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진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를 바라는 경외 유생 김운주 등의 상소
경외(京外)의 유생 김운주(金雲柱) 등이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세상에 나와 고정(考亭)225) 의 학문을 으뜸으로 삼고 《춘추(春秋)》의 의리를 행하면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맑게 하는 동시에 후학(後學)에게 길을 열어 주고 사설(邪說)을 물리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뚝 사림(士林)의 영도자가 되자 군유(群儒) 숙덕(宿德)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림자처럼 따른 나머지 그 도를 함께 하며 서로 전하는 기풍이 성대하게 이 세상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도가 재차 전해져 고(故) 유신(儒臣) 한원진(韓元震)에 이르러서는 선정(先正)이 전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은미(隱微)한 말과 오묘한 뜻이 모두 밝혀져서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보건대 원진은 걸출하게 호걸의 자질을 타고 나 일찍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노닐었는데, 상하가 그와 며칠 동안 이야기해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가 겨우 약관(弱冠)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한 학문으로부터 병농(兵農)과 율력(律曆)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을 탐구하고 그 흐름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라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시(詩)를 지어 주어 장려하기를 ‘묘령의 나이에 드높은 재주로 공자와 주자의 학문 배움이여 경서의 해설 정밀하고 해박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도다[妙歲高才學孔朱 說經精博似君無]’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원진은 이미 비밀히 전해진 비결(秘訣)을 받은 위에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참작하면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주에 남이 백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하는 공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미세해서 안이 없는 것[無內]까지도 분석하여 정밀하게 따지고 거대해서 밖이 없는 것[無外]까지도 포괄하여 통합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가운데, 혹은 크게 분류하고 작게 분류하기도 하며 혹은 떼어내어 보기도 하고 합쳐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기(理氣)의 원류(源流)에 대해서 논하기를 ‘일물(一物)이 아니면서 일물이고 선후(先後)가 없으면서 선후가 있다.’ 하였으며, 성리(性理) 두 글자의 명의(名義)에 대해서 논하기를 ‘하늘의 입장에서는 이(理)라고 해야지 성(性)이 라고 해서는 안 되며 사람과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는 성이라고 해야지 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과 이는 본래 일물(一物)이기 때문에 서로 바꿔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하였으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서 논하기를 ‘기(氣) 가운데 나아가 이(理)만 단독으로 가리킬 때 본연지성이 되는 것이고 기까지 아울러 지칭할 때 기질지성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극(太極)과 오상(五常)에 대해서 논하기를 ‘태극이란 형기(形氣)를 초월해서 말하는 개념이고 오상이란 기질(氣質)에 입각하여 성립된 이름이다.’ 