嘉慶) 6년에나 가서 상세히 전례를 상고한 뒤 길일(吉日)을 택해 거행할 예정입니다.
2. 고황제(高皇帝)의 실록(實錄)은 이미 편찬 기관을 설치하고 감수(監修)에 착수했습니다. 태학사(太學士) 경계(慶桂)가 총재관(摠裁官)을 맡았으며 편찬하는 체재는 한결같이 《강희실록(康熙實錄)》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미 즉위 초년(初年) 5개월 동안의 정치를 가지고 편집해서 9권(卷)의 책으로 만든 뒤 벌써 위에 바쳤는데, 완성될 때쯤이면 대략 1천 4백, 5백 권쯤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강희실록》은 3백 권으로 되어 있는데 작업을 착수한 지 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실록의 경우는 권질(卷帙)이 예전의 것보다 다섯 배나 되는 만큼 편찬 기관의 인원을 만약 옛날식대로만 겨우 채워준다면 시일만 끌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보다는 적당히 인원을 보충해 주어 일찌감치 완성하게 하는 것이 낫겠기에 마침내 만족(滿族)과 한족(漢族) 출신으로 찬수관(纂修官)과 수장관(收掌官)·번역관(繙繹官)·등록관(謄錄官) 등 1백 50여 인을 더 차출한 뒤 봉급으로 은(銀)을 내주면서 달마다 계획량을 설정해 편찬케 하고 있습니다.
3. 급사중(給事中) 명승(明繩)이 은광(銀礦)을 발굴해 캐내자고 청하니, 유시하기를 ‘지금 이익을 도모하는 일로 놀고 먹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될 경우 점점 흔단을 일으키게 되리라는 것은 사세상 필연적인 일이다. 그리고 국가의 경비(經費)는 본래 정상적인 공부(供賦)로 댈 수가 있는데 어찌 산택(山澤)을 끝까지 뒤져가면서 얄팍한 이익을 노려서야 되겠는가. 짐이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은 것은 이익을 말하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니다. 거두어들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신하는 결단코 쓸 수 없으니, 즉시 명하여 아뢴 원본을 되돌려 주도록 하고 이 일을 부(部)에 교부하여 의논해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살빈도(薩彬圖)가 화신(和珅)이 재산을 숨겨 둔 곳을 추적해서 찾아내게 하자고 청하니, 유시하기를 ‘짐이 이 사건을 심리하면서 이미 지나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속히 처결하고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라고 유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식한 무리들이 벌벌 떨면서 그의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이는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는 일이 될 뿐만이 아니라 짐의 본의를 체득할 줄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짐은 천하를 내 집으로 삼고 있으니 어찌 겨우 부고(府庫)에 저장해 둔 것만을 내 소유로 간주하겠는가. 이에 대한 일을 조사해 낸 결과 가령 숨겨둔 곳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 역시 하늘 아래 땅 위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돈을 긁어 모으려고 안달하면서 마을을 샅샅이 뒤져 세금을 물리는 일과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홍양길(洪亮吉)이 사서(私書)를 성친왕(成親王)에게 정체(呈遞)268) 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3, 4월 이래로 조회를 여는 일이 조금 늦어지고 있으니 아마도 배우(俳優)나 근습(近習)들이 상의 총명을 혼란시키고 있는 듯하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에 군기처(軍機處)의 대신들이 회동하여 심리한 결과 근거가 없는 일로 밝혀지자 마침내 참형(斬刑)의 율(律)을 적용하기로 결정하니, 유시하기를 ‘만약 그러한 말들을 직접 상소하여 진달했다면 그 내용보다 더 황당무계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짐은 반드시 죄를 주지 않고 스스로 반성할 자료로 삼으면서 좋은 가르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무 근거도 없는 말을 가지고 각처에 편지를 써 보내다니 이것이 정말 무슨 심보인가. 그러나 짐은 바야흐로 강직한 말을 듣고 싶어하는 중이다. 그러니 어찌 그에게 사죄(死罪)를 적용함으로써 곧다는 명성을 도둑질하려고 하는 자로 하여금 짐이 말한 사람을 주륙(誅戮)했다고 생각하게 하겠는가. 