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록》을 편집 교정하고 있던 전 승지 홍의호를 소견하다
전 승지 홍의호(洪義浩)를 소견(召見)하였다. 이때 의호가 그의 형 홍인호(洪仁浩)를 이어 《심리록(審理錄)》을 편집 교정하고 있었다. 의호가 아뢰기를,
"정유년 사목(事目) 가운데 나오는 바 ‘이미 매장했을 경우에는 검시(檢屍)하지 말라.’고 한 분부는 대체로 백골(白骨)을 검시하게 되는 경우나 아주 오래된 시체를 파내는 경우를 지칭하여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합의하여 묻었건 몰래 묻었건 간에 세월이 혹 조금 흘렀다 하더라도 검시해야만 할 사정이 있을 경우, 이런 것까지 일체 파내어 검시하지 못하도록 한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또 상놈[常漢]을 거적으로 싸서 임시로 묻은 경우는 영구히 매장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두 한편으로는 계문(啓聞)하고 한편으로는 무덤을 파서 검시해야 마땅한데, 《통편(通編)》 속에 수록된 내용은 너무 간단해 경외(京外)에서 거행할 때 의혹을 갖게 하기가 쉬우니, 역시 품지(稟旨)하여 상세히 수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판당(判堂)을 거친 사람들과 다시 상의하는 동시에 또 대신에게 의논하여 의견을 하나로 모아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호가 또 아뢰기를,
"고한(辜限)250) 과 관련된 법을 보건대, 원(元)나라와 송(宋)나라 이전에는 손과 발로 사람을 상해했을 경우 10일의 기한을 두었었는데,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20일로 기한을 설정하였습니다. 대체로 빨리 죽게 되는 부위의 경우 10일을 넘길 수 없고 보면 10일의 기한을 둔 것이 법의 뜻으로 볼 때는 그럴 듯합니다만, 사람마다 강하고 약한 것이 다르고 타격을 가한 것 역시 세고 헐한 차이가 있어 어떤 때는 20일을 끌다가 비로소 죽는 경우도 있고 보면 명나라에서 20일로 단안을 내린 것은 대체로 인명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한을 늘린 법을 상고해 보건대, 만력(萬曆)251) 13년252) 에 형관(刑官)인 서화(舒化)가 편찬하여 올린 조례(條例)에 ‘본 상처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을 경우, 고한을 늘려 적용한다.’는 구절이 처음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 상처로 인해 죽게 되었는지 단정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데 하나라도 혹시 착오를 범하게 되면 사람 목숨이 관련이 되니 이를 경솔하게 끌어다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무자년에 올린 평안도의 녹계(錄啓) 가운데에 복계(覆啓)를 거치지도 않은 채 고한을 늘리는 법을 무턱대고 적용한 사례가 있게 되자 수고스럽게도 엄한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반인(泮人)253) 이었던 정한룡(鄭漢龍)이 환도(環刀)로 다른 사람의 무릎뼈를 쳤는데 그 사람이 고한을 넘겨 죽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환도로 쳤다면 의도적으로 죽이려 한 것이 분명했고, 무릎뼈가 반쯤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그 상처로 죽게 된 것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형조가 계품(啓稟)하여 고한을 늘려 적용할 것을 청하자, 대신에게 문의한 뒤 윤허하신 일까지 있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칼에 의한 상처나 입으로 물어서 생긴 상처 등 정상이 명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고한을 늘려서 적용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옥사(獄事)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뜻과 합치될 듯합니다."
하니, 이에 따르고, 하교하기를,
"고한(辜限)을 늘리는 법이 쉽사리 비롯되게 해서는 안 된다. 칼로 인한 상처나 입으로 문 상처라 하더라도 별도로 품지(稟旨)한 뒤 의논을 거두어 귀일시키기 이전에는 감히 경솔하게 먼저 옥사를 성립시키지 말게 하라고 경외(京外)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1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풍속-예속(禮俗)
- [註 250]고한(辜限) : 남을 상해(傷害)한 자가 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간.
- [註 251]
○召見前承旨洪義浩。 時義浩, 繼其兄(仁活)〔仁浩〕 , 編校《審理錄》也。 義浩啓言: "丁酉事目中, ‘已埋者勿檢’ 之敎, 蓋指白骨之檢, 久遠之掘埋匿埋也。 至於和埋, 日月雖或稍久, 事情當屬檢驗者, 未嘗一切勿許掘檢。 又若常漢藁瘞, 未可謂永埋之類。 皆當一邊啓聞, 一邊開檢, 而《通編》中撮錄太簡, 京外擧行, 易致疑眩, 亦宜稟旨詳錄。" 敎以更與曾經判堂人相議, 仍又就議大臣, 指一定式。 義浩又啓言: "辜限之法, 元、宋以前, 手足傷人例限十日, 至于皇朝, 始用二十日之限。 蓋速死處不得過十日, 則十日之限, 法意則然, 而人有强弱之不同, 打有猛歇之差殊, 或有拖至二十日而始死者, 則皇朝之斷以二十日, 蓋出於重人命立意也。 至於加辜限之法, 則萬曆十三年, 刑官舒化纂進條例, 始有因 ‘本傷致死, 加用辜限’ 之例矣。 然而因本傷致死, 最難執定, 一或差誤, 死生係焉, 其不可輕易援用也。 戊子年平安道錄啓中, 未經覆啓, 遽用加限之法, 而致勤嚴敎。 曾前泮人鄭漢龍, 以環刀擊人膝骨, 死於辜限之外, 環刀擊人, 其有殺心明白, 膝骨半落, 其因傷致死亦無疑, 故秋曹啓稟, 請用加限, 至有問大臣後允許之擧矣。 自今以後, 除非金刃傷口咬傷等事情明白者外, 勿用加限, 似合於愼獄之意矣。" 從之。 敎以: "加限之法, 不可容易始之。 雖金刃傷口咬傷, 除非別般稟旨, 收議歸一之前, 無敢輕先成獄之意, 嚴飭京外。"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1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풍속-예속(禮俗)
- [註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