하였으며, 사람과 다른 존재의 성(性)에 대해서 논하기를 ‘사람이든 다른 존재이든 모두 똑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니 태극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만물의 근원이 하나이기 때문이요, 사람과 사람이 같은 성을 갖고 있고 다른 존재와 존재 역시 같은 성을 갖고 있으니 오상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하나의 근원에서 다르게 갈려 나간 것이요, 사람끼리도 다른 성을 갖고 있고 다른 존재끼리도 다른 성을 갖고 있으니 기질지성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다르게 갈려 나간 것이 다시 다르게 갈려 나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心)과 기질(氣質)에 대해서 논하기를 ‘심은 기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미발지심(未發之心)을 일컬어 본래 선(善)하다고 하는 것은 기(氣)가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기질을 아울러서 말한다면 심에도 선악(善惡)이 있는 것인데, 담연(湛然)하며 허명(虛明)한 것은 미발의 기상이요, 청탁(淸濁)과 수박(粹駁)이 있는 것이 기품(氣稟)의 본래 속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며, 지각(知覺)의 설에 대해서 논하기를 ‘물[水]이 만물에 대해서 처음과 끝을 같이 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지(智)에도 사덕(四德)을 포괄하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지각이 비록 일심(一心)의 미묘한 기능을 전단(專斷)한다 할지라도 지(智)의 작용에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하였으며, 사단(四端) 칠정(七情)에 대해서 논하기를 ‘심(心)과 성(性)은 둘로 가를 수 없고 이(理)와 기(氣)가 각각 발동하는 법은 없다.’ 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그가 곧장 앞으로 용맹스럽게 매진하여 도체(道體)를 분명하게 본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주자가 이미 완성해 놓은 가르침에 입각하여 그 은미한 뜻을 더욱 드러내었고 오랜 세월에 걸친 제가(諸家)의 잘못된 점을 변별하여 모두 지극한 이치에 맞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깊이 걱정하고 멀리 내다 보는 생각에서 심득(心得)한 것을 글로 옮겨 써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이 세상에 나오자 《주역(周易)》·《중용(中庸)》·《대학(大學)》의 뜻이 단청(丹靑)처럼 분명해졌고,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라는 작품이 나오자 자양(紫陽)226) 의 초년과 만년의 견해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해졌으며, 가령 《의례보편(儀禮補編)》 같은 책의 완성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 임금의 정치 경륜과 여러 성인들이 말씀해 놓으신 것을 빠짐없이 소개하면서 그 종지(宗旨)와 귀결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백가(百家)를 포괄하고 만세토록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때 저술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인사들이 그 울타리나마 엿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그의 평생에 걸친 언행을 보면 한결같이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신기한 주장을 내놓으려고 힘쓰면서 주자의 학설에 배치되는 자가 나오기만 하면, 그 주장이 아무리 훈고(訓詁)와 관련된 지엽적인 것이거나 품물(品物)의 속성을 규정하는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통렬하게 분별하여 극력 배척하면서 부월(斧鉞)을 가하듯 엄하게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춘추(春秋)》의 의리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기만 하여, 오랑캐인 원(元)나라를 섬겨 복무한 허형(許衡)을 두고 만세의 죄인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충청도를 둘러 싼 수백 리 사이에서는 비록 삼척 동자라 할지라도 모두 주자는 감히 높이지 않을 수 없고 이단은 물리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적이 정통(正統)을 같이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였으니, 이 모두가 원진의 덕택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영고(寧考)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특별한 은총을 먼저 원진에게 내리시고 도타웁게 유시하시면서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셨습니다. 