관대하게 처리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주도록 특별히 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진달한 일이 조금도 훌륭한 정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이 때문에 노여워하며 화평스러운 분위기를 깨뜨리거나 감히 말할 수 있는 기풍을 막지 않을 것이며, 원서(原書)는 안에 놔두고 보면서 처음엔 부지런히 잘하다가 나중엔 게을러지는 폐단에 대한 경계로 삼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4. 중국의 습속을 보면 옛날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만인(滿人)들은 수초(水草)의 고통269) 을 잊어버린 채 점점 안일한 생활에 빠져들고 있고, 한인(漢人)들은 바뀐 의복을 태연히 입고 살아 가면서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아내는 뜻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이 또한 세상이 한 단계 변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나라를 세운 지 이미 오래되어 점차 전성기로 접어들면서 형식적인 겉치레만 요란해지고 원기(元氣)는 감퇴되고 있으며 부박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가운데 실용(實用)의 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치 풍조로 말하면 민간이나 저잣거리 할 것 없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들 모두가 생활에 절실한 것들이 아니라 그저 노리개에 불과한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겉치레에 몰두하고 세속의 풍조가 얼마나 부박한지를 이를 통해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홍양길(洪亮吉)을 처분하는 분부를 내리면서 ‘오늘날의 기풍을 보면 왕왕 의논하기를 좋아하고 있으며, 어쩌다 시문(詩文)들을 보기라도 할라치면 자기 작품이 최고라고 뽑내고들 있다. 이는 인심과 사습(士習)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어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본조(本朝)에서 명(明)나라 말기의 분위기나 폐습을 답습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고질적인 세속의 폐단을 정확하게 본 것으로서, 이를 바로잡아 쇄신하려는 뜻을 여러 차례에 걸쳐 칙유(勅諭)하는 가운데에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학술로 말하면 풍속이 날로 달라지면서 더욱더 심하게 지리 멸렬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로는 정(程)·주(朱)도 함께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 대체적인 내용조차 엿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조금 지식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기록이나 의례(義例)에 대해서 출처가 어디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왕양명(王陽明)이나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에 있어서도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서양(西洋)의 사교(邪敎)에 대한 일을 가지고 더러 조정 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에 대한 설은 당초 일반 서민들을 바보스럽게 미혹시키는 데 불과했던 것으로서 처음에는 점점 만연되어 치성해지는 결과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국가에서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5. 금년 8월에 묘비(苗匪)를 초유(招諭)하는 일과 관련하여 전후 수백 자(字)에 달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을 보살펴 주고 먼 지역의 나라를 포용해 주었던 선황제(先皇帝)의 덕을 빠짐없이 서술하였는데, 맨 먼저 조선이 유조(遺詔)를 받들어 이 일을 전담하는 사신을 파견해서 향을 올리고 제사를 드리면서 애도하는 뜻을 표하고 예를 극진히 했던 일을 일컫고, 이와 아울러 안남(安南)의 여러 나라도 정성을 쏟아 추모하면서 앞을 다투어 달려왔던 일을 언급하였으며, 해비(該匪) 등은 똑같이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을텐데도 조금도 감동하는 일은 없이 그저 난리만 일으키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60년 동안 중국에서 기름을 받은 데 대한 보답이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유(宣諭)한 문자를 조서 형태로 인쇄하여 두루 효유(曉諭)토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유하기를 ‘짐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반복해서 이유를 생각해 보니, 해마다 지방에서 백성의 고혈(膏血)을 쥐어짜낸 나머지 이런 사변을 일으키게 된 것이 분명하다. 