이에 원진이 남다른 대우에 감격한 나머지 대궐을 멀리 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되돌리고는 진수당(進修堂)에 등대(登對)하여 경사(經史)의 뜻을 토론하면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지향점과 보살필 점, 그리고 음양(陰陽)과 선악(善惡)의 소장(消長) 및 왕복(往復)에 관하여 위아래로 수천 언(言)의 말씀을 드렸으니, 이는 이천(伊川)227) 이 이영전(邇英殿)에 등대했던 것이나 주자가 연화전(延和殿)에서 아뢰었던 것과 시대는 달라도 똑같은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령 그가 병자·정축년의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개탄하고 신축·임인년의 제적(諸賊)을 성토하면서 의리를 해와 달보다도 밝게 드러내고 국가의 형세를 구정(九鼎) 대려(大呂)보다도 무겁게 안정시킨 일로 말하더라도, 국가와 백성에 끼친 그 공적이야말로 또한 초야에 묻혀 자기 몸만 온전히 하려는 자들과 똑같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그의 덕업(德業)을 드러내도록 하시는 동시에 추증(推贈)하는 은총과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심으로써 사림(士林)을 빛내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이 포증(褒贈)과 관련된 일인 만큼 상례(常例)로 비답을 내리기가 어려우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1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 [註 225]
○京外儒生金雲柱等上疏曰:
"先正臣宋時烈出, 而學宗考亭, 義秉《春秋》, 明天理而淑人心, 倡來學而闢邪說。 屹然爲上林之魁斗, 而群儒宿德之雲合影從, 同道相傳者, 蔚然湖海之間。 至於再傳而得故儒臣韓元震, 則先正所傳孔、朱之微言奧義, 蓋莫不發揮而無遺憾矣。 蓋元震, 生挺人豪之資, 早悅爲己之學。 遊於先正臣權尙夏之門, 尙夏與之語數日, 喟然嘆曰: ‘此子年纔弱冠, 上自天人性命之學, 以至兵農律曆之語, 靡不探其源而涉其流, 眞命世之奇才。’ 遂贈詩以奬之曰: ‘妙歲高才學孔、朱, 說經精博似君無。’ 自是元震旣承密傳之訣, 參以自得之物, 以聞一知十之才, 加人百己千之工。 小而無內者, 剖析以精之, 大而無外者, 混淪以合之, 或大分而細分, 或離看而合看。 其論理氣之源流則曰: ‘非一物中爲一物, 無先後處有先後。’ 其論性理二字之名義則曰: ‘在天曰理, 而不可曰性, 在人物曰性, 而不可曰理。 然而性理本是一物, 故亦有互換說去者。’ 其論本然、氣質之性, 則 ‘就氣中單指其理, 爲本然之性, 兼指其氣, 爲氣質之性。’ 其論太極五常則曰: ‘太極超形氣而爲言, 五常因氣質而成名。’ 其論人物之性則曰: ‘有人物皆同之性, 太極是已, 萬物之一原也, 有人與人同, 物與物同之性, 五常是已, 一原之分殊也, 有人人不同, 物物不同之性, 氣質之性是已, 分殊之分殊也。’ 其論心與氣質則曰: ‘心是離氣質, 不得。 未發之心, 謂之本善者, 氣不用事故也。 若兼言氣質, 則心有善惡, 而湛然虛明, 未發氣像, 淸濁粹駁, 氣稟本色。’ 其論知覺之說則曰: ‘水有終始萬物之象, 智有兼包四德之體。 故知覺雖專心之妙, 不害爲智之用也。’ 論四端七情則曰: ‘心性無二岐, 理氣無二發。’ 此皆勇往直前, 的見道體。 因朱子已成之訓, 而益闡其微蘊, 辨諸家愈久之失, 而咸準乎至理。 憂之深而慮之遠, 得之心而筆之書。 《經義記聞錄》出, 而大《易》、《庸》、《學》之旨, 炳若丹靑, 《朱子言論同異攷》作, 而紫陽初晩之見, 瞭如指掌, 若其《儀禮補編》之成焉, 而一王之治謨, 群聖之制作, 昭布旁達, 統宗歸極。 包括于百家程章乎萬世, 有非一時能言著書之士, 所可窺其藩屛者也。 蓋其平生言行, 一以朱子爲準則。 而一有務立新奇, 背馳朱子者, 則雖訓詁之末, 名物之細, 必痛卞力斥, 嚴若斧銊。 而尤嚴於《春秋》尊攘之義, 以許衡之服事胡元, 謂萬世之罪人。 使環湖中數百里之間, 雖三尺童子, 皆知朱子之不敢不尊, 異端之不可不闢, 夷狄之不當與正統者, 皆元震之力也。 惟我寧考英宗大王光御之初, 邱園玉帛, 先及元震, 聖諭諄複, 側席延佇。 元震感激殊遇, 勉回遐心, 登對進修之堂, 討論經史之旨, 天命人心, 蘄向眷顧之際, 陰陽淑慝, 消長往復之幾, 上下數千言, 與伊川 邇英之對, 紫陽 延和之奏, 後前一揆。 而若其慨丙丁之深羞, 討辛壬之諸賊, 明義理於赫日華月, 重國勢於九鼎大呂, 則其功烈之在於國及於人, 又非林下獨善者所可與論也。 伏願殿下, 亟命有司, 表章其德業, 寵之以貽贈, 侈之以易名, 以爲光士林振士風之地。"
批曰: "疏辭事, 係褒贈, 難以例批, 許令議于大臣以聞。"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1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