지금 보면 탐욕만 부리는 관원들이 아직도 모조리 축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을 시골로 내려보내고 나면 그대로 침학하는 일이 이어질까봐 관망하고 머뭇거리면서 감히 바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소속(所屬) 주현(州縣)에서 백성을 침해하는 탐관 오리들을 조사해 내어 몇 사람을 엄히 탄핵함으로써 공분(公憤)이 풀리게 하고, 평소 민심을 얻은 어진 관리들을 승진시켜 발탁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라고 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적중에서 잡아내는 자가 있을 때에는 모두 예전에 있었던 오롱등(吳隴登)의 예에 따라 상을 주고 5품(品)으로 대우해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다시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19면
- 【분류】외교-야(野)
○書狀官韓致應進別單曰: "一, 再昨年奉太上皇勅旨, 命於孝淑皇后二十七月後, 立皇貴妃鈕祜祿氏爲皇后矣。 今年五月, 是爲屆期, 仍遵勅旨, 正位中壼, 皇后父恭阿拉, 照例封爲一等侯。 應行冊后典禮, 俟嘉慶六年二十七月釋服後, 詳査定例, 擇吉擧行。 一, 高皇帝實錄, 業已開館監修。 太學士慶桂爲摠裁官, 而纂輯條款, 一依《康熙實錄》。 已將初年五個月政績, 編輯成書者爲九卷, 先已進御, 計至告成之時, 約爲一千四五百卷。 《康熙實錄》爲三百卷, 而開館九年, 始得告完。 今此卷帙, 五倍于前, 在館各員, 若僅照舊額, 則不免耽延時月。 莫如量加添泒, 及早告成, 故遂添出滿、漢, 纂修官、收掌官、繙繹官、謄錄官一百五十餘員, 支給捧銀, 按月編摩。 一, 給事中明繩, 請開採銀礦, 則諭以: ‘今以謀利之事, 聚游手之民, 生衅滋事, 勢所必然。 且國家經費, 自有正供常賦, 安可窮搜山澤, 計及錙銖? 朕廣開言路, 非開言利之路也。 聚歛之臣, 斷不可用, 卽命原摺擲還, 交部議處云。’ 薩彬圖, 請追究和珅貲産寄頓之處, 則諭以: ‘朕以辨理此案, 已覺過當。 故諭其速決不爲已甚。 而無識之徒, 鰓鰓較計財産, 不惟不知事體, 實不知仰體〔朕〕 之本意矣。 朕以天下爲家, 豈僅〔以〕 藏諸府庫者, 視爲己有? 此項査抄, 縱有隱寄, 自朕視之, 亦不過在天之下, 地之上耳, 何以輾轉根布, 近于搜括間架稅錢事耶云云。’ 洪亮吉以私書呈遞成親王, 而書中有 ‘三四月以來, 視朝稍晏, 恐爲俳優、近習熒惑聖聰’ 等語。 軍機大臣, 會同審訊, 竟無指據, 遂擬以斬決, 則諭以: ‘若以此等語言, 手疏陳奏, 卽荒誕有甚於此者, 朕必不加之罪, 原當借以自省, 引爲良規。 今以無稽之言, 向各處投札, 是誠何心? 朕方冀聞讜言。 豈肯以死罪, 俾伊竊取直名, 妄謂賊誅戮言事之人乎? 特命從寬免死。 所陳雖毫無影響之事, 必不因此含怒, 以干太和之氣, 而沮敢言之風, 原書留以備覽, 以爲始勤終怠之儆云。’ 一, 中州習俗, 大不如古。 滿人忘水草之苦, 而稍啓宴安之漸, 漢人恬衣章之變, 而少無含忍底意, 此亦世級之一變也。 開國旣久, 漸當崇極之會, 文具繁而元氣損, 浮靡勝而實用虛。 侈習則閭巷市井之間, 玲瓏煥爛者, 無非不切於用, 而只爲玩娛之具。 人心之虛假, 俗尙之浮靡, 据此可見。 皇帝於處分洪亮吉之敎, 有曰: ‘近日風氣, 往往好爲議論, 或見諸詩文, 自負通品。 此則人心士習所關, 豈可以本朝極盛之時, 而轍蹈明末聲氣陋習哉?’ 云云, 此正灼見俗弊之痼, 而振刷矯捄之意, 屢發勅諭之間。 學術則習尙日渝, 滅裂益甚。 其言則共尊程、朱, 而實未嘗窺見門墻。 雖稱稍有知識者, 竝與記錄義例而不辨出處者有之, 至於王、陸之學, 亦未聞傳其緖餘云云。 所謂西洋邪敎事, 或與朝紳間酬酢, 則以爲: ‘堂獄之說, 初不過愚惑匹庶之事, 而未始至於浸染蔓熾之境, 近因邦禁之截嚴, 委巷之間, 幾乎止熄’ 云云。 一, 今年八月, 因苗匪招諭事, 下詔首尾數百言, 備述先皇帝涵濡小民, 懷綏遠服之德, 首稱朝鮮接奉遺詔, 專遣使臣, 進香致祭, 擧哀盡禮, 竝及安南諸國, 抒誠追慕, 奔越爭先之事, 而該匪等具有人心, 毫無感動, 只事搆亂, 豈六十年受養中夏之意耶。 命將宣諭文字, 刊刻謄黃, 遍行曉示。 又下諭曰: ‘朕宵旰焦思, 反覆推究, 其故必因連年地方脧削脂膏, 激成事變。 而今見貪墨之員, 尙未盡黜。 恐投歸之後, 仍遭侵虐, 是以觀望逡巡, 未敢卽行投出。 遂命査出所屬州縣之貪縱虐民者, 嚴參數人, 以洩公憤, 陞擢素得民心之良吏, 使之撫諭。 若有自賊中捉出者, 竝依吳隴登前事賞給, 五品頂戴之意, 更行曉諭。’"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19면
- 【분류】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